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과 공감의 차이를 몸으로 느끼고 싶은가?

자신을 살상하고 새로운 진리를 추구하는 살구나무를 만나보라



살구나무는 4~5월에 피어 벚꽃을 연상케 하는 나무다. 파란 열매를 보면 매실이 떠오르지만 노랗게 열매가 익어가면서 매실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노란 살구 열매를 따서 반을 쪼개면 가운데 씨앗을 중심으로 정확히 양분되고 씨앗은 고맙게도 과실 부분과 쉽게 분리된다.


봄날 만개한 꽃을 시작으로 우리에게 계절 감각을 알려준 살구나무는 가을날 다시 맛 좋은 살구 열매를 선물로 준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이 있다. 겉보기에는 먹음직스러운 빛깔을 띠고 있지만 맛은 없는 개살구라는 뜻으로, 겉만 그럴듯하고 실속이 없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가을 햇볕에 익어가는 노란 살구는 빛깔만 좋은 게 아니라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하다. 개살구로 전락한 이유는, 살구처럼 겉과 속이 다 노랗게 익어 자연의 맛을 선물로 주지 않고 겉만 화려한 사람들의 속임수를 효과적으로 비유하기 위해서다. 살구 열매는 치열한 노력의 산물이다. 이른 봄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 한여름의 폭염을 견뎌낸다. 따라서 개살구라고 한다면 살구에게는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빛 좋은 개살구는 그만큼 속은 부실하면서 겉만 가꿔서 사람을 속이려는 얄팍한 기교를 경고하는 메시지다.


살구나무는 한자로 ‘杏(행)’이다. 은행나무와 글자를 같이 쓴다. 공자가 야외 수업을 한 무대를 ‘행단(杏壇)’이라고 한다. 행단은 살구나무杏가 있는 제단을 말한다. 살구나무의 ‘살구(殺狗)’는 개를 죽인다는 뜻이다. 살구나무의 독성이 개를 죽일 수 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살구씨는 한의학에서 ‘행인(杏仁)’이라 불린다. 《본초강목本草綱目》과 《동의보감東醫寶鑑》 등에 살구씨를 이용한 치료 방법이 200가지나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쓰임새와 약효가 많아 “약방의 살구”라 불리기도 한다. 살구씨를 갈아서 만든 한방 외용제는 기미나 주근깨 등의 피부 색소 침착, 종기, 부스럼 등에 사용되며, 피부를 하얗고 윤기 있게 하기 때문에 일찍이 궁중 여인들은 이것으로 피부를 가꾸기도 하였다.


“인은 하늘이 모든 존재에게 준 씨앗이다. 하늘이 준 인을 키우는 것이 인간의 할 일이다. 유가에서 ‘인’을 정치의 덕목 중 으뜸으로 생각하는 까닭이다. 인에 기초한 정치, 즉 인정(仁政)은 인간이 품고 있는 인을 발휘하는 것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모르는 국민을 불쌍하게 여기는 측은지심이 ‘인(仁)이다. 그 ‘인’ 덕분에 한글이 창제된 것이다. 인은 상대방의 아픔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 씀씀이며, 그 사람이 겪는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용기 있는 결단이다.


공자의 사상인 ‘인(仁)’ 또한 씨앗, 종자를 일컫는다. 종자가 있어야 만물이 탄생한다. 공자가 ‘인’을 그토록 강조한 것도 씨앗이 있어야 나무가 있듯 ‘인’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근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은 다른 말로 해석하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다. 공감은 내가 타인의 입장이 되어 직접 체험하면서 온몸으로 느끼고 가슴으로 생각하는 능력이다. 체험 없이는 공감 능력이 생기지 않는다. 머리로 생각하는 역지사지는 진정한 의미의 공감이 아니다. 그것은 연민이다. 공감은 타자의 아픔을 가슴으로 느끼는 수준을 넘어 그 사람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결연한 행동을 포함한다. 진정한 공감은 결국 머리로 생각하는 이해타산(利害打算)이 아니라 가슴으로 생각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머리로 생각하면 나에게 얼마나 이익이 될지를 따지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으로 치닫지만 가슴으로 생각하면 타인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내가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발 벗고 나설 수 있는 결단이 따라온다.


옛사람들의 행복은 풍류를 즐기는 멋에서 나온다. 살구나무가 있는 곳에 술집이 있는 경우가 많다. 술집에서 살구나무를 심었는지, 살구나무가 있는 곳에 술집을 차렸는지 분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선비들이 꽃놀이를 즐기며 풍류를 즐길 수 있도록 술집 근처에 살구나무를 일부러 심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살구꽃이 피는, 특히 비 오는 봄날 살구꽃을 배경으로 술 한잔 할 수 있는 풍류는 선비들이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여유이자 흥겨움의 시간이었다. 살구나무 꽃이 만발한 비 오는 봄날, 그것도 석양이 물들어가는 저녁노을과 함께 술을 마시며 즐기는 풍류의 멋은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살구꽃이 피는 술집을 ‘행화촌(杏花村)’이라 하고 살구꽃이 핀 봄날에 오는 비를 ‘행화우(杏花雨)’라고 불렀다. 살구꽃이 만발한 행화촌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과 어울리며 술잔을 기울일 때, 그것도 봄날 비가 오는 저녁에 술잔에 담긴 인생의 의미를 논하는 술자리는 살아가면서 반드시 찾아야 할 자리다.


살구나무가 있는 곳은 풍류와 술이 있는 여유와 여흥의 공간이기도 했지만 공자가 제자를 행단(杏壇)에서 가르쳤듯이 배움과 깨달음이 머무는 공간이기도 했다. 살구나무 꽃이 피어있는, 행사나 축제를 하는 정원을 ‘행원(杏園)’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살구나무가 있는 행원을 여유와 여백이 살아 숨 쉬는 풍류의 공간이었으며, 치열함과 열정이 스며드는 배움의 터전이기도 했으며, 다 함께 축가를 부르며 축제를 즐기는 공동체의 무대이기도 했다.


살구나무는 과일로서 사람들에게 배고픔을 해결해주고 빛나는 꽃으로 아름다움을 선물해주지만 나무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신비한 소리를 선물해준다. 스님들이 두드리는 목탁을 바로 살구나무로 만든다. 목탁을 두드릴 때 울리는 특이한 울림과 은은한 소리는 살구나무가 아니면 낼 수 없는 신비한 소리다. 나무가 너무 단단하고 강하면 둔탁한 소리가 나서 멀리까지 울려 퍼질 수 없다. 나무가 또 너무 무르면 두들기는 소리에 반응하는 울림이 나무 자체로 흡수되어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해서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이문재 시인의 <농담>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목탁의 소리가 맑고 청명하며 오랫동안 잔향이 남는 이유는 살구나무가 바로 그런 소리를 품고 자랐기 때문이다. 서양의 종은 시끄럽게 안에서 밖으로 흔들어야 소리가 나는데, 멀리, 그리고 오랫동안 울려 퍼지지는 않는다. 한국의 종은 밖에서 안으로 때려 나는 소리가 오랫동안, 그리고 멀리까지 울려 퍼진다. 그만큼 종이 아프기 때문에 자신이 품고 있는 소리를 세상을 향해 천천히 풀어놓는 것이다. 목탁이 내는 소리는 살구나무가 자라면서 겪었던 시련과 역경이 안으로 새겨져 울려 퍼지는 소리다.


살구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인데, 개살구는 토종 살구다. 살구나무에 비해 크기도 작고 맛도 없지만 엄연히 우리 땅에서 태어나 자라는 토종이다. 그냥 살구에 비해 맛이 떨어져 볼품만 있고 실속은 거의 없는 경우를 빗대어 “빛 좋은 개살구”라고 한다. 문득 산속에서 외롭게 자란 개살구나무로 만든 목탁의 소리가 더 구슬프고 청명하게 울려 퍼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외롭게 자라면서 고독을 삼킨 나무이기에 안으로 품은 한 많은 세상을 소리로 읊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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