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해드립니다

by 로렌스 블록


리뷰어: 홍지로 (번역가)



『살인해드립니다』는 알코올중독 무면허 탐정 ‘매슈 스커더’ 시리즈로 널리 알려진(희망사항이다) 작가 로런스 블록의 또 다른 대표작, 살인 청부업자 ‘켈러’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집이다. 이 책에는 열 편의 단편이 실려 있으며, 그중 첫 번째부터 세 번째 작품에 해당하는 「솔저라고 부르면 대답함」, 「말을 탄 사나이 켈러」, 「켈러의 상담 치료」는 기존에 각각 다른 지면을 통해 시차를 두고 소개되어 미적지근한 반응을 얻은 바 있다. 본 글의 1차 목표는 앞서 소개된 세 단편을 읽고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했거나, 그중 한두 개는 마음에 들었으나 나머지는 별로였기에 이 시리즈를 믿어도 될까 망설이고 있거나, 셋 다 재미있게 읽기는 했지만 이런 이야기를 굳이 일곱 편이나 더 읽을 필요가 있을까 주저하는 독자 여러분의 손을 붙잡고 모쪼록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사 청하는 데에 있다. 이미 세 단편에 홀딱 반한 독자라면 설득이 필요하지 않을 테고, 애당초 이런 작품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독자라면 이하 이어지는 호소를 통해 자연스럽게 어떤 책인지 아실 수 있으리라.


『살인해드립니다』는 각 단편마다 살인 청부업자 켈러가 매번 새로운 의뢰를 받아 사람을 죽이는 구조를 반복한다. 이래서야 기왕의 캐릭터나 구성에 동하지 않았던 독자의 마음을 새삼 움직일 방법이 있을까? 그런데 앞서 세 단편이 소개되는 과정에서 충분히 안내되지 못한 부분이 있다. 『살인해드립니다』는 실은 독립적인 단편 열 편을 한데 모아둔 옴니버스 단편집이라기보다는 서로 느슨히 연결된 단편들을 엮어 만든 장편에 가깝다. 이런 유형의 책이 흔히 그렇듯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아무 단편이나 발췌해 읽어도 표면상의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에 무리가 없긴 하지만, 열 개의 이야기가 순차적으로 축적되면서 생겨나는 큰 그림을 보지 못한다면 진가를 맛보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단편 간의 관계는 몇몇 인물이나 사건이 중첩되면서 세계를 확장하는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여기는 반드시 열 편을 순서대로 읽어야만 드러나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숨어있다. 각각의 단편을 독립된 작품으로 읽느냐 전체의 부분으로 읽느냐에 따라 무게중심은 완전히 달라지며, 이 책의 정수는 전자보다는 후자에 있다.


그렇다면 숨어 있는 또 하나의 이야기란 무엇인가? 범죄소설 및 영화의 팬이라면 누구나 얼개를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다. 여기 한 살인 청부업자가 있다. 프로인 그는 의뢰인과 만나는 일 없이 중개인을 통해 의뢰를 받으며, 도덕적 고뇌 없이 무심히 살인을 해치운다. 일의 성격상 그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고, 일이 없을 때도 특기할 만한 사생활이나 소중한 인간관계는 없다. 그러던 그가 업무 도중 어떤 사건 혹은 사람을 만나 마음을 쓰기 시작하면서 전문가다운 냉철함이 흔들리기 시작하는데…….


고개를 가로젓고 계신 분들은 조금만 더 참아주시길. 살인 청부업자가 제거 대상에게 반해 의뢰를 포기한 뒤 분노한 의뢰인에게 쫓기다 목숨을 버리는 결말 따위의 지긋지긋한 멜로드라마가 아님을 보증한다. 이곳은 하드보일드계의 심리상담가 로렌스 블록의 세계. 삶의 변화는 순간의 계기를 통해 갑작스레 찾아오기보다는 음으로 양으로 누적된 다양한 경험을 통해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일어난다. 중요한 것은 살인 청부업 자체가 아니라 업무를 수행하며 생기는 일견 ‘잉여로운’ 경험들이며, 그것이 켈러의 견고한 세계를 침식해 들어온다. 그는 낯선 ‘출장지’에 갔다가 동네가 마음에 들자 일은 잠시 제쳐놓고 부동산에 들러 집을 구경한다. 왜 실천하지도 않을 그런 몽상에 빠지는 걸까 싶어 심리 치료도 받아본다. 출장이 잦은데 개를 키울 수 있을까 고민하기도 하고, 사적인 인간관계에서 느낀 상실감을 업무 처리에 반영하기도 한다. 평생직장처럼 보이던 살인 청부업에 위기가 찾아오는 대목은 특히 포복절도할 만하다. 변화가 쌓일수록 그는 점점 더 평범하고 고민 많은 프리랜서처럼 보인다. 편의상 장르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을 구분해도 된다면, 『살인해드립니다』는 빠르고 폭력적인 죽음으로 가득한 장르 세계가 느리고 사소한 골칫거리로 가득한 일상의 무게에 휘청거리는 광경을 음미하는 코미디에 가깝다.


참, 그리고 이 작품이 훌륭한 애견 소설이기도 하다는 이야기를 썼던가? 정말이다. 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치면 올해 이 분야에서 나온 소설 중 이나미 이쓰라의 『세인트메리의 리본』과 『사냥개 탐정』(모두 신정원 옮김, 손안의책 펴냄), 루이즈 페니의 『네 시체를 묻어라』(김연우 옮김, 피니스아프리카에 펴냄)에 뒤지지 않는다. 특히 개를 두고 외출하며 애달픈 마음을 표현하는 켈러의 모습은 반려동물이 없는 독자들의 심금마저 울릴 만하다. 세상에는 훌륭한 살인 기술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그렇게나 많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