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몸으로 사는 사람은 상황 속에 뛰어들고 과제가 주어지면 반응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머리로 사는 사람은 상황과 거리를 두고 과제가 주어지면 거기에 반응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두고 생각을 하는 식으로 '반응'하곤 한다. 가끔 무언가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도중에 일어나는 잦은 회의로 인해 길게 가지를 못한다. 나는 최근 매우 거칠기 짝이 없는 이 구분이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고 느꼈다. 이 때 '적지 않은'이란 상대적인 형용사인데 어떤 현대정치철학의 개념에 자신이 부합하냐, 어떤 이론적 준비가 갖춰졌느냐,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의 철학적 내지는 거시적 의미를 알고 있느냐의 기준들보다 그러하다는 것이다. 몸과 머리의 이분법을 내가 따라왔던 이 모든 가치기준을 상대화시키는 것을 가능케 해준다. 그리고 이 가치기준에서 폄하되어 왔던 삶과 모습들에 대한 재평가, 나아가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역시나) 지적인 기초를 마련해준다. 여기서도 지적 기초에 집착하는 것은 내가 아직도 머리로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겟지. 나를 포함한 이런 사람들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는 않지만 크지는 않다. 유물론 대 관념론이라는 식상한 구분을 들여놓고 싶지 않고, 자기반성이 또 한번 나중에 반성할 일을 만들게 하고 싶지 않다. 만약 이 구분에서 한 쪽에 속했다고 간주되는 사람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그가 어디 한 쪽에 속해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 사람 자체가 모자라서 그러한 경우가 훨씬 많다. 나는 그저 내가 적어도 조만간에는 몸으로 사는 사람이 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이분법이 시사하는 것을 좀더 이해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 리스트를 작성한다.


9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휴전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0년 9월
14,000원 → 11,200원(20%할인) / 마일리지 340점(3% 적립)
*지금 주문하면 "오늘 수령" 가능(17~21시 사이)
28대 출판사 베스트 에세이전! 행키+파우치 증정
[국내도서 분야 쿠폰] 분야별 3만원 1천5백원 쿠폰
[국내도서 쿠폰] 국내도서 구매시 최대 3천5백원 쿠폰

머리가 몸으로 살길 강요당하게 된 이후 다른 몸/머리들을 볼 때


9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찔벅이기


3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3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지구화 시대의 정의 - 정치적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 프리즘 총서 5 
낸시 프레이저 지음, 김원식 옮김 / 그린비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낸시 프레이저, 『지구화 시대의 정의: 정치적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 김원식 옮김, 김재훈 편집, 그린비, 2010.

1. 문체의 미덕: 낸시 프레이저의 이 책은 그야말로 비판적 현대사회이론의 교과서라고 부를 만한 책이지 않나 싶다. 특히 어떤 면에서 그러하느냐면 서술이 놀라우리만치 명확간결명료하며 건축적이다.
  명확간결명료하다는 것은 저자가 특정한 주제를 묘사하는 데 사태를 과장하기 위한 문학적 장식을 달지 않고, 모국어 이용자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장난 애드립을 치지 않으며, 특정한 이론의 추종자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어휘를 쓰지 않고, 교과서 류의 전공서적에 주로 쓰이는 중립적이고 일반적인 어휘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일반화를 하면서도 본래 이론적 배경이 되는 사상들의 힘을 거의 축소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해당 사상들의 호환가능성을 윈도우급으로 격상시킨다는 데에서 그 힘을 적어도 현행적인 차원에서는 증진시킨다. 그러니까 거칠게 소화해보자면 원래 잠재된 힘이 100인데 쓸 수 있는 것은 10밖에 안 되었다면, 여기서는 잠재된 힘을 80으로 축소하는 대신 적어도 70은 사용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원래 잠재되어 있는 힘이 100인지는 10밖에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20이라는 가상적 잠재력에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사용할 수 있는 힘 60의 증가에 기뻐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렇다고 책이 절대로 딱딱하거나 하지 않은 것은 놀라울 정도로 건축적인 구성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문제가 3개 있고 각 문제당 실제 사례당 3개가 배정되어 있다. 그리고 대안도 따라서 3개이며 이런 문제분석과 대안제시를 위해 참조되는 이론적 전통은 2종류로 나뉘어 3가지 방향에 조명된다 등등...뭔 소리나 싶을 수 있겠는데 책이 정말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따로 노트나 여백에 논의의 구조를 힘겹게 적을 필요가 없다. 거기에다가 이런 건축적인 구조를 가진 내용들은 마지막에 가서는 한 문단 정도에 따로 요약되며 길어야 2~3문장으로 축약될 수 있는 하나의 이론적/실천적 요청으로 정리된다. 사유의 소재를 공급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이를 즉각 활용하거나 독자의 맥락에 접합가능한 형태로 가공해서 내어놓는 것이 아주 기가 막히다.
  이런 명확간결명료성과 건축성이 결합되어 독서는 교과서류 전공서적의 지겨움과는 달리 매우 술술 읽힌다. 오히려 역으로 교과서가 지루한 건 충분히 교과서답지 못했기 때문이구나 하는 반성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독자는 책장을 넘겨가며 복잡해 보이는 경제주의, 문화주의, 정치주의, 하버마스, 푸코, 아렌트 등의 비판적 현대사회이론의 사조와 이름들의 관계를 파악하고 이들이 현재의 역사적 조건과 현실의 투쟁들과 맞물려 어떤 이론적/실천적 과제를 제시하고 있는지에 대한 좋은 정리 중의 하나를 파악하게 된다. 물론 이건 낸시의 관점일 뿐만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본 메모에서는 낸시에 대한 비판적 접근은 일단 생략하기로 한다. 모든 교과서들이 흠이 있지만 적어도 그것들은 좋은 출발의 계기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그렇게 불린다). 하지만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적어도 이 바로 밑 수준 정도의 명료함을 가진 문체는 가지고 반박에 임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좀 들기도 한다. 아니면 이렇게 서술이 명료해질 수 없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기술하던가. 구슬이 서말이에도 꿰어야 보배라는 옛말이 있다. 우리는 이 '꿰는 행위'를 부차적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내 주장일 뿐이지만 호환성은 진리의 우회불가능한 계기 중 하나이다.


2. 사회과학이라는 쟁점: 3장에 등장하는 '사회과학'에 대한 언급들은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낸시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모순을 사회현실을 가장 핵심적인 불평등 원인으로 강조하는 이들이 그 무시무시한 전망과는 달리 모종의 순진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한 사실들이 논란거리가 될 수 있는 묵시적인 사회이론적 가정들과 역사적 해석들에 의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각각은 자신들이 요청하고 있는 '사실'이 논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한다. 이러한 상황의 결과는 사회과학자들이 이미 그런 어려운 질문들을 해결해 둔 것으로 추정되는 무대 뒤의 '다른 어떤 곳'을 상정하는 것이다."(70쪽)

  낸시는 이렇게 되면 '무엇이 정의(내용)고 누구의 정의(당사자)인지'에 대해서 결국 (아마도 주류) 사회과학자들이 결정권을 쥐게 된다면서 정의의 내용과 당사자를 결정하는 과정이 지식을 가진 소수가 참여하는 '과학적' 방식이 아닌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정치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에 의해서 수행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가끔 사회과학이 너무 부정적인 의미로 쓰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사회과학의 '폐기'를 말하기보다는 사회과학의 '활용'정도로 말하는 것 같긴 한데 낸시 자신이 사회과학,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전문적 지식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할지 확신에 찬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앞서 말한 정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사회과학에의 종속 문제를 해결키 위하여 '관련된 모든 당사자 원칙'이 '종속된 모든 사람들의 원칙'으로 전화되어야 함을 말하는데 결국 "협치(governance) 구조에 대한 포괄적 이해"(118쪽)라는 것도 사회과학자들의 역할이 클 수 밖에 없지 않겠나?
  만약 낸시가 이 쟁점을 충분히 다루길 원했다면 '지식의 민주화'라는 별도의 쟁점을 다뤄야만 하지 않았을까. 엘리트들에 의해 형성된 지식의 분배에 측면에 있어서나, 지식 자체를 사회적으로 형성하는 생산의 측면에 있어서나 말이다.


3. 규범과 현실 사이에 다리놓기를 고민하기로서의 '공론장'에 대한 비판적 개조: 어쩌면 낸시가 위에서 말한 지식의 민주화, 다른 말로 하자면 일반 공중(public)의 '말'이 모이고 현실을 주조한다는 의미에서의 '정의에의 민주적 참여' 측면을 다루기 위해 하버마스의 공론장 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5장에서 시도하는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낸시는 공론장에 사람들이 충분히 진입했느냐는 의미에서의 '정당성'과 그렇게 형성된 공론장이 과연 자신의 기획에 따라 현실을 바꿀 힘으로 전환될 수 있느냐는 의미에서의 '유효성' 차원 둘로 나눠 질문을 던진다. 지구화 시대에 이 둘은 모두 위기에 처했는데 정당성은 국민 이외의 사람들이 공중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효성은 초국적 사태들에 과거나 현재의 국가 기구만큼의 힘을 가지고 개입할 제도적 장치들이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개인적으로는 하버마스의 논의를 그 자체로서나 그 잠재력에 있어서나 지나치게 과소평가했다는 생각들이 많이 들었던 절이었다.


4. 자신의 과거에 대한 현실적 평가: 여성주의, 특히 제2물결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하고 있는 6장은 핵심 논점 자체도 좋겠지만 뭔가 낸시의 자전적 회고를 듣는 듯한 기분을 들게 만들기도 한다. "재분배에서 인정으로"라는 왕년의 논문 부제에 연상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그는 이런 이행이 긍정적이었다기보다는 결국 탈베스트팔렌화와 신자유주의라는 역사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았기에 '인정'이라는 기획이 마땅히 지향해야 했을 평등주의적 성격을 스스로 박탈했다고 자평한다. 한국 사회의 90년대 이후 소수 지식인들과 출판시장의 조금 특이한 상품으로만 유통되었던 문화주의적 정치를 여기에 비교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국의 경우 더 슬픈 것은 이런 운동들이 현실 자체에 그때나 그 전이나 큰 영향력은 없었기에 실패해봤자 더 낙담할 껀덕지도 없다는 것이 아닐까...라는 섣부른 짐작을 잠깐 해봤다.
  6장 6번째 절 "복음주의: 자아에 관한 신자유주의적 기술"은 내가 이 장이 낸시의 자전적 회고 성격을 가지기도 했다고 어림짐작하게 만든 주요한 부분이다. 여기서 그녀는 부시가 당선된 대선과 오바마가 당선된 경선을 예로 들며 여성주의 이론가들이 세심한 이론적 차이에 집착하는 도중에 결국 현실정치와의 접점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뼈아프게 지적한다("미국의 여성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본질주의에 관해서 논쟁하는 동안에 자유시장과 기독교 근본주의 사이의 사악한 동맹이 조국을 장악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185쪽)). 복음주의에 대한 숱한 비판들이 그러는 것과 달리 낸시는 여기서 하층여성들의 ('계급배반적'이라는 수사를 패러디하면) '젠더배반적' 자기의식을 내재적으로 이해하려 하는데 나는 여기서 그녀가 그녀 자신 역시 '미국의 여성주의자'로서 자신의 책임을 찾으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 느낌을 계속 받게 되는 것이 이 책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 절 자체가 생뚱맞다. 배경과 주장을 한데 뭉쳐서 한 절로 몰아놓는 다른 장들과 달리 이 장의 이 절과 바로 앞 절은 앞으로 하려는 주장의 배경으로서의 정치적 실패를 설명하기 위해 별도로 자리가 배치되어 있다. 과민한 독해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기서 낸시의 자신의 정신적 유산 중의 가장 큰 부분 중의 하나를 다룬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5. 선배 사상가들에 대한 평가: 도 역시 매우 깔끔하다. 각 사상가를 거부하지도 무작정 계승하지도 않고, 그런 비판적 계승을 각 사상가가 제시한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 모두를 취하는 방식으로 전개하는데(자세한 건 직접 읽어보시길) 놀랍게도 푸코와 아렌트 둘 모두에게 이렇게 동일한 논리적 구조의 틀을 적용하여 그렇게 한다. 말 그대로 똑같다. 이런 것을 보고 있자면 결국 이론의 역할이 이런 것이 아닐까라는 반성의 기회를 얻기도 한다. 말로 혁명을 일으키거나 대체하려는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서 담담히 기계적으로 성실하게 문제를 분석하고 지평을 열어주기. 그리고 이것의 성격의 제한성을 분명히 말하고, 그럼으로써 목적성과 유효성을 분명하게 하기.


   문체의 문제, 이론의 역할(분석이냐 규범이냐), 이론과 현실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런저런 산만한 고민을 하던 차에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적지 않을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좋은 예감을 얻었다. 이 예감을 잘 간직해 놓기 위해서 완결되지 않은 형태고 누구에게 충분히 읽힐만한 형태의 글은 아니지만 감상을 짤막하게 정리해 공개적 공간에 올려놓아 본다. 좋은 책을 추천해주신 구멍 님께 감사드린다.

 전출처 : 아시누스님의 "퍼포먼스로서의 사상사 "

잘 읽었습니다. 저로서는 퍼포먼스로서 사상사를 본다는 것 자체가 많이 신기한 책이었는데요, "문제는 아즈마를 비판하느냐 긍정하느냐가 아니라 사상을 퍼포먼스로 기술하고자 한다면 다른 사상가들에게도 그러한 설명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점이다"라는 지적에 사사키가 충분하지 못한 게 아닌가 생각을 해보게 되었군요.

 
 
 
정치의 발견 -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 
박상훈 지음 / 폴리테이아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박상훈, 『정치의 발견』, 폴리테이아, 2011.

1.
  '최장집'은 한국 사회의 무수한 정치 관련 담론 생산자들 중에서 오롯이 제 위치를 가지는 이름이다. 우선 체계적이고 내적인 정합성을 가진 이론틀을 가지고 있고 이를 사람들에게 저술의 형태로 내놓았다는 점에서 그는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자신의 의견을 총체적인 형태로 가지고 있든 아니든 그러한 형태로 잘 제시하지 않는 정치인과 기자와 구분되는 '정치 이론가'이다.{(아마 이 포스트의 주된 독자일)'이론의 독자'로서 정치인이나 기자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을 개념적으로 정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함부로 비난하는 것은 무례할 뿐만 아니라 둔감한 행동이다. 정치인과 기자에게는 '사상'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상이 존재하는 방식으로서의 언어와 그의 구성이 다를 뿐이다. 이 비이론적인 이론의 존재 방식이나 의미는 매우 재미있고 또 지금 서술에서도 부연되어야 할 필요가 분명히 있는 것이지만 본 포스트의 목적과 논자의 모자람으로 인해 뒤로 미루기로 한다.} 그러면서도 그 이론을 개념적으로 연마하거나 다른 국산/외산 이론과 비교하는 일보다는, 이론을 자신의 문제의식이 촉발되었고 함께 정치적 운명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과 살아가고 있는 장소, '현대 한국사회'에 대한 분석에 적용하거나 기초하거나 반성하는 방식으로 전개했다는 점에서 그는 다른 이론 종사자들과 구분되는 '한국 정치 이론가'이다. 그리고 그 '한국 정치 이론가'들 중에서도 아카데미에 제대로 자리를 잡아 지속적으로 후학을 배출할 여건을 갖춰 이른바 '학풍'까지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그는 '성공한 한국 정치 이론가'이다.{이론의 유효성 역시 성공의 요인 중 하나겠지만 최장집이 정교수가 되지 않았다면 이 정도의 제자들을 길러내고 주목을 받을 수 있었을까? 이론(가)의 사회적 생명은 이론과 무관한 이유 때문에 지속될 수 있으며, 특히 정치적 이유에서든 학술적 이유에서든 이론에 대한 고정적인 수요층이 두텁지 못한 한국같은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이런 사실이 해당 이론을 폄하하는 논거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박상훈은 이 학풍을 대표하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우선 최장집 교수가 있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박사 학위 논문(「한국 지역 정당 체제의 합리적 기초에 관한 연구」, 1999)을 썼으며, 해당 학풍에서 중요시하는 이론가들의 번역서와 최장집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한국 학자들의 저서를 출간하는 출판사 후마니타스의 대표이다. 이러한 박상훈은 그야말로 '최장집의 제자'라는 말을 붙이기에 적합한 사람인데 이론적으로 스승이 제기한 문제틀(한국 사회에서의 민주주의론)을 따르고 있다는 '이론'의 측면에서 수동적으로 그러하고, 또한 자신의 주장뿐만 아니라 스승과 동료의 주장을 출판물의 형태로 보존하며 단순이든 확대든 학풍의 재생산을 도모하게 하는 물적 기초를 제공한다는 '활동'의 측면에서는 (스승이 하지 않았던 것을 한다는 의미에서) 능동적으로 그러하다.

  이런 박상훈이 '정치학 강의'를 내었다면 견적은 이미 어느 정도 나온 셈이다. 본서는 박상훈 개인의 독립적인 견해를 담고 있다기보다는 최장집과 제자들이 현재 정치이론과 한국정치 성찰에 있어서 도달한 잠정적 결론들을 담고 있고, 또 그런 논지들을 알기 쉽게 풀어놓음으로서 이 경향의 이론적 영향력을 보다 확대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좀더 저자로서의 박상훈 개인에게 초점을 맞춰보자면 이 책은 박상훈의 '활동'의 연장선에 놓여 있으며, '지역주의'라는 한국 정치에 고유하진 않지만 특징적인 문제를 다룬 『만들어진 현실』(박상훈, 후마니타스, 2009)과 함께 짝을 이루며 마치 그간 박상훈의 학술적 사회적 삶을 중간결산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을 해당 학풍의 이기적이고 당파적인 확장 욕심의 산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자기가 믿는 무엇이 있고 적절한 반성을 거쳐 이것이 공적으로도 옳거나 유용하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그 무엇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 일반을 어떻게 이기심이라는 좁은 말 안에 다 담을 수 있겠는가? 아니면 우리는 이 책의 주된 논지 중 하나가 제안하듯이 '당파적'이나 '이기적'이라는 말의 정의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 물론 '적절한 반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라고 각자의 입장에서 비판할 수 있겠지만, 그러기에 더더욱 비판을 받아 그 반성이 이번에는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공적인 장에 펼쳐질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갈등과 차이가 제거될 수 없는 '민주주의 사회', 아니 '인간 사회'에서 담론장에서의 당파적인 활동은 그 갈등을 언어의 형식으로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처한 문제 내지는 최소한 '너와 나'의 입장 차이를 공적으로 드러내고 토론의 대상의 삼음으로써 생산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나는 이런 면에 있어 박상훈이나 후마니타스는 '글'로 세계와 관계하고자 하는 이로서 '당파적 이론 활동의 모범'이라 할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내용도 내용이지만 (자신이 믿기에) 올바른 것을 쓰는 것 말고도 읽히려고도 하는 '활동'의 측면에서 그러한 인상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이런 '활동'의 측면과 양상은 이론과 별개의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실천의 제도성을 중요시하는 이론에서 연유하는 것 같기도 한 것 같다.

  나는 이러한 책의 배경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고서 이 책을 '예상 독자'라는 범주를 중심으로 '정치적 의도', 저자가 '의도했을 법한 정치적 효과'의 측면에서 읽어내 보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선입견을 확인하는 것 이외에도 역으로 이를 수정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2절과 3절). 그리고 수정에도 불구하고 저술에 표시할 수밖에 없는 불만들을 짤막하게 제시하는 식으로 서평을 마무리짓고자 한다(4절).


2.
   이 책의 내용은 해당 학풍이 '정치'를 사고함에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들 "정치가", "정치적 실천", "민주주의", "진보파의 맹목적인 정치관"을 해당 학풍이 이 주제들을 고민하는 데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저술들 (각각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 알린스키의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사츠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 셰리 버만의 『정치가 우선한다』)을 요약하며 다루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심플하지만 흥미롭기도 한 구성인데 자신이 믿고 있는 혹은 빚지고 있는 정치학적 조류의 경향을 '전달'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겸손하고 정직한 구성이며, 독자를 추가적인 독서와 구매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친절한 혹은 여러 의미에서 상업적인 구성이다. 의도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책의 구성에서도 박상훈의 출판인-활동가적인 면모가 슬며시 묻어나오는 것만 같다...

  '내용'의 측면으로 돌아가자면 이 책은 그러니까 이중의 요약인 셈인데 해당 저술들에 대한 요약인 동시에 무엇보다도 최장집과 제자들의 문제의식에 대한 요약이다. 따라서 오래전부터 이 학풍의 논지를 차근히 따라온 독자들에게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읽을 이유도 없겠지만, 나와 같이 몇몇 단편적인 기사나 논문, 전해들은 이야기로 이들에 대해서 '대강' 알고 있던 사람이나 아예 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거의 들어본 적이 없지만 정치 문제에 약간의 관심은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훌륭한 견학 기회를 제공해주며 이 책 역시 그러한 독자를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을 위한 민주주의(샤츠슈나이더)"를 지향하는 이 책의 부제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가 아니라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란 곧바로 '진보'라는 특정한 정치적 당파성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게 된다. 그 이유는 보수는 이미 권력을 가지고 있기에 굳이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을 필요가 없으며, 설령 가능성을 찾을 일이 있더라도 후마니타스와 같은 학계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아도 규모나 영향력으로 봐서는 작디작은 출판사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담론적 욕구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매체나 지식인, 연구소를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논지 역시 보편적인 독자에 대한 효과보다는 진보적 성향의 독자에 대한 효과를 중심으로 그 유효성을 평가받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고, 또한 이 책 역시 그러한 독자를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책은 진보적 성향의 현역 또는 희망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한 '정치바로 아카데미'에서의 강의를 기초를 쓰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굳이 이런 책의 배경을 들춰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책의 논지에서 충분히 이 책이 '진보파'를 의도적으로 겨냥하고 있다고 볼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저자가 대놓고 말하는 대목 이외에도 1~4장에 걸쳐 전개되는 메인 테마들을 다룸에 있어 진보파는 항상 '이 중요한 걸 모르는 자'라는 비판과 안타까움의 대상이라는 이론적 배경으로서 등장한다. 진보파는 이에 대해 주로 정당활동으로 포섭될 수 없는 운동들을 무시한 의회지상주의라며 대립각을 세워 왔다.


3.
  이 예상독자에 관한 부분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 책에서 '무지한 자'의 범주는 그 외형적 명료함과 달리 매우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호함은 책의 주논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 작지 않은 혼동을 가져다 주지만 제대로 이해되었을 경우 우린 이 학풍 내지 저자의 이론이 어째서 의회지상주의 이상의 것인지 알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가정하는 "우리"가 누구인지 살펴보자.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이해에 기초한 현실적인 정치가와 활동가의 상을 묘사하고 이를 요청하는 대목인 1장과 2장에서는 "우리"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보다 분명하다. 여기서 저자는 틀림없이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와 변혁에 관심있는 직업정치가나 활동가, 그리고 일반인들을 포괄하는 '진보파'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 책의 부제가 가지고 있는 양의성이 보다 분명해 진다. 이 책은 주로 진보파에 의해서 말해지는 정치(1)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저자가 생각하는 정치(2)에서 가능성을 찾게끔 끌어내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헌데 1장과 2장에서 뚜렷했던 의도와 독자는 논의가 정치적 실천가의 덕목이 아닌 민주주의론 일반을 논하게 되는 3장에 들어가게 되면 모호해지게 된다. 더이상 무지한 자는 '진보파'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일반'으로 확장된다. 1장과 2장에도 그러한 서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만 3장에서는 보다 전면화된다. "민중적인 것, 진보적인 것의 가치만 앞세우면서 현실의 민주주의를 부정하거나 경시"(98쪽)하는 사람들이야 분명하겠지만 "정당은 당리당략이나 일삼는 집단으로 보는 풍토"(같은 쪽)도 그 사람들의 풍토일까? "민주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싸움"에서 '이해해야 할 사람'들은 대체 누구인 걸까? "문제는 시민이 아니라 정치가"(107쪽)라고 말하며 1억8천만명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닌 1억8천만명의 보통 사람들을 위한 반엘리트주의적 민주주의론을 펼치며, 마지막 페이지(174쪽)에서는 "한국 정치의 주변을 박차고 나와 민주주의의 발전에 중심적 기여자"가 될 "진보"를 기대하는 저자를 보면 분명해 보이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를 비판하는 부분들을 헷갈리게 된다. 이런 몰이해에 대한 비판 내지 불평은 마치 저자가 실은 1억8천만명의 아리스토텔레스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품게 만든다. 엘리트주의를 비판하는 엘리트주의라는 이상하고 자기모순적으로 보이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저자는 한편으로는 대중을 신비화하거나 책망하는 무책임한 정치 엘리트들을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의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를 개탄하며 나아가 이를 한국 정치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로 보는 것 같다. 이 두 논의를 모순없이 종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는 알린스키의 대중관에 대한 서술(61~2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저자는 알린스키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열악한 상황을 바꿀 힘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때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 사람들이 조직화되어 변화를 일으킬 힘을 갖게 될 때 그때 그들은 변화의 문제에 부딪히면서 어떻게 변화를 이끌 것인가를 생각하고 질문을 던진다. …… 힘을 위한 도구나 환경을 창조하는 것이야말로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알려고 하는 이유를 갖게 하고 지식을 필요로 하게 만든다."

  이를 고려해 볼 때 위의 모순을 종합하는 서사는 아마 이런 것이 되지 않을까?

'정치 엘리트와 대중 모두의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는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이 부분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으면 해당 학풍의 논지에 대한 심각한 왜곡을 하게 된다)이다. 정치가가 아무리 올바른 민주주의관을 가지더라도 대중의 민주주의 이해도가 낮다면 말짱 꽝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대중의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는 특정한 조건 하에서 변화될 수 있다. 이 변화는 민주주의에 대한 완전한 이해까지 이를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일정한 수준, 즉 대중으로 하여금 전체적이고 결과적으로는 민주주의적 정치 효과를 산출하기 위해 충분한 민주주의적인 개별적/집합적인 정치 결정을 내리거나 그런 결정 과정에 동원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끔(이 표현이 문제적이라면 '형태를 띠게끔')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순간들에 필요한 그 '특정한 조건'이란 바로 1장과 2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핵심인 잘 성장한 정치가의 노력과 그 노력의 실천을 정책적 실현의 측면에서나 지속성의 측면에서나 보장해 줄 수 있는 정당이다.'

  이 즈음에서 우리는 저자에게 있어 보다 대중보다 엘리트의 무지가 우선적으로 비판되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대중의 무지, 정확히 말하자면 불안정성은 직접적으로 교정불가능하나 정당에 소속된 정치가의 활동을 매개로 교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단 정치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 심지어는 이들이 그리도 강조하는 '정당' 역시도 제대로 굴러갈 수가 없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정치가'야말로 저자에게 있어 대중을 정치적 결정으로 이끌어내는 동시에, 정당의 기능을 정상화하며, 민주주의 이론과 구체적인 정치 현실을 연결하는 매개항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의회지상주의라는 일부 좌파의 신경질적인 반응은 솔직히 설득력을 읽을 수밖에 없다. 저자는 베버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묻는다.

"그렇다면 정당이면 다 되는가?
  아니다. 정당에서도 결국 지도자가 중요하다. "지도자와 그 추종자는 모든 정당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기본 요소"이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경우도 "정당이 가진 추상적 강령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에 대한 절대적 개인적 헌신"으로 자신의 역할을 한다. 널리 인정받는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 순간부터 인간은 "명망가들의 허영심과 이해관계에 매몰되거나 당 관료들의 손에서" 놀아나게 된다." (37쪽)

  요약하자면 대강 이런 그림이 될 거 같다. '민주주의 이론은 정치 엘리트를 교육하나 대중을 통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살아있는 인간으로서의 정치가는 대중을 특정한 방향으로 인도하고 동원할 수 있다. 그래서 나님은 올바른 민주주의가 실천되기 위해서, 그리하여 나님이 생각하는 '진보적인 것'이 관철되기 위해서 제대로 된 정치가가 나왔으면 좋겠고 서로 지금 생각은 많이 다르지만 그래도 열정이라도 가진 것은 진보파 님들밖에는 없는 것 같다. 그러니 한 번 내 말 좀 들어다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이 책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논하는 책인 동시에 그 자체가 이미 설득을 목표로 한 "진보파를 위한 전략적 계몽주의"라는 '정치적' 의도를 가진 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4.
  지금까지가 책을 평상시 최장집과 박상훈, 후마니타스에 대한 내 선입견을 갱신하면서 읽으려는 다소 수더분한 시도였다면 이제는 책에 대한 불만을 짤막하게 말해보겠다.

  우선 몰역사성 내지는 좌파를 포함한 대중에 대한 외재적인 접근이 그것이다. 저자는 사람들의 그릇된 정치관을 훈계조로 곧잘 비판하는데 이런 비관 자체가 정치 학습의 모자람이 아닌 정치를 통해 득본 적이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대중의 역사적 경험에 근거한다는 것을 외면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저자가 그런 역사적 경험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가 상층 엘리트의 기획이 아닌 하층의 배제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태어났음을 언급하는 부분(91쪽)과 이어서 한국에서는 그러한 민주주의 학습의 기회를 일제와 미국이라는 외부의 요소에 의해 빼앗겼음을 논하는 부분(93쪽)은 저자가 역사적 맥락에 민감함을 짐작케 해준다. 헌데 어째서 이런 역사적 고찰을 대중을 논하는 부분에서는 일부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무시하는지 모르겠다. 저자 자신이 알린스키를 통해 강조하는 이론을 주입하기보다는 다리를 놓는 식의 실천론을 본인의 서술에서도 실천했더라면 참 좋았지 않을까 싶다.{그리고 몰역사성과 관련해서 셰리 버먼을 활용해 서구 유럽 현대사를 해설하는 대목인 4장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저자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사민주의 세력을 비판하는데 좌파 일반을 사민주의와 크게 구별하지 않는다. 사실 그 당시 사민주의 까는 거야 공산주의 진영에서 천년만년 해오던 거라 저자가 기대하는 좌파 일반에 대한 공격은 잘 성립되지 않는다. 특히 정치적 소극성에 관한 부분은 그렇다. 좌파라면 "그러니까 로자를 죽이지 말고 혁명을..." 식으로 되받아치면 될 일이다. 게다가 나치즘의 등장을 독일의 1차대전 패전과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갈등이라는 이제는 매우 상식적인 역사적 조건을 고려치 않고 그저 사민주의의 실패에서만 찾는 것은 황당하다. 나아가 여기에서 좌파의 반정치성의 정치적 해악이라는 일반적 결론으로 나아가는데 내가 알기로는 전후 유럽사에서 공산주의의 외양적 급진성은 성숙한 민주주의의 사례로 손꼽이곤 하는 사민주의 질서의 성립에 환원불가능한 기여를 하였다. 나는 셰리 버먼의 책이 이런 측면을 다루어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만약 박상훈이 하는 것처럼 제한된 시기의 역사적 실패를 좌파 일반의 문제에 끼워맞추는 그런 불성실한 책이라면 구매를 재고해 봐야겠다...}

  좌파에 대한 서술에서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자꾸 좌파를 인간의 문제에 관심이 없고 이념의 문제에 미친 사람들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김문수의 전향에 대한 코멘트(56~57쪽)에서 뚜렷히 드러난다. 그는 김문수의 문제를 사회주의의 신념을 지키지 못했다는 데에서가 아니라 애당초 처음부터 가난한 보통 사람들을 위한 투쟁이 아닌 이름뿐인 이념에 매몰되었다는 데에서 찾는데, 여기서 우리는 저자가 이상에 대한 헌신과 인간에 대한 헌신을 칼같이 분리해 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이 둘을 어떻게 그렇게 무자르듯 나눌 수 있겠는가. 자기가 -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모두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일까? 비록 개인이 저자가 칭송하는 알린스키처럼 정치적 실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이념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이라고 반성된 형태로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비정치적인 성공의 길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어느 정도 인간에 대한 애정이 전제되어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 사랑의 방식이 괴팍해 보일 수는 있다는 점과 그게 교정되어야 한다는 점은 말해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저 사람에게 사랑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편의적인 사고방식이다.

  마지막으로 정치의 조건, 규정성에 대한 충분하지 못한 강조를 들 수 있겠다. 저자는 일단 이 저술에서는 제대로 된 정치가의 부재를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로 규정했지만 전문적인 정치가가 등장하기 힘든 척박한 정치계의 물적 풍토나 또 진보적 정치가가 온전히 활동을 펼치기 힘든 현실적 조건들을 역사적이든 현재적이든 뚜렷히 보여주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자와 저자가 속한 학풍이 이에 대해 둔감한 것은 절대 아니고 그 역이라는 것은 후마니타스의 다른 출판 목록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후마니타스라고 최장집과 사츠슈나이더를 경전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열심히 읽었기에 한국 사회 지배 구조에 대한 분석부터 노동자 수기에 최근에는 문학까지 이르는 책을 다양하게 내는 것이기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는 한국 정치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 책의 예상 독자와 그들에 대해 품었을 법한 '전략적 의도' 역시 이에 대한 서술을 부연하지 않은 이유가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님들, 이런 건 잘 알잖슴까..." 그렇지만 그래도 다리를 놓으려면, 그리고 정치에 대해 좀더 '현실적'으로 접근하긴 위해서는 한 소절이라도 이에 대한 주의를 표했어야 하는 게 '정치학 강의'라면 맞지 않았을까? 아니면 저자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치도 않는 정치의 종속성에 대해 내가 너무 호의적인 평을 해주는 것일까?
  다음과 같은 구절은 의심을 더해주는 데에서 나아가 황당한 심정도 들게끔 한다. "정치에서의 비극은 돈 때문이 아니라 돈의 위력에 압도되어 늘 변명을 찾는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168쪽) 정치인을 자본의 꼭두각시로만 보는 맑스주의적 정치인관(?)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해하겠다만 그렇다고 정치인의 당당함만으로 자본에 대한 경제적 종속이라는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저자는 생각하는 것일까? 138쪽에 나오는 경제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역시 굳이 없어도 되었을 부분이다. 경제의 규정성을 말하는 것이 무조건 경제 환원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경제 결정론이란 둘 중 어느 항을 긍정하든 이렇듯 정치와 경제의 관계를 무시하는 것일 수 있다.
  이 모든 물음은 저자가 정치의 가능성과 조건 사이의 관계에 대해 적극적인 해명을 했을 때에나 속시원하게 풀릴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