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수첩 1 알베르 카뮈 전집 11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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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중해, 따스한 햇살이 술처럼 목젖을 적시는 땅


 “지중해의 따뜻한 가슴, 프로방스는 완전히 절망한 사람이 올 곳은 아니다. 오직 행복한 자,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 없이도 이 땅 위에 태어난 것이 기뻐지는 자들만이 올 곳이다. 아니 적어도 많은 절망의 한구석에 아직 저 필사의 모든 생명들이 공유하는 생명의 행복감, 우리들의 건강한 육체가, 죄없는 육체가 아는 행복감의 씨앗을 아직 죽이지 않은 자들만이 올 일이다.” 라고 김화영은 그의 아름다운 산문집, 『행복의 충격』에서 말하고 있다. 나는 대책없이 그런 구절에 매혹되었다. 한 점 그늘도 없는 유쾌한 낙천주의, 이십대의 내겐 지중해의 정신은 그런 것이었다. 알베르트 까뮈는 『작가수첩』에서 풍부한 아포리즘으로 지중해의 정신을 엄호했다. “천재는 일종의 건강한 상태이며 고등한 스타일이며 유쾌한 기분이다-그러나 찢어질 듯한 아픔의 극치이다.”라는 구절은 니체를 연상시켰지만 까뮈는 누구의 아들도 아닌 지중해의 아들, 행복의 전령사였다. “무겁기 때문에 그만큼 더 가벼운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술의 핵심이다”라는 구절엔 까뮈의 오만함이 묻어 있지만 그 구절은 아주 유쾌하게 유머의 정신을 구현해주고 있었다. 얼마나 무거워야 새털처럼 가벼운 질량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 가브리엘 살바토레의 영화, ‘지중해’는 새털처럼 가벼운 영화다. 무겁기 때문에 가벼운.


 살바토레는 ‘도피를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침’이란 문구를 내걸었다. 도피란 중력에의 저항이 아닌가. 잡아끄는 모든 구속의 힘으로부터의 일탈이 아닌가. 그 일탈의 땅이 ‘지중해’다. 햇볕에 마음껏 이마를 적시며 무겁고 우울한 외피를 벗어버려도 좋다. 태양의 기총소사에 속진(俗塵)일랑 말끔히 샤워해버려도 좋다. 늠실대는 그랑블루의 바다를 보면 인생은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다. 이런 곳에선 축구가 제격이다. 차고 달리고 내지르면 그만이다. 엄숙한 얼굴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까뮈의 『작가수첩』이다. “ 티파사의 아침에 폐허 위로 맺히는 이슬,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것 위에 가장 젊고 싱싱한 것, 이것이 나의 신앙이고 또 내 생각으로는 예술과 삶의 원칙이다.”


 가장 젊고, 가장 싱싱한 것들을 위해선 한 잔의 따뜻한 술이 필요하다. 뜨겁게 목젖을 넘어오는 그 무엇, 젊음이란 연소할 수 있는 힘, 탕진할 수 있는 힘이 아니면 무엇인가. 술 한 잔에서마저도 굳이 교훈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지중해’엔 더운 몸이 부르는 육체가 있다. 염소들을 몰고 절벽을 오르는 처녀의 육체, 거기엔 문명의 때가 없다. 무구하고 순수하다. 전쟁의 기억도 없다. 시시덕거리며 바다로 풍덩 뛰어드는 몸의 순수한 유희가 있는 곳, 영화 ‘지중해’는 그런 곳이다. 얼쑤 하는 추임새가 필요하다면 까뮈의 책을 열면 된다. 『결혼, 여름』, 『태양의 후예』, 『작가수첩』이 그것. 이 책들을 열면 지중해의 햇볕이 가득하다. 바람이 갈피를 열어주는 곳, 어떤 페이지든 게으르게 듬성듬성 읽어도 좋다.


 ‘지중해’는 혁명가의 땅이 아니다. 애국자의 땅도 아니다. 패잔병의 땅, 탈영병의 땅, 도피자의 땅, 노새를 적으로 오인해 쏘아 버리는 오합지졸의 땅이다. 축구와 태양과 그랑블루의 땅, 염소의 수염이 하얗게 널어놓은 빨래처럼 날리는 땅이다. 계율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는 곳에서 창녀는 사랑스런 애인일 뿐이다. ‘지중해’는 그런 곳이다. 그곳은 임무의 땅이 아니라 도피의 땅, off-duty, 휴가의 땅이다. ‘지중해’는 '통신기‘가 운 좋게 박살나는 땅이다. 명령이나 하달하는 통신기란 축제의 땅에선 쓸모 없는 퇴물이다. 이런 통신기가 고장난 건 아주 다행한 일이다. 통신기가 먹통이 되었으니 이래라 저래라 하는 명령이 먹혀들지 않는 땅, ’지중해‘는 그런 곳이다. 까뮈는 다시 『작가수첩』에서 말한다. “자연풍경은 그 어떤 불의의 대가로 얻은 것이 아니어서 나의 마음은 그 속에서 자유롭다.” 그렇다. 지중해의 풍광 앞에서 술잔을 들며 중력의 법칙에 거슬러 볼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시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휴가나 축제도 한번쯤은 있어야 한다. 술과 함께, 살바토레와 함께. 모래 바람이 책의 갈피를 열어주는 까뮈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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