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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노래
김중혁 지음 / 마음산책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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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말할 것 같으면,
김중혁소설가님의 소설보다 에세이를 먼저 좋아했다. 먼저 읽은 건 소설이었다. 펭귄뉴스를 언제 읽어봐야 하는데…하다가 악기들의 도서관을 먼저 읽었고, 좀비들을 읽었고, 그리고 나서야 펭귄뉴스를 읽었다. 좀비들은 몇 개의 단편이 합쳐진 것 같은 장편이었고, 악기들의 도서관은 한 장편이 몇 개의 단편으로 나뉜 듯한 소설집이었다. 펭귄뉴스는 (죄송합니다) 다른 책들보다 덜 마음에 들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그랬다.

이렇게 세 작품을 다 읽고서 남은 건 아쉽게도 아쉬움이었다. 싫지는 않은데 막 좋지도 않은. 나쁘진 않은데 팍 꽂히지도 않는. 그런 기분으로 대책 없이 해피엔딩을 읽었다. 처음엔 김연수소설가님을 연모하는 마음 때문에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보니 의외로 김연수소설가님의 유머만큼 김중혁소설가님의 유머도 내 코드에 잘 맞는 거다(이거 참 호칭이 너무 길다. 김중혁소설가님을 따라 김연수소설가님=K2, 김중혁소설가님=K3으로 써야겠다. 약간 아웃도어 상품 얘기 같아지겠지만ㅋ). K2님이 유려하면서도 능청스럽게 유머를 구사한다면, K3님은 약간은 소심한 듯하면서도 엉뚱하게 툭툭 던지는 말로 독자를 웃긴달까. 여튼간 나는 육성으로 끼득끼득 낄낄낄 으하하하하하!!!!! 하고 웃으며 그 책을 읽었더랬고, 그 이후로 K3님에 대한 애정을 이전보다 더 깊이 가졌더랬다.


K3님의 에세이 3종세트 - 대책 없이 해피엔딩, 뭐라도 되겠지, 그리고 모든 게 노래!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이후 발간된 K3님의 소설들은 이전의 소설들보다 훨씬 더 좋았고-좀 우스운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미스터 모노레일을 읽으며 우와! 김중혁!! 김중혁!!! 김중혁!!!! 하고 기뻐했었다ㅋㅋㅋㅋ-심지어 책날개에서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진까지도 이전의 사진보다 마음에 들었다(이거 꼭 찍어야 한다니까 찍기는 찍는데 사실 별로 찍고 싶지는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찍으면서도 계속 찍고 싶지 않…투덜투덜…하는 듯한 느낌의 표정이랄까). 나는 K3님의 소설과 에세이를 모두 아끼고 기대하는 독자로 탈바꿈했다. 뭐라도 되겠지, F1/B1, 그리고 이번에 읽은 모든 게 노래까지.


대책 없이 해피엔딩에 수록된 K3님의 자화상 & 모든 게 노래 책날개에 실린 K3님의 (심드렁한 표정의) 사진ㅋ




노래를 잊는 순간, 우리는 땅으로 곤두박질치게 돼 있다.

뭐라도 되겠지를 읽기 전엔 '뭘로 날 웃겨주려나'라고 기대했다. 그 다음이 '이번엔 또 어떤 그림을 그렸으려나'였고ㅎ 이번엔 좀 달랐다. 모든 게 노래에 수록된 글이 씨네21에 연재될 때부터(아니다 한겨레21이었나? 둘 중 하나였는데 아오ㅠ) 듬성듬성 읽어왔기에 이번엔 재치보다 감성이 터지는 책일거라고 예측했기 때문. 내가 좋다고 생각한 음악을 칭찬하시는 글도 여러 번 읽은 터라 글의 소재가 된 음악들이 가장 궁금했다.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이 몇 명이나 나올까? 모르는 뮤지션은 몇 명이나 나올까? 따위의, 1차원적인 호기심ㅎㅎ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 경험과 K3님의 경험들을 비교하며 책을 읽게 됐다. 책에 실린 MD 플레이어의 그림을 보고 정말이지 오랜만에 책상 서랍 속에서 자고 있던 MD를 꺼내 보았다. CD 플레이어의 그림을 보고 '어 나도 디스크맨인데!!'하면서 즐거워했다.

CD플레이어든 MD플레이어든, 결국 남는 건 '기계'가 아니라 '음악'이라는 생각이 든다.


K3님의 다른 에세이, 특히 뭐라도 되겠지에 실린 글들과 모든 게 노래에 실린 글들을 비교해 읽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모든 게 노래만 읽고 아직 뭐라도 되겠지를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특히 강추할 만하다. 마음산책에서는 K3님의 책을 널리 알리고 싶어하는 독자들을 위해 '김중혁 에세이 세트'를 출간해 주시기 바랍니다ㅋㅋㅋㅋㅋㅋㅋ

모든 게 노래에 실린 라디오 그림. 그리고,

뭐라도 되겠지에 실린 라디오 그림. 위의 그림보다 좀더 투박하고 정겹다.




필사적으로 음악을 들었던 시절

롤링스톤즈보다 비틀즈를 좋아한다는 말에 반가워하다가도 퀸의 노래를 좋아해본 적이 없다는 말에 왠지 모를 서운함을 느꼈고(프레디머큐리도 서운해할거야ㅠㅠ) 한희정과 이아립과 오지은과 야광토끼와 루싸이트토끼가 이어 나올 때 괜히 싱글거리다가 클래식과 힙합과 아이돌 얘기에서 이유 없이 흠칫 했다. 다양한 장르 사이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즐겁게 살자'는 삶의 모토를 실천하고 있는 K3님이 부럽기도 하고 멋져보였다. '어떤 노래 좋아해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아 뭐 그냥…되는 대로 들어요…'라고 대답한다만 사실은 힙합 안듣고 클래식 안듣고 아이돌 음악 안듣고 이른바 최신가요라 불리는 노래들은 거의 다 안듣는 편향적 리스너다보니ㅠㅠ (솔직히 남들이 '인디음악'이라 하는 그 음악들을 성실하게 챙겨 듣는 것도 엄청나게 힘들다. 너무 많은 뮤지션들이 생겼다 없어지고 없어진 줄 알면 다시 나타나고…)


K3님이 언급하신 노래들만큼이나 K3님의 목소리가 더욱 익숙한 독자라 그런지(나는 예에에전에 문학라디오 '문장의 소리'를 진행하실 때부터 지금 빨간책방의 적임자 역할을 하고 계시는 때까지, 꾸준히 K3님의 방송을 청취하고 있다), 눈으로 활자를 따라읽어내려가는데 K3님의 목소리가 자꾸 떠올랐다. 주머니에 접어 넣어 둔 탓에 꼬깃꼬깃해진 메모지를 주섬주섬 펼쳐 거기에 적혀 있던 이야기를 천천히 읽어주는 아저씨(!)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듯한 기분.


분명 K3님은 조용한 카페에서 시크한 표정으로 맥북을 펼쳐 놓고 아이팟 클래식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글을 쓰셨을텐데 왜 눈앞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런 거지?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K3님의 글 때문이라는 결론을 잠정적으로 내렸다. 트렌디한 소재를 세련되게 다루시는데도 묘하게 복고적이고 소박한 느낌이 묻어난다는 인상을 자주 받았기 때문인 듯. 이 책을 오디오북으로 내시면 재미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K3님이 글 읽어 주시고, 글에 언급된 노래 나오고, 다음 글 읽어 주시고, 다음 노래 나오고…아 물론 음악 저작권법 때문에 절대 남는 장사가 되진 않을 것 같지만;;;;




닉 혼비의 글을 읽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내가 쓴 글 같아서 놀랄 떄도 많다.

K3님이 닉 혼비의 글을 읽으며 깜짝깜짝 놀라시듯, 나 역시 K3 님의 글을 읽으며 깜짝깜짝 놀랐다. '어 나랑 비슷해!'하고 혼잣말을 내질렀다. 좋아하는 보컬의 특성, 하와이의 '쎄라비'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이아립의 얼굴, 해가 지고 노을이 질 때 쯤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만나던 순간들, 더이상 챙겨 듣고 챙겨 보지 않는 명작들/걸작들 이야기, 어찌 이렇게 모였을까 싶은 공연장의 관객들…에 대한 문장들을 읽으면서 그랬다.


내가 좋아하는 보컬은 대부분 '무심한 목소리'다. 이게 참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데, 감정이 없다기보다는, 옳고 그른 것이나 좋고 나쁜 것에 경계를 두지 않는 목소리라고 해야 할까. 자신의 감정을 애써 설명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던져두고 멀리서 바라보는 목소리라고 해야 할까. 도무지 설명하기 힘들지만(게다가 이런 비교 위험하고 가끔 기준이 오락가락하긴 하지만), 롤링 스톤즈보다 비틀스를 더 좋아하고, 재니스 조플린보다 니코를 더 좋아하는 것도 다 이런 취향 때문이 아닐까 싶다. (P.38)


희한한 것은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이아립의 얼굴이 허공에 보인다는 거다. 목소리가 어찌나 시각적인지, 조금은 시니컬한 표정으로 씨익 웃으면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아립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P.101, '조금은 시니컬한 표정으로 씨익 웃'는 이아립의 표정!!!!!!! 공연을 본 사람이라면 '아 나 그거 뭔지 알아!!!!'라고 누구나 말할 것 같은 그 표정!!!!!!!)


얼마 전부터는 '걸작 따위 지나갈 테면 지나가버려'라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므로, 수많은 명작들이 나 모르게 세월의 뒤편으로 사라져버렸다. 모두들, 굿바이! 동시대 작품들을 부지런히 챙겨 읽고, 보고, 듣는 건 참 재미난 일이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다 건져낼 수는 없다. 그랬다간 허리 부러진다. (P.213,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너와 내가 만나지 않은 것도 너와 나의 운명'이라 되뇌이며 수많은 동시대의 명작들을 술술 흘러넘겨버리고 있다하하하…'문화인이라면 이 정도는!' 따위의 태도는 버린 지 오래. 나도, 굿바이!)


홍대 거리에 붙은 포스터를 보면서 저렇게 많은 공연을 누가 다 보러 가나 싶었는데, 막상 공연장에 가보면 늘 사람들이 많았다. (P.226, 공연 갈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락페 갔을 땐 '아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락큰롤을 외치는데 왜 tv에는 아이돌만 나오는 것이며 왜 인터넷에서는 이 밴드들을 듣보잡 취급하는 거야?!?!'하는 생각도 함께. )




우린 서로 다들 잘 아니까. 소설 속 시간을 함께 겪은 사람들이니까. 

K3님이 2002년의 신촌에서 롤러코스터의 노래를 듣던 순간을 회고하는 글을 읽었을 때는 어, 이건 좀…하며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2002년이면 내가 김중혁이라는 소설가 및 에세이스트 및 방송진행자 및 카투니스트 및 전 기자이자 방송 프로듀서에 대해 전혀 몰랐을 때인데, 이 시기 내가 겪었던 일과 그가 겪었던 일이 그림자처럼 겹쳐진다는 게 신비로우면서도 놀라웠고 묘하게 싸한 느낌도 들었다. 비슷하지만 다르게, '나'가 누구인지에 따라 조금은 왜곡된 모습으로.


2002년의 어느 날, 나는 신촌을 걷고 있었다. 생각 없이 신촌을 걷던 내 귀에, 너무나 익숙한 조원선의 목소리가 들렸다…나는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비트는 강했지만 노래는 슬펐다. 사람들은 바쁜 걸음으로 곁을 지나갔고…나는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그 순간, 이상하게 나는 슬펐다. 사람들의 걸음걸음이 모두 슬펐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안고, 각자의 방향으로 정신없이 사라져가는 게 슬퍼 보였고, 절대 알 수 없을 그들의 삶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때 들었던 노래가 롤러코스터의 <Last Scene>이었는데,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신촌의 레코드 가게 앞을 지나가던 사람들의 쓸쓸한 뒷모습이 떠오른다. (PP.148-149)


나도 그랬다. 수많은 사람들이 월드컵 이외의 다른 것을 이야기하지도 않던 2002년의 봄과 여름, 나는 아무도 보지 않는 것 같던 야구를 보고 영화를 보고 노래를 들었다. 지금은 없어진 신나라레코드를 지날 때, 지금도 그 자리에 있는 향뮤직 앞을 지날 때, Last Scene을 들었고, 그 처연한 목소리에 어쩔 줄 모르고 한참을 서 있었다. 신나라레코드 앞 횡단보도의 불이 바뀌어도 보지 못하고. 향뮤직을 지나 학교로 가야 하는데도 멍하니. 


그 해의 내겐 많은 게 복잡했고 어려웠고 잘 보이지 않았다. 나의 이야기를 안고 나의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게 힘겨워서, 내 삶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내가 남들의 삶에 대해 알게 되는 건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 웃어도 슬프고, 떠들어도 슬픈 때였다. 물론 이런 얘기,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감수성 과잉의 부산물이자 민망한 기억일지도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다 거울인 셈이다.

그 민망한 감수성 과잉의 시기를 떠올려도 더이상 슬프지 않을 수 있는 건, 그때의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던 것보다 지금의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더 많아졌기 때문인 듯 싶다. K3님은 이해를 믿지 않는다고 하셨지만, 나는 이해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면, 머리로 이해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어차피 난 이해하지 못할 거야'라며 애초부터 가능성을 거둬 버리는 건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함에서 비롯하는 게 아니라 아무 것도 책임지고 싶어하지 않는 두려움과 차가움에서 비롯할지도 모른다. 그래, 그 상황에선 그럴 수 밖에 없었어, 하고 그 때의 나를 이해할 수 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해할 수 없어도 위로할 수 있을지 모른다만, '누군가를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위로해 주는 것'과 '누군가를 이해하여 위로해 주는 것'은 분명히 다르지 않나. 그리고 나는 누군가를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위로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


그래서, 더 이해하고 싶어서,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도 더 이해하고, 나와 멀리 있는 사람들도 이해하고, 나와 평생 아무 상관도 없을 것 같은 사람들까지도 이해하고 싶어서, 이야기를 읽는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 헤매면서, 내가 가진 주머니의 입구를 더욱 크게 열어놓는 거라고 생각한다. 소설도, 시도, 영화도, 연극도, 드라마도, 결국은 사람들의 이야기니까. 사람은 자기의 노래를 부르는 법이고, 결국은 그 이야기 하나하나가 모두 노래니까, 노래를 듣는 거다, 나와 너에 대해 이해하고 싶어서. 


제대로 이해한다면, 이해가 끝난 후에 무엇이든 할 수밖에 없을 거다. 위로를 하든지, 연대를 하든지, 어깨를 곁든지. 어쩌면 이 세상의 모든 문제들은 이해조차 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과, 자기 멋대로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과, 제대로 이해하고 나서도 다 이해했으니까 됐어, 라고 손을 놓아 버리는 사람들 때문에 생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몰라서 그렇지, 자세히 둘러보면, 모든 게 노래다.

책을 다 읽은 후 남은 욕심 두 가지 : 1. '가을과 겨울에 어울릴 만한 노래'와 대응되는 '봄과 여름에 어울릴 만한 노래'도 실어 주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2. 주간지에 연재된 글을 묶은 책이다보니 연재 당시 새 노래를 발표하지 않았거나 공연을 하지 않은(또는 했지만 K3님이 그 공연에 가지 못한) 뮤지션들 상당수가 빠져 있어 아쉬웠다. K3님이 흥분해 상기된 얼굴로 좋아하는 노래들과 좋아하는 뮤지션들에 대해 써내려간 글을 읽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려면 모든 게 노래 2탄이 나와야겠지? '김중혁이 추천하는 뮤지션 500명' 같은 부제를 달고ㅎ


노오란 은행잎을 떠올리게 하는 책 표지 때문인지 가을에 읽기 좋은 책이다 싶었고, 그 때문인지 자꾸 (책에도 언급된) 가을방학의 음악이 떠올랐다. 가을방학의 음악과 선명한 노랑이 은근히 잘 어울리는 듯. 계피의 담담하지만 사람을 울컥 하게 만드는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 읽고 싶다. 완전한 겨울이 오기 전에.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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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 2014-02-27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리뷰를 참 정성스럽게 잘쓰셨군요.지나가다 이책리뷰에 관심이 많아 다 읽고갑니다.

alma 2014-03-23 19:29   좋아요 0 | URL
아휴, 댓글이 너무 늦었네요(__) 반갑습니다 :)
 
[작가의 얼굴]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작가의 얼굴 - 어느 늙은 비평가의 문학 이야기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지음, 김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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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얼굴의 첫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는 특정한 작가를 소개해주면서 그의 초상화를 곁들여 보여주는 책인줄 알았다. 서문을 읽으면서부터 그 쉬운 예상은 깨졌다. '그냥 유명한 그림'이 아니라 글쓴이가 직접 수집한 초상화라니. 게다가 글쓴이는 평론가고 초상화의 대상들은 모두 작가들. 심지어 글쓴이인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자신이 모은 작가의 초상화를 집에 걸어 놓았고, 그걸 본 그의 지인들이 초상화를 선물하기까지 했다니. 우왕.


집에 초상화를 걸어 놓는다면 그건 당연히 집안 식구 중 한 명의 것이겠거니 생각해온 내게 작가의 초상화를 집에 걸어놓는 평론가란 그 존재 자체가 이색적인 것이었다. 평론가와 작가의 사이는 결코 '서로에게 우호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기에 더더욱 놀라웠고. 한국 작가들이나 뮤지션들의 인터뷰를 보면 꽤 많은 이들이 평론가들의 호평 또는 악평에 대한 질문에 '평론가들의 말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평론가들의 말은 잘 이해가 안 간다', '평론가들의 말보다는 작품을 읽고 써 주시는 일반 독자/리스너들의 리뷰를 더 즐겁게 읽는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 


내가 평론가라면, 벽에 걸린 초상화 속 작가의 신간을 읽고 '아 이건 좀 아니지 않나-_-'하며 지적하는 글을 쓰고 싶다가도 자꾸 벽 속 얼굴이 신경쓰여 짜증날 것 같은데. 내가 작가라면, 나의 글을 읽고 늘 좋다고 하는 것도 아닌 평론가가 집 벽에 내 초상화를 걸어놓고 있다는 사실에 괜히 신경질이 날 것 같은데. 우왕우왕.


책을 읽으면서 더더욱 신기하다 싶었던 건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유머러스하면서도 굉장히 솔직한 서술 때문이었다. 라이히라니츠키의 작가들에 대한 평은 결코 객관적이지 않았는데도 조심스럽다기보다는 단호하고 거침없었다. 때로는 '와, 이런 말을 평론가가 대놓고 할 수 있단 말야?'라는 느낌까지 들 정도로 신랄하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 하인리히 만에 대한 글에서 내가 하인리히 만을 많이 읽긴 했지만, 그의 책을 좋아한 적은 없다고 선언하듯이 말한 문장. 데오도어 폰타네의 좋은 이미지를 쭉 언급한 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이미지를 우리 모두에게 주입한 장본인이 바로 폰타네 자신이었다'며 대중들이 기억하는 폰타네의 모습은 그가 원했던 모습, 즉, 부드럽게 순화되고, 은근히 미화된, 아무튼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친 모습이라고 적어내려간 글을 읽을 때는 라이히나리츠키의 대담함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우와,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나? 작가들이나 독자들이 항의하진 않나? 그런 거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는 걸까? 아니면 독일의 문학계 분위기가 '이 정도쯤이야'인 걸까? 한국에서 평론가란 이름을 단 누군가가 '이건 요러하고 조러하고 고러하고…해서 이러이러하게 비판받을 소지가 있고…'라는 글을 길게 쭉 늘어놓는 대신 '어쨌든 난 이거 안 좋다'고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올 것 같은데. 우왕우왕우왕.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왜 이 평론가가 집 벽에 작가의 초상화를 걸어놓을 수 있는지, 알 것 같다는 기분이 슬슬 들었다. 글 하나하나에 신기하게도 애정이 어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이 작가가 이러저러한 부분에서 칭찬받을 수 없다는 건 알아, 그리고 이러저러한 부분은 별로라는 것도 잘 알아! 그래도 분명 이 작가에겐 사랑스럽고 귀엽고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이 있어!! 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달까.


그는 믿을 수 없게 걸출하고,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한 인물(호프만)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그렇고 그런 '대중작가'로 치부되는 것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했고, 프리드리히 폰 실러가 특별히 준수한 용모를 지닌 사람은 아니었기에 그의 초상화를 그린 루도비케 시마노비츠는 대중을 실망시키고싶지 않은 마음에 미화된 초상화를 그릴 수 밖에 없었음을 언급하면서도 하지만 그래도 실러의 실제 생김새를 어렴풋하게나마 추측하게 해준다고 따뜻하게 덧붙여 주었다. 하웁트만에 대해 쓴 글에서는 대중의 호응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자기주장을 곧 자기연출로 이어가게 마련이라며 작가치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 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작가라는 존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고백했다. 이런 라이히라니츠키는 아마도 작가와 작가의 작품을 평가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작가의 인간미와 작품 속에 나타나는 인간의 인간다운 모습을 찾으려 한 평론가가 아니었을까.


덕분에 책을 읽으며,  이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작가들과 그의 작품들이 궁금해졌다. 사반세기에 걸쳐 한 남자만을 사랑했던 리카르다 후흐의 소설에는 그녀의 삶이 반영되어 있을까. 애국자였으나 조국이 없었고, 민중의 지도자였으나 따르는 민중이 없었고, 작가였으나 작품이 없었다는 루트비히 뵈르네의 위트 넘치는 글은 어떤 세계를 나에게 보여 줄 수 있을까. 천재적인 작가였지만 종종 날림으로 대충대충 작품을 써내기도 했다는 베르펠의 역작과 평작과 졸작은 얼마나 다른 느낌일까 등등. 어릴 적 한두번 읽고 나선 한동안 잊고 있었던 토마스 만이나 괴테의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글이나 라이히라니츠키가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가 아닐까 짐작할 수 있었)던 작가에 대한 글은 특별히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체호프에 대한 글에서 그의 작품에 나오는 대사들의 핵심은 대개 화자들이 말로 옮기지 않는 표현들 사이의 정지 장면에서 들을 수 있다. 바로 이 침묵이야말로 이 작품들의 근간을 이룬다. 왜냐하면 체호프는 속삭임의 절규, 고요의 통곡을 창시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참혹한 고통으로 말을 잃은 인간을 보여주었다고 쓴 부분은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하이네에 대한 글에서 하이네만큼 나와 가까웠던 작가, 내 삶의 가장 힘든 시기에 나를 지탱해주고, 변화시켜주었다고 할 만한 작가가 또 누가 있을까라고 고백하던 문장은 뭉클하기까지 했다. 그의 말마따나, 작품의 예술적 수준을 따지기에 앞서…각별히 소중한 작가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독자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 중 하나일 테니.


우리 나라에도 어떤 평론가가 작가의 초상화나 사진을 수십 년동안 수십 작품 모아왔다면, 그래서 그 작가들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고백하는 내용의 글을 책으로 엮어 낸다면 멋있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이상과 김유정, 박태원과 이광수, 박목월과 조지훈과 정지용에서부터 신경숙과 김영하, 조경란과 박민규, 천명관과 이기호, 편혜영과 김연수와 김중혁과 김애란에 이르기까지. 작가에 대한 애정 고백을 금기시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한국에서는 아직 먼 얘기일까. 언젠가 그런 고백으로 가득 찬 책을 설레는 마음으로 읽고 싶다는 소망을, 수줍게 가져 본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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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가는 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책으로 가는 문 - 이와나미 소년문고를 말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미야자키 하야오가 열어 준, 책으로 가는 문.

명사가 추천하는 책 목록을 읽는 것은 대부분 흥미로운 일이다. 예전에는 네*버에서 연재하는 '지식인의 서재(http://bookshelf.naver.com)'를 꼬박꼬박 챙겨 읽으면서 이 사람이 추천한 책 중 내가 읽어본 건 몇 권인가, 갖고 있는 건 몇 권인가 하나하나 세어보기도 했다. 누군가가 추천하는 책 목록을 훑다 보면 그 사람의 취향을 알 수 있게 되어 흥미롭기도 하지만, 세상엔 정말 읽을 책이 많구나 싶어 머리가 어질해지기도 한다. 나를 뺀 사람들은 다들 이걸 읽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괜히 불안해지기도 하고ㅎㅎ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건 역시 부러움인 것 같다. 이 책 한 번 읽어봐, 참 좋아! 라고 추천하는 사람들의 자신만만함에 대한 부러움. 난 이 책이 좋아! 라고 당당히 밝힐 수 있다는 건 언제 읽어도 좋은 책이라는 거 아닌가.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는 분명 다를 테지만, 이 책은 언제의 내게라도 좋은 책일거라는 확신. 언제의 내게라도 좋은 책이라면 어떤 시공간에 있는 어떤 연령의 이에게라도 좋은 책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할 때마다 딴 게 더 낫지 않을까? 과연 이 책을 좋아는 할까? 나한테만 특별히 좋은 책인 건 아닐까? 하고 자주 주저하는 나인지라, 부러움이 가장 큰 건지도 모르겠다.


책으로 가는 문을 처음 읽을 때에도, 참 부러웠다. 아이들에게 추천해줄 수 있는 책을 50권이나 뽑을 수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부러웠고, 이토록 흥미로워보이고 때로는 사랑스러워보이기까지 하는 책들로 꾸려진 소년문고를 갖고 있는 일본이 부러웠고, 마음만 먹는다면 이 책들을 한 권 한 권 다 찾아 읽을 수 있는 일본 사람들이 부러웠다.


처음엔 내가 읽어본 게 있는지 손가락을 꼽다가 그만뒀다. 내가 읽었던 책과 미야자키 하야오가 추천한 그 책은 제목만 같을 뿐 하나의 책이 아니니까. 내가 읽은 하이디엔 마르타 프파넨슈미트의 귀염 돋는 그림이 없었고, 내가 읽은 톰 소여의 모험은 노먼 록웰의 그림이 표지에 있는 책이 아니었으니까. 일본어를 읽지 못하고 일본에 살지도 않는 내가 죽기 전 이와나미 소년문고를 읽게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우니 아마도 나는 이 책에 소개된 50권을 단 한 권도 읽을 수 없을 테다.


**윗사진 : 미야자키 하야오의 친필 추천사. 이 추천사가 책 한 권 한 권마다 붙어 있다.


* 미야자키 하야오가 전해 준, 책에 대한 이야기.

그가 추천한 책을 한 권도 읽지 못하게 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왜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 책을 추천했을까, 이 책을 추천하면서 그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를 짐작해 보는 일이었다. 그 짐작의 실마리는 '책'에 대해 미야자키 하야오가 남긴 말들에서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책의 2부, [소중한 책 한 권만 있으면 된다] 부분에서. 어떤 의미에서, 내게 50권의 목록보다 더 의미있었던 건 2부이기도 했고.


이런저런 인터뷰에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했던 말들을 기초로 묶고 다듬은 2부에서, 그는 책에 대한 추억을 잔잔하게 풀어놓으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책의 의미, 특히 어린이책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1950년대에 읽었던 책은 글자가 가득 들어찬 책이었다며, 내용이 있는 책이니 공손하게 읽으라는 느낌을 주었다는 말부터 인상적이었다. 공손함이란 새 책의 첫 페이지를 넘길 때의 설렘과 비슷한 것 아닐까. '어디 한 번 나를 설득시켜 보시지'라는 건방 대신 '와, 이 책을 통해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또 새롭게 알거나 느끼게 되겠구나!'하는 두근거림. 요즘의 나는 그런 공손함을 가지고 책을 접하고 있는 걸까. 겸손하게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걸까. 한번 반성해 보기도 했다.


자본론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칸트와 헤겔, 사르트르, 마르크스, 키에르케고르 등를 언급하면서 펼치는 순간 졸립니다. 도대체 단어부터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책을 상당히 읽지 않고 지냈습니다.라고 진솔하게 고백하는 부분에서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에도 자기 안에 담긴 서랍을 언제 읽었는지 기억도 못하는 책들로 가득 채울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많은 작품들을 만들 수 있었다는 회고. 


그러고 보면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책'이 정말 있을까 싶다. 사람들의 생각도 취향도 감수성도 감각의 예민도도 다를 텐데, 모든 이에게 의미 있는 만큼의 정보와 감동과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책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실 인간이라면 이 정도는 읽었어야지! 넌 이 정도의 책을 읽지 않았으니 교양 없는 사람이야! 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폭력적인가. 자본론이든 순수이성비판이든 논리학이든, 잠을 쫓아가며 꾸역꾸역 페이지를 넘겨 마지막 장까지 다 읽어치우는 것도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나를 힘들게 하는 책 대신 톰 소여의 모험이나 파브르 곤충기를 읽고 역시 엄청나게 재미있구나! 경탄할 만한 이야기야! 라고 감탄하는 것 역시 의미 있는 독서 아닐까. 얼마나 어려운 책을 읽는 사람인가를 인간 판단의 한 기준으로 삼는다는 게 얼마나 멍청한지 잘 알고 있으면서, 왜이렇게 나는 종종 그것이 어리석음을 잊어버리는지.


소년문고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편견이나 책 자체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게끔 하는 세태를 차분하게 지적하는 부분 역시 기억에 남는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


어린이문고의 역사를 보면, 처음에는 어른으로서 아이에게 뭔가 좋은 것을 전해주고 싶다는 마음에서 말 잘 들으면 좋겠다, 배우면 좋겠다, 나쁜 짓 하면 혼난다는 등 교훈을 담으려 합니다. 그러다가 점점 문학적 감동을 담은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려는 움직임으로 나아가지요. (p.98, 그러니까 결국 '어른으로서 교훈을 담으려고 한 책'은 제대로 된 작품이 아니라는 거잖아! 근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ㅎ 의도된 교훈성은 아이들을 피곤하게 해요!)


일본 영화계에서는 어린이를 위한 작품을 '조무래기물'이라고 했습니다…저는 그 '조무래기물'이라는 발상이 싫었습니다. (p.105, 이 역시 어른들의 건방짐. 나이가 어리다는 게 무시해도 된다는 건 아니라는 건 너무 당연한 얘긴데.)


어느새 모두가 소인이 되어버린 겁니다. 세상에 대해 무력해져서 한 푼이라도 싼 게 낫다는 둥 하찮은 문제로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시야도 정말 좁아졌습니다.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게 어떤 인간으로 살 것인가 논하던 거대한 주제는 지금 건강이나 연금 이야기로 바뀌어버렸습니다. (p.108, 물론 연금 이야기나 건강 이야기도 중요한 얘기긴 하지만ㅎ 여기서 그가 토로하고 싶었던 건 사익만을 중시하는 존재들로 변해 버린 인간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닐까.)


오늘날은 사진도 영상도 흘러넘쳐서, 한 장의 그림을 꼼꼼히 읽어내는 습관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p.127, 깊이 공감. 그리고 반성. 꼼꼼히 그림을 읽어본지 나 역시 너무 오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의 과제는 우리들 안에 싹트는 값싼 니힐리즘을 극복하는 일입니다…깊은 니힐리즘은 생명의 근원에 대한 물음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만, 값싼 니힐리즘은 게으름의 변명이기 일쑤입니다. (p.149, 결국 삶을 치열하게 대하지 않는다면 모든 게 다 허무할 뿐이겠지.)


앞으로 참담한 일이 속속 일어나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테지요. 아직 끝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진도 끝나지 않았고, '몬주'도 정리되지 않았고, 원전도 재가동하려고 기를 쓰는, 그런 나라니까요. 아무도 현실을 보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p.157, 미야자키 하야오가 말하는 일본의 현실이 한국의 현실과 쌍둥이 같아 소름이 끼쳤다.)



* 미야자키 하야오가  남겨 준, 책이 가진 과제.

그의 말마따나 값싼 니힐리즘과 자포자기한 데카당스의 향락주의가 한층 더 강해지고 살벌해지는 앞으로의 시대에, 책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특히 어린이책은, 어린이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너희가 살 세상이 얼마나 무섭고 지독하고 끔찍한지 일찍부터 알려주는 걸 해야 하나. 저 끝의 절망까지 떨어져 보게 하여 쓸데없는 희망따위 갖지 말라고 충고해야 하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만드는 것 이상을 소비하는 이 생활을 그만둘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해지기도 하겠지요. 전쟁마저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전세계가 터질 것처럼 부풀어 있습니다…거대한 경제 변동에 농락당할 가능성도 농후합니다. 그렇게 되더라도 마음가짐은 무너지지 말자 다짐할 도리밖에 없습니다. (p.153)


어린이문학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다"하고 인간 존재에 대해 엄격하고 비판적인 문학과는 달리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 살아도 된다"라는 응원을 아이들에게 보내려는 마음이 어린이문학이 생겨난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아이들에게 절망을 말하지 마라"는 뜻입니다. 아이들 일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평소에 니힐리즘이나 데카당스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라도, 눈앞에서 아이의 존재를 본다면 " 이 아이들이 태어난 걸 쓸데없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하는 마음이 강하게 작동하는 것입니다. (p.155)


아무리 거지 같은 세상이더라도, 태어나길 잘 했다고 도닥여줄 수 있는 문학. 너희가 세상을 오염시키기만 하는 존재들이 아니라, 나름의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태어난 생명들임을 주장해 주는 문학. 나와 마찬가지로 너도 소중한 생명이니까, 너를 위하듯이 남을 위해야 한다고 속삭여주는 문학. 그것이 앞으로의 책들이 해야 할 일들이라면, 내가 할 일은 그 책을 읽고 그 책의 메시지를 기억하면서 전하는 일이겠지. 그것은 어두운 세상을 완전히 외면하거나 그로부터 도피하는 것과 분명 다르리라고 믿는다. 태어나길 잘했다고 말해 주는, 그래서 읽는 사람을 더없이 행복하게 하는, 그 책을 만날 수 있도록, 권할 수 있도록, 선물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이야기를 읽고, 생각하고, 나눠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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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 영혼이 쉴 수 있는 곳을 가꾸다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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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성과 가설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이라. 그야말로 중산층의 향기로운 콧노래가 귓가에서 살랑거리는 듯한 제목이다. 이런 생각을 부채질하는, 화사한 노란색 표지. 나도 모르게 심술이 불쑥 올라왔다. 정원은 무슨, 손바닥만한 화분 하나도 책상 구석에 올려놓고 키울 여력이 없는데! 팍팍하게 사는 내가 꽃 구경하면서 물이나 뿌릴 것 같은 고상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 혹시 이거 알고 보면 윤선도처럼 자연 속에서 사시사철 유유자적 단사표음 물아일체 자연합일하는 것처럼 노래해놓고 정원사니 일꾼이니 왕창 불러 엄청 부려먹은 거 아냐? 


마지막 장까지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미안함이었다. 잘못했어요, 헤세 아저씨. 제가 아저씨에 대한 지식이 너무 없었어요. 이 책이 고상하고 향기로운 건 맞지만, 제 의심은 아저씨가 아끼셨던 유다의 나무를 꺾어놓은 열대 태풍처럼 못되먹고 야만스러운 것이었어요. 용서해주세요. 헤세 아저씨라는 호칭이 거슬리신다면 헤세 님이라고 할까요? 여튼간에 진심으로 반성합니다ㅠㅠ


미안함이 지나간 자리에 찾아온 다음 손님은 새삼스럽게도 이런 생각이었다 : 역시 소설가들이 쓴 에세이는 재미있구나. 이야기를 다루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게 술술 잘 읽히는구나. 그래, 이제까지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에세이집의 대부분이 소설가가 쓴 에세이집이었어. '소설가가 쓴 에세이는 재미있다'는 가설이 하나 성립하는군. 앞으로 소설가들의 에세이를 읽을 땐 '과연 재미있을까' 인상 쓰며 표지 넘기지 말아야지. 현재로선 확신에 가까운 이 가설도 어디까지나 귀납적인 추리에 의한 것이니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깨지겠지만, 뭐, 그땐 또다른 가설을 세우면 되지.



2. 아름다운 노동, 아름다운 정원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은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게으른 정원사의 즐거움', '작지만 반가운 손님들을 초대하기', '다시, 소중한 것들이 말을 건다', '만약 내가 고독 속에만 머물러 있었더라면' 순서로 길지 않은 글들이 4-6편씩 묶여 있다. 그렇다고 하나의 장이 하나의 주제로 구성된 건 아니다. 전체적으로 헤세가 만나고 감정을 공유했던 나무들, 꽃들, 나비와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들마다 자연과 공존하며 그 속에서 소박하고 아름답게 사는 것을 추구했던 헤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고즈넉하면서도 조금은 쓸쓸하게.


헤세는 스스로를 게으른 정원사라 칭하고 있지만, 그것이 겸양의 표현이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제대로 먹이고 재우고 단장하려 해도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가. 내맘대로 주물럭거릴 수 없는 나무와 꽃과 풀을 키운다는 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과 인내와 시간과 의지를 필요로 하는 게 당연한 것. 헤세는 일하기 편한 옷을 입고, 성실하게 일을 한다. 힘이 들고 몸 여기저기가 아프지만 솔직하게 몸을 쓰고 요령을 피우지 않는다. 정성을 기울이고 마음을 준다. 머리로 계산하고 손익을 비교하고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는 그의 노동은 아름답다.


일은 늘 어렵다. 새해 들어 처음으로 우리 머리에서 땀이 흘러내린다. 우리가 신은 부드러운 장화는 무거운 흙 속으로 빠져들고, 삽자루를 잡은 손에는 물집이 잡혀 통증이 느껴진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감미로운 3월의 햇살은 벌써 너무 덥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강렬하게 내리쪼인다. 피로에 젖어 등이 아파 오고 몇 시간째 힘들게 하던 일을 끝내고 집으로 들어서면 집 안에서 피어오르는 난로의 열기가 불현듯 낯설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물론 이 노동이 헤세에게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명예를 가져다줄 리 없다. 오히려 헤세가 그려낸 자신의 모습은 가난한 촌부에 가깝다. '보덴 호수와 작별하며'에서 그는 이사의 추억을 차분하게 나열하며 카사 카무치에서의 12년을 궁색하고 빈털터리가 된 문인의 삶이라고 요약한다. 우유와 쌀과 마카로니로 근근이 끼니를 때우고, 낡은 양복은 닳아서 올이 풀어질 때까지 입었으며, 가을에는 숲에서 밤을 주워와 저녁식사로 대신하는 초라하고 어딘가 수상쩍은 이방인이었다고, 스스로를 설명한다. 기실 책 중간중간에 실려 있는 정원 속 헤세의 사진도 사람들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정원'의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그렇기에 헤세가 들려주는 자연의 모습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광택 나는 신발과 모자와 옷을 몸에 두르고 그늘 아래 편히 앉아 풍류를 즐기는 이가 자연을 노래할 때 느껴지는 이물감과 기름기가, 이 책에서는 쫙 빠져 있다. 대신 정원일을 하러 가는 길에 이끼와 덤불, 들판이 야생화되어 점점 더 숲이 우거지는 것을 보고 '일꾼들이 제대로 들판을 정리하지 않았잖아!'하고 화를 내지 않고 감탄 어린 시선으로 자연의 생명력을 예찬하는 겸손함이 자리한다. 천천히 정원 안을 걸으며 돌아보다가 정원용 도구를 몇 가지 챙겨 들고 경사면을 한 칸씩 한 칸씩 굼뜨게 따라 내려가면서 몇 년 전에 목초지에 심어 놓은 무스카리가 피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미소 짓는 이의 눈에 비친 자연은 늘 내게 풍요를 선물하지 않는다. 꽃은 금세 피었다 지고 나비는 날아가 버리며 때로는 튼튼하던 나무도 부러진다. 그렇게 죽어가기에, 다시 태어난다. 헤세의 말대로 자신을 기다리는 땅을 향해서, 새로운 생명의 순환을 향해서. 경이롭게도 모든 걸음은 죽음이며 모든 무덤은 어머니이니까. 





3. 숨막히는 장면들, 눈부신 문장들


책을 읽다 꿀꺽, 침을 삼키면서 집중하게 되는 장면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


나비는 앉아서 두 날개를 포개고 있었다. 날개의 아랫부분은 매우 칙칙한 갈색 빛과 잿빛을 띠었는데, 날개를 다시 쫙 펴자 비로드처럼 부드럽고 진한 자주색이 화려하게 드러났다. 거기에는 샛노란 색 줄무늬와 푸른색 점들이 멋지게 줄지어 있었다. 그 줄무늬는 날개의 밝은 가장자리 색과 물감을 칠한 듯한 검붉은 색 사이에서 너무도 고상하고 우아하게 돋보였다. 나비는 마치 리듬을 타듯이 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부드러운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면서 머리카락만큼 가는 여섯 개의 작은 다리를 내 손 등 위에 단단히 붙여 몸을 지탱했다. 잠시 후 그 나비는 내가 놓아주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뜨겁고 밝은 햇살 속으로 날아가 저 멀리로 사라지고 말았다.


머릿속에 나비의 모습이 차라락 그려지는, 그러면서 이 나비를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는 헤세의 모습까지 동시에 상상할 수 있게 하는 묘사. 쓰잘데 없는 감정이나 군말 따위 섞지 않고 하나의 그림을 눈 앞에 펼쳐낼 수 있게 하는 작가의 능력에 새삼 경외감 비슷한 기분까지 들었다. 이런 장면들이 나올 때마다 잠이 확 깨는 듯 했다. 


게다가 광채가 나는 문장들은 어찌나 많은지! 자연에 대한 문장은 물론이고 어리석고 단조로운 도시의 삶이 얼마나 한심한지, 기술과 역사의 진보와 발전에 대한 낙관주의가 얼마나 대책 없는지 신랄하게 설파한 부분들까지도. 헤세의 어떤 생각들은 내가 가진 생각들과 너무 비슷해 '이거 뭐야 무서워...'하다가ㅎ 내 생각이란 것도 결국은 내 앞의 누군가가 떠올린 것을 반복하고 변주한 것에 불과하겠지 싶었다. 책을 읽다가 특별히 기억하고 싶은 부분이 나오면 붙여 놓은 포스트잇이 이만큼. 



헤세의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재미있었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자신 있게 '맞아맞아' 대답하진 못할 것 같다.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과 보낸 시간이 즐거웠던 건 사실이지만, 그 시간만큼 어린 시절 <데미안>이나 <싯다르타>나 <수레바퀴 아래서> 등등을 읽던 순간들도 흥미로웠으니까. 대신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헤세의 삶은 헤세의 소설만큼 아름다웠다고. 무엇보다 그 자신이 아름답게 사는 것 하나만은 늘 자기 마음대로 했노라 확신했다고. 그렇게 장담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삶은 확신 없는 사람들의 삶보다 더 아름다워 보인다고.




4. 마지막으로,


제일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은 문장들. 이런 문장을 책에서 만나면 문장을 쓴 이에게 마구 고마워서 인사라도 하고 싶어진다. 삶은 죽음을 향해 가고 죽음은 다시 삶을 낳듯이, 꺾어졌던 삶의 노선은 언젠가 상승할 것이고 또 언젠가 다시 꺾어질 것이다. 그러나 계속 살아간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극복한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또다시 극복할 것이다. 아마도 더 자주 극복할 것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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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토끼 2013-10-06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은 정말 멋지네요..고독한 삶을 살았던 헤세를 생각하면 마음이 찡하면서도 무지 힘이 되는 말입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읽으시다니!! 저 포스트잇들!!)

alma 2013-10-19 11:34   좋아요 0 | URL
아 이렇게 댓글을 늦게…………………아이쿠 죄송하네요ㅠ 저 문장이 '특히' 마음에 들어서 이미 몇 사람에게 이 책을 선물했어요ㅎㅎ (근데 얼마전 이레에서 나왔던 이 책의 '전 버전'을 봤지 말입니다. 그 책이 좀더 좋아 보여서 기분이 묘했답니다=_=;;)
 
[헌 책이 내게 말을 걸어 왔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 어느 책방에 머물러 있던 청춘의 글씨들
윤성근 엮음 / 큐리어스(Qrious)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당신의 청춘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책 욕심이 가장 많았던 때는 단연 대학생 때였다. 2000년대 초반 인터넷 서점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면서 나는 신간을 지르는 재미에 흠뻑 빠졌고, '지금 막 나온 책들'을 장바구니에 꽉꽉 눌러 담았다. 구간은 헌책방에서 많이 사 왔다. 윤대녕이나 김영하, 황석영, 조세희, 최인훈 같은 남자 소설가들의 책도 가끔 샀고 <인물과 사상>이나 <시인세계>, <여성문학연구> 따위의 계간지를 들고 헌책방 문을 나올 때도 종종 있었지만 주로 사 온 것은 한국 여자 소설가들의 구간이었다. 신경숙, 은희경, 전경린, 공지영, 조경란…당시 게걸스럽게 읽어치운 그녀들의 소설 중 8할은 헌책방에서 사 온 것이었을 테지.

처음 헌책방을 찾게 된 건 수업 교재를 조금 더 싼 값에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행히 학교 근처에는 헌책방이 많았다. 정문 맞은편의 정은서점, 신촌로터리의 공씨책방, 길 건너 골목을 찾아 들어가면 나오던 숨어있는책, 홍대 앞의 온고당 등. 헌책방 문을 열고 들어가 바닥부터 천장까지 가득 채운 헌책들을 훑어보면 저 속에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싶어 아득해졌다. 책꽂이를 빼곡히 채운 책들 중 한 권을 꺼내 팔랑팔랑 넘겨보면서 먼지 냄새를 맡고 있으면 갑자기 마음이 녹아내렸다. 적당히 몸을 말고 바닥에 앉아 읽다가 고개를 들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책들이 보였다. 누군가 또다른 누군가에게 선물로 건넸을지도 모르는 책이, 여기서 짐짝처럼 끈에 묶여 있다는 게 서글펐다.

이 책을 처음 보고 느꼈던 감정도 그 서글픔과 비슷하다. 소중히 여겼던 이 혹은 나를 소중히 여겨주던 이에게 선물로 받은 책을 헌책방에 가져가 돈과 바꿔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책은 소중하지만 그 책을 선물해준 이와 나 사이의 관계가 달라졌기 때문일까. 선물받은 책이 마음에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던 까닭일까. 책을 팔지 않으면 굶어 죽을 정도로 배가 고팠거나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방이 좁았던 걸까. 삶이 그저 귀찮아져서 소유가 불편해졌기 때문일까. 책과 바꾼 돈을 주머니에 집어넣었을 때의 마음은 어떤 빛깔이었을까.…알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지만 무엇이 사실이든간에 서글프기는 매한가지다. 한때는 가치 있었던 무언가가 그 빛을 잃는다는 건 슬픈 일이니까.


이름 모를 시간이 보내온 편지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는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주인으로 유명하신 윤성근 씨가 헌책에서 발견한 사람들의 메모와 그에 대한 자신의 해설 혹은 감상을 짧게 덧붙여 엮은 책이다. 8, 90년대 대학생이 쓴 것으로 짐작되는 것들이 많았는데, 솔직히 손발이 살짝 오그라드는^^; 메모도 없진 않았다.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책갈피에 끼워 넣는 대신 속지에 짧은 글을 쓰는 걸 선택한 이들의 흔적이 남겨진 페이지를 읽을 때는 풋풋함에 미소가 지어지면서도 조금 쑥스러웠다. 희는 사랑하는 친구 소영이의 입학을 축하하며 백기완의 시집 속지에 함께 하는 삶이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이 되길 빈다고 적었으며, Happy Child라는 이는 졸업하는 '오빠'에게 명랑했던 자신을 기억해달라며 정현종의 시집을 선물했고, 누군가는 <불멸>의 속지 한 면을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으로 가득 채웠다. 나보다 십여년이나 이십여년 일찍 태어난 이들의 말투와 글씨체라서, 대학생 때 읽었던 소설 속의 인물들이 쓴 글 같기도 했다.

자신의 책에 이런저런 상념을 일기처럼 써내려간 흔적도 꽤 있었다. 젊어서 불안하지만 허세로 용기를 가장하는 대학생 때. 하나의 개념이 백만개의 잡념을 잇고 또 낳는 그/그녀의 머릿속이 그대로 맨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도 그 나이 때, '책을 읽을 때마다 맘에 드는 구절에 줄을 치고 그 옆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메모해가며 읽는' 사람들이 멋져 보여서 그렇게 해 보려 애썼던 적이 있다. 기형도의 수필집과 몇 권의 시집에 샤프로 사각사각 몇 개의 문장들을 남겼다. 딴에는 진지했었는데 몇 년 지나 다시 읽어보니 얼굴이 벌개지도록 민망한 거다. 아니 이걸 멋있는 말이라고 적어놨던 거야? 하면서 양팔을 엑스자로 만들고는 손톱으로 북북 긁었다. 몇 개의 문장들은 지우개로 빡빡 힘주어 없애버리기까지 했다. <에티카>와 <시간과 타자>를 헌책방에 팔았던 이들이 한 것처럼 책에 메모를 하는 것, 메모를 한 책을 파는 것, 둘다 내가 죽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에티카>를 읽고 깊이 없는 지식의 허영에 빠져 있었던 시간이 행복했노라고 회상하던 이와 <시간과 타자>를 읽고 관성이 무너지고 존재 전체가 거듭나는 순간'을 꿈꾸던 이의 기나긴 토로를 한 자 한 자 다 읽어보면서, 그/그녀가 그 글을 적었을 때 소용돌이치고 있었을 머릿속과 그 글이 적힌 책을 헌책방에 내다 팔던 때의 마음속을 조금이라도 짐작해보고 싶었다. 민낯의 고백을 누군가 보더라도 괜찮았던 걸까. 누구에게나 보여줄 수 있을 만큼 그 고백이 진지하고 치열했던 걸까. 한편으론 부럽고 한편으론 낯설다.


모든 게 가능성뿐이라는 게 幸인지 不幸인지... (p.141, <또하나의 문화 제 7호>에 쓰인 메모)
마음은, 책을 많이 보고 싶은데, 맘같지 않다. (p.197, 신경숙의 <그는 언제 오는가>에 쓰인 메모)
과연 훗날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줄 것인가? 1980. 10 (p.79, 안토니 버제스의 <1985>에 쓰인 메모)


왜 지나간 것들은 모두 따뜻할까

사실 나는 책을 매우 깨끗이 보는 편이다. 인상 깊은 구절에 줄을 긋거나 느낌을 적어두는 경우는 99.9% 없다. 그러다보니 헌책방에서도 늘 깨끗한 책을 골랐다. 표지와 책등은 벗김 없이 깨끗해야 하고, 전 주인의 이름이나 그와 연관된 사연은 적혀 있지 않아야 했다. 나처럼 살과 피를 가진 사람이 이 책을 먼저 읽었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살과 피가 남긴 자국을 굳이 계속 확인하고 싶진 않았다. 이름이든 사연이든 돈을 쥔 내게는 낙서에 불과했기에, '낙서'가 많은 책은 많이 오염되어 있는 것이었다. 점 하나만 찍혀 있어도 지저분하게 느껴져 싫었다.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를 읽고 생각해 본다. 그 때 내가 만났으나 눈길을 주지 않았던 헌책들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생각들과 감정들이 얽혀 있었을까. 그 생각들과 감정들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 때마다 나는 '아 이 책 낙서 더럽게 많네'라며 투덜거렸겠지. 그로 인해 놓친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을까. 사지는 않더라도 읽어볼 수는 있었을텐데. 이 책의 주인들이 어떤 기분으로 이 책을 고르고 값을 치렀을까 상상해 보면서 책을 집은 그 순간, 또다른 이야기들이 만들어졌을지도 모르는데. 새책을 집어들고 조심스럽게 구입한 날짜와 구입한 서점과 구입하자마자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내려갔던 예전 주인들의 기분과 느낌이 아주 잠시나마 나에게 찾아왔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놓친 순간들이 아쉽다.

책장을 넘기다가 좋아하는 책이나 갖고 있는 책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씨익 웃었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카뮈의 <최초의 인간>을 '당신'께 선물하기 위해 서점에서 지갑을 꺼냈을 때, 효진 씨의 가슴은 얼마나 쿵쾅쿵쾅 뛰었을까. 왜 영미는 민희에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선물하며 굳이 물 말은 밥을 넘기며란 구절을 써야 했을까. 하루키의 <댄스 댄스 댄스> 1권을 선물하며 하권과 2권은 너의 소감편지 받으면 바로 보내주마라고 적은 이의 짓궂음에 키득거리다가 '하권과 2권이라니? 문학사상사에서 나온 댄스 댄스 댄스는 상하 두 권 짜린데?'라는 생각이 떠올라 갑자기 혼란스러워지기도 했다ㅎ

특별히 기억에 남는 기록은 황지우의 시집에 淵이란 사람이 적어 놓았던, 밥값으로 책 사다. 이틀간 밥 안 먹기. 책 읽기 두렵지만 그래도 읽고 싶다.와 박노해의 시집에 누군가 적어 놓았던 아 아 우리 조국 아 아 영원토록 사랑하리라 우웩~이라는 문구들. 밥 대신 책을 선택한 이의 기름기 없는 용기에 짠해졌고, <노동의 새벽>과 '아름다운 우리 조국'과 '우웩~'이 빚어내는 냉소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때 잃어버린 것들은 어쩌면
그러고 보니 헌책방에 가 본지도 꽤 오래 됐다. 정은서점은 문을 닫았다고 한다. 알라딘 중고서점은 최근까지도 다녀왔지만 그곳을 헌책방 중 한 곳으로 분류하는 건 좀 찝찝하다. 헌책방에 자주 다니던 시절에는 그 곳에 있는 책들을 '새 책이었을 때의 모양을 최대한 잘 보존하고 있어야 가치가 올라가는 상품'으로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싶어 새삼 입맛이 쓰기도 하다.

숨어있는책에 가보고 싶다. 다른 날보다 많은 책을 계산대로 가져가는 날이면 주인 아저씨가 슥 한번 훑어 보시고 오백원 천원씩 깎아주시기도 했었는데. 아저씨가 나의 존재를 알 리는 전혀 없지만(그만큼 많이 갔던 건 아닐지도) 그래도 헌책방이라고 하면 가장 애틋하게 기억나는 곳인데(그나마 가던 곳 중에선 제일 자주 갔으니).

예전처럼 '오늘은 진짜 괜찮은 걸 발견해야 할텐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눈을 굴리는 대신, 편안한 마음으로 책에 남겨진 이야기들을 찾아보고 싶다. 누군가가 남긴 메모를 곰곰이 읽어보고, 나의 마음이 그의 마음과 데칼코마니처럼 겹쳐지는 순간을 느껴보고 싶다. 좋아하는 책을 들고 나와, 아끼는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다. 이 책을 통해 나의 생각과 느낌을 당신과 공유할 수 있다면 정말 기쁘겠다는 쪽지를 포스트잇으로 붙여(아무래도 책에 직접 메모하는 건 내키지 않는다ㅋㅋ) 건네주고 싶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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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토끼 2013-09-25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끼야 귀여운 리뷰! ㅎ

alma 2013-09-25 22:41   좋아요 0 | URL
꺄앗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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