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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을 사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한아는 그 순간에도 체념하듯 생각했다. 체념, 이라고 부르는 애정도 있는 것이다. (2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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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해도 로또가 되지 않는 건
이미 엄마 아빠 딸로 태어났기 때문일 거예요.
(5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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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손에 잡은 순간부터 너무 좋았다, 책이라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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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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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뒷표지에는 '억압적인 가부장제 속에서 침묵하던 한 고등학생 소녀가 드넓은 세계와 주체적인 자아를 찾아 나서는 정신적 독립기'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나는 이게 완전히 틀린 설명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저 문장만 보면 억압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던 킴발리가 엄청난 자각을 이루어서 굉장히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이 되는 이야기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나 하고 생각하긴 한다.


인간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한 번에 완전히 변모하는 인간, 같은 얘기야말로 정말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이 '드넓은 세계로 달려나가 주체적인 인간으로 바로선 여성'의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오히려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생각조차 해본 적 없던 여성이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기 스스로를 이해하게 되면서 겪는 혼란과 갈등을 굉장히 현실적으로 그린 소설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그런 부분이 이 소설의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혼란과 갈등의 흐름을 따라가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첫 번째 이유는 킴발리의 아버지인 유진의 행위가 지극히 폭력적이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먼저 떠올렸던 개념은 가스라이팅이었다. 


생리통을 경감시켜주는 약을 먹으려고 미사 십 분 전에 콘플레이크를 먹었다는 이유로 가죽 벨트를 풀어 킴발리를 때리고 나서 "왜 죄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거야?" "왜 죄악을 좋아하는 거야?"라고 묻는 아버지를 볼 때는 너무 화가 났는데, 이 다음 장면에서는 화도 나지 않았다. 그냥 머리가 멍해져서, 책을 잠시 내려놓았었다.

 

아버지가 오빠와 나를 홱 끌어안았다. "많이 아팠니? 살갗이 터졌니?" 아버지가 우리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나는 등이 욱신거렸지만 아니라고, 아프지 않다고 말했다. 죄악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며 고개를 흔드는 아버지는 마치 뭔가에, 떨쳐 낼 수 없는 뭔가에 짓눌린 듯한 모습이었다. (132쪽)


이 아버지는 정말로 이게 사랑이며 헌신이라고 믿고 있는 거구나. 너희를 때리는 게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나는 너희를 사랑하니까 때릴 수 밖에 없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구나. 이래야 너희가 죄악에 사로잡히지 않고, 완벽한 존재가 되어 천국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구나. 그 생각에 자기 자신도 억압되어 있는데, 그래서 자기 자신도 그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데도, 그래도 저걸 감당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짓누르고 있는 거구나…소름이 끼쳤다. 

 

더 끔찍한 장면은 고모네 집에 다녀온 킴발리가 할아버지와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킴발리를 벌하는 부분이었다. 카톨릭 교도가 아닌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의 딸'이 '자신의 동생' 집에서 함께 지냈다고, 그리고 그 사실을 딸이 자신에게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다고, 너는 죄악으로 걸어 들어간 거라며 딸을 비난하는 아버지. 그리고는 딸에게 끓인 물을 붓는 아버지…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지만, 그 상황에서도 아버지에게 "네, 아버지."라는 대답을 들려주고 싶어하는 킴발리를 봐야 한다는 건 더 무시무시했다. 그리고 이 점이 내가 이 책을 읽기 힘들어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너 할아버지가 은수카에 오는 거 알고 있었지?" 아버지가 이보어로 물었다. 
"네 아버지."
"그런데 나에게 전화해서 그 사실을 알려 줬던가, 그보?" 
"아뇨."
"이교도와 한집에서 자게 될 것도 알았지?" 
"네, 아버지."
"그러니까 죄악을 똑똑히 보고도 걸어 들어갔단 말이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

"킴발리, 너는 귀한 아이야. (중략) 너는 맹렬하게 완벽을 추구해야 한다. 죄악을 보고도 걸어 들어가선 안 돼." 아버지가 주전자를 욕조 안으로 가져오더니 내 발을 향해 기울였다. 그러고는 마치 실험을 하면서 어던 결과가 나오는지 보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내 발에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부었다. 아버지는 이제 울고 있었다. 눈물이 얼굴을 줄줄 흘러내렸다. 나는 수증기를 먼저 보고 그다음에 물을 봤다. 주전자에서 나온 물이 거의 슬로 모션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내 발을 향해 흐르는 것을 지켜봤다. 닿았을 때의 통증이 너무나 순연한 극열이라 일순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비명을 질렀다. 
"이게 네가 죄악으로 걸어 들어갈 때 스스로에게 하는 짓이다. 발을 데는 거야."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의 말이 옳았기 때문에 "네, 아버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발의 열기가 순식간에 여러 갈래의 극심한 고통이 되어 머리와 입술과 눈으로 올라왔다. 아버지는 넓적한 한 손으로 나를 안은 채 다른 손으로 조심스럽게 물을 부었다. (239-240쪽)


아버지의 폭력을 직접적으로 당하는 킴발리와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고 기쁘게 해 주고 싶어하는 킴발리가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 이 점이 독자로서의 나를 혼란스럽고 슬프게 만들어서,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킴발리를 마냥 좋아하지도 못했다. 킴발리가 자신이 학대당하고 있음을 빨리 깨닫고 아버지로부터 도망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요원해 보였다. 


그런데 가스라이팅은 보통 정신적 폭력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굳이 물리적인 폭력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피조종자의 조종자에 대한 지배력이 강력하고 흔들림 없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그러나 유진은 킴발리와 자자뿐만 아니라 베아트리스에게도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을 계속 사용했으니까 가스라이팅으로 그의 행위가 완전히 설명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루밍 수법을 이용한 학대인가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유진의 가학적 행위가 그에게 기쁨이나 즐거움을 준 것 같지도 않다. 자식과 아내에게 폭력을 가하는 가부장들이 모두 다 그렇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지만, 최소한 이 책의 유진은 때리는 자신과 때려야 하는 자신을 별로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인간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너는 이 모든 특권을 누리는 만큼 뭔가를 해야만 해. 하느님이 너에게 많은 것을 주셨으니 기대하시는 것 또한 많단 말이다. 하느님은 완벽을 기대하셔.” (64쪽)   


 문장을 읽고서야 조금 이해가 갔다. 어쩌면 유진은 스스로를 신처럼 생각했던 게 아닐까. 신에 대한 믿음을 중시하며 신의 이름을 앞세우다보니 신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데 점점 익숙해져 결국은 자기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하게 된 사람. 그래서 신 앞에 인간이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고 믿었듯이, 자신이 지배하는 이들도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 구약 성경 속의 신이 사랑하는 백성들이 신을 위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려고 불을 내리고 질병을 내리고 홍수를 내렸듯이, 자신도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이 자신을 위한 삶을 살게 하려면 가죽 벨트를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 킴발리에게 신이 주었다는 특권도, 신이 기대하신다는 완벽도, 사실은 자신이 준 것이며 자신이 기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외면하면서 온 가족을 망가뜨렸겠지. 자신도 망가뜨리고. 그렇다면 이 책의 구성이 신들 부수기-마음으로 이야기하기-신들의 파편-다른 침묵으로 되어 있는 것도 이해가 된다. 


내가 알던 세계가 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 것, 그래서 나의 지평과 인식이 확장되어가는 것은 분명 감사한 경험이지만 행복한 경험만은 아니다. 자각 이전의 세계는 완전히 잘못됐었던 것 같고 그 세계에서 살아가던 나는 아무 생각 없는 무지렁이였던 것 같아서 과거의 나를 증오하게 되기도 하고 과거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오겠다며 불가능한 몸부림을 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엔 킴발리를 마냥 좋아하지 못했던 나는, 책을 다 읽은 후에야 킴발리를 좋아하게 됐다. 킴발리는 솔직하고 진심이고 현실적이었으니까. 내게 없던 언어를 찾아가기에 새 세계의 문법에 결코 익숙할 수 없는 자신을 그냥 그대로 보여주었으니까. 킴발리가 유진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여러 번 표현했고, 마지막 장에 이를 때까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했다는 이유로 '야 너를 그렇게 학대한 사람한테 그런 마음을 갖다니 미친 거 아니냐????'라며 그녀를 손가락질하는 거야말로 편협하고 얕은 이해라고 생각한다. 양육자 혹은 보호자에 대한 양가적 감정이야말로 인간의 보편적인 것 아니겠는가. 

 

아버지 때문에 겪어야 했던 침묵에서 벗어난 현재를 기뻐하고, "네가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어, 킴발리."라고 말해주는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아버지가 나오는 꿈을 늘 악몽으로 끝내게 되는 킴발리와 '그래도' 아버지를 위해 미사를 드리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킴발리가 동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진실이다. 그리고 이런 진실을 맞닥뜨리기 위해서 나는 소설을 읽는 것이라고, 오늘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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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사람
윤성희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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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성희소설가님의 소설을 좋아한다. 맨 처음에 읽었던 건 거기, 당신이었다. 십년도 더 전이다. 제일 앞에 실려 있는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부터 마음에 들었다. 봉자네 분식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소설이 잘 가, 또 보자였던 것도 좋았다. 다음 책이 나오면 또 찾아 읽게 되겠구나 싶었다. 그 후에 감기 구경꾼들 웃는 동안이 순서대로 나왔고, 베개를 베다 첫 문장까지 나왔다. 모두 나오자마자 샀다. 늘 또 보는구나, 하는 기분이었다.



2상냥한 사람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서 생각했다. 상냥한 사람의 이야기일까 상냥하고 싶었던 사람의 이야기일까 결코 상냥해지지 못했던 사람의 이야기일까. 문득 '상냥한'이 무슨 뜻인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 페이지를 열었다. '성질이 싹싹하고 부드럽다.'라는 뜻풀이를 확인하고는 음 역시 나랑은 거리가 먼 형용사 맞군, 하고서 표지를 펼쳤다.

 



3소설은 아역배우 출신인 형민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형민뿐만 아니라 형민의 어머니와 아버지, 아내와 딸, 직장 동료들, 형민이 출연했던 TV 토크쇼의 진행자, 형민이 출근할 때 들르는 회사 근처 포장마차에서 샌드위치를 파는 부부 아들의 친구, 형민이 사는 아파트 할머니들, 형민이 들른 휴게소에서 만난 남성 등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직조되어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극적인 사건들이 있고 자기 나름의 입장이 있다. 형민은 아내와 이혼하고 딸과 떨어져 지낸다. 형민의 딸 하영은 친구를 사귀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학교에서 벌어진 따돌림의 방관자로 지목됐다. 직장 동료들은 횡령을 했고 차도에 뛰어들었고 아르바이트생을 다치게 했고 잘못된 일을 못본 척했다. 포장마차에서 샌드위치를 팔던 부부는 사고를 당했다. 형민은 어머니를 잃었고 아내와 사별했고 TV 토크쇼의 진행자는 자살했으며 하영이 외면했던 친구는 자살 기도를 했다. 강차장의 아들도 강차장을 도둑으로 몰았던 문방구 주인도 죽었다. 하지만 이런 사연들과 함께 나와야 할 것 같은, 억울하고 분하고 속상하고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감정들은, 문장 사이에서 스윽, 하고 지나간다. 형민의 아내가 교통 사고로 입원해 있다가 결국 죽는 내용은 이런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형민은 버스를 타고 아내는 택시를 탔다. 그리고 그 택시는 사거리에서 신호위반을 하다 트럭을 박았다. 형민의 아내는 응급실에서 일주일을 버텼다. 아내의 귀에 대고 형민은 늘 똑같은 말을 했다. "어서 일어나자. 그러면 내일 풍경이 다르게 보일 거야." (177쪽)

 

어떻게 보면 굉장히 건조한데, 그 건조함 때문에 더 많은 소리와 장면과 냄새를 상상하게 되는 이런 서술. 그래서 건조하다기보다는 담담하다고 느껴지는 말투. 울고 불면서 해야 할 것 같은 이야기를 조그맣게 속삭이듯이 전달하는 목소리를 따라가고 있다 보면, 큰 목소리로 말하는 것조차 꺼려하는 서술자가 눈 앞에 그려진다. 내가 할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내 이야기를 들을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주는, 정말이지 이 책의 제목처럼 상냥한 서술자.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고맙다는 기분이 들었다. 소설 속의 수많은 슬픈 이야기들이 자극적으로 진열되어 있지 않고, 신파로 흘러가지 않아서. 어디선가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들려주는 서술자의 목소리에서 지긋지긋한 삶의 누추한 주름들을 '그래도 아름답게 보아주는' 소설가님의 시선이 느껴져서.



4. 몇몇 장면에서는 지난 소설집인 베개를 베다의 흔적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영이 같은 학교 친구의 따돌림을 방관하는 에피소드나 형민이 아내와 이혼한 후에도 만나서 낮술을 마시고 방송에 나간다고 새 양말을 신는 장면, 형민과 강차장이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강차장이 등교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내용 같은 거. 베개를 베다를 읽을 때 기억에 남았던 부분들이라 그런 것 같다. 베개를 베다에 실린 여러 소설들의 특정한 장면들이 상냥한 사람에서 다시 재생된 것 같은 느낌. 지루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겪은 것의 반복인 경우도 많으니까.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들로만 이루어진 하루 같은 건 없으니까.

 

서술자만 상냥한 게 아니라 등장하는 인물들도 대부분 상냥해서, 여운이 남는 에피소드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와 이거 진짜 내 얘기다 같은 건 별로 없었는데, 그건 에피소드들이 비현실적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상냥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설이란 내가 나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주지만 내가 타인을 이해하는 데 훨씬 더 많은 도움을 주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후자로 인해 전자가 가능해지지 않을까 하고 짐작하기도 하고) 전혀 아쉽거나 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냥한 사람들의 섬세한 말들과 행동들로 인해 내가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아주 오래 전 했던 말을 계속 떠올리면서 후회하고 또 후회해서 걷고 또 걸으면서도 잠들지 못하는 '친구'의 무릎에 오른손을 올려놓고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할머니와 악몽을 꾼 아이의 가슴을 토닥여주며 괜찮다고 말해주는 엄마의 모습을 상상하니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5. 정작 나를 가장 심란하게 했던 인물은 강차장이었다. 이런 문장들을 읽을 때가 그랬다.

 

이십대 시절 강차장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등교하는 아이들을 보니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이 치기 어리게 느껴졌다. 선생님은 될 수 없겠지만 뒤늦게 공부를 하고 싶은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262-263쪽)

 

유쾌한 사람, 나는 그 말이 좋았어. 그런데 다리가 부러져 산속에서 구급대원들을 기다리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이제 마냥 유쾌한 사람으로 살 수는 없겠구나. 다리를 잃은 아르바이트생은 매일 회사 앞에서 시위를 했고, 그 아이를 친 후배 녀석은 출산 중 한 아이를 잃었지. 그때도 나는 우리 딸들하고 영화도 보고, 제주도 여행도 갔다 오고, 맛집도 찾아다니고… (278-279쪽)

 

나도 그랬다. 이십대 시절,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가 나로 인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싫었다. 정확하게는 두렵고 무서웠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직업을 갖게 되고, 그 삶을 살게 되면서, 그 때의 내가 얼마나 치기 어렸는지 깨달았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받고 싶지 않다는 말은 사실 나 자신이 누군가로 인해 영향을 받고 싶지 않다는 거였고, 더 정확히는 누군가 깊이 있는 관계를 맺으면서 상처를 주고받고 갈등을 겪어나가는 것 자체가 두렵고 무서웠기 때문이라는 걸. 


여전히 나는 관계에 서툴고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지금 잠깐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진심을 다하려고 애쓴다. 지금이 아니면 이들을 만날 시간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만나는 이들이 나에게 주는 영향은 분명히 있고, 그중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지만 좋은 것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으면 괜찮다고 생각하고, 그렇다면 나는 이들이 준 좋은 것보다 더 좋은 것을 그들에게 주고 싶다. 형민을 만난 아이처럼, 아이가 만난 형민처럼.

 




6. 아픈 할머니를 먼저 꼭 안아주는 마음, 그걸 잘 해내는 사람.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에도 사과하는 마음, 그 마음을 전하기 위해 지렁이 젤리를 기꺼이 내어주는 사람. 처음 만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마음, 그랬다가 아이가 머리를 만졌다고 화를 내면 쪼끄만 게 어른한테 버릇없다고 혼을 내는 게 아니라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 있는 사람. 이런 마음이라면 괜찮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이 팍팍한 세상에서 어깨를 겯고 살아가기에는 말이다.

 

그 마음을 상냥함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나는 상냥한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아주 특출난 삶이 아니더라도, 어중간하고 어정쩡한 삶이라도, 때로는 불쾌함과 후회를 견뎌야 하는 삶이라도, 이런 상냥함이라면 상처로 좍좍 갈라진 삶의 틈새들에 바를 수 있는 연고 역할 정도는 해 줄 수 있을 거니까. 그리고 이런 상냥함을 잔뜩 만날 수 있는 이 책을 여러 번 읽고 싶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슬픔이 더이상 없는 것만 같을 때, 지금의 슬픔만으로도 내가 꽉 찬 것 같을 때, 상냥한 마음을 주고받는 상냥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쉬어가고 싶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슬픔의 그릇을 조금이나마 키우기 위해서는 타인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먼저 있어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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