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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이 벌써 다 지나버린 2월의 둘째 날. 솔직히 첫 달에 나온 책들 중 눈에 확!!!! 띈 책은 없었다-특별히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보이지 않았다는 뜻. 그러다보니 다섯 권을 못 채우겠구나 싶었지만, 확!!!! 꽂히는 책 대신 '적당히' 읽어봐도 좋겠다 싶은 것들 중 몇 권을 고르기가 더 쉽지 않았다 하하하-_- 그렇게저렇게 고른 이번 달의 신간들은…




1. 길 잃은 고래가 있는 저녁

구보 미스미라는 작가도 낯설고, 제목이 특별히 맘에 드는 것도 아니고('저녁이 있는 삶'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으음;), 표지가 맘에 팍 드는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첫 번째로 꼽은 이유는 책 소개 페이지에 실린 이 문장들 때문이었다 : 무슨 짓을 하든 그냥 옆에 있어주기만 하면 됐는데. 그냥 그렇게 있기만 해도 됐는데.


어머니/가족과 자살에 대한 욕망을 한꺼번에 이야기하고 있다는 소설. 어머니/가족이란 너무 진부한 주제인지도 모르지만, 생각할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뻐근해져오는 '영원한 숙제'인 것도 사실이다. 어머니/가족로부터 받은 상처에 대해 얘기해보라면 누구나 할 말이 너무 많다고 하겠지만, 그 한편에는 어머니/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과 아련함과 애틋함과…그 외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온갖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으며, 그 감정들은 결국 어머니/가족로부터의 애정을 갈구하는 것의 다른 이름일 테니.


나이가 들면서 가족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고, 얼마 전부터는 더더욱 가족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 나에게, 어머니/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이 스스로 죽음을 앞당기려다가 죽음을 보류하고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는 참 무겁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 생각 때문에 더더욱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무슨 짓을 하든 그냥 옆에 있어주기만 하면 되는, 그 사람, 나의 아버지/어머니/동생, 가족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 같아서.



2. 일러스트 이방인

카뮈 전집을 출간한 세계사에서 카뮈 탄생 백 주년을 맞이해 출간했다는 이방인의 일러스트판. 일러스트를 그린 사람은 호세 무뇨스. 앙굴렘 국제만화축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세계적 거장…이라고 하지만 나에겐 낯선 이름이다보니ㅠㅠ 위키에서 검색해봤다. 1942년생, 아르헨티나의 만화가고 '하드보일드한 그래픽 노블'을 그리는 작가라고. 책 소개 페이지의 설명으로는 2012년 봄에 이 책이 소개되었을 때 큰 화제를 일으키며 찬사를 받았다고 하는데, 표지 느낌도 괜찮다.


출판 관련 기사들을 찾아보다가 몇 편의 일러스트를 미리 봤는데, 뫼르소가 총 쏘는 장면이라든지 땀흘리는 장면이라든지…흑백의 절제된 톤이 아이러니하게도 강렬했다. 화려한 컬러도 아닌데 뫼르소의 심란하고 복잡한 그 내면 세계를 어쩌면 이리 섬찟한 느낌이 들게 그려냈는지. 책 한 권을 다 보고 있다 보면 중간중간 숨막히는 느낌이 들 것도 같지만 그런 숨막힘이야말로 이방인이 선사하는 가장 '주된' 감정이니 오히려 기대될 뿐이다. 일러스트와 같이 읽는 이방인은 어떨까, 내 머릿속에 그려진 이방인의 장면과 호세 무뇨스가 그려낸 장면들은 어떻게 다를까. 궁금하다.



3. 끝까지 연기하라

<길 잃은 고래가 있는 저녁>처럼 낯선 작가의 작품. 책 소개 페이지의 설명으로는 현재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범죄소설, 역사소설 작가라지만 우리 나라엔 거의 소개되지 않은 것 같은, 로버트 고다드라는 소설가. 평소 같으면 '뭐 그냥 그런 것 중 하나'라 생각하고 넘어갔을 수도 있는 소설이었는데 주인공의 상황이 눈길을 끌었다. '그저 그런 연극을 순회공연하고 있는 왕년의 스타'라니,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는 '현존하는 스타'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설정이다, 개인적으로는!ㅎ


나는 경찰검찰판검사 등이 미스터리물보다는 사립탐정 혹은 일반인(!)이 등장하는 미스터리물을 더 좋아하는데 이 작품은 전자보다 후자에 가까운 것 같다는 점도 맘에 든다. 또 미스터리물에 반전이 있는 거야 필수 조건이라 할 만 하지만, 로버트 고다드의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없이 반전'이라는 것도 관심이 가는 이유 중 하나고. 번역자가 부모성함께쓰기를 하고 있다는 것과 표지가 마음에 든다는 것도 이 책이 마음에 드는 사소한 이유들.



4. 라이프보트

얼마 전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의 인터뷰를 듣다가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에 인용되어 있다는 살인 사건에 대해 알게 됐다. 1884년에 한 배가 표류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식량이 모자라자 다수의 의견에 따라 배에 타고 있던 소년을 죽여 먹었다고. 만약 '정의'를 '다수를 위한/다수가 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때 소년을 죽어 먹은 결정은 정의로운 것이라고 봐야 하는가? 물론 나는 '정의'가 '다수를 위한/다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므로 그 결정 역시 정의롭지 않다고 한칼에 자를 수 있지만(전제가 틀리면 명제도 틀리는…뭐 그런 거ㅎ) '다수가 행복하면 행복한 사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꽤 어려운 문제일 거다. 그 어려운 문제를 바탕으로 해서 쓰인 소설이 바로 이 <라이프보트>라고 한다. 제목에서부터 그런 느낌이 팍팍…


작가는 건축과 엔지니어링 분야에서 일하다가 집에서 세쌍둥이를 기르고 혼자 독학으로 글쓰기를 공부했다고 한다. 변호사인 남편의 서재에서 책을 보다가 이 사건을 알게 되었고 영감을 받았다고. 세상에 어머님, 세쌍둥이 기르는 것만으로도 고단하고 시간이 빠듯했을텐데 어떻게 독학으로 글쓰기 공부를 하고 소설까지! 그것만으로도 이 소설을 눈여겨볼만한 이유는 충분한 것 같다만 뿌리가 된 실화 자체도 워낙 이슈가 될 만한 것이니 더더욱 관심이 간다. 하지만 표지는 음, 너무, 뭐랄까, 너무 직설적인 느낌이라 아주 맘에 들진 않네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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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설계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지옥설계도
이인화 지음 / 해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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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상; 깊은 밤 잠 못 이루고 컴퓨터 앞에서 게임에 빠져 있다가 그다음날 아침이면 어쩔 수 없이 현실로 돌아와 하루 종일 책상 위에 얼굴을 붙인 채 죽은 것처럼 지내는, 그러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또다시 다음다음날 아침이 될 때까지 게임에 빠져 있기…를 반복하는 어린 영혼들을 자주 접하곤 한다. 그런 영혼들 중에서는 현실에서 티없이 맑고 밝고 명랑한 영혼들도 있지만, 지독한 무기력에 빠져 무표정한 얼굴로 하루를 지내는 영혼들도 적지 않다. 현실에서의 그 무엇도 후자에게 자극이 되지 못한다. 그저 컴퓨터 전원을 켜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가상의 현실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


이인화의 <지옥설계도>를 덮으며, 그 영혼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책상 위에 축 늘어져 있다가 어깨를 두드리며 '어제도 게임 했어?'라고 물어보면 부끄러운 듯 고개만 설레설레 젓던 영혼들. 하지만 아이들은 그가 어젯밤에도 새벽 몇 시까지 게임을 하고 있었다며 목소리를 높였고, 뭔지도 잘 모르는 게임 이름들을 들어가며 몇 렙이나 업했다고 떠들어댔다. 그의 어머니는 집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잠도 잘 자지 않고 심지어 밥도 잘 먹지 않는 아들내미가 컴퓨터 앞에 앉아 소리내어 웃는 모습을 보고 내가 아는 그 애가 맞나 생각했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마음이 아파왔다.


이 소설 속의 준경도, 유진도, 한때 분명 그런 영혼 중 한 명이었을 거다. 게임 속에서 가상의 동지를 만나 가상의 적들과 가상의 전투를 치를 때면 가상의 내가 현실의 나보다 훨씬 강력해지고 위대해지고 훌륭해진 느낌에 가슴이 뿌듯했을. 그러다가 컴퓨터를 끄고 현실로 돌아오면 강력하지도 위대하지도 훌륭하지도 않은 스스로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기가 죽었을.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유진은 게임 폐인 생활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 준경에게 "너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라고 말했던 거겠지...



이 책, <지옥설계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는 이유진이라는 인물의 살인 사건을 '기관원'인 김호가 추적해 나가는 추리 소설 형식의 이야기다. 두 번째는 이유진이 만든 최면의 세계로, 인페르노 나인이라는 이름이 붙은 가상의 현실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갑오징어 먹물 리조토'라는 제목이 붙은 두 번째 세계의 설계도이다. 이 '갑오징어 먹물 리조토'는 이유진이 만든 이야기로, 3차대전 이후의 세계를 배경으로 경희라는 여자와 수연이라는 남자의 사랑 이야기가 표면에 등장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들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이 존재하는 세계의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경희와 수연이 사는 세계는 3차 대전 이후의 세계이다. 경희는 지금의 인간과 같은 '단백질 생체 인간'이지만 수연은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 아니라 DNA 정보와 나노세포가 결합된 '초신경 생체 인간'이다. 3차 대전 후 생명계가 오염되고 아사와 병사가 창궐하자 인간들은 거대한 컴퓨터 서버 장치를 설치해 220억명을 수용할 수 있는 디지털 가상 세계-정신계를 만들고 자기 두뇌의 가장 세세한 부분까지 디지털화해 완벽하게 복사함으로써 불사의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아날로그에 대한 회귀 본능이 어느 정도까지 남아 있게 마련인지라, 초신경 생체 인간들 중에서는 자신이 생명계에서 존재하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을 생명계와의 접촉으로써 달래려 하는 사람도 생겨나는데, 그 중 한 명이 바로 수연이다.


수연은 경희라는 단백질 생체 인간을 사랑하지만 정신계에서만 가능한 전자극 유희-영화와 뮤지컬과 게임이 혼합되어 있는 형태의 예술-의 배우가 되고 싶어하고, 결국 경희와 헤어진다. 전자극 유희 분야에서 명인으로 이름을 떨치던 어느 날, 알렉스 리드코프라는 신진 기예와의 대결에서 패하고 슬럼프에 빠진다. 이를 극복하고 기사회생하기 위한 자극을 찾다가 오랜만에 생명계를 방문하고, 익숙한 맛의 갑오징어 먹물 리조토를 먹게 되고, 그것을 만든 여인이 경희가 단성생식을 통해 얻은 여인-딸-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경희가 오랫동안 자신을 믿고 기다려왔음을, 경희의 사랑이야말로 그 후의 생애에서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을 고귀한 것이었음을(P.377) 깨닫는다. 이 깨달음은 수연이 인생을 건 공연을 할 수 있게 하는 동기가 되고, 이 공연을 끝낸 후 수연은 자살한다. 


-는 것이 '갑오징어 먹물 리조토'의 줄거리다.



사실 '갑오징어 먹물 리조토'는 소설 전체에서 가장 작은 비중을 차지한다. 가장 큰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첫 번째 이야기이고, 그 다음은 두 번째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갑오징어 먹물 리조토'를 주목했던 건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든 생각이 결국 '갑오징어 먹물 리조토'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과학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해 인간의 존재까지 모두 다 변해버리는 세상이 와도, 그 세상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인간으로서, 인간과 함께 존재하지 못한다면 결코 '발전'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 이것이 내가 느낀, 너무나 당연한 명제였다.


소설 속 공생당의 메시지처럼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의 게르니카, 수많은 게르니카를 살아간다. 전쟁을 일상화한 나머지 자기 삶의 비참함을 인식하지도 못하는 우리에게, 현실은 지옥과 다름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지옥같은 삶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가상의 세계로 도망치고 싶어한다. 설계도를 얻지 못하면 빠져나올 수 없는 세계로. 세상을 위해 나를 소모하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잊을 수 있고, 내가 정복하고 사랑하고 가꾸면 되는 세계로. 그 꼴꼴난 현실 세계보다 훨씬 행복하고 보람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는 세계로.


하지만 결국 그 세계는 이유진이 만들어낸 최면의 세계일 뿐이다. 환상이란 말이다. 내가 거기서 수많은 시간 동안 수많은 성을 만들고 수많은 영토를 정복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고 할지라도, 이 세계가 지옥이라면 그 세계 역시 지옥이다. 겉은 아름답고 풍요로워 보일지언정, 전쟁이 지배하고 있어서 인간이 무의미한 고통을 겪고 무의미하게 죽어나가는 유배지인 것이다. 최면의 세계 역시, 현실 세계를 본따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므로, 이유진이 만든 것은 결국 지옥일 뿐이다.


물론 수연의 말처럼, 우리는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지옥에서 스스로 신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가 놓인 곳이 지옥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결국 인간이 해야 하는 일은, 이곳을 지옥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아닐까. 안준경이 김호에게 '이 땅의 가장 약하고, 어리석고, 못 가진 사람들 속에서 나타난 저희들은 반란에 나설 것이고 그것은 혁명이 될 겁니다.'라며 자신들을 도와 달라고 제안하는 장면으로 소설이 끝나는 것도 현실을 바꾸지 않는다면 가상 현실로 도피해 봤자 아무 것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약함과 어리석음과 못 가짐을 깨닫고, 약하고 어리석고 못 가진 또다른 이들과 연대하여 우리의 세상을 선택해야 한다는, 그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바로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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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물소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여울물 소리
황석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의 말까지 다 읽은 후, 책 표지를 다시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꼼꼼히 살펴 보았다. 분홍색 종이 위에 그려진 두 남자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채 무언가 말을 하고 있는 남자와 그 옆에서 북을 치고 있는 상투머리의 남자. 책 속에서 신통이 책을 읽을 때 고수를 데리고 다녔다는 구절을 본 기억은 안 나는데. 옛날에 전기수들이 고수를 데리고 다니기도 했나? 싶어서 검색해 보았더니 전기수 중에서는 고수나 소리꾼과 동행하며 자신이 읽는 이야기의 흥을 더하던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건 신통이고, 이건 서일수로구나, 하며 표지의 두 남자를 다시 보니 괜히 친근감이 느껴졌다. 책을 읽기 전엔 그냥 별 의미 없는 남자 둘의 그림이었는데, 책을 읽고 나서 다시 보니  파란만장한 삶을 산 두 남자의 그림이었다. 이렇게 없던 의미가 생겼다는 건, 그들의 이야기를 내가 짚어 나가 보았다는 데서 연유하는 것.



그렇다. <여울물 소리>는 이신통이라는 남자의 이야기고, 이신통이라는 남자와 함께 조선 땅을 떠돌았던 서일수라는 남자의 이야기고, 이신통과 서일수가 따랐던 천지도를 세우고 전파한 최씨 대신사-신사들의 이야기고, 그들이 전한 진리를 믿었던 박도희라는 남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인물들 하나하나의 삶이 모두 다 이야기다. 그 이야기들이 여울물처럼 흘러가고 흘러가고 또 흘러가며 이어지고, 중간에 다른 물과 합쳐지고 천방지고 지방지고 소쿠라지고 펑퍼지며 넓은 데로 나아간다. 조그맣게 시작된 개울이 흘러 흘러 큰 강에 도달하듯이, 작은 여울의 물이 합쳐져 커다란 강물 속에 섞여버리듯이.



이신통은 서자이고, 어릴 적부터 글 읽는 재주를 가졌던 사람이다. 조선 후기의 양반이므로 연애 결혼을 할 리 만무하고, 집안에서 정해준 여자와 결혼하여 딸도 갖지만 그녀에 대한 애정 같은 건 없(다고 본)다. 어릴 땐 총명하다 칭찬도 들었고 나름 공부도 한 듯 하지만 어쨌든 서자이니 제대로 된 벼슬을 할 수도 없고, 매관매직이 당연한 시대에 제대로 된 벼슬 자리도 이미 없다. 과거를 보겠다고 집을 나온 지 일 년이 다 되었지만 집에 갈 생각 따위 없다. 어머니가 편찮으시고 아내가 곧 출산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세상의 경난을 배우려고 집을 떠났'다며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참 대책 없고 책임감 없는, 무능한데도 뻔뻔한 양반이다.


그러나 사실 그가 대책 없고 책임감 없는 양반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건 꿈 자체를 꿀 수 없게 했던 시대적 제약 때문이었을 게다.  이신통이 백 년, 이백 년 일찍 태어났더라도 그렇게 일찍 '책임감 없는 길'에 올랐을까? 대원군과 고종이 나라를 지배하던 때, 서양 문물이 들어오고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을 두고 대립하던 때, 그래서 결국은 일제에게 국권을 찬탈당하도록 역사가 흘러가던 그 때에 어떤 양반이 어떤 야심을 품을 수 있었겠으며 어떤 꿈을 꾸고 어떻게 그것을 이루어낼 수 있었겠는가. 꿈을 꾼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시대에, 그는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믿지 않았을 테고, 그래서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이야기를 불특정 다수에게 읽어주는 일밖에 할 수 없었을 테다. 자기가 주인공인 이야기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테니.


하지만 격변기를 살아가는 개인이란 태풍에 휩쓸려 날아가는 나뭇잎과 같은 것이라, 이신통의 삶 역시 격변기에 휘말린다. 서일수 주변에서 기록된 것을 읽고 세상의 모습을 관찰하던 데서 그치지 않고, 놀이패가 되어 재담을 하고 발탈놀음을 하며 자기 안에 있었던 '말들'을 몸 밖으로 꺼내놓기 시작한다. 그믐이라는 여인을 만나고 연옥이라는 여인을 만나서 사랑다운 사랑도 해 본다. 천지도에 입문하고 신사의 말씀과 행적을 경전으로 쓴다. 신사의 죽음을 수습하고 호서 활빈당의 유사 노릇도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진짜 형' 같던 서일수의 죽음을 경험하고 이복형을 죽이며 사랑했던 여인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그리고 결국, 관군의 총에 맞아 죽는다. 그의 무덤을 제대로 만들어준 사람도 없었고, 사랑했던 여인이 낳은 아들을 죽기 전에 한 번 만나보지도 못한다. 덤으로 사는, 죄 많은 인생이, 그렇게 쓸쓸히 저문다.


과연 이신통이라는 한 개인의 삶만 그러했을까. 천지도-동학에 입도하지 않았더라도, 굽이치는 역사의 물결에 자신이 진정 이루고 싶었던 꿈 같은 건 생각도 해보지 못한 채 굴곡진 시간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신사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데 충실하는 것 말고 없다는 신념으로 천지도인으로서의 삶에 생의 순간을 모두 바치면서 개인적인 삶의 소소한 행복 같은 건 내 것이 아니라고 믿었던 이신통을 보면서, 이 소설은 이신통이라는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갔던 수많은 이신통들에 대한 이야기로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찌 보면 지금도 끊임없이 이신통들이 만들어지고 있을테고, 이신통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을 테다. 나 역시 한 명의 이신통인지도 모르고.



결국 모든 게 이야기에서 출발하고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것이리라. 이신통이 읽고 만든 것도 이야기지만,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갖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한 사람이 곧 하나의 세계인 것이다. 역사라는 큰 힘에 나약한 개인의 삶이 빨려들어가는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며 만들어내는 각각의 세계들이 만나고 부딪치고 합쳐져서 더 큰 세계를, 더 큰 세계를, 더 큰 세계를 이루어갈 것이다. 그 세계 하나하나가 또 각각의 이야기를 만들 것이고...이렇게 이야기가 이어지고, 전해지며, 계속된다는 것이, 결국 사람이 살아왔고 살아가며 앞으로도 살아가리라는 증거겠지.



약간 아쉬운 건 백화/그믐을 제외한 여성 인물들의 삶이 너무 단편적으로 나타나 있었다는 것. 구례댁도, 동이 어멈도, 금산댁도, 자선이도, '어디선가 본 듯한' 인물 같아서 아쉬웠다. 남성 인물들의 이야기에 비해 빈약하다는 느낌이 들었달까. 사실 처음에 <여울물 소리>를 펼치고 몇 장을 읽지 않았을 때는 연옥이 주인공일 거라고 예측했던 탓에 책을 읽으면서 '어 이상해 아닌가 보네...어 아니네 아니야 아니었어...;'해야 했던 게 결국 아쉬움으로 남은 것 같다. '관기의 딸'이라는 구절을 보고 대충 춘향이 같은 여자인가보다 생각했고, 양반과 결혼한 관기의 딸이 유랑하는 남편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이야기 아니면 남편이 유랑하러 떠난 후 겪게 되는 신산한 삶의 이야기겠거니 했지 그저 이신통이라는 남자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관찰자에 그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지라. 하지만 뭐, 이야기를 쓴다는 건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작업일 테니까, 이 아쉬움 역시 이신통의 삶에 집중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 때문에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이해해야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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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은, 개인적으로, 나쁜 일이 너무 많은 한 달이었다. 그리고 그 일들 중 거의 대부분은 새해가 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신간페이퍼를 쓰려고 노트북을 펼쳤을 때까지만 해도 마음이 개운치 않았...지만, 새로 출간된 책의 표지와 제목을 훑어 보고 있으니 아주 조금은 기분이 나아지는 것도 같다. 어쨌든간 보기 좋은 것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조금이나마 좋아지는 게 사람이니까. 12월의 소설 신간으로는 어떤 것이 선정될지 궁금해하며, 내가 꼽아보는 신간 리스트.



1. 헬로, 미스터 디킨스 - 한국 작가 9인의 찰스 디킨스 테마 소설집


애정하는 승열오라버니가 진행하시는 EBS 영미문학관에서 작년 12월, 찰스 디킨스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며 디킨스의 작품을 읽어 주었다. 그 때 어떤 청취자께서 서점에 갔다가 이 책을 보셨다며 사연을 보내셨는데, 참여한 작가들이 워낙 쟁쟁해서+_+ 기억해두었었다. 이번에 생각나 검색해 보았더니 바로 나오는구나, <헬로, 미스터 디킨스>. 


디킨스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세 작품, <두 도시 이야기>와 <크리스마스 캐럴> 그리고 <올리버 트위스트>를 테마로 김중혁, 백가흠, 배명훈, 최제훈, 김경욱, 윤성희 등 '믿을 만한' 작가들이 써낸 소설들이 엮여 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캐럴>이나 <올리버 트위스트>도 좋은 소설이지만 어릴 때 <두 도시 이야기>를 꽤 감명 깊게 읽은 기억이 있어 꼭 읽어 보고 싶은 책이다. 특히 광주와 아테네를 배경으로 펼쳐진다는 백가흠의 소설 <수도원 오르는 길-더 송The Song 4>와 윤성희 버전의 크리스마스 캐럴, <날씨 이야기>에 관심이 간다. 부산과 서울에 대한 소설이라는 김중혁의 <픽포켓>은 내용 자체보다 김중혁이라는 이름 때문에 끌리고. 부산과 서울이라니, 음, 좀, 음, 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김중혁 작가의 단편소설은 해가 갈수록 점점 더 매력적이어지고 있으니까!! 기대감 상승!!!!



2. 사랑과 욕망의 변주곡 - 안톤 체호프의 에로티시즘 단편선


솔직히 책 제목도, 책 표지도, 개인적인 취향과는 거리가 멀지만(ㅠㅠㅠ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리스트의 두 번째에 올려놓은 것은 오직, 단지, Only, 안톤 체호프라는 작가의 이름 때문이다. (사실 '에로티시즘 단편선'도 별 매력 없기는 마찬가지...하아;;;;)


<바다에서>부터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까지 열 여섯 편이 실려 있다는데,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말고는 다 처음 보는 소설이다. 체호프 단편의 그 씁쓸하면서도 짜릿한 맛을 꽤 좋아하는 편이라 우리 나라에 소개된 체호프 소설은 꾸준히 찾아봤던 독자로서 안 찾아 읽을 수 없는 책이다. 아무리 책 제목과 부제와 표지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도...하아;;;;;;


그래도 이 책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은(체호프의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것 빼고) 작품이 발표 연도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다는 것. 출판사의 책 소개에 쓰인 구절처럼 '여자들에 대한 체호프의 시선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를 자연스럽게 느끼'는 데 관심이 많아서라기보다는 원래 내가 책 읽는 방식이 발표 순서대로 좌라락 찾아 읽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보통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들은 작가의 대표작 중심으로 읽게 되는 터라 거의 그렇게 읽지 못앴고,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은 거의 그런 방식으로 읽고 있는데, 이번 책에서는 내게 '고전'인 체호프의 소설을 그가 쓴 시간 순서대로 읽을 수 있다는 게 꽤 매력적이다. 어떤 작품에서 체호프 특유의 아릿한 쌉쌀함을 느낄 수 있을지, 궁금하다.



3. 인질의 낭독회/ 오가와 요코


오가와 요코의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워낙 행복하게 읽었다. 사람의 감정선을 아무렇지 않게 툭, 건드리는 류의 일본 영화나 소설을 꽤 좋아하는 편인데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 나에겐 그런 소설 중 하나였다. 보들보들하고 순정 만화 같은 거, 나도 울테니까 너도 같이 울자, 뭐 이런 거 말고, 덤덤하고 소박하고 어떨 땐 무뚝뚝하면서도 약간은 짓궂은 거,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 남을 팍 울려버리는, 그런 거 말이다.


어쩌다 보니 <박사가 사랑한 수식> 이후로 그녀의 소설을 한 권도 읽지 못했던 내게 <인질의 낭독회>는 꽤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만한 책이다. 오가와 요코와 인질? 너무 안 어울리는데? 싶었는데,  관광객 납치 사건의 인질 여덟 명이 낭독회를 벌인다니. 영화나 TV에서 본 '인질 납치 사건'을 떠올리자면 경찰과 납치범들의 총질과 고함이 오가야 할 것 같은데.


만약 인질들이 엄청나게 독특한 사람들이었다면 이제까지 나열한 이유만으로도 특별한 흥미가 안 생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마음이 동한 것은, 이 책의 인질들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조숙한 안경집 아들, 남편을 잃은 여자, 정리정돈에 꽂힌 할머니, 불량품 알파벳 비스킷을 좋아하는 여자, 눈이 하나뿐인 인형을 만드는 노인 등등. 글로 쓰면 뭔가 사연을 갖고 있을 것 같지만, 사실 내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인물들 아닌가. 평범하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일반적으고 보편적인 정도의' 상실감과 패배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걸 테고. 그들의 슬픔을, 눈물이 묻어있는 목소리를, 읽어 보고 싶다. 지금의 내게는 그런 독서가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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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평가단이 되고 처음 수행하는 미션. 11월에 나온 소설 중 눈에 띄는 것 다섯 편을 골라 보았다.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니었는데; 고르다보니 묘하게도 한국/일본/외국 소설이 골고루 섞였...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또다시 목록을 살펴 보니 역시 한국 소설이 많구나-_- <능력자>라든지 <노랑무늬영원><불을 지피다> <당분간 영원>, 아멜리 노통브나 우타노 쇼고의 신간 등 흥미로운 책들이 많이 나왔던 10월에 비해 눈에 띄는 책들이 많지 않은 건 사실이었지만-뭐 연말이고 12월 대선도 있으니 그럴 만 하다 싶다. 12월은 새로 나온 책을 사다 읽기보다는 한 해 동안 사놓고 못 읽은 책을 한 해 가기 전에 읽는 달일 테니까. 하하하.


여튼간! 올해를 보내기 전에 읽고 싶은 책 다섯 권, 리스트업 :)



1. 모피아 - 우석훈 지음, 김영사


첫 번째로 꼽은 책은 '올해의 다작 작가' 우석훈 씨의 <모피아>. 도대체 우석훈은 올해 몇 권의 책을 내는가...싶어 검색해 봤더니 공저가 아닌 책만 네 권. <1인분 인생>, , <시민의 정부 시민의 경제>, 그리고 이 책 <모피아>. 앞의 두 권은 읽었고ㅋ <시민의 정부 시민의 경제>는 아직 못 읽었는데, 그보다 <모피아>를 먼저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아무래도 소설이니까 더 금방 읽히지 않을까? 게다가 본인 스스로 나꼽살에서 재미있다고 여러 번 얘기하기도 했고ㅎㅎ 


줄거리를 살펴보니 주인공들의 직업 자체가 보통이 아니다. 한국은행 조사팀장, 펜타곤 소속 동아시아 담당 무기상, 청와대 경제특보, 재정경제부 고위공무원들 등등...아마도 책을 읽다 보면 현존하는 '그분'들을 목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특히나 '이현도'라는 모피아 인물은, 너무 당연하게도 '이헌*'와 연결되지 않는가.


몇년 전까지만 해도 정치경제에 관심이 높은 사람들이나 알고 있는 용어였던 '모피아'가 이제는 누구나 아는 단어처럼 널리 쓰이고 있는 지금, 유력한 대선 후보이신 유신공주님께서는 국민대통합을 이루겠다며 악세사리처럼 달고 다니던 김종인을 걷어차 버렸고, 경제민주화라는 허울도 벗어던진지 오래다. 이런 때에, 정말로 경제민주화를 이루려 하는 정부가 이 땅에 들어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 끝은 희망인가 파국일까. 궁금해진다. 표지가 더 매력적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2.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 하타사와 세이고 & 구도 치나쓰 지음, 추지나 옮김/ 다른


제목과 지은이와 책 표지와 출판사 모두 '마구 땡기는' 건 하나도 아닌데...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두 번째로 올려놓는 것은 이 책이 화제가 됐던 연극을 소설화한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지난 여름, 동명의 연극이 무대에 올라왔고 여러 언론에서 화제가 됐었다. 당시 손석희의 시선집중 토요일 코너인 '토요일에 만난 사람'에 배우 손숙 씨가 출연해 이 연극에 대해 언급했었는데, 직업이 직업인지라-_- 매우 흥미롭게 들었지만 막상 연극을 보진 못했다. 직장에서 늘 마주치고 느끼는 그 공포를, 굳이 극장에서까지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비겁한 변명이겠지.


사실 이 책의 내용은 내게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다. 수많은 아이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이 따돌림당하지 않기 위해 또다른 아이들을 따돌리며 피해와 가해를 주고받고 있으니까. 학교 제도 자체를 군대식으로 형성한 일본과 그 일본의 제도를 수혈받아 학교를 만들어 낸 한국에서 이지메/왕때 문제를 없애겠다는 건 학교 제도 자체를 바꾸지 않곤 불가능한 미션이다. 이 책 역시 말끔한 대안이나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진 못할 거다. 그래서 내게 이 책은 '이미 많이 본 장면'을 글로 확인하는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결국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사람은, 학교를 졸업한 지 많은 시간이 지난 탓에 지금의 학교가 어떤 모습인지 잘 모르는 '부모님'들이 아닐까 싶다. 내 아이가 이렇게 피해를 입을 수도 있고, 이렇게 가해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소설 속 부모들처럼 자신 역시 아이의 위치에 따라 극도로 뻔뻔하고 파렴치하게 변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게 '특별한 몇몇 찐따들'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우리 모두의 문제로 느껴질 거고, 바뀔 수 있을 테니까.



3. 펭씨네 가족 - 케빈 윌슨 지음/ 오세원 옮김, 은행나무


정형화된 가족이 아닌, 특이하면서도 웃기는 가족 이야기는 대부분 재미있다. 이 책 제목과 표지만 봤을 때는 <네 가족을 믿지 마라> 시리즈가 떠올랐었는데, 줄거리를 읽어 보니 부모보다 아이가 더 특이해 보이는 <네 가족을 믿지 마라>와 달리 아이보다 부모가 더 특이한 인물로 등장하는 모양이다.


등장인물은 펭 씨 부부와 애니 & 버스터 남매. '삶과 예술을 철저히 결합시키는' '극단적인 행위예술가' 부모라니, 함께 살기 녹록친 않겠다ㅋ 예술가 부모의 재능을 물려받은 탓인지 영화배우와 소설가로 성인의 삶을 살아가던 남매가 '실종된 부모 찾기'라는 과제를 수행하며 부모의 세계를 벗어나 자기의 세계를 찾아나서는 이야기라면 성장 소설로서의 모습도 갖고 있을 테고.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을 다룬 이야기라면 무엇이든지 성장 소설일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긴 하지만-꼭 '어린아이'나 '부모가 아닌 자식'이 아니더라도!-세상은 나와 달리 주인공의 나이로 성장 소설이란 장르를 구획화하고 싶어하니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은 출판사의 추천사가 너무 많고 화려하다는 점. '천재적' '다른 그 어떤 소설과도 비교 불가능' '철저하게 아름다운 소설'이라니...이렇게 독자들의 기대를 추천사로 부풀리려는 소설일수록 실제 재미는 별볼일 없는 경우가 많다보니  좀 그렇네. 과연 어떨까. 궁금하도다.



4. 이상 소설 전집 - 이상 지음/ 권영민 편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0

 

대학 때, 일제 강점기 문학을 전공하셨던, 특히 이상과 이광수의 문학에 조예가 깊으셨던 전공 교수님이 계셨다. <한국 현대 문학의 배경>이라는 수업을 2학년 때 매우 흥미롭게 듣고, 별로 좋은 학점을 받지 못했음에도(B+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냥 그 수업이 듣고 싶어 4학년 때 <한국 근대문학 원전 읽기>라는 교수님의 수업을 신청했다. 


막연히 여러 작가의 여러 작품을 읽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수업의 오리엔테이션 날, 교수님께서는 이상의 소설을 한 학기 동안 읽을 것이라고 하셨다. 나 역시 그전까지는 한국에서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보통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상=신기한/특이한/이상한 사람, 이상 소설=어렵고 복잡한 소설'이라고 생각해 왔기에, 이번엔 B+보다 더 못한 학점을 받는 거 아냐-_- 싶어 수업을 바꿔야되나 잠시 고민했다. 그렇지만 그 때가 아니라면 이상의 소설을, 그것도 원전으로 읽을 기회란 살면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았다. 학점을 좀 못 받더라도 그의 소설을 읽어 보고 싶었다. 그리고, 한 학기 동안 그의 소설 12편을 읽었다. 교수님의 흥미로우면서도 날카로운 해석이 수업을 더 풍성하게 해 주었다. 그 때의 강렬한 기억 때문인지, 이상은 내게 대학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아이콘(!) 중 하나이다. 


이상의 소설 전집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0번째 책으로 나왔다. 편집자는 이상 연구의 권위자 중 한 분인 권영민 교수. 게다가 저 표지는 이상의 여러 초상화 중 내가 좋아하는, 구본웅의 작품! 보자마자 오오오!! 라는 탄성을 내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의 전집들 중 표지로서는 가장 괜찮은 것 같다ㅎ 다른 전집을 이미 가지고 있음에도 또 눈독들이게 되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판 이상 소설 전집. 땡기지 않을 수 없는 신간이다.



5.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 방현석 지음, 이야기공작소


오늘 남영동1985를 보고 왔다. 생각보다 관객이 너무 없어 안타까웠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관객이 많지 않은 게 당연하겠다 싶었다. 영화를 본 후 유쾌하거나 신나거나 즐겁기는 커녕 슬프고 비참해지는데, 그런 걸 돈 내고 하라면 몇 사람이나 자진해서 하겠나 싶은 생각이 들어 버리는 거다.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 직업적 의무 혹은 책무라는 이름으로 '애국'이라는 허울 뒤에 숨어 거짓을 날조하고 자신을 잃게 하고 삶을 부숴뜨리고......가해자에게 감정 이입하기엔 가해자의 존재가 너무 끔찍하고, 피해자에 감정 이입하기엔 피해자의 고통이 너무 소름끼치고......많은 사람들이 보았으면 좋겠지만, 보라고 강요하기 힘든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고통과 마주하기 힘들어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는 것이 어떨까. 


방현석 작가가 아주 오랜만에 낸 신작이 고 김근태 의장의 이야기라 하여 신기하다 했는데, 검색을 하다가 김근태 의장이 돌아가셨을 때 방현석 작가가 추도사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 그래서...라 중얼거리며 추도사 전문을 읽다가, 이 부분에서 스크롤을 멈췄다. 그리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쉴 수밖에 없더라.


- 우리는 정직과 진실을, 민주주의를 목표로 여긴 반면에 당신은 그것을 이루려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정직과 진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것을 온전히 살아버린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이 옳았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불운은 당신의 '실패'를 통해서만이 당신이 옳았음을 입증할 수 있었다는 역설입니다.


이 책에서 김근태 의장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서울구치소로 옮겨 왔을 때를 묘사한 부분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한다.


- 내가 지켜낸 이름과 지켜 내지 못한 이름, 나를 모욕하고 유린했던 이름, 끝없이 그리운 이름, 이름들.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안간힘으로, 그들이 불러준 내 이름을 잊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그해 겨울 나는 죽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표면적이나마 '자유'랍시고 이런저런 권리들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 우리보다 먼저 살았던 이들이 흘린 눈물과 핏물 때문이라는 걸 잊지 않기 위해서는, 알고 공부하고 기억하고 알리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공중파 뉴스에서 '새누리당 김근태 의원'의 사진을 고 김근태 의장의 사진으로 잘못 게재하여 매우 큰 물의를 빚기도 한-_- 때에, 김근태가 누구인지, 군부 독재 정권 하에서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으며 그로 인해 어떤 핍박과 억압을 당해야만 했는지, 알지 않는다면 역사는 분명 되풀이되겠지, 바로 12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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