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29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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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예프스키의 장편 소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엄청난 분량의 대작이다. 도스또예프스키 40년 문학 인생의 집결체이며, 그가 생애의 마지막 3년(1878~1880) 동안 혼신을 다해 집필한 결정체다. 그는 이 소설을 완성하고 삼 개월 뒤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많은 지식인은 이 소설을 읽기 위한 다양한 방향타를 제시해왔다. 프로이트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이론을 증명할 텍스트로서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선택했다. 그는 자신의 이론에 맞춰 텍스트를 분석하면서, 이론적 근거들을 마련해냈다.


다방면의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이 작품이 포괄하고 있는 내용이 다양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은 누구에게는 훌륭한 심리소설로, 누구에게는 민중의 삶을 그린 사실주의 소설로, 누구에게는 신과 악마의 이야기를 다룬 종교소설로, 누구에게는 인간의 본질을 성찰하는 철학적 소설로 읽힐 것이다. 어쩌면 그저 긴박감이 넘치는 추리소설로 읽힐 수도 있겠다.


나의 경우엔 '까라마조프 적' 인간이라는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아버지 표도르와 세 아들 드미뜨리, 이반, 알료사를 포괄하는 '까라마조프'라는 성은 소설 속에 일반명사처럼 자주 등장한다. 이후 해설을 통해 까라마조프Karamazov란 본래 <검다>를 의미하는 중앙아시아 어의 <하라hara>와 <바르다>란 의미의 러시아어 <마자찌mazat'>의 결합어라는 것을 알았다. 즉 이 단어는 선과 악으로 뒤범벅된 인간을 표현하는 도스또예프스키 적 표현인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엔 신도 악마도 존재한다. 신이 인간이 만들어낸 창조물이라면, 그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가령 개나 돼지는 절대 선으로서의 신을 창조해낼 수 없다. 그들은 아낌없이 내어주고 자신을 희생하며 욕망을 절제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그들은 인간만큼 잔인하지 못하다. 인간은 필요하지 않더라도 즐거움을 위해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 그저 목숨을 끊는 것이 아니라 살갗을 벗기고 손가락을 잘라내며 죽음에 다다르는 여운을 즐기기도 한다. 그런즉, 개나 돼지는 악마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신과 악마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절대 선이고 절대 악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둘 다 우리의 한 단면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까라마조프 적 인간들이다. 드미뜨리 같은 경우엔 어릴 적 게르쩬쉬뚜베가 건넨 호두 한 줌의 고마움을 평생 간직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공공연히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떠벌리고 다닌다. 이반 같은 경우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는 냉철하고 사리에 밝은 인간이다. 그리고 마음 한 편으론 드미뜨리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여버리길 원한다. 이 '내적' 친부 살인은 소설을 이끌어가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 속의 알로샤는 특이한 인물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까라마조프 가문의 피를 물려받았음에도 스스로 절제하고 수양하며, 스스로 수도사의 길로 들어선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드미뜨리와 이반뿐만 아니라 소설 속 많은 인물이 알료사에게 마음을 기대고 그에게서 허락을 받고, 도움을 받길 원한다.


기본적으로 소설은 애정과 욕망에 관련된 이야기다. 아버지 표도르를 비롯한 밑의 두 아들이 품은 연정은 복잡하게 뒤얽힌다. 드미뜨리는 자신의 선행으로 말미암아 까쩨리나를 약혼자로 맞이하게 되지만, 이후 불량한 여자인 그루셴까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표도르는 이미 죽은 드미뜨리의 엄마가 남긴 유산을 바탕으로 그루셴까를 꼬셔보려 호시탐탐 노린다. 이반은 마음속으로 까쩨리나에 대한 연모를 품는다. 두 여자를 놓고 얽혀버린 세 남자의 애욕은 그 자체로 파국에 이른다.


하지만 결국 이 소설이 그 복잡한 연애 문제 속에서 끄집어내고자 한 것은 그 속에 감춰져 있는 인물 면면의 내면이다. 도스또예프스키의 소설을 읽으며 놀랐던 점은, 그 내면을 속속들이 파헤쳐 치밀하게 늘어놓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물들은 스스로의 마음에 대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린다. 자신의 마음조차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지 않은가. 그 주체 없이 흔들리고 튀어 오르는 마음의 가지들을 한가닥 한가닥 정리하여 풀어놓는 도스또예프스키의 능력은 대단하다. 많은 철학가나 심리학자들이 도스또예프스키의 소설을 탐닉하는 이유는 그가 인간에 대해 깊이 분석하고, 탐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은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고, 소설가는 인간을 연구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도스또예프스키는 훌륭하고도 모범적인 소설가였다.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 김경욱 소설집
김경욱 지음 / 창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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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에 수록된 김경욱의 소설들은 언뜻 보면 하층민들의 곡진한 삶을 그리는 듯하다.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에 등장하는 소녀의 아픔과, 그녀의 복수를 이루기 위해 계획을 세우는 사내의 모습이 그렇다. 비장한 각오로 사내가 복수에 성공했음에도 세상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직업까지 잃어가며 행한 복수의 끝엔 허무함만이 남을 뿐이었다.


'러닝맨'에 등장하는 남자는 또 어떤가. 은재라는 아이의 한국어 과외를 하는 '나'는 은재와 한강에서 한낮의 데이트를 즐긴다. 강 건너에는 '찍어낸 듯 엇비슷한 아파트가 성벽처럼 죽 늘어서 있다.'(p.52) 그곳엔 은재의 집이 있는데 이 짧은 묘사는 은재와 나의 거리감을 확연히 보여준다. 나는 최종면접에서 열한번째 고배를 마시고, 할 일 없이 집에서 제 물건이나 조물락 거리는 남자인 것이다. 그런 남자가 강변의 사내들과 자신을 끝없이 쫓는 런닝맨에게서 도망쳐 오리배에 올라타 강 건너로 하염없이 페달을 밟는 장면은 그러므로 상징적이다.


'러닝맨'의 남자는 누군가에게 쫓겨 해자를 건너지만, 사실 사람들은 누구나 1%가 되길 원한다. 이 심리를 파고든 단편 99%에는 회사에 혜성처럼 등장한 스티브 킴과 그의 과거를 파헤치려 하는 '나'가 등장한다. 스티브 킴과 자신이 어릴 적 알고 지내던 친구가 동일 인물이라 생각하는 '나'는 스티브 킴의 치부를 드러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사실 그것이 밝혀진다 하더라도 스티브 킴이 회사에서 인정받는 실력까지 거짓이라 말할 수 없음에도 나는 치열하다. 어쩌면 그것은 스티브 킴의 옆자리에 자신을 슬쩍 편승시키고 싶은 욕망 때문인지도 모른다.


'태양이 뜨지 않는 나라'는 낮엔 잠을 자고 밤엔 일을 하는 등장인물들이 등장한다. 주유소에서 일을 하는 나와 경비소에서 일을 하는 아버지. 그들의 세상은 낮이 밤이다. 그들의 일상은 매일 같이 반복되고, 일자리에서도 하염없이 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그것들은 이미 소통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그저 버티기 위한 일일 뿐이다. 이처럼 김경욱의 소설들에선 고달픈 하층민들의 삶이 드러나는데 그 삶들은 영원히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된다. 그들은 결국 그러한 삶을 지난하게 반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작가는 그저 이런 기구한 삶을 고발하고, 모사하고 싶었을 뿐일까. '태양이 뜨지 않는 나라'를 읽을 때 나는 한 단어가 가슴이 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사랑해"(p.205) '나'는 앵무새에게 이런 대사를 한다. 말이 없는 새에게 고백하듯 중얼거리는 이 대사는 김경욱이 결국 자신의 소설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말을 아낀다. '연애의 여왕'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울음이 여자친구만의 언어였다면 침묵은 나만의 언어였다.'(p.182) 주인공은 여자친구가 선을 보겠다고 할 때도, 결혼을 하겠다고 할 때도 침묵했다. '혁명 기념일'에 등장하는 주인공 또한 그렇다. 사귄지 육년이 된 남자친구와 주인공은 결혼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 그와의 관계는 친구처럼 편할 뿐이다. 그런 그녀는 남자친구가 탔을지도 모르는 비행기의 납치소식을 듣고, 그에게 해야 할 말을 뒤늦게야 떠올린다. 그것은 '진부하지만 이제껏 누구에게도 건넨 적 없는 진실의 불씨, 듣기만을 바랐을 뿐 단 한 번도 들려준 적 없는 그 흔한 말'이었다.(p.253) '연애의 여왕' 또한 차를 돌려 연애의 여왕에게 돌아간 주인공이 여자친구에게 줄 싸인을 받으며 끝난다.


다시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로 돌아가 볼까. 사내와 계집의 삶은 피폐하고 곤궁하다. 사내의 복수는 세상에 어떤 족적도 남기지 못했고, 크리스마스는 어김없이 왔다. 사내는 직업마저 잃었으니 오히려 그들의 삶은 더 괴로워졌을 것이다. 게다가 사내는 눈마저 어두워져 간다. 소설은 사내가 계집에게 노래를 불러 주며 끝나는데 이는 사내의 한없는 사랑을 보여준다. 이는 끝없이 하느님을 기도로써 찾으며 그의 뜻을 따르려 했던 사내가 결국 사랑을 통해 스스로 초인이 되어가는 모습이 아닌가. 그 때가 크리스마스라는 점 또한 뜻깊다.


'하인리히의 심장'에 나오는 두 시체는 가슴이 타서 죽었다. 어떠한 연결점도 찾기 힘든 두 남녀가 가슴이 타서 죽었다. 이 미스터리한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 채미정의 약혼자는 프라하로 떠난다. 결혼하거나 헤어지거나 하자는 채미정의 말에 대한 답변이었다. '사랑이라는 단어 없이는 단 한 편의 시도 완성하지 못하면서'(p.139) 그는 그 한마디를 입에 담지 못하고 그녀를 떠나간다. 결국은 사랑이다. 진부할 수도 있는 사회고발 스타일의 소설을 쓰면서도 그의 소설이 빛나는 것은 그 속에 빛나는 사랑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 별이 땅에 꽃이 피는 것처럼 사람의 가슴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두 도시 이야기 펭귄클래식 135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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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이 '다크나이트 라이즈'를 구상할 때 영감을 받은 작품이라 밝혀 얻은 호기심. 얼마 전에 국내에서 공연하기 시작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두 도시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이 얽혀 이 소설을 집어들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150년 전의 소설이라는 것이 두렵긴 했다. 현대 소설에 비해 지루한 플롯과 장황한 서사가 기다릴 것이라는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루한 소설일 거란 불안은 기우였다. 주 단위로 연재된 소설이라 그런지 에피소드가 굉장히 타이트하고 이야기가 속도감 있게 진행됐다. 거기에 대단히 효율적인 인물 배치가 돋보였다. 이런 류의 전지적 작가시점은 실로 오랜만에 보았다. 화자가 작가로서 소설 속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의 목소리를 내는데, 처음엔 약간 거북했던 이 어투가 나중엔 소설을 이끌어가는 감칠맛 중의 하나로 사용되더라.


화자는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역량을 십분 발휘한다. 이것이 두드러지는 것은 '감추기'인데, 작가는 어떤 인물의 정체를 의도적으로 가리고 나중에 '짜잔' 등장 시킴으로서 독자에게 약간의 충격과 대단한 흥미를 유발하는 기술을 때때로 사용한다. 덕분에 소설이 지루해질 틈이 없는데, 앞서 스치듯 지나간 케릭터들이 나중에 중요한 인물로 재등장하면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환기되고 앞 내용을 상기하게 되면서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더라.


역시 이 소설의 백미는 인민재판 과정이다. 이는 '다크나이트 라이즈'에도 훌륭히 차용되어 있다. 가난한 시민들과 부유한 귀족들의 상황이 역전되어, 시민들이 귀족들을 재판하는 모습은 광기에 가득 차 있다. 오랜 세월동안 그들에게 핍박당하고 괴롭힘 당해온 시민들의 아픔은 파리 전체를 광란의 도가니로 이끌고, 모든 귀족들은 프랑스 혁명의 획기적 발명품 기요틴에 의해 일 분에 한 명 꼴로 목이 잘린다. 프랑스 혁명은 분명 세계 역사에서 한 지점을 차지한 민주주의 혁명의 대표이고, 그 의의는 뜻깊지만 혁명이 행해졌을 당시 프랑스의 분위기는 소설 속에 그려지듯이 참담할 따름이었다.


소설은 개인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처절한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개인 서사로서 한 시대를 그리는 소설의 방식은 오래된 작품임에도 대단히 세련되다. 극적 구성을 극대화시키는 구성 방식이나 빠른 서사 전개, 그리고 치밀하게 구축된 복선과 반전은 이 소설의 매력을 부각시킨다. 현대 서사에 뒤지지 않는 뛰어난 이야기는 고전으로서 이 소설의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놀라운 소설이다. 일독을 권하고 싶다.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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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을 읽었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생각만 하면서도 끝내 집지는 못했던 그의 소설들을 맘먹고 읽기 시작했다. 읽기 전에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미니멀리즘이라느니 담담한 문체라느니 여운이 길다느니. 어떤 소설일까 궁금했고, 우리 문학계의 단편들과는 많이 다르대서 또 기대했다.


첫 느낌은 낯섦이다. 생전 처음 보는 생경한 느낌의 소설을 대면한 듯했다. 지금껏 한국 문학으로 축적해온 단편소설의 규범이 깡그리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치밀한 상징, 복선, 어떤 치부를 찌르는 '문학적 대사', 서술, 인위적 과정이나 기법 따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카버의 소설엔 일상의 어느 부분이 고스란히 모사되어 있을 뿐이었다.


어떤 식으로 그의 소설을 받아들여야할지 혼란스러운 가운데 책을 덮었다. 이런 느낌을 언제 받았더라. 그래, 안톤 체호프의 단편을 읽었을 때 받았던 느낌들과 비슷했다. 허무했고, 아쉬운 느낌. 벌써 소설이 끝났느냐는 아쉬움, 다른 이야기는 없냐는 허무함. 쉬운 낙관과 회복은 복잡다단한 플롯과 끝간데 없이 밀어닥치는 과도한 긴장감으로 점철된 소설들만 읽어 온 나에게 허탈감마저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런 게 삶임을,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이 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는 아들을 잃은 부모가 나온다. 빵집 주인은 생일 케잌을 찾아가지 않는 부부에게 계속 전화를 걸고, 부부는 아들 일은 잊은 거냐며 독촉하는 낯선 이에게 분노를 느낀다. 그게 빵집 주인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부부는 빵집으로 쳐들어간다. 그리고 제빵사는 그들을 다독여 앉혀놓고는 자신이 막 만든 빵들을 내어 놓는다.


"내가 갓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141페이지.


그리고 부부는 제빵사의 고충을 이해하고, 제빵사는 부부의 아픔을 생각하며 둘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한다. 이 회복의 플롯은 소설 전반을 지배한다. 카버의 소설은 이렇다. 서로를 이해하는 데 어떤 대단한 사건이나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가. 그건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일이다. 어쩌면 그래서 이 소설을 나에게 추천해준 몇몇의 지인이 카버의 문장이 담담하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카버의 소설이 여운이 깊은 것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그는 어떤 것도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어떤 삶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목적의식이 결여된 소설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소설 속에서 작가가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확고한 주제의식을 포착해내려 한다. 하지만 카버의 소설엔 그런 것이 없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하지만 그가 들려주는 단면엔 어떤 사색들이,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우리를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표제작인 '대성당'은 주인공이 맹인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만 맹인을 접하던 주인공은 처음으로 맹인을 대면한다. 그것도 자신의 집에서. 카버는 두 인물이 소통하는 과정을 대성당을 그리는 작업을 통해 표현해낸다. 주인공은 펜으로 큰 종이에 대성당을 그리고 맹인은 그 손을 따라 대성당의 모양을 쫓는다. 그 작업에 불만을 갖던 주인공은 이내 빠져든다. 마지막엔 눈까지 감고 종이에 움푹 페인 펜자국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인다. 그는 맹인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러한 장면들에서 작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들은 느낄 수 있다, 두 인물이 이루어내는 깊은 곳으로부터의 대화를. 카버의 단편들이 명작이라 불리는 까닭이다.



 
 
 
아Q정전 문학동네 루쉰 판화 작품집
루쉰 지음, 이욱연 옮김, 자오옌녠 판화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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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정말 가깝고도 먼 나라다. 이젠 생활 속에서 중국제 아닌 것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중국은 우리의 삶에 깊이 침투해 있다. 역사적으로도 우리는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지속해서 유지해왔고, 문화적도으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다. 하지만 현대 문학의 경우 중국과의 교류가 전무하다. 특히 그것은 일본과 비교해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물론 그것은 현대 중국 작가의 대부분이 당 밑에서 검열을 받으며 글을 쓰기 때문이기도 하다. 근래엔 인터넷 붐을 타고 다양한 작품들이 양산되고 있다곤 하지만 아직 그 여파는 미치지 않고 있는 듯하다.

국내에 소개된 중국 작가가 적진 않다. '사람아, 아, 사람아'의 작가 다이허우잉, 허삼관매혈기의 작가 '위화' 등 유명세를 탄 작가도 있다. 하지만 아직 대중에겐 낯선 이름들이다. 루쉰의 '아Q정전'도 마찬가지다. 중국 근대문학의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되는 이 작품은 희한하게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와 더불어 알려진 부분도 있지 않나 싶다. 하여튼,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첫 감정은 낯섦이었다. 근방에 있는 나라의 문학임에도, 오히려 유럽 문학보다 어색함을 느꼈던 것은 이들의 문학에 무지한 탓도 클 테고,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상에 무지한 탓도 클 것이다.

나는 이 작품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읽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거라면 책 날개와 뒤표지에 적힌 소갯글이 전부였다. 그런 상황에서 주인공 아Q의 행동은 기이한 불편함을 안겨줬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불편함은 주인공이 가져야 하는 대표성에 대한 부분이었다. 아무래도 대부분의 문학 작품들이 그렇듯 작품의 주인공은 작가의 사상을 대표하기 마련이고, 작가가 으뜸으로 치는 인간형을 표본으로 삼곤 한다. 이 부분을 적나라하게 꼬집은 것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절망'이 아닐까 싶다. 독자는 작가가 주인공으로 내세운 화자에게서 어떤 진실성을, 교훈성을 발견하길 원한다. 하지만 내가 본 아Q의 행동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얼핏 보기엔 아Q의 삶은 나쁘지 않아 보인다. 나름대로 논어의 구절들을 운운해가며 이야기하는 품새도 그렇거니와, 날품팔이를하는 주제에 자신을 고용하는 이들과 자신을 동등한 위치로 시선도 당당하다. 게다가 힘센 이가 자신을 때리면 '제까짓 것들이'라며 그들을 깔보거나, 아니면 '나는 그냥 버러지일 뿐이다.'라며 자신을 낮춰 모멸감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을 똑같이 괴롭힌다. 이런 삶을 쉽게 말해 '정신 승리'라고 칭할 수 있겠다. 자신의 상황이 어떠하던 생각하는 방향에 따라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을 읽는 내내 기분이 찜찜했다. 그럴 듯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노예근성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었다.

글을 읽어나가며 이러한 불편함을 루쉰이 의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쉰은 아Q를 통해 자신의 사상이나, 올바른 삶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당시 중국 민중의 보편성을 표현해내고자 했던 것이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반항하지 않는 삶. 그리고 반복되는 모욕과 폭력을 금세 잊어버리고 백치처럼 살아가는 삶을 루쉰은 아Q라는 인물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아Q가 이름도 제대로 없고, 어떤 인물인지도 확실치 않은 것이 그렇다. 그는 중국 민중 대다수를 대표하는 인물인 셈이다.

루쉰은 이렇게 당시 중국인들의 어리석음을 꼬집으면서도 한편으론 허울뿐인 혁명을 그려낸다. 소설이 배경이 되는 시기는 신해혁명이 일어났던 때다. 황제를 폐위시키고 공화정을 세운 이 혁명은 중국 역사상 중요한 코드로 읽힌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혁명은 어딘가에서 들리는 풍문일 뿐이다. 누군가가 목이 잘려 죽었다는 소문은 들리지만, 혁명군이 성 내에 들어왔다는 소문은 들리지만 마을에선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지방의 유지였던 인물들이 혁명군에 가담하여 한 자리씩 거머쥔다.

혁명에 가담코자 하는 이들의 자세 또한 문제의식이 결여된 모습이다. 아Q는 혁명에 참여하려 하지만, 그 이유는 단지 혁명군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우러러봐 주고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혁명에 대한 어떤 내적 동기도 신념도 성찰도 없는 채, 그저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혁명군에 가담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혁명군엔 이전에 권력을 잡았던 사람들만이 가득하고 아Q는 여전히 그 집단에 들어가지 못한다. 아Q의 삶은 이전과 다를 바 없다.

루쉰은 이 이야기를 통해 사회에 대한 저항의식이 결여된 대중의 인물상, 그리고 그런 인물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일어난 이름뿐인 혁명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진정한 혁명이란 혁명주체들이 분명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사회에 대한 통렬한 성찰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과정을 통해 거머쥔 혁명이야말로 순기능 할 수 있는 것이다. 소설을 읽으며 내내 불편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지만, 어쩌면 그것은 루쉰이 아Q를 통해 우리의 내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소설을 통해 나 자신이 아닌,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인물을 보며 꿈을 꾸고 싶을 뿐이 아닌가. 거울을 보며 자신의 추한 모습을 반추하는 것은 괴로운 일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