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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놓여 있는 수많은 책들 중에서 이 책을 선택한 것에 대해 먼저 감사를 드린다. 아마도 나의 예상이 맞다면 당신은 현재 함께 일하는 회사의 동료, 요청사항을 조목조목 늘어놓는 고객, 조별 과제를 함께 해야 하는 친구와 같은 주변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느끼거나,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해 답답한 상태일 것이다.


왜 나의 상사는 늘 나의 의견을 무시하는지


왜 거래처의 담당자는 우리의 의견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로 일관하는지


왜 나의 동료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지


내 맘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고, 


함께하는 동료나 상사들은 내 말을 전혀 이해하는 것 같지 않고


늘 울려대는 전화에서는 하나같이 불만 가득한 고객들의 목소리만 들려온다고 느낄 것이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늘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만 한다고 생각하는 당신을 위해 지금부터 불편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법을 찾아볼 것이다.


학창 시절에는 친구를 선택할 수 있었지만 사회생활을 하면 그마저도 쉽지 않다. 직장에는 나이, 성, 출신 환경이 전혀 다른 사람들뿐이다. 그들과 매일 부딪히다 보면 인간관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 계속된다. 혹시라도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말다툼을 하거나 이직을 하려고 마음을 먹어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런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이 책을 쓰게 되었다.


나는 13년 전, 워킹맘들을 대상으로 커뮤니케이션 코치라는 일을 시작했다. 워킹맘들에게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던 코치가 왜 이런 비즈니스 서적을 쓰게 되었는지 의아할 것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모든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은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조직들이 팀 단위로 움직이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는 늘 우리 곁을 따라다닌다.


기업에서 필요한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은 워킹맘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먼저 커뮤니케이션에는 두 종류가 있다. 기본적으로는 ‘사람을 대하는’ 커뮤니케이션이고, 또 하나, 내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자신을 대하는’ 커뮤니케이션이다.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우선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의 감정과 적절하게 동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주변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도 저절로 원활해진다.


단,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점이 있다. ‘알고 있다’ ‘할 수 있다’는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알고 있다’고 끝내지 말고 일상생활에서 ‘할 수 있을’ 때까지 실천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 것. 이 책에서 전하고 있는 이론을 모두 실천해야 할 필요는 없다. 한두 가지도 괜찮으니 “이건 오늘부터 당장 실천하자!”는 느낌이 드는 것부터 실천해보자. 그리고 반드시 지속하자.


꾸준함을 이기는 것은 없다. 이것은 13년 동안 코치로 활동해온 내가 증명할 수 있다. 단 한 가지라도 지속적으로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감과 연결된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속에서 단단해진 인간관계의 기술은 틀림없이 당신의 무기가 될 것이다.


여러분의 인생이 보다 행복해질 수 있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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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매 2018-08-27 13:1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불편한 상사와 친해지는것은 쉽다. 방법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의 신념을 버리거나 숨기면서까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낙하산 상사는 본인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신념이라고는 1도 없으니까....
 


테크놀로지 융합으로 모든 것을 재생하다 

“다양한 테크놀로지의 융합이 한층 더 진행되어 인간, 생활, 산업, 그리고 지구 환경에 이르는 모든 것이 재생된다.” 

2018년 이후의 테크놀로지 동향과 그 영향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각각 다른 영역에서 육성되어온 테크놀로지가 융합되어 쌍방의 영역을 바꾸어가는 실정이다. 오랜 시간 사용되어온 제품이나 구조가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도입에 의해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테크놀로지에 대한 기대 


일단 표를 살펴보자. 2022년에 기대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에 관하여 800명의 비즈니스 전문가에게 설문한 결과를 닛케이BP종합연구소가 정리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정리를 하자면 경영전반·기획을 담당하는 사람이 40%, 연구개발 및 설계·기술’을 담당하는 사람이 50%이고, 나머지는 건축·토목·의료 전문가다. 그들에게 각각의 테크놀로지에 관하여 알고 있는지를 묻고, 각 테크놀로지에 대한 기대 수치를 질문해서 가중 평균을 하여 득점을 매기고 랭킹을 작성했다. 

랭킹을 살펴보고 느낀 점은 1위와 8위, 9위, 10위에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테크놀로지가 뽑혔다는 것이다. 인간의 세포나 조직을 이용하여 난치병을 치료하는 
‘재생 의료’, 면역반응을 이용하여 암을 치료하는 ‘면역 체크포인트 저해약’, 혈액이나 체액을 바탕으로 정밀한 진단을 내리는 ‘액체 생체검사’는 인지도와 기대 수치가 모두 높았다. 이들 기술은 모두 인간이 본래 갖추고 있는 세포나 면역 구조를 이용해 치료하거나 생명을 연장시키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다. ‘차세대 수술 지원 로봇’ 또한 어디까지나 로봇이 의사를 돕는 방식이지 기계가 독자적으로 수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주목하고 싶은 점은 이들 테크놀로지가 의료 분야 이외의 다른 기술과 융합하여 성립된다는 것이다. 재생 의료에는 정밀공학이 융합되어 있다. 실제로 클린룸에서 극소의 세계를 상대해온 반도체 제조 장치 기업이 재생 의료에 도전하고 있다. 약을 만들기 위해 유전자 해석을 할 때에도 슈퍼컴퓨터는 필수적이다. 

기대 수치 랭킹으로 다시 돌아가면, 의료 이외의 테크놀로지에도 모두 사람과 관련이 있거나 사람의 안전을 지키는 기술이 뽑혀 있다. 고속도로나 다리 등 이른바 사회 인프라의 재생을 위해서는 ‘인프라 모니터링’이 필요한데, 이것은 토목과 
‘IoT(사물인터넷)’의 융합이다. IoT는 센서를 이용하여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사물을 감시하고 제어하는 테크놀로지다. 

자동차와 IoT의 융합이라고 할 수 있는 ‘자동 운전’은 ‘충돌하지 않는 자동차’를 실현한다는 목표를 가진, 안전을 위한 테크놀로지다. 자동 운전과 전기자동차(EV)는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전고체 전지(全固体電池) 등 ‘EV를 위한 포스트 리튬 전지’에도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또 과열 양상을 보이고 있는 ‘AI(인공지능)’와 그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기계 학습’은 인간의 능력을 컴퓨터로 재현하려는 도전으로, 모든 분야와의 융합이 시도되고 있다. 



크로스테크 시대가 왔다 

조사 결과를 통해 우리는 이 책의 주제인 
‘융합’과 ‘재생’에 다시 한 번 주목하게 된다. 등장한 지 수십 년이 지난 테크놀로지와 갓 태어난 테크놀로지가 융합하여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때로는 문제를 일으킨 테크놀로지도 있었지만 테크놀로지의 오랜 역사를 통하여 이제는 융합의 시대가 찾아왔다고 말할 수 있다. 

IT나 AI 등의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다른 테크놀로지와 적절히 융합할 수 있다. 금융에 IT를 활용하는 것을 
핀테크(FinTech), 농업에 IT를 활용하는 것을 애그리테크(AgriTech)라고 하는데, 이런 트렌드를 크로스테크(X-tech)라고 부른다. IT만 융합하는 것이 아니다. 산업과 산업, 테크놀로지와 테크놀로지, 그리고 인간과 인간이 융합되기도 한다. 

인공물을 이용해서 세상을 보다 바람직하게 만든다는 테크놀로지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테크놀로지 이용에도 오랜 역사가 있으며 그 결과 인간, 산업, 인프라, 환경 등의 일부에 노후화된 부분이 나타나고 있다. 테크놀로지의 융합이 모든 사물들의 재생과 연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즈니스 업계에서는 융합과 재생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까. 일단 크로스를 빼놓을 수 없다. 경영층과 기술자의 크로스, 업종과 업종과의 크로스, 전통 있는 기업과 젊은 기업의 크로스, 영리기업과 비영리조직(NPO)의 크로스가 필요하다. 크로스의 시작은 당연히 대화다. 경영자와 기술자, 다른 전문 분야에 종사해온 기술자끼리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경영자와 기술자의 대화를 만드는 계기로서 ‘경영전반·기획’을 담당하는 비즈니스 분야, ‘연구개발 및 설계·기술’을 담당하는 테크놀로지 분야로 각각 나누어 정리한 테크놀로지 기대 수치 랭킹도 뒤에 게재했다. 기본적인 경향은 다르지 않지만 비즈니스 분야에서는 건강이나 안전에 대한 공헌을 더 많이 기대하고 있고, 테크놀로지 분야는 현장의 과제를 숙지하고 있기 때문인지 인프라 모니터링이나 자동 운전에 기대를 더 많이 걸고 있다. 



오이시 모토유키(大石基之); 닛케이 테크놀로지 온라인 편집장 

도가와 나오키(戸川尚樹); ITpro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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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과 공감의 차이를 몸으로 느끼고 싶은가?

자신을 살상하고 새로운 진리를 추구하는 살구나무를 만나보라



살구나무는 4~5월에 피어 벚꽃을 연상케 하는 나무다. 파란 열매를 보면 매실이 떠오르지만 노랗게 열매가 익어가면서 매실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노란 살구 열매를 따서 반을 쪼개면 가운데 씨앗을 중심으로 정확히 양분되고 씨앗은 고맙게도 과실 부분과 쉽게 분리된다.


봄날 만개한 꽃을 시작으로 우리에게 계절 감각을 알려준 살구나무는 가을날 다시 맛 좋은 살구 열매를 선물로 준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이 있다. 겉보기에는 먹음직스러운 빛깔을 띠고 있지만 맛은 없는 개살구라는 뜻으로, 겉만 그럴듯하고 실속이 없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가을 햇볕에 익어가는 노란 살구는 빛깔만 좋은 게 아니라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하다. 개살구로 전락한 이유는, 살구처럼 겉과 속이 다 노랗게 익어 자연의 맛을 선물로 주지 않고 겉만 화려한 사람들의 속임수를 효과적으로 비유하기 위해서다. 살구 열매는 치열한 노력의 산물이다. 이른 봄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 한여름의 폭염을 견뎌낸다. 따라서 개살구라고 한다면 살구에게는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빛 좋은 개살구는 그만큼 속은 부실하면서 겉만 가꿔서 사람을 속이려는 얄팍한 기교를 경고하는 메시지다.


살구나무는 한자로 ‘杏(행)’이다. 은행나무와 글자를 같이 쓴다. 공자가 야외 수업을 한 무대를 ‘행단(杏壇)’이라고 한다. 행단은 살구나무杏가 있는 제단을 말한다. 살구나무의 ‘살구(殺狗)’는 개를 죽인다는 뜻이다. 살구나무의 독성이 개를 죽일 수 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살구씨는 한의학에서 ‘행인(杏仁)’이라 불린다. 《본초강목本草綱目》과 《동의보감東醫寶鑑》 등에 살구씨를 이용한 치료 방법이 200가지나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쓰임새와 약효가 많아 “약방의 살구”라 불리기도 한다. 살구씨를 갈아서 만든 한방 외용제는 기미나 주근깨 등의 피부 색소 침착, 종기, 부스럼 등에 사용되며, 피부를 하얗고 윤기 있게 하기 때문에 일찍이 궁중 여인들은 이것으로 피부를 가꾸기도 하였다.


“인은 하늘이 모든 존재에게 준 씨앗이다. 하늘이 준 인을 키우는 것이 인간의 할 일이다. 유가에서 ‘인’을 정치의 덕목 중 으뜸으로 생각하는 까닭이다. 인에 기초한 정치, 즉 인정(仁政)은 인간이 품고 있는 인을 발휘하는 것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모르는 국민을 불쌍하게 여기는 측은지심이 ‘인(仁)이다. 그 ‘인’ 덕분에 한글이 창제된 것이다. 인은 상대방의 아픔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 씀씀이며, 그 사람이 겪는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용기 있는 결단이다.


공자의 사상인 ‘인(仁)’ 또한 씨앗, 종자를 일컫는다. 종자가 있어야 만물이 탄생한다. 공자가 ‘인’을 그토록 강조한 것도 씨앗이 있어야 나무가 있듯 ‘인’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근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은 다른 말로 해석하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다. 공감은 내가 타인의 입장이 되어 직접 체험하면서 온몸으로 느끼고 가슴으로 생각하는 능력이다. 체험 없이는 공감 능력이 생기지 않는다. 머리로 생각하는 역지사지는 진정한 의미의 공감이 아니다. 그것은 연민이다. 공감은 타자의 아픔을 가슴으로 느끼는 수준을 넘어 그 사람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결연한 행동을 포함한다. 진정한 공감은 결국 머리로 생각하는 이해타산(利害打算)이 아니라 가슴으로 생각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머리로 생각하면 나에게 얼마나 이익이 될지를 따지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으로 치닫지만 가슴으로 생각하면 타인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내가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발 벗고 나설 수 있는 결단이 따라온다.


옛사람들의 행복은 풍류를 즐기는 멋에서 나온다. 살구나무가 있는 곳에 술집이 있는 경우가 많다. 술집에서 살구나무를 심었는지, 살구나무가 있는 곳에 술집을 차렸는지 분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선비들이 꽃놀이를 즐기며 풍류를 즐길 수 있도록 술집 근처에 살구나무를 일부러 심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살구꽃이 피는, 특히 비 오는 봄날 살구꽃을 배경으로 술 한잔 할 수 있는 풍류는 선비들이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여유이자 흥겨움의 시간이었다. 살구나무 꽃이 만발한 비 오는 봄날, 그것도 석양이 물들어가는 저녁노을과 함께 술을 마시며 즐기는 풍류의 멋은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살구꽃이 피는 술집을 ‘행화촌(杏花村)’이라 하고 살구꽃이 핀 봄날에 오는 비를 ‘행화우(杏花雨)’라고 불렀다. 살구꽃이 만발한 행화촌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과 어울리며 술잔을 기울일 때, 그것도 봄날 비가 오는 저녁에 술잔에 담긴 인생의 의미를 논하는 술자리는 살아가면서 반드시 찾아야 할 자리다.


살구나무가 있는 곳은 풍류와 술이 있는 여유와 여흥의 공간이기도 했지만 공자가 제자를 행단(杏壇)에서 가르쳤듯이 배움과 깨달음이 머무는 공간이기도 했다. 살구나무 꽃이 피어있는, 행사나 축제를 하는 정원을 ‘행원(杏園)’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살구나무가 있는 행원을 여유와 여백이 살아 숨 쉬는 풍류의 공간이었으며, 치열함과 열정이 스며드는 배움의 터전이기도 했으며, 다 함께 축가를 부르며 축제를 즐기는 공동체의 무대이기도 했다.


살구나무는 과일로서 사람들에게 배고픔을 해결해주고 빛나는 꽃으로 아름다움을 선물해주지만 나무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신비한 소리를 선물해준다. 스님들이 두드리는 목탁을 바로 살구나무로 만든다. 목탁을 두드릴 때 울리는 특이한 울림과 은은한 소리는 살구나무가 아니면 낼 수 없는 신비한 소리다. 나무가 너무 단단하고 강하면 둔탁한 소리가 나서 멀리까지 울려 퍼질 수 없다. 나무가 또 너무 무르면 두들기는 소리에 반응하는 울림이 나무 자체로 흡수되어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해서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이문재 시인의 <농담>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목탁의 소리가 맑고 청명하며 오랫동안 잔향이 남는 이유는 살구나무가 바로 그런 소리를 품고 자랐기 때문이다. 서양의 종은 시끄럽게 안에서 밖으로 흔들어야 소리가 나는데, 멀리, 그리고 오랫동안 울려 퍼지지는 않는다. 한국의 종은 밖에서 안으로 때려 나는 소리가 오랫동안, 그리고 멀리까지 울려 퍼진다. 그만큼 종이 아프기 때문에 자신이 품고 있는 소리를 세상을 향해 천천히 풀어놓는 것이다. 목탁이 내는 소리는 살구나무가 자라면서 겪었던 시련과 역경이 안으로 새겨져 울려 퍼지는 소리다.


살구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인데, 개살구는 토종 살구다. 살구나무에 비해 크기도 작고 맛도 없지만 엄연히 우리 땅에서 태어나 자라는 토종이다. 그냥 살구에 비해 맛이 떨어져 볼품만 있고 실속은 거의 없는 경우를 빗대어 “빛 좋은 개살구”라고 한다. 문득 산속에서 외롭게 자란 개살구나무로 만든 목탁의 소리가 더 구슬프고 청명하게 울려 퍼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외롭게 자라면서 고독을 삼킨 나무이기에 안으로 품은 한 많은 세상을 소리로 읊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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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로 뻗어야 위로 자랄 수 있다



성장할 수 있는 ‘높이’는 성장하기 위해서 아래로 뻗은 뿌리의 ‘깊이’가 좌우한다. 아래로 파고드는 깊이 없이 쉽고 빨리 위로 성장하려는 사람은 어느 순간 높이 자랄 수는 있지만 높이를 지탱할 수 있는 깊이가 없어서 쉽사리 무너진다. 아래로 뿌리를 내리는 노력이 위로 성장하기 위한 가능성을 결정한다. 잡초의 생명력은 위로 자란 줄기의 높이보다 아래로 자란 뿌리의 깊이가 결정한다.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야 뿌리 뽑히는 나무가 되지 않는다. 일단 뿌리가 뽑히면 나무는 더 이상 생명 연장이 불가능하다. 그만큼 나무에게 뿌리는 생명의 다른 이름이다.


아래로 깊이 뿌리를 내려야 결국 위로 높이 자랄 수 있다. 아래로 뿌리를 내리는 노력은 위로 줄기와 가지를 뻗으려는 노력보다 힘들고 어렵다. 그러나 뿌리 내리기를 포기한다면 성장의 가능성도 함께 포기해야 한다. 뿌리 없이 줄기 없고, 줄기 없이 가지 없으며, 가지 없이 꽃을 피울 수 없고, 꽃이 피지 않고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열매의 풍족함과 풍요로움은 뿌리의 깊음과 힘겨움을 버텨내는 노고에서 비롯된다. 연못을 가득 채운 연잎도 ‘위로 밖으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래로 안으로’ 향하고 있다. ‘위로 밖으로’ 향하고 싶은 욕망이 강할수록 ‘아래로 안으로’ 파고들어 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낮추면 높일 수 있다. 낮춤이 높임이다. 아래로 숙여야 더 높이 치켜세울 수 있다. 아래로 파고든 깊이가 위로 치솟을 수 있는 성장 에너지를 결정한다. 그러나 파고들지 않고 치켜세우려고만 하면 금방 무너진다. 무너지지 않으려면 기초를 튼실하게 가꾸어야 한다. 기초는 기본이고 본질이며, 본질은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으려면 파고들어야 한다. 확고부동한 신념은 파고들어간 깊이에서 나온다.


“나무든 풀이든 모든 생명체는 뿌리를 닮는다.”


뿌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겉으로 드러난 실체의 본질을 결정하고 지배한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결정하는 셈이다. 지금 나의 모습도 지금까지 내가 파고든 뿌리가 만든 산물이다. 파고들기 전에 옆으로 뻗거나 위로 올라가다가 무너지면 다시 회복하기 어렵다. 파고든 깊이의 내공이 옆으로 뻗을 수 있는 넓이를 결정하고,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높이를 결정한다.


나무가 위로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은 아래로 뻗은 뿌리 덕분이다. 뭔가를 얻거나 되려면 뭔가를 해야 한다. 나무는 위로 향하면서도 옆으로 몸집을 불린다. 사람도 위로 성장하면서 옆으로 살이 찐다. 그러나 위로 성장하는 키에 비해 옆으로 성장하는 몸집 불리기는 그다지 이미지가 좋지 않다. 몸집 불리기는 지나친 욕망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나무에게 높이 성장하는 것은 수직적 깊이를 전제로 이루어지는 시간적 성장이고 옆으로 몸집 불리기는 수평적 넓이의 확산을 통한 공간적 성장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나무는 위아래로 성장하는 동시에 옆으로도 성장하면서 나무로서의 존재 가치를 드러낸다.


사람에게 수직적 깊이의 심화는 곧 전문성의 추구를 통한 종적(縱的) 심화 과정이다. 이에 반해 수평적 넓이의 확산은 또다른 전문성과의 부단한 접목을 통한 인식 지평의 확대, 즉 횡적(橫的) 확산을 의미한다. 부정적 뉘앙스를 지니고 있는 수평적 몸집 불리기와는 다르게 횡적 확산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좌정관천(坐井觀天)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분투노력이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나이가 있다. 하나는 깊이 파고든 수직의 나이다. 수직의 나이가 깊을수록 해당 분야의 전문성의 정도도 깊어진다. 또 다른 하나는 수평의 나이다. 수평의 나이는 인간관계를 통해 인맥을 구축한 관계의 나이다. 수직적 깊이 없는 수평적 넓이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며, 수평적 넓이 없는 수직적 깊이는 견딜 수 없는 답답함이다. 나무는 수직으로 파고들면서 동시에 수평으로 줄기와 가지를 두껍게 만들어나간다.


오랜 준비 없이 쉽게 시작하는 모든 일은 그 결실을 맺기전에 무너지기 십상이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보다 빠른 시간에 관심과 주목을 받기 위해 튼튼한 뿌리를 땅속 깊이 내리기도 전에 보여주는 생각과 행동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첨단을 걷기 쉽다.


“용두사미(龍頭蛇尾)란 경구를 모르는 사람이 없듯이 정당이든 단체든 개인이든 거대하고 요란한 출발은 대체로 속에 허약함을 숨기고 있는 허세인 경우가 허다하다. 민들레의 뿌리를 캐어본 사람은 안다. 하찮은 봄풀 한 포기라도 뽑아본 사람은 땅속에 얼마나 깊은 뿌리를 뻗고 있는가를 안다. 모든 나무는 자기 키만큼의 긴 뿌리를 땅속에 묻어두고 있는 법이다. 대숲은 그 숲의 모든 대나무의 키를 합친 것만큼의 광범한 뿌리를 땅속에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대나무가 그 뿌리를 서로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나무가 반드시 숲을 이루고야 마는 비결이 바로 이 뿌리의 공유에 있다.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나면 이제는 나무의 이야기가 아니다. 개인의 마디와 뿌리의 연대가 이루어내는 숲의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잡초에는 TR비라는 것이 있다. TR비는 잡초가 땅 속 깊이 뻗은 뿌리(Root)와 땅 위로 뻗은 줄기와 가지의 높이(Top)의 비율이다. 80:20 법칙이다. 잡초의 80%는 땅속에 뻗어 있고 20%만이 겉으로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잡초를 뜯어내고 동물들이 아무리 많은 양의 잡초를 뜯어 먹어도 잡초는 땅 밑의 뿌리로부터 새로운 싹을 틔우고 줄기와 가지를 뻗어 자신의 종족을 퍼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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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려봐야 뒤흔들 수 있다



살다 보면 참으로 많은 바람이 분다. 한겨울에 몰아치는 삭풍(朔風)과 북풍(北風)이 있고 한여름에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는 비바람도 있다. 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어와도 줄기와 가지가 휘어지고 때로는 꺾일지언정 뿌리로 버티는 나무나 들풀처럼 우리도 혼탁한 바람에 짓눌리지 않고 중심을 잡아야 삶이 무너지지 않는다. 중심은 흔들리면서 잡힌다. 흔들려보지 않은 사람은 삶의 중심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중심이라고 잡아서 안심하고 있는 찰나 생각지도 못한 바람이 불어와 뿌리째 흔들려봐야 진짜 내 삶의 중심을 알 수 있다. 중심은 흔들리면서 서서히 잡히는 내 삶의 핵심이다. 바람이 심하게 불수록 흔들어 깨워야 할 우리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반성하고 점검해보는 것이다.


많이 흔들려본 사람만이 세상을 남다르게 뒤흔들 수 있다. 흔들린다는 것은 내 삶의 중심을 흔들어본다는 것이다. 나무의 중심은 뿌리다. 흔들어서 뿌리가 잘 버티고 있는지를 점검해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무의 중심이 얼마나 튼튼하게 자리 잡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따라서 흔들리는 일은 나무를 더 강하게 성장시키는 원동력인 셈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상황에서 여러 가지 일로 흔들려본 사람일수록 어지간한 흔들림은 이겨낸다. 흔들려보지 않고서는 자신의 중심을 똑바로 세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삶의 진한 체험적 깨달음으로 다른 사람을 뒤흔들 수도 없다. 숱한 개념에 나의 체험적 신념이 추가되지 않으면 관념의 파편으로 전락해 호소력이 없게 된다.


풍경은 바람이 불지 않으면 소리 내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야만 비로소 그윽한 소리를 낸다. 인생도 무사평온하다면 즐거움이 뭔지 알지 못한다. 힘든 일이 있기에 즐거움을 알게 된다. 이는 《채근담》에 나오는 말이다. 시냇물도 돌부리가 있어야 노래를 부른다. 걸리는 돌이 있어서 부딪히면서 소리가 나는 것이다. 바람이 불지 않는 인생은 가슴이 뛰지 않는 삶이다. 어제와 다른 불확실한 바람이 불어야 어제와 다른 방법으로 내일을 준비한다. 내일 어떤 바람이 불어올지를 기다리지 말고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정면 도전해야 한다. 미국의 작가이자 강사였던 데일 카네기Dale Carnegie도 말하지 않았던가.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라고.


영화 〈최종병기 활〉에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불어오는 바람의 강도나 방향을 너무 오랫동안 고민하며 계산하려다 오히려 바람에 밀려 사라질 수 있다. 다양한 각도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맞부딪혀 보는 경험이 많을수록 바람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내공이 깊어지는 법이다. 머리로 계산해서 바람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바람을 맞이해본 경험이 있어야 바람을 느낄 수 있다. 불어오는 바람의 존재는 확실하지만 그 바람의 실체와 본질에 대해서 사전에 알 길은 없다. 즉, 바람이 불어온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바람의 성격이나 방향은 몸으로 부딪혀보지 않고서는 확실히 알 길이 없다.



이런 점에서 “타자는 존재론적으로 확실하고 인식론적으로 모호하다.”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바람이 분다는 사실, 그리고 그 바람으로 내가 흔들린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바람으로 인해 흔들리는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는 알 수 없다. 오직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내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바람으로 인해 나무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 흔들림으로 나무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무슨 대응 논리를 구상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아프다고 하면, 그의 고통은 존재론적으로 확실하다. 하지만 그 고통의 의미를 나는 잘 알지 못한다. 확실한 고통의 존재를 인식론적으로 불완전하게 알 뿐이다. 김훈의 단편소설 〈화장〉에 이런 말이 있다.


“나는 아내의 고통을 알 수 없었다. 나는 다만 아내의 고통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고통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나무가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힘들게 흔들리며 살아왔는지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모든 나무는 흔들리면서 성장한다는 점이다. 흔들리지 않는 나무는 죽은 나무밖에 없다. 그래서 흔들림은 살아 있음의 증거다. 사람도 살아가면서 흔들려본 경험이 있을 것이며, 그때마다 저마다의 사연과 배경이 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심하게 흔들렸을 때일수록 더 심하게 안간힘을 쓰면서 삶의 중심을 잡아보려 애썼던 것 같다.


나의 의지는 의지할 데가 없다는 생각이 들 때 더욱 빛나기 시작한다. 흔들려도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는 나무처럼 결국 나의 의지로 흔들리는 난국을 극복해야 한다. 위대한 성취는 위로 속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남다른 성취는 사무치게 외로운 고독 속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창조적으로 승화시킨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다.


“의지(依支)의 강도가 약할수록 의지意志의 강도는 강해진다.”


의지(依支)하는 사람은 의존적인 사람이고 의지(意志)를 불태우는 사람은 독립적인 사람이다. 나무야말로 세상에 의지(依支)하지 않고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는 의지意志가 강한 생명체다. 반대로 인간은 지구상에서 다른 생명체에게 가장 많이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의존적인 생명체다. 사람은 어린 시절에 누군가에게 의지하다 점차 어른이 되면서 자신의 의지(意志)로 독립적인 삶을 살아간다. 의지가 생기려면 우선 내가 의존하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살기 시작해야 한다.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나무의 의지를 생각하면서 미래를 지향하는 나의 의지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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