<?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불타는 골방 (바라 서재) &gt; 뉴스 스크랩들</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category/2203996</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vitam impendere vero</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at, 26 May 2012 09:25:49 +0900</lastBuildDate><image><title>바라</title><url>http://image.aladdin.co.kr/Community/myface/pt_725516154514779.jpg</url><link>http://blog.aladin.co.kr/vara/category/2203996</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바라</description></image><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2000년대 한국문학</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4134826</link><pubDate>Wed, 22 Sep 2010 03: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4134826</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20000&TPaperId=4134826"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646/75/coveroff/8932020000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6250596&TPaperId=4134826"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90/61/coveroff/8956250596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33555&TPaperId=4134826"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68/83/coveroff/8936433555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33679&TPaperId=4134826"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272/78/coveroff/8936433679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2819274&TPaperId=4134826"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53/28/coveroff/8982819274_1.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blog.aladin.co.kr/vara/4134826'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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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8065.html
[한겨레신문 특집] 젊은 문학평론가가 뽑은 2000년대 최고의 한국문학… <!-- e:post_title_for_opms_nochange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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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의 노래〉 등 일련의 역사소설을 2000년대에 상재한 김훈, 2000년대를 가장 성실하게 보낸 김연수, <br />
            2000년대 문학 키워드의 중심에 있는 박민규. ‘한 편의 시’라는 ‘곤혹스러운 뽑기’가 가리킨 곳은 문태준의 ‘가재미’였다. <br />
            황병승은 〈여장남자 시코쿠〉로 2000년대를 반으로 쪼개버렸다.(왼쪽부터) 생각의 나무 제공, 한겨레 이정아, 문학사상사 <br />
            제공, 한겨레 자료, 황병승 제공. 
        
        
            &lt;한겨레21&gt;은 문학평론가·문학전문기자·서점 MD들을 대상으로 2000년대 한국 문학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다. <br />
            2001년 1월1일부터 2010년 7월30일까지 발표된 문학작품 중 최고의 장편소설, 중·단편소설, 소설집, 시, 시집을 뽑아달라고 주문했다. <br />
            더불어 2000년대 최고 작가와 이 시대 문학을 특징짓는 키워드 및 그것을 가장 잘 보여준 작품·작가도 추천을 부탁했다. 각 항목당 셋까지 추천을 받았다. 
        
        
            문학전문기자 2명, 서점 MD 3명을 포함해 총 68명이 회신을 해주었다. 문학평론가가 63명으로 회신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셈이다. <br />
            최근 등단한 이를 비롯한 젊은 문학평론가들의 회신율이 높았다. <br />
            ‘젊다’는 것이 편향성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응답자 나이에 상관없이 골고루 추천을 받은 작품이 많았다. <br />
            7개의 칸을 다 채울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많은 이들이 몇 편의 시를 고르는 것, 시집을 고르는 것은 벅찬 일이라며 ‘패스’를 외쳤다. 
        
        
            결과를 내보인다. 장편소설에서는 김훈의 &lt;칼의 노래&gt;(생각의나무·2001), 중·단편소설에서는 김연수의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lt;나는 유령작가입니다&gt;<br />
            (창비·2005) 수록), 소설집에서는 박민규의 &lt;카스테라&gt;(문학동네·2005)가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 <br />
            시는 문태준의 ‘가재미’(&lt;가재미&gt;(문학과지성사·2006) 수록)를, 시집은 황병승의 &lt;여장남자 시코쿠&gt;(랜덤하우스코리아·2005)를 가장 많이 추천했다. 
        
        
             
        
        
            ≫ 젊은 문학평론가가 뽑은 2000년대 최고의 한국문학 
        
        
            김훈·김연수·박민규, 2000년대는 그들의 시대 
        
        
            소설의 각 부문별로 ‘타이틀’을 사이좋게 나눠갖기도 했지만, 각 부문에서 빠지지 않고 노크한 이가 김훈·김연수·박민규다. <br />
            최고 작가 지명에서도 앞자리를 차지했다. 김훈의 &lt;칼의 노래&gt;가 2001년, 김연수의 문학이 본령으로 올랐다고 평가되는 &lt;빠이, 이상&gt;(문학동네)이 2001년, 박민규가 &lt;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gt;(한겨레출판)과 &lt;지구영웅전설&gt;(문학동네)로 혜성같이 등단한 것이 2003년이다. <br />
            2000년대 초반 문제작을 내놓은 이들은 2000년대 내내 왕성한 활동을 계속했다. 세 작가 모두 2000년대 이상문학상과 황순원문학상을 사이좋게 나눠가졌다<br />
            (이상문학상 김훈 2004년·김연수 2009년·박민규 2010년, 황순원문학상 김훈 2005년·김연수 2007년·박민규 2009년). 미래가 기대되기도 하지만 분명 2000년대는 그들의 시대였다. 
        
        
            김훈과 &lt;칼의 노래&gt;에 대해 회신자들은 이렇게 평가했다.<br />
            “2000년대적 역사소설의 탄생! 이순신도 이제는 영웅이 아니라 ‘개인’이 된다. 내용을 결코 요약할 수 없는 문체소설의 진수.”(함돈균·문학평론가) “2001년 &lt;칼의 노래&gt;부터 2009년 &lt;공무도하&gt;에 이르기까지 어느 순간 홀연히 나타나 그 자체로 완성된 세계를 보여주다, 
        
        
            홀로 사라질 대가.”(박하영·알라딘 도서1팀장) &lt;남한산성&gt;을 최고 걸작으로, &lt;공무도하&gt;와 &lt;현의 노래&gt;를 최고로 꼽아준 이도 있었다. <br />
            &lt;칼의 노래&gt;는 그가 이어나간 역사소설의 황홀경을 연 작품이었다. “한국 문학에 쏟아진 ‘벼락’ 같은 축복”(동인문학상 심사평)을 고 노무현 대통령도 추천으로 보탰고, <br />
            출간된 지 7년 만에 100만 부 판매를 기록했다. <br />
            김훈의 ‘화장’ 또한 단편소설에서 많은 표를 얻었다. 
        
        
            김연수는 ‘단편소설의 왕’이었다. <br />
            가장 많은 표를 얻은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 대해 문학평론가 오창은은 “역사를 개인화하려는 의지가 문학적 성취로 이어진 작품”이라고 했다. <br />
            한 작품으로 가장 많은 표를 얻기도 했지만, 흩어진 표를 그러모아서도 단연 압도적이다. 최고 단편으로 거론된 것만 ‘세계의 끝 여자친구’ ‘달로 간 코미디언’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뿌넝숴’ 등 다섯 작품에 이른다. <br />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내놓은 단편소설집만 2000년대 초·중·후반에 걸쳐 &lt;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gt;(문학동네·2002), &lt;나는 유령작가입니다&gt; (창비·2005), &lt;세계의 끝 여자친구&gt;(문학동네·2009) 등 세 권이다. 
        
        
             
        
        
            ≫ 평론가 68명이 꼽은 2000년대 최고의 작품과 작가 
        
        
            　 태작 없는 성실과 문학 흐름의 중심 
        
        
            장편소설에서도 그를 최고로 꼽은 이가 많다. <br />
            그의 작품 중 가장 많은 이가 최고라고 지목한 작품은 &lt;밤은 노래한다&gt;이다. 이 작품에 대해 문학평론가 허병식은 “세계, 이념, 자아의 몰락과 종언”으로 평가한다. <br />
            되레 왕성한 필력은 표를 흩어지게 했다. <br />
            &lt;밤은 노래한다&gt;를 비롯해 &lt;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gt; &lt;빠이, 이상&gt;까지 거론한 이가 여럿이다. 쓸데없는 ‘산수’를 하자면, 김훈과 김연수의 장편을 지목한 숫자를 합치면 똑같다. 
        
        
            틈틈이 김연수는 산문집 &lt;청춘의 문장들&gt;(마음산책·2004), &lt;여행할 권리&gt;(창비·2008), &lt;대책 없이 해피엔딩&gt;(공저·씨네21북스·2010)을 썼고 레이먼드 카버를 비롯한 번역에도 몰입했다. <br />
            많이 썼고 여러 가지로 인정받았다.<br />
            한 문학평론가는 “출발 작품 &lt;빠이, 이상&gt;과 도착 작품 &lt;세계의 끝 여자친구&gt;가 다 훌륭하고 그 사이에 태작이 하나도 없다. <br />
            10년을 이렇게 성실하게 보내기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그가 2000년대 대표작가임을 역설한다. 
        
        
            김연수가 ‘이야기’를 다 드러내놓고 이야기한다면(그는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소설을 시작하곤 한다), <br />
            박민규는 ‘2000년대적’ 서사에 몰입했다. 함돈균은 박민규의 &lt;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gt;에 대해 “바야흐로 2000년대는 루저들의 시대다. <br />
            아 그런데 이야기는 왜 이렇게 웃긴단 말이냐”라고 말한다. <br />
            오창은은 “2000년대 한국 소설의 스타일을 바꾼 작품이다. 발랄한 서글픔을 통해 한국 사회의 상처를 헤집었다. 
        
        
            젊은 감각으로 IMF의 상처를 묘파한다”고 말한다. <br />
            요약되듯 그는 2000년대적 문제 인물이다. 문학평론가 이선우의 말대로 “박민규의 등장으로 2000년대의 새로운 흐름이 생겨났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해요. <br />
            딱 한 명만 짚으라면, 어쩔 수 없이 박민규입니다.” 키워드에서도 그를 중심으로 문학판을 평가한 이가 많다. 문학평론가 이정석은 ‘역사적·개인적 자의식의 무거움을 벗어던진 경쾌함’이라는 면에서, 박혜경은 ‘사실주의적 개연성의 세계를 뛰어넘는 환상과 엽기의 상상력’이라는 면에서,<br />
            황종연은 ‘하위문화’, 원종찬은 ‘루저’, 노대원은 ‘백수’라는 키워드로 그가 2000년대 문학의 중심에 있음을 말했다. 
        
        
            박진 문화평론가는 ‘장르 혼종’이라는 2000년대적 현상의 중심에 박민규가 있다고 말한다. <br />
            “2000년대는 역사소설, SF, 판타지, 추리물과 스릴러 등 그동안 순문학이 아닌 대중문학이나 하위장르로 평가돼왔던 경향이 문학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적극적으로 교섭·혼종되는 양상이 두드러졌다. 
        
        
            이제 누구도 장르문학(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의 경계를 가를 수 없는 시대, 그것이 얼마나 인위적인 구획이었는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br />
            이런 경향이 2000년대 들어 문학의 지형을 크게 변화시켰으며 문학에 대한 배타적인 선입관을 무너뜨리게 되었다.<br />
            이런 경향을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준 작가는 박민규이고, &lt;지구영웅전설&gt; &lt;핑퐁&gt; 등의 장편소설과 단편집 &lt;카스테라&gt;가 그 좋은 예다.” 
        
        
             
        
        
            ≫ 김애란(왼쪽)은 단편만으로 전 세대로부터 고루 사랑을 받았다. <br />
            황석영은 2000년대에도 건재함을 과시했다. <br />
            그는 2000년대 ‘장편소설’ 논쟁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br />
            한겨레 김진수 기자 　 
        
        
            고수 황석영, 신예 김애란, 핵폭풍 ‘여장남자’ 
        
        
            등단 이후 언제나 문제작을 써온 황석영은 2000년대에도 건재했다. <br />
            황석영의 &lt;손님&gt;(창비·2001)은 “2000년대 분단문학의 가능성을 몸으로 써낸 문제작. 한반도에서 분단의 상처는 어떻게 우리의 삶에 개입되어 있는가를 보여주었다”(오창은), “문학적으로 실험된 사회적(정치적) 한의 씻김굿”(함돈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br />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일제강점기의 민족 내부 갈등에 대한 정직한 응시들”이 2000년대 주요한 경향이었다며, <br />
            &lt;손님&gt;을 김연수의 &lt;밤은 노래한다&gt;와 함께 거론했다. 
        
        
            단편집 두 권을 낸 김애란 역시 주요하게 언급된 작가 중 한 명이다. <br />
            &lt;달려라 아비&gt;(창비·2005), &lt;침이 고인다&gt;(문학과지성사·2007)의 표를 합치면 소설집 1위인 &lt;카스테라&gt;에 맞먹는다. 2000년대 감수성을 요약한다는 면에서 박민규와 함께 김애란을 키워드로 거론한 이가 많았다. 
        
        
            시에서는 25명이 37편을 추천했다. <br />
            문태준의 ‘가재미’는 많은 이들의 가슴을 두드린 작품이었다. <br />
            ‘맨발’도 거론한 이가 많았다. <br />
            다음으로 김경주의 다섯 작품(‘내 워크맨 속 갠지스’ ‘당신의 잠든 눈을 만져본 적이 있다’ ‘드라이아이스’ ‘무릎의 문양’ ‘외계’)을 6명이, 황병승의 2편(‘불쌍한 처남들의 세계’ ‘여장남자 시코쿠’)을 4명이 거론했다. <br />
            김사인, 문인수, 신영목, 이영광, 김행숙의 시들도 2편씩 추천됐다. 
        
        
            시집은 단연 황병승의 &lt;여장남자 시코쿠&gt;였다. <br />
            신형철은 “2005년에 출간돼 2000년대를 반으로 쪼개버린 시집”이라고 말한다. <br />
            오창은은 “2000년대 미래파의 화려한 등장을 위해 터뜨려진 폭죽”, 함돈균은 “핵폭풍이었다고 할 만한 2000년대 시들의 바람. 그 폭풍의 눈에 ‘시코쿠’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이번 ‘설문조사’가 몰이해에서 시작됐음을 밝힌다. 많은 답신자가 ‘최고’라는 표현에 의문을 표했다. <br />
            문학적 성취가 투표로 가늠하는 선거가 아니라는 면에서 십분 공감할 수 있는 의문이다. <br />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작품을 뽑은 이도 있고 2000년대라는 시대성을 담은 작품을 뽑았다는 이도 있다. 그런 점에서도 이 ‘최고’는 헷갈린다. <br />
            문학 종사자들의 난감함은 더한다. 
        
        
            최고의 작품을 뽑는 것에 대해 소설가와 시인은 아예 고개를 내저었다. <br />
            “자신이 가장 최고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 작가”라는 개인적인 토로도 있었고 “내 글을 쓰느라고 시대 전체를 조망할 만큼 읽지 못했다”는 현실적인 설명도 있었다. <br />
            애초에 설문 대상에서 소설가와 시인이 빠진 이유다. <br />
            설문에 이름이 보이는 소설가나 시인은 문학 수업이나 강좌를 하는 일로 ‘조망권’을 획득했달 수 있는 이들이다. 젊은 작가들에 대한 응원의 느낌도 읽힌다. 　 
        
        
            문학의 수학, 시대적 성취 
        
        
            무엇보다도 이들 난감함 중 최고는 이 발표의 자리다. 개인이 ‘최고’를 밝히는 일은 수줍은 사랑 고백이지만, <br />
            이것을 세어서 숫자로 명시하니 이 일은 난감을 넘는 ‘몹쓸 짓’으로 보인다. <br />
            이 설문조사는 ‘문학’이라기보다는 ‘수학’이다. 어쨌든 추첨보다는 조금 낫다는 점이 위로다. <br />
            그리고 시대를 읽는다는 면에서, ‘문학의 수학’이 몹쓸 일이나마 필요했음을 변명으로 내놓는다. 많은 이들의 시선이 간 곳, 공감을 얻은 작품에는 분명 ‘시대적 성취’가 있을 것이다. <br />
            문학의 입지가 좁아지고, 출판 상업 안으로 소설이 포획된 때에 문학을 새롭게 되새김질하는 계기로도 작용하길 바란다. 
        
        
            <br />
            
        
        
            &#160;
        
        
            <br />
            출처/hani/구둘래 기자 
        
    

<!-- e:post_title_for_opms_nochange --><br />
&#160;]]></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98/84/cover150/895460398x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0398X</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알튀세르 심포지움</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4039050</link><pubDate>Mon, 23 Aug 2010 03:4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4039050</guid><description><![CDATA[너무 더워서 못 자고 있다ㅠㅠ&#160;&#160;
저번에 꼭 보려고 가보려 했던 알튀세르 심포지엄이 어느 새 며칠 남지 않았네..&#160;
장소가 무려 상상마당, 예전에 못이나 검정치마 공연할 때나 가보았던 상상마당이다.&#160;
심포지엄 제목은&#160;94년도에&#160;열렸던&#160;빈에서&#160;열렸던 심포지엄 이름을 땄나보다&#160;
(헤닝&#160;뵈케 "알튀세르 효과", 이론 94년 가을/겨울 호)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2부랑 3부는 꼭 보고싶다...&#160;
http://althusser.greenbee.co.kr/에도 여러 글들이 올라와있음. &#160;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Community/mypaper/pimg_725516154583902.jpg</url><link>http://blog.aladin.co.kr/vara/4039050</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서동진 인터뷰</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3279376</link><pubDate>Sun, 20 Dec 2009 01: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3279376</guid><description><![CDATA[<!-- 본문 우측 광고 끝-->노무현·이명박 낳은 '괴물'은 어떻게 탄생했나?<!--/DCM_TITLE--> <br />

<h4>[인터뷰] 서동진의 &lt;자유의 의지 자기 계발의 의지&gt;</h4>
&#160;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1218194250&amp;section=04
&#160;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 서동진(42). 그는 1990년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 1996년대 중반 그가 &lt;누가 성 정치학을 두려워하랴&gt;(문예마당 펴냄)를 펴냈을 때, 많은 이들은 '평등'이 아닌 '자유'를 외치는 진보주의자의 탄생에 열광했다. 그는 거침없이 '더 많은' 자유를 요구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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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랬던 그가 지난 2004년 연세대학교에서 박사 학위 논문을 발표하자, 많은 이들은 당혹스러웠다. 그는 이 논문에서 자신의 과거 행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논지를 펼쳤다. '더 많은 자유는 없다.'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최근 그는 이 논문을 보완해 &lt;자유의 의지 자기 계발의 의지&gt;(돌베개)를 펴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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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그는 오늘날 자유로워 보이는 노동자가 어떻게 자본이 원하는 맞춤한 인간형이 되고자 '자발적으로' 노력하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그는 이런 자본주의가 원하는 인간형을 '자기 계발하는 주체'라고 명명했다. 그가 보기엔, 더 많은 자유에 대한 갈구야말로 이런 자기 계발하는 주체를 낳은 원동력이다.<br />
<br />
지난 10일 서울 서교동의 한 찻집에서 그를 만났다. 책 얘기만 하자는 언질이 있었지만, 사실은 책에 다 담지 못했던 그의 고민이 더 궁금했다. 더구나 그 논문이 나온 것이 벌써 5년 전이 아닌가? 결국 그의 '극적인' 변화의 이유를 캐묻는 데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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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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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외환 위기 계기로 '민주화의 한계'를 고민<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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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1990년대 중반 &lt;누가 성 정치학을 두려워하랴&gt;의 서동진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이 책의 내용이 낯설 듯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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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진 : 한마디로 '자유주의와의 불장난'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였다. 내 삶의 '주홍글씨'다. 그 때는 이렇게 생각했다. '1987년부터 민주화로 이행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평등'은 확실히 제자리를 잡았다. 이제 민주주의를 더 심화하려면 '자유'가 덧붙여져야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하는 일이 시급해 보였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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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하게도 그 때는 그것이 한국 사회에서 좌파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기왕 문제제기를 할 바에는 가장 급진적인 목소리를 내는 데서 시작하는 게 나아보였다. 많은 이들이 외면하던 동성애와 같은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실천에 옮기자 반응도 뜨거웠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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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어디서부터 '이건 아닌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나?<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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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진 : 1997년 외환 위기를 전후해서 혼란을 겪으면서 '뭔가 잘못되었다', 이렇게 생각했다. 그 뒤로 5년간 모든 활동을 두문불출하고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그 자기반성을 하면서 1980년대부터 추구해온 '민주화의 한계'를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되었고, 그 결과물이 바로 2004년 박사 학위 논문으로 펴낸 바로 이 책의 내용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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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자유화…'자기 계발하는 주체'의 탄생<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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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시안
        
    

프레시안 : 이 책의 열쇳말은 '자기 계발하는 주체'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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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진 : 지난 30년간의 민주화의 결과로 탄생한 인간형이 오늘날의 우리들, 바로 끊임없이 자기를 계발해야 생존할 수 있는 주체이다. 이런 자기 계발하는 주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파헤치다보면, 지난 30년간 우리가 추구해온 민주화의 정체가 드러나리라는 게 이 연구를 시작할 때의 문제의식이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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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얘기하면, 우리의 민주화는 바로 '자유화'였다. 많은 이들은 지금 우리의 삶을 옥죄는 신자유주의가 지난 수십 년간 추구해온 민주주의를 배반한 결과라고 여긴다. 어불성설이다. 우리가 추구해온 민주주의 자체가 신자유주의를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자본이 하고 싶은 일을 우리가 대신 해준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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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바로 그 결과가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이 딱 원하는 인간형, 바로 자기 계발하는 주체의 탄생이다. 기업이 요구하는 인간형이 되기 위해서 자진해서, 끊임없이 학습하는 사람들. 요람에서 무덤까지 자기 계발을 해야만 스스로 편하고, 생존도 가능한 사람들. 바로 우리들 말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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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평등의 관점에서 다시 쓰여야 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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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t;자유의 의지 자기 계발의 의지&gt;(서동진 지음, 돌베개 펴냄). ⓒ프레시안
        
    

프레시안 : 자유의 의지가 기껏해야 자본이 원하는 자기 계발하는 주체를 낳을 뿐이라는 주장에는 이견이 많을 듯하다. '자유'는 여전히 한국의 많은 진보주의자에게 더 나은 사회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동력이다. 예를 들면, 직장에서의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하는 '노동의 인간화', 학교에서의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하는 '학교의 인간화' 등….<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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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진 : '평등'과 '자유'의 대립 관계를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자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자유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평등이 자리를 잡은 터 안에 자유를 위치시켜야 한다. 방금 열거한 실천들이 애초 의도대로 성공하기 위해서라도 자유를 다시 평등의 관점에서 재구성해야 한다.<br />
<br />
예를 들어볼까. 요즘엔 기업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방법을 자랑한다. 노동자에게 적당한 자유를 부여했더니, 알아서 열심히 일한다는 것. 과연 그 기업의 노동자가 행복할까?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우리는 진실을 안다. 바로 이런 식의 자유를 거부해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 자유가 평등의 가치 안으로 복속될 때, 약자의 것이 될 수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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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한국 사회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이들의 다수는 바로 자유에 대한 열정을 갖고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면, 노무현의 지지자들을 떠올릴 수 있겠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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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진 : 그렇게 한국의 민주화가 자유화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니, 이명박 정부에 대한 정치 비판이 자유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 아닌가? 예를 들면 '신공안 정국'과 같은 용어가 그렇다. 세밀한 비판은 내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지만, 확신하건대 자유주의와 결별하지 않으면 한국 정치의 발전은 없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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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그러고 보니, 공교롭게도 자기 계발하는 주체가 뽑은 두 대통령이 노무현, 이명박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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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진 : 상업고등학교 나와서 변호사, 정치인, 대통령에 오른 노무현. 상업고등학교 나와서 현대건설의 말단 직원에서 사장이 되고, 결국 대통령에 오른 이명박. 이런 자수성가한 사람들이야말로 자기 계발하는 주체가 가장 닮고 싶은 인간형이다. 노무현, 이명박의 부상도 이런 맥락에서 살피면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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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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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하는 주체를 강요하는 '자본주의의 힘'<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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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아직도 유행하는 수많은 자기 계발 책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lt;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gt; 얘기를 잠깐 해보자. 이 책을 처음 읽으면서 '이것은 거꾸로 읽는 자본론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다. 그 책의 메시지가 이런 것이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로 살아봐야 별 볼일 없다. 자산가가 되어라!'<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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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lt;자본론&gt; 등에서 얘기한 것과 마지막 권고만 반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로 살아봐야 별 볼일 없다. 서로 연대해서 자본주의를 뒤집어라!' 그런데 오늘날 이런 마르크스의 권고를 따르는 노동자는 아무도 없다. 모두가 괴로워하면서도 기꺼이 자기 계발하는 주체가 되는 데 동참한다.<br />
<br />
서동진 : 새삼 구조의 힘을 강조하고 싶다. 1990년대 이후부터 한국 사회를 분석할 때,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가공할 만한 힘을 간과해왔다. 후기 자본주의가 유지되려면 그에 적합한 인간형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자기 계발하는 주체이다. 책에서 자기 계발하는 주체를 강요하는 자본주의의 힘을 염두에 두자, 이런 메시지를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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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자본주의의 힘을 강조했다. 언급한 대로, 신자유주의에 맞춤한 인간형이 자기 계발하는 주체이다. 이 책에서는 그런 자기 계발하는 주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굉장히 세밀하게 검토하고 있다. 많은 자기 계발하는 주체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굉장한 패배감, 자괴감을 느낄 것 같다.<br />
<br />
서동진 : 그런 반성적 거리두기야말로 다른 가능성을 고민하는 출발점이 된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이 책에 실린 내용이 무슨 말인지 잘 안다. 기업, 대학 심지어 교회까지 곳곳에서 자기 계발을 강요하고, 그것 때문에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 책을 통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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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하는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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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방금 '고통'을 얘기했다. 그렇게 고통 받는 이들이 자기 계발하는 주체로 '훈육'되는 것을 거부하고 '다른' 주체로 거듭날 가능성은 없을까? 이 책에서 그런 문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br />
<br />
서동진 : 그 문제는 이 책을 쓸 때까지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 책에서는 '지배 받는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런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투쟁하는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 문제를 해명하려면 전혀 다른 방식의 접근과,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br />
<br />
이 책의 이론적 배경도 그런 질문에는 적합하지 않다. 이 책은 프랑스의 철학자 푸코의 이론에 많이 빚지고 있다. 푸코를 두고 시효가 지난 철학자라는 시각이 있는데, 그것은 그의 철학이 가진 한계 때문이다. 푸코는 사람들이 어떻게 지배받는 대상으로 빚어지는지 놀라울 만큼 섬세하게 얘기를 하지만, 그 역에 대해서는 모호한 화두만 던지고 있으니까.<br />
<br />
프레시안 : 이 책의 골격이 된 박사 학위 논문을 발표한 지 벌써 5년이 지났다. 그 동안 바로 이 책의 공백인 그 문제(투쟁하는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와 관련해 고민의 진척이 있었나?<br />
<br />
서동진 : 자기 계발하는 주체가 아닌 다른 주체가 탄생할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인데…. 사실 별로 진척이 없다. 나뿐만이 아니라 국내외 수많은 지식인이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있지만, 누구도 뾰족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이 왜 지배받는 사람으로 만들어지는지는 알겠어. 그런데 어떻게 투쟁하는 사람으로 바뀔까.' 두 질문 사이의 심연이 깊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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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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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한 사람이 바로 저항의 주체가 되지는 않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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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최근에 일부 지식인 사이에서 실업자 운동, 빈민 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다. 자기 계발하는 주체를 강요하는 자본주의 임노동 관계에서 퇴출 혹은 이탈한 이들이 새로운 저항의 주체가 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이런 기대 때문이다.<br />
<br />
서동진 : 그런 논리가 이해는 된다. 배제된 사람, 사회에서 가장 약자를 해방시키는 것은 사회 전체의 해방으로 이어진다. 그런 약자의 해방은 보편성이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실업자 운동, 빈민 운동을 그렇게 자리매김하는 게 얼마나 현실과 맞닿아 있는 해석인지 회의적이다.<br />
<br />
자기 스스로를 해방할 조건을 갖춘 이들만이 '투쟁하는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과연 실업자, 빈민 등이 그런 조건을 갖췄는가? 혹시 이런 관심은 '가장 비참한 사람이 구원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런 현실과는 유리된 일종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나는 그런 가능성에 회의적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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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시안
        
    

프레시안 : 우석훈의 &lt;88만 원 세대&gt;를 계기로 '세대 간 갈등'도 관심거리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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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진 : 그런 논의가 분명히 장점이 있다. 왜냐 하면, 1980년대 대학을 졸업한 사람과 1990~2000년대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결정적인 차이가 있으니까. 이처럼 세대 차이가 큰 의미를 갖는 단절의 시기가 있다. 1980년대 대학을 졸업한 이들이 가졌던 자유에 대한 열정이 1990~2000년대 대학을 졸업한 이들을 괴롭히는 환경을 만들었으니까.<br />
<br />
안타까운 점은 이런 문제제기가 있는데도 1980년대에 대학을 졸업한 이들이 민주주의로 위장한 자유주의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기들의 자유에 대한 열정이 자기는 물론이고 다음 세대를 신자유주의에 맞춤한 인간형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인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세대 간 갈등은 필연적이다.<br />
<br />
다만 여기서 주의해서 볼 게 있다. 이른바 '88만 원 세대'가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해서 곧바로 그들이 자기 계발하는 주체와는 다른 주체로 거듭나는 것은 아니다. 그 매개 고리가 필요하다. 그게 바로 아까 언급한, '어떻게 투쟁하는 사람이 등장할까' 이런 질문이 중요한 이유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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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마르크스, 사르트르를 읽는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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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얘기를 듣다 보니 마음이 편치 않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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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진 : 지난 수년간 우울증이 깊어졌다. 사실 가슴에 붙어 있는 '자유주의자', 이 주홍글씨도 문제다. 그것을 떼고자 10년간 두문불출하다 이제야 돌아왔다. (웃음) 그런데 이 주홍글씨를 여전히 모든 이들이 알고 있다. 최근에 한 사회단체가 날 섭외했는데, 일부 회원의 반대가 심했다고 하더라. 슬프고 또 (자유주의에 대한 경계라는 점에서) 반가웠다.<br />
<br />
프레시안 : 요즘엔 무슨 공부를 하고 있나?<br />
<br />
서동진 : 딱히 갈피를 못 잡겠으니, 닥치는 대로 읽는다. 몇 해 전까지는 (요즘 한국의 지식인 사이에서 유행하는) 랑시에르, 바디우와 같은 프랑스 철학자의 책을 많이 읽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답답함이 깊어졌다. 요즘은 사르트르를 읽고 있다. 사르트르를 읽을수록 제대로 읽지도 않고 얕잡아 봤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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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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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진은 인터뷰 내내 깊은 슬픔을 토로했다. 그는 요즘 "철 지난" 마르크스도 다시 읽고 있다. 자본주의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상황에서 갈피를 잡아보려는 한 지식인의 안간힘이 엿보인다. 끝으로 그에게 또 다른 책 출간을 권했다. 그가 지난 5년간 답을 찾고자 좌충우돌한 흔적을 공유하는 것도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서 도움이 될 테니까.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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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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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M_BODY--><br />
/강양구 기자,안은별 기자,최형락 기자(사진)  <br />
]]></description><image><url>http://pic.pressian.com/images/2009/12/18/60091218194250.JPG</url><link>http://blog.aladin.co.kr/vara/3279376</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사실 잘 모르는' 연예인 입조심 하라?</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3027622</link><pubDate>Thu, 13 Aug 2009 13: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3027622</guid><description><![CDATA[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95494
전여옥 의원님께.<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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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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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배우 일을 하는 정진영이라고 합니다.&#160;전 의원님과 일면식도 없습니다. 의원님의 지역구에 살지도 않고, 여러 사회적 사건에 있어 의원님과 미주알고주알 의견을 주고받을 일도 없습니다. 의원님도 아시다시피 국회의원과 배우 사이에는 적절한 거리가 있고, 서로 무릎을 맞대고 국정을 논하거나 시나리오 회의를 할 일이 없으니까요.<br />
<br />

&#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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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글을 올리는 것은, 최근 인터넷에 보도된 바 있는 배우 김민선씨에 대한 전 의원님의 글 때문입니다. 물론 전 의원님의 개인 홈페이지에 게재된 글이고 제게 개인적으로 의견을 표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가 글을 올리는 것이 온당치 않을지도 모릅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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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br />
<br />

허나&#160;1년 전 자신의 홈페이지에 미 쇠고기 수입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올린 글 때문에 이틀에 걸쳐 쇠고기 수입업체로부터 피소당하고 전 의원님으로부터 행동의 지적을 받은 동료 배우 김민선씨의 현재 상황을 생각해보면, 그리고 아무 대응도 못하고 그저 웅크리고 있는 그의 속 타는 심정을 헤아린다면 누군가 그녀의 마음을 대신 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이 글을 올립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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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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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민은 자신의 견해를 밝힐 권리가 있습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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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 Fuction btns --><br />
                        
                            
                                
                                    &#160;&#160;
                                
                            
                        
                        <!-- E: Fuction btns -->▲ 전여옥 의원이 지난 11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배우 김민선의 발언을 비판하는 '연예인의 한마디- 사회적 책임이 있다' 는 글을 올려 논란이 되고 있다. 
                    
                    
                        ⓒ 전여옥홈페이지 
                        <!-- S: first TAG --><br />
                        
                            
                                
                                     김민선
                                
                            
                        
                        <!-- E: first TA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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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시피 김민선씨는 배우입니다. 그는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160; 이 사회의 한 구성원입니다. 의원님이 글에서&#160;"배우, 가수, 탤런트, 개그맨--저는 그들의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존중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시피, 한 사회의 구성원은 사회 현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직업이 무엇이든지 말이죠. <br />
<br />

&#160;<br />
<br />

의원님은 "영향력이 남다르기 때문에 공인인 연예인들은&#160;'자신의 한마디'에 늘 '사실'에 기초하는가?라는 매우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라고 쓰셨습니다. 차분한 어조셨고, 정치인으로서 충분히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릴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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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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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의원님의 말씀에는 상당한 논리적 비약이 있으며&#160; 결과적으로 온당치 못한 결론이 내려졌다고 저는 생각합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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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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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민은 자신의 견해를 밝힐 권리가 있습니다. 물론 연예인도 마찬가지이구요. 김민선씨가 광우병 정국의 초입에 대중의 관심을 끄는 발언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홈페이지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우려를 표현한 문장이, 선동적인 문구로 언론에 보도된 것이지요.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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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60;&#160;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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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선씨는 쇠고기 수입에 대한 시민으로서의 견해를 밝혔습니다. 하지만 쇠고기 수입업체는 그녀가 허위사실을 유포했다고 몰아붙이고 있고, 의원님 또한 사실에 기초했는지 신중했어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습니다.&#160;이상한 일이지요. 김민선씨가 도대체 어떤 허위사실을 말했다는 것이죠?<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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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전 많은 시민들은 광우병&#160;소가 수입될 수 도 있다는 우려를 표했고, 그 우려는 시민이 가질 수 있는 정당한 우려입니다. 자신이 먹을 것이 위험할까 걱정된다는 것이 허위사실 유포인가요?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견해인가요? 그렇다면 도대체 사실에 기초한 것은 무엇인가요?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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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일 년이 지난 일이고, 대개의 '사실'들이 밝혀졌습니다. 정부에서 쇠고기 수입과정에서 주무부서의 실수를 인정했고, 성급한 협상에 대한 시민들의 항의를 받아들여, 이런저런 행정상의 추가 보완조치도 취했습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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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님께서도 이른바 공인에 대한 상반된 개념정의를 거론하셨듯이, 배우 등 연예인이 과연 공인인가 아닌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160; 의원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예인의 한마디 한마디가 '공적신호'로 '코드화'되고 사회적인 영향력이 막강하므로 공인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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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력이 막강하므로 연예인을 공인으로 봐야한다는 의원님의 논리를 차용하자면, 정부가 실수를 인정하고 추가 보완조치를 취했음으로 시민의 우려가 사실이었다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나요?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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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은 그만해야겠습니다. 이제 제가 진짜로 드리고 싶은 말씀을 드려야겠네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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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우려가 정치적 견해인가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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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160;
                                
                            
                        
                        <!-- E: Fuction btns -->▲ 지난 2006년 1일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집회에서 참석한 배우 김민선. 
                    
                    
                        ⓒ 오마이뉴스 안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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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연예인이 선거 국면에 있어 특정후보를 지지하고 선거운동을 한다면 그것은 이른바 정치적 견해 내지 정치행위라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의원님께서는 이른바 연예인의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존중한다 하셨습니다. 내편이든 아니든 상관 않고 말입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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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참 이상합니다.&#160;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것이 어째서 정치적 견해가 되는 것일까요?&#160;연예인이 공인이라는 논리에 저는 동의하지 않지만, 백번 양보하여 그렇다 하더라도 공인인 연예인이 한 말은 모두 정치적 견해입니까? 자기가 먹을 것이 위험하다 우려해도 정치적 견해인가요? 사회현안에 대해 이야기 했다면 그것은 모두 정치적인 것인가요?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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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은 권력획득이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권력획득의 주체가 정당으로 현실화되고, 그 정당은 자신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권력을 쟁취하려 하는 것이 곧&#160;정치행위가 되겠죠.&#160;또 한편으로 정치의 기본은 '편가름'이라고 저는 봅니다. 정당은 그 편가름의 현실적 실체이구요.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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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으로서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여러 현안에 관심을 갖고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권력을 쟁취하려는 정치행위가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기본권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편 가름에 기초한 행위가 아니라 네편 내편을 넘어선 것입니다. 상대방은 무조건 보수꼴통이고 좌빨이라는, 무지막지한 편가름을 저는 경멸합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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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님께서는 공인인 연예인은 자신의 한마디가&#160;사실에 기초해 있는가를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연예인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공인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의무를 왜 굳이 '대중에 대한 영향력이 막강한 연예인'에게만&#160;요구하시나요? 연예인을 넘어 공인을 넘어 모든 인간은 사실에 기초한 이야기를 해야겠지요. 그리고 누가 뭐래도 공인인 정치인은 더욱 그래야겠지요.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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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말이 사실에 기초한 것인지를 확인하라는 말도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사실이란 게 대체 뭘까요? 진실의 다른 이름인가요?&#160;저는 이 세상에서 진실이 항상 대접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란 말도 좀 반대하는 편이구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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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정치적인 논리는 진리를 추구하는 논리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흔히 말하는 정치적 전략과 전술은 진리를 구현하는 방법론이 아니라, 다만 이기기 위한 것일 뿐이지요. 이기면 반칙도 합리화되고, 거짓말도 합리화 되는 것이 정치의 세계이지요. 진실이든 아니든 사실이든 아니든 다중에게 호소하여 표를 얻는 행위가 정치행위이지요? 그렇게 얻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정치행위이지요? 제가 너무 냉소적인가요? 예, 저는 최소한 현실 정당과 정치인에 대해서는 냉소적입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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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도 선거 때마다 투표를 합니다. 그것은 시민으로서의 저의 정치행위이지요. 하지만 누구를 찍겠다고 공개적으로 표명하거나 선거운동에 나선 적은 없습니다. 그게 저의 정치행위의 스타일이니까요. 다른 연예인이 선거운동에 나선다고 해서 비난한 적도 없고, 비난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것은 그의 정치행위 스타일이니까요.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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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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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민운동은 현실 정당 정치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시민운동은 권력쟁취 운동이 아니라 권력 감시 운동이니까요. 물론 좌든 우든 진보든 보수든 현실정당과 시민단체가 이념적인 협력전선을 형성하는 것을 모르는 바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협력일 뿐이지요.&#160;시민운동은 권력을 얻으려 해서도 안되고, 권력을 얻는 순간 그 집단은 정당이 되어야 하며, 진정한 시민운동세력은 그 정당을 빠져나와 다시 권력 감시와 비판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160;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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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선씨 이야기를 하다가 왜 시민운동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하시겠지요. 김민선씨는 정치권력획득을 위해&#160;견해를 표명한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서 자신의 견해를 표명한 것뿐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함입니다. 정치적 견해를 이야기해도 괜찮다면서 시민으로서의 견해 표명이 문제가 될 수 있나요? 그녀가 선거 때 어느 당에 표를 던졌는지는 모르지만, 적극적인 선거운동을 한 적도 없고, 더 나아가&#160; 권력을 쟁취하려고 쇠고기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권력을 쟁취하려고 유권자를 미혹시킨 것이 아니고, 다만 먹을거리가 위험하다는 견해를 표했을 뿐이란 말입니다. 그게 그리도 잘못인가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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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 못하면 잠자코 있어라?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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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 Fuction btns -->▲ 영화배우 김민선의 싸이월드 미니홈피. 
                    
                    
                        ⓒ 화면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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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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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거짓말쟁이가 되니까요. 거짓말쟁이는 나쁘다는 말을 우린 어릴적부터 숱하게 들어왔으니까요.&#160;혹 의도치 않게 사실이 아닌 것을 옮길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으니 옮기는 것이겠지요.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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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에게 당하지 않으려고, 거짓말쟁이에서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고 우린 애를 씁니다. 그래도 간혹 당합니다. 이른바 '사실' 이란 것도 그렇습니다. 광우병 쇠고기에 대해서 작년에 많은 전문가들의 논란이 있었습니다. 과학적 사실이란 것은 항상 논란거리입니다. 접근에 따라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는 것이 과학이거든요. 믿을 수 있는 과학자를 판별할 능력을 우린 갖고 있지 않고, 누구의 말이 맞는지 판별할 과학적 지식을 일반인은 갖고 있지 못합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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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에게 사실의 기초를 확인하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시민에게 사실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공인의 의무가 아닐까요? 김민선이라는 시민에게 사실의 기초를 확인하라고 충고할 것이&#160; 아니라,&#160; 그녀가 사실을 알 수 있도록 미리 알려주어야 합니다. 정치적 논리가 아닌 진짜 사실을 말입니다.&#160; 그것이 바로 진짜 공인인 의원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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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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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160;김민선씨의 피소 뉴스를 접했고, 그때는 '참 너무들 하는군'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아는 법 상식으로는 혐의가 성립되지 않을 텐데 라는 한가한 생각도 했구요. 그러다&#160;12일 의원님의 글을 인터넷 기사를 통해 접했습니다. 혹 전체 맥락을 오해할까봐 홈페이지를 방문해 전문을 읽었구요. 부분을 침소봉대해 전체를 비난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런다 해도 의원님의 의견에 동의가 안 되더군요.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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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기 전에 김민선씨과 통화를 했습니다. 괴롭겠다며 위로를 했습니다. "뭐 어쩌겠어요 가만히 있어야지요"라는 말을 하더군요. 최소한의 자기 방어를 할 수 없는 어린 후배였습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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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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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160;이 글을 정치적 견해 표명으로 오해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 글은 문화적 견해 표명입니다. 의원님의 말씀이 '잘 알지 못하면 잠자코 있어라'라는 말로 들려 그것은 참으로 문제가 있는 논리라는 생각이 들어 쓰는 글입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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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br />
<br />

잘 알지 못하면 알려고 노력을 해야 하고, 최소한 자기가 아는 만큼의 발언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사회는 그런 발언을 묵살하거나 무시할 것이 아니라, 혹 잘 모르고 있다면 설명을 해야 하며, 설득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합리적&#160; 사회의 문화적인 건강성 아닌가요? 전문가가 아니면 말하지 말라. 잘 모르면 가만히 있어라 라는 말은 소통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려는&#160; 병들고 시들어가는 반문화적인 언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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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br />
<br />
시민의 말을,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다르다고 하여 막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의원님의 견해를 많은 사람이 적극 지지하고 따른다면 좋겠지요. 하지만 정치인은 반대론자의 의견도 경청하고 설득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려고 노력한다 하시니 다행입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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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160;
                                
                            
                        
                        <!-- E: Fuction btns -->▲ 배우 정진영 
                    
                    
                        ⓒ 오마이뉴스 권우성
                        <!-- S: first TAG --><br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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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제 머리 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갑니다. 혹 의원님께서는 최소한의 자기방어에도 미숙한, 직업이 배우인 한 시민에게, 그녀가 최근에 겪고 있을&#160; 심리적 공황을 고려하지 아니하고, 너무 엄혹한 충고를 주시는 게 아닌가라는 야속함이 듭니다. <br />

&#160;<br />
<br />
그런 충고는 한 여배우에게 주시지 마시고, 남의 이야기는 절대 듣지 않으려하는, 자기 이야기만 하려고 하는 진짜 공인들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br />

&#160;<br />
<br />

혹 '사실도 잘 모르는' 연예인들 입조심하라는 섬뜩한 경고로 들려 마음이 영 개운치 않습니다.&#160;&#160; <br />
<br />

&#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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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12일&#160;&#160;정진영 올림&#160;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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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사실 잘 모르는' 연예인 입조심 하라?<br />
&#160;전여옥 의원님, 배우도 권리가 있습니다 - 오마이뉴스 <br />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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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image><url>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09/0813/IE001093086_STD.jpg</url><link>http://blog.aladin.co.kr/vara/3027622</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사랑은 88만원보다 비싸다</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3015869</link><pubDate>Sat, 08 Aug 2009 01: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3015869</guid><description><![CDATA[출처 : &#160;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5496.html
&#160;
&#160;'88만원 세대'의 사랑은 사치다. <br />
어느새 한국은 불임의 사회가 돼버린 것 아닐까? 일찍이 경쟁에 내몰리고 숨 가쁘게 뛰어다녀 취업에 필요한 '스펙'을 쌓아봐야 꼬박꼬박 월급 주는 직장을 구하기 어렵고, 고졸이든 대졸이든 아르바이트(알바)를 전전하며 입사원서를 내다보면 시간도 부족하고…. 이렇게 불안정한 노동과 불투명한 미래에 시달리는 88만원 세대의 사랑은 안녕할까?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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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청춘은 바쁘다. 사랑에 필요한 시간과 여유와 열정을 허용하지 않는 세상은 불안정한 사랑을 낳았다. 한 달을 꼬박 일해도 기껏 '88만원'을 손에 쥐는 청춘의 시대. '가난한 사랑 노래'는 옛 노래가 아니다. 신경림 시인이 1988년 발표한 '가난한 사랑 노래'는 강산이 두 번 변한 오늘에 오히려 심금을 울린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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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원 더 나온 전화요금, "누나, 동생으로 남자"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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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br />
내 볼에 와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br />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br />
돌아서던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br />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br />
<br />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br />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br />
그도 가난하기 때문에 사랑을 버려야 했다. 스물여섯의 팔팔한 청춘에게 사랑은 사치였다. 8만원, 휴대전화 요금 고지서에 찍한 금액을 보는 순간 그는 연애를 '끊기로' 결심했다. 3만원이 아까웠다. 통화는 비싸서 안 하고 문자도 "세 번이 오면 한 번만" 보내며 자제를 했건만, 원래 5만원 나오던 요금이 3만원 더 나왔다. 차라리 그 돈으로 등록금 대출을 갚자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 알바를 하며 만났던 연하의 청년과 연애의 가능성을 실험해보기엔 그의 어깨에 얹힌 짐이 컸다. 2014년, 대학 등록금 대출 상환이 끝나는 날은 아득히 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알바를 뛰어도 손에 쥐는 돈은 겨우 100만원 안팎, 한 달 60만원 등록금 대출을 갚으면 한 푼이 아쉽다. 한지혜씨는 그렇게 "마음의 문을 닫았다". "누나, 동생으로 남자." 모처럼 찾아온 사랑의 기회는 그렇게 끝났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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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고 속삭이던 입술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일찍이 스무 살의 지혜씨는 사랑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대학 시절 사랑한다고 고백하던 남자들이 네댓은 됐지만, 그들에게 눈길을 줄 여유가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알바 인생은 시작됐다. 400만원 가까운 등록금 대출은 학교를 다니면서도 한 달에 20만~30만원씩 갚아야 했다. 그래도 빚은 남았다. "인생을 담보로 대학을 다녔다"는 지혜씨의 표정이 쓸쓸했다. 게다가 2008년 졸업할 무렵엔 버스 운전을 하던 어머니가 사고를 내 벌금을 내게 됐다. 어머니는 몸져누웠고, 쌍둥이 남동생은 벌이가 없었다. 등록금 상환에 어머니 벌금까지, 고스란히 지혜씨가 감당할 부채가 됐다. 새벽에 나가서 오후에 끝나는 알바에 몸이 무거워 누구를 만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없는 청춘의 세월은 빨랐다. '서른 살 이전에 연애 한번 해볼까?' 그렇게 연애는 '결심'이 필요한, '용기'를 요하는 일이 되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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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내가 일하는 나한테 미안해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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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날… 남자는 여자가 졸업 선물로 준비한 만년필을 꺼내, 종이컵 위에 성탄절에 드는 하루 데이트 비용을 적어보았다. 저녁 식사 약 2만원, 영화 관람료 1만4천원, 선물 2만원, 찻값 1만원, 모텔비 4만원… 얼추 10만원이 넘었다. …돈을 꾸어볼까 생각해봤지만, 그럴 만한 곳에서는 이미 빚을 진 상태였다. 남자는 여자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고 싶었다. 저녁도 먹고, 선물도 주고, 와인이나 칵테일도 마시고, 평소 가던 곳보다 조금쯤 더 비싼 모텔에서 근사한 섹스도 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남들처럼. 남자는 돈을 구할 수 없었다. …결국 남자는 거짓말을 했다. '어머님이 편찮으시다.' 그것이 자신과 여자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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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20대 소설가가 그린 요즘 20대의 연애는 쓸쓸하다. 김애란이 2007년 펴낸 소설집 &lt; 침이 고인다 &gt; 에 나오는 단편 '성탄특선'엔 지방에서 올라와 알바를 하는 여자와 대학을 졸업하고 구직 중인 남자가 성탄절에 겪는 얘기가 담겼다. 이렇게 낭만적인 성탄절에도 모텔방 하나에 세들 여유가 없는 현실은 소설 속 얘기가 아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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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수(29·가명)씨도 여자친구와 모텔에 갈 때마다 덜컥 겁이 난다. 애인이 좋아하는 모텔은 방값이 4만원. 부모님의 식당일을 도와서 한 달에 60만원을 받는 그에겐 버거운 액수다. 그러나 차마 남자의 자존심 때문에 가지 말자고 말하진 못한다. 그는 연상의 애인이 밥값과 술값을 내면 모텔비는 자신이 내는 것으로 자존심을 지킨다. 패밀리레스토랑은 "여친이 가자고 하는 경우만 간다". 여친이 가자고 하는 경우엔 자신이 내겠단 사인이다. 영화일을 하려고 대학을 중퇴한 조씨는 오늘도 다짐한다. '그래, 서른까지만 나에게 (영화일) 기회를 주자.' 서른이 넘은 애인은 혼기가 꽉 찼지만 차마 결혼하자는 얘기를 꺼내지 못한다. 이렇게 오늘의 청춘에게 내일은 없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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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대학을 졸업하고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난 정진아(25)씨는 자꾸만 데이트 시간이 '800원'으로 계산됐다. 오래된 알바는 오래된 습관을 키웠다. 그는 인터넷으로 중·고생 학습 상담을 해주는 알바를 대학 시절 내내 했는데, 10~15분에 상담 하나를 끝내면 800원을 받았다. 그러니 애인과 영화 한 편을 봐도 '영화요금 8천원이면 3시간 알바인데…'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그는 "노는 내가 일하는 나에게 미안했다"고 말했다. 이른바 서울의 상위권 대학에 다닌 그도 알바로 점철된 대학 시절을 보냈다. 동생과 둘이 대학에 다니다 보니 한번에 800만원씩 나오는 등록금은 "잘살지도 못살지도 않는" 그의 집에도 큰 부담이었다. 그는 "언제나 오전엔 수업, 오후엔 알바를 했다"고 돌이켰다. 휴학을 하면 더욱 '빡세게' 살았다. "학교에서 복사하고 청소하고 도서관 잡무로 8시간 일했다. 그 사이사이 눈치를 보면서 채점하는 알바를 하고, 한 주에 두 번씩 점심시간에 나가서 학생들 출석 점검을 하고, 주말 알바를 따로 뛰고." 그렇게 시간당 4천원, 한 달에 150만원을 벌었다. 두어 번 연애를 했지만 "만나기 전에 뭔가 계산부터 하거나 내가 이걸 할 여유가 있을까 생각이 들어서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다". 결국 연애는 길지 않았다. 그는 "그래서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제발 숨 좀 쉬게 해달라"고 호소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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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준비를 위해 이별을 고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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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들이 먹고살기 위해서 하는 일의 대다수는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은 길어야 그 유효 기간이 2년에 불과하다. 노동이 이처럼 장기적으로 이어지지 않고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고 일시적이고 잠정적이게 되었는데, 자기 삶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그런 지속 가능한 삶이 가능하겠는가? …신자유주의가 불러온 노동의 유연화는 언제나 일시적이고 잠정적이기에, 연애와 사랑, 가족처럼 한정적 시공간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야 하는 인간 사이의 친밀성과 유대감, 연대의 틀과는 도무지 맞지 않는 노동의 형식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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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호씨가 쓴 신자유주의 비판서 &lt;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gt; 의 일부다. 신자유주의의 유연한 노동은 잦은 이동을 요구한다. 더구나 서울에 자원이 집중된 사회에서 편입과 취업을 통해 서울로 가려는 욕망은 거세질 수밖에 없다. 대구의 대학에 다니는 박지현(22·가명)씨는 편입을 준비하고 있다. 외식 관련 학과에 다니는 그는 "대구엔 취업할 호텔도 별로 없을뿐더러 차별을 당하지 않기 위해 서울의 대학으로 편입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당분간 연애는 유예할 각오다. "편입할 학교에서 이전 학교의 학점도 본다니 학사 관리도 해야 하고, 편입 준비도 하니까 알바를 하지 않아도 바쁘다." 사귀던 애인과는 지난해 여름에 헤어졌다. 그는 "3학년이 되면 연애도 심각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전했다. 연애가 더 이상 낭만이 될 수 없는 3학년. 여름방학을 맞아 서울에 올라온 그는 편입학원을 다니며 자신에게 집중하는 중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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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입과 취업의 성공이 '이별'로 이어지는 지방의 사랑은 철새의 사랑이 됐다. 엄기호씨는 &lt;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gt; 에서 지방대 출신 형석씨의 이야기를 전한다. "형석은 지방대생의 사랑은 슬픈 것이라고 말했다. 지방대에서는 어느 한쪽이든 서울로 더 일찍 떠날수록 경쟁에서 성공한 삶이기 때문이다. 떠남이 미리 전제되고 축하해야 할 일이 된 곳에 머무르는 두 마리 철새의 사랑은 슬프지 않을 수 없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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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지방이 아니라도 공간의 분리는 이별을 부른다. 같은 지역에 살아도 취업을 위해선 자신을 유폐해야 하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취업난 속에서 오늘의 공시(공무원 시험)는 어제의 고시가 되었다. 마치 고시 공부를 하듯이 자기만의 골방에 틀어박혀 공부하지 않으면 합격이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취업을 위해 방에 '박히면서' 이별을 고하는 커플이 적잖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이혜영(26·가명)씨는 의학전문대학원을 가려는 남자친구를 만난다. 이씨는 "공부를 시작하면서 한 주에 두 번만 보기로 정했다"며 "경력에 방해가 된다면 운명 같은 사랑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도 이들은 나은 편이다. 시간이 드는 연애 대신에 감정적 소모가 적은 '섹스 파트너'를 두는 경우도 있다. 엄씨는 "이제 사랑은 취업의 적"이라며 "윗세대는 세상과 교류하며 자신의 자리를 찾았지만, 88만원 세대는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서 세상에서 고립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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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선택, 초식남-철벽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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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해서… 돈을 열심히 벌어야 할 시기에 백수… 제 주변에도 많은 친구들이 결혼할 생각도 능력도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더 이상 여자와 정신적으로 노동을 해야 할 필요를 못 느끼는 남자들이 늘고 있습니다. …어쩌면 초식남이나 건어물녀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장기 불황 속에서 연애나 결혼 후 자신과 자신의 다음 세대에게 평균 이상의 삶을 가져다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자괴감에서 온 슬픈 현상이 아닐까요? …결국 우리 사람들도 벌이나 개미처럼 번식은 특별한 몇몇만 하는 사례가 될까 두렵습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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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아고라에 올라온 20대 '초식남'(연애나 결혼에 관심이 없고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대상에만 몰두하는 남자를 일컫는 말)의 글이다. 이렇게 초식남에서 단물만 빼면 '연애 못하는 남자' '결혼 못하는 세대'가 나온다. 김정운(가명)씨는 스물다섯이 되도록 변변한 연애를 못해봤다. 블로그를 열심히 하는 그는 타로로 점을 보고, 음식을 만들고, 신화에 관심이 많다. 이렇게 취미가 다양하고, 신제품에 관심이 많으며, 여성과 잘 어울리나 애인으로 발전하진 않는 면에서 그는 초식남의 외양을 갖췄다. 그러나 그는 "나는 육식이야!" 외친다. 연애 따윈 필요 없어,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나처럼 강요된 초식남과 자발적 초식남은 구분해야 한다"고 항변했다. 키가 조금 작은 것만 빼면, 연애를 못할 이유가 없다고 그는 생각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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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식남은 마법사로 변신한다. 신준철(25)씨의 블로그엔 '마법사 전직 경축!' 이벤트 사진이 있다. 마법사가 된 친구를 축하하기 위해 준철씨와 친구들이 케이크를 주문하고, 티셔츠를 제작했다. 'Finally, He keeps his pure for 25 years….' 얼굴에 케이크를 묻힌 친구가 입은 셔츠에 적힌 문구다. '마법사'란 25살이 될 때까지 동정을 지킨 남성을 뜻한다. 일본 만화에서 유래한 신조어로 알려졌다. 그런데 친구뿐 아니라 준철씨도 마법사가 될 위기다. 그는 "(25살 생일까지) 아직 3개월이 남았다!"고 외친다. 남들이 보기엔 그도 초식남. 스스로도 "초식남 리스트를 보니 확정적인 초식남"이라고 말한다. 사실 그도 미래를 위해서 연애를 조금은 참았다. 그렇게 노력한 준철씨는 국립연구소에서 일할 미래가 보장됐다. 그는 "주변에선 '준철이가 애인만 있으면 엄친아가 될 텐데' 그런다"며 "엄친아와 마법사는 한 끗 차이"라며 웃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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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이 죽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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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도 이제는 '건어물녀'를 넘어서 '철벽녀'로 변신한다. 철벽녀란 외모도 괜찮고 학력과 집안도 웬만하나 연애를 못하는 여성을 말한다. 마치 철의 장막을 치듯이 연애를 차단한단 뜻이다. 실제 그들은 연애할 의지도 없지는 않으나 연애에 대한 환상이 있고, 어차피 실패할 연애는 시작도 않는단 생각을 가진 자존심 강한 여성이다. 그래서 실전 연애에 몸을 던질 확률은 매우 낮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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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마법사·철벽녀처럼 연애를 못하는 종족이 최근 부쩍 주목을 받는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는 "88만원 세대는 혼자 지내는 것이 편해서 연애는 안 하고, 결혼은 희생으로 생각해 싫어한다"며 "비용 대비 효과만 생각해 감정노동을 피한다"고 말했다. 어쩌면 시간과 돈 같은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자아냐 관계냐를 저울질해 나온 합리적 선택이 초식남·철벽녀인 셈이다. 물론 마을과 가족 속에서 관계를 익혔던 경험이 부족한 세대적 특성도 있다. 이렇게 가다간 정말로 여왕벌과 왕개미 같은 강자만 결혼하는 시대가 되지 않을까?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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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이 사라졌다."(우석훈) <br />
"오히려 뿅 가는 연애는 안 한다. 그렇게 말하는 학생들이 늘었다. 100%인 사랑은 오히려 무섭다고 한다. 살기도 바쁜데 상처까지 받으면 감당하기 힘드니까."(엄기호)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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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이 아니라 굴이다. 신기하게 감정의 촉을 잘라버린다."(이규호) <br />
이제 관계의 상처는 치명타. 살아남으려면 쿨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세상은 자기관리를 못한 당신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그러니 쿨해지라고 강권한다. 신자유주의 치하에서 오래된 사랑의 우물은 그렇게 말랐다. &lt; 88만원 세대 &gt; 의 공동저자 우석훈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는 "선물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열정이 절실한데, 자원도 열정도 없으니 짝사랑이 죽었다"고 말한다. 더 이상 '사랑을 하다가 죽어도 좋아'는 아닌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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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일리노이대 인류학과 박사과정에 있는 이규호씨는 "88만원 세대는 가문 혹은 혈통을 이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포스트 가부장제 남성들"이라며 "가족에 대한 갈망, 밥상에 대한 애착이 없는 이들은 감정의 촉을 끊어버리는 기계가 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쿨하기보다는 각자의 '굴'에 갇힌 존재란 것이다. 20대 고학력·중산층·대기업·정규직 남성의 연애를 연구한 그는 "이른바 88만원 세대 중에서 잘나가는 남성은 사랑에 내재된 것들을 잘게 쪼개어 아웃소싱한다"며 "돌봄과 보살핌은 취향과 취미로 대체하고, 자식을 키우면서 느끼는 희로애락은 주식과 펀드로 대신하고, 성적 욕망은 (유사) 성매매로 해결한다"고 분석했다. 심지어 가족은 '장기적 부채'라고 말한 20대도 있단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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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연애는 부담이고 가족은 짐이다. 우석훈 강사는 "한국전쟁 직후에도 서울의 청춘남녀가 남대문부터 동대문까지 거닐며 연애하는 재건 데이트가 유행했다"며 "지금이 경제적으로 당시보다 더 어렵진 않을 텐데, 무엇이 청춘의 열정마저 메마르게 하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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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하기보다는 굴에 갇힌 존재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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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전히 세상엔 뜨거운 숨결을 나누고 사랑을 키워 가정을 꾸리는 청춘이 많다. 그러나 20대의 열정이 점점 식어가는 신호는 명백하다. 세상이 추운 탓이다. 20대를 착취하는 체제에 지쳐 '러브러브'할 힘마저 잃은 청춘이 늘어간다. 그렇게 88만원 세대는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사랑할 자유마저 잃었다. 사회는 청춘의 호주머니에 더 많은 돈을 찔러주고, 더 많은 시간을 허락해야 한다. 사랑은 88만원보다 비싸다. 이것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다. 이런 현실을 외면한 채,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하는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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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br />
]]></description><image><url>http://photo-media.daum-img.net/200908/07/hani21/20090807181033635.jpg</url><link>http://blog.aladin.co.kr/vara/3015869</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맑스코뮤날레</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2919605</link><pubDate>Mon, 22 Jun 2009 02:2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2919605</guid><description><![CDATA[<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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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의 평론, 미래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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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04월 04일 (토) 23:34:44
                        김지혜  dalki6458@sn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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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담 일시 및 장소: 3월 31일 오후 7시, 호암교수회관 2층<br />
            사회: 박성창 교수(국어국문학과․문학평론가)<br />
            패널: 박준흠 음악평론가<br />
            &#160;&#160;&#160;&#160;&#160; 반이정 미술평론가<br />
            &#160;&#160;&#160;&#160;&#160; 황진미 영화평론가<br />
            정리: 김지혜 기자, 사진: 이다민 기자&#160;&#160;&#160;&#160;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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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의 위기는 더이상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매체의 다변화로 평론가들은 과거에 누린 권위를 상당 부분 잃어 버렸다. 소위‘주례사 비평’이나 현학적인 비평이 횡행하는 등 평단 스스로 위기를 자초했다는 지적도 있다. 평론의 위기라는 현상은&#160; 문학, 영화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등을 포함한 모든 예술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평론이 우리사회 담론 배치에 큰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평론의 위기는 평론 자체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사회 담론 생산 구조 전반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담론 생산에서 주체적 역할을 담당해온 우리 사회 지식인 집단의 새로운 역할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한다. 『대학신문』은&#160; 현재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평론가들을 초대해 현재 평론 위기의 양상과 그 원인,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평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는 좌담회를 가졌다.&#160;&#160;&#160;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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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나&#160;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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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창: 문학의 경우 평론의 역사가 다른 분야에 비해 오래됐고 담론의 층위도 다양하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발언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문학평론은 시대나 사회에 관한 발언을 가능케 하는 일종의 우회적 통로였다. 그래서 문학평론은 작품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시대나 사회에 관한 이야기였고 문학평론가는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겸해야 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여러 지각변동이 일어났고 문학평론의 지평은 작품 자체에 머물게 됐다. 최근 일본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근대문학의 종언』에서 ‘문학의 정치적․경제적 기능은 끝났다’고 말했다. 문학이 정치․경제 바깥의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일례로 신경숙, 황석영과 같은 작가들이 꾸준히 대중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문학의 종언을 말하는 것은 섣부르다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이래 언급돼 온 위기는 문학의 위기라기보다는 오히려 문학평론의 위기에 가깝다. 주례사 비평이나 현학적 비평은 1990년대 초 이래 문학평론이 처한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또한 대중과의 소통능력을 상실해 현재 수많은 잡지에 실리는 문학평론이 실질적인 독자를 잃어버린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160;&#160;&#160;&#160;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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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이정: 다른 예술 분야는 주로 소비 주체인 대중들에 의해 평가받는 반면, 미술 분야는 미술계에 속한 전문가 집단이 평가의 주체가 되는 속성을 갖는다. 미술은 향유자가 실질적으로 직접 평가·참여하기 힘든 영역일 뿐만 아니라 미술은 전문가의 영역이라는 항간의 믿음 또한 크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미술은 창작 현장에서든 평론 현장에서든 외부의 견제 없이 생존 가능한 예술 장르다. 따라서 미술(평론)은 고립됐지만 무너질 리 없는 굳건한 섬에 비유할 수 있다. 따라서 미술 공동체 내부에서 온전한 견제와 평론이 존립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많은 미술 평론가들이 평론의 자주권보단 집단의 이해에 얽혀 평론을 하는 경우가 많다. 미술계와 연관된 사회적 사건들이 평단보다는 외부 매체를 통해 폭로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95년 이후 광주 비엔날레를 비롯해 논평자가 필요한 국가적 대형 미술 행사는 미술평론가들이 평론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준 측면도 있다. 한편 평론이 미술종합지의 난해한 평론과 저널리즘 평론으로 양분된 것도 평론위기의 원인으로 지적할 만하다. 미술종합지 평론은 전문가 그룹을 독자로 설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미를 알기 어렵고, 이에 반해 저널리즘 평론 중 일부는 일반 독자의 수준을 오히려 하향 평준화시켰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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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흠: 한국에서 대중음악 평론이 위기라고 말하기 전에, 음악평론이 정상적이었던 때가 없었다고 말해야 옳다. 평론을 하기 위해서는 작품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껏 한국의 음악 담론은 주로 음악 자체가 아닌 단순한 엔터테인먼트 영역만을 다뤄왔다. 서구 대중음악 애호가를 비롯한 소수 마니아 집단에서 이뤄진 평론을 제외하면 한국에서 음악평론이 정상적으로 존재했다고 하기 어렵다. 영미권에서는 1950년대 말 모던포크를 중심으로 음악평론이 등장해 1960년대 들어 음악전문지가 생겨 음악담론이 이뤄졌지만 한국에서는 그 역사조차 찾기 어렵다. 오히려 최근에 와서야 평론가가 제대로 평론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인디음악이 하나의 음악 컨텐츠로서, 작가의 작품으로서 인식되면서 평론의 대상이 생겼다.&#160; 평론을 하는 입장에서 최근 음악계 내부의 상황은 긍정적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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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미: 보통 영화평론에 대해 언급할 수 있는 시기는 1990년대 이후다. 그 이전에는 영화평론이 대중과 접점을 갖지 못한 채 영화계에 속한 소수 사람들 사이에서 이뤄졌다. 1990년대 한국영화 붐이 일면서 부산영화제가 만들어지고 「씨네21」이나 「키노」 같은 영화잡지가 창간됐다. 영화평론의 위기는 2000년대 중반 이후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7년 「디워」 논란에서 알 수 있듯이 평론가 집단은 이전의 권위와 신뢰를 잃었다. 오죽하면 평론가가 좋다고 하는 영화는 재미가 없고 흥행이 안 된다는 역설이 존재하겠는가. 영화평론의 위기 상황을 보여주는 또 다른 국면은 8년 역사의 「필름 2.0」이 무기 정간에 들어가고, 「프리미어」가 폐간됐다는 사실이다. 영화 담론을 담아낼 지면이 점차 줄어드는데 평론과는 거리가 먼 엔터테인먼트성 기사들은 엄청난 양으로 유포되고 있다. 시장에서 요구하는 짧은 가십성의 글은 넘쳐나고 진지한 영화평론은 설 자리를 잃어가는 상황, 이것이 진정한 위기다. 그래서 최근에는 지면보다는 개인 블로그가 활성화되고 있다. 급격한 매체 변화를 겪는 중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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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는 어디서 왔나&#160;&#160;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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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창: 문학평론의 위기를 불러온 가장 큰 원인으로 평론가들이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위치를 확보하기 힘들어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평론의 축이 이념에서 자본으로 이동하면서 대부분의 평론가는 자신이 속한 출판사 책에 대해 제대로 된 평론을 하기 힘든 상황이 벌어졌다. 평론계 내부 문제로는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이 명확하게 구분돼 있지 않다는 점 또한 문학평론의 위기를 불러온 중요한 이유다. 문학평론은 저널리즘의 영역인데도 문학평론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아카데미즘에 속해 있다. 평론과 학술논문은 분류돼야 할 영역인데 주류를 형성하는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 사이에 제대로 된 소통이 이뤄지지 않아 많은 이들이 평론을 학술논문으로 생각하면서 문학평론이 너무 어려워졌다.&#160; 최근에 인터넷 상에 인기 작가들이 소설을 연재하면서 독자 또한 인터넷 상에 직접 작품에 대한 평가와 분석을 내놓는다. 이들의 평가와 분석이 인터넷 공간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전달된다. 이런 상황에서 평론가의 역할이나 입지가 이전에 비해 좁아진 것은 사실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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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이정: 인터넷이 기존의 평론을 위협한 건 사실이지만, 인터넷 매체의 발달이 제도권 미술평론의 위기를 직접적으로 야기한 것은 아니다. 미술과 미술평론이 외부로부터 고립돼도 존립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진정한 견제 세력 없이도 존립할 수 있는 구조야말로 미술평론이 직면한 위기의 실체다. 한편 미술담론을 평론가보다 전시기획자가 유도하는 전 세계적인 시류 또한 평론 위기의 한 요소로 본다. 비평가가 전시 기획을 맡다보니 평론의 역할이 축소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른 예술 평론과는 달리 미술평론은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이 양극화돼는 것 또한 문제다. 평론가들이 미술잡지에 싣는 글은 재미가 없는 반면, 저널리즘 평론은 독자의 반응에 민감하다 보니 격이 떨어지는 예가 간혹 있다. 미술평론의 이러한 양극화의 원인으로 독자(관객)의 지적 수준 문제도 배제할 수 없다. 독자(관객)의 교양적 인프라가 탄탄할 때야 비로소 질 좋은 평론도 존립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 미술의 요체를 훼손시키지 않으면서도 독자와 온전히 소통하려는, 평론가의 현실적 노력이 절실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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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흠: 음악평론의 경우 평론가가 평론만으로 삶의 기반을 확보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 현재 한국에서 음악평론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전무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이는 대중음악 평론에 아카데미즘적인 요소가 부족해 많은 대중음악평론가들이 부업평론가로 전락하는 데서 비롯된다. 동시대 창작되는 무수한 대중음악을 모두 접하기에는 물리적인 시간의 압박이 심하다는 것도 위기의 원인으로 짚어볼 수 있다.<br />
더 근본적인 문제는 현재 한국에 통찰력과 혜안을 지닌 대중음악평론가가 없다는 사실이다. 음악마니아에서 출발하지 않은 음악평론가들이 1990년대 음악평론계를 점하면서 평론가가 대중에게 평론적 호소력을 갖지 못하게 된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글만으로 대중과 소통하려 한 이들은 들을 가치가 있는 음악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음악 가이드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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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미: 1990년대까지만 해도 평론가는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고 그 결과 평론 자체가 권위를 지녔다. 1990년대 초반은 80년대에 사회과학을 익힌 이들이 활동 분야를 바꿔 대중문화평론과 영화평론을 하던 시기이기도 했고, 해외에서 영화를 전공한 사람들이 아카데미즘적 글을 쓰던 시기이기도 했다. 관객들 사이에선 문화적 목마름이 있었고 예술영화 붐이 일기도 했다. 이 시기 평론가들은 문화담론을 선도한다는 자부심이 있었고&#160; 독자들은 새로운 지식과 안목을 동경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포착된 영화평론의 위기는 이런 분위기가 사라진 것과 관계가 깊다. 관객에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독자가 보지 못한 점을 짚어 주는 전통적인 평론가의 역할을 관객이 인정하지 않기 시작했으며, 이전의 권위도 잃게 됐다. 이러한 현상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바로 「디 워」 논란이다. 대중의 선택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평론가의 견해를 존중할 것인가라는 이상한 이분법이 생겨났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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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우리시대 평론은 무엇으로 사는가&#160;&#160;&#160;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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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창: 평론가는 작가와 작품을 이어주는 교량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좋은 평론은 그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이 평론을 읽은 후 읽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더불어 작품을 통해서 작품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시대적 맥락과 사회적 의미를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면 최근 화제가 됐던 『88만원 세대』란 책에 나온 내용도 사실 2000년대 소설 속에 이미 제시된 것들이다. 문학평론가는 소박한 작품론에서 벗어나 경제학자보다 명민한 눈으로 『88만원 세대』의 테제를 포착해 젊은이들이 부딪힌 삶의 문제를 시대적 맥락에서 읽어줄 수 있어야 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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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이정: 평론의 위기라고들 말하지만 평론은 반드시 필요하다. 평론가는 그릇된 다수의 견해에 맞서 전문가의 양식과 입장을 고수할 필요가 있다. 평론이 대중의 힘을 외면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전문가적 확신이 있다면 힘겨운 싸움에도 임해야 한다. 현재 그런 기본적인 소임이 수행되지 않아 평론이 위기라는 말이 수년째 떠도는 것이다. 어정쩡한 평론만이 난무하는 현재 상황에서 탈피해야 한다. 또한 평론은 시의성을 갖추고 세상과 교감해야 한다. 1980년대와 같은 격변기가 아니더라도 모든 사회에는 항상 부조리가 있게 마련이다. 평론가는 이러한 사회의 부조리를 견제하기 위한 동시대적 감각을 스스로 갖춰야 한다. 사회와 미술을 유기적으로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평론을 고립되지 않게 하고 버티게 할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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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흠: 앞서 대중음악의 경우 평론할 수 있는 음악적 환경이 조성돼&#160; 있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평론 없이 작가 또한 존재하기 힘들다. 대중음악계에서 평론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궁극적 이유는 건강한 음악산업 발전을 위해서다. 음악평론가는 뛰어난 역량을 갖춘 음악생산자를 발굴하고 재평가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하고 평론가의 평은 일반 대중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평론가가 작가와 작품에 대해 얘기함에도 불구하고 일반 소비자에게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다면, 즉 음반이 팔리지 않는다면 평론가는 실질적 의미를 잃고 만다. 평론가가 작품 생산자를 발굴하고 재평가하는 것은 음반이 팔리는 것으로 연결돼 대중들이 지속적으로 음악시장에 머무르게 하고 오래도록 음악을 좋아할 수 있게 돕기 위해서다. 음악산업의 선순환 구조를 가능케 하는 것이야말로 평론가의 역할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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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미: 정보가 제한됐던 시절, 영화 선택의 가이드 역할을 했던 평론가는 사라졌다. 이제 평론의 기능은 축소됐다. 1990년대 이후 사회 문제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 담론을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정치적 억압은 없어졌다 할지라도 자본의 지배가 더욱 극심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계급이나 민족, 젠더 문제는 이전보다 복잡하고 풀기 힘든 양상을 띠고 있다. 이제 평론가는 작품성뿐만 아니라 대중의 욕망을 사회적 맥락에서 짚을 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과속스캔들」과 같은 평범한 영화를 왜 800만이나 관람하는 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영화가 현재의 어떤 문화적 욕망과 맞아 떨어진 것인지 논의해야 한다. 영화평론은 영화텍스트를 기반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영화라는 현실사회의 반영이자 또 다른 2차 가공의 세계를 놓고 다른 차원의‘가치투쟁’에 임해야 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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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은 어디로 가야하는가&#160;&#160;&#160;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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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창: 문학의 경우 창조적 글쓰기로서 평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열려야 한다. 또한 평론계 내부에서 인사이더들과 아웃사이더들의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지는 열린 구조가 필요하다. 건강한 저널리즘의 확립과 평론 웹진의 모색도 필수적이라고 본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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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이정: 평론가가 장기적 안목을 갖고 평론에 임한다면 평론은 충분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평론의 위기는 시류에 맞춰 말을 바꾸고 평론 양극화를 방관한 데에서 발생했다. 교과서적 답 같지만 이해관계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 그리고 글쓰기의 진정성을 일관되게 지켜나가는 것. 그것이 평론 위기의 극복 방안이다. 미술의 경우는 아직 웹진을 논할만큼 독자나 미술인의 수준이 탄탄하지 못하다. 1990년대 후반 한국 화단에서도 웹진이 시도된 바 있지만 거의 고사 상태다. 인터넷이 유용한 미디어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2009년 현재 미술평론에서 주요 담론을 유도하는 데 긍정적 역할 모델이 될 거라 보지는 않는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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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흠: 한국 대중음악을 중심으로 다루는 음악 전문지가 오프라인에서 있었던 적은 없다. 온라인의 경우 현재 독립 웹진이 4개가 존재한다. 인터넷이 만들어지면서 대중음악 평론계에서는 인터넷의 수혜가 막대했다고 할 수 있다. 독립웹진은 사무실, 유통망이 없어도 된다는 점에서 비용을 절대적으로 줄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소수의 전문 인력이 적은 비용으로 독자들과 직접 대면할 수 있기 때문에 긍정적이다. 그러나 음악평론 웹진의 역사가 거의 10년 가까이 돼 가는데 4개에서 더 이상 늘어나지는 않고 있는 상황인 것이 안타깝다.&#160; 인터넷 포털들에 의해 문화적 취향이 획일화되는 상황에서 음악평론 전문 웹진은 매우 긍정적이라고 본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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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미: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영화평론은 돈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차라리 돈과는 전혀 무관한 자세로 글을 써야 하지 않을까. 평론가는 영화평론이 실릴 지면을 찾아 나설 것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매체를 통해 자기 견해와 입장을 풀어낼 필요가 있다. 영화평론가의‘그들만의 리그’는 결국 사멸하고 말 것이다. 다양한 분야에 관해서 담론을 쏟아낼 필요가 있다. 이제 영화평론은 TV 다큐멘터리나 뉴스클립, 드라마, CF를 포함한 광고영상물, 인터넷 동영상 등 일상적인 영역으로 그 범위를 확대하여 영상이 현실에 개입하는 방식에 대해 그 미학적, 정치적 의미를 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lt;끝&gt;<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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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위기의 평론, 미래를 말하다 (대학신문 2009년4월6일)|작성자 반이정<br />
]]></description></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일제고사 거부 중징계에 대한 민변성명 </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2475997</link><pubDate>Tue, 23 Dec 2008 11:5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2475997</guid><description><![CDATA[성명<br />

&#160;&#160;서울시교육청은 10일 “9일부터 열린 교육공무원 일반징계위원회에서 ‘일제고사’에 반대해 학생들의 <br />
<br />

야외 체험학습을 허용한 초등교사 6명과 중등교사 1명이 국가공무원법상의 성실·복종 의무 등을 어긴 <br />
<br />

것으로 결론냈다”며 “이들 가운데 3명은 파면, 4명은 해임을 결정하고, 사립 중학교 교사 1명에 대해서<br />
<br />

는 해당 학교재단이 자체 징계를 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br />
<br />

&#160; <o:p></o:p><br />
<br />

&#160;<br />
<br />

이는 지난 10월 실시된 일제고사 때에 편지를 보내 학부모와 학생의 의견을 묻고, 희망자에게는 체험학<br />
<br />

습등 대체교육프로그램을 허락한 교사들에게 파면&#160; 해임 등 중징계를 내린 것으로 전교조 교사들이 무<br />
<br />

더기로 중징계를 받은 것은 전교조 합법화 이전인 1980년대 ‘대량 해직 사태’ 이후 처음이다. <br />
<br />

&#160; <o:p></o:p><br />
<br />

&#160;<br />
<br />

그러나 해당 교사들은 정기고사가 아니고 교육청과 교원노조의 단체협약상 표집학교에 대해서만 실시<br />
<br />

할 수 있게 되어 있는 학업성취도평가가 전국 단위로 일제히 실시된 것에 대하여 그 합법성이나 합목적<br />
<br />

성이 의심되고 어린 나이부터 성적지상주의와 경쟁스트레스에 노출되는 것에 대한 염려 등 국민여론이 <br />
<br />

분분한 것을 고려하여 각 가정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활동을 안배한 것일 뿐이므로, 서울<br />
<br />

시교육청이 징계의 사유로 밝히고 있는 성실의무와 복종의무위반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br />
<br />

&#160; <o:p></o:p><br />
<br />

&#160;<br />
<br />

헌법 제31조 교육을 받을 권리에는 학부모와 아동의 교육선택권이 포함되어 있고, 초. 중등 교육법 제18조 <br />
<br />

제4항은 헌법과 국제인권조약에 명시된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고 있으며,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아동에게 <br />
<br />

본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할 권리를 규정하고 있는 바, 교육청의 <br />
<br />

인권조약과 단체협약을 무시한 전국 단위의 학업성취도평가 일제실시와 학부모와 아동의 의사에 따라 일제<br />
<br />

교사 대체 교육프로그램을 실시한 교사들에 대한 중징계는 그 처분의 위법성을 면하기 힘들다고 할 것이다. <br />
<br />

&#160; <o:p></o:p><br />
<br />

&#160;<br />
<br />

설사 교육청의 처분자체는 위법하지 않다 하더라도 그동안 교육청이 성추행과 금품수수 등 각종 비리를 저지<br />
<br />

른 교원에 대해서는 대부분 경징계를 내려온 점, 예전 국가단위 진단평가에서 전면적으로 시험을 거부한 교사<br />
<br />

에게 내려진 징계처분이 감봉 1개월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이번 파면, 해임 등 중징계처분은 비례성의 원칙과 <br />
<br />

재량권의 한계를 일탈했다고 할 것이며, 전교조 압박 등 다른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었는지를 의심하는 바이다. <br />
<br />

&#160; <o:p></o:p><br />
<br />

&#160;<br />
<br />

이번 일제고사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응이 수용적 여론과 비판적 여론이 분명히 함께 존재했던 만큼, 현장교사가 <br />
<br />

이 두 여론을 함께 반영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는 이유로 해당 교사들에게 더 이상 교원으로 남아 있을 수 없는 <br />
<br />

가혹한 처분을 하는 것은 다양성을 존중하고 민주주의를 가르쳐야할 교육당국의 자세가 아님이 자명하다고 할 것<br />
<br />

이며, 이에 중징계의 철회를 촉구한다.&#160;<br />
&#160;
&#160;
&#160;
<br />

<h1>&#160;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jinbo_media_24&amp;nid=50935&#160;</h1>
&#160;
&nbsp;
<h1>‘유엔교육노벨상’ 받았다는 공정택&#160;</h1>
<h1>&#160;</h1>
<h1><br />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쌈 싸 먹었나</h1>
<br />
<h2>부모의 자녀 교육 우선 선택권 보장 ‘세계인권&#160;</h2>
<h2>선언’도 무시</h2>
<br />
&#160;
<br />
최대현 기자&#160;juleum@ktu.or.kr / 2008년12월23일 6시51분<br />
<br />
<br />
<br />
<br />


    
        
            
        
        
            일제고사 관련 파면, 해임을 당한 7명의 교사는 지난달 10일 일제고사를 치르는 과정에서 서울시교육청에게 학부모와 학생, 교사가 인권침해를 당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했다. 최대현 기자
        
    

<br />
일제고사에 대한 학생과 학부모에게 선택권을 줬다는 이유로 7명을 파면, 해임한 서울시교육청의 행태는 세계인권선언은 물론 유엔아동권리협약까지 뭉갠 것으로 확인돼 비판의 목소리가 더욱 거세지고 있다.<br />
<br />
<br />
이번에 중징계를 당한 7명의 서울 교사들은 지난 10월14일과 15일 이틀에 걸쳐 진행된 일제고사를 앞두고 학부모에게 ‘담임편지’를 써 일제고사를 포함해 체험학습 등 다른 교육 과정도 알려 학생과 학부모가 ‘선택’할 수 있게 했다.<br />
<br />
<br />
그리고 그 선택을 존중해 일제고사 당일 체험학습 등 다른 교육 과정을 인정했다.<br />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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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선택 보장 ‘아동권리협약’ 뭉갠 서울시교육청 ‘불법’ <br />
<br />
<br />
하지만 서울시교육청(교육감 공정택)은 이를 “학교장의 결재를 받지 않은 채 가정통신문을 발송해 학부모들에게 자녀들을 평가에 불참하도록 유도했다”고 해석했다. 학부모와 학생의 선택을 인정하지 않은 셈이다.<br />
<br />
<br />
그러나 이는 지난 1989년11월20일 유엔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한 유엔 아동권리협약(CRC, Convention on the Rights of the Child)을 어긴 것이다.<br />
<br />
<br />
아동권리협약 12조에는 “당사국은 자신의 의견을 형성할 능력을 갖춘 아동에게는 본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할 권리를 보장하고 아동의 나이와 성숙도에 따라 그 의견에 적절한 비중을 부여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br />
<br />
<br />
또 6조에는 모든 아동이 생명에 관한 고육의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아동의 생존과 발달을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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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
정부는 지난 1991년 아동권리협약을 비준해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적용했다. 이렇게 보면 사실상 서울교육청은 불법을 저지른 셈이다.<br />
<br />
<br />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이미 지난 2003년 제26차 회기에서 “위원회는 매우 경쟁적인 교육시스템이 아동 잠재성의 최대한의 발전을 저해할 위험이 있다는 위원회의 우려를 반복한다”고 남한 정부에 권고한 바 있다.<br />
<br />
<br />
공정택 서울교육감은 지난 7월 서울교육감 선거 기간에 단순 등록단체인 곳을 유엔 산하단체라고 하고 인증서를 상으로 표현해 ‘유엔 산하 세계평화교육자국제연합(IAEWP) 아카데미 평화상-교육노벨상’을 받았다고 알린 바 있다.<br />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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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권선언 60주년 날 무시한 ‘부모 자녀 교육 우선 선택권’ <br />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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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함께 이번 징계는 1948년 12월10일 유엔총회에서 제정한 세계인권선언도 무시했다는 지적도 나온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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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
세계인권선언 제26조 세 번째 항목을 보면 “부모는 자기 자녀가 어떤 교육을 받을지 ‘우선적으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돼 있다.<br />
<br />
<br />
7명의 교사에게 중징계 결정이 전해진 날이 공교롭게도 지난 10일로 세계인권선언 60주년 된 날이어서 서울교육청에 더욱 싸늘한 시선이 머문다<br />
<br />
<br />
해임된 서울 유현초 설은주 교사는 “전국 일제고사는 아이들의 최상의 이익뿐 아니라 발전의 권리도 보장하지 않고 있다. 아이들의 의견이 존중받을 권리는 완전히 무시당했다”며 “국제협약에 대한 법적인 효력까지 외면하고 학부모의 교육권과 학생들의 인권을 억압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br />
<br />
<br />
이러한 이유 때문에 7명의 교사에 대한 중징계는 부당하다는 학부모와 학생, 시민 등의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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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치 않은 시험 강요 독재정권에서나 가능 <br />
<br />
<br />
정경희 평등교육실현을위한전국학부모회 사무국장은 “이들 교사들이 체험학습 신청서를 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학부모들의 요구에 근거한 것”이라며 “이는 상식적인 요구이고 민주시민으로서의 권리였다. 도대체 원하지 않는 시험을 강요하는 것은 독재정권 말고 어디서 가능하겠는가”라고 말했다.<br />
<br />
<br />
백승헌 민주사를위한변호사모임 회장은 “학부모와 아동의 의사에 따라 일제고사 대체 교육프로그램을 실시한 교사들에 대한 중징계는 그 처분의 위법성을 면하기 힘들다고 할 것”이라며 “더 이상 교원으로 남아 있을 수 없는 가혹한 처분을 하는 것은 다양성을 존중하고 민주주의를 가르쳐야 할 교육당국의 자세가 아님이 자명하다. 중징계를 철회해야 한다”고 밝혔다.&#160;
&#160;
&#160;]]></description><image><url>http://news.eduhope.net/data/media-50/photo/5/10741/포맷변환_제목_없음.jpg</url><link>http://blog.aladin.co.kr/vara/2475997</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홉스의 국가론, 한국의 국가폭력</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2469291</link><pubDate>Sat, 20 Dec 2008 01: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2469291</guid><description><![CDATA[2008. 12. 19. 경향신문 <br />
<br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12181756545&amp;code=990000<br />
<br />
홉스의 국가論, 한국의 국가폭력<!-- TITLE END -->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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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초기 영국의 철학자였던 홉스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해 늑대와 같아서 그대로 내버려두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인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지킬 수 없다. 이런 자연적 전쟁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통해 인간의 폭력적 공격성을 제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때로는 국가라는 것이 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성가신 존재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까닭도 타자의 폭력으로부터 나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가라는 울타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대로 이것이 홉스의 생각이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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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국가이론은 서양에서는 어떨지 모르나 적어도 한국에서는 잘못된 이론이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는 다른 사람의 폭력이 아니라 국가의 폭력이야말로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요인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행패를 부리지 않으면 개인의 삶이 훨씬 더 평화롭고 조화로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국가기구는 시민을 적으로 삼아 야만적인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시민들 사이의 전쟁상태를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국가기구와 시민공동체 사이에 전쟁상태를 스스로 조성해 왔던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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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권리 지키는 울타리<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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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국가와 시민공동체 사이에 불화가 없는 나라는 없다. 왜냐하면 국가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 역시 특정한 개인들인 까닭에 다른 사람들과 이해관계가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충돌하는 이해관계가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조정되는 한에서 국가는 정치적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 나라 안에서 자기와 이해관계가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대등한 시민으로서 인정하지 않고 폭력으로 억압하려 하거나 적대적으로 말살하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런 경우 만약 국가기구가 표면적으로라도 다수의 이익을 대변한다면 소수자들을 희생양 삼는 파시즘적 전체주의가 득세하게 된다. 하지만 국가기구가 소수의 이익을 위해 대다수 국민을 적으로 몰아간다면 그 때는 국가기구와 대다수 시민공동체 사이에 전쟁상태가 초래될 수밖에 없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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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이 서양 나라들의 병리현상이라면 우리나라에서는 국가기구와 시민공동체 사이의 전쟁상태가 수백 년 이래 나라의 불치병이었다. 왜냐하면 국민 모두의 공공적 이익이 아니라 자기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국가권력을 사유화하는 것이 이 나라 지배계급의 집요한 습속이기 때문이다. 공공적 이익을 지키는 데는 지극히 무능하면서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탐욕은 상상을 초월하는 자들이 이 나라의 상류층인데, 이들은 자기들의 그런 무능과 탐욕에 대한 시민들의 비판을 틀어막기 위해 다시 국가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국민의 마음에 원한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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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테면 자동차를 몰고 촛불집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운전면허를 취소하여 가난한 장애인 부부의 생계를 막거나, 일제고사에 반대했다 하여 여러 명의 교사들을 한꺼번에 해고하는 것이 모두 그런 권력 남용이라 할 수 있다. 사소한 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당사자에게 이런 일은 생존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폭력이다. 그런데 이런 만행을 법의 이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는 것이 한국의 권력집단인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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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을 짓밟은 권력 남용<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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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는 동학농민전쟁에서부터 가까이는 87년 6월항쟁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에서 20~30년 만에 한 번씩 엄청난 봉기가 나라를 뒤흔들고 때때로 국가기구를 전복시켜온 까닭도 바로 이런 야만적인 국가폭력 때문이다. 권력집단이 동료시민을 적대시하고 법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크고 작은 폭력을 행사할 때 그들은 이를 통해 시민 봉기의 에너지를 스스로 축적하게 된다. 그리고 때가 되면 씨알들의 분노는 지진처럼 대지를 뒤흔들고 썩은 권력의 성채를 허물어 버리는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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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봄, 여름 이 나라를 밝혔던 촛불은 명백히 그런 지진의 전조였다. 머지않아 그 전조는 현실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겨울이니 가난한 우리는 서로의 체온으로 이 추위를 견디자.<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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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김상봉 | 전남대 교수·철학&gt;<!-- BODY END -->&#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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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블로거 뉴스 위젯 --><!-- 테마 가이드 코멘트 -->]]></description></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랑시에르 인터뷰들</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2436017</link><pubDate>Wed, 03 Dec 2008 02:2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2436017</guid><description><![CDATA[&lt;민주주의와 인권&gt;을 주제로 한, 랑시에르의 강연 보고 왔다. 아니 사실 늦게 도착해서 강연은 못 듣고 질의응답만 들었다. 다소 아스트랄한 느낌의 질문들도 있었고, 통역을 맡은 박기순 샘이 약간 당황하는 듯도 했지만, 아무튼 한 시간 여 정도 질의응답이 진행되었다. 강연장에 사람들이 꽉 들어차서 놀랐고, 이 사람들이 왜 이런 '좌빨' 철학자에게 관심을 갖는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뭐 그래도 대부분은 프랑스산에 대한 경박한 환호와 맹목적 추종이 아닌, 진지한 관심에서 보러 온 거 같았다. 보니까 한겨레와 경향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예전에 하버마스 방한 때&#160;동아와 조선 등에서 인터뷰했던 일이 어렴풋이&#160;기억난다.&#160;아무튼 다음은 인터뷰 몇 개&#160;퍼온 것. &#160;

연합뉴스(08. 12. 02) &lt;인터뷰&gt; 자크 랑시에르 파리8대학 교수<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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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서 사람들 간의 불화와 불일치는 필연적입니다."<br />
세계적 정치철학자이자 미학자인 자크 랑시에르(68) 파리8대학 명예교수는 2일 서울대에서 가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160;한국을 처음 방문한 랑시에르 교수는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건 '합의'보다 '불일치'라고 말했다.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지만 이는 민주주의에서 합의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합의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권력을 가진 자들이 불법노동자, 이민자 등 약자들과 합의할 수 없는 지점까지 끊임없이 소통하고, 대화하라는 말이다. '불일치'가 소통을 통해 계급 간의 '일치'를 보는 것. 그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합의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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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랑시에르 교수와의 일문일답.<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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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서 '합의'보다는 '불일치'가 더 바람직하다고 말씀하셨는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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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이 보고,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정치의 토대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불화와 불일치는 필연적이다. 모든 사람의 이익이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민주주의 개념에서 '합의'라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다양성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즉, 우리가 허용할 수 없는 주장들까지 터놓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동질적인 세계를 구축하려는 방편으로 타자와 대화를 시도한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들이 가진 권력'은 주류 질서 속에서 배제되는 권리까지 논의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정치의 바탕이다. 토론이나 합의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건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경계를 넘어선 주장들을 어떻게 수용하는 가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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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은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 능력의 의미는 무엇인가. 교육을 통한 능력인가.<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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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적 능력은 학문적, 과학적 사실의 문제가 아니다. 교육을 받건 받지 않건 누구나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명령하는 사람이 있으면 명령을 따르는 사람이 있다. 명령을 따르는 사람은 명령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에 명령을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명령자와 명령받는 자가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얘기다. 또 교육이라는 건 다양한 종류의 학습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다. 우리는 지식을 학교 안에서 배울 수도 있고, 학교 밖에서도 배울 수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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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촛불집회를 필두로 대의제 논란이 확산됐었다. 그때 민주주의의 위기, 희망론이 분분했는데, 현대 사회에서 지적되는 대의제 위기에 대해서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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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제란 모순적인 개념이다. 일단 사회.경제적으로 힘을 가진 사람들이 실시한 제도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하위주체들의 수많은 투쟁을 통해 보완 수정된 제도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버려야 할 제도는 아니다. 내가 강조하는 건 대중들의 직접적인 행위가 정치에 구현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역사적 산물로서 축적된 대의제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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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의 말처럼 '벌거벗은 자'(약자라는 의미)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세계화의 파고 속에서 상대적으로 더 소외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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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도 정치적으로 주체가 될 힘과 능력이 있다는 점이 나의 일관된 주장이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에게 인도주의라는 명목하에 뭔가를 주자는 게 아니다. 이미 벌이고 있는 투쟁, 이를테면 불법이민자의 투쟁에 변호사들이 합류하는 것과 같은 연대를 말하는 것이다. 그건 도움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싸움에 동참하는 것이다. 함께하고 연대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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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발목을 잡는 철도, 지하철 파업" 같은 논리는 부적절한가.<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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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말하지만 중요한 건 연대다. 해결책은 파업주체와 시민사회가 연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1995년에 프랑스에서 있었던 파업에서 실질적으로 파업 주체들과 시민들 사이에 연대성이 공유된 경험이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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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였던 오바마 당선이 미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이라 보나.<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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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변화를 가져다줄 것이라 믿는 건 과한 생각이다. 하지만 오바마의 당선은 미국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또 줄 것이라고 믿는다. 인종주의적 정책이 잔존하고, 복음주의, 신보수주의가 상종가를 치는 상황에서 오바마의 당선은 미국의 이 같은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또 인종주의의 역사가 오래된 미국이 이제 흑인 대통령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미국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줄 것이라 본다. 그렇다고 '기적'을 기대하는 건 아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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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처음 방문했는데 어떤가.<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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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잘 모르겠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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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는 교수는 1940년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1970년대 자신의 스승이었던 루이 알튀세를 엘리트주의자라고 비판하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후 한동안 침체기를 겪던 그는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자신의 정치사상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불화' 등을 출판하며 다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현재 세계 철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학자 중 한 명이며 저서로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1990), '역사의 이름들'(1992), '감성의 분할'(2000) 등 정치철학, 미학, 역사학 관련서들이 있다.(송광호기자)<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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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08. 12. 03) 자크 랑시에르 “비정규직 노동운동이 새 정치의 희망”<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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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한국을 찾은 자크 랑시에르(68) 파리8대학 명예교수는 정치와 평등, 민주주의에 관한 독창적 사유로 주목받는 프랑스 철학계의 거목이다. 그는 1일 진태원 고려대 연구교수(철학)와의 대담에서 “진정한 정치는 사회에서 주변화되고 배제됐던 사람들이 새로운 통치 주체로 참여하는 과정”이라며 “경제위기로 삶의 불안이 심화하는 지금이야말로 정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삶의 불안정화에 맞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운동이야말로 한계에 직면한 조직 노동운동을 대체할 새로운 정치의 희망”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대담은 주한 프랑스문화원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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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태원(이하 진)=지구상의 모든 정부가 민주정부를 표방하면서, 민주주의는 어느 순간 진부한 것이 돼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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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랑시에르=사람들은 대의제와 인권을 민주주의의 핵심요소로 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민주주의는 인민이 가진 권력 자체다. 그것은 (국회의원처럼) 인민의 대표를 자임하는 자들이나, 사회적으로 그 존재를 인정받은 집단들이 행사하는 권력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대의제를 통해 인민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기성의 시스템을 넘어서려는 힘이며, 배제되고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사람들이 정치적 주체가 돼 통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상치 못했던 시간에,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주체들이 공적인 문제들을 결정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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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최근 한국에도 출간된 &lt;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gt;란 책에서 당신은 ‘치안’과 ‘정치’를 엄격히 구분한다. 그 차이는 어떤 것인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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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사실 그 개념들은 정치에 대한 기존의 관념들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임시방편으로 사용했던 것들이다. 사람들은 보통 정치를 ‘국가가 사회를 경영·관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나는 이것을 정치가 아닌 치안이라고 본다. 치안은 공동체를 조직하기 위해 구성원들에게 고정된 자리와 정체성을 배분하는 작업이다. 이런 치안의 논리를 문제삼고, 여기에 새로운 집단성을 개입시키는 활동이 정치다. 말하자면 정치는 부·지식·가문 같은 자산의 크기에 따라 사회를 분할하는 치안 논리에 맞서, 어느 누구나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그 능력을 가지고 통치과정에 참여하게 만드는 활동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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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당신의 사상에서는 데모스(demos), 인민(people)이란 개념이 중요하다. 지난여름 한국에서는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며 대규모 촛불시위가 벌어졌다. 여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당신이 얘기하는 인민인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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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내가 말하는 인민이란 주민의 총합이 아니라, 어떤 사건을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고 투쟁하는 사람들이다. 흔히 생각하듯 정치적인 것이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란 정치적인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문제조차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고, 그 문제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집단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생명·건강처럼 비정치적인 것으로 보이는 문제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온 한국인들은 진정한 의미의 인민이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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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입 철회 조처가 없었음에도, 대통령이 나서 사과한 뒤 촛불시위는 눈에 띄게 약해졌다. 시위가 가라앉자 정부는 주동자를 구속했고 사과 자체를 부정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선 촛불시위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고 불평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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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운동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려면 처음 내걸었던 요구가 충족됐는지, 또 사회적 세력관계가 운동을 통해 변화했는지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2006년 프랑스에서는 정부의 최초고용계약제(CPE)에 반대하는 시위가 장기간 지속됐다. 정부가 결국 정책안을 철회했지만, 과연 이 시위가 성공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문제는 정부가 양보한 뒤 거리의 정치공간은 닫혔고, 운동은 무장해제됐다는 점이다. 요구안의 즉각적 성취를 넘어, 사회의 독점적 합의체제에 얼마나 균열을 일으켰는지가 중요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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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계적 경제위기는 전체 노동자의 50%를 넘어선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에 직격탄이 되고 있다. 당신의 민주주의론이 비정규직 노동을 포함한 사회문제를 새롭게 사고하는 데 실마리가 될 수 있을까.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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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비정규직 노동은 한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보호 시스템이 있느냐 없느냐에 상관 없이 노동자의 신분은 전반적으로 불안정해지고 있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조직화된 노동운동의 역할을 강조했을 것이다. 그런데 조직 노동운동처럼 동질적 계급 이해에 기반한 운동은 쇠퇴하고 있다. 이 때문에 네그리같은 학자는 ‘비물질노동’이란 개념을 통해 정규 노동시장에 편입되지 않은 서비스·비정규직 노동자 집단의 존재에 주목하기도 한다. 민주주의의 확장이란 차원에서도 지금의 시스템에서 일정한 권력 지분을 갖고 있는 전통 노동운동보다, 주변화되고 배제된 이 노동자들을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구성하는 일을 고민해야 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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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과정에서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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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주어진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탈정체화’를 정치의 출발로 규정한다면,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사실상 없다. 지식인들은 주어진 자리를 분배하는 데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인/비지식인, 전문가/비전문가, 전공자/비전공자의 구분과 차별을 깨뜨리는 것이다.(정리 이세영 기자)<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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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08. 12. 03) "해방은 인민의 주체적 역량으로만 가능”<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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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 파리8대학 명예교수(68)가 지난달 30일 프랑스문화원 후원으로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그는 현재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 등과 함께 프랑스 사상계를 이끌고 있다. 2일 서울대를 시작으로 홍익대·중앙대에서의 공개 강연을통해 한국 독자들을 만나는 랑시에르 교수를 지난 1일 만났다. 그의 저서 &lt;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gt;의 번역자이기도 한 양창렬씨(31·파리1대학 박사과정)가 대담자로 나섰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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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세대의 프랑스 사상가들에 비해 뒤늦게 주목 받는 이유는.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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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대의 이론적 토론에 개입하거나 다른 사상가들과의 차이 속에서 개념을 만들어내기보다 자신의 길을 걷는 작업을 해왔다. 1970년대 10여년 동안 19세기 노동자운동의 문서고를 뒤지면서 정치와 미학에 대한 생각들을 마름질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왜 그런 논의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는 명확한 철학적 체계를 세우거나 일반적인 언표들을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1992년쯤 &lt;불화&gt;의 근간이 되는 강연들을 하는 과정에서 정치에 대한 체계화된 설명을 내놓자 사람들은 내가 하는 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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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성적 사유가 요구되고 있다. 당신이 보는 신자유주의의 문제점과 대안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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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는 시장이 세계적인 수준에서 모든 관계를 자기조절할 수 있다는 통합된 자본주의에 대한 유토피아를 가리킨다. 그것은 사회적 연대 체계를 파괴하고, 이윤을 위해서라면 전통적인 모든 관계를 소환하려는 의기양양한 유토피아였다. 하지만 오늘날 경제 위기는 시장이 자기조절을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 위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국가가 개입함으로써 시장 논리와 국가 개입의 논리는 다시 평형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듯하다. 그렇다고 그것이 자동적으로 새로운 대안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경제 위기가 그 자체로 새로운 세계의 편성에 아무 것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안토니오 네그리나 마이클 하트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본주의의 발전이나 위기가 해방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기존 질서와 단절하는 인민의 주체적 역량을 통해서만 해방이 가능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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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촛불시위나 비정규직 문제 등을 통해 새로운 정치적 주체에 대한 논의들이 진행되고 있다. 당신이 말하는 ‘배제된 자들의 정치적 주체화’와 맞닿는 것 같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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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예술 분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운동의 예를 들어보자. 그들은 작품에 참여하는 기간이 아니면 장시간 실업 상태다. 프랑스에는 그들을 위한 사회보장체계가 있다. 정부는 그 체계를 개혁해 그들의 권리를 축소하려 했다. 이에 맞서는 운동은 두 상반된 논거에 사로잡혔다. 한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국가나 시민들에게 중요한 문화의 일익을 담당하는 만큼 보상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반대되는 논거에 따르면, 그들은 스스로를 문화나 예술에 종사하는 특수한 노동자가 아니라 오늘날 일반화되고 있는 불안정하고 단속(斷續)적인 노동조직화를 증언하는 자로 내세웠다. 그들은 노동시장구조에서 노동과 실업의 경계에 있는 자들, 그렇기 때문에 쉽게 사회학적으로 정체성을 부여할 수 없는 자들이다. 이처럼 노동과 실업의 경계, 한계점, 틈새에서 노동과 시간을 다른 식으로 활용하는 방식에서 정치적 주체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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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흔히 정치라고 부르는 것을 치안이라고 칭하면서 그에 대립해 정치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했는데.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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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조직에 대해 사유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치안이란 공동체 내에서 각자에 맞는 자리, 직무, 정체성들을 자연적으로 분배하는 일종의 총체성이다. 곤봉이나 총을 든 경찰은 치안 논리의 결과에 불과하다. 치안 질서에서는 출생, 부, 나이, 지식, 종교 등이 통치를 하기 위한 자격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그것은 대개 과두정치나 전문가들의 통치로 귀결된다. 반면 정치는 치안 논리에 따라 정해진 사회 집단의 정체성으로부터 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주체인 ‘인민’은 사회학적으로 식별가능한 집단이나 주민들의 총합이 결코 아니다. 정치란 오히려 각자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분할에 맞서 하나의 ‘보충’으로서 공통적인 것에 참여하는 인민의 힘을 가리킨다. 정치는 정부 또는 선거 같은 대의 체계를 뛰어넘는 활동이 벌어지는 도처에 존재한다. 민주주의란 통치할 자격이나 능력이 없다고 간주되던 자들이, 모두에게 속한 통치할 수 있는 역량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반대로 민주주의를 합의를 실행하는 국가 형태나 특정한 사회적 삶의 형태로 간주하는 것은 정치를 제거하는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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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은.<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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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lt;해방된 관객&gt;을 출간했다. &lt;민주주의에 대한 증오&gt;의 다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의 전통 좌파는 반민주주의적이었다. 지배를 이데올로기의 필연적 강제·부과라고 보았던 그들은 관객이 영상, 광고, 이미지 등에 속고 소외되는 멍청이들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또한 외양 뒤에 숨겨진 현실이 있으며, 그것을 전문가들이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lt;무지한 스승&gt;에서 검토한 바 있듯이, 위의 관점은 지능의 불평등에서 출발해 불평등의 간격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은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거리를 계속 유지하는 불평등의 고리에 빠지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지능의 평등에서 출발해 관객들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능력을 주장해야 한다고 본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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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랑시에르<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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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파리8대학에서 1969~2000년 미학과 철학을 가르쳤다. 루이 알튀세르가 제자들과 함께 펴낸 &lt;‘자본’을 읽자&gt;(1965)의 공저자였지만 68혁명을 경험하면서 알튀세르주의자들의 ‘앎과 대중의 분리’에 반대하고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그는 민주주의나 평등 등 현대 사회가 선전하는 가치들이 일부 구성원을 배제한다고 비판하면서 본래의 정치란 ‘배제된 자들의 주체화’에 있다고 말해왔다. &lt;무지한 스승&gt; &lt;역사의 이름들&gt; &lt;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gt; &lt;불화&gt; &lt;감성의 분할&gt; 등의 저서가 있다.(정리 김진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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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학은 감각적 경험을 분배하는 체제다”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는 어떤 자격과 능력을 갖춘 자들이 통치하는 특정한 정치제도를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다. 정치를 구성하는 원리 자체다. 불화는 그러한 정치의 조건이다. 랑시에르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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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호] 2008년 12월 09일 (화) 11:23:04
                        정리·박근영 기자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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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IN 윤무영자크 랑시에르(오른쪽)와 최정우씨(왼쪽)의 대담이 12월2일 주한 프랑스문화원에서 있었다.
                    
                
            
            자크 랑시에르를 접할 때 사람들은 개인의 지적 배경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는 사회에서 통용되던 언어를 새롭게 사유한다. 이를 바탕으로 이끌어낸 그의 이론은 기존 사상적 영역을 넘나들고 개개인의 생각의 폭을 넓혀준다.&#160; 랑시에르에게 미학은 단순히 미와 예술에 대한 이론이나 학문이 아니다. 그는 “회화·연극 등 예술적 실천과 그 생산물들은 사실 ‘무엇이 감각되고 지각될 수 있는가’ 하는 사회적 분배의 행위와 연관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즉, 미학은 정치와 밀접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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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의 마지막 달, 한국을 방문한 독특한 철학자 랑시에르에게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이번 대담을 준비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요소다. 한국 민주주의 현실에 대한 진단이나 한국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언해달라고 부탁하지는 않기로 했다. 대담자로 나선 최정우씨는 “한국 상황에 기본적으로 어두울 수밖에 없는 랑시에르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다분히 일반론적 언급일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대담은 랑시에르가 생각하는 기본 논의를 최대한 잘 전달하는 데 집중했다. 현실에 대한 사유와 판단은 ‘독자 몫’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br />
            <br />
            최정우(최):당신은 합의에 기초한 민주주의라는 ‘안전한’ 관념을 비판하고 불화와 불일치를 민주주의와 정치의 근본 조건으로 강조한다. 당신이 비판하고 있는 합의에 기초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지 알고 싶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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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크 랑시에르(랑시에르): 소련 붕괴 이후의 민주주의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민주주의를 국가 형태 자체와 동일시하려는 경향’이다. 즉, 국가의 형태나 정부의 체제나, 자유시장, 소비사회, 자유로운 개인의 삶 등과 민주주의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이러한 것과 전혀 관계 없다. 민주주의는 특정한 인구 집단을 가리키는 말도 아니고 특정한 국가의 정치체제를 가리키는 말도 아니다.<br />
            민주주의란 단절과 틈을 가져오는 일종의 불일치 과정이다. 내가 민주주의에서 합의 대신 불화와 불일치를 강조하는 것은, 단지 민주주의가 다양한 의견의 갈등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합의라는 관념에 기초한 민주주의는 사회구성원인 우리 모두가 똑같은 경험을 공유한다는 잘못된 전제 위에 서 있다. 곧, 합의에 의한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일종의 ‘객관적 필연성’ 같은 것을 전제하고 있지만 내 생각은 반대다. 민주주의란, 그리고 정치란 불화의 지점이며 그러한 불일치들이 발현되는 순간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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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당신의 ‘미학’ 또는 ‘감성학’의 개념에 관심이 많다. 나는 당신이 ‘미학’의 개념을 새롭게 사유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을 높이 평가한다. 당신은 미학을 하나의 체제라 보는데, 이런 관점은 넓게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론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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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랑시에르:미학은 서양 근대에 출현한 새로운 예술철학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좀더 일반적인 층위에서 ‘감각이나 지각을 분배하는 하나의 정치적 체제’를 의미한다. 내가 생각하는 미학이란 무엇보다 이러한 ‘감각적인 것의 분배’와 관련 있다. 미학은 단순히 미와 예술에 대한 이론이나 학문이 아니다. 회화·연극 등 예술적 실천과 그 생산물은 사실 무엇이 감각되고 지각될 수 있는가 하는 사회적 분배의 행위와 연관되어 있다. 미학은 볼 수 있는 것, 들을 수 있는 것 등의 감각적 경험을 분배하고 해석하는 하나의 체제로서 존재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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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의 재현 중심 체제 안에서 중요했던 것은 예술의 창작과 예술의 감상 사이의 분리, 예술적 생산물과 그러한 예술에 대한 수용 사이의 분리였다. 내가 생각하는 미학은 또한 이러한 확정적인 분리와 이러한 분리가 만들어낸 예술의 자율성을 문제 삼는다. 미학이란 이러한 분리의 지점 위에 있는 이름이다. 이러한 미학적 체제 안에서 작가가 만드는 예술품과 그것을 수용하고 경험하는 관객 사이의 분리, 예술품을 여타의 다른 대상들과는 다른 자율적인 것으로 만드는 분리는 사라진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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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한국어 ‘미학’은 그 의미상 단순히 ‘미에 대한 학문’을 뜻하는데, 나를 포함한 많은 번역자들은 당신의 논의가 강조하고 있는 지점을 따라서, 이 ‘미학’이라는 번역어를 그 어원과 정치적 함의에 충실하게 ‘감성학’ 또는 ‘감성론’이라는 번역어로 치환하고자 노력한다. &lt;미학 내에서의 불만&gt;이라는 책에서 당신은 미학과 정치의 윤리적 전회를 다루기도 했다. 당신이 이 ‘미학’이라는 용어를 일종의 정치 범주로 사유하고자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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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IN 윤무영자크 랑시에르(68)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루이 알튀세르의 제자였던 그는 1965년 출간된 &lt;자본 읽기&gt;의 공동저자로서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68혁명이후 알튀세르의 엘리트주의를 비판하면서 독자적인 사유의 길을 걷는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정치철학·미학·역사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시각을 담은 일련의 저작을 출간했다. 한국에서 올해 &lt;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gt; &lt;감성의 분할&gt; &lt;민주주의에 대한 증오&gt;가 번역 출간되었다. 그의 주저인 &lt;불화&gt; &lt;무지한 스승&gt; 등은 번역 중이다. 이번 랑시에르의 방한은 도서출판b, 길, 궁리의 초청과 주한 프랑스문화원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랑시에르:그렇다. 나는 미학을 ‘동일시’의 체제로 이해한다. 미학적 경험은 예술의 제작과는 다르다. 내가 미학을 하나의 체제로 다루면서 예술의 제작을 의미하는 포이에시스(poiesis)와 그에 대한 감각을 의미하는 아이스테시스(aisthesis) 사이의 분리와 차이에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감성적 경험은 예술작품의 영역을 넘어선다. 따라서 내게 미학의 문제는 철학적 논의로부터 예술 또는 예술적 경험을 분리시키거나 해방시키는 데 있지 않다. <br />
            <br />
            나에게 미학은 정치적 잠재성의 영역이다. 예술은 그 자체로 독립적이거나 자율적인 실천이 아니다. 미학의 문제는 내게 언제나 정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미학에 대한 나의 관점은 기본적으로 합의와 불화에 대한 논의에 기초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또한 내가 강조하는 개념이 바로 ‘감각적인 것의 분배’다. 이는 감각적 경험들, 곧 볼 수 있는 것, 말할 수 있는 것, 사유할 수 있는 것을 누구에게 어떻게 분배하는가 하는 문제, 곧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다. 여기에는 항상 불화와 긴장이 존재한다. 미학에 대한 사유란 내게 이러한 긴장들이 지닌 논리를 사유하고자 하는 시도를 의미한다.<br />
            <br />
            최:그런 의미에서 미학에 대한 당신의 새로운 생각은 ‘정치적 전복’과 연결된다. ‘감각적인 것의 분배’는 당신의 이론적 작업 안에서 중심이 되고, 불가능성·이질성 등과 밀접하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미학의 개념을 근대 철학의 개념과 연결시키지만 당신은 ‘미학’을 ‘정치’와 마찬가지로 희랍적 어원에 관련해 분석하면서 그 의미에 대해 새롭게 사유하려 한다. 이런 작업이 당신의 이론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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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랑시에르:서양 철학은 언제나 그리스를 참고한다. 따라서 희랍적 개념들을 어떻게 번역하고 해석하며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참고하는 이유는 로고스, 데모스, 통치 따위 개념을 그 어원에서 새롭게 분석하고 그러한 개념들이 역사적으로 거쳐온 분절에 관해 새롭게 생각해보기 위해서다. <br />
            <br />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정치란 로고스를 가진 자들의 통치, 곧 어떤 자격과 능력이 있는 자들의 통치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관념에 대해서 새롭게 사유하고자 한다. 많은 논자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정치란 단순히 언어나 소통에 의거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란 통치할 자격이 없는 자들의 통치, 곧 평등 그 자체를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전제로 이해하는 정치적 사유를 말한다. <br />
            <br />
            최:정치에 대한 당신의 접근 방식은, ‘목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찾아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알다시피 2008년 한국에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집회가 있었다. 예를 들어 이러한 촛불집회에 비판적이었던 한 정치인은 이를 ‘천민민주주의’라는 신조어로 표현하기도 했다. 대의민주주의에 의해 선출된 그 정치인 스스로가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이 내게는 적잖이 충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느끼는 바나 몇 가지 첨언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된다.<br />
            <br />
            랑시에르: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단순히 그 문제와 관련된 전문가들만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특정한 정체성을 지닌 전문가 집단이나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무개·모든 이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공공 건강의 문제, 곧 공적 영역의 문제다. 정치적 주체화는 이렇듯 특정한 이슈로부터 시작해 그것을 공공의 이슈로 만들어내는 과정 안에서 발생한다. 정치적 주체는 특정한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에 의해서 미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주체화의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인민의 힘은 인민의 힘없음으로부터 출현하며, 이렇듯 몫을 가지지 못한 자들이 자신의 몫을 주장하는 과정 속에 정치적 주체화의 과정이 존재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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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IN 윤무영대담자로 나선 최정우씨(위)는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불문과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동시에 번역가이자 작곡가로 활동한다. 그는 이번 대담의 핵심 내용으로 ‘감각적인 것의 분배’를 꼽았다.
                    
                
            
            최:내가 과거 당신의 저작을 처음으로 접했던 것은 당신이 알튀세르 학파의 일원이었을 때의 글 &lt;비판의 개념&gt;이었다. 최근 정치와 미학에 대한 당신의 논의는 그러한 과거에 비해 매우 새롭고 이질적인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당신의 이론적 여정에 일종의 이론적 ‘단절’이 있었다고 할 수 있는가?<br />
            <br />
            랑시에르:알튀세르는 과학적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이데올로기론과 그에 따른 해방에 관한 담론에 중점을 두었다. 기본적으로 알튀세르는 지배가 무엇이고 착취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노동자들에게 가르쳐주는 교사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 그들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쓰고 사유하는가 하는 문제였다.<br />
            그람시에게 중요한 것이 상이한 정체성들 간의 헤게모니 문제였다면, 정치에 대한 나의 사유 안에서는 노동자 운동과, 노동자가 지닌 정체성의 문제, 프롤레타리아적 정체성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br />
            <br />
            최:그런 의미에서 &lt;프롤레타리아의 밤&gt;은 당신의 이론적 여정 안에서도 일종의 전환점을 이루면서 매우 각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듯하다. 노동자의 문서고, 곧 그들이 직접 쓴 기록들에 천착하는 작업은 여전히 중요하고 신선한 문제다. 특히 한국에서는 이주노동자 문제가 사회적으로 부각된 지 오래이다.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주는 작업은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가?<br />
            <br />
            랑시에르:자전적인 글 또는 대중·인민의 문화에 대한 글 등 이른바 노동자 문학 혹은 노동자들의 글쓰기는 그들만의 목소리가 표현되는 영역이다. 이러한 목소리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내게 매우 중요했다. 합의에 기초한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구성원이 모두 똑같은 목소리와 똑같은 언어로 이야기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만의 목소리를 듣는 작업과 그들의 목소리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는 불화와 불일치에 기초한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도 특히나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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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image><url>http://img.hani.co.kr/imgdb/resize/2008/1203/6000141591_20081203.JPG</url><link>http://blog.aladin.co.kr/vara/2436017</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랑시에르 강연</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2429372</link><pubDate>Sat, 29 Nov 2008 03:4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2429372</guid><description><![CDATA[<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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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160;구경갈 수 있을지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저녁 때 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래도 출판사들의 초청이라고 해서 강연집이 추후에 출간될 수도 있다고&#160;하니 뭐 못 가게 되더라도.. 근데 금요일은 통역이 없다나?&#160;그날은 HK 주최&#160;문명 포럼이라 박기순 선생님의&#160;스피노자와 데리다의 폭력론에 대한 발표도 있을 거라는 소문이 있다.&#160;다음은 요새 드문드문 읽고 있는 Julie Rose가 번역한 영역본 &lt;불화&gt;Disagreement의&#160;몇몇 밑줄긋기&#160;
&#160;
The party of the poor embodies nothing other than politics itself as the setting-up of a part of those who&#160;have no part. (14)
The foundation of politics is not in fact more a matter of convention than of&#160;nature, the sheer contingency of any social order. politics exists simply because no social order is based on nature, no divine law regulates&#160;human society.(16)
politics does not exist because men, through the privilege of speech, place their interest in common. politics exists because tthose who have no right to be counted as speaking beings make themselves of some account, setting-up&#160;a community....(27)
Political subjectification redefines the field of experience that gave to each their ships between the ways of doing,&#160;of being, and of&#160;saying that define the perceptible organization of the community.....(40)&#160;
politics is not made up of power relationships; it is made up of relationships between worlds.(42)
the inferior has understood the superior's &#160;order because the inferior takes part in the same community of speaking beings and so is, in this sense, their equal. In short, we can deduce that the inequality of social ranks works only because of the very equality of speaking beings.(49)
&#160;]]></description></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참세상)여성의 날 '축제'에 대한 유감</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1967772</link><pubDate>Sat, 08 Mar 2008 23:1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1967772</guid><description><![CDATA[올해로 벌써 100년이다. 100년. 아무리 알파걸, 골드미스가 운위되는 시대라지만 섣불리 여성상위시대 같은 헛소리를 말하기 전에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그대로인가는 생각해봐야한다.&#160;그냥 주위에 보면 대학에서 여성학 협동과정 등이 생기고 물론 극소수일지언정 여성주의를 다루는 수업들이 개설되고 있긴 하지만, 그걸 듣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다.&#160;게다가 학생회나 기타&#160;&#160;특히 여성모임&#160;등의 자치단위는&#160;요새 거의 개입력을&#160;가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니...&#160;누군가의 말처럼 초등학교 때부터 여성주의라는 과목을 만들어서 가르쳐야되나?&#160;물론 요원한 일이고 또 체제 내화의 위험 역시 없지는 않겠지만... 요새는 예비역으로서 생활습관이 종종 실생활에서 나타나는 나 역시 무언가 새로운 계몽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단지 기념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안 되겠지만, 그마저도 잊고 지냈던 무심함을 반성하면서... 참세상에서 관련 기사가 여럿 올라왔는데 그 중&#160;이꽃맘 기자의 글을 퍼온다.&#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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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1>여성의 날 ‘축제’에 대한 유감</h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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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3·8 100주년][기자의 눈] 함께 싸울 수 있는 여성의 날을 기대하며</h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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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꽃맘 기자&#160;iliberty@jinbo.net / 2008년03월07일 15시21분<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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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도 열 번은 족히 변했을 시간,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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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100년이다. 100년이면 강산이 열 번은 족히 변했을 시간이고, 보통 사람이라면 삶에서 겪을 수 없는 기간의 시간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많은 것들이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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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미국 트라이앵글이라는 피복회사에서 불이 났다. 146명의 여성노동자가 불에 타 죽었다. 그녀들은 거리로 나섰으며 “임금을 인상하라”, “하루에 10시간 만 일하게 해 달라”, “노조를 결성할 수 있는 자유를 달라”를 외쳤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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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후, 뉴코아-이랜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은,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은, 청소용역 여성노동자들은, 학교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의 70%를 차지한다는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조합 활동을 보장하라”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보장하라”고 외치고 있다. 100년이 지나도 그녀들은 여전히 거리에서 ‘인간’이 되기 위해 싸우고 있다. 변한 것은 없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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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160;참세상 자료사진 <!--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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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노동기구(ILO)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의 취업 여성 수는 지난 해 12억 명으로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10년 전에 비해 2억 명 이상 늘어난 수이다. 하지만 여성들의 일자리는 안정성이 떨어지고 급여가 낮은 직종에 몰려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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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국제노조연맹(ITUC)의 보고서에 따르면 동일노동 하에서 여성의 임금 격차는 세계적으로도 한국이 가장 컸다. 노동부의 ‘2007년도 사업체 근로 실태조사’에 따르면 여성노동자는 남성노동자의 64.8%의 임금을 받고 있었으며, 같은 정규직의 경우에도 남성 정규직의 66.5%의 임금만을 받는다. 빈곤을 탈출하기 위해 여성들이 취업전선에 나서고 있지만 이는 불가능하다. 100년 전과 변한 것은 없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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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축제’를 즐길 수 없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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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한 것 하나 없는 여성의 삶을 변화시키겠다며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다양한 행사가 준비되고 있다. 그러나 준비되는 행사의 모습은 너무나 다르다. 한 쪽에서는 ‘축제’를 벌이고, 한 쪽에는 ‘투쟁’을 준비하고.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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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bsp;&nbsp;-->[출처: 세계 여성의 날 100주년 기념 3.8 여성 축제 조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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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여성운동이라고 불리는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167개 단체는 ‘세계 여성의 날 100주년 기념 3.8 여성 축제 조직위원회’(3.8축제조직위원회)를 구성하고 8일, 서울시청 일대에서 ‘축제’를 벌인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도 이들과 함께 한다. 이들은 “여성, 새로운 공동체 세상을 열자”라는 제목을 걸었다. ‘새로운 공동체’의 가치는 “사람, 돌봄, 상생”으로 설명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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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이 아닌 사람을, 돌봄 노동에 대한 사회화를 이를 통해 모두가 함께 사는 ‘상생’하는 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이다. 물론 주류여성운동이 제시한 가치 하나하나를 두고 논쟁할 거리는 너무나 많지만, 왜 ‘축제’여야 하는가만 살펴보려 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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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축제조직위원회가 요구하고 있는 △비정규직 차별철폐, 최저임금 현실화 △성평등한 가족정책 실현, 보육의 공공성 강화 △통합적 인권교육 실시, 차별금지법 제정 △이주여성에 대한 차별반대 △여성장애인 고용할당제 강화 △식량주권 실현, 여성 농민의 사회적 지위 보장 등은 축제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명한 김미화 씨와 김성주 씨가 사회를 보고, 파랑, 보라, 녹색, 빨강으로 꾸민 퍼레이드 카를 앞세워 거리를 행진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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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투쟁도, 집회도 즐겁게 진행되어야 한다. 축제처럼 되어야 한다. 시민들과 함께 소리를 지르고,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함께 외치는 축제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주류여성운동이 준비하고 있는 이번 ‘축제’는 참가하는 단체들의 요구를 쭉 늘어놓고 유명한 연예인들 불러서 노는(?), 1908년 방직공장 여성들의 아픔과 2008년 비정규직 여성들의 싸움을 살아있는 기억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의 투쟁을 빛바랜 사진으로 액자 속에 넣어 ‘기념’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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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에서 한국여성노동자회는 “돌봄 노동자로 일하는 한부모 여성인 극중 주인공 강화자가 겪는 돌봄 노동의 스트레스, 한부모로서의 어려움, 비정규직 노동자로서의 어려움을 겪다가 투쟁으로 ‘무기계약’을 쟁취 한다”는 내용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마당극을 벌인다니 황당하기까지 하다. 무기계약은 정부에서는 ‘정규직’이라 떠들고, 노동계는 계약을 ‘무기’로 할 뿐 오히려 비정규직을 고착화시키는 수단이라고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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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160;참세상 자료사진 <!--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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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정치세력화’ 초점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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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결론은 ‘여성의 정치세력화’이다. 물론 4년 마다 한 번씩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라는 중요한 정치 일정이 있기 때문에 이는 반드시 짚어야 하는 문제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주류여성운동을 통해 나타난 ‘여성의 정치세력화’는 여성이 국회에 들어가는 것, 정치에 입문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지난 대선 박근혜가 유력한 후보로 떠오를 당시 이를 지지해야 하는 것이냐 아니냐를 두고 주류여성운동 내부에서 벌어진 논란은 이를 극명히 보여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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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세상의 절반이 여성이기에 정치든 무엇이든 간에 절반을 여성이라는 성이 차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를 가로 막고 있는 장벽은 모두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판검사가 되는 여성이 늘어나고 있다느니, 알파걸이라느니, 골드미스라느니, 여성상위시대가 왔다느니 세상은 떠들지만 여성의 삶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있는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이 정치세력화 된다는 의미는 단순히 많은 수의 정치인을 여성으로 배출한다는 의미를 넘어 정치를 ‘여성주의’로 재구조화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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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투쟁력을 확인하는 ‘세계 여성의 날’<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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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러시아 혁명가인 콜론타이가 쓴 글에서는 첫 번째 세계 여성의 날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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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세계 여성의 날 행사는 1911년에 열렸다. 성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여성의 날,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수많은 여성들이 쏟아져 나와 바다를 이루었다. 작은 도시 곳곳에서 회의가 열렸고, 마을의 강당을 가득 채운 여성들은 노동자들에게 자리를 내어줄 것을 요구했다. 이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력을 확인시켜 준 첫 계기가 되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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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160;참세상 자료사진 <!--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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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세계 여성의 날은 “여성노동자들의 투쟁력을 확인하는 날”이다. 돌봄 노동을 사회화 한다면서 이를 저임금,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로 채우고 있는 세상에 맞서, 일과 가족을 양립시켜야 한다면서 여성에게 일과 가족을 모두 책임지는 슈퍼우먼이 될 것을 강요하는 세상에 맞서,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을 마치 국가를 망하게 할 범죄자 취급하는 세상에 맞서 여성들의 투쟁력을 확인하는 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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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축제’가 아니라 함께 싸우면 바꿀 수 있다는 용기를 확인하는 ‘세계 여성의 날’이다.]]></description><image><url>http://www.newscham.net/data/news/photo/3/42627/sIMG_3595.jpg</url><link>http://blog.aladin.co.kr/vara/1967772</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코포크라시, 새로운 국가의 탄생</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1855416</link><pubDate>Tue, 22 Jan 2008 02:2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1855416</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7671577&TPaperId=1855416"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87/27/coveroff/8987671577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106192&TPaperId=1855416"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65/95/coveroff/8990106192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20924201&TPaperId=1855416"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92/92/coveroff/8920924201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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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코포크라시, 새로운 국가의 탄생<BR><BR><BR><BR>재벌을 위해 사회 전 영역을 재조직화하는 기업국가의 결정판, 마침내 우리 눈 앞에 <BR><BR>▣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BR><BR>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한국 재벌의 본산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관이 들어선 것은 1979년이었다. 그해 11월16일 치러진 회관 준공식에는 본래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렇지만 준공식 때 박 대통령은 스무 날 전의 ‘10·26 사태’로 고인이 돼 있었다. 대신 준공식에 참석한 이는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다. <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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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사진/ 사진공동취재단)<BR><BR><BR><BR><BR>어찌된 일인지, 회관 준공식 뒤엔 전경련을 찾은 대통령이나 대통령 당선자는 아무도 없었다. 전두환·노태우·김영삼 대통령 모두 전경련을 방문하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전경련의 대표 격인 4대 그룹 회장들을 만나긴 했어도 국회 식당에서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전경련 회장단을 만난 장소 역시 바깥의 음식점이었다. 군사정권 시절엔 재벌 회장들이 청와대로 불려 들어갔고 그 뒤엔 주로 제3의 장소에서 만났다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정치 권력’이 ‘경제 권력’의 본산으로 여겨진 전경련으로 직접 찾아가는 것은 모두 꺼려했다는 게 흥미롭다. <BR><BR>정부가 나서서 가려운 데 긁어줘 <BR><BR>잘 알려진 대로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대선 직후 전경련을 전격 방문해 그간의 ‘관례’를 깼다. 선거를 치른 지 9일 만인 12월28일이었다. 당선자 신분으로 치른 공식적인 첫 외부 일정이기도 했다. 국내 재계를 대표하는 ‘법적 단체’인 대한상공회의소나 노동계의 파트너인 경영자총협회를 제쳐두고 재벌 회장단 중심의 ‘임의 단체’인 전경련을 첫 방문지로 잡은 건 우연이었을까? <BR>이 당선자의 전경련 방문 직후 꼬리를 문 경제 부처들의 업무 보고 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주목할 경제 정책들을 쏟아냈다. 1월3일 금융감독위원회의 업무 보고에선 비금융주력자(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소유한도(현행 소유 10%, 의결 4%)를 높여주는 ‘금산분리 완화’ 방안이 제시됐다. 이틀 뒤 공정거래위원회가 업무 보고를 하고 나자 출자총액제한제(출총제)를 폐지하고 지주회사 요건을 푼다는 방침이 발표됐다. 이런 인수위발 주요 정책들은 친기업을 넘어 친재벌이라는 평가로 이어졌다. 선단식 그룹 구조를 유지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는 출총제를 폐지해달라는 주장은 재벌기업들의 끈질긴 민원이었고 금산분리 완화 방침은 재벌, 특히 삼성 총수 가문의 핵심적인 요구 사항이었다. <BR>출총제 폐지나 금산분리 완화로 대표되는 인수위의 방향 제시가 그다지 놀랍게 여겨지지는 않는다. 대체로 이명박 당선자의 후보 시절 공약으로 제시됐던 게 다시 확인된 수준이다. ‘친재벌’이란 딱지도 새삼스럽지 않다. 성격을 달리하는 노무현 정부에서 이미 ‘재벌공화국’에 ‘삼성공화국’이란 말이 돌 정도로 재벌의 힘이 한국 사회 구석구석에 미친 지 오래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오래전 우리 귀에 익숙해진 구호다. 그렇다면 이명박 당선자 쪽에서 발신하는 주요 재벌 정책들은 앞 정부의 그것과 실질적인 차이를 보이지 않는 연장선에 불과한 걸까? <BR>1월8일 마무리된 정부 부처의 업무 보고 과정에서 드러난 인수위의 경제 정책 방향은 이미 이 당선자의 공약에서 제시된 대로 대기업을 중심에 두는 ‘트리클 다운’(물 흐름) 효과를 꾀하고 있다. 물이 아래로 흐르듯 대기업이 잘돼야 중소기업의 일거리가 늘어나고 전체 기업의 투자와 고용 확대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게 이 당선자의 논리다. 정치적 구호에 그쳤는지는 몰라도 ‘대기업·중소기업 동반 성장’이라는 참여정부의 깃발과는 차이를 느끼게 한다. 재벌 쪽에서 줄기차게 제기한 민원 사항을, 힘에 밀려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정치 권력 쪽에서 알아서 풀어주는 모양새도 새롭게 볼 양상이다. <BR>재벌을 중심에 두는 ‘경제’ 중심의 화두는 경제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은 특히 눈여겨볼 대목으로 꼽힌다. 국세청, 검찰 등 룰(규칙)을 제대로 지키는지 감시하는 국가 기구들도 법·원칙보다는 ‘경제 살리기’에 주파수를 맞춘 발언들을 잇따라 냈다. 교육 정책의 밑그림을 그리는 인수위 사회·교육·문화 분과의 교육 분야를 경제학자인 이주호 의원(간사 겸 인수위원)과 조전혁 인천대 교수(전문위원)가 앞장서 이끌고 있다는 사실은 재벌을 중심에 놓은 ‘경제’와 ‘시장’이란 블랙홀에 모든 영역이 빨려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BR><BR>모든 걸 분쇄하는 ‘악마의 맷돌’ <BR><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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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최고경영자(CEO)형 총장으로 일컬어지는 이경숙 대통령직 인수위원장도 ‘기업사회’ 현상을 반영하는 한 예다. (사진/ 사진공동취재단)<BR clear=all><BR><BR><BR><BR><BR>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이를 두고 “이명박 정부가 인수위 시절부터 한국 사회를 생산성과 기업의 운영 원리로 빨리 재조직하려는 게 아닌가 싶다”며 “전대미문의 ‘기업사회’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기업을 도와주는 게 정부의 일이라는 식으로 문제에 접근하게 되면 이게 전형적인 기업사회적 성격이다. 옛날 산업화 때는 국가 스스로 기업이 되는 것이었고, 종속이론에선 이를 기업국가라고 했다. 국가가 기업의 역할을 하는 것인데, 지금은 기업이 국가의 역할을 대행하는 모양새다. 권위주의 산업화 시대의 기업국가보다 훨씬 진전된 기업사회의 형태를 띠고 있다.” <BR>박 대표는 “기업은 한 사회의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조직으로, 사회가 하나의 체제라고 볼 때 기업 부문은 그중의 하나인 하위 체제인데, 하위 체제의 운영 원리나 가치가 체제 전반을 지배할 때 그 공동체는 ‘악마의 맷돌’이 된다”고 말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 칼 폴라니가 시장경제 체제를 빗대어 일컬었던 ‘악마의 맷돌’처럼 기업적 가치가 다른 모든 걸 분쇄해 견제와 균형의 민주주의 원리를 위협하게 된다는 것이다. <BR>기업이 사회조직의 일부가 아니라 모든 조직의 이상형으로 부각되는 ‘기업사회’에 대한 우려는 이미 제기돼온 터였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사회학)는 2006년 12월 펴낸 &lt;1997년 이후 한국 사회의 성찰&gt;이란 책의 부제를 ‘기업사회로의 변환과 과제’로 달았다. 김 교수는 ‘정치·사회가 기업 활동을 통제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봉사하는 역할을 하고, 기업의 생산성이 곧 국가나 사회의 생산성으로 간주되는 사회’를 기업사회로 규정하고, “한국은 외환위기를 계기로 군사형 사회에서 기업사회로 변했다”고 분석했다. <BR>미국 부시 행정부처럼 각료 자리의 대부분을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출신들이 접수하는 모습으로 대표되는 기업사회는 시장만능주의(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전 지구적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기업(corporate)에 의한, 기업의 지배를 일컫는 ‘코포크라시’(corpocracy)라는 말이 외국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는 현실은 그 반영이다. <BR>김동춘 교수는 “지금까지 사기업 사람들은 공익과 거리가 있다는 게 통상적인 인식이었는데, 사기업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논리가 확산돼 있다”고 진단했다. “돈을 많이 버는 건 본인에게만 좋은 게 아니라 도덕적이기까지 하다는 정당성까지 획득했다. 이명박 당선자가 기업인들에게 공항 귀빈실을 사용하게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기업인이 공무원보다 더 기여를 많이 하는데 왜 귀빈실을 사용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기업이 경제적 역할을 넘어 사회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인식이다.” <BR>다 같은 기업사회라고 해도 어떤 기업이 지배하느냐에 그 사회의 작동 방식은 달라진다. 예컨대 미국의 경우 공화당 정권 아래에선 석유·군수 자본 쪽이 중심을 이루고 민주당 정부에선 캘리포니아의 문화 자본이 득세하는 식으로 차이를 띤다는 것이다. 기업사회의 메커니즘을 결정짓는 또 하나의 잣대는 자본의 힘을 제어하는 견제력의 강약이다. 노조조직률이 10~12%인 미국과 70~80%에 이르는 북유럽은 같은 기업사회라고 해도 실제 작동하는 방식은 크게 다르다. <BR><BR>경제 살리기는 효과 거둘 수 있나 <BR><BR>김기원 한국방송통신대 교수(경제학)는 “우리 사회는 그런 점에서 코포크라시를 넘어 ‘재벌크라시’이고 더 들어가면 ‘삼성크라시’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단순히 코포크라시라고 하기엔 중소기업들이 같은 ‘자본’이면서도 대우를 받지 못하고 배제돼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노조조직률이 10%를 갓 웃돌 정도로 견제력이 취약한 사정을 아울러 고려할 때 한국의 기업사회는 최소한의 공정 경쟁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천민적 코포크라시’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고 김 교수는 덧붙인다. 그는 “노무현 정부에선 공정위를 통해 재벌을 일정하게 견제하려고 했는데, 이명박 정부에선 ‘시장경쟁’마저 훼손하는 쪽으로 퇴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CEO 출신이 정부 각료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예가 많지 않다는 점에선 ‘미국식 코포크라시’보다 덜해도 막강 경제 권력인 재벌을 견제할 대항마가 없다는 점에선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BR>재벌 중심의 노골적인 코포크라시 흐름의 강화가 민주주의 원리에 끼칠 영향은 일단 제쳐두고라도 ‘경제 살리기’에선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 출총제 폐지를 비롯한 재벌 정책의 변화가 대기업의 투자로 이어지고 중소기업을 비롯한 하위 부문들이 그 혜택을 더불어 누릴 수 있다면, 이명박식 코포크라시는 한층 추진력을 얻게 될 것이란 점에서 주목되는 대목이다. <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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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선거 직후 첫 방문지로 전경련을 선택했다. 지난해 12월28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에서 재벌 회장들과 포즈를 잡은 이 당선자(앞줄 오른쪽에서 여섯 번째/ 사진공동취재단). <BR><BR><BR><BR><BR>‘대기업의 투자 활성화를 통해 경기를 부양하고 그것의 성장 효과가 서민과 중산층에 확대돼 분배 문제까지 해결한다’는 이명박 당선자의 ‘신발전 체제’는 두 가지 전제 위에서 성립할 수 있다. 첫째, 재벌기업들의 투자가 급격히 늘어나야 한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은 이게 실현되기 쉽지 않은 여건이라고 본다. 대우, 쌍용그룹을 뺀 상위 8대 그룹의 투자가 국민경제 전체 투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0~50%로, 과잉 투자 논란을 일으킨 외환위기 직전 수준까지 치고 올라온 상태여서 추가로 크게 늘어나기엔 한계를 안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BR>이명박 당선자에게 선물을 안겨주려는 듯 1월9일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서 재벌들이 올해 투자를 크게 늘리기로 했으니 김 소장의 예측은 빗나갈지 모르지만, 두 번째 전제가 남아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연관관계다. 이를 명확히 보여줄 최근의 지표는 없다. 2005년 3월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에서 내놓은 ‘부품·소재 산업의 경쟁력 현황과 정책 과제’ 같은 자료로 대략 짐작해볼 수 있을 뿐이다. 2000년 기준 산업연관분석 결과 영상·음향·통신 기기나 컴퓨터 기기를 비롯한 정보기술(IT) 업종의 수입유발 계수는 0.47~0.55였다. 1천달러를 수출하면 470~550달러는 해외에서 핵심 부품을 수입하는 데 지출한다는 뜻으로 일본의 0.13보다 4배가량 높았다. 국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연관관계 취약성은 이런 복잡한 수치 이전에, 재벌 대기업들이 초호황을 누리고 있을 때 중소기업계에선 비명이 끊이지 않았던 데서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노무현 정부의 ‘경제’에 실망한 서민, 중산층을 ‘트리클 다운’ 효과로 만족시켜주는 게 만만하지 않은 상황이다. <BR>한국 경제의 난항이 재벌기업들의 어려움에서 비롯된 게 아님은 상식으로 통한다. 전체 성장률보다 각 부문의 양극화, 더 나아가 중간선 아래의 빈곤화가 문제라는 사실에는 대체적인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상층부 재벌기업들은 외환위기 직후 2~3년을 빼고는 줄곧 호황이었다. <BR><BR>단기간 가시적 성과 내기 위해 <BR><BR>인수위를 통해 인재들을 빨아들이고 있는 이명박 당선자 진영에서 이런 사정을 파악하지 못할 리는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시장주의’를 내세우면서도 통신비 20% 인하 유도나 신용불량자 대사면 같은 정책들을 검토했던 게 그런 고민의 발로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정책의 큰 중심점을 대기업, 나아가 재벌기업들에 두며 기업사회 쪽으로 강하게 드라이브를 건 것은 나름의 철학적 기반과 단기적이고 절실한 정치적 필요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된다. <BR>신광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통상 정권 초기에는 대중의 기대 수준이 높게 형성되기 마련이며, 이를 채워주려면 단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줄 수밖에 없다”며 “그런 배경에서 재벌들의 돈을 풀어 단기적인 경기 부양 효과를 꾀하는 것 아닌가 싶다”고 풀이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긴밀한 연관관계를 형성하는 식의 원천적인 접근법은 5년 내내 해도 될까 말까 한 난제여서 회피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반도 대운하 정책’을 밀어붙이는 것도 그런 틀로 이해할 수 있다. 재벌의 민원을 미리 찾아서 해결해주는 이명박식 코포크라시의 강화 분위기는 대중의 조급한 기대와 욕망을 배경에 깔고 있는 셈이다. 순조롭게 채워질 기대와 욕망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BR>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국가의 중립성과 공공성은 자본주의의 장기 발전을 위해서라도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적어도 외양적으로는 지켜져왔는데, 이제 그마저 족쇄로 여겨 벗어버리는 단계에 와 있다. 김동춘 교수는 이를 “발전적인 동시에 위험한 징후”라고 말한다. 끊임없이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키고 그같은 경제적 인센티브가 계속 주어지지 않으면 급속도로 허물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도덕적·공적인 기초가 취약한 탓이다. 김 교수는 “언론이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국가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한 담론을 형성해나가야 할 때”라고 말한다. <BR><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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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BR><BR><BR>재벌 정치 참여의 역사 <BR><BR><BR><BR>1992년 정주영 대선 출마로 시작, 이제 언론과 정치권력을 부리는 단계로 <BR><BR><BR>한국의 경제 권력인 재벌이 정치에 직접 간여하는 움직임을 보인 것은 1992년부터였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두 번째로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해였다. <BR>정치권 진출에서 앞장을 선 재벌 기업인은 작고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었다. 잘 알려져 있는 대로 정 회장은 독자적인 정당을 만들어 1992년 대선에 출마했다. 김기원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이를 “국가 주도로 자본을 육성하는 정부 우위의 정경유착 단계를 지나 자본 우위의 정경유착 단계에 들어섰음을 보여준 단적인 예였다”고 풀이한다. <BR>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정치에 뜻을 보인 것도 그즈음이었다. 김 회장은 정 회장의 정계 진출 선언 전인 1991년 12월께부터 현실 정치판에 대해 매운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5월 기자회견에서는 “일본의 ‘마쓰시타 정치의숙’과 같은 신진 정치인 양성 기관을 세우고 싶다”고 밝혀 파문을 일으켰다. 정주영 회장과는 또 다른 방식의 정치 참여 움직임이었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김우중 회장의 시도가 사실 더 우려스러운 것이었다”고 말한다. “직접 후보로 나서는 것이야 한두 텀(임기)이면 끝나지만, 전면에 나서지 않더라도 정치가를 직접 배출하는 것은 길게 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BR>정주영 회장의 정계 진출은 대선 낙선으로 실패했고, 김우중 회장의 시도 역시 결실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렇다고 정치에 대한 재벌의 영향력이 줄어든 건 아니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4월 이건희 삼성 회장의 “정치 4류, 행정 3류, 기업 2류”라는 이른바 ‘베이징 발언’은 더 이상 정치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된 경제 권력의 힘을 상징한 사건이었다. <BR>재벌은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몰려 1990년대 후반 정치 권력 앞에 잠깐 몸을 낮추는 모습을 보였지만, 곧 힘을 회복했다. 구조조정 과정을 통해 재무구조를 튼튼하게 다져 은행에 대한 의존성을 털어버림에 따라 정부의 통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기반을 갖췄다. 망하지 않고 버틴 재벌들의 힘은 더 막강해졌다. 나중의 대선자금 수사에서 드러나듯 재벌은 자금력을 통해 정치 권력을 주물러왔다. ‘X파일’ 사태에 생생하게 드러난 삼성그룹의 행태는 그 대표 격이다. <BR>이제 굳이 돈을 주지 않아도 언론을 앞세운 이데올로기 공세로 정치 권력이 재벌의 민원 해결에 알아서 나서는 단계로 발전하는 양상이다. 기업의 이익이 곧 국가의 이익이라는 인식은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확산돼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재벌로선 직접 정치에 참여하려고 애써 노력할 필요가 없어진 셈이다. <BR><BR><BR><BR><BR><BR><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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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clear=all><BR><BR><!--{PS..0}--><BR>• [표지이야기] “내게 국가는 곧 기업이다”<BR>• [표지이야기] 민영화, 잔치는 시작됐다<BR>• [표지이야기] 국가보다 기업이 더 비싼 시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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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해서&nbsp;생각나는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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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매우 얇은 책. 미국 사회를 중심으로 기업권력에 대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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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문 및 논문 모음집. 특히 3부 노동없는 민주주의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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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92/92/cover150/8920924201_2.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20924201</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21세기의 사유들 (대학신문 연재모음)</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1724195</link><pubDate>Mon, 26 Nov 2007 23:3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1724195</guid><description><![CDATA[21세기의 사유들 ① 슬라보예 지젝 - 이현우 강사 (인문대ㆍ노어노문학과)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라캉주의 분석가이자 포스트모던 철학자이고 문화비평가다. 혹은 자신의 표현을 빌면, ‘정통 라캉주의적 스탈린주의자’다. 그는 히치콕, 레닌, 오페라, 9ㆍ11 테러, 인권, 근본주의, 사이버공간, 포스트모더니즘, 다문화주의, 전체주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등 광범위한 주제에 대해 많은 책들을 썼다. 그가 목표하는 바는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과, 대중적 환상 혹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신분석적 폭로다. 그 자신의 겸손한 정의에 따르면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그가 다룬 거의 모든 주제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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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재고의 대상이 된 건 이데올로기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해인 1989년 지젝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으로 영어권 지식계에 ‘정식’ 데뷔한 것은 우연의 일치이지만 상징적이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했던 그 시기에 그는 이데올로기의 바깥은 없다고 주장하며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했다. 그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이름은 ‘냉소주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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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주의는 더이상 “그들은 자기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는 마르크스식의 허위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그것을 한다”는 역설로 규정된다. 계몽된 허위의식의 역설이다. 가령, 우리는 지폐가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는&#160; 것을 다 ‘알지만’ 돈에 대한 물신주의적 태도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급진적’ 지식인들은 이민자의 온전한 권리와 국경 개방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지식인으로서의 특권적 지위가 계속 보장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무지’의 폭로는 더이상 아무런 파괴력도 갖지 못한다.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행위와 일상에 구조화돼 있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도 더 많이 믿는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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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에 따르면, 우리는 지난 세기에 두 가지 유토피아의 종말을 경험했다. 하나는 70여년을 버티던 ‘정치적 유토피아’로서의 현실 사회주의의 종말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후 10여년을 구가했던 ‘전지구적 자본주의’, 곧 자유민주주의 유토피아의 종말이다. 전자의 종언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 베를린 장벽 붕괴였다면, 후자의 종언을 보여준 ‘실재적’ 사건은 바로 2001년의 9ㆍ11이다. 이러한 종말 이후에, 새로운 갈등의 장벽들이 실재적 역사로 회귀했다. 따라서 유토피아의 종말 이후에 우리가 ‘역사의 종말’에 접어들었다고 하는 바로 그 관념이야말로 유토피아적 환상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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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념이라는 대타자(the Other)의 몰락 이후에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고 관용적이며 쾌락적인 시대를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젝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부자유를 말할 수 있는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하기에 자유롭다고 ‘느낄’ 따름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오늘날의 쾌락주의는 절제의 쾌락주의다. 카페인 없는 커피나 섹스 없는 섹스, 혁명(유혈) 없는 혁명에 대한 기대와 권장에서 볼 수 있듯이 법의 부재는 아예 금지를 일반화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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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지젝이 자주 예로 드는 권위적인 아버지와 관용적인 아버지의 경우를 대비해보자. 권위적인 아버지는 “너는 그것을 해라!”라고 명령한다. 반면에 관용적인 아버지는 “그것을 해라, 하지만 네가 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아도 좋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배려는, 하지만 “너는 자발적으로 그것을 해라!”라는 보다 더 강한 요구를 숨기고 있다. 이것이 관용의 역설이며 자유주의의 역설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지만 아무것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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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는 게 손쉬워진 만큼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는 점점 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것이 우리시대의 패러독스이며, 우리는 유토피아를 다시 발명해내야 한다. 유토피아는 가장 긴급한 요구의 문제다”라고 지젝은 말한다. 그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무엇인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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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에 따르면, 유토피아는 ‘불가능한 이상적 사회’란 관념과는 어떠한 관련도 없다.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자리가 없는’ 공간의 건설이다. 왜 자리가 없는가? 기존의 사회에서는, 즉 사회적 좌표계 내에서는 자리가 할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인 제스처의 사례로 지젝이 자주 드는 것은 1917년의 레닌이다. 레닌주의의 핵심은 자유주의적 ‘선택의 자유’ 대신에 선택 자체를 선택하는 데 있다. 즉 정치적 활동(activity)이 아닌 행위(act)란 현 상황이 제시하는 강요된 선택 대신에 그러한 ‘정치적 계산’을 돌파하는 어떤 광기다. “난 인간이 아닙니다. 난 괴물입니다.”라고도 지젝은 말했다. 스스로에 대한 새로운 정의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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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사유들 ② 주디스 버틀러 - 조현준 연구원 (한국여성문화이론연구소)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에서 수사학과 및 비교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레즈비언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페미니스트이자 소위 ‘퀴어 이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버틀러의 철학사적 공헌은 페미니즘 담론의 고정관념으로 여겨졌던 ‘억압자 남성’, ‘피억압자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양식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데 있다. 버틀러의 퀴어 이론은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젠더 자체의 불확실성과 불확정성을 토대로, 동성애와 이성애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제도담론의 권력 효과임을 폭로하고자 한다. ‘퀴어’는 원래 동성애자들을 경멸적으로 부르던 호칭이었으나, 버틀러에 이르러 ‘퀴어 이론’은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의미를 고정하는 모든 담론적 권력에 저항하는 전복의 표어가 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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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의 주저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은 시몬 드 보부아르, 지그문트 프로이트, 자크 라캉, 자크 데리다, 그리고 미셸 푸코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현대 철학자들을 ‘퀴어 이론’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조망한 책이다. 이 책은 많은 논쟁을 일으키며 각국의 언어로 번역돼 세계적으로 십만 권 이상 팔렸고 인터넷 상에 ‘주디’라는 국제 팬진(fanzine)까지 탄생시키면서 버틀러를 영미 지성계의 떠오르는 아이콘, 학계의 주목받는 스타로 만들었다. 이후 버틀러는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격분하기 쉬운 말』, 『권력의 심리 양태』, 『젠더 허물기』, 『자신을 말하기』 등의 저작을 통해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뿐 아니라 정치 철학과 윤리학까지 관심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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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무엇이 많은 사람들을 『젠더 트러블』에 열광하게 만든 것일까? 이는 크게 두 가지 논의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여성 없는 페미니즘’의 가능성 제기다. 다시 말해 본질적인 정치 주체가 없는 정치학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다. 예컨대, 일상에서의 일탈을 꿈꾸며 이따금씩 화장과 여장을 즐기는 씨름신동 동구(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나 언제나 자신을 여성이라고 생각하며 성전환 수술비를 저금하는 여장남자 두눈박이(영화 「다세포소녀」)는 페미니즘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혹은 남자로 태어났지만 성전환 수술 후 소송을 통해 2002년 법적으로 성별 정정을 받은 하리수는 어떤가?<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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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이라는 성 정치학의 정치 주체가 여성이라면, 이 때 성을 지칭하는 것은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가 될 것이다. 선천적으로&#160; 타고난 성이 섹스, 후천적으로 사회문화적 환경으로 인해 교육받은 성이 젠더라면, 섹슈얼리티는 인간의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이다. 그런데 섹스라는 생물학적이고 해부학적인 특성도, 섹슈얼리티라는 원초적인 욕망도 사실은 애초부터 그렇게 그 자리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제도담론이 그렇게 명명하고 인식하도록 지식 체계를 동원한 결과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모두 사회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의미에서 젠더로 수렴되며 규범이 만든 허구이기 때문에 분명한 정의가 불가능해진다.<br />
두 번째는 욕망과 법 간에 발생하는 인과론의 전도다. 즉 근원적 욕망은 애초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억압해야 할 어떤 대상을 가정하고 있던 규율권력과 지배담론이 만든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욕망이 법을 만든 것이 아니라 법이 욕망을 만들었다는 ‘인과론의 전도’는 당연하다고 생각돼 온 기존 담론이 어떤 권력의 역학 관계에 의해 구성되고 조작됐는지를 면밀히 살피는 ‘계보학’의 관점을 부각시켰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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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규범이 만든 허구이자 규제가 만든 이상이라는 의미에서 어떤 본질적인 내적 특성을 갖는 것이 아닌, 다양하고 산포된 관점을 가진 제도, 실천, 담론의 효과가 된다.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의미에서 광의의 젠더로 수렴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젠더는 모방을 통해 원본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패러디’, 행위를 통해서만 의미를 발현하는 ‘수행성’, 재의미화의 가능성을 안고 반복되는 규범에의 ‘복종’, 자신 안에 타자를 품고 있는 ‘우울증’의 양식으로 발현된다. 이제 진정한 남성이나 여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기존 규범 속에서 원본의 권위를 허물면서 수행적 행위를 통해 언제나 재의미화된다. 그것은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대상을 떠나보내지 못해서 자신의 일부로 합체한 우울증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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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은, 근본적으로 결정된 ‘본질적인’ 여성은 없다는 것이다. 젠더의 표현물이라는 가면 뒤에 본질적인 젠더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젠더 정체성은 외관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수행을 통해서만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집합이나 범주 없는 ‘여성 없는 페미니즘’의 가능성이고 자신 안에 타자의 가능성을 노정하는 ‘퀴어 이론’의 출발점이다. 타인과 나의 구분과 경계에서 모든 차이가 나오고, 그 차이가 차별을 낳기 때문이다.<br />
페미니즘의 정치주체를 심문하는 버틀러의 젠더 정체성 이론이 현실의 문화정치학과 접목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남자와 여자가, 남성성과 여성성이, 이성애와 동성애가 분명한 자기 정의를 할 수 없다면, 그리고 언제나 규범 안의 패러디로서 수행적 행위를 통해서만 드러나기 때문에 사실상 나와 타인의 경계조차 불분명한 것이라면, 남자가 여자를, 남성성이 여성성을, 이성애가 동성애를 억압하거나 천시할 근거가 없다. 그것이 인류의 절반인 여성뿐 아니라 인구의 십 퍼센트에도 못 미친다고 평가절하되는 소수자의 섹슈얼리티를 인정하고 평등한 공존을 모색하려는 ‘퀴어 이론’의 현실적 정치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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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사유들 ③ 조르지오 아감벤-양창렬
정치철학, 미학, 언어학, 문헌학 등 여러 주제에 대해 정치한 분석을 내놓고 있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은 2000년대 들어 가장 많이 논의되는 사상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주저 『호모 사케르』(1995)는 칼 슈미트, 벤야민, 아렌트, 푸코 등을 거쳐 주권권력과 삶/생명의 관계, 법과 폭력의 문제, 인권 개념 비판 등을 다루고 있으며, 9ㆍ11 이후 시행된 각종 예외조치들의 정치 패러다임을 예견한 것으로 평가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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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케르』에서 아감벤은 주권권력을 언제나 벌거벗은 생명을 생산하며 예외적으로 작동하는, 다시 말해 그 벌거벗은 생명을 배제하면서 포함하는 생명정치적 주권권력이라고 본다. 호모 사케르(homo sacer, 신성한 인간=벌거벗은 생명)란 무엇인가? 로마법에서 정의된 신성한 인간이란, 희생양(제물)으로 삼을 수 없지만 그를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그는 이미 신의 소유이므로 희생양(제물)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신의 영역에서 배제되어 있고, 인간 공동체의 법/권리의 보호 바깥에 위치하기에 그를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영역에서도 배제된다. 혹은 이렇게 배제되는 조건 하에서만 공동체 안에 포함된다. 예를 들어, 9ㆍ11 이후 애국자법이 시행되면서 미국정부는 테러리스트 활동을 했다고 추정되는 비-시민들을 무한정하게 구금하고, 그들을 군사재판을 포함한 특별한 법절차에 종속시켰다. 더구나 이렇게 구금된 이들이 추방되거나 기소되는 것이 아니라 법적 지위 자체를 상실한 채 수용소에 유폐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마땅히 ‘신성한 인간’의 예라 하겠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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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감벤의 주장이 급진적인 까닭은 극단적으로 보이는 이 예외가 오늘날 정상적으로 되었다고 말한다는 데 있다. 이제 모든 시민은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로 간주되고, 수용소는 전 시민을 대상으로, 전 영토로 확장된다. 수용소를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 정치 공간의 패러다임으로 간주하면서, 도처가 정상적으로 되어버린 예외 상태이고, 도처에 신성한 인간들이 있다면 어떻게 저항을 사유할 수 있는가? 우리는 정말 모두 수용소 안에 살고 있는가?<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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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권력은 항상 ‘희생’을 통해 신성한 인간을 만들어낸다. 아감벤은 이 희생을 『장치란 무엇인가?』(2006)에서 ‘장치’라는 말로 바꿔 부른다. 주권권력은 항상 ‘장치’를 통해 주체를 생산함으로써만 작동한다. 장치란 생명체들의 몸짓, 행동, 의견, 담론을 포획, 유도, 결정, 차단, 생산, 통제, 보장하는 능력을 가진 모든 것을 가리킨다. 비단 감옥, 수용소, 판옵티콘, 학교, 고백, 공장, 규율, 법적 조치들뿐 아니라, 펜, 글쓰기, 문학, 철학, 농업, 담배, 항해, 컴퓨터, 핸드폰, 언어도 장치다. 이 장치들을 통해 한 개체 내에서도 핸드폰 사용자, 인터넷 사용자, 시나리오 작가, 탱고 애호가 등의 무수한 주체화 과정이 공존한다. 질문은 반복된다. 과연 위 장치들로부터 벗어날 수나 있단 말인가?<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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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가 도처에 권력이 있다고 말할 때 반드시 도처에 저항이 있음을 덧붙인 것과 마찬가지로, 아감벤이 보기에 도처에 각종 장치들을 통해 주체가 자신의 잠재성을 포획당하는 주체화 과정이 존재하지만, 그만큼 도처에 그것에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 시민과 테러리스트를 구분 불가능하게 만드는 주권권력은 사실상 어느 곳에서 돌출할지 모르는 이 테러리스트를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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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감벤은 저항 혹은 대항-장치를 ‘세속화(profanare)’라고 부른다. 그것은 희생(sacrare)에 의해 신적인 영역으로 빠져나갔던 제물에 손을 대어 더럽힘으로써 인간들이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게 복원하는 것이다. 희생된 사물이 달리 사용될 수 있는 잠재성을 박탈당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세속화는 희생이라는 장치를 비활성화시키고 헛돌게 만듦으로써 이 박탈당한 잠재성을 복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장치가 없으면 생명체는 주체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각종 장치들을 버리고 자연상태로 돌아가자거나 장치를 좋은 목적을 위해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장치를 단순히 부정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을 주체화하되, 더 이상 장치에 배정되어 있는 목적-수단 관계를 따르지 않고 목적 없는 수단이라는 새로운 사용법을 고안해내는 것이 열쇠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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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없는 수단으로 아감벤이 드는 예는 법전을 더 이상 준수할 대상이 아니라 가지고 놀고 실험하는 것, 보는 자의 어떤 정서적 변용도 이끌어내지 않는, 관객에게 완전히 무감한 표정을 짓는 포르노 스타 등이다. 그도 인정하듯 이 대항-장치는 항상 일시적이다. 소변기가 예술작품이 되는 순간은 뒤샹의 시도에서일 뿐, 그 뒤 그것의 잠재성은 박물관에 포획된다. 그가 드는 예는 여전히 묵시록적이고 손에 잡히지 않는 듯하지만, 우리는 신성한 것들을 장난감처럼 마음대로 이리저리 굴리며 새로운 사용법을 발명할 수 있는 방식들을 발명하는 일을 결코 멈추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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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사유들 ④ 알랭 바디우 - 홍기숙 강사(숭실대ㆍ철학과)
현대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이며, 극작가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1937년 모로코 태생으로, 파리 8대학과 파리사범고등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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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프랑스 철학의 커다란 흐름을 ‘진리’와 ‘체계’의 붕괴로, 혹은 니체의 영향 이후 반(反)플라톤주의적 경향의 지배로 특징지을 수 있다면, 알랭 바디우의 사유는 그 반대진영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진리’와 ‘보편성’을 주장하는 플라톤주의적 전통, 혹은 이성적 합리주의를 표방하는 데카르트주의적 전통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디우는 자신의 주요 저서인 『존재와 사건(L'Etre et l'e′ve′nement)』(1988)에서 수학의 집합론에 근거를 둔 ‘순수다수(le multiple pur)’로서의 ‘존재(l'e＾tre)’를 말한다. 사실상 ‘수학’을 통해 ‘존재 문제’에 접근한다는 것이 서양철학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본격적으로 ‘수학의 역사’를 ‘존재 물음의 역사’와 동일시하면서 존재론을 펼치고 있는 바디우의 사유는 철학 내에서도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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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의 철학이 ‘존재’에 대한 물음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바디우는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연장되거나 구별되는 지점으로서 ‘진리’의 영역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그가 프랑스 68년 혁명을 경험한 세대이며, 특히 마오주의자였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존재와 사건』 후반부에서 바디우는 ‘순수다수’인 ‘자연적 존재’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역사성을 특징으로 갖는 ‘일자를 넘어서는 것(l'ultra-Un)’으로서의 ‘사건적 진리’에 대해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바디우는 ‘진리’를 주장하기를 꺼려하는 이 시대에 비록 지엽적이지만 보편성을 갖는 것으로서 ‘진리’를 주장한다. 전통적으로 인식되고 있던 ‘진리’, 즉 유한함에 대립되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는 영원성으로서의 ‘진리’가 이제는 바디우에 의해 국지적이며 복수적인 이름으로서의 ‘진리’로 다르게 그려진다. 이러한 바디우의 ‘진리’에 대한 일종의 당위적 책임감은, 이어서 ‘윤리’의 문제나 ‘주체’의 문제에서도 새로운 접근을 통해 이전의 전통적 개념과는 단절된 모습으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이미 드러나 있었지만 비로소 개념화된 새로운 모습으로 소개되고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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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진리’나 ‘윤리’에 맞서서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사건적 진리’,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사건에 대한 ‘충실성(fide′lite′)’으로서의 ‘윤리’, ‘주체’란 무엇인가? 옳음에 대한 당위성을 말하기 어려운 이 시대에, 그래도 지엽적이고 한시적이지만 보편성을 갖는 ‘진리’를 주장한다는 것은 어떤 철학적, 실천적 의미를 지니는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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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철학이 그 시대의 현실적 상황을 자신의 철학적 물음의 기본 출발로 삼았다는 점은 ‘지금(maintenant)’과 ‘여기(ici)’를 중시하는 실천적 철학자 바디우에게 너무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동구권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모든 절대적 가치가 무너지고 ‘다양’과 ‘차이’만이 강조되는 현 상황에서, 바디우는 ‘진리’와 진리과정에 수반되는 것으로서의 ‘사건적 주체’를 주장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있음(존재일반)의 이름인 다름(차이)’이 아니라, 무엇인가 특별한 사건적 진리에 충실해 우리의 삶을 예기치 못하는 특별함으로 바뀌게 하는 ‘같음’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이 ‘같음’은 다름과 구별되며, 유일하게 ‘다름’에 무관심하며, 무엇인가에 충실하게 하는 ‘주체’를 형성하며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게 하는 ‘진리의 이름’인 것이다. 우리에게 ‘다름’이나 ‘차이’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존재의 모습이지, ‘같음’보다 우월한 가치를 지녀 추구해야 하는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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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바디우의 ‘사건적 진리’에 대한 사유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유가 팽배해 있는 현 시대에, 다시 말하자면 ‘진리’나 ‘주체’를 더 이상 주장하려하지 않는 현시대에, 그럼에도 소위 변화된 세계를 인정하면서 그 위에 자신의 새로운 문제의식을 제출하며 개입하고 있는 실천적 철학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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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바디우에게서 ‘진리’와의 연관성을 갖는 것으로서의 ‘주체’란 무엇인가? 우리가 ‘우연’의 이름 하에 맞이하게 되는 하나의 ‘사건’에 충실할 때, 그 우연적 사건은 주체를 진리과정에 충실할 수 있도록 강제한다. 다시 말하자면 바디우의 ‘주체(sujet)’란 ‘주체화의 과정(subjectivation)’과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주체는 진리를 수반하는 ‘사건’ 이전에 미리 존재할 수 없으며, 진리가 복수인 것처럼 주체 또한 ‘복수’의 형태로 생성된다. 말하자면, 어떠한 ‘진리’나 ‘윤리’, ‘주체’도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기존의 백과사전적 지식에 ‘구멍을 뚫는 것’으로서, 새로운 것의 완전한 출현으로 나타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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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강한 정치적 저항의식을 가져왔던 우리의 역사적인 특수함을 고려해 볼 때, 또 그 반대급부로서 항시적인 안정추구를 위해 여러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이 작용돼 왔던 지난 시절 지배질서의 담론과 그 역학관계를 확인해볼 때, 알랭 바디우의 철학적 사유는 우리사회의 도덕담론이나 지배담론이 갖고 있는 문제들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 줄 뿐 아니라, 해체론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형태의 대안이 아닌 변화와 미래의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줄 것이다. ‘있음’의 이름이 ‘차이’와 ‘다양’이라는 그의 사유는 서양 고전적 철학의 맥을 잇는데, 이는 우리에게 ‘평등’에 대한 당위성의 근거를 마련해준다. 동시에, 비록 한시적이고 지엽적일지라도 보편적인 ‘진리’를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은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추동의 힘을 사유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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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사유들 ⑤ 가라타니 고진 - 조영일(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비평가로서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자(또는 사상가)로서의 얼굴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를 비평가로 여기는 사람은 소수인 것 같다. 물론 얼마 전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를 제출해 한국문단을 한동안 긴장시킨 바 있지만, 그런 주장은 도리어 그가 문학을 완전히 떠난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그와 같은 판단에는 『트랜스크리틱』이나 『세계공화국으로』와 같은 사상서들이 그의 주저로 간주되는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사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흔히 아는 의미에서의 문학비평을 거의 쓰지 않고 있으며, 대신 철학이나 사회사상 쪽으로 관심대상을 넓혀왔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정작 가라타니 자신은 비평가로 불리길 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철학자이기보다 비평가이길 원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가 개념을 좇기보다 문제를 좇기 때문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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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는 ‘극단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철학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는 완전히 이질적인 두 상황이 각각 존재했다는 말이 아니라, 도리어 전자의 시대였기에 후자의 시대가 가능했다는 의미다. 지난 세기 수많은 철학자들이 등장하고 또 사라졌다. 그런데 들뢰즈의 말처럼 철학사가 개념창조의 역사라고 한다면, 철학이란 서로 다른 개념들 간에 이뤄지는 힘겨룸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개념들은 어떻게 생성되고 또 어떻게 사라지는 것일까? 바로 개념들의 배치에 의해서다. 즉 ‘이항대립’을 통해 구축되기 마련인 개념들은 어느 쪽을 더 우위에 놓느냐에 따라 이전 개념군이 파괴되고 바로 그 자리에 새로운 개념군이 자리잡는 방식으로 배치된다. 이런 이유로 알튀세르는 철학에는 무의미한 형식적인 전복운동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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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비평은 이와 다르다. 그것은 철학과 달리 개념에 대한 집착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주어진 문제들에 집착하면서 그에 대한 인식이 개념화되는 것을 끊임없이 회피한다. 그러므로 비평의 관심은 항상 개념의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역사를 향한다. 다른 말로 비평을 한다는 것은 개념을 낳는 문제(조건)들과 씨름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오로지 이동을 통해 가능하다는 말이다. 가라타니가 비평을 ‘대립’이 아니라 ‘이동’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비평은 이를 통해 ‘개념의 노동’(헤겔)을 넘어서는 것이다. 지금껏 수많은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우리에게 소개돼 왔다. 그러나 동시대 사상가 중에 가라타니만큼 널리 읽힌 사람도 없을 것이다. 왜 우리는 그의 책을 그토록 탐독해온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가라타니의 책은 여느 철학서보다 쉽기 때문이다. 단순히 비슷한 한자어 개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에게는 중심개념이라고 할 만한, 다시 말해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익혀야 할 개념(핵심용어)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개념을 만드는 대신에 기존 개념들의 의미를 조금씩 이동시키는 방법으로 논의를 펼쳐가기에, 딱히 철학에 대한 기본지식이 없는 독자라도 약간의 수고만 들인다면 그 흐름을 쫓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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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철학의 대중화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그에 부응하는 성과를 내지 못했으며, 혹 대중적으로 성공을 하더라도 기껏해야 지적 임팩트가 제거된 요약본을 내놓는 데 그쳤다. 그러므로 가라타니는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이나 사상을 대중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저서들이 마냥 쉽게 이해되는 것만은 아니다. 아니 그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지만, 그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을 소화하기란 생각만큼 녹록치 않다. 『세계공화국으로』에서 구체적으로 다뤄지고 있는 생산양식에서 교환양식으로의 전환이나, 생산자 투쟁에서 소비자 투쟁으로의 이행, 진정한 민주주의의 원리로 이야기하는 ‘제비뽑기’, 점진적으로 주권을 양도함으로써 이룩해가는, 규제적 이념으로서의 ‘세계공화국’과 같은 것들은 개념들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같이 우리가 자명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을 조금씩 ‘이동’시킨 결과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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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우리는 개념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쳐 ‘가라타니 철학’이라는 실체와 접하는 경험 따위는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 ‘가라타니의 철학’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라타니를 읽은 후 이제 더 이상 이전 같이 사고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비평의 철학이란 바로 이처럼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게 만드는 것’ 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세기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상가들이 있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실시간으로 우리와 함께 숨 쉬며 머리를 맞대고 있는 사상가는 가라타니 한 사람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까닭은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한국 비평과 한국 철학의 빈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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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사유들 ⑥ 페터 슬로터다이크 - 김석수 교수(경북대ㆍ철학과)
현대 인문학의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는 산 생명을 복제하는 유전공학이 출현하고, 자본주의가 승리하면서 새롭게 구축되는 이 제국의 시대에 과연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다. 이런 현실의 도래는 이미 전통적 인문학이 표방해온 휴머니즘에 위기를 안겨다 줬으며,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돌파구를 찾도록 다그치고 있다. 바로 이런 시대적 흐름의 중심부에, 기존의 휴머니즘의 종언을 고하고, 견유주의(犬儒主義)와 유전공학의 결합으로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기도하는 포스트휴머니즘의 주창자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 1947~)가 자리하고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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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99년 7월 16일 바이에른 엘마우 성에서 개최된 국제학술심포지엄에 참가해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유럽 지성계에 충격을 안겨줬다. 그는 그 동안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정의해 온 기존의 휴머니즘적 인간관이 인간의 야생성을 길들이면서 은폐하고 있음을, 게다가 자기행복에 매몰되거나 냉소주의에 몰입하는 현대 사회의 폭력의 공범자가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성과 문자에 기초해 인간성을 동물성과 구분해왔던 기존의 시도는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날 수 없으며, 공산주의, 민족주의, 아메리카니즘도 모두 이런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의 진단에 따르면 현대인은 ‘사유하는 동물’이 ‘사유하는 인간’으로 전환됨으로써 인간 그 스스로가 문화라는 우리에 갇혀 가축화되고, 그래서 식물처럼 생각하지만 육식동물처럼 살고, 착한 목자처럼 되기를 원하지만 나쁜 가축 떼처럼 살고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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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이런 문화에 저항하지 못하는 ‘낡은 인간’에 얽매여 ‘작은 사육자’로 살아가는 차원을 넘어, 이것을 깨뜨리고 위대한 정치, 위대한 예술, 위대한 사상을 감행해 ‘새로운 인간(위버멘쉬)’을 향해 나아가는 ‘큰 사육자’로 거듭나야 한다. 그의 이 ‘큰 사육자’의 길은, 하버마스를 비롯한 독일 좌파 지식인들이 비판했듯이, 단순히 인간개종을 위해 ‘차라투스트라 기획’을 감행하는 신종 나치스트의 길이 아니다. 그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동물의 근접성을 주장한 저 고대의 견유주의와 오늘날 유전공학의 조화를 통해 인간의 권리와 동물의 권리가 서로 보호되는 길을 추구하고자 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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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와 같은 길을 택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권력지향적인 인간을, 자연이라는 실험장에서 인간이라는 종이 거쳐 온 진화의 과정을 고려하지 않고 관념적으로만 접근하는 기존의 휴머니즘적 접근에 한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위장된 휴머니스트들처럼 유전공학의 도래로 새롭게 시작된 삶의 놀이를 냉소적으로 거부만 할 것이 아니라, ‘참된 인간’의 해방이 어떻게 하면 가능할 것인가라는 대원칙 아래서, 그에 대해 진정성 있는 태도로 바라봐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괴물이 되고 잡종의 형태가 될 위험은 유전공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적인 인간이 지니고 있는 유아적인 사유방식에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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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90년대 후반에 온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의 이 주장은 당시에 싹튼 것이 아니라, 그의 핵심 저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냉소적 이성 비판』(1983)에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현대사회에 만연해 있는 냉소주의를 분석하면서, 이 냉소주의 역시 계몽에 지친 무력한 인간의 모습임을 지적하고 있다. 마치 우리가 현대의 기술문명이 우리의 환경을 망가뜨린다고 주장하면서도 여전히 이 문명에 계속 동참하고 있듯이, 계몽 속에서 더불어 자라난 냉소주의는 우리를 끝없이 더 많은 압박과 고통에 더 잘 순응하도록 이끈다. 계몽은 이 허위의식을 제거하기보다는 이를 대중적 현상으로 일반화시키며, 마침내 스스로를 배반하고 비합리성으로 추락한다. 그는 이런 추락 현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육체와 영혼, 주체와 객체, 문화와 자연, 주관이성과 객관이성을 가르는 기존의 이원론을 거부하고, 이들이 상호 작용하면서 공존하는 ‘혼성적 실재’를 추구하며, 인간-동물-식물-기계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존재론적 구성’을 통해 포스트휴머니즘을 추구한다. 그의 포스트휴머니즘은 『유럽의 도가주의』(1989)에서도 주장되고 있으며, 이러한 그의 입장은 여러 다양한 글들에서, 후쿠야마가 언급한 역사시대의 거대한 세계체제로서의 자본주의와 아메리카니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 있다. 그는 ‘머리의 지식’이 아니라 ‘몸의 지혜’로 거대한 지배체제와 수정궁으로 상징되는 ‘역사시대’를 종식하고, ‘지역’들이 존중받으면서 서로 소통하고 연대하는 진정한 다원주의를 꿈꾸고 있으며, 자본주의의 ‘마지막 인간’을 넘어, 역사 이후의 ‘새로운 인간(post-human)’을 유전공학과 견유주의의 연대를 통해 재창조하고자 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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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이런 시도에는 여전히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 왜냐하면 이 양자의 연대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지식인들도 이제 그가 제시한 이와 같은 문제의식과 전망을 고뇌하지 않고 더 이상 미래의 인문학을 논할 수 없다는&#160;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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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사유들 ⑦ 안토니오 네그리 - 윤수종 교수 (전북대 사회학과)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1933~)는 이탈리아 아우토노미아(autonomia)1)운동 및 이론의 흐름 속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이탈리아의 특수성 속에서 오히려 전 세계적으로 다음 세기를 향한 진전방향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푸코 등과 친화성을 가지고 있으며 가타리와는 공저를 내기도 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프랑스로 망명해 가타리를 비롯한 프랑스 지식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파리 8대학 정치학 교수로 활동했고, 『전미래(Futur Anterieur)』라는 잡지를 중심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생각을 확산시켰다. 1997년 중반에는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 투옥됐다. 최근에는 자유의 몸이 되어 세계 각지를 다니면서 강연도 하고 글도 쓰고 있다. 2000년과 2004년에는 각각 마이클 하트와 『제국(Empire)』과 『대중(Multitude)』2)이란 책을 써서 사회과학계에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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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제국』은 미시논리에 함몰되고 파편화돼 있는 사유들과는 정반대의 지점에서 사유의 거시적 종합화를 시도한 백과사전 같은 책이다. 이 책은 『마르크스를 넘어선 마르크스』로부터 『구성권력』으로 이어지는 네그리의 사유의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전 세계가 휩쓸려 가고 있는 대변동(세계화)에 대해 스피노자와 마키아벨리, 그리고 들뢰즈, 가타리와 푸코에 근거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네그리(와 하트)는 현대사의 주요한 이행을 해방의 도래로서, 그리고 혼성적이고 노마드적인 정치의 기회로 파악한다. 20세기의 이른바 고전적인 제국주의들과 구별해 이 새로운 초민족적ㆍ세계적ㆍ총체적 배치를 ‘제국’이라고 부른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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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은 미국적인 것이 아니고 유럽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며 전지구적인 것이다. 네그리는 국민국가에 기반한 근대적 주권이 네트워크 권력에 기반한 제국적인 주권으로 변형돼 간다고 주장하고, 이러한 이행에서 탈근대화의 생산적인 내용으로서의 생산의 정보화에 주목한다. 더욱이 네그리는 생산을 객관적인 경제적 영역의 생산으로 좁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의 생산이라는 측면을 강조한다. 이러한 네그리의 사고의 밑바탕에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추동하는 것이 대중의 저항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는 푸코, 들뢰즈, 가타리의 생각을 받아들여 생체 정치적인 생산으로의 이행을, 차이를 용인하면서 통합을 해나가려는 제국적인 권력의 새로운 (네트워크) 양상을, 그리고 기존의 훈육사회에서 통제(관리)사회로의 이행을 강조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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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이 지배에 대해 분석했다면 『대중』은 그 부제 ‘제국시대의 전쟁과 민주주의’에서 볼 수 있듯이, 전쟁 중에도 대중이 등장했고 그에 따라 사회운동 방향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설명해 주고 있다. 그의 대중 개념은 군중, 인민, 일반적인 ‘대중’, 국민 개념과 대비되며, 상이한 문화, 인종, 인종성, 젠더, 성적 지향, 노동형태, 생활방식, 세계관, 욕망 등등 수많은 내적 차이들로 이뤄져 있어 통일적인 혹은 단일한 정체성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개념이 배제적인 개념인 데 반해 그의 대중 개념은 포괄적인 개념으로, 즉 ‘자본주의 아래에서 살고 일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특히 임금노동을 하지 않는 다양한 주민층인 빈민을 포함하게 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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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대중은 서구에서는 68혁명 이후에, 한국에서는 1987년 노동자ㆍ농민 대투쟁 이후 다양한 욕망을 담지한 채 나타났다. 노동자계급의 내적인 분화와 다양화 속에서 대중의 노동형상은 다양화되고 더욱 더 비물질적 노동의 특성을 띠어 간다는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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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새로운 주체로서의 대중의 등장과 함께 사회운동의 투쟁방식과 방향이 변하고 있다고 네그리는 설명한다. 1960년대에 나타난 게릴라 투쟁모델은 집중적 투쟁모델의 단말마를 보여주며 네트워크 투쟁으로 나아가는 과도적 형식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이탈리아의 자율운동에서 나타난 네트워크 투쟁은 그 이후 사회운동의 방식으로 널리 확산되며 대안세계화운동에서 절정에 달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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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네트워크 투쟁으로의 변화과정 속에서 대중의 욕망투쟁과 주체성 생산투쟁이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한다. 기존의 이해투쟁과 대비되는 욕망투쟁의 전개 속에서 대중은 자본이 부과한 자본주의적 주체성 생산에 대항해 각종 시설들 속에서 다양한 일상적 파업을 통해 자본의 훈육을 거부하면서 색다른 주체성 생산(특이화)을 시도한다고 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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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그리의 이러한 주장은 많은 쟁점과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기존의 좌파 운동에 대해 비판점을 형성하고 있다. 네그리의 이러한 입장은 당 형태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네트워크 형식의 운동을 강조하고 대안세계화운동, 다양한 소수자운동, 대안운동을 비롯한 자율운동의 활성화에 희망을 걸고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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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br />
1) 자율주의. 이탈리아 비의회 좌파운동의 커다란 흐름이자 동시에 기존 좌파(공산당)에 대한 이론적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1970년대 들어 노동자운동에서 나타난 ‘노동거부’를 통해 공산주의적 전통을 부정하고 현실사회주의 사회와 대립한다.<br />
2) 흔히 ‘다중’으로 옮기나 필자는 ‘대중’으로 옮겼으므로 이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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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사유들 ⑧ 비토리오 회슬레 - 나종석 강사 (연세대ㆍ철학과)
비토리오 회슬레(Vittorio Hosle)는 1960년에 태어난 젊은 철학자이지만, 객관적 관념론이라고 불리는 플라톤 및 헤겔 철학의 전통을 새롭게 발전시키고자 노력하는 대표적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헤겔의 체계』, 『도덕과 정치』, 『현대의 위기와 철학의 책임』 그리고 『철학적 대화』 등을 비롯해 형이상학, 실천철학, 자연철학 그리고 철학사 등에 관련한 무수히 많은 저서와 논문들을 통해 현대 인류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의 근원을 성찰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br />

이성을 통해 객관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회슬레는 이성의 억압성과 폭력성에 주목하는 포스트모던적 사상의 흐름과는 근본적으로 관점을 달리한다. 그는 니체, 하이데거 등 독일 철학자들이나 이들에게 큰 영향을 받은 푸코나 데리다, 들뢰즈 등과 같은 프랑스의 현대 사상가들이 내세우는 이성에 대한 총체적 비판의 토대가 튼튼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그는 몇 가지 예외적 흐름을 제외한다면 현대의 다양한 철학적 사조들은 ‘이성과 도덕적인 가치 및 의무에 대한 믿음’을 회의하고 파괴하는 경향 확산에 커다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흐름들이 지속되면 인간의 비판적 정신이 완전히 마비되고, 시대가 제기하는 도전들을 해결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이 파괴될 것이라고 염려한다. 따라서 그는 총체적 이성 비판에 대해 강력히 반론을 펼치면서, 이성과 객관적 진리의 추구라는 전통적 서구 철학의 담론을 이어받고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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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슬레의 철학은 민주주의, 환경위기, 시장 경제, 종교 등 21세기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과제들에 대해 새로운 이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객관적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적 사유가 비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이라고 생각한다. 시민들의 민주적 합의보다 객관적 진리를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철학이 다양한 견해들을 억압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철학과 민주주의의 독자성을 오해하는 데서 생긴 것이다. 회슬레가 보기에 철학과 민주주의는 서로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서로 협력해야 한다. 비판적 사유를 포기하지 않는 철학은 민주주의적 결정의 정당성을 되물을 수 있다는 점에서 건전한 민주주의와 더불어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다수가 어떤 규칙에 동의했다고 해서 그것을 정의롭다고 보는 여론 독재로 흐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사람들의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고 이들 사이의 토론을 통해 더욱 건전하고 옳은 결정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을 견지하는 민주주의를 철학적 사유가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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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슬레는 21세기가 생태적 세기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환경위기를 초래한 근대의 인간중심주의적 관점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과 여타 생명체의 가치를 동등한 것으로 바라보는 심층생태주의적인 사고도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중심주의의 한계는 인간만이 내적 가치를 갖고 있고 다른 생명체는 인간의 목적 실현을 위한 대상으로 본다는 점에 있다. 이와는 달리 심층생태주의는 인간뿐 아니라 여러 생명체들 또한 내재적 가치를 갖고 있음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렇지만 이 관점은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적절하게 해명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모든 자연적 존재들이 동등하게 가치가 있다면,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도덕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심층생태주의는 자연과 생명의 위대성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왜 지구에 인류가 존재해야 하며, 왜 우리는 미래 세대뿐 아니라 여타 생명체를 존중해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해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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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슬레는 세계화가 가져오는 여러 부작용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보편주의자인 그는 세계의 여러 지역들이 서로 만나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는 과정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세계화가 초래하는 부와 빈곤의 양극화 및 환경파괴의 심화 현상을 크게 염려한다. 따라서 시장이 스스로 움직이는 자기 완결적 시스템이라고 생각하는 신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을 비판한다. 국가의 개입을 금하는 것은 허구적이라는 점뿐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을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가치관을 전제하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시장경제를 정의의 관점에서 재조정할 것을 요구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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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회슬레는 이성의 과잉이 아니라 정의와 도덕의 보편적 원칙에 대한 사유를 추구하는 이성에 대한 믿음의 상실이 현대 사회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보면서, 현대의 위기를 극복할 이성적 사유의 복권을 역설한다. 이성의 본질을 억압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만 보고 이와 전면적 결별을 선언하는 포스트모던적 사유는 급진적 외양에도 불구하고 이성을 도구적 합리성과 동일시하는 이성에 대한 편견의 표현이 아닌가? 또한 편협한 시야에서 이성에 접근하고 그것을 해체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우리들에게서 건전한 비판적 사유의 싹 자체를 앗아가 우리를 현존 질서에 순응케 할 독버섯은 아닌가?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인가를 토론하고 논증하고 반박하는 이성적 사유와의 작별이 우리가 취해야 할 사유의 길인가? 회슬레의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독자들의 몫일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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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사유들 ⑨ 장­뤽 낭시 - 박준상
장-뤽 낭시(Jean-Luc Nancy, 1940~)는 현존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80년대 말 과도한 심장 이상 수축으로 심장 이식수술을 받게 되면서 매우 어려운 시기를 거쳤으나 지금까지도 계속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낭시는 개인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매우 가까웠던 동료 필립 라쿠-라바르트(라쿠-라바르트 역시 반드시 주목해봐야 할 사상가인데, 안타깝게도 최근 타계했다)와 함께 초기 독일낭만주의(슐레겔 형제, 노발리스)의 기관지 『아테네움』에 실렸던 중요한 논문들을 편역한 책 『문학적 절대』를 내놓음으로써 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초기 독일낭만주의와 더불어 하이데거, 셸링, 칸트, 니체와 같은 사상가들에 대한 해석을 통해 자신의 사유의 출발점을 마련했으며, 근대 정치 철학과 여러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파시즘, 나치즘, 공산주의)을 검토함으로써 매우 독창적이고 특이한 정치 철학을 구축해냈다. 우리는 현재 아쉽게도 다만 그 정치 철학의 단면을 모리스 블랑쇼를 경유해서『마주한 공동체』에서 볼 수 있을 뿐이다(모리스 블랑쇼/장-뤽 낭시,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 2005). 그러나 정확히 하자면 블랑쇼가 『밝힐 수 없는 공동체』에서 보여준 공동체에 대한 사유의 원류에는 낭시가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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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시는 동구권의 몰락과 교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패퇴 이후에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는 공산주의의 문제와 공동체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것을 자신의 주요한 과제로 삼았다. 알랭 바디우가 그에게 ‘최후의 공산주의자’라는 명칭을 부여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낭시는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개인주의를 넘어서는 공동 존재와 공동체에 대한 요구가 취소될 수 없다고 본다. 낭시의 정치 철학의 독창성은 공동체가 어떠한 종류의 사회(국가를 비롯해서 크든 작든 모든 동일성의 집단)와도 일치될 수 없다는 주장 가운데에서 발견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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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에서부터 교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 이르기까지 자주 이상적(理想的) 공동체는 구축해야 할 사회로서 추구됐다. 낭시가 반대하는 것은 ‘공동체’를 ‘사회’와 일치시키려는 이상주의적ㆍ전체주의적 시도이고, 그가 우리의 주목을 요구하는 것은 사회 내로 환원되지 않는 관계 또는 사회 내에서 고착되지 않는 ‘관계’ 자체다. 그 ‘관계’는 단순히 반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의 진정한 조건이자 근거인 우리의 ‘자연적인’ 평등의 장소이며 소통의 장소다. 낭시는 그 장소를 ‘무위(無爲, desœuvrement)’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그는 그 무위의 장소가 결코 어떤 구도, 목적, 기획, 프로그램에 따라 규정되거나 고정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는 정치적 투쟁이나 제도에 대한 개혁의 시도나 기존 사회 구조에 대한 변혁의 노력이 필요 없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다만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윤리적, 총체적, 사회적 가치를 담보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어떠한 개념적, 관념적 구도에도 종속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낭시의 메시지는 사회가 동일성의 가치 기준에 따라 스스로 구조화되고 폐쇄적으로 될 때, 즉 사회 바깥에서의 지정될 수 없는 무위와의 관계를 망각할 때, 필연적으로 파탄의 위험에 놓인다는 것이다. 또한 그 무위의 관계가, 즉 궁극적으로 어떠한 존재 이유도 존재 목적도 어떠한 명확한 동일성의 근거도 갖고 있지 않은 유토피아적(또는 불가능한) 장소가 모든 사회의 중심에, 즉 현실의 모든 정치적ㆍ경제적ㆍ 이념적 관계의 중심에 보이지 않게(또는 블랑쇼의 표현을 따르면, “밝힐 수 없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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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시는 현재 프랑스에서 알랭 바디우, 앙리 말디네, 자크 랑시에르, 필립 라쿠-라바르트 등과 함께 가장 부각된 철학자들 중 한 사람이다. 낭시의 가까운 동반자였던 자크 데리다는 2000년 『접촉, 장-뤽 낭시』를 출간해 이 점을 확인시켰다(낭시는―라쿠-라바르트도 마찬가지이지만―한국에서 흔히 데리다의 제자로 소개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오해다. 낭시가 데리다의 해체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소통ㆍ공동ㆍ접촉 등의 정치적 주제들을 독자적인 관점에서 전개해 나갔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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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 저서로는, 바타유에 대한 해석을 거쳐 동일성의 지배 바깥의 공동체, 조직ㆍ기관ㆍ이데올로기 바깥의 ‘공동체 없는 공동체’에 대한 사유를 명확히 제시한 『무위의 공동체』, 실존이 어떻게 타인과 함께 하는&#160; 공(共)실존인가를 밝힌 『복수적 단수의 존재』, 개념ㆍ명제 너머의 의미, 개념ㆍ명제의 성립조건으로서의 의미, ‘의미의 의미’에 대한 정식화인 『세계의 의미』, 현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전개한 『사유의 무게』 등이 있다. 그의 저서들이 널리 번역되면서 그의 사상도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졌지만(최근 것들까지 포함해서 그의 저서들은 거의 영역되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주저들 가운데 하나인 『무위의 공동체』(박준상 옮김)와 이안 제임스가 쓴 연구서 『장-뤽 낭시 철학 입문』(민승기 옮김)이 번역 중에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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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사유들 ⑩ 자크 랑시에르 - 진태원 강사(서울대ㆍ철학과)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는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 등과 더불어 21세기 벽두 프랑스 철학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알튀세르의 후예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불화』(1995),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1998),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2005) 같은 혁신적인 정치철학 저서들뿐 아니라, 지적 평등을 교육의 기초로 제시하는 『알지 못하는 선생』(1987)에서부터 아날학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은 『역사의 이름들』(1992)을 비롯해 문학, 영화 및 미학에 관한 독창적인 작업으로 세계 학계에서 대단한 명성을 누리고 있다. 이처럼 그가 광범위한 주제에 관해 많은 책들을 출간하고 있지만, 그의 저술 전체는 단일한 주제, 곧 근원적인 평등의 원리에 대한 다양한 변주로 이해될 수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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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의 원리에 대한 옹호’라는 문구는 진부한 느낌마저 주는 것이 사실이다. 평등을 반대하든 찬성하든 간에, 철학자 또는 사상가치고 평등에 관해 한두 마디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랑시에르가 옹호하는 평등은 기회의 평등이나 조건의 평등, 심지어 결과의 평등도 아니다. 그것은 원리로서, 공리(axiom)로서의 평등이다. 곧 평등은 달성해야 할 (또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나 과제가 아니라, 항상 이미 모든 인간의 행위 속에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가 이해하는 정치 역시 이러한 평등 원리의 옹호와 다르지 않으며, 이는 또한 올바른 의미의 민주주의이기도 하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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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말 사람들은 실제로 평등할까? 가령 지적 능력의 차이는 어떨까? 우리가 알다시피 천재와 바보, 수재와 둔재, 세계적인 석학과 범인(凡人) 사이에는 부인할 수 없는 능력의 차이, 괴리가 존재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차이를 좁히려는 노력이 교육의 주요 목표 중 하나가 아닐까?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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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랑시에르는 이러한 차이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알지 못하는 선생』은 19세기 네덜란드로 이주한 장 조제프 자코토(Jean-Joseph Jacotot)라는 프랑스 교사의 경험을 들려준다. 네덜란드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 불어 선생은 불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네덜란드 학생들이 불어-네덜란드어 대역본 책 한 권을 교사의 가르침 없이 그들 스스로 읽으면서 불어로 말하고 글을 써나간다는 놀라운 사실을 경험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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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경험의 교훈은 무엇일까? 랑시에르는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교육이란 지식을 소유한 스승이 무지한 제자들에게 지식을 전수하는 과정이 아니라는 점이다. 교육은 학생들(또는 무언가를 알려고 하는 사람들 일반)이 이미 지니고 있는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발휘하고 연마해가는 과정이지, 지적으로 우월한 누군가가 지적으로 열등한 이들을 가르치고 이끌어가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이는 곧 지식의 위계, 지적 능력의 격차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교육의 행위 자체는 항상 이미 지적 능력의 평등을 전제하고 있다. 누군가가 이미 알지 못한다면, 이미 알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교육이란 불가능한 것이다.<br />
이러한 지적 평등의 원리는 정치에 관해, 민주주의에 관해 새로운 빛을 비춰준다. 랑시에르는 서양 정치사상의 역사 전체는 민주주의의 불가능성에 대한 다양한 논증의 역사라고 간주한다. 왜 민주주의란 불가능한 정치일까? 또는 적어도 최악의 정치일까? 그것은 민주주의가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두지 않는, 다시 말해 어떤 특별한 통치의 능력도 인정하지 않는 정치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통치자가 될 수 있고 또 누구나 피통치자가 될 수 있는 정치,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 자체이며, 여기에는 모든 사람의 평등에 대한 공리가 깔려 있다. 통치에 특별한 자격을 가정하는 것은 사회적 분업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는 또한 능력의 차이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추첨이야말로 민주주의에 걸맞은 제도이며 선거는 본질상 귀족주의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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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곧바로 다음과 같은 비판들이 제기된다. 과연 전문적인 지식과 자격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이 현대 사회와 같이 복잡한 사회를 제대로 통치할 수 있을까? 더욱이 현대 사회의 대중은 공적인 문제에는 무관심하고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평등한 소비 주체들일 뿐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등만을 구현하고 있지 않은가?<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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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우파와 좌파의 구별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랑시에르의 주장은 황당한 유토피아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사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는 기존 제도권 정치 안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이들이 통치하거나 사회적인 몫의 분배 질서를 뒤흔드는 일이 계속 되풀이돼 왔다. 고대 그리스의 빈민들의 반란이나 파리 코뮌, 68 운동 등은 그에 대한 증거들이다. 따라서 이는 적어도 유토피아가 아니라 하나의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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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역으로 이러한 사건의 분출은&#160;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번득임이었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랑시에르는 거부할지도 모르지만, 그가 좀 더 대결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왜 랑시에르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늘 예외적인 사건, 봉기로만 존재하는가? 지속적인 제도 속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일은 불가능한가? 평등의 원리를 지속적인 과정 속에서 구현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아니, 그 이전에 대중이 스스로 행위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br />
]]></description></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무한도전과 신자유주의</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1713961</link><pubDate>Wed, 21 Nov 2007 22:4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1713961</guid><description><![CDATA[http://blog.naver.com/caujun/60043223423에서 펌.
무한도전 자체에 대한 본격비평이라기보다는 무한도전을 빌어서 하는 얘기 정도로 읽으면&#160;될 듯.&#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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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무한도전&gt;과 신자유주의: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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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시대 일상과 노동에 대한 ‘리얼 버라이어티 쇼’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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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의 도래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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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률 30%대를 넘나들며 매주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lt;무한도전&gt;이라는 프로그램의 모토는 ‘국내 최초 리얼 버라이어티 쇼’다. 이 말 속에는 이전까지의 버라이어티 쇼들이 ‘리얼’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담겨있을 것이다. 물론 &lt;무한도전&gt; 이전에도 많은 버라이어티 쇼들이 ‘리얼’을 표방했었다. 가령 강호동의 진행으로 남녀 연예인들이 서로 ‘짝짓기’를 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인기를 끌었던 &lt;연애편지&gt; 같은 프로그램은 이들이 ‘정말로’ 서로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었고, 그것이 그 프로그램의 인기비결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모든 것이 쇼에 불과했다는 것이 저절로 드러났고, 몇몇 다른 모방 프로그램들이 생겨나면서 연예인 짝짓기 프로그램은 자취를 감췄다. 사람들은 즐겁게 쇼를 보면서도 그것이 ‘진짜’는 아니라는 생각을 언제나 하고 있는데, &lt;무한도전&gt;은 여기서 ‘이것은 진짜입니다’라고 크게 말하고 들어가는 프로그램이다. 실제로 &lt;무한도전&gt;의 에피소드들은 ‘리얼’한 것 때문에 인기를 얻었다. 자칭 ‘대한민국 평균이하’라 일컫는 여섯 명의 연예인들은 매주 갖가지 ‘도전’을 시도하는데, 그중 한 편에서는 디자이너 이상봉이 연 패션쇼에 직접 모델로 서기도 했고, 자신들이 만든 노래들로 각종 행사에 직접 가서 공연을 펼치기도 했고, 가수이자 연기자 이효리를 여주인공으로 해서 드라마를 만들기도 했으며, 농촌특집에서는 비를 맞으며 모를 심는 장면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외에도 시시때때로 멤버들 중 하나 또는 여럿을 대상으로 몰래카메라를 실시하고, 이들의 집에 갑자기 쳐들어가서 부스스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며, 맥주 한 잔씩을 하며 서로 마음에 담긴 얘기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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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버라이어티 쇼들이 스튜디오 안에서 각본에 맞춰 진행을 하는데 반해, &lt;무한도전&gt;은 거의 언제나 야외로 나가서 그 주에 주어진 과제/도전을 수행하는 플롯으로 진행되고, 이것이 이 프로그램의 ‘리얼리티’를 보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언제나 연예인들은 카메라 앞에서는 서로 웃으며 이야기와 농담을 해왔지만, &lt;무한도전&gt;에서는 먹을 것 앞에서 서로 앞다투어 집착하는 모습을 담고, 서로의 뒷이야기를 카메라에 대고 공개해서 상대방을 당황하게 하며, 그 중 한 명(박명수)은 아예 대놓고 호통을 치는 것으로 인기를 얻었다. 방송상에서 다른 멤버들에 의해서 ‘밤에 일하는 사람’ 혹은 ‘술집사장’과 같은 별명으로 불리며 웃음을 주었던 정준하는 최근 실제로 여성접대부까지 고용하며 영업을 하는 술집에 깊이 관여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 전까지 버라이어티 쇼에서 부분적으로만 표출되었지만 전면화하지 않았던 여러 요소들―도전과제 수행, 몰래카메라, 음주, 개인적 감정 표출, 사담―을 한꺼번에 아우르면서, 즉 연예인과 이들의 사생활, 그리고 이들이 방송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이를 ‘리얼’이라 이름붙인 &lt;무한도전&gt;은 그전까지는 이와 동일한 플롯과 영향력(인기)을 가진 프로그램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한국 버라이어티 쇼의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lt;무한도전&gt;을 따라 ‘리얼’을 표방하는 &lt;무한걸스&gt;, &lt;하이파이브&gt;, &lt;라인업&gt; 등의 프로그램들이 쏟아지고 있다. 가히, ‘리얼’의 전성시대라 할 만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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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떤 ‘리얼’인가? 이 프로그램들이 표방하는 ‘리얼’은 진정한 ‘리얼’인가? &lt;무한도전&gt;의 과제 수행들 속에서 말해지는 ‘리얼’은 이 연예인들이 다른 연예인들, 혹은 일반인들이 하는 일을 매주 하나씩 해본다는 의미에서의 ‘리얼’일 뿐이다. 이들이 서커스를 하는 일, 모델을 하는 일, 모를 심는 일, 면접을 보는 일, 영어마을에 가는 일, 드라마를 찍는 일 등을 가지고 우리는 이들이 진정한 삶의 ‘리얼리티’를 체험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껏 스튜디오에서만 서로 농담을 하면서 인기를 얻었던 이들에게는 신기한 ‘리얼’일지 몰라도, 실제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에게는 여전히 하나의 가상이자 쇼일 뿐이다. 이 프로그램의 메인 진행자를 맡고 있는 유재석은 &lt;무한도전&gt;이 국내 버라이어티 사상 최초의 ‘3D’(Dirty, Dangerous, Difficult) 프로그램 이라고 자괴하지만, 이런 종류의 ‘3D’를 체험하면서 회당 몇 백만원을 출연료로 받는다면 이를 마다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lt;무한도전&gt; 멤버들이 이 프로그램을 정말로 ‘3D’라고 생각한다면 아마 이미 멤버교체가 몇 번씩 되었을 것인데, 여섯 명의 멤버들은 매주 빠짐없이 카메라 앞에 서고 있지 않은가? &lt;무한도전&gt;의 ‘3D’는 현재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담당하고 있는 ‘3D’와 완전히 다른 의미, 아니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하면, &lt;무한도전&gt;의 ‘리얼’은 여전히 가상이고, 여전히 쇼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판타지로서의 ‘리얼’이라는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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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역설적으로 &lt;무한도전&gt;의 가상적 ‘리얼’은 현 시기 한국사회의 가장 ‘리얼’한 어떤 풍경, 다시 말하면 신자유주의적인 풍경을 드러낸다. ‘신자유주의적인 풍경’이라는 말은 길게는 90년대 초반 이후, 짧게는 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성격, 즉 세계화, 경쟁, 자본의 자유, 노동권의 몰락, 비정규직 확산, 빈익빈 부익부, 복지의 축소, 삶의 교환가치화와 그로 인한 전쟁같은 삶의 측면들을 일컫는다.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변화함으로써 경제나 사회영역 뿐 아니라 대중문화 영역 내부에서도 이런 변화를 징후적으로 반영하게 되는데, &lt;무한도전&gt;을 비롯한 일련의 ‘리얼’ 프로그램들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런 신자유주의적인 현실을 어쩔 수 없이, 그러나 아주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lt;무한도전&gt;이 ‘국내 최초 리얼 버라이어티 쇼’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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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의 시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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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그램의 이름인 ‘무한도전’은 의미심장하다. &lt;무한도전&gt;의 모태가 되었던 &lt;무모한 도전&gt;이 매주 기상천외한 도전을 ‘무모’하게 벌인다는 데 초점을 맞췄던 데 비해, &lt;무한도전&gt;은 도전의 ‘무모성’보다 도전의 ‘무한성’을 강조한다. 도전의 ‘무모성’은 언제나 코미디의 단골소재였지만, 도전의 ‘무한성’은 새롭다. 프로그램의 멤버들은 언제나 끊임없이 무언가에 도전해야 하고, 그것이 자신들의 밥벌이가 된다. 다시 말하면, 시청률을 끌어 올려 개편 때마다 ‘잘리지’ 않기 위해 이들은 어떻게든 ‘무한도전’을 하고 있는 셈이다. 흥미롭게도, 신자유주의 시대의 모토 역시 ‘무한도전’이다. 1994년 11월 동남아 순방길에서 ‘시드니 구상’이라는 것을 발표하면서 김영삼 전대통령이 ‘세계화’라는 말을 처음 대중화시킨 이후로, 우리의 경쟁상대는 한국의 누군가가 아니라 미국이나 중국이나 덴마크의 누군가가 되었다. 그 세계화의 장밋빛 그림이 우리의 삶을 파괴시킬 수도 있는 엄청난 괴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의 전측면이 철저히 신자유주의로 ‘구조조정’되면서, 한국인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한도전’을 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2007년 현재 한-미 FTA의 타결 이후 정부가 내보내고 있는 광고의 문구는 이를 더욱 명확히 보여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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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솜씨, 4900만의 식탁에만 오르기엔 너무 맛있습니다. 당신의 기술 10만 Km의 도로만 달리기엔 너무 아깝습니다. 당신의 디자인, 90개의 백화점에만 걸리기엔 너무 멋집니다. 당신의 아이디어, 당신의 능력, 당신의 열정, 이제 더 큰 무대에서 펼쳐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경제영토를 넓힐 기회―세계와의 자유무역협정입니다!" (자유무역협정 국내대책위원회)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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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가입국 중 최장노동시간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한국에게 이제 때로는 ‘한민족의 저력’을, 때로는 ‘당신의 솜씨와 기술과 디자인’을 호명하는 이 엄청난 프로파간다는 “더 큰 무대”로 나갈 것을 요구한다. 개개인이 부가가치를 창조하며 전 세계를 상대로 경쟁하는 무한경쟁의 시대가 제대로 펼쳐진 것이다. 무한도전은 무한경쟁을 낳고, 무한경쟁은 무한이기주의를 낳는다. 이 새로운 신자유주의의 마태복음은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시대를 얘기하고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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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경쟁과 무한이기주의는 &lt;무한도전&gt;의 플롯이 가지고 있는 핵심이기도 하다. 우리는 ‘대한민국 평균이하’들이 게임과 경쟁에서 각종 반칙을 쓰며 게임의 규칙 자체를 무너뜨리고, 그 와중에 서로를 물어 뜯으면서 결국 누군가는 목표를 달성하는 모습을 재밌게 보고 있다. 그 과정에서 &lt;무한도전&gt; 멤버들 각자의 입담이나 좌충우돌하는 모습이 웃음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리얼’한 삶의 모습도 그와 닮아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들의 그런 모습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다. 이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지칭하는 ‘무한이기주의’는 박명수에 의해 가장 극적으로 재현된다. 오랜 무명생활을 딛고 &lt;무한도전&gt;으로 새로운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박명수는 산전수전을 겪은 사람답게 ‘인기’라는 목표를 위해 가장 이기적이고, 가장 전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캐릭터이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연예인으로서 치명적인 것이었을 이런 비신사적인 박명수의 캐릭터가 인기를 얻게 된 이유는 그의 행동이 ‘무한도전’의 상황에서 가장 적합하고 효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색한’ 정형돈이 자주 ‘편집’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닐까.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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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이라는 명제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대응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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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남아야 한다’는 것과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는 것은 &lt;무한도전&gt;의 핵심 이데올로기인데, 이것은 방송의 가상 플롯을 넘어 실제로 이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연예인들의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 대중문화 영역에서 활동하는 연예인들은 비정규직-계약직 노동자여서 이들에게는 어떠한 종류의 ‘정규직’ 보장이 없다. 일단 인기를 얻으면 소득이 높아지기는 하지만, 인기가 사라지는 순간, 그래서 불러주는 이가 없는 순간 이들은 어느새 ‘백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생기는 긴장과 불안을 상쇄하기 위해서는 대체로 세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다양한 연예 프로그램에 최대한 많이 출연하여 인기를 유지하거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거나, 연예인 외의 생계수단을 병행하는 것이다. &lt;무한도전&gt;의 모든 멤버는 다른 프로그램에도 꾸준히 겹치기 출연을 하고 있고, 정준하나 박명수, 하하 등은 가수, 연기자, 뮤지컬 배우 등으로 노동 영역을 확장하고 있으며, 정준하, 박명수는 각각 주점과 피자체인사업 등을 통해 다른 생계수단을 확보하고 있다. 이렇게 연예인 노동의 특성상 이들은 ‘인기’에 연연해 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이들이 &lt;무한도전&gt;에서 매번 ‘무한이기주의’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실 그들 노동의 본질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비정규직-계약직 노동자, 나아가 정규직 노동자에게서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인기’가 없으면 ‘잘리는’ 연예인들처럼, 신자유주의시대의 노동자들은 부가가치창출이 안 되는 순간 ‘구조조정’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은 노동자 안에서도 정규직-비정규직으로 분할되어 단합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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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불안정한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안정적인 것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독자적인 자신만의 능력을 갖거나 자신을 확실히 챙겨줄 수 있는 사람을 잡아야 할 것이다. 역시 박명수가 보여주는 캐릭터는 이를 반영한다. 그는 자신의 인기를 위해 끊임없이 유행어를 개발하고, 상황극을 만들어 내는, 생산성이 높은 연예인이다. 하지만 불안한 노동자의 입장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지켜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이 만든 유행어나 행동 등을 다른 멤버들이 할 때마다 호통을 치며 ‘자기 것’이라는 영역표시를 한다(지적재산권). 또, 인기가 많은 ‘국민 MC’인 유재석 밑에서 언제나 ‘2인자’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유재석의 진행능력을 분석하며 배우려고 하고, 그와의 관계를 언제나 돈독히 하려는 노력을 한다. 이것은 다른 멤버들에게는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실은 철저히 자신의 노동이 가진 불안요소를 최소화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소위 ‘라인’이라는 말이 나온다. 연예계에서 일종의 문화권력이 된 진행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그들이 잘 봐주는 후배들이 그들과 함께 프로그램에 동반출연하게 되고, 이것이 소위 ‘규라인’(이경규)이니 ‘용라인’(김용만)이니 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lt;무한도전&gt;에 도전장을 내며 등장한 &lt;라인업&gt;이라는 프로그램은 소문으로만 떠돌던 연예계 ‘라인’을 직접 거론하면서 아예 ‘규라인’과 ‘용라인’을 중심으로 한 연예인들을 모아놓았다. 이 과정에서 ‘라인’의 핵심인 두 진행자들은 무한권력을 행사하면서 패널 연예인들을 매주 ‘천국’과 ‘지옥’으로 보낸다. 비정규직-계약직 노동자들이 고용주에게 꼼짝 못하고, 폭력까지 감내하면서, 지옥으로 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노동하는 모습을 우리는 &lt;라인업&gt;의 패널 연예인들에게서 볼 수 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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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정치학: ‘몸개그’, 포스트포디즘, 생체정치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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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 위한 이 연예계 비정규직-계약직 노동자들의 노력의 백미는 ‘몸개그’에서 나타난다. &lt;무한도전&gt;의 멤버들은 어떤 ‘도전’에서도 몸개그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이들은 그것이 시청자들에게 ‘빅재미’를 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빅재미’는 시청률이고, 시청률은 이들에게 인기이자 돈이다. 결국 이들은 인기/돈/생존을 위해 몸개그를 하는 셈인데, &lt;무한도전&gt;의 몸개그는 말 그대로 자기 온 몸을 던져서 땅에 넘어지거나 함으로써 웃음을 유발하는 행위다. 이것은 슬랩스틱과는 또 다르다. 슬랩스틱은 철저히 계산된 각본과 플롯에 따라 몸을 던짐으로써 계속되는 웃음의 고리를 만들어내지만, 몸개그는 각본이나 플롯이 있다기보다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무작정 몸을 던지는 행위라는 점에서 슬랩스틱보다 더욱 원초적이다. &lt;무한도전&gt;의 멤버들은 농촌에 가서 비오는 날 100미터나 되는 논두렁을 그릇 쟁반을 이고 달린다. 그 과정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들은 미끄러져 쓰러진다. 또 다른 편에서 이들은 겉으로는 판단이 어려운, 물이 가득찬 축구공과 일반 축구공 중 하나를 선택하여 헤딩을 하는데, 물 축구공을 선택한 사람은 그 충격에 바로 쓰러질 수밖에 없다. 이런 몸개그에서 나오는 ‘빅재미’는 사실 다른 어떤 계산된 유머보다도 강력하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 원초성에는 어떤 처절함이 담겨있다. 이 몸개그가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자의 어떤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떤 아이디어를 내고, 어떤 인기를 누리고, 어떤 보수를 받는다고 해도, 결국 이 연예-노동자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팔아야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기 ‘몸’이다. 이들의 ‘몸’은 결국 자신들이 가진 유일한 ‘생산수단’이다. 논두렁에서 쓰러지고, 물공을 헤딩하다 넘어지는 이들의 몸개그에는 몸을 유일한 생산수단으로 가진 노동자들의 처절함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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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개그콘서트&gt;의 인기코너 ‘마빡이’(현재는 ‘귀신이 산다’)와 ‘헬쓰보이’는 모두 ‘몸’을 웃음의 핵심에 놓는다는 점에서 &lt;무한도전&gt;의 몸개그와 닮아있다. ‘마빡이’는 20분 넘는 시간동안 개그맨들이 이마를 치는 동작을 반복하고, 그 과정에서 얼굴이 빨개지며 힘들어하는 모습이 웃음을 유발한다. ‘헬쓰보이’는 평범한 몸을 가진 남자 개그맨 세 명이 매주 자신의 몸을 단련한 결과 ‘근육남’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못생긴 얼굴이나 몸매를 가지고 웃음을 유발하는 차원을 넘어서, 이 두 코미디는 자신의 몸을 반복적으로 학대하거나 자신의 몸을 꾸준히 관리하는 과정을 지속적으로 화면에 담는다. 대중문화 혹은 문화일반이 가지는 어떤 창조성을 거부하고, 자신의 몸을 반복과 관리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이 코미디는 신자유주의 시대 자본주의의 본질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낸다. FTA 광고에서 보이듯, 우리 시대는 ‘창조’를 최대 과제로 설정하는 듯하지만, 실제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내는 현실은 극소수의 창조자와 대다수의 노동자일 뿐이다.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이 부가가치 창조의 시대에 여전히 가장 반복적인 노동을 수행해야 하고, 거기에서라도 쫓겨나지 않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몸과 시간을 관리해야 한다. 아무 생각없이 반복적인 노동을 수행하지 못하는 자(‘마빡이’)나 꾸준히 자신을 관리하지 못하는 자(‘헬쓰보이’)는 이 시대 어느 곳에도 설 데가 없다 (역에 가면 누울 데는 많다). 자신의 몸을 사정없이 던지지 못하는 자(&lt;무한도전&gt;) 역시 인기를 누리며 노동을 계속할 수 없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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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무한도전&gt;의 몸개그는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변치 않는 육체노동의 원초적 처절함이나 비정규직 노동자의 ‘제 것이 아닌 몸’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lt;무한도전&gt;의 다른 측면은 포스트포디즘 시기 노동의 한 특질을 포착하기도 한다. 포스트포디즘 시기의 노동은 포디즘 시기와는 달리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인해 노동의 기능이 다변화되고, 노동자에게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그에 맞는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능력까지 요구된다. 반복과 관리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동시에 다양성과 창조성 역시 겸비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은 신자유주의 시대 가치 창조의 핵심적 요인으로 선전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누구나 ‘지식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lt;무한도전&gt;의 멤버들에게는 ‘지식’은 거의 없는 편이지만, 이들은 다양한 버라이어티 쇼 분야에서 인정받은 연예인이라는 사실이 무색하지 않게 그 어떤 ‘도전’에서도 웃음을 유발하는 능력을 가졌다. 눈밭에서도, 논밭에서도, 스튜디오에서도, 콩트에서도, 모델로도, 체육관에서도, 녹음실에서도 이들은 그 상황에 최적으로 적응하면서 거기서 자신의 캐릭터를 살려낸다. 기실 문화산업의 종사자들에게 이러한 포스트포디즘적 직무능력은 포디즘 시절부터 요구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t;무한도전&gt;이라는 프로그램 자체가 가지고 있는 포스트포디즘적 성격(매주 다른 과제, 매주 다른 형식, 매주 다른 장소―버라이어티!)은 이들의 노동을 더욱 확실히 부각시켜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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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뿐 아니라, &lt;무한도전&gt;은 촬영의 시간과 장소를 전혀 가리지 않음으로써, 멤버들의 ‘모든 것’을 프로그램의 대상으로 삼는다. ‘빨리 와주길 바래’ 코너를 통해 카메라는 멤버들의 집까지 가서 이들을 깨우고, 정형돈이 이사를 갈 때는 멤버들을 동원하여 직접 이삿짐을 나르게 하며, ‘빨간 하이힐의 비밀’을 캐기 위해 멤버들은 노홍철의 집을 기습 방문한다. 다시 말하면, &lt;무한도전&gt; 멤버들은 자신들의 일상을 프로그램의 일부로 사용해야 한다. 일상이 노동이 되고, 노동이 일상이 되는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가 말하는 ‘생체정치’(biopolitics)의 &lt;무한도전&gt; 버전이다. 그러니까, 자본(방송국/PD)은 이제 노동자(&lt;무한도전&gt; 멤버들)의 노동시간만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일상까지도 노동에 귀속되게 하여 노동과 일상의 경계를 허물어 일상/삶/몸의 영역까지도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도 회사가 끝나자마자 회사가 끊어준 어학원에 가고, 헬쓰클럽에서 몸을 단련하여 지덕체 모두를 완벽히 관리해야 하는, 자신의 시간과 몸을 온전히 자본에게 바쳐야 살 수 있는 이 시대 노동자들에 비한다면 멤버들에 대한 카메라의 빈번한 습격과 이들의 당황해하는 모습 속에서 유발되는 웃음들은 생체정치의 가장 유머러스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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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의 몸과 일상을 쥐락펴락하며 ‘판을 깔아준’ PD들은 방송자막을 통해 이들을 진정한 ‘평균이하’로 묘사하며 조롱을 일삼는다. 몸개그까지를 포함한 생체노동 과정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이들이 이 노동과정을 실행하는 이들에게 행하는 조롱은 (비록 그 행위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일지라도) &lt;무한도전&gt; 멤버들의 노동이 매주 명백하게 소외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죽도록 일하라고 해서 죽도록 했더니 죽도록 했다고 비아냥대는 꼴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동의 최종 결과는 여기 아닐까? 도전하고 경쟁해서 가치를 창조하라고 닦달하더니 그렇게 열심히 하다가 아무런 결과물을 못내거나 지쳐 쓰러진 자들에게는 한없이 비정한 현실 말이다. 자유는 보장하되 분배는 아직 이르고, 노동은 강조하되 복지는 알아서 하라는 신자유주의의의 무책임함은 열심히 뛰어다니는 &lt;무한도전&gt; 멤버들에게 중식제공을 하지 않아 바나나 하나 가지고 서로 싸우게 만들고 이를 한발짝 물러서서 조롱하는 제작진의 태도와 너무나 닮아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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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lt;무한도전&gt;은 신자유주의 시대 한국의 일상과 노동에 스민 다양한 풍경들을 ‘리얼 버라이어티 쇼’라는 형태로 그리는 풍경화다. 그 속에는 무한도전의 시대 속에서 서로 무한경쟁해야 하는 무한이기주의가 있고, 자신의 노동을 다각화함으로써 생존 확률을 높여야 하는 노동자들의 선택이 담겨 있으며, 능력 있는 자의 ‘라인’에 기대거나 편을 가름으로써 살아남거나 분할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있다. 기본적으로 몸을 던져야 하는 노동의 원초적 처절성이 있고, 동시에 다양한 기능분화를 통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거나 일상과 노동이 분리되지 않고 철저히 자본의 권력 앞에 동일화되는 과정이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노동을 강요한 자본에 의해 다시 소외되는 아이러니가 있다. &lt;무한도전&gt;의 ‘리얼 버라이어티’는 한편으로는 수익 좋은 연예인들의 가상적 ‘리얼’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2007년 오늘 한국 노동자의 현실과 노동양상을 드러내는 진정한 ‘리얼’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 아래에는 ‘생존’이라는 절대명제가 버티고 있으니, 이것은 &lt;무한도전&gt;의 연예인과 그것을 웃으며 보는 시청자 모두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신자유주의 시대 한국의 ‘실재’(the Real)다. 우리의 평일을 장악하고 있는 이 ‘실재’는 &lt;무한도전&gt;의 ‘리얼 버라이어티’로 주말까지 우리와 함께 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박명수’적 인간이 되는 그 날까지 이 ‘리얼’의 행진은 계속될지도 모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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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lt;문화과학&gt; 52호 '문화분석' 원고 (2007년 10월말 발행예정)<br />
]]></description><image><url>http://blogfiles14.naver.net/data28/2007/10/16/77/%B9%AB%C7%D1%B5%B5%C0%FC_caujun.jpg</url><link>http://blog.aladin.co.kr/vara/1713961</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88만원 크래프트(딴지일보)</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1639392</link><pubDate>Thu, 18 Oct 2007 21:4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1639392</guid><description><![CDATA[<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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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척 매뉴얼 외전] 본격 호러 경제학<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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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88만원 세대&gt;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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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17 목요일<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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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적은 IMF이후 승자독식과 무한경쟁이라는 룰을 시대정신으로 교육받았던 지금의 20대 앞에 놓여있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의 현실들을 경제학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책의 제목인 88만원 세대는 비정규직 전체의 평균임금이 119만원에 20대의 평균 소득 비율인 74%를 곱한 것으로, 지금의 20대 비정규직이 받게 될, 혹은 받고 있는 임금이다.(참고로 세전소득 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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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큰 이변이 없는 한 지금의 20대는 평생 동안 88~119만원쯤의 돈을 받으며 비정규직으로 살게 될 것이라는 '저주'를 내린다. 그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으로서 386과 유신세대로 대표되는 기성세대들의 '세대착취'와 '획일화'를 큰 이유로 꼽는다. 그가 보는 한국 사회는 "40대와 50대의 남자가 주축이 된 한국 경제의 주도세력이 10대를 인질로 잡고 20대를 착취하는 형국"이다. 게다가 "늦은 세대 독립과 경험의 부족, 강요된 승자독식 게임으로 인한 획일성으로 앞으로의 미래도 암울하기 짝이 없"기 때문에 지금의 20대가 30대, 40대가 되어도 나아질 것은 별로 없을 것이라 말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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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20대의 암울한 미래는 단지 20대만의 것이 아니다. 20대 전체가 한 줌이 채 안 되는 승자(그 마저도 20대 내에서의 승자일 뿐인)가 되기 위해 토익과 토플에 모든 역량을 불사르는 것은, 한국경제가 창의력과 숙련도를 자양분으로 하는 포스트포디즘사회, 소위 말하는 다품종 소량생산 사회에서 적응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뿐더러, IMF와 같은 외부충격이 닥쳐왔을 때, 적절한 대응방안을 찾고, 안정성을 회복하는 것 역시 힘들게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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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대체 대안이 뭔가가 궁금해질 법도 하다. 이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우리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어 '답 없음'이라는 먹먹한 한마디만을 남긴다. 20대의 미래가 밝아지려면 1. 지금의 기성세대가 20대를 위해 자신들의 몫을 포기하던지, 아니면 2. 20대 모두가 일심 단결하여 판 자체를 깨버리던지, 그것도 아니면 3. 하늘이 내린 천재가 등장하여 모든 사태를 해결해버리는, 그야말로 각각이 '기적'에 준하는 무언가가 일어나지 않으면 적어도 저자의 판단으로는 답이 안 나온다는 것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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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자, 위와 같은 이야기를 접한 직후 약 72분간 패닉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더랬다.&#160; 이건 마치, 수능시험장에서 수학시험지를 받아들었을 때의 느낌만큼이나 아득한 것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널부러져 있을 수만은 없는 법. 타고난 정신력으로 흩어져가는 혼을 수습한 본 기자, 급히 본지 수뇌부와의 긴급 회동을 주선해, '난 20대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냐'는 무책임한 선배기자들의 항의를 묵살하고, 대책마련을 종용했다. 그 결과 이러한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본 내용을 전격 게임화하기로 결정하고, 본지가 자랑하는 초절정 하이테크놀러지의 집적체인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본격 호러 경제 블록버스터 RTS(리얼타임 전략 시뮬레이션)' &lt;88만원 크래프트&gt;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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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Community/mypaper/pimg_725516154331432.jpg</url><link>http://blog.aladin.co.kr/vara/1639392</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이랜드 박성수회장 "성경에는 노조없다. 주5일제도 없다."</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1350379</link><pubDate>Mon, 25 Jun 2007 23:4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1350379</guid><description><![C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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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bsp;<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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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랜드 박성수회장 &quot;성경에는 노조없다. 주5일제도 없다.&quot;<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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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단&middot;숭배' 문화 강요 &hellip; 성경모임 리더 통해 직원 성향 파악 <br />
            <br />
            <br />
            비정규직 문제가 전면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 캐리어 사내하청노조, 한국통신 계약직노조 등 독자적인 비정규직 노조의 결성이 잇달았지만, 정규직의 지원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장 투쟁을 벌이던 이들 노조는 끝내 좌절을 맛보게 된다.<br />
            <br />
            이 때문에 2000년 이랜드노조의 파업은 독보적이다.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직접 조직화 한 사례인 이랜드노조의 파업은 비정규직 노조 태동기의 의미있는 투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br />
            <br />
            그러나 이랜드노조의 현 주소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지난 9월 단협이 해지됐고, 최근에는 사측으로부터 &lsquo;노조사무실 폐쇄&rsquo; 통지서를 받아놓은 상태다. &lsquo;만3년 이상 근무한 계약직은 정규직으로 전환한다&rsquo;는 노사 합의 역시 사측이 고안한 &lsquo;3&middot;6&middot;9&rsquo; 제도(3개월마다 계약 갱신, 최대 9개월 근무)라는 변형된 제도 앞에 무용지물이 됐다. 1천명이 넘던 조합원 수도 50여명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br />
            <br />
            비정규직 조직화와 관련해서는 &lsquo;신화적 투쟁&rsquo;을 벌인 것으로 두고두고 평가받는 이랜드노조가 몇년 사이 이토록 맥을 못 추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lsquo;기독교 정신&rsquo;으로 무장한 이랜드그룹의 경영방침이 노동자를 통제하고 노조를 고립시키는 수단으로 활용된 것은 아닐까. <br />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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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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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사하자마자 성경교육 &hellip; 근무외 시간 통제 <br />
            <br />
            지난 27일 저녁, 이랜드 본사에서 3년 가까이 근무했다가 최근 사직한 김승욱씨(가명)을 어렵게 만날 수 있었다. 기자를 만나러 온 김씨는 &lt;그리스도인의 성품&gt;, &lt;이랜드인이 생각하는 직업의 의미&gt;라는 두 권의 책을 들고 왔다. 이랜드가 신입직원을 교육할 때 쓰는 교재들이다. 직원 1명당 연간 600시간의 교육을 받게 한다는 이랜드는 크게 두 가지 내용을 교육한다. 이랜드인의 바이블로 통하는 &lsquo;이랜드 스피릿&rsquo; 18과목과 경영학원론, 생산관리, 재무관리 등 경영학 과목이다. 이랜드는 특히 &lsquo;하나님 중심, 믿음 중심, 말씀 중심&rsquo;으로 시작되는 &lsquo;이랜드 스피릿&rsquo;을 전 직원에게 외우도록 하고, 별도의 시험도 치른다. 물론 시험 결과는 인사고과에 반영된다. <br />
            <br />
            &ldquo;신촌과 가산동 본사에서 치러지는 승진시험에는 &lsquo;이랜드 스피릿&rsquo;을 암기해 쓰라는 문제가 나옵니다. &lsquo;이랜드 스피릿&rsquo;을 읽다 보면 간혹 맞춤법 틀린 문장도 있는데 틀린 맞춤법을 그대로 적어야 만점, 제대로 고쳐 쓰면 감제.&rdquo; <br />
            <br />
            그렇다면 이랜드는 연간 600시간에 달하는 직원교육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진행하는 있을까? 근무시간 중 일부를 교육시간으로 활용하고 있을까? <br />
            <br />
            &ldquo;근무시간엔 근무를 하죠. 그외의 시간에 교육을 받습니다. 새벽6시에 출근해서 아침9시까지 교육받고, 정상근무 한 후, 밤11시까지 또 교육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교육한다는 명목으로 직원들의 근무외 시간까지 통제하는 셈이죠.&rdquo; <br />
            <br />
            이랜드 직원들은 회사에서 정해준 각 조에 포함돼 기도모임, 성경공부 등에 참여하고 있다. 이 조는 3개월에 한번씩 전환된다. <br />
            <br />
            김씨는 교육 내용 자체에도 문제가 많았다고 말했다. <br />
            <br />
            &ldquo;이랜드는 직원교육을 기업 홍보수단으로 곧잘 활용하지만, 정작 실용교육 부분은 굉장히 취약합니다. 이랜드가 주력하는 부분은 당연히 성경교육인데요, 성경구절을 인용하거나 해석할 때 박성수 회장의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된다는 게 문제입니다. 성경 구절을 박 회장의 입맛에 맞게 해석해 직원들에게 주입한다고 할까요?&rdquo; <br />
            <br />
            이랜드는 종종 사내게시판에 &lsquo;올해의 기도 제목&rsquo; 등을 게시하곤 한다. 기도 제목은 대게 &lsquo;매출증대&rsquo;를 비는 내용으로 채워진다. 최근에는 계열사인 뉴코아와 홈에버(옛 까르푸)에도 유사한 기도 제목이 등장하고 있다. 이같은 게시물이 등장할 때마다 각 계열사 노조들은 &ldquo;기독교를 착취 수단으로 악용하지 말라&rdquo;고 반발하지만, 최근 수개월간 기도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br />
            <br />
            <br />
            <br />
            기도소모임, 직원 성향 파악 도구로 활용 &hellip; 노조가입 사전차단 <br />
            <br />
            이랜드 직원들은 회사에서 정해준 각 조에 포함돼 기도모임, 성경공부 등에 참여하고 있다. 이 조는 앞서 말했듯이 3개월에 한번씩 전환된다. <br />
            <br />
            &ldquo;성경공부 모임마다 조장이 따로 있습니다. 조장은 기도모임에 나오지 않았거나 지각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회사에 보고하죠. 일종의 점조직이랄까요? 그런데 이 조장들이 직원들의 성향까지 파악해서 보고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기도모임으로 대변되는 감시문화가 이랜드노조의 조직 확대를 가로막는 주범이라고 봅니다.&rdquo; <br />
            <br />
            한편 이랜드의 기독교문화는 &lsquo;감시문화&rsquo; 외에 &lsquo;집단문화&rsquo;, &lsquo;순종문화&rsquo;를 조장하고 있다. 이랜드는 특히 운동회, 페스티벌, MT, 성경퀴즈대회 등을 자주 개최하는데, 이 중 단연 압권은 매년 12월 열리는 찬송가 경연대회인 &lsquo;송 페스티벌&rsquo;이다. <br />
            <br />
            페스티벌 날짜가 공지되면 이랜드 직원들은 근무외 시간에 팀별로 모여 춤과 율동을 연습한다. 공연날짜가 되면 직원들은 TV 어린이 예능프로에 자주 등장하는 펭귄, 벌, 물고기 등의 동물 복장을 입고 나와 공연을 벌인다. 공연이 끝나면 팀별 시상이 이어지는데, 이때 박성수 회장이 직접 직원들에게 상금을 지급한다. <br />
            <br />
            &ldquo;이랜드 직원들이 젊은 편이라고는 하지만 대부분 자녀를 둔 학부모입니다. 밤늦게 퇴근하며 학예회 같은 페스티벌 공연을 연습하는 것도 고역이지만, 그걸 평가받는 것은 더욱 굴욕적이죠.&rdquo; <br />
            <br />
            이런 예도 있다. 이랜드의 체육대회는 일반적인 회사 체육대회와 사뭇 다른데, 대회 당일 박성수 회장이 일부 종목을 즉흥적으로 지정해 발표한다. 한번은 박 회장이 이어달리기를 하자고 지정했다. 그런데 달리기 방식이 독특하다. <br />
            <br />
            &ldquo;1번 주자가 한바퀴를 돌고 2번 주자의 손을 잡고 다시 돌고, 그리고 다시 1,2번 주자가 3번 주자의 손을 잡고 셋이서 돌고, 이렇게 해서 10번 주자까지 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1번 주자는 열 바퀴, 2번 주자는 아홉 바퀴를 돌게 되니, 마지막 바퀴 땐 질질 끌려오게 되죠. 이때 게임을 제안한 박 회장은 VIP석에서 웃으며 박수를 치고 있더군요.&rdquo; <br />
            <br />
            &lsquo;집단문화&rsquo;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랜드의 경영방침은 가끔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 여름 뉴코아 직원들의 원성을 산 &lsquo;꼭짓점 댄스 경연대회&rsquo;다. 당시 뉴코아 직원들 역시 휴무일까지 출근해 꼭짓점 댄스를 연습해야 했다. 결국 노조의 강한 반발로 경연대회 일정은 취소됐으나, 이랜드의 기업문화가 계열사로 어떻게 전이되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사례인 것만은 분명하다. <br />
            <br />
            사실상 '무노조 전략'&hellip; &quot;성경엔 노조 없다&quot; <br />
            <br />
            사실상 회장을 중심으로 단결할 것을 강요하는 분위기이다 보니, &lsquo;회장 퇴진&rsquo;까지 공공연하게 요구하는 노동조합에 대한 사측의 태도는 쉽게 집작할 수 있다. <br />
            <br />
            &ldquo;박 회장의 주장은 간단합니다. 노조는 성경에도 없는 조직이라는 거지요. 사실상 무노조 방침이 서 있다고 불 수 있지만, 사회적 이미지를 감안해 공식화 하지는 않고 있다고 봅니다. 체계화된 기도모임을 활용해 직원들의 노조 가입을 사전에 차단하고, 노조 탈퇴 의사가 없는 사람들은 철처히 고립시키고 있지요.&rdquo; 노조를 통해 &lsquo;단결&rsquo;하기보다는 노조 때문에 &lsquo;왕따&rsquo; 당하기 십상이라는 말이다. <br />
            <br />
            이같은 사정에 대해 이랜드 노조위원장은 &ldquo;노조 활동하기가 독립운동하기보다 어렵다&rdquo;고 토로한다. 홍윤경 노조위원장은 &quot;종교문화 일부를 차용해 노조 고립수단으로 삼는 이랜드의 노무전략은 계열사로 빠르게 이식되고 있다&quot;며 &quot;기도실 설치를 둘러싼 뉴코아,까르푸 노조와 사측의 대립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quot;고 말했다.<br />
            <br />
            <br />
            &lt;매일노동뉴스&gt; 구은회 기자 press79@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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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uot;이랜드, 계산대를 멈춰라&quot; 
                    
                    
                        [발로 뛰는 진보정치 현장] 가슴 뭉클한 연대로 숙연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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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이랜드 일반노조 김경욱 위원장이 말했다. &ldquo;상암동 홈에버에서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조합가입을 유도하는 선전홍보전을 한다고 했을 때, 몇 번하고 말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겨울 내내 계속 하더군요. 여러분들이 한 겨울 이곳에서 조합 가입 권유를 해 주셔서 지금 상암동 홈에버에서만 100명이 넘는 조합원이 생겼습니다.&rdquo; <br />
                        <br />
                        
                        사실 나도 그랬다. 부끄럽지만, 민주노동당 마포, 서대문, 은평, 용산구위원회 노동위원들이 상암동에 있는 홈에버에서 몇 달 동안 선전전을 할 때, &ldquo;이거 잘 되겠나&rdquo; 싶었다. 과연 저 거대한 매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노조에 가입시키고, 그 조합원이 당원이 되고, 그리고 파업이 일어나 매장이 멈추는 그런 날이 과연 있겠는가 생각했다. <br />
                        <br />
                        
                        나도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br />
                        <br />
                        
                        촛불도 얼어붙을 추위 속에서 4개 지역위원회의 당원들이, 그것도 많은 수가 아닌 소수가 매주 선전전을 할 때에 나는 발언을 했다. <br />
                        <br />
                        
                        &ldquo;민주노동당은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입니다. 이번 비정규직 투쟁, 이건 우리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투쟁입니다. 지금은 조합원이 없어도, 우리가 겨울을 지나고 봄이 올 때면 반드시 이곳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할 수 있을 것입니다.&rdquo; <br />
                        <br />
                        
                        말은 얼마나 멋진가. 우리의 존재를 증명하는 투쟁. 민주노동당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매서운 겨울바람과 맞서며 이곳에 나왔노라고&hellip; <br />
                        <br />
                        
                        그러나 나도 확신은 없었다. 시린 손을 촛불로 달래며 고생하는 당원들에게 힘을 주기 위한 말이었지, 아니 이렇게 비정규직을 대상으로 조합에 가입시키려는 당원들의 선전 행위 자체가 가지는 '숭고함'에 대한 존중의 표시였을 수도 있다. 비단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br />
                        <br />
                        그러나 모두의 예상은 아름답게 깨졌다. 봄이 오자, 이랜드 일반노조 월드컵 분회가 결성되고, 지역위원회 사무실에서 수차례 조합원 교육이 이어지고, 네 개 지역위원회 주최로 하종강 선생의 강연회가 비정규직 아주머니 조합원을 대상으로 열리고&hellip; 그리고 파업찬반 투표 뒤 파업돌입. <br />
                        <br />
                        
                        우리의 예상은 아름답게 깨지고<br />
                        <br />
                        지난 23일, 토요일. 월드컵이 열렸던 서울 상암동에 수천의 조합원이 모였고, 그만큼의 경찰력이 동원됐다. 마포가 들썩였다. 노조는 이랜드 그룹이 6월 말까지 뉴코아 비정규직 수백 명을 해고하고, 홈에버에서도 이미 350명 이상의 비정규직이 해고했고, 이후 순차적으로 수천 명을 해고할 예정이라며, 이날 매장을 점거하는 공세적인 투쟁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br />
                        <br />
                        
                        이랜드 일반노조의 공세적 투쟁지침은 간단했고,&nbsp;더 이상 명확할 수는 없었다.&nbsp;&ldquo;계산대를 멈춰라.&rdquo; 매출제로. 이랜드 그룹에서 가장 매출이 높다는 서울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내 대형유통업체인 홈에버(구 까르푸)와 역시 같은 이랜드 계열사인 뉴코아 매출 1위 강남점을 마비시키겠다는 것. <br />
                        <br />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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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bsp;24일 오후&nbsp;잠원동 뉴코아아울렛 강남점 앞에서 비정규직 해고 중단을 요구하며 경찰들과 몸싸움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홍찬선 기자)
                                    &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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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포구위원회 노동위원장으로부터 오후 1시에 결합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도착하니 이미 매장 안으로 조합원들이 들어간 상황이었다. 오전에 격렬한 투쟁이 있었다. 용역과의 몸싸움에 이은 전경과의 충돌. 그러나 조합원들은 기어이 매장 안으로 진입했다. <br />
                        <br />
                        
                        1층은 이랜드 일반노조 조합원이, 2층은 함께 공동투쟁을 하고 있는 이랜드 계열사 뉴코아 노조 조합원이 계산대를 완전히 점거하고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손님들이야 불편한 일이지만, 조합원들에게는 생존권이다. 간혹 손님들과 마찰이 있었지만, 조합원들의 호소가 우위였다. 하지만 TV 뉴스는 불만에 가득 찬 손님들 얘기만 옮겨놨다. <br />
                        <br />
                        
                        제발 오늘 하루 물건을 사지 말아 주십시오<br />
                        <br />
                        
                        &ldquo;제발 물건을 사지 말아 주십시오. 오늘 하루 여기를 멈춰야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rdquo; 민주노동당 용산구위원회 홍성준이 피켓을 들며 목청껏 외친다. &ldquo;약한 사람들과 함께 합시다. 제발 오늘은 그냥 돌아가 주시길 바랍니다. 비정규직과 함께 해주십시오.&rdquo; <br />
                        <br />
                        
                        1층에서는 이랜드 일반노조 위원장이 마이크를 잡고 조합원들을 독려하는 모습도 보인다. &ldquo;여기서 물러나면 우린 다 죽습니다. 조합원들은 절대로, 절대로 계산대에서 한발자욱도 물러나지 마십시오. 알겠습니까.&rdquo; 나이가 40에서 50대인 여성 비정규직 조합원들이 악에 바친 구호로 위원장의 지침에 답한다. &ldquo;투~쟁.&rdquo; <br />
                        <br />
                        
                        서부지역노점상 연합회 회원들도 대거 비정규직 연대투쟁에 결합했다. 지역장과 부지역장을 비롯한 회원들이 함께 계산대를 점거하며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연배로 보자면, 홈에버 비정규직 노동자와 비슷해 보인다. 회원들도 손님들에게 물건을 사지 말 것을 호소한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다. 이런 연대도 뭉클하다. <br />
                        <br />
                        
                        2층을 점거한 뉴코아 노조는 비정규직 조합원을 앞으로 불러 발언을 요청하며 &ldquo;이제까지 우리 정규직이 비정규직에게 잘 못한 거 많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사과 드리겠습니다&rdquo;하며 정중히 인사를 한다. <br />
                        <br />
                        
                        뉴코아 노조의 정규직은 대부분 젊은 층인데 비해 비정규직은 홈에버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아주머니들이다. 수줍은 듯, 아주머니들이 젊디젊은 정규직 조합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다. 이를 지켜보는 당원들은 코끝이 찡했던지 숙연해진다. <br />
                        <br />
                        
                        투쟁 현장에서 코끝이 찡해지다<br />
                        <br />
                        
                        경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전갈이다. 조합원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이 매장에 진입할 경우 이랜드 일반노조 지원대책위 소속 단위들이 앞줄에 서기로 했다. 지원대책위는 민주노동당의 4개 지역위원회가 주축이다. <br />
                        <br />
                        
                        여차하면 1층으로 내려갈 태세를 하고 있는데, 사측이 영업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발표가 났다. 계산대에서 철수를 해도 된다는 얘기다. 모두가 환호를 지른다. 경찰도 조합원에 대해 연행을 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전원 물러갔다. <br />
                        <br />
                        
                        불가능해 보였던 상암동 홈에버의 계산대가 조합원들의 투쟁에 의해 멈췄고, 이에 사측도 백기를 든 것.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며 정리집회를 가졌고 당원들의 얼굴도 조금은 상기됐다. 그러나 정리 집회를 마치고 난 뒤, 1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사측은 결국 약속을 어기고 영업을 시작해, 앞으로 투쟁이 험난하게 진행될 것임을 예고했다. <br />
                        <br />
                        
                        하지만, 오늘의 승자는 누가 뭐래도 조합원들이었다. 그동안 이랜드 자본으로부터 하찮은 존재로 취급받았던 그들이 매출 1위의 홈에버 월드컵점을 적어도 몇시간 동안은 완전히 멈추게 만들었지 않았는가. <br />
                        <br />
                        
                        다 이해하진 못하지만, 굳건한 연대로<br />
                        <br />
                        &ldquo;노동자는 점점 더 많은 압박을 받으면서도 항상 언제든 '사용'될 수 있다는 안심을 가지지도 못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을 소집한 산업은 그들이 필요할 때에는 그들을 살아만 있게 한다. 그리고 그들을 버릴 수 있게 되면 일말의 배려도 없이 곧바로 그들을 버린다.&rdquo;<br />
                        <br />
                        
                        언제 얘긴가. 지금의 비정규직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1844년 스물여섯 살 마르크스가 쓴 &lt;경제학-철학 수고&gt;에 나오는 말이다. 필요할 때만 살아있게 한다는 마르크스의 지적은 오늘날에도 본질적인 차이가 없이 그대로 적용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 <br />
                        <br />
                        
                        &ldquo;사람들이 그들에게 부여하는 노동이 길고 고통스럽고 불쾌할수록, 그 노동의 보수는 적다.&rdquo; 홈에버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월급은 80만원. 먹는 시간을 빼면 7시간 넘게 꼬박 서서 일하고, 화장실에 갈 때도 보고해야 한다. 이런 상황을 그들은 몇 년씩 인내하며 버텨왔다. <br />
                        <br />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노동을 감내했던 비정규직 아주머니들이 노래를 부른다. 아직은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파업가. 하지만,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절을 부를 땐, 누구보다 절절하다. 난 머리로만 알지만, 그들은 가슴으로 느끼기 때문일 게다. 화장실에 갈 때, 보고하지 않아도 되는 난, 그들을 전부 다 이해한다고 감히 말하지 못한다. 그냥 힘차게 연대할 뿐.<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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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날짜와기자이름바//--><br />
                        
                            
                                
                                    
                                    2007년 06월 25일 (월) 07:49:59
                                    정경섭  redian@redian.org
                                    
                                
                            
                        
                        <!--기사날짜와기자이름바끝//-->
                    
                
            
            
            
        
    
]]></description><image><url>http://www.labortoday.co.kr/image/2007/1/23/크기변환_이랜드3.jpg</url><link>http://blog.aladin.co.kr/vara/1350379</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학자들의 취미생활</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1261157</link><pubDate>Sat, 09 Jun 2007 14: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1261157</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4185393&TPaperId=1261157"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36/54/coveroff/8974185393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4185458&TPaperId=1261157"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48/69/coveroff/8974185458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7755360&TPaperId=1261157"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57/3/coveroff/8977755360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4983624&TPaperId=1261157"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51/46/coveroff/8984983624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5459336&TPaperId=1261157"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48/71/coveroff/8995459336_2.jpg" width="75" border="0"></a>&nbsp;&nbsp;<a href='http://blog.aladin.co.kr/vara/1261157' target='_blank'>[상품더보기]</a><br/><br/>&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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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h!
<BR>Of course they'd rather sit back with Plato's Symposium or Frege's theorem, but intellectuals have some less elevated tastes, too - cable TV wrestling or rap, anyone? Philip Oltermann confers with some great brains about their guilty pleasures 
Saturday February 3, 2007<BR>The Guardian 
<BR>James Wood, literary critic, Harvard professor <BR>Car magazines 
I'm very fond of car magazines. Whenever I am over in Britain, I pick up the best one, which is, appropriately enough, just called Car. A typical feature in Car seems to involve taking a BMW, a Mercedes and a Jaguar for a triumphantly gratuitous spree across France, Switzerland and Italy. There is much talk of hairpin bends and switchback Alpine roads, and slight but manageable understeer. The writing is perky, sybaritic, deliciously technical. I moon over the lavish shots of the car interiors - the excitement of all those dials, which stare back like multiplied images of one's own excited face. I become a child again. I was one of those children who hoarded facts, and few facts delighted me as much as those about cars. At 13 I could tell you the 0-60 times, the top speeds, the cubic capacity, the brake horsepower of all the fastest and most exciting cars. I still can. As a child, when I couldn't get to sleep, I used to roll my head from left to right on the pillow, and imagine taking a long journey in a fast car - a Jensen Interceptor, a Triumph Stag, a BMW 735i, an MGB V8, a Jag XJS. At 40, I still sometimes do that, though to less effect, alas. But do you know what I drive? A VW Passat estate, with a 1.8-litre engine and a piddling 170bhp. It won't do; I must change my life. 
Antony Beevor, historian 
Blind Date 
Arthur Koestler's satire of academic conferences, The Call Girls (1973), included an extreme leftwing French professor whose secret comfort was to lock his door and retire to bed to read The Three Musketeers while eating chocolate truffles. I sometimes thought of him when I indulged in my own curious vice, which was to watch Blind Date when working out on the rowing machine. This prototype for many far worse versions of humiliation television took my mind off the hamster-wheel boredom of static, indoor exercise. In fact its true awfulness and the glimpses of young macho-macha life in this country proved utterly gripping. The girls were often the crueller, when putting down their artificially selected partners, and it was hard not to feel sorry for the inarticulate and pathetically boastful young males. They could not see how things had changed and how they had become potentially redundant in the brave new world of mass communication to which they had exposed their own pitiful inadequacies. 
Anthony Giddens, sociologist 
Wrest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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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a fan of a very disreputable sports programme, one that I like because of its absurdist nature. It is a cable TV offering, featuring American professional wrestling. Watching it is certainly a guilty pleasure because the programme is politically incorrect in more or less every way one could think of. It is Americana at its most extreme, although put on in a knowing way and with a definite element of self-parody. I can't really work out what is going on, which is part of the reason it's addictive. Wrestling isn't a real sport and the contests are in some large part staged. On the other hand, the wrestlers sometimes do serious damage to one another and the losers surely can't always agree beforehand to lose. Do they hate one another as much as they seem to, or are they buddies behind the scenes? I don't know. Even more ridiculous, when there is a commercial break, the programme solemnly informs the viewer, "Whatever you do, don't try this at home." Do they seriously think people would? 
Simon Singh, science writer 
Deal Or No Deal 
Between the guilty pleasures of Countdown and Richard &amp; Judy is the guiltiest pleasure of all - Deal Or No Deal. It is a beautifully simple game which touches on areas of mathematics such as probability and game theory. Indeed, it has much in common with an ancient American TV show called Let's Make A Deal, hosted by Monty Hall, which resulted in the Monty Hall paradox, one of the most famous problems in probability theory. 
In addition to the maths, there is a huge dollop of psychology, which leads to players making sub-optimal decisions. The notorious Dealer makes stingy offers, particularly early on in the show, to encourage contestants to continue playing, so mathematically there would be no reason to deal. However, the desire for security means that contestants settle for measly deals - on average players in the first series won ?6,000, whereas they would have won an average of over ?0,000 if they had refused the Dealer's offers and stuck with their original box. Noel Edmonds's idiot belief in cosmic ordering seems to conspire against his contestants. So far the UK has been spared the delight of watching psychics playing the game. When this happened in an Australian edition in 2004, a "gifted" player walked away with just 20% of what dumb luck would typically achieve. 
Richard Dawkins, evolutionary biologist, author 
Computer programming 
I have now kicked the habit, but every so often the craving returns and I must thrust it down and away. But whence the guilt? Isn't programming useful? In the right hands, yes. But my projects (inventing a word processor, machine translation from one programming language to another, inventing a programming language of my own) could all be done better (and were) by professionals. It was a classic addiction: prolonged frustration, occasionally rewarded by a briefly glowing fix of achievement. It was that pernicious "just one more push to see what's over the next mountain and then I'll call it a day" syndrome. It was a lonely vice, interfering with sleeping, eating, useful work and healthy human intercourse. I'm glad it's over and I won't start up again. Except ... perhaps one day, just a little ... 
Marcus du Sautoy, mathematician 
Football shirts 
My guilty pleasure: my number 17 Recreativo Hackney Football Shirt. Every footballer cares about the number shirt they play in. When you get an autograph from Thierry Henry, you'll find he's worked the number 14 into his signature. Beckham has 7 in Roman numerals tattooed on his arm. His move to Real Madrid almost collapsed when Raul said he wasn't going to relinquish his number 7. Arsenal retired the number 8 shirt after the great Ian Wright, Wright, Wright retired. 
So when the shirts of Recreativo Hackney get pulled out of the kitbag on a Sunday morning, I wait patiently until the 17 shirt appears, then grab it possessively. As a mathematician, each number has its own special character for me. 17 is a prime number, an indivisible number. The Ancient Chinese thought numbers had sexuality and primes for them were the macho numbers, essential for surviving Recreativo's battles on the Hackney Marshes. Primes are also key to the evolutionary survival of a curious species of cicada that lives in the forests of North America. The cicada exploits a 17-year life cycle to keep out of the way of a predator that stalks. So I take a secret pleasure in the power of 17 to protect me on the pitch. 
I know that my obsession with my shirt number is no more than superstitious nonsense and goes against the analytic rational mind that I use the rest of the week. But when my team were languishing at the bottom of the Super Sunday League Division 2, I persuaded them to change our kit and we all now play in prime numbers, from 2 to 43. The next season we got promoted into the first division. That's proof enough for me of the power of number. 
John Carey, literary critic, English professor 
Nice cup of tea and a sit down 
Until a few years ago, re-reading Sherlock Holmes stories was my favourite relaxation. I do it less often now because I know them too well, so there's no surprise. A book I've got fond of recently and often dip into last thing at night is called Nicey &amp; Wifey's Nice Cup Of Tea And A Sit Down, which is helpfully subtitled A Book About Having A Sit Down, A Biscuit And A Nice Cup Of Tea. Its pseudonymous authors are actually Stuart and Jenny Payne, and it is really about biscuits - their varieties, history and characteristics, from Rich Teas and custard creams to Choco Leibnizes and Jaffa Cakes (which qualify as biscuits only disputably). It is funny and, like its subject, undeviatingly cosy and comforting. 
Stanley Fish, literary theorist, legal scholar 
Country music 
Every time I return to it after an absence, I am struck again by the power and integrity of country music. In part it is the lyrics, self-consciously clever ("If I said you have a beautiful body, would you hold it against me?"), alert to and accepting of contradictions ("She's a Saturday night out on the town/Church on Sunday girl"), precise in their observation of small detail ("She left the suds in the bucket and the clothes hanging out on the line"). In part it is the structuring of a narrative (usually unabashedly maudlin) by a line that gradually changes meaning, as when George Jones sings, "He stopped loving her today", and reveals in the last verse that he has stopped only because he is dead. In part it is the affirmation and exploration of a raunchy Christianity that holds drinking, cheating, criminality and Jesus in a volatile and energising mix. In part it is the extraordinary musicianship of pianists, fiddlers and guitarists who bear comparison to members of any symphony orchestra. And most of all it is the fact that when I'm in the car searching for something to listen to, the sound of country music, even in just a few notes, is unmistakable. Country music knows what it is. 
Antonia Fraser, historian, biographer 
Film stars' autographs 
The first one I had was of Gary Cooper in the 40s and I had to cut it out of a fan magazine. My best friend Lucy and I, pouring over Picturegoer - was it? - had agreed to share him as there was a lot of him to share. But I got the photo, and faked a signature "For Toinette". Somehow I didn't think he'd go the full mile of Antonia Pakenham. We loved Gary to distraction and when there was an ugly rumour that he was actually dumb, were both correspondingly depressed. Luckily he soon made a fine statement to Picturegoer about remaining so long at the top of his profession: "People with big feet is hard to move." Call that man dumb! 
Many photos later, all treasured and pinned up (sometimes the star even signed it himself, making the Toinette ploy unnecessary), I was interviewed for Life magazine by James Salter. He had just written the screenplay of Downhill Racer for Robert Redford. Now that was a wonderful photograph that followed! RR smiled at me from the wall, all blond hair and merriment for many years. 
I move on to Placido Domingo who signed my programme in a restaurant near Covent Garden just above his own photograph, "To Lady Phraser: we like your books". And recently a French friend got me an enormous photograph of the great man, silver-haired now, dedicated to me personally and singing to me out of the frame. 
What next? I saw Juan Diego Fl?ez in The Barber Of Seville last week. I'm on the trail ... 
AC Grayling, philosopher 
Boxing 
Boxing should be banned, of course: it causes brain damage, and there is something questionable about the pleasure taken by spectators in watching men hitting one another. And yet... there is also something noble about boxing. In the past it was mainly an aristocratic pursuit. In the Regency period, blue-blooded enthusiasts gathered at Gentleman Jackson's gym in London to learn the art of pugilism inherited from ancient Greece. (Pugilism is boxing without gloves.) Just as Homer celebrated the bare-knuckled contest between Epeus (the builder of the Wooden Horse) and Euryalus on the plain before Troy, and Virgil wrote of Entellus accepting the challenge of Dares by tossing his "brain and blood bespattered cestus" into the ring (a cestus was a fist-strap), so the great William Hazlitt wrote perhaps the finest ever account of a contest in the ring, The Fight. 
The solitude of the boxer before his opponent, the stripped-down, unfurnished, essential nature of man pitted against man, in a bare space roped off from the rest of the world, sums up everything about courage. In its way boxing recapitulates something ancient, almost primordial, about human striving, with a rough beauty all its own. 
It should, though, be banned. 
John Berger, writer and artist 
Bi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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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ause you are on two wheels and not four, you are much closer to the ground. By closer I mean more intimate with. Take the surface of the road. You are conscious of all its possible variations, whether it offers a grip or is smooth, whether it's new or used, wet, damp or dry, where there's mud or gravel, where ruts are being worn - all the while you are aware of the hold of the tyres or their lack of it on the varying surfaces, and you drive accordingly. 
Bends produce another intimate effect. If you enter one properly, it holds you in its arms, just as a hill points you to the sky and a descent receives you. And speed is of the essence. By this I do not necessarily mean the speed at which you are travelling. The reading on the speedometer is a small part of the story. 
The fastness that counts most is that between decision and consequence, between an action and its effect - changing direction, braking or accelerating. Other vehicles may in fact react as quickly or more quickly than a motorbike, but a jet plane, a highly tuned car, a speedboat are not as physically close to your body, and none of them leaves your body so exposed. From this comes the sensation that the bike is responding as immediately as one of your own limbs - yet without your own physical energy being tapped. And this effortless immediacy bestows a sense of freedom. 
Denis Healey, politician 
French cabaret music 
Edith Piaf, of course, is the queen of the genre, but there are others: Yves Montand, Jean Sablon. The only one that came close to it in England is Vera Lynn. My favourite number is a Jacques Pr?ert song performed by Montand called Barbara. "Rappelle-toi Barbara/N'oublie pas/Cette pluie sur la mer/Sur ton visage heureux." I heard it for the first time at the end of the war - I used to go to the cabaret cafes in Montmartre a lot back then. It's a song about the war, or about the emotions that people used to feel during the war: it's about being in love with someone you haven't even met. Songs like these are important: they keep you in touch with life. There is nothing remotely like it nowadays. 
Naomi Wolf, writer 
Star 
My guilty pleasure would definitely be Star. This is a tabloid - a cross between Hello! and the National Enquirer, that is, more malicious than the former but, unlike the latter, features no half-bat children or sightings of Elvis. It is real if trashy journalism. Even though it is 90% escapism for me, I do tell myself it shines a light on what the id of the culture is obsessing about: why Paris Hilton, right now? What does it mean that Brad Pitt redeemed himself so quickly once he provided a father figure to that adorable multiracial brood? Why are shoulder pads back on the starlets on the red carpet? What does it say about the American pulse that the Dixie Chicks (who attacked President Bush) are back in vogue? You can predict election outcomes this way, but it is also just pure sleazy fun. 
Elaine Showalter, feminist literary critic 
Trinny &amp; Susannah 
It's easier to find profound meanings in masculine guilty pleasures such as football or Mastermind, which have grand elements of contestation, than in feminine guilty pleasures, such as shopping or makeovers, which all seem to be about consumerism and vanity. Although women's indulgences may produce more guilt than pleasure, I'll always treasure What Not To Wear with Trinny and Susannah. Unlike other makeover gurus, Trinny and Susannah never demanded extreme weight loss, extensive cosmetic surgery, expensive dentistry, uncomfortable hair extensions or couture wardrobes from the women they instructed. Their advice involved accessible and affordable high-street shops, and the subjects were encouraged to ignore any flaw and focus on every asset. Despite their posh accents, brusque manner and seemingly effortless elegance, Trinny and Susannah had an overall respect and affection for other women that transcended class, age and occupation. And they were willing to expose their own flaws, too, pulling up their tops or tugging down their trousers before the infamous 360-degree mirror to reveal bulges or droops. 
Bernard-Henri Levy, philosopher-author 
SAS spy novels 
I read my first book in G?ard de Villiers' SAS series when I was 16 or 17 years old. His hero is a special agent who for the last 40 years has been going from mission to mission - in Afghanistan, in Libya, in Chechnya - without ageing in the slightest. SAS novels are always built on the same pattern: you can predict the first torture scene down to the page, and you always know that there will be one female character who betrays the protagonist and one who saves him. Most intellectuals in France despise de Villiers - and yet to me this guy is the best journalist around. His reports from areas of political conflict - such as his account of the non-capture of Karadzic in one of his last novels - are more detailed and precise than what I read in the newspapers. 
Catharine A MacKinnon, lawyer, writer, feminist activist 
Nothing 
Ever since a British journalist wrote that I confessed to the guilty pleasure of reading People magazine, I've been trying to figure out what I stood convicted of. Reading, thinking, and writing for a living makes one in need of humanising in some quarters, meaning bringing down. Feeling bad about what you feel good about, or good because you feel bad - a coy wink indicating addiction or lack of intent to stop - fills the bill. Apparently we don't enjoy what we do when we are being intellectual, high thought being one thing, low culture another. Intellectuals' guilty pleasures thus must be low-brow indulgences. 
While much scholarship badly needs grounding, and a lot of mental life ignores the body and is decidedly uncreative, mine has participated in creating its own field, centred concretely on relations between women and men, focusing on sexual abuse, often representing the violated. People magazine, for that matter, is also sensitive to ordinary life and class politics, unobtrusively but solidly anti-racist, and pursues animal rights. Pleasure here means having nothing to be guilty about. When what you do is unearned, or others are hurt by it - pornography use, for example, or invasion of celebrities' privacy - pleasure becomes guilty. You rightly dislike yourself for what you like. Some intellectuals have had to fight hard for our work, learn what we know from life as well as books, confront power, and find what we do energising and meaningful. Neither elevated nor predatory, human already, its pleasures are not guilty. 
Homi K Bhabha, cultural theorist 
Project Runway 
There is everything to be learned from your bright and beautiful 18-year-old so long as you can cope with the "likes" that litter her speech, and keep up with the A (Abercrombie &amp; Fitch) to Z (Zara) of high street fashion. All wound up with worries about grades and university applications, Leah relaxed instantly as she watched Bravo network's designer game-show Project Runway: a dozen wannabe Marc Jacobs and Stella McCartneys compete to create a collection for a celebrated label. Yards of silk and taffeta lie wasted on the cutting room floor, but something - perhaps just one thing - witty and lovely emerges. The cut-and-paste technique is as true of working with textiles as it is of writing literary criticism. 
Leah's refuge has become my weekly fix. There is life beyond "cords" and cardigans - like hip-hugging Diesel jeans, like Kenzo's slim-waisted Nehru jacket, like Vivienne Westwood's double-breasted pinstripe ... "Dad, you look freaky ... like just stop sucking in!" A little sucking in, a little tuck and nip, a little camouflage provides a whole new persona in academic life. While moderating a panel on "the Metaphysics of Metaphor" in Milan, make sure that you cut short the question period to allow you to wander through the via Monte Napoleone; if you are caught up in a contentious argument on global media in Bombay, concede the point gracefully and dash off to Ensemble; "Baudrillard in New York" at NYU should never keep you from Barneys of New York. Manners makyth a man; clothes complete the process. 
Roger Scruton, philosopher, journalist 
Elvis 
Although I argue vehemently against modern pop music, on grounds of its musical incompetence, verbal impoverishment and general morbidity, narcissism and salaciousness; although I fiercely object to disco dancing as a sacrilege against the human form and a collective rejection of civilised courtship; although I defend reels, minuets, galliards, sarabands and (as limiting cases) waltzes and polkas as the only ways in which ordinary humanity should dare to put its sexual nature on festive display, and although I regard the 12-bar blues and the flattened subdominant seventh as the lowest forms of vulgarity in music, I find rock'n'roll in general, and Elvis in particular, irresistible, and would happily dance away the night to it. I cannot explain the thrill of delight with which I hear the first bars of Jailhouse Rock or the eagerness with which I at once search the vicinity for a partner: but there it is, appalling proof that, despite all my efforts, I am human. 
Martha Nussbaum, philosopher 
Baseball 
When the Chicago White Sox won the World Series in 2005, I was in Japan, lecturing on justice for all the world's people. But all the while, my heart was with my team, my boys: with the heroic strength of Paulie, the heart of Bad Bobby (even larger than his 270lb body) and, not least, the in-your-face manner and indomitable spirit of AJ. I felt it was unfair that I was in Japan talking about justice, rather than at home, where I could be near them. I expressed my annoyance by wearing Sox T-shirts throughout the conference. Their all-black elegance fitted well with the rest of my wardrobe. 
I have been a baseball fan since childhood, when my father took me to Connie Mack Stadium in Philadelphia to show me examples of will, excellence and joy. I associate baseball with those values, and with my delight at going to a special event with my father. My father was a working-class man, yet I was brought up in a snooty aristocratic milieu, because that was what he had made his way into. But he secretly communicated disdain for its airs and graces, showing me that the real world was the ballpark, not the Junior Dance Assembly. I love the fact that the White Sox are Chicago's working-class team. 
Marcus Aurelius said that the first lesson in ethical impartiality was to learn not to be a sports fan, and I have not learned that lesson, nor do I want to learn it. Pondering that apparent contradiction helps me think better about how we can build a world where we support the urgent needs of people everywhere, while still having something improbably wonderful to love. 
Christopher Hitchens, journalist 
The Simpsons 
I threw out the TV for practical purposes many years ago, and barely ever go to the movies. I do know (slightly) and very much like Matt Groening, and did get my children a tour of the Simpsons set a few years back, but have not seen many episodes. Same with South Park - people say, hey look, they attack the Pope and the Mormons and the Islamists, and I say, "Tell me about it." I do this myself in real time: don't need the vicarious living that seems so central to all this stu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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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ven Pinker, psychologist 
Rock lyrics 
Just let me hear some of that rock and roll music, any old way you choose it, it's got a back beat, you can't lose it, any old time you use it. I know that classical music is more sophisticated, but - I feel like I'm confessing to a murder - I just don't listen to it. The 1,900 songs on my iPod include jazz, blues, soul, klezmer and country, but the largest single category (49.4%) is rock. In my books, I've analysed rock lyrics for their relevance to linguistics: Bob Dylan's "God said to Abraham, kill me a son" is a perfect example of a benefactive double-object dative construction; Paul McCartney's "She could steal but she could not rob" illustrates a subtle contrast in lexical semantics. I've also used them to exemplify features of human nature: Jim Croce's "You don't mess around with Jim" explains the psychology of reputation; John Lennon's "I want you so bad it's driving me mad", though hardly the most poetic expression of endearment, encapsulates the logic of paradoxical tactics in courtship and similar problems of binding one's implicit promises. Still, I can't say that my musical tastes are driven by my scholarly passions. In the words of a certain poet and philosopher: it's only rock'n'roll, but I like it. 
Tariq Ramadan, theologian 
Rap 
It was originally my 20-year-old daughter who got me into rap music. Now I listen to it at home and when I drive to or from work. I like American rap, but I particularly love the French rappers MAdina and IAM's Philippe Fragione aka Chill Phil aka Akhenaton. Their music is very socially engaged: they criticise injustice, war and racism within European society. Their voice is that of revolt and resistance. 
During my work at grassroots level, I have met a lot of young people in the suburbs of France who connect strongly with the message of legitimate violence in rap lyrics. Music allows them to express sentiments that would otherwise erupt in actions. Of course, as in any genre, there are heroes and villains in rap music: a lot of it is just about fashion and mindlessly violent machoism. 
I have never been to a rap concert, and I have never rapped myself, but as Picasso said, it takes a long time to become young. 
Lewis Wolpert, biologist, author 
Cartoons 
I await each week for the pleasure that the arrival of my New Yorker magazine will give me. I rarely read it - it is the cartoons that I love. The cartoons in this magazine provide a special view of the world, and often it is my special world. One of my favourites is of someone like me, a bit elderly, going into a room and saying, "Oh dear, grown ups." And on my kitchen wall over the title "Low Self-esteem" is a man writing, "Dear diary, sorry to bother you again." 
Frank Kermode, literary critic 
Cribbage 
My father taught me to play cribbage when I was a child. But it wasn't until the six years I spent in the navy that I started to play cribbage obsessively. I remember being on a ship that was meandering aimlessly around the Pacific for several weeks. The dentist and I had a lot of time on our hands and passed it with games of cribbage. I won most of the time. I now have a cribbage game on the PC in my office, which has proved an excellent means for putting off work. Unlike the dentist, the computer wins most of the time. I suspect it's chea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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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ard O Wilson, naturalist, scientific theorist 
Horror movies 
I like science fiction horror movies, especially those involving alien invaders. I am a big fan of the classics - War Of The Worlds, the original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 and Forbidden Planet - but I also like more recent films, such as Independence Day, 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 or even the recent remake of War Of The Worlds. At the top of my list, however, is the second film in the Alien series, the best sci-fi horror of all time. 
These films play on basic archetypes of the human psyche (predators out there in the dark, and invaders of our territory, etc), so it's OK intellectually to like these movies (I tell myself). There. Now that I've publicly confessed, I feel better. 
Steve Jones, evolutionary biologist 
Estate agents 
I have a voyeuristic interest in estate agents. From window to website, in many parts of the world, I dream about houses that I could never afford to buy. A French castle or a Manhattan loft: a Greek island or an Anatolian estate; an Islington Georgian or something futuristic near Aberystwyth - all have the charm of being mere fantasies and at least they comfort me when I get home to Camden Town and find that I have been burgled yet again. 
Slavoj Zizek, Slovenian sociologist, cultural critic 
Military PC ga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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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play them compulsively, enjoying the freedom to dwell in the virtual space where I can do with impunity all the horrible things I was always dreaming of - killing innocent civilians, burning churches and houses, betraying allies... Plato was right: there are only two kinds of people on this earth, those who dream about doing horrible things and those who actually do them. 
My favourite game? Stalin Subway, a Russian one: Moscow 1952, the player is a KGB investigator, called by Stalin Himself to unearth the plot to kill Stalin and other members of the Politburo. One can arrest and kill suspects at one's will. If one wins, one gets a medal from Stalin and Beria! What more can one expect in this miserable life?<BR>&nbsp;<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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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 괜히 알라딘 상품 넣기를 하기로 해갖고...;; 하여튼 존 버거랑 슬라보예 지젝은 정말 많이 뜨는군요-_-;;
영국신문이라 그런지 그쪽 사람들이 많은 듯 하고&nbsp;특히 진화생물학, 사회생물학 분야 인물들이 눈에 띄네요.&nbsp;
대학중앙도서관홈페이지랑 알라딘 상품넣기 검색을 둘 다 해봤는데 가끔씩은 알라딘 것이 더 검색되네요...;; 
앤서니 기든스,안토니아 프레이저(헤롤드 핀터의 아내라네요..),호미 바바, 크리스토퍼 히친스, 로저 스크루턴, 
에드워드 윌슨, 슬라보예 지젝 등의 취미가 재밌군요. 특히 지젝은 왠지 정말 지젝스러운 ㅋㅋ 
사실 무엇보다 친애하는 천 모군이 Tariq Ramadan의 취미를 보아주었으면 좋겠군요.. <BR>]]></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49/42/cover150/8974832119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4832119</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퍼온글] * 20대 젊은 보수주의자들의 현황 2 </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1111797</link><pubDate>Mon, 07 May 2007 00:1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1111797</guid><description><![CDATA[




* 한겨레(2007. 5. 3)&nbsp; / "구조조정은 해야죠…나는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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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보수화?그 이면②]노동ㆍ노동자를 보는 모순된 시선 
"요즘 애들한테는 희망이 없어요. 파시스트나 안 되면 다행이야."<BR>&nbsp;&nbsp;<BR>&nbsp;&nbsp;종종 진보단체들의 정책자문 역할을 하는 한 대학 교수가 스치듯이 한 얘기다. 대학생이 변했다는 얘기는 이제 '식상한' 말이 된 지 오래다. '어른들'은 "20대들이 변했다"고 한탄한다. 하지만 20대들은 자신들을 바라보는 그 '못마땅한' 눈빛이 당황스럽다고 한다.<BR>&nbsp;&nbsp;<BR>&nbsp;&nbsp;오히려 자신들을 8% 가까이 되는 청년실업률 속으로 내 몬 어른들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이런 점까지 포함해 요즘의 20대가 과거의 20대와 다른 것만은 사실이다. 주요대학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정당지지도 조사에서 매번 1위는 한나라당이다. '보수적'이라는 40-50대와 비슷한 성향을 보인다. 강의실 대신 거리에 섰던 시간이 더 많은 '선배들'과 확실히 다르다.<BR>&nbsp;&nbsp;<BR>&nbsp;&nbsp;"민주화요? 이미 어느 정도 이룬 것 아닌가요? 지금 우리사회가 신경써야 할 것은 경제죠."<BR>&nbsp;&nbsp;<BR>&nbsp;&nbsp;그러나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과거와 다르다. 복지보다는 경쟁을, 분배보다는 성장을 중시한다.<BR>&nbsp;&nbsp; 





▲ 20대가 변했다고 한다. 확실히 지금의 20대는 그 이전의 선배들과 다르다. 민주화보다는 경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복지보다는 경쟁이 살 길이라고 믿는다. ⓒ프레시안 <BR>&nbsp;&nbsp;"'구조조정 반대' 논리가 더 빈약해요"<BR>&nbsp;&nbsp;<BR>&nbsp;&nbsp;아직 학생인 대학생들과 막 졸업해 취업준비를 하고 있는 이들, 그리고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들이 노동과 노동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취재하면서 발견한 것은 그들의 생각 속에 자리 잡은 '모순들'이었다.<BR>&nbsp;&nbsp;<BR>&nbsp;&nbsp;"내 안정은 중요하지만 구조조정은 필요하다", "노동운동은 싫지만 노조에 가입하겠다", "자유주의는 좋은 것이지만 내 권리는 보장받아야 한다." 이들은 각기 다른 맥락의 얘기를 뒤섞어 쏟아냈다.<BR>&nbsp;&nbsp; 





▲ 20대의 생각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혼돈기 같았다. 인터뷰 과정에서 앞의 대답과 상반되는 맥락의 답을 내놓기도 했다. ⓒ프레시안 <BR>&nbsp;&nbsp;앞으로 직업을 구할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안정'이라고 하는 대학 4학년 김희정 양(가명)은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기업 구조조정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는 "경쟁력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답했다. 하지만 구조조정은 노동자의 고용을 불안하게 만든다.<BR>&nbsp;&nbsp;<BR>&nbsp;&nbsp;김 양에게 "본인이 구조조정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냐"고 묻자 그는 "내가 경쟁력을 키워 (구조조정) 대상에 안 끼면 된다"고 답했다.<BR>&nbsp;&nbsp;<BR>&nbsp;&nbsp;"과연 지금처럼 치열한 경쟁시대에 '구조조정은 안 된다'는 논리가 먹힐까요? 경쟁이 세계적 추세인걸요. 오히려 저는 반대하는 쪽의 논리가 더 빈약하다고 생각해요. 각자 경쟁력을 갖춰 그 속에서 살아남도록 노력해야 하는 거죠."<BR>&nbsp;&nbsp;<BR>&nbsp;&nbsp;이처럼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시장경제의 경쟁 논리를 '거부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박준식 한림대 교수가 한국노총의 용역을 받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대학생 응답자의 70.1%가 자본주의를 긍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진 지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마당에 이들 젊은이들 입장에서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체제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이들에게 자본주의는 저항의 대상이 아니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대상이다. (☞ 관련기사 보기 : 대학생 70.1%, 자본주의 긍정적으로 평가)<BR>&nbsp;&nbsp;<BR>&nbsp;&nbsp;하지만 자본주의 질서에 따라 밀려나야 할 대상이 자기 자신이 되면 사정은 조금 달라진다. 그래서 이들이 선택한 적응 방법은 자신이 '구조조정의 대상자'에 포함될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애초부터 안정적인 직업을 선호한다는 것. 지난 2월 서울의 한 대학을 졸업하고 학원강사를 하고 있는 김동운 씨는 "친구들 가운데 소위 '스펙'(학점과 영어점수 등)이 되는 아이들은 모두 공기업으로 간다"고 말했다.<BR>&nbsp;&nbsp;<BR>&nbsp;&nbsp;"아니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고시 공부'에 매달리지요. 대기업은 오히려 그 다음입니다."<BR>&nbsp;&nbsp;<BR>&nbsp;&nbsp;"노동조합? 내 방패막이가 되어 줘!"<BR>&nbsp;&nbsp;<BR>&nbsp;&nbsp;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대한 시선도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BR>&nbsp;&nbsp;<BR>&nbsp;&nbsp;ㄱ기업에서 1년 계약의 기간제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이모 씨(26)는 "잦은 노동조합의 '투쟁'이 우리 기업들의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한 요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기업에 대한 정부의 간섭에 대해서도 그는 "지나친 규제가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가로 막는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그는 기업 활동의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관점의 소유자였다.<BR>&nbsp;&nbsp;<BR>&nbsp;&nbsp;하지만 그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호소하면서는 "우리 회사의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들의 문제에 관심이 없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각종 사회적 현안에 노동조합이 나서는 것을 '삐딱'하게 보면서도, 자신의 '방패막이'로서의 노조는 긍정하고 있는 셈이었다.<BR>&nbsp;&nbsp;<BR>&nbsp;&nbsp;그의 관점은, 앞의 한국노총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노조에 참여할 의사가 있다고 밝히면서도 현재의 노동운동이 투쟁위주의 운동노선으로 인해 외면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응답자가 70% 가까이 됐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BR>&nbsp;&nbsp;<BR>&nbsp;&nbsp;이런 20대의 변화는 향후 노동운동에도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한 노동운동가는 "지금의 20대가 조합원들의 다수가 되는 10년 후면 노동운동의 모습은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며 "조합원들의 실리주의 경향은 점점 강화되고 자신들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회적 이슈에 대한 참여는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BR>&nbsp;&nbsp;<BR>&nbsp;&nbsp;"아무리 취업난이어도 일한 만큼 정당하게 대우 받고 싶다"<BR>&nbsp;&nbsp; 





▲ 노동, 일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학원과 학점에 매달리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일정한 수준의 삶의 질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에 취직하는 것이다. ⓒ프레시안 <BR>&nbsp;&nbsp;노동, 즉 일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 20대에게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해 안정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삶의 질 또한 중요하다. 누구보다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삶을 벼랑 끝까지 내몰고 싶은 생각은 없다. 노동은 자아실현의 이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적절한 수준의 삶의 질을 보장받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BR>&nbsp;&nbsp;<BR>&nbsp;&nbsp;지난 2월 서울의 한 대학을 졸업해 H대기업에 입사한 문재희 씨(24, 가명)는 "이력서를 낼 회사를 선택한 기준은 복지후생이었다"고 말했다. 적절한 휴가와 지나치게 '빡빡하지' 않은 근로환경이 우선 순위가 됐다는 것이다.<BR>&nbsp;&nbsp;<BR>&nbsp;&nbsp;대학생들 역시 대부분 "일한만큼 정당하게 대우받을 수 있는 회사에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삶의 질에 대한 욕구가 강한 것이다. 취업정보사이트인 인크루트가 260개의 중소·대기업을 상대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난해 신입사원의 평균 퇴사비율은 28.8%였다. 그렇게 어렵다는 취업난을 뚫고 들어간 회사에서 1년 이내에 회사를 그만두는 신입사원이 10명 중 3명 꼴인 것이다.<BR>&nbsp;&nbsp;<BR>&nbsp;&nbsp;입사 2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나온 김모 씨(28)는 지금 다른 기업에의 취직을 준비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했다.<BR>&nbsp;&nbsp;<BR>&nbsp;&nbsp;"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일은 너무 많고 월급은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BR>&nbsp;&nbsp;<BR>&nbsp;&nbsp;인크루트의 또 다른 설문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 사무직과 대기업 생산직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 것이냐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 5042명 가운데 3179명(63%)이 대기업 생산직을 골랐다.<BR>&nbsp;&nbsp;<BR>&nbsp;&nbsp;과거 같으면 사무직을 더 선호했겠지만 지금은 기름때가 묻더라도 더 높은 임금과 복지혜택을 누릴 수 있고 상대적으로 고용이 안정된 대기업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BR>&nbsp;&nbsp;<BR>&nbsp;&nbsp;"우리가 보수? No!"…"노무현 정권, '진보'아닌 것들로 '진보' 채워 놓아"<BR>&nbsp;&nbsp; 





▲ 누가 이들의 머리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을까? 노무현 정권의 등장 이후 혼란스러워진 진보와 보수의 개념도 한 가지 원인이라는 지적이 있다. ⓒ프레시안 <BR>&nbsp;&nbsp;20대의 이같은 '실리주의적 경향'에 대해 전문가들은 "정서적으로 가장 예민한 청소년기에 외환위기라는 큰 태풍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외환위기 때 부모가 명예퇴직 당하고 하루 아침에 가계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보고 들은 현재의 20대가 이전 세대에 비해 경제적인 마인드가 유독 발달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분석이다.<BR>&nbsp;&nbsp;<BR>&nbsp;&nbsp;더욱이 대학의 공동체가 무너져 내리면서 20대가 주로 접하게 되는 '생각'은 사회 주류의 것들뿐이다. 부모의 영향력도 과거보다 막대해졌다. 80년대의 20대는 상당수가 그들의 부모보다 나은 학벌에 더 '똑똑한' 자식이었지만 지금의 20대는 부모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못한 경우도 종종 있다.<BR>&nbsp;&nbsp;<BR>&nbsp;&nbsp;취업포털 커리어가 20대 구직자 17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8.7%가 구직활동 시 부모의 관여도가 크다고 답했다. 심지어는 부모가 채용 문의를 하거나 면접시험에 동행했다는 응답도 각각 9.5%, 3.4%였다. 부모 세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실제 한 대학에서 만난 김희정 양은 "취업 문제를 부모님과 가장 많이 상의한다"고 말했다.<BR>&nbsp;&nbsp;<BR>&nbsp;&nbsp;우리사회에서 또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라는 개념이 혼재ㆍ왜곡돼 사용되는 것도 20대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 중 하나다. 한 대학생은 "한미FTA 같은 개방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보수적인 것 아니냐"고 되묻기도 했다.<BR>&nbsp;&nbsp;<BR>&nbsp;&nbsp;3년간 C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한 시간강사는 "20대는 아직 가치관이 완전히 정립되지 않은 시기로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며 "특히 노무현 정권은 진보가 아닌 것들을 '진보'라는 개념 속에 담아둠으로써 학생들의 생각에 혼란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사회 통념상 '보수'에 속하는 것들을 노무현 정권이 '진보'라고 주장함으로써 '진보'의 개념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BR>&nbsp;&nbsp;<BR>&nbsp;&nbsp;실제로 "개방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더 보수적"이라는 20대의 주장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쇄국론자'로 몰아붙이며 "개방만이 살 길"이라고 강변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논리를 그대로 닮아 있었다. 이 시간강사는 "온갖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밀어붙이면서도 스스로 진보를 자처하며 '좌파신자유주의'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낸 노 대통령은 젊은이들의 의식 변화에 큰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BR>&nbsp;&nbsp;<BR>&nbsp;&nbsp;그런 점에서, 20대의 이율배반적인 사고들, 그리고 그것들을 스스로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의식구조는 요즘 20대들의 '생각 없음'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그들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모순이 반영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 //기사 본문 끝 ----><!---- 관련링크 기자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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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description><image><url>http://www.pressian.com/images/2007/05/04/60070429132232.jpg</url><link>http://blog.aladin.co.kr/vara/1111797</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퍼온글] 경향신문-지식 찍어내는 사회, 지성은 숨쉬는가</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1105797</link><pubDate>Thu, 26 Apr 2007 15: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1105797</guid><description><![CDATA[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지식 찍어내는 사회, 지성은 숨쉬는가<!-- TITLE END -->

입력: 2007년 04월 22일 17:5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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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DY START -->서울대 경제학부 김수행 교수는 1989년 3월부터 서울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마르크스 강의였다. 학생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300명 규모의 강의실은 매번 만원이었다. 비좁은 계단을 파고들어 앉아 기어코 강의를 들었다. <BR><BR>91년에 이 강의를 수강했던 신모씨(36)는 “중간·기말 고사 때 1000여명이 모여 시험을 치르느라 건물 한 동을 다 빌릴 정도였다”고 회상했다.<BR><!--imgtbl_start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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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_start_1-->지난달 30일 김수행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현대마르크스 경제학’강의를 하고 있는 서울대 멀티미디어강의동(83동) 506호 강의실. 210명이 들어올 수 있는 대형강의실이지만, 빈 자리가 많아 썰렁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손제민기자 <!--cap_end_1--><!--imgtbl_end_1-->
<BR>그로부터 18년이 흐른 지난달 30일 오후 1시 서울대 멀티미디어강의동(83동) 506호. 김교수는 여전히 마르크스를 가르치고 있었다. “케인스는 상당히 훌륭한 경제학자예요. 자기가 살던 시대 문제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죠.” ‘현대마르크스 경제학’ 과목. 이날 수업은 케인스의 유효 수요 이론과 장기 정체설에 관한 것이다. 210명 규모의 강의실에 40여명의 학생만 앉아 있다. <BR><BR>조교 정상준씨(32)는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수업에는 안 들어와도 시험 때 들어와서 밖에서 토론하고 ‘학습’한 가락으로 일필휘지 답을 적고 나가던 ‘고수’들이 있었다. 지금은 강의를 열심히 듣지만 판에 박힌 답안만 제출한다”고 말했다.<BR><BR>김교수는 “요즘 학생들을 보면 다들 취업에 너무 매달려. 신입생 때부터 그래. 이해는 돼. 대한상공회의소 이런 데서는 성적표에 마르크스 경제학 표시가 돼 있으면 ‘이런 수업을 왜 들었느냐’고 물어본다지”라고 했다. 올해 정년을 맞는 김교수는 요즘 후임 문제를 걱정하고 있다. “경제학부 교수가 34명인데 미국 박사가 31명이야. 비주류 경제학은 나 하나뿐이야. 올해 내가 정년퇴직하면 비주류 경제학이 없어질지 몰라. 요즘 새로 들어온 경제학과 교수들 대부분이 신자유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어. 마르크스 경제학을 둘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을 가진 젊은 교수들이 많아.”<BR><BR>이 문제는 비주류 경제학자를 뽑을 것인가라는 단순한 임용 문제가 아니라 한국 지식 사회에 비판적 지식인의 재생산 구조가 존재하는가의 문제이다. 학부 시절 김교수의 ‘마르크스’ 수업에 열광했던 인문학자 고병권씨는 ‘지식인의 비극적 죽음’을 예감했다고 한다. 그는 “예전에는 김교수 같은 분들의 글이 잡지에 실리면 논쟁에 불이 붙고, 대자보도 붙이고 했는데 지금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른다”고 했다.<BR><BR>이제는 대학을 ‘지성의 전당’이라고 말하는 이도 드문 세상이 됐다. 실용과 부가가치 창출은 대학의 최고 목표가 되었다. 일부 대학의 국문학과는 ‘시나리오 학과’로 명칭을 바꿨다. 대학가 인문과학서점은 하나 둘 줄더니 요즘 대부분 문을 닫았다. <BR><BR>김대중·노무현 정부에 걸쳐 전개된 ‘지식기반사회’ ‘지식기반경제’는 우리 사회가 지식을 비판이성의 관점이 아닌, 산업으로 수용하도록 주입시켰다. 교육의 목표는 ‘올바른 시민’의 육성이 아닌, ‘시장반응형 인간’ 양성으로 변했다. 기업은 대학의 진정한 주인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교육부와 전경련이 함께 경제교과서를 만들어 노동을 모욕하고 재벌을 찬양하는 세상이 됐다.<BR><BR>포털사이트 네이버는 ‘지식인’이란 명사를 동사로 만들었다. 지식인에게 묻는다는 것은 ‘지식iN’ 네트워크와 검색툴을 이용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지식은 붕어빵처럼 대량생산되는 복제품이 된 것이다. 한때 시대 정신을 선도했던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저술활동은 쓴 사람과 평가하는 사람들만 읽는, 틀에 얽매인 지루한 논문들로 대체되고 있다. 학자는 ‘논문 작성 노동자’로 변모하고 있다. 이것이 지식인의 죽음이 어른거리고 있는 한국사회의 풍경이다. <BR><BR>〈김종목·손제민기자〉<!-- BODY END -->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87년 이후 지식인상의 변화<!-- TITLE END -->

입력: 2007년 04월 24일 17:2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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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DY START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주류적인 지식인상은 저항적 지식인이었다. 사르트르가 역설한 “지식인은 우리 시대의 모든 갈등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인은 억압당하는 자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는 명제는 4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은 80년대 대학 신입생의 필독도서였고, 그들을 새로운 현실로 인도하는 안내서였다. 스스로를 지식인으로 자각하는 것이 사회와 현실로 나아가는 초대장이었던 셈이다.<BR><!--imgtbl_start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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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_start_1-->1971년 전태일 추모기도회에서 대중을 상대로 구국강연을 펼치고 있는 함석헌 선생. <!--cap_end_1--><!--imgtbl_end_1--><BR>－탈근대화, 천대받는 ‘진실’－<BR><BR>문익환 목사는 생전에 강연회에서 종종 지식인과 민중의 관계를 칼날과 칼등의 관계로 비유하곤 했는데,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지식인들은 비유 그대로 ‘민중의 칼날’이었다. 당시의 현실에서 지식인은 근대적 합리성과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해 가장 많이 교육받은 존재였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담지자로 기능했다. 민주주의, 자유, 인권과 같은 추상적 개념은 이들에 의해 만질 수 있고 도달할 수 있는 현실적 실재로 감지됐다. 민중의 계몽가이자 선구자로서 지식인은 사회의 각 영역에 큰 자취를 남겼다. 시대의 선생으로 불린 함석헌과 리영희의 저작들, 장준하의 선구적 활동, 백낙청과 김현이 주도한 비평의식의 고도화,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탈춤과 같은 민중 문화의 재발견 등은 그러한 현상의 몇몇 예에 불과하다. 70, 80년대에 걸쳐 지식인은 민주화 투쟁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지적 수준을 끌어올린 교사였으며, 특정한 의미에서 ‘민족’과 ‘문화’의 창안자이기도 했다.<BR><BR><!--imgtbl_start_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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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_start_2-->광복군 장교 출신으로 박정희 군사정권에 저항하다 75년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장준하 선생. <!--cap_end_2--><!--imgtbl_end_2-->하지만 이제 이런 일들은 추억 속의 에피소드가 되었다. 굳이 푸코나 리오타르 같은 프랑스 사상가들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지식인의 사회적 위상이 현저하게 추락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다양하게 설명돼야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같은 세계사적 전환이 바탕을 이루며 거기에 한국 사회의 역사적 변천이 조응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BR><BR>그 밑바닥에 탈근대적 현실이 있다. 근대 극복을 목표로 출발한 탈근대주의는 근대가 창출한 각종 제도, 가치, 개념, 역사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데 일조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당연시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근대에 이르러 ‘만들어진 전통’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현실과 진실의 관계가 흔들렸다. 과거에는 현실을 깊게 파고들면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진실’이라는 단어가 천대받은 적이 있었던가? 총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현실을 총체적으로 재현·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탈근대주의가 가르친 진실이다. <BR><BR>리오타르는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가치를 여전히 설파하는 지식인이란 무지이거나 권력의지의 산물일 뿐이라고. ‘지식인의 종언’은 무엇보다 지식인 자신에 의해 천명됐다.<BR><BR>여기에 사회주의의 붕괴로 대표되는 이념의 붕괴는 한국 지식인상의 변화에서 기억할만한 사건이다. 박노해나 조정환, 이진경처럼 이 무렵 새로 등장한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한 채 선배 세대인 4·19세대, 유신세대와 자신들을 날카롭게 구분했다. 하지만 민주화가 시작되고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이러한 구분법의 의미도 모호해졌다. 이념의 붕괴는 역설적으로 사상의 해방을 몰고 왔다. 분수처럼 사상이 흩어졌으니, 사람들은 저마다 급진좌파에서 뉴라이트로, 헤겔에서 들뢰즈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오늘날 한국 지식인 사회는 사상의 백가쟁명 시대를 새롭게 관통하고 있다. 그런 만큼 사상의 대변인으로서, 혹은 안내자로서 지식인의 사회적 입지는 현저하게 약화됐다.<BR><BR>아마도 지식인을 날것의 현실로 끌어내린 직접적인 계기는 외환위기일 것이다. 자살이 속출하고 노숙자로 넘쳐나는 거리가 매일 매스컴에 보도되면서, 모든 것이 물질적 가치를 중심으로 재편됐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신지식인’이다. 현재까지 3316명이 선정된 것으로 알려진 신지식인은 외환위기 속에서 경제적 가치창출이라는 일반적 목표에 국민을 동원하려는 상징조작이었다. 신지식인은 한편으로는 기존 지식인의 권위에 기대면서도 수량화, 물질화, 공유화라는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지식인의 ‘유용성’에 강력한 의문부호를 새겨놓았다.<BR><BR>－IMF뒤 평등에서 양극화로－<BR><BR>외환위기의 극복이 신자유주의의 적극적인 수용으로 귀결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강화되었다. 신지식인은 이제 하나의 해프닝이 되고 말았지만, ‘인문학의 위기’는 필연이었다. 자본의 거칠 것 없는 자유와 제국으로의 수렴을 특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는 담론의 중추를 민주주의로부터 돈으로, 평등과 인권으로부터 양극화와 개방으로 옮겨놓았다. 황우석이 찬양되던 시절, 각종 뉴스는 앞으로 벌어들일 로열티를 계산하느라 바빴다. 그곳에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지식인, 아니 환산되어서는 안 되는 지식인이 설 자리는 없다. 또한 황우석 사태는 지식인의 보루였던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함으로써 마지막 옷고름을 풀어헤쳤다. 연이어 고위공직자나 총장 등의 표절사건이 불거지면서 ‘지식인의 종언’은 엉뚱한 방식으로 현실화됐다. 이것을 ‘관행’이라 하던데, 그렇다면 그러한 관행으로 지탱돼 온 과거 지식인의 존재방식을 누가 존경할 수 있겠는가?<BR><BR>오늘날 한국의 지식인은 혼돈의 와중에 서 있다. 그의 자산인 ‘지식’은 인터넷이 대신하며, 그의 도구인 ‘글쓰기’는 댓글보다 읽히지 않는다. 그의 언어인 보편성은 의심의 대상이며 그가 가리키는 방향은 신뢰성을 썩 잃었다. 시대의 양심이란 칭호는 역사책에나 둥지를 틀었다. 지식정보화사회에서 지식의 가치는 무한대로 상승했지만 지식인의 가치는 역사상 유례없이 추락했다. 교양과 지적 유희를 제공하고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지식의 효용성은 거듭 강조되지만, 이를 종합하고 비판할 지식인의 필요성을 적극 긍정하는 목소리는 턱없이 부족하다.<BR><BR>사실 민주화라는 지상과제와 총체성을 강조하는 거대담론의 존재는 사상과 이론의 성찰을 억압해왔다. 이로부터 해방된 지식인들은 낡은 갑옷을 벗어던지고 근본을 파고들었다. 근대성, 젠더, 민족주의, 기억, 일상권력 등이 비판목록에 오르면서 전선(戰線)은 갈라졌고 심화됐다. 문제는 ‘부분’에 대한 비판이 ‘전체’로서 존재하는 권력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하는가이다. 오늘날 사회 곳곳에서 발견되는 지식인의 기능화 양상은 지식인 자신이 부분성에 매달려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BR><BR>최근에 지식인과 관계된 논의가 여전히 하나로 존재하는 ‘국가’로 수렴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황우석 사태가 애국주의의 광풍을 등에 업고 등장·확산됐던 상황, 현재 진보진영이나 보수진영 모두 ‘선진(화)’ 담론을 둘러싸고 경쟁적으로 국가정책 마련에 부심하는 경향, ‘인문학의 위기’론이 국가의 지원 요구로 귀결되는 풍경, 학술진흥재단이라는 국가기관이 학문의 기반을 좌우하는 현실 등은 지식인의 국가종속성 내지는 국가지향성을 강하게 예시한다.<BR><BR>이런 상황은 지식인과 국가의 관계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권력의 민주성 문제만이 초점일 수 없다. 많은 논의들이 국가로 수렴될 때 그로 인해 가려지는 부분들이 상당하며 그런 부분들이 오히려 지식인의 질문과 대답을 기다리는 곳일 수 있다. 따라서 질문은 지식인들이 ‘민주화 이후’의 국가에 대해 얼마나 지혜롭게 대응하고 있는가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권력은 민주화되었을지언정 지식인의 국가론이 지혜로워졌다는 증거는 많지 않다. 국가와 지식인의 관계 설정은 현재진행형의 문제다.<BR><BR>그간 일어난 지식인상의 변화 중 ‘독립적 지식인’의 확산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강준만, 박노자, 고미숙, 이정우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탈근대적 사유에 기반을 두면서 탈권위주의, 다원화 그리고 ‘대중’과의 직접소통을 지향한다. 여러 방면에서 과거 지식인의 존재방식과 다른 차원을 선보이는 이들의 활동은 향후 지식인상의 갱신이라는 측면에서 하나의 시금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들과 다른 궤도에 속하지만 공병호나 이덕일처럼 직접 대중을 상대로 한 자유저술가의 확산도 현 단계 지식인상의 또 다른 변모 양상을 보여준다.<BR><BR>－새로 떠오르는 ‘대중지성’－<BR><BR>최근에 ‘대중지성’ 개념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도 지식인의 몰락과 대중의 등장이라는 현상과 연관이 깊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와 자율주의에 기반한 ‘다중네트워크’가 주도적으로 제창하고 있는 이 개념은 지식인의 위계적, 엘리트적 사유로부터 벗어나 대중을 근원에 두는 새로운 지식 창출·향유 방식을 겨냥한다. ‘대중지성’은 계몽주의적 지식인의 역할이 한계에 봉착하고, 인터넷의 발달에 따라 대중이 지식의 소비자이자 창조자로 부상하면서 전통적인 의미의 지식(인)과 변별되는 개념으로 떠오르고 있다.<BR><BR>한국 사회의 물질적, 구조적 변화를 빠트리고 지식인상의 변화를 말할 수 없다. 서울대 입학생 중 상류층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가는 현실을 덮어둔 채, 소득격차가 학력격차로 이어지고 학력격차가 신분고착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말하지 않고, 여전히 미국박사가 최고고 학연과 인맥이 우선시되는 문제를 괄호치고 지식인상을 논한다는 것은 난센스가 아닌가. 하지만 그러하기에 더더욱 ‘지식인’은 되새겨져야 할 화두이다. 과거에도 지식인은 학력과 신분으로서 규정되지 않았다. 지식인이란 본시 실천적 개념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이다. 허위에 저항하고, 현실을 인간화하며, 가야할 길을 묻는 한 그는 언제나 지식인인 것이다.<BR><BR>〈박헌호/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연구교수〉<!-- BODY END -->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이념분포’ 지식인 명단<BR>강내희(중앙대 교수) 강만길(고려대 명예교수) 강정구(동국대 교수) 강준만(전북대 교수) 고미숙(수유+너머 연구원) 고병권(수유+너머 연구원) 공병호(공병호경영연구소장) 김동길(연세대 명예교수) 김동춘(성공회대 교수) 김명인(인하대 교수) 김상봉(전남대 교수) 김상조(한성대 교수) 김세균(서울대 교수) 김수행(서울대 교수) 김영민(한일장신대 교수) 김우창(고려대 명예교수) 김원(서강대 연구교수) 김은실(이화여대 교수) 김일영(성균관대 교수) 김정배(전 고려대 총장) 김종철(녹색평론 대표) 김지하(시인) 김태동(성균관대 교수) 김호기(연세대 교수) 나성린(한양대 교수) 나임윤경(연세대 교수) 민경국(강원대 교수)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 박세일(서울대 교수) 박지향(서울대 교수) 박태균(서울대 교수) 박효종(서울대 교수)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장)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 백영서(연세대 교수) 복거일(소설가) 서경석(목사) 서길수(서경대 교수) 서중석(성균관대 교수) 손호철(서강대 교수) 송두율(독일 뮌스터대 교수) 송호근(서울대 교수) 신광영(중앙대 교수) 신영복(성공회대 석좌교수) 신용하(이화여대 석좌교수) 신율(명지대 교수) 신지호(자유주의연대 대표) 심광현(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안병욱(가톨릭대 교수) 안병직(서울대 명예교수) 염재호(고려대 교수) 오세철(연세대 명예교수) 우석훈(성공회대 연구교수) 유석춘(연세대교수) 윤평중(한신대 교수) 윤해동(성균관대 교수) 이근식(서울시립대 교수) 이문열(소설가) 이병천(강원대 교수) 이석연(변호사) 이어령(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 이영훈(서울대 교수) 이인호(명지대 석좌교수) 이정우(경북대 교수)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 이필렬(에너지전환 대표) 이효재(이화여대 명예교수) 임지현(한양대 교수) 임헌영(문학평론가) 임혁백(고려대 교수) 임현진(서울대 교수) 장상환(경상대 교수) 장하성(고려대 교수) 장하준(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 장회익(녹색대 석좌교수) 전상인(서울대 교수) 정성진(경상대 교수) 제성호(중앙대 교수) 조갑제(전 월간조선 대표) 조국(서울대 교수) 조순(서울대 명예교수) 조순경(이화여대 교수) 조정래(소설가) 조정환(문학평론가) 조한혜정(연세대 교수) 조효제(성공회대 교수) 조희연(성공회대 교수) 좌승희(경기개발연구원장) 진중권(중앙대 겸임교수) 최갑수(서울대 교수) 최광식(고려대 교수) 최원식(인하대 교수) 최장집(고려대 교수) 하영선(서울대 교수) 하용출(서울대 교수) 한상진(서울대 교수) 한홍구(성공회대 교수) 홍성태(상지대 교수) 홍세화(한겨레신문 기획위원) 홍윤기(동국대 교수) 홍진표(자유주의연대 사무총장) 황대권(생태공동체운동센터 대표) 황석영(소설가) 황장엽(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
* 설마 여기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만 지식인은 아닐 테지만... 어쨌든... 오프 신문에는 지식인들의 계보도가 이념적으로 구분되어 그려져 있다. 그게 재미있는데...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1－2. 지금,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BR>지식인 사회가 분명한 ‘민주 대 반민주’ 전선으로 양분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지식인 사회는 ‘사상해방’이라고 할 만큼 다양하게 분화됐다. 반공주의자는 냉전적 사회인식이 힘을 잃어가면서 세가 줄었다. 특히 2000년 6·15공동선언 등 남북한 화해무드가 지식사회 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파 지식인들도 반공주의를 배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민족주의자의 경우 위세는 여전하지만, 인권·시민사회· 탈민족주의자의 부상도 두드러지고 있다. 너도 나도 자유주의를 자처할 만큼 자유주의자가 증가하고 있다. 노동, 성, 환경 등 다양한 주제가 등장하면서 지식인의 분포도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급격히 부상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동아시아론’ 등 대안 담론의 도전을 받고 있다. 좌파 지식인들의 우파 전향 및 ‘중도선언’이라는 새 경향도 나타났다. 80년대 중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포기한 좌파 경제학자 안병직(뉴라이트재단 이사장·서울대 명예교수)을 비롯해 90년대 소련 등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김영환(시대정신 편집위원), 신지호(자유주의연대 대표) 등 ‘주체사상파 운동권’들이 전향했다. 최근 홍윤기(동국대 교수), 황석영(소설가) 등은 ‘급진적인 좌파나 경직된 우파가 아닌 통합적 대안으로서의 중도’를 천명했다.<BR><!--imgtbl_start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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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_start_1-->2006년 유신체제를 재평가한 역사교과서 편찬을 추진하다 4·19유족회원에게 멱살을 잡힌 서울대 이영훈 교수. <!--cap_end_1--><!--imgtbl_end_1--><BR><!--imgtbl_start_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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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_start_2-->2003년 입국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기소됐던 재독 학자 송두율 교수. <!--cap_end_2--><!--imgtbl_end_2-->경향신문은 최근 이들의 사상 궤적을 토대로 ‘2007년 한국사회 지식인 지도’를 작성했다. 정치·경제·사회 이념의 좌우 성향(가로축), 민족주의 성향 여부(세로축)로 한 2차원 공간에 주요 지식인을 배열했다. 두 축의 교차점에서 멀수록 이념적 특성을 뚜렷이 보여준다. 강정구(동국대 교수)와 강만길(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장·고려대 명예교수)은 좌파 성향에 차이가 있지만 민족주의적 특성이 강하다. 강정구는 좌파 민족주의자, 홍세화(한겨레신문 기획위원)는 좌파 탈민족주의자, 복거일(문화미래포럼 대표·소설가)은 우파 탈민족주의자를 각각 대표한다.<BR><BR>김호기(연세대 교수)는 “우리의 지식인 이념 분포 양상은 서구 사회와 다르다. 서구적 틀로는 좌파가 탈민족주의, 우파가 민족주의 중심으로 분포하지만 우리는 좌파민족주의 지식인들이 많다”며 “이는 김구 등 우파 민족주의 그룹이 몰락하고 나서 수십년간 반공체제가 공고해진 탓”이라고 말했다.<BR><BR>#민족주의자<BR><BR>좌우 이념 성향에 따라 북한체제의 포용 및 통일 방식의 개방성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좌파 민족주의자는 ‘분단 국가의 일부’로서 남한이 가진 정체성의 한계를 강조한다.<BR><BR><!--imgtbl_start_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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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_start_3--><!--cap_end_3--><!--imgtbl_end_3-->70년대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등을 써 통일지향의 필요성과 민족문제에 대한 자각을 일깨운 강만길, 남북한 모두의 내부 모순을 해소하기 위한 통일(분단체제론)을 주장한 백낙청(‘창작과 비평’ 편집인·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진보적 민족주의자다. 급진적 좌파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북한도 우리의 일부’란 시각에서 반외세 자주 통일을 지향한다. ‘민중에 의한 통일’을 주장하는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장), 강정구, 송두율(독일 뮌스터대 교수)이 있다. 우파 쪽의 대표적 인사로 신용하(독도학회장·이화여대 석좌교수), 서길수(고구려연구회 이사장·서경대 교수) 등이 있다. 남한 체제 우위의 통일을 추구하거나, 통일보다는 대외 영토·역사 문제에 천착한다. 중도적 민족주의자로는 ‘전통 문화·정신’을 강조하는 김지하(시인·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를 들 수 있다. 북한을 타도 대상으로 보는 통일지향 세력으로서 극우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는 인사로는 97년 월남한 ‘주체사상의 대부’ 황장엽(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을 들 수 있다.<BR><BR>#좌파·진보주의자<BR><BR><!--imgtbl_start_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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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_start_4--><!--cap_end_4--><!--imgtbl_end_4-->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결함을 비판한다. 마르크스주의, 진보적 시민사회론, 근대비판주의 등으로 분화해 있다.<BR><BR>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은 사회 구성과 발전의 주체로서 노동자 계급을 강조한다. 특히 불평등 문제를 주시한다.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 위원으로 활동 중인 장상환(경상대 교수)은 현실 참여를 통한 사회 개선을 추구한다. 오세철(연세대 명예교수)은 좌파 학자들 위주로 ‘부르주아 체제에 포섭되지 않는 대안학교’인 진보적 사회과학대학원의 설립을 추진중이다. 손호철(서강대 교수)은 계급·민중적 시각의 사회평론에 적극적이다.<BR><BR><!--imgtbl_start_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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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_start_5--><!--cap_end_5--><!--imgtbl_end_5-->포스트 마르크스주의 지식인 그룹으로는 문화주의, 트로츠키주의, 자율주의자가 있다. 문화주의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을 비판하는 한편 자본주의 체제 내 문화가 계급 및 불평등 구조를 재생산한다고 본다. 강내희(중앙대 교수)가 대표적이다. 그는 시민단체 ‘문화연대’를 통해 음악 저작권 강화 반대, 18세 선거권 낮추기 운동, 외국인 노동자 문화축제 등을 펼치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자 정성진(경상대 교수)은 국가 단위의 자본주의 극복이 아닌 세계 수준의 혁명을 추구한다. ‘노동계급의 국제연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같은 노선에는 국제사회주의 단체 ‘다함께’가 있다. 자율주의자 조정환(갈무리출판 대표)은 스탈린식의 일당(전위당) 독재를 거부하고 노동자 자율에 의한 혁명과 발전을 추구한다.<BR><BR>진보적 시민사회론자들은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사회변화의 주체를 ‘억압 당하는 노동계급’이 아닌 ‘시민’으로 본다. “민중이 자신의 다양한 이익을 체제에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최장집(고려대 교수)의 민주주의 담론이 이와 연계된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 김상조(한성대 교수), 참여연대 운영위원 조국(서울대 교수) 등이 이 범주에 들어간다.<BR><BR><!--imgtbl_start_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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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_start_6--><!--cap_end_6--><!--imgtbl_end_6-->근대비판주의 지식인의 스펙트럼은 넓다. 페미니즘, 생태주의, 탈근대론 등 체제 비판 이론이 다양하게 분포해 있다. 국가주의, 개발론, 민족주의 등 근대적·권위주의적 담론을 거부한다. 페미니즘은 가부장적 사회체제가 가지는 폭압적 구조를 반대한다. 여성운동의 대가 이효재(이화여대 명예교수)로 시작된 페미니즘은 ‘여성의 신체’(조한혜정 연세대 교수)에서 ‘여성노동자’(조순경 이화여대 교수)까지 논의의 폭을 넓혔다.<BR><BR>생태주의는 ‘대안적’ 삶·사회를 꿈꾸는 급진적 개발반대론이다. ‘지속가능한 발전’(환경주의)을 넘어 ‘인간의 탐욕’이란 문제 의식에 기초해 “생태 문제를 최우선시하고 생태가치를 생활의 전반에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종철(녹색평론 대표), 장회익(녹색대학 석좌교수)이 있다. 탈근대론자들은 ‘민족주의 비판’(임지현 한양대 교수), ‘냉전적 국가론 비판’(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소수자 소외 비판’(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등을 통해 가부장적 획일주의, 순혈주의를 비판한다.<BR><BR>#우파·보수주의자<BR><BR><!--imgtbl_start_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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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_start_7--><!--cap_end_7--><!--imgtbl_end_7-->기본적으로 사회주의 반대, 자본주의 지향을 유지한다. 반공주의, 반공주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연한 뉴라이트, 시장자유주의 등이 분포하지만 각각 명백히 구분되지 않은 채 혼재된 양상이다.<BR><BR>반공주의 지식인들은 ‘정통 보수’를 자칭하며 ‘대한민국의 법통’을 강조한다.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서 대한민국은 ‘반국가단체’인 북한에 대항해야 한다는 논리를 토대로 한·미동맹과 보안법을 최우선시한다. 조갑제(전 월간조선 대표)가 이 그룹의 대표적 지식인이다. ‘산업화 세력’에 대한 ‘민주화 세력’의 폄훼 시도를 적극 방어하는 이들은 “뉴라이트는 위장 전향한 빨갱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BR><BR>뉴라이트는 신지호 및 홍진표, 최홍재(각각 자유주의연대 사무총장, 조직위원장) 등 ‘전향 386’들이 주도하는 ‘신우파’ 그룹이다. 자유주의, 북한인권 중시, 대외개방 및 시장주도 경제, 기간산업 민영화 등을 주장한다. 최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찬성에서 드러나듯 “자폐적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애국적 세계주의를 지향”한다. 대외 개방을 중시하는 탈민족주의자들이다.<BR><BR><!--imgtbl_start_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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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_start_8--><!--cap_end_8--><!--imgtbl_end_8-->“전통적 반공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됐고 사회 담론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신지호의 지적처럼 뉴라이트 그룹은 최근 보수진영의 사회 이슈를 선점하고 있다. “자유시장경제의 창달을 통한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추구하는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박세일(서울대 교수), “자본주의의 참담한 모순만 다룬, 잘못된 역사쓰기는 바로 세워져야 한다”는 교과서포럼 공동대표 박효종(서울대 교수)이 같은 노선이다.<BR><BR>시장자유주의는 영어공용화론을 주장하는 복거일, 자유시장 경제 지상론을 펴는 민경국(강원대 교수), 좌승희(경기개발연구원장) 등이 있다. 경제·통상 이슈에 집중하며, 정부의 시장개입은 최소한이어야 한다는 ‘작은 정부론’을 주창한다.<BR><BR>#자유주의자<BR><BR>국내 자유주의 개념은 포괄적이며 모호하다. 사회복지를 내세우는 사회적 자유주의(social liberalism)와 시장자유주의(libertarianism) 모두 자유주의로 해석된다. <BR><BR>최장집과 신지호 등 좌우파 지식인들이 모두 자유주의자를 자처한다. 상대적으로 이념 성향이 강하지 않은 지식인 그룹을 자유주의로 분류된다. 좌파와 우파를 넘나드는 총체적 시각으로 현상을 비판한다. 사회주의나 군부 독재 하에서의 ‘동원체제’ 등 억압적 권위를 거부한다. 윤평중(한신대 교수)은 자유주의자를 “열려 있으면서도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 연대하면서도 패거리 만들지 않는 사람”이라며 “사회의 여러 이념들 간의 괴리를 메울 수 있는 지식인”이라고 정의했다. 최근 ‘중도’를 선언한 홍윤기(동국대 교수)가 자유주의자 가운데 상대적 좌파, 유럽적 우파로 통하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출신의 이근식(서울시립대 교수)이 상대적 우파로 분류된다. <BR><BR>〈장관순·손제민기자〉<BR><BR><!-- 본문 테이블 end--><!--center></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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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이 요새 기획기사를 잘 하고 있네요. 재미있게 지켜보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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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description><image><url>http://img.khan.co.kr/news/2007/04/22/7d2301b.jpg</url><link>http://blog.aladin.co.kr/vara/1105797</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혼동되는 유목주의, 실체는 무엇인가? </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1098948</link><pubDate>Sun, 15 Apr 2007 09: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1098948</guid><description><![CDATA[대학신문서 펌.




혼동되는 유목주의, 실체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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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석 기자 ground28@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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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우…"들뢰즈-가타리의 개념에 처음부터 가치론적 함의 넣었기 때문에 오해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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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환…"『안티-오이디푸스』에서부터 자본주의에 대한 들뢰즈-가타리의 관점 애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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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민…"전쟁기계 개념은 환상에 불과하며 실천적 가능성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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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동욱…"정치적 해석으로부터 분리해 들뢰즈가 말한 일의적 존재론으로 돌아가야"

“언젠가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다”라고 미셸 푸코가 말한 것처럼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21세기 철학계의 큰 화두다. 들뢰즈는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에서 차이의 존재론으로서의 유목론을 언급했으며, 그 이후 『천 개의 고원』에서는 펠릭스 가타리와 함께 국가구속의 해체를 지향하는 ‘전쟁기계와 유목론’을 논했다. 이러한 유목론의 의미를 포착해 이진경은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어 가는 행위를 ‘노마디즘(유목주의)’으로 규정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유목주의’는 기존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일체의 방식을 의미하기도 하며, 철학적 개념으로서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의 문화ㆍ심리ㆍ경제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로 쓰일 정도로 용례의 범주가 넓어졌다. 그러나 과연 유목주의라는 개념은 올바로 사용되고 있는가? 과연 유목주의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이 될 수 있는가?&nbsp; 『대학신문』은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서면인터뷰 형식으로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들어봤다.<BR>
난무하는 유목주의 담론…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BR>◆천규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라는 책이 출간돼 지난해 한바탕 논쟁이 일었다. 노마디즘이 침략주의적 성격을 띤다는 그의 주장을 원전을 오독해 생긴 문제쯤으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이정우: 유목주의가 공격성 혹은 침략성을 띤다는 주장은 들뢰즈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생긴 오해다. 전쟁기계(사회 구성원들을 국가의 체계로 포섭시키는 국가장치의 기능을 해체하는 주체를 설명하기 위해 명명된 개념)는 국가장치 외부에 저항하는 삶의 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그것이 어떤 전쟁기계냐는 물론 경우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초국적 기업이나 거대 종교들도 전쟁기계이고, 대안 화폐를 모색하는 단체들도 전쟁기계일 수 있다. 전쟁기계는 하나의 개념이다. 그 자체에 처음부터 어떤 가치론적 판단이나 함의를 넣어 해석해서는&nbsp; 안 된다.
김진석: 이정우나 이진경은 유목주의가 침략성ㆍ공격성을 갖는다는 점을 완강히 혹은 완곡히 부인하지만 유목주의는 많은 경우에 공격성과 침략성을 띤다. 한국에서 유목주의는 어떤 공격성도 없이 국가의 구속력을 벗어나 자유롭게 이동하는 ‘사유’라고 소개되는데, 이 이해는 ‘관념적 철학의 안일한 자기만족’이 아닌가 싶다. 유목주의는 실제로 전쟁기계와 합체돼 상당한 공격성을 가진 ‘까칠까칠한 현존재’를 구성한다. 전쟁기계는 본질적으로 국가 체계에 반기를 드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김재인:&nbsp; 김진석의 의견에 동의한다. 유목주의(굳이 이 용어를 써야 한다면)는 이진경이 주장하는 것처럼 국가의 구속력을 쉽게 탈주하는 ‘사유’로 볼 수 없다. 공격성과 파괴를 부정적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모든 창조는 파괴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구성원을 구속하는 국가체제를 해체하려 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침략성ㆍ파괴성을 가질 수 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유목주의를 현실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이정우: 유목주의가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느냐의 여부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선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유목주의 개념이 현실성이 있느냐, 혹은 침략성을 갖느냐라는 논의는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그 저자의 어떤 측면을 어떻게 받아 들이는가에 따라 다른 함의를 가지기 때문이다. 나는 들뢰즈 철학의 주요한 측면 중 하나를 ‘소수자 윤리학’으로 본다. 자본주의가 노동자를 포획하면서 노동자가 기득권 세력이 된 20세기 중엽 이후, 그런 노동자의 대열에조차 끼지 못한 사람들이 소수자다. 오늘날의 ‘유목’은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이렇게 비참하다. <BR>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천 개의 고원』의 다양한 층위를 현대 과학으로 어떻게 읽을 것인가, 혹은 그의 전쟁기계론을 어떻게 현대 대안 운동들과 연계시켜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김재인: 이진경 등이 주장하는 ‘앉아서 하는 유목주의’와 같은 현대적 유목은 대부분 사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폐기해야 한다. 왜냐하면그들은 오늘날 사회가 주체를 어떻게 구성하느냐를 충분히 분석하지 않고 단순히 추상적인 대안으로서 유목주의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BR>현재 한국사회에 대한 논의나 현행 세계체제에 관한 분석은 거의 없다. 마르크스주의자들만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질 뿐이지만 그들은 너무 거시적이고 도식적인 구도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현재 한국 학계는 논쟁 구도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상태다.<BR>들뢰즈 철학을 실천적으로 전유하려면 87년 시민혁명, 88년 이후의 개방과 외국여행 자율화, 97년 외환위기와 수평적 정권교체, 2002년 월드컵과 촛불시위, 2002년 전자민주주의와 노무현 정권의 탄생, 2007년 FTA 체결 등 사회 문제의 굵은 선을 분석해야 하고 각 시기별로 개인들의 사회적 관계망이 어떻게 변화했으며 앞으로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확산이 끼칠 대ㆍ내외적 영향이 무엇일지에 대해 깊이 고찰해야 한다. 현실 분석 없이 개념만 떠도는 사태는 인문학적 담론에 대한 사회적 불신을 증폭시킬 뿐이다.
이성민: 유목주의 개념은 자본주의 사회 구성원의 생활 유형을 설명할 수 있다는 데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목주의 안에 어떤 혁명적이거나 대안적인 가치가 전제돼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들뢰즈는 단지 그의 저서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현대인의 행동 양식을 노마드적(nomadic)인 것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유목주의 자체는 기술(記述)적인 것이지 규범적인 것이 아니다. <BR>또한 유목주의와 한 축을 이루는 전쟁기계 자체는 또 하나의 재건된 환상에 불과하다. 라캉은 그의 정신분석학에서 인간은 환상 없이는 욕망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천 개의 고원』에서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부분을 읽어본다면 그 개념들이 현실성을 가진 규범이 아니라 남성적인 환상에서 비롯된 은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박기순: 들뢰즈-가타리의 유목주의가 낭만적 혹은 무정부적일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전쟁기계는 국가의 외부에 존재한다. <BR>들뢰즈-가타리가 다양한 분석을 통해 보여주고 있듯이, 전쟁기계는 국가해체의 지평(地坪)이 된다. 국가외부에 존재하는 전쟁기계의 힘은 네그리가 스피노자에서 찾아낸 ‘대중’(multitudo)의 역량(puissance)이다. 그런데 들뢰즈-네그리의 정치철학적 주장은 기본적으로 대중의 자발적 역량에 의지해 있다. 즉 그들이 말하고 있는 개념은 ‘개인 주체’들의 자발성과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에서 전쟁기계-유목론이 개인의 자발성 혹은 역능을 이끌어 낼 수 있는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들뢰즈-가타리의 유목주의를 ‘반자본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김진석: 자본주의에 대한 들뢰즈의 태도는 부정적이지 않다. 들뢰즈 해설자들은 마치 자본이 유목주의와 전혀 관계가 없거나 혹은 『천 개의 고원』에서 주적이 자본주의인 것처럼 암시하는데, 그 관점이 들뢰즈 등의 관점을 정확히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들뢰즈-가타리는 자본주의는 자신의 한계를 자꾸 확장시키며 한계를 극복한다는 식으로 말했고 또 그들의 작업은 철저하게 자본주의를 기본으로 해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김재인: 자본주의가 주적이 아니라는 김진석의 지적에 동의한다. 오히려 자본주의에 대한 들뢰즈의 객관적 분석에 주목해야 하고, 그 부분에서 논의가 시작돼야 한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려면 자본주의의 외부에서 이를 생각해야 하는데 자본주의 자체는 끊임없는 확장 운동을 하고 있으며, 그 바깥에 어떻게 이를지는 역사적으로건 논리적으로건 말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현행 자본주의가 좋거나 옳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자본의 객관적 운동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자본주의의 분열적인 모습을 잘 포착했다는 점에서 들뢰즈의 작업은 의미가 있다.<BR>김상환: 김재인과 김진석의 지적 일리 있다. 이미 1972년 『안티-오이디푸스』에서부터 자본주의와 들뢰즈-가타리의 관계는 애매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자본주의가 분열증적 한계에 이르는 극단적 탈영토화와 탈코드화의 운동을 일으키면서도 과거의 잔재와 상투적인 유산 속에 영토화된다고 고발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창조한 기계, 욕망, 유목주의 등과 같은 개념들은 자본이 이미 창조해 놓은 사태를 번역하고 재현한다는 느낌과 더 나아가 정당화하고 있지 않느냐는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자본을 비판하고 해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방하고 옹호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BR>이런 문제는 물론 들뢰즈-가타리도 어느 정도 의식한 것 같다. 후에 『천 개의 고원』에서 탈영토화의 문제를 보다 정교하게 전개하는 것도 이런 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본주의적 탈영토화와 구별되고 또 그것을 능가하는 어떤 다른 유형의 탈영토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는 두 저자가 끝까지 맞서려는 가장 중요한 적임에는 틀림이 없다. 『안티-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의 공통 부제가 “자본주의와 분열증”인 것만 봐도 그렇다.&nbsp; 
이정우: 『천 개의 고원』의 주적은 넓게 보면 모든 형태의 억압과 닫힘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봉건성을 깨는 열림의 면도 있지만 모든 것을 화폐의 회로 속으로 몰아넣는 닫힌 면도 있다. 따라서 『천 개의 고원』의 주적은 자본주의이기도 하다. 
◆유목주의나 전쟁기계 같은 개념 자체를 긍정적인 가치로 평가할 수 있는가?
이정우: 전쟁기계나 유목주의 같은 개념에 처음부터 어떤 가치론적 판단을 넣어서 읽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작년의 논쟁과 같은 오해가 생겼다. 유목주의는 그 자체로서 ‘좋은’ 것이 아니다. 들뢰즈-가타리를 오해하는 가장 일차적인 메커니즘은 이들의 개념에 처음부터 가치론적 함의를 넣어서 읽는 것이다. IBM 컴퓨터도 농촌공동체도 모두 전쟁기계다. 모두 국가장치의 바깥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정확히 어떤 전쟁기계를 추구할 것인가이다. 
김재인: 들뢰즈의 개념에서 조심해야 할 점은 바로 이원론적 사고다. 『천 개의 고원』에서 리좀(rhizome: 뿌리줄기. 통일되거나 위계화되지 않는 접속과 창조의 무한성을 가리킴)과 지도(carte: 현실을 물화된 실체로 다루지 않고 역동적인 실천에 의해 끊임없이 가변화되고 새롭게 구성되는 공간으로 봄)를 좋은 쪽으로, 나무나 뿌리 혹은 사본(지도와 다르게 폐쇄적인 대상을 복제하는 것에 그침)을 나쁜 쪽으로 대립시키는 것은 단순한 이원론을 복원시키는 것 같아 위험하다. 들뢰즈는 1980년 10월 23일 「리베라시옹(Lib&#47061;ation)」과의 인터뷰에서 “천 개의 고원에서 우리가 말하려는 것은 좋은 것은 결코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매끈한 공간(espace lisse)만으로 주름(striages)과 억압을 이겨낼 수 없고, 기관 없는 육체만으로 조직을 이겨낼 수 없다”고 말한다. 나무, 뿌리로부터 리좀으로 가는 것은 창조의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막다른 골목에서 길을 뚫는 일이다. <BR>&nbsp;&nbsp;&nbsp; <BR>김진석: 유목주의는 자유로운 사유이며 침략과 전혀 상관없다고 찬양하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관념성을 깨야 하지만, 유목주의의 침략성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역사 속의 모든 침략적 이동성을 비난하려고만 하는 맹목적 생태주의자도 자신의 관념성을 깨야 한다. 그 두 측은 서로 유목주의에 자신의 가치를 대입해서 사고했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한국 사회에서 ‘유목주의’ 개념이 혼동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떻게 길을 찾아가야 하는가?
이정우: 이런 문제는 여러 층위의 유목주의를 구분하지 않아 생긴 문제다. 유목주의는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을 가리킬 수도 있고, 자크 아탈리 식의 문명론, 삼성에서 강조하는 디지털 유목주의, 몽골 초원을 그리워하는 낭만적 복고주의 등을 모두 뜻할 수 있다. 말은 하나지만 사유의 스펙트럼은 상당히 넓다. 『천 개의 고원』을 숙독한 사람보다는 대기업의 선전을 본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이 현재 비극의 원인이다. <BR>&nbsp;&nbsp; <BR>김진석: 최소한 들뢰즈-가타리의 탓은 아니다. 그들은 국가의 포획장치가 굳건하다는 명제와 함께, ‘유목주의’와 ‘전쟁기계’가 합체한다고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한국에서 들뢰즈 철학을 소개하는 사람들은 국가의 포획장치는 강조하면서도, 상대적으로 그 체계를 해체하려고 하는 ‘전쟁기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유목주의’는 디지털 소비문화 등에 포획되거나 무정부주의적 의미를 많이 가지게 됐다.<BR>이성민: 김진석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 자신의 철학이 정치적으로 손쉽게 해석되는 데 들뢰즈 후기철학이 협조했다고 생각한다. 들뢰즈 본연의 철학과 들뢰즈와 가타리의 협력 작업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존재한다. 지젝은 이같은 후기 들뢰즈의 경향을 부정한 바 있다. 『천 개의 고원』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유목주의’와 같은 추상적 대상을 너무 쉽고 단순하게 대안으로서 제시할 뿐이다.
서동욱: 작년의 논쟁과 들뢰즈 철학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정치적 관점으로 볼 것이 아니라 『차이와 반복』과 같은 들뢰즈 초기 저작으로 돌아가서 ‘유목주의’를 고찰해 봐야 한다. 단순히 대안 개념으로서 유목주의가 아니라 그의 중요한 개념인 일의성(univocite)을 기초로 존재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존재자들 사이에서 개별화되는 차이들을 주목하는 일의성의 관점에서 ‘유목주의’를 해석한다면 좀&nbsp; 더 풍부한 함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BR>&nbsp;&nbsp;&nbsp;
&nbsp;인터뷰 및 정리 이민석 기자 <BR>&nbsp;ground28@snu.ac.kr
<BR>■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들<BR>김상환(서울대 철학과 교수), 이정우(철학아카데미 대표), 김재인(서울여대 철학과 강사), 이성민(도서출판b 기획위원), 서동욱(서강대 철학과 교수), 김진석 교수(인하대 철학과 교수), 박기순(서울대 철학ㆍ미학과 강사)<BR>]]></description><image><url>http://www.snunews.com/news/photo/5133-2-1469.jpg</url><link>http://blog.aladin.co.kr/vara/1098948</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우울증적 기억과 애도의 망각 사이 -박제철 </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1080347</link><pubDate>Fri, 16 Mar 2007 10:2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1080347</guid><description><![CDATA[교수신문서 펌
[연세대]우울증적 기억과 애도의 망각 사이&nbsp; <BR>기억-고통에서 망각-사랑으로 <BR>&nbsp;<BR>&nbsp;2006년 08월 07일 (월) 13:12:53 박제철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강사&nbsp; cinelettre@empal.com&nbsp; <BR>&nbsp;<BR>&nbsp;<BR>&nbsp;&nbsp;&nbsp;&nbsp; <BR>&nbsp; <BR>&nbsp;&nbsp;&nbsp;&nbsp; <BR>&nbsp; <BR>영화 &lt;메멘토&gt;에서 단기기억상실증을 겪고 있는 주인공 레너드는 자신의 장애를 이렇게 묘사한다. “전 단지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지 못할 뿐이에요.” ‘새로운’을 강한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그 장애는 단지 병적인 특수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주체가 보편적으로 겪고 있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오늘날 우리는 전례 없는 기억의 홍수 속에 빠져있다. 디지털 기술 향상으로 보철기억기관의 용량은 점점 더 막대해지고 있고 터부와 같은 금지 체계가 약화됨에 따라 기억하기 꺼릴만한 것은 사실상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외관상의 이런 증식은 동시에 특정한 기억(방식)에 대한 완고한 고집과 더불어 진행되고 있다. 기억은 증식하되 새로운 기억은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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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기억-고통, 기억은 증식하지만 새로운 기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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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아이러니하게도 최근 우리가 사로잡혀 있는 기억은 고통스러운 기억이다. 나찌 수용소에서의 끔찍한 포로생활에 대한 가짜 회고록(비르코미르스키, 『단편들Fragments』)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나 몇몇 이주민 여성들이 강제 없이 음핵절제를 스스로 행하는 사례, 혹은 최근 한국 문학과 영화에서 잔혹·엽기극이 유행하는 것 등을 상기해보라. 그런데 이미 오래전 프로이트와 니체는 이런 아이러니에 주목했다.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부터 프로이트는 인간에게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반복적으로 재경험하려는 강한 성향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로부터 ‘고통 속의 쾌락’, ‘죽음 충동’, ‘도덕적 마조히즘’ 등의 개념들을 세공했다.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 또한 기억과 고통의 불가분의 관계를 강조했다. 고통을 주는 것만이 기억에 남는다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기억에 대한 고착은 인간 주체의 숙명인가? 그리하여 우리는 ‘나는 고통스럽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새로운 데카르트적 공리를 정립해야만 하는가? 이에 대해 프로이트와 라캉, 그리고 니체는 단연코 ‘아니오’라고 답한다. 정신분석에서 이 고통스러운 기억은 사실도 허구도 아니며 바로 그 정확한 의미에서 환상의 지위를 갖는다. 환상의 수학소 $&#52049;a가 시사하듯 환상은 주체가 큰 타자의 구성적 결여를 채색하는 특정한 방식 혹은 도식으로 그 자체 일종의 방어 기제이다. 큰 타자의 구성적 결여로 인해 타자와 조우하는 것은 주체에게 항상 불안을 내포한다. 환상은 이러한 조우를 타자가 우리에게 가할지도 모르는 위협의 순간으로, 그리하여 주체에게 고통을 야기하는 순간으로 무대화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지만 불안이 주는 당혹스러움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도피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런 도피와 더불어 제한되는 것이 있다. 먼저 환상을 고집하는 한 정의상 윤리적 행위는 있을 수 없는데, 그 어떤 행위도 고통을 야기하는 파국적 결과의 씨앗을 품고 있을테니 말이다. 또한 바로 그렇기에 환상 하에서 주체의 근본적인 변화는 기대할 수 없다. 환상에 기초하는 한 주체는 항상 ‘동일한’ 타자와 ‘동일하게’ 만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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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행위 혹은 사랑과 동시에 일어나는 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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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고통스럽지만 역설적으로 안락을 주는 기억-고통에 맞서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에서 망각의 윤리를 역설한다. 여기서 망각을 정신분석에서의 억압과 혼동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무엇보다 니체는 망각을 행위 혹은 사랑과 동시에 일어나는 과정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망각은 단순히 어떤 경험을 정신에서 제거하는 부정적인 제스처가 아니다. 망각은 새로운 사건들과의 조우 혹은 새로운 것들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일어나는 기존의 관심사들로부터의 단절이다. 이 점을 강조하려는 듯 그는 망각 앞에 ‘적극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라캉과 지젝에 익숙한 독자라면 니체의 망각 개념에 내포된 행위 혹은 사랑이 문자 그대로 라캉과 지젝의 (윤리적) 행위 혹은 사랑과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는 점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기억의 중핵이 환상이라면 망각은 ‘환상을 횡단’하는 작업일 것이며 환상의 횡단이 동시에 내포하는 것은 라캉과 지젝에게서도 (윤리적) 행위 혹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망각의 윤리를 강조하고 사랑을 망각과 연결할 때 우리는 우울증적 애착의 한계를 식별할 수 있게 된다. 여러 문화연구 논의에서 종종 우울증적 애착은 동질적인 세계화에 맞서 타자성의 차이를 유지하는 급진적 태도로 간주된다. 하지만 대상의 상실의 고통을 기억 속에서 유지하고자 하는 태도인 한 우울증적 애착은 주체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장애이다. 오히려 프로이트가 우울증과 대비시켜 정상적 과정으로 묘사한 애도 작업이야말로 주체성의 변화의 가능성의 조건을 제공할 수 있다. 고통-기억을 지속시키는 우울증적 애착과 달리 애도 작업의 끝에는 기존에 사랑했던 대상과 절연하는 망각이 따르기 때문이다. 애도 작업은 다시 말해 새로운 사건으로, 새로운 사랑으로 가는 여정의 필수적인 예비 작업인 셈이다.
하지만 기억-고통에서 망각-사랑으로의 이행에 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세기를 피로 물들였던 파시즘과 전체주의 하에서의 대량 학살은 이런 이행에 기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해체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존재의 질서와 단절하는 진리-사건의 출현을 그토록 역설했던 바디우조차도 최근에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망각에 뒤이은 사랑을 불가능한 실재의 완전한 현재화로 이해한다면 이는 필경 파국적인 대학살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귀착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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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사랑이 갖는 기적적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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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하지만 정신분석에서 그리고 니체가 제시하는 사랑의 논리는 단순히 그 어떤 주어진 대상에 대한 맹목적인 충실성을 역설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대상과 그것에 바치는 애착 사이의 간극 그 자체가 그들이 말하는 사랑의 핵심이다. 사랑받기 전의 대상과 그 후의 대상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 사랑이 갖는 기적적 역설이다. 사랑은 우선 보잘 것 없고 우스꽝스러운 어떤 대상을 향한다. 그렇지만 사랑을 받는 순간 그 대상은 그 어떤 숭고한 차원을 마술처럼 획득한다. 그런데 이 숭고한 차원은 여하한 실정적인 특질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수수께끼를 낳는 난포착적인 그 무엇일 뿐이다. 말하자면 사랑은 실재의 현재화이기는커녕 그 반대 즉, 진부한 현존을 불가해한 실재로 재창조해내는 작업이다. 이는 또한 정확히 정신분석에서 승화 개념이 겨냥하는 것이기도 하다. “평범한 대상을 사물의 존엄으로 고양시키는 것”이라는 승화에 대한 라캉의 정의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사랑을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각-사랑은 보편성이 출현하는 계기, 즉 윤리의 정초적 계기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디우적인 진리-사건으로 불리건, 들뢰즈적인 의미-사건으로 불리건, 라캉적인 증환으로 불리건 간에 말이다. 중요한 것은 망각-사랑은 보편성에 대한 오도적 이해를 성공적으로 피할 수 있게 해주고 보편성 본연의 차원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는 데 있다. 보편성은 더 이상 현실을 초월하는 그 어떤 규제적 이념이나 절대지의 완전한 실현이 아니다. 망각-사랑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현실 속의 현실 이상의 것, 혹은 존재의 질서 내에 각인되어 있는 구성적 틈새를 존재론적 소여로 단언하는 제스처로부터 보편성이 출현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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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lt;메멘토&gt;와 &lt;시티라이트&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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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lt;메멘토&gt;의 주인공처럼 고통의 기억을 반복적으로 재경험하려는 고집은 새로운 기억을 더 이상 만들어내지 못하는 무능함에 기초하고 있다. 망각-사랑의 제스처는 단순히 우리가 그 후로는 기억과 무관한 삶을 살게 되리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근본적으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망각-사랑이다. 기존의 기억은 ‘내가 어떻게 고통받게 되었나?’를 해명해줄 수 있을지언정 ‘내가 어떻게 사랑하게 혹은 사랑받게 되었나?’를 해명해줄 수는 없다.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기억, 서사와는 전적으로 다른 논리를 갖는 기억, 서사가 필요하며 이 새로운 기억, 서사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망각은 필요하다.
채플린의 영화 &lt;시티 라이트&gt;는 환상적 기억이 망각-사랑에 자리를 양보하기 직전에 끝난다. 맹인 소녀는 자신의 시력을 되찾게 해준 볼품없는 사회의 방랑자를 매력적인 부자로 기억하고 있다. 영화의 끝무렵 그 소녀는 목소리와 손의 감촉을 통해 바로 그 방랑자가 자신의 은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나서 영화는 그 소녀의 반응이 어떨지를 불안해하며 지켜보는 방랑자의 미디엄 클로즈업 쇼트로 끝난다. 만약 소녀가 방랑자를 사랑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 사랑에 이르기까지의 둘 사이의 기억은 전적으로 새로 쓰여져야만 할 것이다.&nbsp;&nbsp;&nbsp;&nbsp;&nbsp; 
박제철 /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강사, cinelettre@empal.com<BR>&nbsp;ⓒ 교수신문(http://www.kyosu.net)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nbsp; <BR>]]></description></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사회과학대학원 설립 위한 실험적 공동세미나 첫 시작  </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1067325</link><pubDate>Sat, 24 Feb 2007 12:2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1067325</guid><description><![CDATA[참세상에서 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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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대학원 설립 위한 실험적 공동세미나 첫 시작&nbsp; <BR>&nbsp;<BR>&nbsp;'문학과 경제', '마르크스 경제학' 등 6개월 과정&nbsp; <BR>&nbsp;&nbsp; <BR>&nbsp;<BR>&nbsp;조수빈 기자&nbsp; / 2007년02월23일 14시29분&nbsp;&nbsp; <BR>&nbsp;<BR>&nbsp;'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유기적 지식인과 실천가 양성을 위한' 사회과학대학원이 오세철 연세대 교수, 강내희 중앙대 교수, 김세균 서울대 교수 등 40여명의 좌파 교수 및 연구자들의 주도로 설립 추진되고 있다.
<BR>'인문학의 위기선언' 넘어선다
<BR>가칭 사회과학대학원 추진위원회 준비모임(추진위준비모임)은 "한국사회가 무차별적인 시장논리와 효율성을 맹신하는 신자유주의에 휩쓸리고, 대학이 신자유주의 전도사 노릇을 하는 상황에서, 실천과 연관된 유기적 지식인의 양성을 위해 보다 계획적인 사회과학대학원 설립추진을 준비하고 있다"고 사회과학대학원 설립의 취지를 설명하고 "좌파교수, 연구자들의 대안적인 사회과학대학원 설립추진 모색은 지난해 대학교수들의 '인문학의 위기선언'을 넘어선다"고 밝혔다.
<BR>언급된 '인문학의 위기선언'은 지난해 9월 고려대학교 문과대 교수들이 "무차별 시장논리와 효율성에 대한 맹신으로 인문학의 존립근거가 위협받고 있다"며 '인문학 위기를 선언하면서 공론화된 내용이다.
<BR>추진위준비모임은 사회과학대학원 설립을 위해 이미 공청회와 3차례 토론회를 진행한 바 있다. 추진위준비모임은 지난 공청회와 토론회에 이어 오는 3월 12일 추진위준비모임과 사회실천연구소가 공동 주최로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경계를 넘어, 분과학문의 체계를 뛰어넘는 사회과학대학원 교과과정 수립'을 위한 첫번째 세미나를 시작한다.
<BR>이번 공동세미나는 사회과학대학원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문학과 경제', '마르크스 경제학', '자본주의노동과정', '욕망과 혁명', '역사와 혁명'을 주제로 6개월간 실험적인 세미나 형식으로 진행한다.
<BR>한편 2005년 10월 오세철 교수, 강내희 교수, 김세균 교수 등 교수 및 연구자 8인은 '가칭 사회과학대학원 설립 취지 제안문'을 통해 "현 시기 한국사회에서 신자유주의에 맞설 수 있는 유기적 지식인을 양성할 고등교육기관으로서 사회과학 대학원의 설립을 위한 주객관적 조건이 성숙되고 있으며 부르주아 체제에 포섭되지 않는 대안학교의 건설이 시급하다"며 사회과학대학원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대학과 대학원이 모두 요구되고 있으나 대중교육을 넘어서 변혁적 연구자와 전문가를 양성할 대학원부터 건설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대학의 경우는 대학원 설립 이후의 성과를 바탕으로, 그리고 실천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단기 프로그램과 단기 교육과정에 대한 평가와 재편을 바탕으로 2단계 계획으로 나아가려고 한다"고 중장기 계획을 밝힌 바 있다.&nbsp;&nbsp; <BR>&nbsp;<BR>&nbsp;&nbsp; ]]></description></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엘리트 독자 가고 대중 독자가 왔다"</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1066390</link><pubDate>Fri, 23 Feb 2007 08:2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1066390</guid><description><![CDATA["엘리트 독자 가고 대중 독자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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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End -->[동아일보]<BR><BR>■ 세계의 문학 ‘2000년대 표준 독자’ 분석<BR><BR>서울 거주 22세 여대생 김모 씨. 한 달에 한두 번 시내 중심가 대형 서점에 가며 ‘에쿠니 가오리’류의 소설을 사 본다. 베스트셀러 목록이나 인터넷 독자 서평을 살펴보긴 하지만 구매를 결정하는 것은 책의 내용을 직접 확인하고 나서다. 대학 도서관이나 대여점, 친구들에게서 빌려 읽을 때도 있다. 독서 시간은 잠들기 전 1시간 정도. 인터넷 이용 시간이 훨씬 많고 개봉 영화 무료 시사회를 알뜰히 챙기는 영상 세대지만 재미있는 소설이라면 기꺼이 손에 잡는다.<BR><BR>다음 주 출간되는 ‘세계의 문학’ 봄호에 소개되는 ‘2000년대 표준 문학 독자’의 모습이다. ‘세계의 문학’은 특집 ‘누가 문학을 읽는가’에서 한국의 문학 독자가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짚었다. 결론은 ‘엘리트 독자가 물러난 자리를 대중 독자들이 채우고 있다’는 것.<BR><BR>○ 엘리트 독자가 쇠하다<BR><BR>이 특집에서 성균관대 천정환 교수는 ‘2000년대 한국소설 독자 Ⅱ’라는 기고를 통해 엘리트 독자가 사라져 간다고 선언한다. 그는 직접 인터뷰한 모델 독자 G, C, Y 씨를 통해 엘리트 독자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BR><BR>사회과학을 전공한 40대 초반의 남성 교수. 주요 한국소설 작품과 김윤식 백낙청 등 대가급 평론가의 저작을 읽었다. ‘창작과 비평’ 등 문예지를 읽고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한국 현대소설 사상 최고의 유산이라고 믿는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선 ‘한국문학의 대안’인지 모르겠다며 유보적이다.<BR><BR>인문학 출판사의 40대 남성 주간. 문예지는 안 보지만 우리 작가의 주요 작품집과 장편을 꾸준히 읽는다. 천명관의 ‘고래’, 박민규의 ‘카스테라’ 같은 30대 작가들의 작품을 재미있게 읽었고 ‘좋은 문학적 역량을 갖고 있다’고 평한다.<BR><BR>문학박사 학위를 소지한 30대 초반 여성 대학강사. 한국소설 중 어떤 작품이 대중적으로 읽히는지, 평단에서 회자되는지에 대해선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현장의 한국문학 작품은 거의 읽지 않는다. “재미가 없을 것 같고, 안 읽어도 세상 사는 데 별 문제가 안 되기 때문”이다.<BR><BR>독자 G 씨는 우리 문학 교육과 인문학 제도가 길러 낸 가장 모범적인 엘리트 독자다. C 씨는 성실한 엘리트 독자이긴 하지만 G 씨에 비해 문학의 변화를 보는 태도가 유연하다. 천 교수는 “Y 씨는 문학도이면서도 G, C 씨와 같은 선배 엘리트 독자의 명맥을 잇지 못하는 독자”라면서 “전통적 의미의 엘리트 독자가 단절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밝혔다.<BR><BR>○ 재미난 이야기를 찾는 대중 독자들<BR><BR>그렇다고 문학 독자 자체가 사라지는가? 이 특집에 따르면 엘리트 독자의 뒤를 잇는 것은 들끓는 대중 독자다. 출판문화연구소 백원근 책임연구원은 특집 기고 ‘통계로 본 소설 독자’에서 지난해 ‘국민 독서실태 조사’(성인 1000명, 초중고교생 3000명 대상)를 꼼꼼하게 분석했다. 그 결과 남성보다는 여성이, 세대별로는 20대가, 대학생과 화이트칼라 직업군이 소설을 많이 읽으며, 소설 독자들이 다른 문학 장르 독자들보다 영화를 많이 본다는 등의 자료를 토대로 ‘서울 거주 22세 대학생 김모 씨’라는 2000년대 표준 문학 독자의 초상을 뽑아냈다.<BR><BR>이들에게는 앞선 엘리트 독자들처럼 한국문학 작품을 읽거나 최소한 알아야 한다는 ‘충성심’이 없다. 일본소설이나 영미권 치크리트(chick-lit) 등 국적을 가리지 않고 읽으며 소설의 선택 기준은 ‘재미와 오락’이다. 백 연구원은 이 같은 대중 독자들 때문에 “소설 판매량은 안정적이고 견실하며, 다양한 방식을 통해 여러 사람이 한 권의 소설을 읽는 경향이 있다”면서 소설은 힘센 장르라고 밝혔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이 조사에 따르면 한국소설은 엔터테인먼트 경쟁력 제고가 필요한 조정 국면”이라는 지적도 잊지 않았다.<BR><BR>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BR><BR>"세상을 보는 맑은 창이 되겠습니다."<BR><BR>ⓒ 동아일보 &amp;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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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본문-->
성격이 비슷한 학과들을 하나의 학부로 묶어 신입생을 모집하고 2학년 때 전공을 결정하는 학부제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지 올해로 10년. 1학년 때 학문을 폭넓게 접한 뒤 자기 진로를 선택하자는 취지로 도입된 ‘학부제’는 그간 느슨했던 대학 문화를 뿌리째 바꿔 놓았다.<BR><BR>◆공부하는 대학 문화 자리잡아<BR><BR>2006년 고려대 인문학부에 입학한 김광욱(20)씨는 작년 한 해 동안 대학입시보다 더한 ‘학과 입시’를 치렀다. 2학년 때 자신이 원하는 심리학과에 들어가기 위해서다. 고3 내신 관리하듯 중간·기말 시험에 ‘올인’했고 결과는 만족스러웠다.<BR><BR>서울 Y대 김선영(21)씨 역시 작년에 치열한 경쟁을 뚫고 원하던 신문방송학과에 ‘합격’했다. 김씨는 “인기 학과를 두고 경쟁하기 때문에 입학 동기들끼리 서로 강의 필기노트도 안 보여줬다”며 “시험 시간에 옆 친구가 부정행위를 하면 교수에게 이메일을 보내 항의하는 게 일반적이다”고 말했다. <BR><BR><BR><BR><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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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제 이후 대학 캠퍼스에는 ‘고(高)4’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취직이 잘되고 원하는 전공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1학년 때부터 치열하게 공부해야 하는 분위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덕분에 ‘대학은 들어가기는 어렵고 나오기는 쉬운 곳’, ‘한국 대학생은 노는 대학생’이란 말들도 옛말이 됐다. 대학교 1학년 때 주로 하던 ‘미팅’도 옛말이 됐다.<BR><BR>대신 1년간 다양한 과목 수업을 듣고 전공을 선택하는 학부제 시스템으로 학생들은 ‘적성에 맞는’ 학과를 선택할 수 있게 됐다. 수능 후 진로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부족한 상태에서 학과를 선택했던 과거와 달리, 좀더 신중히 미래를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연세대 문경원(영문과 1·21)씨도 “인문학부에 입학했을 때 영문학과 중문학 중에서 고민했는데 1년 수업을 듣고 나서 영문학이 내 적성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BR><BR>학부 학생의 최대 관심이 전공선택과 취업에 쏠리면서 학생운동도 급변했다. ‘이념’을 떠나 복지·장학금 등 ‘실용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게 된 것이다. 2005년 중앙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김민석(26)씨는 “수업에 관심 많은 학생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좋은 수업 만들기’ ‘강의평가백서 만들기’ 같이 실질적인 공약을 내걸어야 했다”고 말했다. <BR><BR>선·후배끼리 얼굴을 익히는 자리였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은 정보전달 위주의 ‘설명회’로 변신하고 있다. 숙명여대는 올해부터 ‘전공 특성화 영역’, ‘교과 과정’, ‘취업 정보’를 설명하는 시간으로 1박2일 일정을 채웠다. 가수 공연을 관람하고 밤 새워 술을 마시던 ‘오락 위주’ 분위기가 진지하게 대학 생활을 토론하는 분위기로 바뀐 것이다.<BR><BR><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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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 기초학력은 떨어져<BR><BR>반면 과(科) 체제가 무너지고 학생들간의 결속력이 사라졌다. 서울대 정치학과 이모(21)씨는 “신학기 때 멋모르고 ‘문학예술학회’에 가입했지만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며 “학점을 관리하기도 빠듯한데 선배들과 어울려 다닐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했다. 학과가 사라지면서 ‘과방’도 자취를 감추고 있다. 과방은 선·후배가 수업후 모여 수다를 떠는 등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던 공간이다. <BR><BR>일부에서는 좋은 과 선점을 위한 경쟁은 치열해졌을지 몰라도 ‘학력저하’는 더 심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본격적인 전공 수업은 2학년 때 시작되므로, 전공을 깊이 있게 공부할 시간도 부족하고 학생들의 이해도도 떨어진다는 얘기다. 성균관대 독어독문학 이정준 교수는 “1학년 때 전공 기초가 안 된 학생들을 상대로 전공심화 수업을 하다 보면 힘이 빠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라며 “대학원 진학률도 학부제 10년 동안 현저히 줄었다”고 말했다. <BR><BR>인기학과 쏠림 현상도 학부제 10년이 풀어야 할 숙제다. 서울 K대 심모 교수는 “학생들이 영문과·중문과 등 일부 학과만 선호해 비인기학과는 계속 쪼그라들고 있다”며 “1학년 때 학점 관리를 못해 비인기학과로 온 아이들은 자기 전공은 소홀히 하고 인기학과를 이중 전공으로 공부할 기회만을 노린다”고 말했다.[김연주 기자 carol@chosun.com]<BR><BR>[김연정 인턴기자·고려대 국어교육 4]<BR><BR>&lt;모바일로 보는 조선일보 속보 305+NATE, 305+magicⓝ(&gt;http://mobile.chosun.com)&gt;<BR><BR>- Copyrights ⓒ 조선일보 &amp;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description><image><url>http://photo-media.hanmail.net/200702/23/chosun/20070223030203.112.0.jpg</url><link>http://blog.aladin.co.kr/vara/1066388</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한돌의 노래</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1064541</link><pubDate>Tue, 20 Feb 2007 16:3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1064541</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6344800836&TPaperId=1064541"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82/87/coveroff/2462437473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9205332&TPaperId=1064541"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62/28/coveroff/8939205332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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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대 초반, 새로운 민중가요 창작자 한돌의 노래
                                
                                
                                    [노래여 나오너라 27] 이영미 선생님의 민중가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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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노동자시대&#160;&#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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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icle, .article a, .article a:visited, .article p{ font-size:14px; color:#222222; line-height:24px; } 		
                                    
                                    &#160;&#160;지난주 80년대 이후에 대학노래패 '메아리' 가 취미써클의 한계를 벗어나 어떻게 운동성을 획득하면서 자신의 창작곡들을 변화시키는가에 대해 말씀해드렸는데요. 이때 보면 노래책도 변해요. 메아리가 계속 악보집을 냈는데요. 70년 말의 악보집의 서문은 이런 식이죠. "이 세상에서 노래는 우리에게 하나의 구원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81년, 메아리의 4집 또는 5집쯤 가면 테마별로 묶여있어요. 농민들의 노래, 김민기의 노래 등등으로 말입니다. <br />
                                    &#160;&#160; <br />
                                    &#160;&#160;확실하게 이제 노래를 내가 좋아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사회적 의미를 갖고 있는 노래로 인식했다는 게 노래책 안에서도 변화가 보이구요. 서문도 달라요. 사회적 의무를 생각하고 노래는 이 땅에서 어떠해야하는가 등의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br />
                                    &#160;&#160; <br />
                                    &#160;&#160;이렇게 메아리에 있었던 회원들이 슬슬 변화하면서 민중가요의 새로운 창작자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 당시에는 물론 ‘오월의 노래’ ‘내 눈길 닿는 곳 어디나’ 등의 노래들은 모두 그냥 ‘메아리’ 의 공연용 레퍼토리였습니다. ‘노찾사’ 음반에 나오면서 89년 이후에 되서야 넓게 퍼지는 거구요. 일반 학생대중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 류의 노래들을 부르느라고 정신이 없었죠. ‘오월의 노래’ 도 너무 화려해서 못 부르겠다는 정서가 지배적이었습니다. <br />
                                    &#160;&#160; <br />
                                    &#160;&#160;오늘부터는 몇 차례에 걸쳐서 새로운 창작자 중의 한분인 한돌에 대해서 말씀드릴까 합니다. <br />
                                    &#160;&#160; <br />
                                    &#160;&#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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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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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한돌 씨가 이 당시에 음반을 내지 못했어요. 한돌의 음반이 나온 것은 80년대 중반이 돼서 예요. 그럼 어떻게 한돌의 노래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을까요? 이 노래들의 배포처가 됐던 곳이 결국 ‘메아리’ 였습니다. 학교의 노래 팀이 이런 역할을 해줬던 거죠. 공연 때 열심히 불러주고 악보집 낼 때 열심히 실어주고 말이죠. <br />
                                    &#160;&#160; <br />
                                    &#160;&#160;제가 70년대 얘기를 드리면서 김민기의 미발표 곡들이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 의 입과 악보집을 통해서 나왔다는 말씀을 드렸었는데요. 이와 비슷하죠. 개인적으로 뭔가 노래를 짓고 했던 분들의 노래들이 별로 널리 퍼지지 않고 있다가 ‘메아리’ 안으로 들어와서 1차적으로 선곡이 됩니다. 그렇게 살아남은 노래들이 많죠. <br />
                                    &#160;&#160; <br />
                                    &#160;&#160;오늘 먼저 소개해드릴 한돌의 노래는 언제 지어졌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80년대 초반 곡으로 예상이 됩니다. 김민기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은 것 같은 노래입니다. <br />
                                    &#160;&#160; <br />
                                    &#160;&#160;'소' 라는 노래입니다. '소' 는 서울로 아들을 보낸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아들의 학비를 대기위해 소를 팔러 가는데 소가 자꾸 뒤돌아봅니다. <br />
                                    &#160;&#160; <br />
                                    &#160;&#160;나중에 합법음반이 나왔을 때 한돌의 목소리로 실었습니다. 참고로 한돌 씨는 굉장히 노래를 못 불러요. 김민기씨 보다 더 못 부릅니다. 어눌한 느낌이 들죠. 그런데 그게 한돌의 노래로서는 어울려요. 싱어송라이터들이 갖고 있는 매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가의 맛이 납니다. 노래는 잘 못 부르지만 정말 소박한 동요 같은 노래를 동요 같은 음색으로 부르는 어른남자를 볼 때의 어떤 감동이 있습니다. 한돌의 음성으로 들어보시겠습니다. <br />
                                    &#160;&#160; <br />
                                    &#160;&#160;&lt;'소' 듣기&gt; <br />
                                    &#160;&#160; <br />
                                    &#160;&#160;들어보시니까 어떠세요? 기교가 하나도 없죠. 여러분이 잘 아시는 '조율' 이란 노래도 딱 이렇게 부릅니다. 한영애씨는 기교덩어리잖아요. 한돌씨가 부르면 그 ‘조율’ 이라는 노랜지 모를 정도로 심플하게 부릅니다. 그런데 그 맛이 있습니다. 작가가 자기 목소리를 냈을 때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정확히 와 닿습니다. 이런걸 보면 감동은 기술과 기교에서 오는 게 아니라는 게 확실해집니다. <br />
                                    &#160;&#160; <br />
                                    &#160;&#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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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돌 1집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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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 />
                                    &#160;한돌의 노래는 대부분 5음계를 쓰고 있습니다. 도레미솔라..이렇게만 씁니다. '소' 를 한번 계명창으로 불러볼까요? “저 건너 마을에 장날이라 송아지 끌고서 장터 간다. 서울 간 내 아들 생각하며 송아지 끌고서 장터 간다." (솔솔솔미레도 도라솔라솔 미레도라라라 미레도레 솔솔솔미레도 도라솔라솔 미레도라라라 솔미레도) <br />
                                    &#160;&#160;파,시 가 한번도 안 나옵니다. <br />
                                    &#160;&#160; <br />
                                    &#160;&#160;이런 노래가 왜 우리에게 이렇게 편안하게 들리냐하면 우리가 어렸을 때 들었던 동요의 대부분이 5음계거든요. "나리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병아리떼 뿅뿅뿅 봄나들이 갑니다." 한번 5음계로 불러볼까요? "솔미솔미 솔라솔 미솔미도 레미레 솔미솔미 솔라솔 도라솔미레미도" <br />
                                    &#160;&#160; <br />
                                    &#160;&#160;이런 노래가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나라에 서양음계가 들어왔을 때 ‘도레미파솔라시도’ 를 다 구사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구요. 그래서 5음계가 더 편해요. 우리가 어렸을 때 불렀던 소박한 노래들, 그리고 일제시대 때 지어졌던 동요의 대부분이 5음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올라가면 좀 복잡해지죠. 7음계가 많습니다.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 (솔미라솔 파미레미 라라도미레 솔미라솔 파미레미 라라시레도) <br />
                                    &#160;&#160; <br />
                                    &#160;&#160;한돌씨의 노래 대부분은 5음계이고 아주 쉽고 소박합니다. 동요 같은 느낌을 주죠. 마치 아이의 심성으로 부르는 듯 한 느낌입니다. <br />
                                    &#160;&#160;예컨대 한돌의 '땅' 이라는 노래도 그렇고요. <br />
                                    &#160;&#160; <br />
                                    &#160;&#160;두 번째 노래는 서울로 올라와서 사는 노동자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노래입니다. '오늘만 넘기면' 이라는 노래인데요. <br />
                                    &#160;&#160; <br />
                                    &#160;&#160;추석 혹은 설날 전날 즈음 "내일이면 집으로 간다. 오늘만 넘기면 집으로 간다" 라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넘기면’ 이라는 구절이 주는 느낌이 참 묘하죠. <br />
                                    &#160;&#160;민문연의 음원으로 남아있는데요. 한번 들어보시죠.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br />
                                    &#160;&#160; <br />
                                    &#160;&#160;&lt;'오늘만 넘기면' 듣기&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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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기사에 덧붙임<br />
                                    노동방송 &lt;지금은 노동자시대&gt; 매주 월요일-이영미선생님이 들려주는 민중가요이야기 '노래여 나오너라' 코너에서 방송된 내용을 정리한 기사입니다. <br />
                                    이영미 선생님은 대중예술평론가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책임연구원을 역임하셨습니다. '노래여 나오너라', '노래이야기 주머니' 등을 지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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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09월08일 ⓒ민중의소리
                                    
                                
                            
                        
                        
                    
                
            
            
            
            
                
                    
                        
                    
                
            
            &#160; 
            #한돌을 처음 알게 된 건 과방&#160;구석에 굴러다니던 노래책에서 본 '못생긴 얼굴'을 통해서였다.&#160; 김광석은 군 제대 후&#160;이 노래를 부르면서&#160;눈물을 흘렸고, 이런 노래를&#160;부를 수만 있다면 가수를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는&#160;일화가 전해진다. 역시 제일 유명한 노래는 개똥벌레, 터, 홀로아리랑 같은 (노래방에도 있는) 노래일텐데 &#160;꼴찌를 위하여, 못생긴 얼굴, 쉬는 날, 쓸쓸한 사람, 새벽열차 같은 노래가 개인적으로는&#160;더 좋았던 것 같다. 아마도 아리랑, 독도 뭐 이런 민족적인 감수성이 크게 와닿지 않아서일텐데... 결코 잘 부른다고는 할 수 없는 노래, 그렇지만 그 나직한 목소리가 쉽고 애잔한 선율과 가슴을 치는 가사에 실릴 때 주는 그 감동은 때로는 김광석 이상이다. 빼앗긴 것에 대한 분노,&#160;'못난' 보통 사람들에 대한 긍정과 연민, 때로는 허무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애수를 한돌만큼 노래한 사람은 드물 듯 싶다....&#160;다음은 심의에 걸려서 개사를 강요당한 못생긴 얼굴의 가사. 굵게 표시한 부분이 심의에 걸린 부분이다.
            
            &#160;열사람 중에서 아홉 사람이 / 내 모습을 보더니 손가락질 해 <br />
            &#160;&#160;그놈의 손가락질 받기 싫지만 / 위선은 싫다 거짓은 싫어 <br />
            &#160;&#160;못생긴 내 얼굴 맨처음부터 / 못생긴걸 어떡해 <br />
            &#160;&#160; <br />
            &#160;&#160;너네는 큰집에서 네명이 살지 / 우리는 작은집에 일곱이 산다 <br />
            &#160;&#160;그것도 모자라서 집을 또 사니 / 너네는 집 많아서 좋겠다 <br />
            &#160;&#160;하얀 눈 내리는 겨울이 오면 / 우리집도 하얗지 <br />
            &#160;&#160; <br />
            &#160;&#160;모처럼에 동창회서 여잘만났네 / 말 한번 잘못했다 뺨을 맞았네 <br />
            &#160;&#160;뺨 맞은건 괜찮지만 기분 나쁘다 / 말 안하면 그만이지 왜 때려 <br />
            &#160;&#160;예쁜 눈 예쁜 코 아름다운 입 / 귀부인이 되었구나 <br />
            &#160;&#160; <br />
            &#160;&#160;몇 일후면 우리집이 헐리어진다 / 쌓아놓은 행복들도 무너지겠지 <br />
            &#160;&#160;오늘도 그 사람이 겁주고 갔다 / 가엾은 우리엄마 한 숨만 쉬네 <br />
            &#160;&#160;개xx 개xx 나쁜 사람들 / 엄마 울지 마세요 <br />
            &#160;&#160; <br />
            &#160;&#160;아버지를 따라서 일터 나갔네 / 처음잡은 삽자루에 손이 아파서 <br />
            &#160;&#160;땀 흘리는 아버지를 바라보니까 / 나도 몰래 내눈에서 눈물이 난다 <br />
            &#160;&#160;하늘에 태양아 잘난척 마라 / 자랑스런 우리 아버지 <br />
            
            &#160;
            요건&#160;그리하여 개사된 가사
            열사람 중에서 아홉 사람이 내 모습을 보더니 웃고있네 <br />
            나도 같이 따라서 웃어보지만 위선은 싫다 거짓은 싫어 <br />
            못생긴 내 얼굴 맨 처음부터 못생긴 걸 어떻게 <br />
            <br />
            모처럼에 동창회서 여잘 만났지 <br />
            말 한번 잘못했다 뺨을 맞었지 <br />
            뺨 맞은 건 좋지만 기분나쁘다 <br />
            말 안하면 그만이지 왜 때려 <br />
            예쁜 눈 높은 코 아름다운 입&#160;귀부인이 되겠구나 <br />
            <br />
            사랑하던 내 친구가 시집을 간다 <br />
            어쩌면 그리 쉽게 떠날 수 있나 <br />
            그래도 내 마음은 사랑이었지 <br />
            시집가면 행복하게 잘 살아라&#160;<br />
            &#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하얀 눈 내리는 겨울이 되면 하얀 마음 되겠지(요건 통째로 추가된 거;;&#160;원곡이 단박에 못생겨서 서글픈 남자의 사랑타령으로 뒤바뀐다.)&#160;<br />
            <br />
            오늘은 우리집이 이사를 간다 <br />
            쌓아놓은 행복들도 따라 오려나 <br />
            뒤돌아 바라보는 내가 살던 집 <br />
            가엾은 우리 엄마 한숨만 쉬네 <br />
            달려라 달려라 짐실은 차야 엄마 울지마세요(이렇게 바뀌었다;;이사랑 철거가 바꿔치기됨;)&#160;<br />
            <br />
            아버지를 따라서 일판 나갔지 <br />
            처음 잡은 삽자루가 손이 아파서 <br />
            땀 흘리는 아버지를 바라보니까 <br />
            나도 몰래 내 눈에서 눈물이 난다 <br />
            뜨거운 태양아 잘난척 마라 자랑스런 아버지 <br />
            <br />
            열사람 중에서 아홉 사람이 내 모습을 보더니 웃고 있네 <br />
            나도 같이 따라서 웃어보지만 위선은 싫다 거짓은 싫어 <br />
            못생긴 내얼굴 맨 처음부터 못생긴 걸 어떻게 
            
            
        
    

&#160;
&lt;- 검색해보니 책도 나온다. 음반은 작년에인가 두 개의 씨디로 
새로 나왔다. 책은 언젠가 읽기를 기약해봐야지...]]></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62/28/cover150/8939205332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9205332</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노동착취·단속 풀리지 않는 ‘굴레’</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1059335</link><pubDate>Mon, 12 Feb 2007 09:4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1059335</guid><description><![CDATA[노동착취·단속 풀리지 않는 ‘굴레’
<!--기사본문-->
<!-- 사진 Start -->







<BR><BR style="LINE-HEIGHT: 1px">전남 여수시 화장동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 3층 화재 현장에 필사적으로 탈출하려던 수용자의 손톱과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BR>

<!-- 사진 End -->아직도 수많은 외국인 근로자에게 ‘코리안 드림’은 ‘꿈’일 뿐이다. 수만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희망을 안고 한국을 찾지만 상당수는 사업주의 착취와 사회적 냉대로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불법체류자가 되거나 ‘노예 같은 삶’을 피하기 어렵다.<BR><BR><!--Img_Src_1-->한국에 오는 길도 결코 순탄치 않다. 한국행 티켓을 사기 위해 거금을 브로커에게 건네지만 사기를 당해 날리거나, 밀입국 과정에서 변을 당해 사망하는 경우도 많다.<BR><BR>지난해 11월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한국을 찾은 스리랑카인 라싱하는 현재 화성외국인보호소에 있다. 라싱하는 경기 화성의 ㄷ사에서 연수를 시작했고 성실히 일을 했다. 하지만 ㄷ사 사장은 업무가 많아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라싱하의 산업연수신청을 차일피일 미뤘다. ㄷ사는 결국 수원출입국관리사무소의 불시 점검에 의해 외국인 노동자 불법 고용이 적발됐다. 라싱하 역시 불법체류자가 되어 쫓겨날 날만 기다리고 있다. 라싱하의 비자 만료 기간은 2년6개월이나 남아있다. 합법적으로 일하던 선량한 외국인 노동자가 사업주의 태만으로 불법 체류자 딱지를 안게 된 사례다.<BR><BR>경기 안산의 중국어 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던 중국인 ㅎ씨는 학원장으로부터 욕설과 폭행을 당한 뒤 근무지에서 쫓겨났다. ㅎ씨는 관할 노동청에 원장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진정을 냈다. 하지만 ㅎ씨 역시 강제출국 위기에 처했다. ㅎ씨는 어학강사용 비자인 E-2비자를 G－1 비자(특별체류비자)로 전환했지만 G－1 비자로는 노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용주의 부당행위가 인정되어 사업장이 변경되더라도 G－1에서 E-2 비자로의 재변경이 되지 않는다.<BR><BR>네팔인 ㄴ씨는 한국에 와서 일한 지 1년 만에 회사가 부도나 사장이 잠적해 버렸다. 반년간 수소문 해봤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1년 동안 일한 임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본국으로 돌아갔다. 대전의 한 금속공장에서 일을 하던 인도인 ㅅ씨는 일 하던 중 손가락이 잘렸으나 산재처리를 받지 못했다. 사장은 도리어 “손가락 잘린 네가 어떻게 제대로 일을 하겠냐”며 해고했다. 불법 체류자인 그는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못한 채 피눈물을 쏟으며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BR><BR>밀입국하다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다. 지난해 6월15일 부산 영도구 남외항에 정박 중인 495t급 제91태백호에서 인도네시아 선원 9명 등 외국인 선원 14명이 바다로 뛰어들어 육상으로 밀입국을 시도하던 중 9명은 해경에 검거됐으나 5명은 행방이 확인되지 않아 익사한 것으로 추정됐다.<BR><BR>앞서 지난해 5월에도 같은 곳에서 원양어선에 타고 있던 베트남인 선원 4명이 해상을 통해 밀입국을 시도하다 1명은 구조됐으나 나머지 3명은 실종됐다. 2000년 1월27일 밀폐공간인 냉동탑차에 남자 25명 등 모두 48명의 밀입국자가 빼곡히 앉아 제주~목포간 여객선에 실렸다가 1명이 산소 부족으로 사망하고, 1명은 호흡곤란으로 병원 신세를 지는 일도 있었다.<BR><BR>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 류성환 사무국장은 “외국인 노동자 정책이 고용주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어 외국인 노동자의 불법체류를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했다.<BR><BR>〈배명재·김준일·임현주기자〉<BR><BR>- 대한민국 희망언론! 경향신문, 구독신청(http://smile.khan.co.kr) -<BR><BR>ⓒ 경향신문 &amp; 미디어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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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image><url>http://photo-media.hanmail.net/200702/11/khan/20070211190207.215.0.jpg</url><link>http://blog.aladin.co.kr/vara/1059335</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대안배움터, 어떤 곳들 있나…어떤 사람들 오나…</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1056012</link><pubDate>Tue, 06 Feb 2007 23:3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1056012</guid><description><![CDATA[







 



 한겨레홈 &gt; 뉴스 &gt; 사회 &gt; 교육 



<!-- Print Area ST --><!-- #####  news title ##### -->



대안배움터, 어떤 곳들 있나…어떤 사람들 오나…







 
<TD noWrap> 조혜정 기자 

<!--/#####  news title ##### -->




<!-- ### news option S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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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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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noWrap colSpan=3><!-- Padding - Height --><!-- ### news option END ### -->문예·인권·독서 등 분야 다양 
“자기 성찰 통해 미래 그리는 시도” 평가 
1992년 설립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의 문예아카데미는 이러한 대안배움터의 효시 격이다. 문학·미술·음악·영화 등의 강좌를 통해 문화 텍스트가 우리의 삶과 어떻게 연관돼 있고, 어떻게 읽어내야 하는지를 대중적으로 알렸다. 
인권실천시민연대의 ‘연대를 위한 인권학교’는 인권의 개념과 생활 속 인권문제를 공유하려는 취지로 2005년 10월 시작됐다. 21일 시작되는 5기 강좌는 법률·노동·언론·성적 소수자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인권 감수성을 짚어본다. 
부산에 자리잡은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 ‘인디고 서원’에서는 두달에 한번씩 ‘주제와 변주’라는 이름으로 토론회를 연다. 주제와 변주 위원인 고등학생 6명이 토론을 거쳐 책을 정하고, 저자를 초청하는데 지금까지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박홍규 영남대 교수, 조병준 시인 등이 다녀갔다. 토론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한 학생들은 최근 ‘인디고잉’이라는 잡지를 묶어 내기도 했다. 
이종태 교육혁신위원회 상임위원은 이런 흐름에 대해 “직업 선택을 위한 수단이나 제도로 기능하는 배움이 아니라, 자기성찰적 배움과 공동체를 통해 근대적 가치의 한계를 뛰어넘어 미래를 그려보려는 시도”라고 진단했다. 정유성 서강대 교수(교육문화 전공)는 “미래지향적 교육문화를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사야 하지만, 교육의 질을 어떻게 담보할 것인가는 더 고민이 필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혜정 기자 


<BR><!--ⓘ AD kisa banner include 끝--><BR>내면 채우려는 11년차 교사부터 혼자 ‘배움 여행’ 10살 소녀까지 
대안적인 배움에 대한 갈망은 어른·아이를 가리지 않는다. 
강문식(38)씨는 서울 청원고에서 사회과목을 가르치는 11년차 교사이자, 교양·문화 교육단체 ‘풀로 엮은 집’에서 2년째 강의를 듣고 있는 학생이다. 강씨는 교사를 기껏해야 학생들을 평가하고 감시하는 ‘간수’로 여기고 냉소하는 아이들과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곤 했다. 대학원에서 사회교육을 배우고 수업 방식도 바꿔봤지만 아이들과 거리감은 좁혀지지 않았다. 교사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지 위기감마저 느껴졌다. 
마침 ‘풀로 엮은 집’의 강좌 안내를 보게 됐고, 서양미술사, 서양철학, 한국철학 등의 강좌를 차례차례 듣기를 2년. 강씨는 이제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는 “그동안 수직적인 관계에서 ‘똑바로 살라’고 다그치고 날카롭게 비판하기만 하던 내 자신을 보게 됐다”며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행복하게 살자’고 얘기하기 시작하니까 아이들의 반응도 달라졌다”고 한다. ‘풀로 엮은 집’ 강의에는 학기마다 어른 25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서울 신촌에 자리잡은 회원제 카페 ‘체화당’의 토요강좌는 회원인 주민과 대학생 20여명이 스스로 공부하고 싶은 분야를 정한 뒤 각자 지닌 지식을 나누거나 강사를 초빙해 수업을 진행한다.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은 일상을 담은 노래 만들기 수업을 진행하고, 고미술품 가게 주인은 고미술품 감상 수업을 맡는 식이다. 2001년 말, 이신행 연세대 교수(정치외교)가 체화당을 만들 때부터 인연을 맺은 변영환(28·대학원생)씨는 “지역사회에 기반한 배움터가 실제로 지역 공동체와 소통의 기반이 된 것은 감동적인 경험”이라고 말했다. 
천편일률적인 체험캠프 대신 ‘새로운 배움’을 모색하는 학생들도 있다. 울산 울주군 삼동면에 사는 오수연(10·초등 3년)양은 지난달 전남 곡성군 죽곡면 김재영씨 집에서 나흘 동안 열린 ‘보따리 학교’에 다녀왔다. 보따리 학교는 생태공동체 ‘길동무’ 회원 30여명이 주제·일정·장소·규모를 정해 여는 부정기적이고 유연한 대안 배움 조직이다. 
오양은 혼자 여행하며 차표를 사고, 시외버스를 갈아타는 게 조금 두려웠지만 곡성에 도착했을 땐 뿌듯했다. 버스 안에서 만난 비구니 스님이 자신을 걱정해 집에 전화를 걸어주고 과자 사먹으라며 손에 6천원을 쥐여줬을 땐 ‘세상 인심’도 체험했다. 전기도, 전화도 없는 김씨 집에서 시간의 흐름을 몸으로 느끼고, 아주까리잎 따고 토란잎 다듬다가 흘린 땀을 계곡에서 씻어내며 자유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인근 보성에 있는 티베트 박물관에서 관 속에 들어가 10분 동안 죽음 체험을 하면서는 “엄마한테 야단맞지 않으려고 거짓말했던 게 생각나 눈물이 났다”고 한다. 오양의 어머니는 “보따리 학교에 세번째로 다녀오는 건데, 갔다 올 때마다 마음의 키가 쑥쑥 자라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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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나중에는 저런 곳에서 공부할 기회가 나려나.. 과연 그날이 올 것인가;;;]]></description></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진보 꿈꾸던 대학생들, 졸업 후 어디로 가나 </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1053726</link><pubDate>Sat, 03 Feb 2007 21: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1053726</guid><description><![CDATA[


진보 꿈꾸던 대학생들, 졸업 후 어디로 가나



[오마이뉴스 2007-02-03 15:49] &nbsp; &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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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홍성희 기자] "남들이 그러지. 넌 왜 좋은 대학까지 나와서 굳이 공장에 들어 가냐고. 그런데 노조니 파업이니 무슨 대단한 목적이 있어서 들어온 게 아냐. 그냥 노동자가 되어 보고 그들을 이해하고 싶었어." <BR><BR>지난 1월 13일 밤 8시, 충북 청주시 가경동의 낯선 밤거리에서 세 달 만에 '그'를 만났습니다. 저 멀리 러브호텔과 룸살롱의 화려한 네온사인 밑으로 고동색 점퍼를 걸친 한 노동자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학생 티는 온데간데없고, 그는 완연한 노동자가 다 되어 있었습니다. <BR><BR>서울에서 편하게만 살아오던 그가 '현장'을 결심한 건 작년 10월입니다. 대학 시절 오랫동안 학생운동을 해왔던 그는 졸업을 앞두고 고심 끝에 청주의 한 전자공장에 위장취업했습니다. 졸업이 운동을 정리하는 데 공식적인 면죄부가 되고 있는 요즘의 학생운동 풍토에서 그는 흔치 않은 선배였습니다. <BR><BR>80년대 학생운동 활동가들의 활발한 공장 이전은 이제 '옛말'이 되었습니다. 신화가 된 과거일 뿐입니다. 졸업에 겁부터 나는 것은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입니다. <BR><BR>올해는 6월 항쟁 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제 80년대처럼 정해진 길은 없습니다. 학생운동 활동가들은 '운동'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며, 다양한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80년대가 '현장으로'였다면, 오늘날 이들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요? <BR><BR>낯선 곳에서 노동자로 살아가는 것이란 <BR><BR>그가 혼자 살고 있는 열 평 남짓한 방은 사람이 적을 두고 생활하는 곳이라기보다는 어느 이름 모를 기차역 부근의 여인숙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작은 방에 비해 어색하게 큰 침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냉장고에는 생수통만이 있었습니다. 그의 현장 생활의 고단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습니다. <BR><BR>침대에 기대어, 글라스에 소주를 부었습니다. <BR><BR>"요즘은 운동을 직업적으로 고민하는 학생들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BR>"사회가 많이 바뀌었으니까. 꼭 공장에 들어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돈과 명예 때문에 운동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고 봐. 남들의 자기를 어떻게 볼까 신경 쓰이는 거지." <BR><BR>가슴이 뜨끔했습니다. 남의 얘기처럼 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배반한 유다의 심정이 이런 걸까요. TV에서는 '무한도전' 멤버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어서 "근데 우리가 진로를 고민할 수 있다는 거 자체가 특권이더라, 여기서 보니까 공고 졸업하고 바로 공장에 들어와 돈 버는 사람도 많거든"하고 덧붙였습니다. <BR><BR>밤11시도 채 되지 않아 그는 "나 침대에 좀 누워도 되지?"하고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습니다. 졸음이 몰려 오는 모양입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후배와 한마디라도 더 나누고 싶었는지 늘어진 테이프처럼 힘겹게 말을 이어갑니다. <BR><BR>"노동자는 정치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어. 10시간 일하고 나면 정치고 뭐고 피곤해서 다 귀찮거든. 일하고 자는 게 전부야. 피곤해서 다들 집에 가기 바쁘지." <BR><BR>그가 생산직으로 일하고 있는 전자공장은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저녁 7시 30분에 퇴근이라고 합니다. 12시간에 가까운 노동입니다. 게다가 일요일도 없습니다. 그날은 토요일 밤이었지만 그는 벌써 다음날의 출근을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BR><BR>언론계 진출, 소신일까 환상일까 <B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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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10월, 고려대 타이거플라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백시원씨. 



ⓒ2007 홍성희고려대 앞 카페에서 만난 백시원(고려대· 사회학 3년)씨는 졸업을 앞두고 방송사 PD시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녀 역시 학생운동을 했습니다. <BR><BR>2004년 그녀는 당시 학교의 신축건물이었던 '타이거플라자'의 건설 비용에 학생복지기금이 유용됐다며 항의운동을 벌였습니다. 2005년에는 과 학생회장으로 교육투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그녀가 이제는 과실에 갈 시간도, 과실에 갈 계기도 찾기 힘들다고 합니다. 졸업을 앞두고 언론사 입사를 택한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BR><BR>"선두에서 급진적으로 투쟁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한 발자국 나가는 게 더 중요한 거 같다고 생각해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진보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요. 물론 보수가 안정적이라는 이유도 빼놓을 수 없겠지만." <BR><BR>그녀는 시험을 준비하면서 회의감이 들 때도 많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결정이 현실과의 '타협'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원래 독립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게 꿈이라고 했습니다. <BR><BR>"물론, 메이저 방송사에 들어가면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할 수 없을 거란 고민도 들어요. 특히 노동현장을 담는 데는 제약이 많이 있겠죠. 시청률도 발목을 잡는 거고." <BR><BR>복잡한 심정이 엿보였습니다. 한 활동가는 운동권이 언론계로 몰리는 현상을 두고 "기자란 직업을 통해 자신의 정치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큰 착각"이라며 씁쓸해 했습니다. <BR><BR>얼마 안 되는 활동비, 그래도 원하는 길을 걷는다 <BR><BR>남부터미널 부근에서 만난 최성화(24)씨는 작년 12월부터 사회운동단체에서 기관지를 만들며 상근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동국대에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작년에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사정을 묻는 질문에 "학생운동이 버거웠고, 집안 문제가 있었다"며 말을 흐렸습니다. 사회단체에서 활동하게 된 까닭을 물어보았습니다. <BR><BR>







▲ 사회단체에서 상근하고 있는 최성화씨. 



ⓒ2007 홍성희

"운동권에게 선택권은 별로 넓지 않아요. 선배들 대학원 가는 게 대부분이에요. 할 거 없으니까 대학원 간다고 하는 게 결국 쉬운 길 찾아 가는 게 아닌가 싶죠. 운동판에서도 지식인이나 인권변호사는 우대 받고 노동자는 멸시 받는 세상이에요. 저는 여기서 노동자들 만나고 기관지 만드는 게 좋아요. 나중에는 교육과정을 이수해서 성폭력 상담사가 될 거에요." <BR><BR>그녀는 상근활동가 중에서 자신이 가장 어리다고 했습니다. 보통 사회단체들이 그렇듯이 '활동비' 명목으로 주어지는 돈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원하는 길을 떳떳이 걷고 있는 그녀입니다. 그녀는 감옥에서 출소한 노동자를 취재한다며 청주행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BR><BR>졸업을 앞둔 활동가 A(28)씨는 "요즘은 평생운동이란 개념이 많이 없어진 것 같다. 운동이 학생 때만 하는 것은 아닌데…"하고 씁쓸해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활동가들의 사회진출이 다양해진 것도 사실입니다. 노동현장에 집중됐던 80년대와 달리 요즘은 미디어나 환경, 여성, 교육 분야로 폭넓게 진출하고 있습니다. <BR><BR>활동가들에게 직업은 단지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닙니다. 대학 시절 품었던 이상과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생이별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운동하며 먹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는 한 활동가들의 푸념이 귓전에 맴돕니다. 
뉴스게릴라들의 뉴스연대 -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description></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뉴스 스크랩들</category><title>등록금 천만원 시대 꼭 대학에 가야할까?</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1048661</link><pubDate>Fri, 26 Jan 2007 19: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1048661</guid><description><![CDATA[[동아닷컴]<BR><BR>연간 대학등록금 최고 1000만 원 시대. 거액의 등록금 앞에서 돈 없는 서민들이 울고 있다. <BR><BR>학생은 대학에 가야 하는지를, 부모는 보내야 하는지를 울면서 고민한다. 대졸 취업률이 낮아지는 것도 이들의 고민을 부추긴다. <BR><BR>지난 23일 미디어다음 토론 게시판에 ‘대학에 가야하는 이유를 설명해 달라’는 한 고등학생의 글이 올라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틀 만에 조회수 1만 4000개를 기록한 이 글은 고민이 가득한 수많은 덧글이 붙으며 논란에 불을 지폈다. <!-- 사진 Sta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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