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복의 랑데부>


리뷰어: 김서진 (작가)




영국 범죄소설의 대가이자 평론가이기도 했던 줄리언 시먼스는 『블러디 머더』(김명남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에서 코넬 울리치에 대해 더없이 냉정하게 썼다.  


“그의 글은 전형적인 펄프 픽션들과는 관계가 멀었다. (중략) 그러나 플롯은 멜로드라마처럼 한심하고 선정적일 때가 많고, 필치는 쉼 없이 새된 어조로 칭얼거리는 듯하여 나는 그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못하겠다.”


코넬 울리치와 함께 동시대를 풍미했던 대실 해밋이나 레이먼드 챈들러가 계속해서 새로운 독자들을 만나고 찬사의 대상이 되는 것에 비해, 이런 박정한 평가는 책을 써보겠다고 나선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무섭기까지 하다. 모든 작가는 자신의 책이 계속 남기를 꿈꾸지만 그걸 확인할 수는 없다. 시간과 함께 독자도 변하고 평가도 바뀐다. 울리치가 남긴 유명한 구절 “오늘은 꿈을 꾼다. 내일은 꿈과 함께 죽는다(First you dream, and then you die)”는 어쩌면 작가들의 숙명을 드러내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코넬 울리치의 팬으로서 마음 아프지만, 줄리언 시먼스의 지적은 대체로 옳다. 울리치의 소설에는 샘 스페이드나 필립 말로 같은 유명한 캐릭터가, 사회를 향해 열려 있는 창도 없다. 지극히 고독하고 괴팍했던 작가 본인의 삶처럼 그의 소설은 모든 문을 닫아걸고 술에 취한 채 쏟아낸 듯한 자폐적 감정으로 가득차 있다. 챈들러가 보여준 냉정한 균형 감각과 비교하면 울리치는 어느 모로 보나 과잉의 작가였다. 소설은 쓴 것보다 쓰지 않은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데, 아름답고 세련된 그의 문장은 지나친 감상으로 흐르고, 상황은 절묘하다 못해 종종 개연성을 놓쳐버린다. 하드보일드 시대에 그는 너무 쉽게 감정으로 끓어올랐다. 


그러나 울리치의 과잉을 한 겹만 접고 보면 그가 서스펜스의 대가이고 드라마 제조기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미스터리 소설은 추리와 두뇌 싸움에서 시작해 범죄와 폭력 자체를 주목하는 것으로 변화해왔다. 이런 점에서 울리치가 영웅을 배제하고 유혹과 운명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는 평범하고 나약한 인물들을 내세운 것은 지극히 현대적인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죽은 자와의 결혼』(김석환 옮김, 해문출판사 펴냄)에서는 범인이 밝혀지지도 않은 채 끝나는데 이런 결말은 지금도 신선하다. 


울리치는 상황과 인물의 감정에 몰두했다. 그가 만들어낸 상황이 얼마나 드라마틱한지는 『상복의 랑데부』에서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결혼을 앞두고 약혼녀를 잃은 한 남자. 그는 복수를 위해 범인들의 연인을 차례로 죽이고는 그 옆에 쪽지를 남긴다. “어떤 기분인지 너도 알겠지?” 이와 비슷한 설정의 영화가 그 후로 얼마나 많았던가. 


비단 『상복의 랑데부』뿐만 아니다. 그의 숱한 작품들이 영화나 드라마로 계속 각색되고 있고(『죽은 자와의 결혼』은 로맨틱 코미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브렌던 프레이저 주연의 1996년 작 『사랑이라면 이들처럼(Mrs. Winterbourne)』), 여러 작가들이 그에게서 아이디어를 빌렸다는 건 울리치가 만들어낸 드라마 설정이 얼마나 빼어난지 방증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70년대 후반 조해일이 발표한 『갈 수 없는 나라』(고려원 펴냄)는 『상복의 랑데부』와 설정이 흡사하다. 


『갈 수 없는 나라』는 재벌 자제들의 타락과 그에 대한 응징을 그리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80년대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일상 같던 시위를 끝내고 술집에 모여 드라마 『갈 수 없는 나라』의 주제곡을 목청껏 부르던 그 시절. 『갈 수 없는 나라』가 북한을 의미한다는 둥, 그래서 금지곡이 되었다는 둥 헛소리를 진지하게 늘어놓기도 했으니, 그때 ‘밤은 젊고 우리도 젊’었나 보다. 


시먼스와는 달리 레이 브래드버리는 울리치를 매 세대마다 재발견되어야 할 작가라고 치켜세웠다. 브래드버리의 초기 작품에서 나타나는 아련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는 울리치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울리치의 작품 전편에 흐르는 서글픈 정서, 멜랑콜리는 그의 지문과도 같으며 그 정서는 『상복의 랑데부』에서 정점을 찍는다.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해 매일 밤 약속 장소를 지키는 남자. 경찰은 그의 연인을 빼닮은 사람을 구해 약속 장소에 세우고, 예상대로 그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 나타난다. “나를 기다려주었어, 나를 기다려주었어……”라고 반복하면서. 


십 대 시절 나는 이 대목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어떤 사람들은 슬픔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다. 울리치도 그랬다. 그의 삶도 슬펐고, 그의 주인공들도 슬픔에 젖어 도시의 밤거리를 헤맨다. 이 슬픔에 같이 젖어들 의지만 있다면 『상복의 랑데부』는 코넬 울리치의 작품 중에서 최고작으로 꼽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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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6-06-01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복의 랑데뷰 재미있는 책이지요.전형적인 미스터리 물을 아니지만 이른바 정통파 추리소설이나 하드보일드에 지친 분들에겐 아주 신선한 작품이라고 할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