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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출판사 분들과 만나면 서로 씩 웃을 때가 있습니다. 말없이 눈빛으로 대강 이런 대화가 오갑니다.

'이거 좋은 책 같은데요' '네 그렇죠. 근데 잘 안 팔리겠죠?' '네 뭐 아쉽죠..' 씨익.

담당하고 있는 분야들에 진열해 놓은 책들을 바꿀 때가 되면 늘 갈등에 휩싸입니다. 꼭 한두 번은 개인적으로 좀 더 밀고 싶은 책과 아무래도 좀 더 팔릴 듯한 책이 맞서곤 하지요. 이런 딜레마까지 일종의 즐거움으로 생각한다면야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합니다만...

마침 이번 주는 우격다짐으로 밀어보는 책들이 두 분야의 메인 도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들은 예의 그 눈빛을 교환한 책들이에요., 아마 이 상자에 들어가 있어도 별로 어색하지 않을 겁니다. ㅎㅎ 

 

예수의 독설

-개인적으로 접할 때마다 감탄하지만, 어째서인지 꾸준하게 파고들지 못해서 아쉬운 분야가  민중신학입니다. 거기서는 하늘을 바라볼 여유조차 없는 사람들을 위해 땅으로 내려오신 분에 대해 얘기하지요. 존경은 커녕 온갖 조롱의 대상으로까지 밀려난 대형 교회들의 규모 지상주의와 자본주의화와는 완전히 다른 길입니다.

이 책 속에서 성서의 신화는 그 신비의 옷을 벗고 역사와 현실과 민중 속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 진실을 캐겠다는 역사/고고학적 호기심의 문제가 아니지요. 민중신학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정신 자체를 복원하는 일입니다.

<예수의 독설>은 예수 그리스도를 둘러싼 각종 신화와 떠받들려짐을 향해 독설을 날립니다. 없는 자의 편에 서서 제도의 편견을 타파하기 위해 애썼던 위대한 혁명가이자 영적 지도자의 가르침을 되새기자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부름이며 메시아의 임재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이죠. 왜냐하면 소외받는 자들, 가장 낮은 곳에서 사는 자들이야말로 생전의 그리스도가 감싸던 어린 양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생전에 주목했던 것을 지금 우리가 바라봄으로써, 우리 역시 보다 그리스도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이 책은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지상에 넘쳐나는 낮은 자들의 슬픔이 지금도 끝없이 그리스도를 호출하는 신호를 깜빡입니다. 그들은 나약한 양떼가 아니라, 사실은 메시아를 향한 문을 여는 열쇠 그 자체였던 것이죠. 향유 부은 여인에게서 20세기 한국의 '수지 킴 사건'의 그림자를 발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처녀 수태라는, 사실상 사생아로 태어남으로써, '아버지라는 권력의 부재'와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출생'이라는 두 가지의 마이너리티를 동시에 안고 태어난 비천한 인간- 예수 그리스도. 그의 무한한 아래로의 껴안기가 수많은 성경 해석을 통해 실려 있습니다. 제사장들의 계급주의와 형식주의에 항거하고, 그 세계가 저버린 병자와 천민들에게 네 두 발로 서라고 말하는 이 사람. 누구의 아들인가를 묻기 이전에 그야말로 위대한 인간임에 틀림없지요.

성경 속의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질곡의 역사를 거쳐 2008년 초까지의 이 나라 상황까지 아우르면서 민중신학의 요건을 탄탄히 갖춘 책입니다.  낮은 곳의 사람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접점을 탐구하는 그 정신은 열린 마음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물론, 책을 좋아하는 모든 분들께 가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요즘은요.

 

 

열두 살 소령

-열두 살 소년이 보기만 해도 다 알 수 있을 만큼 단순하고 명쾌한(그러나 비극적인) 상황들이 펼쳐집니다. 인과관계가 확실하고 원인도 결과도 다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겹쳐져 만들어진 것은 당췌 이해라고는 불가능한 지옥도지요. 이 소설은 독자가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아프리카의 비극적 상황은 그 원인이 단순하기에 오히려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이는 절망에 맞딱드립니다. 거기에는 살아남으려는 욕구와 계속 그 이상을 요구하는 탐욕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압도하는 탐욕의 열기는 뜨겁습니다. 아프리카 특유의 문화는 그 열기에 타 들어가면서 기괴하게 비틀어져 거의 초현실적으로 보일 때조차 있습니다.

여자 아이들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음핵 절제 시술을 한 뒤 그 아이들의 자기방어를 위해 소총 제식 훈련을 시키는, 허리에 AK소총을 찬 수녀님과 그 예하의 전투용 소녀병 부대(소년이 아닙니다!)를 떠올려 보세요. 이것이 바로 아프리카의 비극입니다. 카프카라도 혀를 내둘렀을 겁니다. 주인공의 어머니를 둘러싼 미신과 저주의 공방이 벌어진 도입부에서부터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이 뒤틀어진 열기는 식을 줄 모르고 거친 숨을 내뿜습니다. 그 열기는 심지어 우울해지거나 무거워질 틈조차 주지 않습니다. 죽거나, 화내거나, 웃으면서 버틸 수밖에 없지요. 이유를 막론하고 어깨가 처지는 자부터 죽어간다는 것을, 주인공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지옥에서 살아남은 열두 살 소년의 고백 역시 신열에 들떠 있습니다. 냉소와 분노에 가득 찼는가 하면 해학과 아프리카 특유의 능청으로 굼실거리기도 하지요. 사람도 죽여보고 마약도 껌 씹듯이 복용해 봤던, 사춘기에 접어들지도 않았을 때에 이미 인간의 바닥을 체험하고 온 그의 고백이 갈지자를 그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솔직히 말하자면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알라께서 항상 공평한 것은 아니다라고 합니다. 뜨거운 열기 때문에 일그러진 프리즘을 통해 대자대비한 우주의 절대원리마저 불공평하게 비추어지는 그 곳, 아프리카의 참혹한 현실을 신파가 아니라 그 특유의 열기와 자조적인 유머로 풀어가는 작품을 또 만날 수 있을까요? 강렬한 소재와 그를 풀어나가는 능청스러운 전개,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삼켜 버릴 듯한 뜨거운 부조리함이 함께 섞여든 이 작품은 걸작의 반열에 올리더라도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강력히 추천합니다...(만 썩 잘 팔리지는 않았습니다. 열심히 팔고 있어요)

p.s: 좀 더 노골적인 번역이었다면 하고 아쉬워합니다만, 청소년도 함께 보는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한 타협이었다고 봅니다.

 

어째 이번에 선정한 두 권을 놓고 보니 어딘가 정치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네요. 물론 우연의 일치였습니다만, 저를 포함해서 주위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다 보니 권력과 탐욕에 대해 또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요즘입니다. 모두들 좀 더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탐욕스런 자들만 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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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입니다. 숫자보다는 꼭 한글로 '오월'이라고 쓰고 싶은 이 즈음에는, 봄의 절정이라기보다는 어째서인지 뜨겁고 묵직한 느낌이 들지요. 망월동 묘지에 처음 갔던 때, 친구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몰래 훔쳤던 기억이 납니다.

평화롭지 못한 요즈음이 오히려 깨어나는 사람들을 위한 축복이라고 위로라도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넋놓고 있으면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라곤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그 일장'춘'몽을 깨우는 것이라면야... 그렇게 보면 봄의 절정이 맞기는 맞나봅니다.

마침 책도 절판이요, 사람도 이제 조금씩 잊혀져 가시는 백기완 선생님의 시집을 폅니다. 오죽 투박한 게 아니어서 세련된 시를 읽는 맛이야 거의 없지요. 구수하기는 하거니와, 밀가루를 섞어 뻑뻑한 막걸리를 사발째 들이키는 기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세상 힘겨이 살던 사람들이 마시던 것임에야...

한 페이지 펼쳐 봅니다. 제목은 [이 강산 낙화유수] 라고 합니다.

1952년 겨울 동숭동 미군 부대가 들어선

서울 대학 자리엔 왠일로

날마다 철조망을 울부짖는 어린 여학생의 찢긴 자락은 너무나 처절했다

은인들에게 정조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냐고

때려도 또 와 울부짖고

미쳤다고 푸닥거릴 해도 또 와

그렇게도 구슬피 몸부림치던 어느 날

그의 검은 머리까지 빡빡 깎이자

동숭동 일대는 숨을 쉬기가 다 스산했건만

눈이 허옇게 내리는 창경궁 빈 터에선

천상 그 주먹이 폭격기 같은 미군 병사와

여드름도 없이 핼쑥한 한국 소년과 격투가 벌어졌다

조국도 얼씬 못하는 그 여학생의 앙갚음을 한다고

그 소년이 먼저 청한 격투였으나

그것은 천상 폭격기와 초가집의 싸움이라고나 할까

보나마나 죽음으로 끝이 나는가 싶을 무렵

비실비실 일어나더니만

왔다, 날으는 범처럼 우직끈 받고 앙짱 받으니

폭격기인들 소용있으랴

역시 썩은 주먹이란 헷것임을 증명했을 때 미군들이 박치기는 반칙이라고

야구 방망이를 치켜드는 순간, 한국 사람 구경꾼들이 그제서야 벌떼처럼 빈 깡통을 던지는 아우성에 미군들은 그 쓰러진 폭격기를 떠메고 가고

 

사람들은 묻는 것이었다 여보게 자네가 도대체 누군가? 나요?

나즉이 말하는 것이었다, 이 강산 낙화유수요

그럼 자네가 갸의 오빠란 말인가

아니오 이 강산 낙화유수라니깐요 그러면서

어두워가는 눈발 속을 사라지는

그 핼쑥한 소년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자위는

따끈한 동태국이라도 한 그릇 먹이고 싶은

그런 겨울이었다

 

저 이야기가 실화이고, 저 소년은 누군가 하니, 소년 백기완이었더라는 얘기(자랑? ㅎㅎ)입니다. 이제 시대는 가고 세월이 흘렀습니다만... 글쎄요. 아직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아 보입니다. 요즘 소식을 접하기 힘든 백 선생님의 건강과 더불어, 요즘 각처에서 펄펄 흩날리는 이 강산 낙화유수들에게 작은 지지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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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아름다운 책들의 세계라고 해도, 서점(직원)의 입장에서는 그리 낭만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어쨌든 하나의 상품으로서 취급하게 되니까요. 정신 없이 새로 나온 책들을 받아내고 여기저기에 배치하다 보면, 어쩔 때는 이게 내가 봐 오던 ‘책’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조차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책에 대해 가장 낭만적인 경험 역시 같은 곳에서부터 온다는 겁니다. 시간이 흘러 더 이상 새로 나온 책으로는 불리우기 힘들게 된 책들이 좀 더 찾기 힘든 곳으로 밀려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가끔은 마음이 싸해지거든요. 가벼운 짝사랑을 앓는 기분과도 비슷합니다. MD가 되기 전에는 제가 원하지 않고서야 책을 떠나 보낼 일이 없었으니까요. 정을 듬뿍 준 책들이 꼭 저 몰래 전학 가듯이 조용히 묻혀가는 걸 보면 참, 그게요.

해서, 고물상 옆 보물창고입니다. 근래 나와서 많이 팔린 책들은 아니지만, 혹여 잊혀지지는 말라고 작은 보물 창고 하나 만들었어요. 소박하게 챙겨 놓았으니 와서 구경하시고, 종종 집어 가시면 저로서는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그럼 첫 번째 상자에 담은 책들 한 번 보시죠. ^^

 

세계 종교 올림픽

-어느 날, 어떤 왕국의 왕과 현자와 광대가 동시에 신이 등장하는 꿈을 꿉니다. 그들은 논의 끝에 그 꿈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세계의 5대 종교와 무신론자의 대표를 불러 토론회를 개최하기로 하지요.

토론자들과 관객들은 역사 내내 서로 각을 세워 온 각 종교의 핵심이 그토록 닮아 있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 모두가 이름만이 조금씩 다른 궁극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며, 그 끝에는 관용과 성찰을
포함한 (시공간과 마음 모두에 대한) 거대한 열림이 기다리고 있지요. 책 속에서 줄곧 인용되는 각 경전의 문구 역시 비할 데 없이 아름답습니다. 온 우주의 분자 하나하나가 영원한 빛을 반사하는 셀 수 없는 숫자의 거울이라는 내용의 옛 이슬람 시는 한 송이 꽃으로부터 시작하지요.

그러나 이 책만의 장점은 바로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유대교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증오를 바라보고만 있는가 라거나 왜 이슬람교는 성전이라는 명목으로 폭력을 양산하는가 등등에 대해 각 종교의 대표들이 부끄러워하고 현실의 장벽을 인정하고 있죠. 이 책은 단순한 종교 개론이나 교리 비교가 아니라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를 독자들에게 되묻는 책입니다(심지어 작가는 독자의 편지를 기다리며 편지 주소까지 써 놨습니다).

책의 주제와 이 세상과의 연결 모두를 놓치지 않는 성찰. 저는 이런 책이야말로 어떤 분야에 대한 진정한 입문서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읽기 쉽게 우화로 시작해서 추리물(!!)의 양념까지 톡톡 뿌린 작가의 정성 어린 배려까지 더해진다면 더더욱 그렇겠지요.

 

자전거 말고 바이크

-저는 <완득이>를 좀 심드렁하게 읽었습니다. 그 친구는 운이 좋으니까요. 개인적으로, 행운의 몫이 큰 소설은 성장소설로는 부르기 좀 껄끄럽습니다. 비록 그 의도가 힘 내서 잘 살아 보자고 하는 것일지라도 말이죠.


과거의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은 학생을 돕고 싶지만, 그 고통이 타인의 말 몇 마디로 회복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를 고백하는 내용의 단편 [서랍 속의 아이]는 바로 청소년 문학계에 던지는 화두입니다. 많은 청소년 문학 작가들은 착한 마음으로 역경을 이겨내자고 계몽합니다. 그런데 그 격려는 누구에게 주어지고 있는 걸까요. 정말로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있는 걸까요.


이 책의 처음에 실린 [구령대 아이들]의 주인공 수탁이는 완득이랑 닮았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를 아껴주는 사람이라고는 ‘소년원 다녀 와서 갑자기 인간 되겠다고 설치는 18세 짱개집 알바’ 형 뿐입니다. 다들 너무 어렸죠. 결국 타고난 싸움꾼 수탁이는 세상에 부딪히는 방법으로서 평생 당해본 적 없는 다굴 맞기를 일부러 선택합니다. 뭘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인생의 바닥은 직접 닿아 보는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저는 수탁이가 더 좋습니다.


<자전거 말고 바이크>는 희망 대신에 어두운 현실을 비추는 것부터가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높이 뛰기 위해서는 아래를 쳐다보고 땅을 단단히 다져야 하니까요. 청소년 문학계는 청소년기에 접어들었으며, 몸이 크는 만큼 이제 그 마음도 커져야 할 때가 온 게 아닐까요. 저는 이 단편집이 일종의 전환점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소중한 책입니다.

 *이 책의 TTB리뷰와 내용이 비슷하지요? 작성자가 동일하므로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

 

엔젤 엔젤 엔젤

-치매에 걸려 '어려진' 할머니와 고등학생 손녀는 매일 밤 마루에서 화장실에 가기 위해 만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둘은 그 어두운 곳에서 수족관 속의 다른 모든 것을 죽여 버리는 엔젤 피시의 악마성을 목격하죠. 그 광경은 할머니와 손녀의 머리 속에서 (마치 인간의 뿌리처럼 보이는) 악에 대한 기억들을 불러내기 시작합니다.

인간 내면의 근본적인 악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입니다만, 단정하고 차분한 전개가 그 주제를 포근히 떠받들고 있습니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할머니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자괴감, 그리고 손녀의 강박증에 가까운 성격과 그녀의 소박하던 어린 시절이 계속 교차하며 점점 하나의 내용으로 뭉쳐집니다. 어느새 환상과 우화와 추억과 현재가 서로 겹치고 섞여듭니다.

평화로운 시골 풍경과 소녀들의 소소한 추억에서부터 요한 계시록과 인류의 원시적 악마성, 마지막으로 구원의 가능성에 이르기까지 플롯의 짜임새가 튼실합니다. 여기에 여러 가지 상징들까지 풍부하게 준비되어 있어서 읽는 맛이 쏠쏠하죠. 136쪽짜리 중편급 소설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입니다.

소소한 경험들로부터 성찰을 끌어내면서도 어려워지지 않는 작가의 글 씀씀이 역시 좋았습니다. 완성도나 내용 모두에서 글을 좋아하는 청소년이나 너무 말랑한 일본 소설에 물리신 분들께는 특히 좋은 선택이겠네요. 작고 귀여운 버전의 도스토예프스키라고 말씀 드려도 될까요? 아 네, 물론 여기에는 알료샤는 없습니다만…



-이번 주는 여기까지입니다.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작은 책들의 이야기이고 해서, 들러주는 분들 한 분 한 분 뵙고 얘기라도 나누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만… 마음처럼 할 수는 없죠(하하). 근래 읽었던 책들 중에 알려지지 않아서 아까운 책이 있다거나 하시면 리플로 달아주세요. 기회가 되면 읽고 나서 창고에 함께 쟁여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한 주 행복하게 보내시고, 다음 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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