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Q정전 문학동네 루쉰 판화 작품집
루쉰 지음, 이욱연 옮김, 자오옌녠 판화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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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정말 가깝고도 먼 나라다. 이젠 생활 속에서 중국제 아닌 것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중국은 우리의 삶에 깊이 침투해 있다. 역사적으로도 우리는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지속해서 유지해왔고, 문화적도으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다. 하지만 현대 문학의 경우 중국과의 교류가 전무하다. 특히 그것은 일본과 비교해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물론 그것은 현대 중국 작가의 대부분이 당 밑에서 검열을 받으며 글을 쓰기 때문이기도 하다. 근래엔 인터넷 붐을 타고 다양한 작품들이 양산되고 있다곤 하지만 아직 그 여파는 미치지 않고 있는 듯하다.

국내에 소개된 중국 작가가 적진 않다. '사람아, 아, 사람아'의 작가 다이허우잉, 허삼관매혈기의 작가 '위화' 등 유명세를 탄 작가도 있다. 하지만 아직 대중에겐 낯선 이름들이다. 루쉰의 '아Q정전'도 마찬가지다. 중국 근대문학의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되는 이 작품은 희한하게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와 더불어 알려진 부분도 있지 않나 싶다. 하여튼,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첫 감정은 낯섦이었다. 근방에 있는 나라의 문학임에도, 오히려 유럽 문학보다 어색함을 느꼈던 것은 이들의 문학에 무지한 탓도 클 테고,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상에 무지한 탓도 클 것이다.

나는 이 작품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읽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거라면 책 날개와 뒤표지에 적힌 소갯글이 전부였다. 그런 상황에서 주인공 아Q의 행동은 기이한 불편함을 안겨줬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불편함은 주인공이 가져야 하는 대표성에 대한 부분이었다. 아무래도 대부분의 문학 작품들이 그렇듯 작품의 주인공은 작가의 사상을 대표하기 마련이고, 작가가 으뜸으로 치는 인간형을 표본으로 삼곤 한다. 이 부분을 적나라하게 꼬집은 것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절망'이 아닐까 싶다. 독자는 작가가 주인공으로 내세운 화자에게서 어떤 진실성을, 교훈성을 발견하길 원한다. 하지만 내가 본 아Q의 행동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얼핏 보기엔 아Q의 삶은 나쁘지 않아 보인다. 나름대로 논어의 구절들을 운운해가며 이야기하는 품새도 그렇거니와, 날품팔이를하는 주제에 자신을 고용하는 이들과 자신을 동등한 위치로 시선도 당당하다. 게다가 힘센 이가 자신을 때리면 '제까짓 것들이'라며 그들을 깔보거나, 아니면 '나는 그냥 버러지일 뿐이다.'라며 자신을 낮춰 모멸감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을 똑같이 괴롭힌다. 이런 삶을 쉽게 말해 '정신 승리'라고 칭할 수 있겠다. 자신의 상황이 어떠하던 생각하는 방향에 따라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을 읽는 내내 기분이 찜찜했다. 그럴 듯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노예근성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었다.

글을 읽어나가며 이러한 불편함을 루쉰이 의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쉰은 아Q를 통해 자신의 사상이나, 올바른 삶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당시 중국 민중의 보편성을 표현해내고자 했던 것이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반항하지 않는 삶. 그리고 반복되는 모욕과 폭력을 금세 잊어버리고 백치처럼 살아가는 삶을 루쉰은 아Q라는 인물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아Q가 이름도 제대로 없고, 어떤 인물인지도 확실치 않은 것이 그렇다. 그는 중국 민중 대다수를 대표하는 인물인 셈이다.

루쉰은 이렇게 당시 중국인들의 어리석음을 꼬집으면서도 한편으론 허울뿐인 혁명을 그려낸다. 소설이 배경이 되는 시기는 신해혁명이 일어났던 때다. 황제를 폐위시키고 공화정을 세운 이 혁명은 중국 역사상 중요한 코드로 읽힌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혁명은 어딘가에서 들리는 풍문일 뿐이다. 누군가가 목이 잘려 죽었다는 소문은 들리지만, 혁명군이 성 내에 들어왔다는 소문은 들리지만 마을에선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지방의 유지였던 인물들이 혁명군에 가담하여 한 자리씩 거머쥔다.

혁명에 가담코자 하는 이들의 자세 또한 문제의식이 결여된 모습이다. 아Q는 혁명에 참여하려 하지만, 그 이유는 단지 혁명군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우러러봐 주고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혁명에 대한 어떤 내적 동기도 신념도 성찰도 없는 채, 그저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혁명군에 가담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혁명군엔 이전에 권력을 잡았던 사람들만이 가득하고 아Q는 여전히 그 집단에 들어가지 못한다. 아Q의 삶은 이전과 다를 바 없다.

루쉰은 이 이야기를 통해 사회에 대한 저항의식이 결여된 대중의 인물상, 그리고 그런 인물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일어난 이름뿐인 혁명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진정한 혁명이란 혁명주체들이 분명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사회에 대한 통렬한 성찰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과정을 통해 거머쥔 혁명이야말로 순기능 할 수 있는 것이다. 소설을 읽으며 내내 불편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지만, 어쩌면 그것은 루쉰이 아Q를 통해 우리의 내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소설을 통해 나 자신이 아닌,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인물을 보며 꿈을 꾸고 싶을 뿐이 아닌가. 거울을 보며 자신의 추한 모습을 반추하는 것은 괴로운 일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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