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29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스또예프스키의 장편 소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엄청난 분량의 대작이다. 도스또예프스키 40년 문학 인생의 집결체이며, 그가 생애의 마지막 3년(1878~1880) 동안 혼신을 다해 집필한 결정체다. 그는 이 소설을 완성하고 삼 개월 뒤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많은 지식인은 이 소설을 읽기 위한 다양한 방향타를 제시해왔다. 프로이트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이론을 증명할 텍스트로서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선택했다. 그는 자신의 이론에 맞춰 텍스트를 분석하면서, 이론적 근거들을 마련해냈다.


다방면의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이 작품이 포괄하고 있는 내용이 다양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은 누구에게는 훌륭한 심리소설로, 누구에게는 민중의 삶을 그린 사실주의 소설로, 누구에게는 신과 악마의 이야기를 다룬 종교소설로, 누구에게는 인간의 본질을 성찰하는 철학적 소설로 읽힐 것이다. 어쩌면 그저 긴박감이 넘치는 추리소설로 읽힐 수도 있겠다.


나의 경우엔 '까라마조프 적' 인간이라는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아버지 표도르와 세 아들 드미뜨리, 이반, 알료사를 포괄하는 '까라마조프'라는 성은 소설 속에 일반명사처럼 자주 등장한다. 이후 해설을 통해 까라마조프Karamazov란 본래 <검다>를 의미하는 중앙아시아 어의 <하라hara>와 <바르다>란 의미의 러시아어 <마자찌mazat'>의 결합어라는 것을 알았다. 즉 이 단어는 선과 악으로 뒤범벅된 인간을 표현하는 도스또예프스키 적 표현인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엔 신도 악마도 존재한다. 신이 인간이 만들어낸 창조물이라면, 그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가령 개나 돼지는 절대 선으로서의 신을 창조해낼 수 없다. 그들은 아낌없이 내어주고 자신을 희생하며 욕망을 절제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그들은 인간만큼 잔인하지 못하다. 인간은 필요하지 않더라도 즐거움을 위해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 그저 목숨을 끊는 것이 아니라 살갗을 벗기고 손가락을 잘라내며 죽음에 다다르는 여운을 즐기기도 한다. 그런즉, 개나 돼지는 악마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신과 악마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절대 선이고 절대 악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둘 다 우리의 한 단면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까라마조프 적 인간들이다. 드미뜨리 같은 경우엔 어릴 적 게르쩬쉬뚜베가 건넨 호두 한 줌의 고마움을 평생 간직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공공연히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떠벌리고 다닌다. 이반 같은 경우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는 냉철하고 사리에 밝은 인간이다. 그리고 마음 한 편으론 드미뜨리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여버리길 원한다. 이 '내적' 친부 살인은 소설을 이끌어가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 속의 알로샤는 특이한 인물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까라마조프 가문의 피를 물려받았음에도 스스로 절제하고 수양하며, 스스로 수도사의 길로 들어선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드미뜨리와 이반뿐만 아니라 소설 속 많은 인물이 알료사에게 마음을 기대고 그에게서 허락을 받고, 도움을 받길 원한다.


기본적으로 소설은 애정과 욕망에 관련된 이야기다. 아버지 표도르를 비롯한 밑의 두 아들이 품은 연정은 복잡하게 뒤얽힌다. 드미뜨리는 자신의 선행으로 말미암아 까쩨리나를 약혼자로 맞이하게 되지만, 이후 불량한 여자인 그루셴까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표도르는 이미 죽은 드미뜨리의 엄마가 남긴 유산을 바탕으로 그루셴까를 꼬셔보려 호시탐탐 노린다. 이반은 마음속으로 까쩨리나에 대한 연모를 품는다. 두 여자를 놓고 얽혀버린 세 남자의 애욕은 그 자체로 파국에 이른다.


하지만 결국 이 소설이 그 복잡한 연애 문제 속에서 끄집어내고자 한 것은 그 속에 감춰져 있는 인물 면면의 내면이다. 도스또예프스키의 소설을 읽으며 놀랐던 점은, 그 내면을 속속들이 파헤쳐 치밀하게 늘어놓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물들은 스스로의 마음에 대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린다. 자신의 마음조차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지 않은가. 그 주체 없이 흔들리고 튀어 오르는 마음의 가지들을 한가닥 한가닥 정리하여 풀어놓는 도스또예프스키의 능력은 대단하다. 많은 철학가나 심리학자들이 도스또예프스키의 소설을 탐닉하는 이유는 그가 인간에 대해 깊이 분석하고, 탐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은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고, 소설가는 인간을 연구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도스또예프스키는 훌륭하고도 모범적인 소설가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