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걸작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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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근법을 처음 배운 순간을 기억한다. 초등2학년 미술 시간, 소풍을 다녀온 후 소풍 장소로 줄지어 가는 아이들을 그렸었다. 선을 나란히 두개 그려 길을 만들고 짝을 지어 줄지어 가고 있는 아이들을 그렸었다. 내가 그린 걸 보더니 담임 선생님이 길을 나란히 평행으로 그리면 안된다면서 점점 좁아지다가 두 선이 만나 소실되는 삼각형으로 길을 고쳐주었다. "길은 나란해요!"라고 우기는 내게 '실제로는 나란하지만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아!"라고 답했다. 하교길에 나는 여우 고개 위에 서서 우리 집까지 가는 길을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 길은 두 개의 선이 나란한테, 내 눈에 점점 좁아지다 지평선 끝에서 두 선이 만나고 있었다.

미술에 대해 잘 모르지만, 미술사에 원근법이 발명된 순간이 있다는 건 안다. 기둥들이 줄줄이 늘어선 회랑을 원근법으로 그린 작품이 아마 원근법을 깨달은 화가가 그린 작품으로 안다. 그렇게 원근법이 발명(?)되었고, 측면의 얼굴에 눈은 정면을 보는 기괴한 평면의 이미지로 수천 년 세월을 뛰어넘는 이집트 벽화나 중요한 것은 크게 그리고 보던 중세 시대 그림에서 서양 미술이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건 얼추 들어서 안다.

그리고 나서는 선과 색에 대한 논란이 이어진 것 같다. 발자크의 <미지의 걸작>은 선과 색, 형태와 내용에 대한 탐구를 치열하게 다루고 있다. 포스트 마던의 아이로 자란 내게,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대상에 닿을 수 없다고 말하는 포스트 마던 시대의 담론이 당연한지라, 닿을 수 없는 대상에 닿으려고 하는 프렌호퍼의 시도가 왜 무위로 끝났는지는 알 것도 같다. 다만, 프렌호퍼라는 화가를 통한 발자크의 치열한 사유가 있었기에, 대상의 본질에 닿을 수 없다는 진술로 인간들의 인식이 수렴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은 한다.

글귀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선'에 대한 고찰이었다. 자연에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화가가 선을 그리는 순간 대상을 배경에서 떼어내게 된다는 진술은, 재현(representation)이 가진 딜레마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 같다.

'재현(representation)'에 관한 진술 중 가장 가슴이 뛰는 진술은 사실 성경 창세기에 나온다. 거기서 복수형의 하나님은 그렇게 말한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자'라고. (복수형의 하나님이라는 이슈, 단수형의 하나님이라는 이슈 역시 매혹적이나 그건 주제와 무관하므로 패스.) 저 형상이라는 단어가 image이다. 즉 인간은 신의 재현품, 복제품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끊임없이 본질에 닿으려는 시도를 한다는 거라고 '어숙룩하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재현된 자신들의 현실을 또 재현해 내려는 시도 역시 끝도 없이 한다.

프렌호퍼가 실패한 지점에서, 문학도였던 나는 사실 희희낙낙했었다. 20대 시절에 인간의 인지의 한계상 인간은 본질에 결코 닿을 수 없다면, 그렇다면 본질에 대한 지향을 포기해야 하는가?하는 질문에 시달렸고, 그때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구닥다리, 문학에서 구원을 찾았다. 본질에 가장 에둘러서 가는 것이, 가장 지름길로 가는 것이라 내 마음대로 결론내려 버렸다. 즉, 비유와 상징을 통해 대상을 표현하는 것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려는 시도들 중 가장 적확하게 대상의 본질에 가서 닿는 방법인데?라고 생각해 버렸다. 가장 먼 길을 택하는 것이 가장 지름길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래서, 가장 오래된 것(stories)에서 상징과 비유를 건져내는 것이, 본질을 파악하는 (영어로 쓴다면 본질을 움켜쥔다는 동사를 쓰겠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나는 믿는다. 물론, 콘래드가 <라군>에서 말했듯 망망대해에서 진리의 입자(particles)를 건지는 일이지만 말이다.

허나 상징과 비유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걸 사람과 사람 사이로 가져와 전달하는 방법은 자크 리베트가 90년대 초반에 시도한 방법이 맞다. 걸작은 과정 중에 있다고 설득하는 것. 즉, the best is in the making 이라고 주장해 버리는 거다. 그렇다면, 그리는 주체와 그려지는 대상은 영원히 그 인터페이스 안에서 완성이 된다. 심지어 그리는 주체의 '주체성'까지 이 과정 중에서 전도되는 것 - 그려지는 대상이 자신의 주체성을 나타낼 때 대상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포착한다고 말하는 것, 까지 외려 자크 리베트는 궁구해냈다. 그렇기 때문에 과정인 걸작은 과정에 참여한 자들의 기억 속에만 살아있게 두고, 결과물은 영원히 봉인해버릴 수 밖에 없다. 이건 지극히 90년대다운 결론이다.

그 이전 시대인 발자크는 대상의 본질에 가서 닿을 수 없어서 결국 대상을 그리는 주체가 대상으로 가는 길과 주체인 자신을 모두 불태워버리는 결론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바벨탑으로 상징되는 완전한 언어를 통한 본질에의 지향은 원래 그렇게 무너질 수 밖에 없으니까.

결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한 구절로 맺는다. "Accordingly, the poet should prefer probable impossibilities to improbable possibilities. (따라서 시인은 개연성있는 불가능성을 개연성 없는 가능성보다 선호해야 한다.)” 즉, 예술가는 그럴 듯하나 불가능한 일을 하는 자들이란 뜻이다. 대상의 본질에 가 닿는 건 불가능하다고 애초부터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고 있었다 - 그냥 그럴 듯한 것, 그게 재현의 최대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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