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 백석, 기역

 

 

1


 

"빌런은 왜 태어나는가비대한 인정욕구를 가진 히어로가 부족한 슈퍼파워를 긁어모아 폭발시키려다 보니 어둠의 길로 빠져 버리고 마는 거야충분히 뜨거운 불씨는 로켓을 우주로 날려 보내지만어중간한 불씨는 성층권에 가지 못하고 떨어져 땅 위를 불바다로 만드는 거라고."

임태운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

 

syo가 살며 만난 수많은 히어로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슈퍼파워를 입으로(혹은 키보드로)만 알려주었다. 그들을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갈라 칠 수 있겠다.

 

1. 내가 인마, ? 지금은 좀 찌그러졌어도 응? 고생대 때는 인마, 내가 바다를 주름잡은 몸이야 내가, 알아? 와나, 진짜 그땐 완전 내 세상이었는데. : 삼엽충형

2. 내가 시대를 잘 못 만나서 이렇게 찌그러져 있지만, 언젠간 봐라, 이거 내가 지금 준비하고 있는 것만 빵 터지면, 와나, 진짜 그땐 완전 나 없인 세상이 돌아가질 않을 걸? : 18차산업혁명형

 

안타깝게도 그들 중 누구도 액션으로 스스로를 증명하지 않았기에, 그들의 업적도 포텐셜도 syo에게는 그저 두메산골 화전밭 이름 모를 영감님 깨 터는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고. 그럼에도 한 듯 안한 듯 하는 화장처럼, 관심이 있는 듯하지만 또 과하지는 않은 듯한 신묘한 맞장구 포인트를 찾아내겠다고 너는 부단히도 노력을 했지, syo, 이 자본주의의 짚신벌레 같은 놈아......

 

어쨌거나, syo를 스쳐간 저 수많은 입히어로들은 다시/결국 히어로가 되었을까? 시민들의 박수소리도 빌런들의 한탄 소리도 들리지 않고 세상은 언제나처럼 언제나 같기만 하다.

 

어쩌면, 그 히어로들은 어딘가에서 자신을 히어로라 믿는 작은 빌런이 되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스몰 빌런 인 에브리데이 에브리나잇. 정말 나쁜 놈들은 비일상 영역의 빌런이 된다. 대체로 자기가 히어로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서식처를 옮겨와서 정신을 살짝 놓으면, 아차 하는 순간 일상 속 빌런이 되고 마는 것이다. Family hero but Company villain, Company hero but Subway villain, Political hero but Sexual villain.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지.

 

 

 

2


 

 어느 날 백석이 연둣빛깔이 나는 더블버튼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양복은 매우 고급스럽게 보였다어깨를 으쓱하며 그가 말했다.

 “이건 이백원을 주고 맞춘 양복이야.”

 신현중과 허준은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들은 30원에서 40원 정도면 살 수 있는 양복을 입고 있을 뿐이었다. 2백원이라면 서너 달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돈이었다.

 “역시 자네는 모던보이가 틀림없어.”

 “당장 장가를 들어도 되겠군.”

 백석은 보통 사람들이 한 켤레에 20~30전짜리 양말을 신고 다닐 때에도 1원이나 2원을 줘야 살 수 있는 양말을 신었다.

 “양말이라고 해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지보이지 않는 것일수록 나는 완벽하게 챙겨야 한다고 생각해그러지 않으면 대체 견딜 수가 없단 말이야.”

 백석은 빈틈이 없었다깔끔하지 않은 모든 것은 그의 적이었다.

안도현백석 평전

 

백석의 시를 보노라면, 전혀 상상하기 어려운 면모가 아닐 수 없다. 시로만 백석을 만난 syo는 백석이 동치미 국수 세 그릇 먹고 툇마루에 앉아 구수하게 방귀를 뀌고, 자고로 막걸리는 나발이지, 이러면서 주전자 부리에 입 대고 들이켜다 친구들한테 등짝 스매싱 당하고,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사람 생각에 눈 오는 밤이면 얼룩얼룩 울기도 하는 그런 인간형일거라 굳게 착각하고 살아왔다. 역시 사람은 알고 볼 일이고, 대충 알고 깝치면 안 될 일이다.

 

 

 

3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뻬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바짝 벽에 붙어선다

 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 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 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 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씽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선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멘다

 방 한구석 힘주어 꼭 짜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김사인바짝 붙어서다전문 


1월에 결혼하는 친구에게 그간의 축가 준비 상황을 검사받는 날이었다. syo가 사는 곳은 가장 가까운 코인 노래방도 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하는 오지다. 이래 놓고 광역시라 할 수 있는가, 시장의 멱살을 잡고 싶다. 잡아봐야 아무 소용도 없겠고, 시장이 멱살 잡힐 이유 역시 하나도 없지만백화점 근처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고 횡단보도를 건너며 syo가 말했다. “, 갑자기 열라 춥네, 바람도 엄청 불고......” 이 대사의 불고가 입 밖으로 나올 때쯤


ㄱ이 보였다. 그건 정말 ㄱ이었다. ㄱ은 언제부터 ㄱ이었는지, ㄱ이고 싶지 않았겠지만 어쨌거나 ㄱ이 되고나서부터는 계속 ㄱ일 수밖에 없었던 건지, >조차 되지 않고(못하고) 꿋꿋이 ㄱ이었다. ㄱ이 ㄴ을 밀고 가고 있었다. 무거운 종이를 잔뜩 실은 ㄴ은 이미 ㅂ이 되어있었지만, ㄱ은 끝없이 ㄱ이었다. 터덜터덜 ㄴ의 바퀴가 도로를 긁는 소리가 났고, ㄱ의 윗도리는 깡똥했고, ㄱ의 척추 뼈 가장 아래쪽 부분이 헐벗고 낮은 산처럼 도드라져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 바람맞는 부분이 ㄱ의 해발고도 지점일 만큼, ㄱ은 하염없이 ㄱ이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는데, 눈물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입장조차 잘못된 것이 아닐까, ㄱ에게 한 톨도 도움이 되지 않는 눈물로 나 자신의 양심에만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머릿속이 복잡해진 찰나, ㄱ은 ㄱ자 모퉁이를 ㄱ처럼 꺾어 돌아갔다. 이래 놓고 광역시라 할 수 있는가, 시장의 멱살을 잡고 싶다. 잡아봐야 아무 소용도 없겠지만, 시장이 멱살 잡힐 이유는, 정말 하나도 없는가?

 

 

 

-- 읽은 --



장강명 외,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

데라치 하루나, 같이 걸어도 나 혼자

송찬호, 10년 동안의 빈 의자

 



-- 읽는 --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채호석, 안주영, 한국 현대문학사를 보다 2

안도현, 백석 평전

이진오, 밥벌이의 미래

김사인, 어린 당나귀 곁에서

이다혜,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옌스 죈트겐, 비탈리 콘스탄티노프, 교양인을 위한 화학사 강의

한강 외, 작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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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2-13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마무시 쇼님!

syo 2018-12-13 20:1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시는 카알님.

카알벨루치 2018-12-13 20:39   좋아요 0 | URL
거기하고 여기하고 가깝쟎아요! ㅎㅎ 여긴 ㄱ인데...ㅋ

쟝쟝 2018-12-13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아 재밌네요.. 저도 스요님 글 속의 백석일거라 짐작 생각했었는 데, 그렇단 말이죠 .. ㅋㅋ

카알벨루치 2018-12-13 20:00   좋아요 0 | URL
백석 빌려놓고 먼지쌓기 중 ㅜㅜ

syo 2018-12-13 20:20   좋아요 0 | URL
장난 없죠.
이 양반 지금 남들 손 닿은 데 더럽다고 팔꿈치로 문 열고 난리도 아니에요, 1930년대에 글쎄.

쟝쟝 2018-12-13 20:23   좋아요 0 | URL
실망!! 열무김치 파김기 치 손가락 쪽쪽 빨아 드실거 같은 시인이라고 생각했는데...

syo 2018-12-13 20:26   좋아요 0 | URL
심지어 여자 문제는 또 엄청 꼬여 있다......

카알벨루치 2018-12-13 20:40   좋아요 0 | URL
정말 백석 같은 느낌이다 대리석 같은 시인~ㅋ

쟝쟝 2018-12-13 20:44   좋아요 0 | URL
얼굴값은 할줄 알았으니 놀랍지 않사오나, 양말부심에 결벽증이라니! 췟.. 그래도 그의 시는 좋아요.

syo 2018-12-13 20:47   좋아요 1 | URL
양말에 관해서는 저기 등장하는 친구 신씨한테 양말을 극구 권해서 결국 신씨, 그 양말 신고 그에 관한 감상문을 기고했다고 하는데......

시는 역시 백석이죠. 이런 유별난 인물인 거 다 알고 봐도 시는 역시 백석.

카알벨루치 2018-12-13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 글 보니 백석 시 말고 평전 읽고 싶네요 ㅎ

syo 2018-12-13 20:48   좋아요 0 | URL
평전 안에도 백석의 유명한 시나 산문들이 거의 전문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ㅎㅎ

비로그인 2018-12-13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ㄱ
칼바람이 부는데....


백석평전, 참.... 좋게? 감동적으로? 아프게? 읽었던 책이네요. 안도현 시인의 팬심이 무럭무럭 느껴져서 재밌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했지만....
저는 무엇보다 말년의 백석이 그렇게 슬프더라고요. 그 깔끔한 모던보이가, 옷도 그렇지만 시에 있어 그토록 깔끔했던 그가, 바로 그랬기에, 사상과 체제 앞에서 시를 쓸 수 없었을 그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보이지 않는 양말도 신경 쓰는 그가, 시를 어떻게 대충 쓸 수 있었겠어요? 시 앞에서 고개 빳빳이 들 수 있었겠어요?

syo 2018-12-13 22:39   좋아요 0 | URL
전 이제 겨우 자야 만나고 자야 만나면서 박경련한테 목 매고 그러고 있는 대목까지 읽었거든요!

idahofish님 말씀 들으니까, 얼른얼른 읽어 나가야겠다.ㅎㅎㅎㅎ

cobomi 2018-12-14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광역시에 사는데 집 앞이 강과 논과 밭입니다만... 같은 시장일까, 문득 궁금하다가 시장이 누군지 얼굴만 기억나고(이사온 지 얼마 안 돼서,라고 합리화) 이름을 모르겠... 다고 적는 순간 이름도 떠올랐어요.ㅎㅎㅎ

syo 2018-12-14 11:00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도 시장 이름 한참 모르고 살다가, 선거철 되면 다시 반짝 알았다가, 또 시간 지나면 다시 까먹었다가..... 이름도 까먹은 사람 멱살을 잡으려고만 했다니 무책임했었네요 ㅎ cobomi님 말씀 듣고 검색해서 이름 다시 알아냈습니다. 다시 까먹을 때까지 저는 이제 시장 이름 아는 사람입니다^-^
 

 

호반정경湖畔情景

 

 

1

 

말이 공간을 휘감고 돌아 약간의 말만으로도 따뜻해지는 카페에 앉아 입김처럼 커피를 마시고 옛 사진 속 하얗고 통통한 아이를 보며 웃고 손을 만지고 머리를 만지고 발끝으로 발끝을 만지고 마음으로 마음을 만지고 아무리 둥글게 둥글게 갈아 놓아도 진심은 진심이고 약간의 진심만으로도 눈물은 뚝뚝 흐르고 휴지는 필요 없다며 힘주어 눈물의 허리를 끊으려 애쓰는 모습을 보고 기왕에 눈물이라면 눈물과 함께 슬픔도 증발하라 증발하라 속으로 외치고 어차피 세상의 모든 마음이 부패의 운명에서 달아날 수 없는 것이라면 기왕에 눈물이라면 눈물과 함께 부패도 정지하라 정지하라 속으로 외치다 보니 창 너머엔 저녁이 밤 속으로 저녁저녁 걸어 들어가고 있었으므로 하루치 사랑을 충실히 마치고 다시 마음의 공간을 휘저어 걷어 올린 몇 마디 사랑의 말을 따뜻하게 서로의 목에 감아주며 주차장으로 나선 우리는 휘발유 가격이 가장 싼 주유소를 검색해 한 주치 기름을 먹인 차를 타고 차근차근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어른들의 노래는 대부분 단조로 되어 있다이주 가끔장조의 노래가 있을 뿐이다어쩌다 만들어지는 장조의 노래는 단조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 대한 역설이거나우리 삶에 스며든손에 쥐고 싶지만 스쳐갈 뿐인 행복의 순간적 포착이다.

목수정월경독서

 

나는 밀려오는 것이 좋았고 짝꿍은 아마도 밀려가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짝꿍이 해변의 작은 모래언덕을 내려가다 잠시 멈춰 서서 먼 곳을 바라보았다나는 그런 짝꿍을 뒤에서 바라봤다거기짝꿍의 눈길이 머무는 곳에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알 수 없으나 나는 나의 눈길이 머무는 곳에 있는 것이 한 사람의 행복이길염원했다연인을 이루는 두 사람은 이렇게도 다르다해변에서 깨치게 되는 인생의 진리 중에서 가장 그윽한 것은 우리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서로에게 애정을 가진 두 사람에게 그 앎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것.

김현아무튼스웨터

 

 

 

2



 용건을 마치고 돌아왔더니아오타가 아까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초콜릿 여자애애게 이런 소리를 하고 있었다.

 “괜찮아정말 아까 괴롭힘을 당한 거 아니지?”

 “정말로 아니라니까요.”

 초콜릿 여자애가 조금 화가 난 말투로 대답했다.

 “그럼 다행이지만여자들끼리 모이면 아무래도 옥신각신하거든우리 슈퍼에서도 아줌마 아르바이트가 고등학생 아르바이트를 들볶는 문제가 많아서 껄끄럽고 질척거리고 그래여자들은 좀 음험한 면이 있잖아!”

 그러면서 혼자 웃던 아오타는 내가 돌아온 것을 보고 대놓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그 표정을 보고 정말 아까 괴롭힘을 당한 거 아니지?”의 괴롭히는 주체가 나를 염두에 두고 한 말임을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아오타의 바짝 긴장한 얼굴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괜찮니?”

 초콜릿 여자애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이 사람이 괴롭히거나 하지 않았어?”

 아오타가 무슨 말씀을 하시냐며 웃으려고 했는데 나도 여자애도 웃지 않자 다시 얼굴을 굳혔다.

 “다른 사람이 화장실에 간 사이에 악담을 해서 번잡한 일에 끌어들이려고 하는 건 음험하고 껄끄럽고 질척거리는 괴롭힘이니까설마 남자가 그런 짓을 하진 않겠지아이고다행이야안심했어.”

나는 생긋 웃었다.

 “악담이라니요...... 혹시 아까 제가 한 얘기 들으셨어요제가 말한 아줌마는 다른 아줌마 아르바이트들을 말하는 거고요시마다 시는 아직 젊으니까 당연히 괜찮지요.”

 당연히 괜찮아뭐가?

 아오타 쪽으로 돌아선 나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이 미소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괜찮다고괜찮아요사십일 년간 열심히 살아왔으니까 그야 당연히 괜찮죠이봐요, ‘아줌마란 단순히 중년기 이후의 여성에 대한 호칭혹은 그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야사전을 보면 그렇게 적혀 있어요. ‘아줌마를 욕이라고 생각하는 건그쪽이 젊지 않은 여자에게는 가치가 없다고 인식하기 때문이잖아요댁이 사귈 여자를 고를 때라면 그래도 상관없어요나이든 뭐든 댁이 좋아하는 기준에 따라 마음껏 고르라고요하지만 나는 여기에 그냥 일하러 왔어요당신의 그 웃기지도 않은 성적 대상 선정의 장에 나를 멋대로 끌어들여서는 아줌마는 안 되겠다느니 뭐니 생각한다면 불쾌하고 불편하니까 그만둘래요? ‘당연히 괜찮지요라니 뭐가 괜찮아그게 위로랍시고 하는 소리야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내가 그래나는 아직 괜찮구나다행이다하고 기뻐할 줄 알았어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당신이 나를 감정해줄 필요 없어요괜찮은지 안 괜찮은지는 내가 정하니까.”

데라치 하루나같이 걸어도 나 혼자, 69-71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래도 이 정도까지 대놓고 수준이 낮으며 답 없는 인간은 이제 소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거지 실제로는 다 멸종했을 거야, 하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세상을 너무 쉽게 봤지. 오늘만 해도 카페에서 거의 저 수준의 이야기를 큰 소리로 떠드는 남정네 두 명을 뒷자리에 앉혀놓고 커피를 마시자니 비싼 커피 맛이 영 별로였다. 그들은 하루 빨리 결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랬다. 서른 넘은 여자는 순수하지 못해서만나서 결혼까지 가기가 힘들다. 그래서 서른이 안 된 여자랑 만나서 결혼하는 것이 좋고, 그게 안 되더라도 최소한 여자가 서른이 되기 전에 사귀기 시작하면 서른을 넘겨도 결혼할 만은 하다. 어쨌든 그렇게 결혼하려면 하루 빨리 뭐라도 시작해야 한다. 안 그러면 장가를 못 간다.

 

당신들은 안 그래도 장가를 못 가고 그래도 장가를 못 가고 하여튼 장가를 못 갈 것만 같다.

 

 


3



하비 교수는 기득권의 아웃사이더였고(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전문가주의를 떨쳐낸 아마추어였다그는 옥스퍼드라는 타이틀에도 괘념치 않았다또 동료 교수들보다는 대학원생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하비 교수와 나는 제리코 북바인더라는 술집에서 당구를 치거나동네 놀이터 구석에서 그의 딸을 지켜보면서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었다(그러면서 교수를 관찰할 수 있었다). 우리의 대화는 지적 아마추어주의의 두 가지 중심축을 기반으로 돌아갔다첫째는 탈전문화에 대한 감수성이었고둘재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정치적 충성이었다데이비드 하비 교수는 전혀 전문가처럼 행동하지 않았고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앤디 메리필드아마추어, 35

 

책 날개에 박힌 작가 소개 첫 머리에서 마르크스주의 도시이론가라는 타이틀을 발견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이 데이비드 하비였다. 작기는 34쪽만에 데이비드 하비와의 관계를 실토하였고 그것만으로도 syo는 작가가 사랑스러워졌다. 하비는 syo가 아주아주아주아주 사랑하는 할아버지인데, 이제 보니 하고 다니는 것도 syo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비할배의 <맑스 자본 강의>는 정말 축복 같은 책이고,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역시 젊은 syo에게 개안의 경험을 전해 준 역작이다. 그때 뜬 눈이 세월의 더께가 앉아 지금은 다시 감겼는데, 그렇다면 오랜만에 다시 한 번 데이비드 하비를 한 바퀴 돌면서 눈을 번쩍 뜨면 좋겠다. 가끔 이렇게 오늘의 책이 어제의 책을 내일의 책으로 정해주는 경험을 할 때마다 이 맛에 읽는 거지 싶고 그렇다.


 



 

-- 읽은 --



박이문, 하나만의 선택

사토 다카유키, 나는 회사 다니면서 공부하기로 했다

채호석, 안주영, 한국 현대 문학사를 보다 1

 

 

 

-- 읽는 --



테리 이글턴, 유물론

장강명 외,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

데라치 하루나, 같이 걸어도 나 혼자

장윤석, 전공이 보이는 미분적분학

앤디 메리필드, 아마추어

고병권, 마르크스의 특별한 눈

송찬호, 10년 동안의 빈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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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8-12-11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 그러다 장가 못 간다 라는 노래 들으면 왠지 어마어마한 욕 같은 느낌인데 카페의 그 분들은 뭐랄까 욕도 아깝네요ㅎㅎ

syo 2018-12-11 22:01   좋아요 1 | URL
조용히도 아니고 찌렁찌렁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니 호연지기가 하늘을 찌르더라구요.

반유행열반인 2018-12-11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분들이 마신 커피도 아깝네요ㅎㅎㅎㅎ

syo 2018-12-12 00:18   좋아요 1 | URL
하하하하 그러네요. 생각해 보니 제일 불쌍한 건 그들이 마신 커피네요. 빻은소리의 연료로 쓰이다니.....

쟝쟝 2018-12-12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녁은 저녁저녁... 근데 그 남자분들 본질을 잘 짚으셨네요... 진짜 서른넘으면 절대 결혼 안하고 싶음..

syo 2018-12-12 22:41   좋아요 0 | URL
아이러니네요. 삐꾸와 현자의 한끗 차이...
 

 

2018이나 2017이나, 2018이나 2019

 

 

1

 

적고 깊게 읽는 12월을 함 만들어 보세- 하고 마음을 다잡았으나, 적게 읽는 일은 되는데 깊게 읽는 일이 안 되고 있으니 이를 절반의 성공이라 불러야 할지 최악의 상황이라 불러야 할지 아리송까리송한 상태로 벌써 일주일이 탕진된 12. 오늘은 대설大雪이라 하는데, 눈은 오지 않지만 눈 맞고 선 것마냥 춥다. 어쨌거나 하루에 한 권 이상을 다 읽고 집어던지는 범법행위를 저지르고 싶어 방방 날뛰는 욕망을 틀어막고는 있으나, 아무래도 이 성난 망아지를 길들이는 데 시간은 물론, 하늘의 뜻도 조금은 필요하겠다. 책이 아무리 귀하고 좋은 물건이라 하나 제 깜냥에 넘치도록 읽는 것은 이번 생을 조지는 길이렷다. 문제는 그런 사실을 안지가 꽤 되었음에도 여전히 차도가 없었다는 것이고, 역시 중독이란 놈은 인식이나 인지만으로 걷어낼 수 있는 성질 순한 녀석이 아닌지라, 쫓겨나는 길에도 금단증상이라는 빅똥을 싸놓고 가는 법이다. 증상 1. 하루에 커피 석 잔, 녹차 여섯 잔, 매실차 한 잔, 맹물(hot) 여섯 잔, 맹물(cool) 두 잔씩을 섭취하고 있다(여기서 350ml를 가리킨다) 증상 2. 따라서 우리 집 변기에서는 세 시간당 두 번 꼴로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증상 3. 기분 탓인지도 모르겠으나 어쩐지 피부가 조금 좋아진 것만 같다?

 

이것은 읽는 영역에서 발생한 사건들이고, 쓰는 영역에서는 이달이나 지난달이나 달라진 것도 나아진 것도 없는 그달이 그달이다. 뭐 특별히 대단한 책, 숨어 있는 보석 같은 책들을 찾아 읽는 고수가 못 되어서 결국 syo가 읽는 책은 남들이 다 읽는 책들이고, syo가 읽고 쓰려는 글은 남들이 다 읽고 써 놓은 글들인 것인데, 이것 참 서글픈 일이다. syo는 세상에 syo만이 할 수 있는 것 따위는 결코 없다고 믿는 사람이고, 혈연이나 인연의 그물을 철거하고 산출, 결과물, 영향력의 관점에서 보면 syo의 독자적인 존재가치란 없으며, 오늘 갑자기 뿅 하고 사라진다고 한들 내일의 세상에 작디작은 파문 하나 남기지 못하리라는 쓰린 팩트를 받아들인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쓰려는 것이 이미 쓰여 있는 세상에서 키보드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에 좌절이 버무려진 망설임이 생기는 일은 피하기가 어렵다. 어차피 뭐 대단한 물건 써내는 것도 아닌데 그냥 쓰면 되지 지가 무슨 보르헤스라고 거창하게 이 지랄이지, 하는 또 다른 팩트에라도 기대지 않았더라면, 아마 아무것도 쓰지 않고 먹고 싸는 일에만 꾸역꾸역 집중하며 고민 없이 잘 살았을 것이다.

 

 

 

2

 

그럼에도 이산화탄소를 내뿜고 똥을 빚는 일 말고는 잘하는 것이 전혀 없어서, 읽고 쓰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안하는 셈이 되어서, 이러고 산다. 이전에도 이러고 살았고 앞으로도 이러고 살겠지. 작년 이맘때의 syo가 쓴 페이퍼들을 뒤적여 보니, 걘 어쩐지 지금의 syo보다 더 밝고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식의 낙관적인 철없음을 뿜뿜 세상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뿜고 앉았다. 저 아이는 올해의 내가 될 줄을 몰랐을 것이다. 작년의 syo가 올해의 syo가 되고 만 것은 전부 내 탓이다. 2019syo가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 될 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그 역시 내 탓이겠고, 운이 좋으면 내 덕이 될 것이다.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2019에는 먹고 싸는 일보다 더 잘 하는 것이 읽고 쓰는 일 말고도 또 생겨나서 그걸 꾸준히 잘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물론 그 전까지는 지금처럼 부질없음을 알고서도 읽고 가치 없음을 알고서도 쓰면서, 2019syo를 기다릴 것이다.

 


 

인생은 그리 길지 않고한가지 일만 하기에도 짧습니다그렇기에 한가지라도 제대로 해낸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클 것입니다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어떤 직업이든 심혈을 기울여서 일하고 가치를 창출한다면세상에서 내리는 평가 이상의 거룩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제가 하고 있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더 훌륭하고 좋은 일들이 많지요하지만 직업에 귀천이 없듯이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저에게는 다른 일을 할 생각과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지금 하고 있는 일로써 우리나라에 기여하고자 합니다이것이 저의 꿈이기에 앞으로도 계속할 것입니다.

노회찬우리가 꿈꾸는 나라



 대단한 대가가 되는 일 같은 건 애초에 기대할 수 없는 일열심히 해도 잘하기는 쉽지 않은 일무엇보다 꼭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매달리고 싶어지는 그런 때가 있다요약하면 그것이 바로 '쓸데 없는 일'의 필요충분조건이기도 하다.

 야근과 야근 혹은 야근과 회식이 번갈아가며 이어지는 날불 꺼진 방으로 늦게 퇴근하게 되는 그런 날이면 이따금 의미 없이 독일어 숫자 1에서 10까지, "아인즈츠바이드라이..."를 한 번 읊어보고 잠이 든다아무래도 이번 생에 독일어를 잘하게 될 것 같지는 않지만이런 뜬금없는 질척거림모르는 말에 대한 쓸데없는 동경이 때때로 한국어로 가득 찬 지루한 일상의 마라톤을 버티게 해주기도 한다.

조지영아무튼외국어

 

마이클 모부신은 2012년에 출간한 <내가 다시 서른 살이 된다면>에서 연속으로 꾼 꿈에 영감을 얻어 마지막 두 자리가 48로 적힌 복권을 산다면 스페인 국민 복권에 당첨될 거라 믿게 된 한 남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그는 사방팔방 다 뒤져본 뒤에 그런 번호가 적힌 복권을 샀고 정말로 복권에 당첨되었다기자가 왜 그 특정 숫자를찾아서 구입하려고 애썼는지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일주일 내내 매일 밤 숫자 7이 나오는 꿈을 꿨습니다, 7이 일곱 번 나왔으니, 7곱하기 7은 48이죠."

로버트 H. 프랭크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역경에 처한 자의 요령은 노력이외다근면이외다번민만 하고 있는 동안은 타임은 가고 그 타임은 절망과 파멸밖에 갖다주는 것이 없나이다.

나혜석나혜석글 쓰는 여자의 탄생 

 

 

-- 읽은 --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김경윤, 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철학 수업

차병직, 단어의 발견

클라이브 해밀턴, 인류세

 

 

 

-- 읽는 --



채호석, 안주영, 한국 현대 문학사를 보다 1

박이문, 하나만의 선택

테리 이글턴, 유물론

장윤석, 전공이 보이는 미분적분학

다니자키 준이치로, 요시노 구즈

안도현, 백석 평전

장강명 외,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세상을 알라

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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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12-07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진짜 책에 7 곱하기 7이 48이라고 나와요? 그 책 꼭 좀 읽어봐야겠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8-12-07 14:04   좋아요 0 | URL
굉장히 재미있는 에피소드죠? ㅎㅎㅎㅎㅎ
꿈대로였다면 49번을 고르고 망했을 텐데, 구구단을 못했기에 당첨이 되다니.....

카알벨루치 2018-12-07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 좋아요가 바로 올땐 쇼님이 여기서 정차중이시란 이야기~ㅎ

syo 2018-12-07 14:4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안녕하세요 ㅋㅋㅋ

카알벨루치 2018-12-07 14:52   좋아요 0 | URL
ㅎㅎㅎ쇼님 글이 딱 올라와 있는거 아닙니까!!!ㅋㅋ

syo 2018-12-07 14:55   좋아요 0 | URL
카알님도 어느덧 저의 습성을 파악하셨군요..... 서로가 서로를 자꾸 알아가고 있다 ㅋㅋㅋㅋ

카알벨루치 2018-12-07 14:58   좋아요 0 | URL
🥰🥰🥰

syo 2018-12-07 15:26   좋아요 0 | URL
뭐죠 이 공백은?? ㅎㅎㅎ

카알벨루치 2018-12-07 15:38   좋아요 0 | URL
이모티콘이 안 떴나 보네요 ㅋ

페크(pek0501) 2018-12-08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머싯 몸의 팬이라서 <인간의 굴레에서 1, 2>를 비롯해 다섯 권을 읽었고 이번에 에세이와 단편집을 추가해 그의 전작을 다 읽어 보겠다고 벼르고 있던 제가... 님의 페이퍼의 다양한 책들의 제목을 읽고... 음마!!!(페크가 기죽는 소리임.) ㅋ

syo 2018-12-08 21:46   좋아요 0 | URL
읽기는 읽는데 읽은 것들이 모여서 동반자살하는 곳이 뇌 속 어딘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결국 읽고 나서 뭐 달라진 거 있느냐는 관점에서 보면 페크님이 기죽으실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ㅠ
 

 

병목현상에서



1

 

어느 시골 마을에 하얀 병 검은 병이 있어, 마을 사람들 섬기는 하얀 병과 검은 병이 있어, 예부터 전하는 말에 하얀 병에서 낮이 나왔고 검은 병에서 밤이 나왔다고 하여 사람들 섬기는 병이 마을에 있어, 순박한 사람들 낮에는 하얀 병을, 밤에는 검은 병을 산신당 앞전에 모시고 지나는 길마다 두 손 모아 빌었는데요. 하얀 병, 빛 머금어 더욱 더 하얀 병 앞에서 사람들 씨감자 주소서 빌면 씨감자 나오고, 호미도 낫도 괭이도 주소서 빌면 그것도 나오고, 산신님 덕분에 감자 잘 심었으니 빗님도 오소서 빌면 빗님도 나렸으니 사람들 하얀 병 앞에만 서면 그리 기껍게 웃을 수가 없었지요. 자꾸 자꾸 닦아대어 하얀 병은 날로 날로 하얘졌지요. 그리고 검은 병, 칡부엉이 날아올라 들쥐 찢어 먹는 겨울밤이면 검은 병 앞에서 사람들 우리 아이 고뿔 걷어 가소서 빌면 아이들 고뿔이 낫고, 볼거리님 마마님 걷어 가소서 빌면 앓던 이가 다음날 밭에 나오고, 무서운 범, 아이 물어가는 꼬리 긴 범 삼켜 주소서 빌면 산에 범 우는 소리가 걷혔으니 사람들 검은 병 앞에만 서면 사시나무 바람 흔들 듯 떨며 빌다 후드득 사라졌지요. 자꾸 자꾸 외로워 검은 병은 밤으로 밤으로 거메졌지요.

 

어느 시골 마을에, 하얀 병 검은 병 있는 시골 마을에 어미는 일찍 죽고 아비는 총포 들고 산에 들어갔다 여즉 소식이 없는 아이 하나 있어, 낮에는 이웃 영감 밭에서 조나 피를 뽑다가 밤이면 귀뚜라미 소리로 눈물을 틀어막고 잠들곤 했는데요. 아이는 하얀 병, 심어도 심어도 끝없이 심을 씨감자를 내놓는 하얀 병이 미워라, 갈아도 갈아도 끝없이 갈 호미를 내놓는 하얀 병이 미워라, 어느 산, 어느 지붕 없는 땅을 헤맬 아비의 옷이 젖을까, 빗님을 자꾸 뿌려대는 하얀 병이 미웠는데요. 아비를 주소서, 어미를 돌려 주소서 빌고 빌어도 모른 체하는 하얀 병이 자꾸 자꾸 미웠는데요. 그러던 어느 밤, 아이는 귀뚜라미 소리를 밟아 검은 병 앞에 섰는데, 검은 병에 손대면 도깨비 같은 순사님 나타나 육모 방망이를 휘두른다고 어른들 말씀하셨는데, 아이는 무람도 없이 검은 병에 눈싸움을 세게 걸었지요. 우리 아비를 주소서, 검은 병은 입이 없고 부엉이만 울었지요. 우리 어미를 주소서 검은 병은 귀가 없고 바람소리만 들렸지요. 아이는 골이 잔뜩 나 붉으락푸르락 하는 얼굴로 꽉 소리를 치더니 검은 병을 팽개치려 집어 든 게지요. 그때 드르륵 드르륵 검은 병이 몸을 떨지 않았겠어요. 아이는 깜짝 놀라 한쪽 눈을 감고 병 주둥이에 뜬 눈을 가져다대었는데요.

 

눈을 가져다 대면 토끼도 있고, 기린도 있고, 노루도 있고, 노루 잡으러 간 아비도 있고, 별님도 있고, 달님도 있고, 돛단배도 있고, 돛단배 타고 달님 구경 가신 어미도 있고, 거북도 있고, 고래도 있고, 어미 아비 손잡고 살러 가고 싶었던 푸른 먼 바다도 있고,

 

다시 눈을 들면 감자가 있고, 호미가 있고, 뽑아야 할 조와 피가 있고, 툇마루에 누워 곰방대만 훑는 영감이 있고, 아비가 갔다는 먼 산이 있고, 그 산에 다녀는 왔는지 하염없이 울어대는 부엉이가 있고, 부엉이의 날개로 몇 날을 날아도 갈 수 없다는 어미 사는 별나라가 있고, 눈처럼 겨울처럼 시리게 빛나는 하얀 병이 있고, 고뿔이 나은 아이가 있고, 그 아이의 아비 어미가 있고,

 

어느 시골 마을에 하얀 병 검은 병이 있어 순박한 마을 사람들 낮이면 하얀 병을 밤이면 검은 병을 섬겼는데요. 어느 겨울 새벽, 부엉이 조는 산신당 산신나무 아래 하얀 병을 조심히 받쳐 들고 온 영감이 있어, 하얀 병을 모셔 놓고 검은 병을 모셔 가는데, 눈이라도 마주치면 볼거리님 마마님 도깨비 같은 순사님 육모 방망이 내려칠까 차마 고개 숙이고 검은 병 모셔 가는데, 그날따라 어쩐지 묵직하여 흔들, 어쩐지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아 흔들, 잠깐 흔들어 보았지만 그래도 차마 안을 들여다보지는 못하고 영감은 얼른 검은 병 모시고 마을로 내려가는데요. 툇마루에 걸쳐 누워 곰방대를 물고는 아비 어미 없는 아이, 밭 갈고 귀뚜라미 소리 듣는 아이 이름을 길게 불러보았는데요.




이런 이상한 이야기는 일단 의심하게 되지만 그렇지만 이 이야기에는 뭔가 교훈이 있다그것은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믿음과 같았다입 밖에 내뱉은 말에는 아무튼 간에 뭔가 힘이 있긴 있다는 것이다그 말은 항상은 아니겠지만 어떤 순간에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다.

박솔뫼사랑하는 개


 그런 날이 있다낮에 쇼핑을 하며 밖에 나와 있는 낯선 이들을 보는 것이 정말 외롭게 느껴지는 날그러니까 내가 입을 떼어내버리고 싶어 발작을 일으키고 응급실로 실려 갔다가 집에 돌아가는오늘 같은 날선명한 색 옷을 입은반짝거리는 머릿결을 한색색의 니트 스웨터를 가리키며 웃음 짓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이 쉽지 않은 날.

 저 모두를 지워버리고 싶었다하지만 나는 또한 저 모두를 원했으니나는 그들을 지워버릴 수 없고 동시에 그들이 되고 싶어 할 수도 없었다.

에이미 벤더레몬 케이크의 특별한 슬픔

 

 얼굴 하나가 말했다

 

 나는 너 때문에 각도가 생겼어 모서리가 됐어 너 때문에 부피가 생겼어 사람들이 들고나올 만한 너 때문에 무게가 생겼어 사람들이 치고받을 만한

 

 여유가 생겼어 너 때문에 얼굴을 가리는 사람들이 있었어 뒤통수에 혹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어 앞이마에 흙을 묻히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어

 

 그림자가 거대해졌어

 

 그것을 묵묵히 나르는 사람이 있었다 삼백육십 개가 넘는 얼굴을 등에 지고 삼백육십 일이 넘는 날을 넘는 사람이 있었다 곱절이 제곱이 되는 삶이 있었다

 

 영영 마주 보지 못하는 얼굴 하나가 말했다

 

 나는 너 때문에 상상하게 됐어 굽는 것은 얼마나 뜨거울까 쌓아 올리는 것은 얼마나 지겨울까 찍어 누르는 것은 얼마나 잔인할까 찍어 눌리는 것은 또 얼마나 쓰라릴까

 

 그것을 밟는 사람이 있었다 얼굴을 뭉개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다 얼굴을 내미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을 피하는 사람이 있었다 얼굴을 외면하는 사람이 있었다

 

 돌이 벽을 만나던 순간이 있었다

 벽돌이 돌벽이 되던 순간이 있었다

오은벽돌부분

 

 

2



고백하자면 나는 살아오면서 한 번도 모든 것을 걸고 싸워보지 않았다그런데 이 싸움은 자체가 수단이고 목적인 순수하고 절대적인 싸움이다.

김진영아침의 피아노

 

건다는 단어가 품고 있는 위태로움을 생각한다. 그것은 최선을 다 한다는 말과 호환되지 않는 진술이다. 최선을 다했더라도 실패로 잃는 것이 없다면 모든 것을 걸고 싸운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걸고 싸워 이겨내 크게 얻었더라도 그 싸움에 여유가 있었더라면 그것은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하는 일은 노력이나 계산의 문제고, 모든 것을 거는 일은 판돈의 문제다. 그 두 가지 과업의 차이와, 그 각각에 적절한 시기를 판별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의외로 간과되기 쉬우니,

 

아마도 내 인생의 무수한 실패들을 도마 위에 늘어놓고 갈라 보면, 뜻밖의 사인死因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나는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싸움에 맞서서 아무것도 내놓지 않은 채 그저 최선을 다하기만 했던 것은 아닐까. 혹은 나는 최선을 다해야 할 싸움 앞에서 모든 것을 걸었으되 정작 있는 힘껏 싸우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3



우리는 보통 아마추어를 전문가에 미치지 못한 자혹은 아직 전문가가 되지 못한 상태라고 생각한다아마추어를 전문가로 이어지는 발전의 회로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다하지만 아마추어는 전문가의 기준에서 평가될 수 없다아마추어와 전문가이 둘은 대상을 다루고앎을 생산하는 데 있어 완전히 다른 지평다른 관점 속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전문가들이 대상에게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려 한다면아마추어는 사랑연대감이라는 지평 속에서 대상과 만나고그 속에서 앎을 생산해 낸다그들은 무언가를 사랑함으로써 앎의 장 속에 들어선다그들에게 대상과의 거리감은 존재하지 않는다이것은 대상을 사랑하는 자만이 지닐 수 있는 앎을 구성하는 새롭고 독특한 방법이다.

정철현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


인간은 모르는 것을 사랑하고, 아는 것을 사랑할 수 있지만, ‘아는 것은 사랑할 수 없는 존재라고 나는 믿는다. 사물에 관한 것이건 사람에 관한 것이건, 얼마만큼 알고 나서부터는 더 많이 아는 일이 곧바로 더 큰 사랑을 담보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고, 그 앎이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앎을 두껍게 만드는 과정 속에서는 애정이 좀처럼 약동하지 않으며 오히려 아, 내가 아직 이 사람에 대해 잘 몰랐구나, 이 사람에게 이런 면도 있었구나, 하는 식의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종종 사랑의 확장을 경험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사랑한다면 결코 그 대상에 대해서 객관적일 수 없다. 뒤집어, 그 대상을 객관적으로 알고,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그것을 사랑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더 많이 알수록 더 많이 모르는 길을 고른다. 이국, 바다, 우주, 가보지 않은 곳을 끝없이 동경하고, 읽다보니 알겠다 싶은 책은 두 번 읽지 않으며, 배우면 배울수록 내가 잘 모른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는 분야에서 의미를 찾고 매력을 느낀다. 나는 내 일을 잘 하고 사랑한다는 말만큼 모순되거나 기만하는 말이 있을까. 그냥 나는 내 일을 잘하고, 일을 잘 하는 나를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읽다가 모르는 것이 없어질까 봐 무섭다. 정확히 말하면, 모르는 것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더 남아 있는 빈 공간을 탐구할 생각, 그러니까 사랑이 사라질까봐 겁이 난다. 그만 알아도 되겠다는 마음은 아는 것이 늘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줄어서 생긴다. 알고 싶은 것이 줄어드는 증상은 사랑을 잃어가는 병의 초기 증세다.

 

 

 

 

-- 읽은 --



유상균, 시민의 물리학

다니자키 준이치로, 슌킨 이야기

갈로아만화로 배우는 곤충의 진화

 

 

-- 읽는 --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김경윤, 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철학 수업

차병직, 단어의 발견

클라이브 해밀턴, 인류세

채호석, 안주영, 한국 현대 문학사를 보다 1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읽거나 말거나

정철현,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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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유리잔에 끓인 물을 따라 부으면 금세 사라지는 물방울 만들며 천천히 잔은 차오르고, 수면의 키가 자라면 잔은 조금씩 다른 소리를 내고, 아쉽게도 물은 금방 가득 차고, 잔 너머 쌓아놓은 책들과 그 등에 박힌 이국 작가의 이름들이 굴절되어 일렁이고, 잔의 꼭대기에 올라선 물은 하염없이 머리칼을 풀며 흩날리고, 얼굴을 가까이 대면 그 따뜻하고 진 머리칼들 안경알에 칭칭 휘감겨 사물이 온통 희부옇게 번지고, 고개를 들면 성에는 새처럼 얼른 날아가 세상은 다시 자기 자리를 잡고, 손잡이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처럼 손바닥으로 잔을 감싸 쥐고, 뜨겁고, 한 모금을 마시고, 잔의 옆구리를 손톱으로 두드려 보고, 한 모금을 더 마시고, 잔의 옆구리를 다시 두드려 소리가 옷을 갈아입었는지 확인하고, 또다시 한 모금, 이번에는 더 큰 한 모금을 마시고, 그러는 사이 뜨거움은 눅어 견딜만한 따뜻함이 되고, 나도 모르게 뜨거웠던 이름과 견딜 만큼 따뜻했던 이름들을 떠올리는 사이 조금씩 잔은 제 몸을 비우고, 잔의 안쪽으로부터 밖을 내다보며 눌린 손가락, 눌린 손바닥의 지문이나 손금 같은 것을 오래 들여다보기도 하고, 무언가 오래 뒤로 밀어 놓았던 이야기들이 슬쩍 보이는 것도 같고, 이제 도리어 내 손이 온기를 빌려주어야 할 정도로 잔은 식어버리고, 내려놓고, 그 너머로 여전히 굴절중이지만 그래도 이제는 눈에 마음에 힘을 빼고도 읽을 수 있는 작가들의 이름이 보여, 나는 다시 그 책을 펼치어 읽었습니다.

 

 

그때나는 묻는다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그러면 너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그때너는 왜 나에게 그렇게 뜨거웠는가서로 차갑거나 뜨겁거나그때 서로 어긋나거나 만나거나 안거나 뒹굴거나 그럴 때서로의 가슴이 이를테면 사슴처럼 저 너른 우주의 발을 돌아 서로에게로 갈 때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럴 때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럴 때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

허수경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181116 181130 : 28 권



1. 아무튼, 트위터

: syo같은 애정결핍범은 SNS의 압력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더라. 일찌감치 포기하고 살았는데, 이 책을 읽어 보니, 하는 이들의 삶 역시 하는 이유가 있는 삶이었고, 그에 따라 조금은 불안해졌다. 나만 멍충멍충 사는 건 아닐까. SNS를 해서 생기는 이해득실의 문제가 아니라, 하는 이들의 생활, 문화, 사고를 이해할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게 아닐까 하고.

 

2. 나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상합니까?

: 시인의 산문은 얕보기 어렵다. 벌컥벌컥 읽다가도 덜컥덜컥 멈추고, 되짚고, 뒤늦게 탄식을 하기도 한다. 손미 시인의 이 산문집을 휘감은 제일 큰 정조는 아무래도 외로움이겠고, 외로운 이야기는 종종 외로운 이들을 더 외롭게 만들기도 하므로 우리는 아무쪼록 이 책을 조심해야 하겠다.

 

3. 심야의 철학도서관

: 인물들의 대화가 일어나는 장소가 도서관의 철학서가라서 이런 제목이 붙었지만, 철학책은 아님.

: 톨렌스와 포넨스라는 두 인물이 인간의 의식이란 무엇인지를 놓고 치열하게 토론하는데, 마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는 것 같다. 끝까지 읽었지만 고도는 오지 않았고, ‘의식역시 끝내 오지 않았다......

 

4.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꿈꾼 유토피아

: 마르크스를 다룬 부분보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나 엥겔스에게 할애한 데가 더 의미 있는 책이다. 그렇다고 뭐 되게 상세하지는 않지만. 마르크스 파트는 되레 부실한 데가 있고, 한형식 선생님의 <맑스주의 역사 강의>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가볍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많은 독자들에게 이 책이 외려 더 나을 수도 있겠다.

 


5. 혼자를 위한 미술사

: 혼자가 되어 그린 그림 앞에 선 인간은 혼자가 된다. 사적인 그림일수록 그린 사람 이외의 그 무엇도 가르쳐주지 않을 것 같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런 그림에서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우리 자신에 대해 배우게 되기도 한다. 미술사의 시기시기를 작풍이나 기술로 구분하지 않고 개인에 깊이 침잠해들어가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관점이 의외로 유익하다.

 

6. 오늘도, 무사

: 책방 하는 모든 이들의 무사를 기원한다. 이들은 존재 자체가 사회를 위한 헌신인 고귀한 사람들이다. 책방 많은 사회가 모든 면에서 나은 사회다. 그보다 더 나은 사회는 딱 하나다. 그 많은 책방이 잘 살아남는 사회.

 

7. 지구 온난화 이야기

: 균형 있는 입문서라는 것은 이런 것이로구나. 단지 10년 된 책이라는 것, 작금에 심화되고 있는 환경 문제에서는 10년이 말도 못하게 긴 기간이라는 것이 좀 아쉽다.

 

8. 위대한 사상들

: 뻔뻔하다. 뻔뻔할 만도 하달 만큼 좋은 글이 아니었다면 중간에 집어던졌을 것이다.

: 위대한 사상가 10, 위대한 시인 10, 최고의 책 100,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애초에 인류라는 개념을 보는 틀이 좁다. 동양의 사상가나 동양의 시인도 들먹여는 놓았지만, 정말 들먹인다는 느낌, 자신이 개방적이고 동양까지 아우르는 시야를 가진 인물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들러리로 세워놓았다는 느낌, . 그러니까, 틀렸다는 게 아니라 틀렸으면 좋겠다 싶다.

: 읽고 있으면 같은 사피엔스의 1인으로서 뿌듯함이나 벅차오름 같은 걸 느끼기도 해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광대한 우주를 맞닥뜨려 스스로의 먼지스러움을 자각하게 만들려고 했나 싶은 느낌인데, 그렇지, 우주 앞에 선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 근데 당신이 우주는 아니잖아요. 글은 정말 잘 쓰시네요. 정말 글 잘 쓰는 먼지시네요. 부러워요.

 


9. 애덤 스미스 국부론

: 이상하지. 국부론에 관련된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진짜 읽어봐야 될 건 국부론 아니라 도덕감정론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상하지, 참 이상하지.

 

10. 이제 나부터 좋아하기로 했습니다.

: 엔도 슈사쿠의 책이 줄지어 나오고 있다. 엔도 슈사쿠의 동물기를 되게 재밌게 읽었던지라 되게 기대하고 되게 빨리 빌려서 되게 빨리 읽기 시작했는데 되게 빨리 실망하고 엔도 슈사쿠에 대한 흥미를 되게 잃었다.

 

11. 그들은 왜 더 행복할까

: 다 읽었는데 그들처럼 행복하기 위해 내가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민 말고는. 그 사실 자체가 그들이 행복한 제일 큰 이유 같다.

 

12. 지구 한계의 경계에서

: syo는 오늘날 우리 지구가 이 모양 이 꼴인 게 우리가 한계를 몰라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수백 수천의 과학자들이 힘을 합쳐 현재 보유한 기술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 한도로 정밀하게 고안해 낸 지구 한계치가 이미 나와 있었다. 그러니까 몰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모른 척 하거나 우물쭈물 하다가 망하는 것이다.

 


13. 이명헌의 과학책방

: 한 권을 읽으면 수십 권을 읽은 꼴이 되는 무거운(무서운) 책이다. 진도를 쭉쭉 빼지 못하는 까닭도 같다. 소개된 책들 가운데 너무 옛날 책이 많은 것도 이유겠지만, 어쩐지 이것만으로도 너무 배가 부른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원전들을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데, 이건 장점인가 단점인가.

 

14. 고인돌, 역사가 되다

: 갑자기 왜 고인돌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알고 싶었던 만큼보다는 훨씬 더 많이 알아버렸다. 까먹겠지만. 그래도 어느 날 또 갑자기 고인돌에 대해 알고 싶어지면, 망설이지 않고 손에 들 책을 알았으니 그걸로 된 거지.

 

15.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이야기

: 해야 할 이야기가 명확하고 그 말을 뒷받침하는 명분이 충분하면 글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뻗어나갈 밖에. 환경 문제는 심각하지만 그래서 우리가 가야할 길은 의외로 선명하다. 단지 먹고사니즘에 치여 그 길을 가지 못할 뿐. 진단과 처방이 잘 버무려진 글들이지만 문제는 진단을 받으러 찾아오는 사람조차 없다는 점이겠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 너무 적다.

 

16. 지도로 읽는다 한눈에 꿰뚫는 세계사 명장면

: 역사책을 읽을 때면 무의식적으로 영화를 기대하는 것 같다. 이 책은 스틸사진이다. 장면은 더없이 선명하고 세밀하게 포착되었지만, 그만큼 서사가 빈곤하다. 남는다면 지식으로 남겠으나 남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겠다.

 


17. 왼손은 마음이 아파

: 퇴보일까, 건성일까? syo는 마음이 아파.

 

18. 문명의 그물

: 유럽의 역사를 씨실로 꿰었다. 질이 좋은 씨실이다. 최고의 씨실이 갖추어졌으니 이제 날실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면 아름다운 직물이 될 것이다. 그래야 아름다운 직물이 될 것이다. 더 읽어야 한다.

 

19. 과학 같은 소리 하네

: 생각해보면, ‘4차산업혁명시대라는 굉장히 공학적이고 과학적인 단어를 공학자나 과학자보다 입에 더 많이 올렸던 이들이 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거나 대충 아는데도 모르는 게 없거나 완전히 아는 것처럼 말했고, 우리 사는 모양새는 이 모양 이 꼴이다. 과학과 공학이 정치인의 입에 오르내리기 전에, 혹은 그러기 시작할 때, 우리가 그것들을 다 알고 있으면 참 좋겠으나 녹록치 않다. 모르니까 우리는 잘 속을까? 의외로 그렇지도 않다. 속이는 놈들도 잘 모르는 건 매한가지기 때문이다. 결국 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실을 검증하는 법, 믿을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소스, 통계의 장난질에 놀아나지 않을만한 기초적 안목, 뭐 이런 간단한 지식들 아닐까? 이 도구들은 생각보다는 얻기가 쉽다. 성의의 문제에 가깝다.

 

20. 에디톨로지

: 표지에는 창조는 편집이다라고 쓰여 있지만, 실은 편집은 창조다정도를 겨우 증명한 책이 아닐까? 다양한 지식들로 편집된 이 책이 창조되었다는 것이 그 증거. 그리고 그게 끝인 것 같다. 읽는 내내 아, 결국 저 말인데 뭘 이렇게까지-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다.

 


21. 마흔에게

: 뭐 그다지 눈에 띄는 이야기도, 마음에 확 들어오는 이야기도 없는 단순한 에세이집. 주제는 늙는 법이고 원제 역시 마흔이라는 똑 떨어지는 숫자와 상관이 없는데도 번역하면서 제목에다 굳이 마흔을 타겟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이렇게까지 드러내는 이유를 알고 싶다.

 

22.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

: 늦게야 정이현에 눈뜬 것 같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랄지, <달콤한 나의 도시> 같은 작품으로 명성 떠르르하던 시절에는 그렇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요즘은 그의 건조한 문장이 왜 이렇게 좋은 걸까. 언제든 추락할 것 같은데 추락하지 않고 가늘게 떨리기만 하는 문장 위에서 아슬아슬 줄을 타다가 불시에 뚝, 하고 떨어지는 경험을 한다.

 

23. 비상문

: 인간은 언제나 다른 인간에게 하나의 질문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인간의 죽음은, 또한 그 죽음이 스스로에게 선사한 죽음이라면, 그건 정말 거대한 질문이 된다. 그 질문을 마주하여 결국은 통속적이거나 자조적인, 혹은 자기계발적인 대답만 내놓고 다시 바쁘게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syo처럼 별 볼일 없는 인간의 한계겠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해서는 말할 수가 없겠다.

 

24. 이성의 운명에 대한 고백 순수 이성 비판

: <순수이성비판>을 읽은 다음 <실천이성비판>을 읽고 <판단력 비판>을 읽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있다. 실제로 그래야 하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얼추 알기로 실천은 순수를 깔고 앉았다고는 하던데. 근데 이놈의 순수는 정말 순수하게 어려워서 잘 따라가는 것 같다가도 자꾸 허방을 짚게 만든다. 원전 번역본은 사놓았지만 읽는 것은 다음 생의 과업으로 미루어 놓은 상태고, 결국은 이런저런 입문서나 개론서를 전전하다가 슬그머니 헤겔로 넘어갈 생각인데, 잘 될지 모르겠다. 좋은 책인지 아닌지 선명하게 판단하려 다른 책을 몇 권 더 읽어 봐야하겠다. 일단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는 제일 좋았다. 지금까지 읽은 책은 무려 두 권. 한 권이 아닙니다.

 


25. 이 모든 것을 만든 기막힌 우연들

: 빅 히스토리는 정말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따로 과학적 기본지식을 갖추고 와서 읽어야 하는 건지, 읽고 나서 과학적 지식을 갖추어야 하는 건지 항상 헷갈리게 한다. 사실 이건 독자의 딜레마인 동시에 저자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빅 히스토리의 가장 큰 변별점은 과학과 역사의 오묘한 배합 속에서 드러나기 마련인데, 과학 독자와 역사 독자의 간격은 기실 유대교 신자와 이슬람 신자 사이의 간격과 유사하여 서로를 꽤나 알 것 같으면서도 생각보다 잘 섞이지는 않는다. 결국 과학에 힘을 주면 역사 독자가 성화고 역사에 힘을 주면 과학 독자가 아우성을 칠 테니, 저자는 야훼와 알라 사이에서 망설이고 독자는 타나크와 꾸란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이다.

 

26. 역사는 재미난 이야기라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역사책

: 에피소드식 역사 지식은 잘난 척 할 때나 쓰는 거라는 인식을 오래 쥐고 있었다. 실제로 그렇게 쓰곤 했다. , 그런 건 어떻게 알아? , 어쩌다 보니(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시크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놓고 막상 책을 평가할 때는 에피소드식 역사책을 하급으로 취급하는 요 양면성, 이중 잣대. 하지만 알고 보니 그저 syo가 멍청한 것이었을 뿐, 에피소드의 이면이나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했을 뿐, 역사책은 언제나 옳다!(짝퉁 역사만 아니라면) 심지어, 재미난 이야기로서의 역사책이라면? 옳고도 옳은 거지.

 

27. 우리가 꿈꾸는 나라

: 그가 없는 세상에 우리에게 부족한 세상이듯, 그가 남긴 말만으로 우리는 부족하다. 다시 살아 돌아오실 게 아니라면, 그의 평전이라도 만나고 싶다. 1주기쯤 이와 관련된 어떤 일이라도 벌어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28. 침묵의 봄

: 고전이 얼추 다 그런 면이 있지만, 과학의 고전은 유독 더 읽어 볼 명분이 적다. 왜냐하면 책 속에 든 주장과 증명들이, 책이 나왔던 시점에는 놀랍도록 혁신적이고 심지어 급진적이었던 그 이야기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상식이 되어 대중지식 속에 자리를 잡고, 같은 분야를 다루는 후발 주자들이 그 지식들을 당연한 전제로 깔고 뒷이야기를 이어나가기 때문이다. 더는 천체학에 대해 알기 위해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를 읽지 않고, 물체의 운동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뉴턴을 읽지 않는다. 독서의 왕국에서 그 책들은 기념비처럼 존재하며 유독 부산스런 독서가들의 순례지가 될 뿐이다. 이 책이 그렇다. 이 책은 수많은 일을 하고 수많은 것들을 바꾸어 놓는 데에 채 반 세기의 시간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곧장 기념비가 되었다. 뒤는 다른 책들이 맡았다. 50년 전에 나온 이 책을 오늘날 다시 읽는 것에 가치가 없지 않겠으나, 오늘은 오늘의 문제를 다룬 오늘의 책을 읽어야 한다.

 




이만하면 올해도 할 만큼 했으니, 12월부터는 적게, 오래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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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11-30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같게 읽어 본 책 딱 한 권이 있으며, 소감도 같게 공감합니다. ^^

syo 2018-11-30 21:02   좋아요 1 | URL
4, 8, 20, 28 중에 그 한 권이 있나요?? ㅎㅎㅎㅎ 찍기

북다이제스터 2018-11-30 21:07   좋아요 0 | URL
역시 무서운 분 ㅎㅎ
신기도 있으세요. 20번요~~~~^^

syo 2018-11-30 21:15   좋아요 1 | URL
북다님이 읽으실 만한 것들, 딱히 읽으실 것 같진 않지만 읽으셨다면 저랑 같은 반응이실 것 같은 책 위주로 한 번 골라봤습니다 ㅎㅎㅎㅎ

카알벨루치 2018-11-30 2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5일동안 30권의 책을 읽는 사람! ㅜㅜ 계속 읽어주세요 도전 늘 팍팍 받고 있으니~ㅎㅎ

syo 2018-11-30 21:03   좋아요 1 | URL
이제 30일동안 15권 읽는 사람으로 거듭날 겁니다. 맨날 다 날라가고 없어ㅠㅠ

카알벨루치 2018-11-30 21:26   좋아요 1 | URL
난 16번, 20번 읽는중인데 두권다 용두사미 되는거 아닌가 싶네요 ㅎ

syo 2018-11-30 22:55   좋아요 2 | URL
카알님의 용두용미를 기원합니다.

북프리쿠키 2018-12-01 14: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8번 딱 한권 겹칩니다..흐흐;; 전 카알벨루치님과는 다르게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않을 껍니다~!!! ㅠ.ㅠ

syo 2018-12-01 14:40   좋아요 1 | URL
그렇다면 누구든 오르려는 사람은 오를 수 있는 나무로 거듭나는 12월의 syo가 되겠습니다 ㅎㅎㅎ

레삭매냐 2018-12-02 1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침묵의 봄, 마저 다 읽어야 하는데...
사실 사서 서문 정도만 읽은 것 같네요.

읽을 책들이 주변에 너무 많은데도
우선 순위에서 밀려 나는 통에 ㅇㅇ

이제 한 달 남았네요, 열심히 읽어 보겠습니다.

syo 2018-12-02 15:10   좋아요 0 | URL
레삭매냐님의 꾸준한 독서와 기록이 항상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12월도 2018년도 알찬 독서로 마무리하시기를 ^-^

페크(pek0501) 2018-12-02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게 오래 읽기. 저도 동참합니다.

syo 2018-12-02 15:10   좋아요 0 | URL
동지! 2018년을 천천히 오래 마무리하자구요^^

cobomi 2018-12-09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독서량에는 못 미치지만, 저도 최근 ˝좀 적게 읽자. 거듭 읽자.˝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침묵의 봄>에 대한 의견에는 공감해요. 고전이지만, 따분하기도 하고 낡은 인상을 받기도 하고요.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제목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라고 했음에도 가장 인기 없는 책이기도 해서 살짝 심란했는데 syo님도 읽으셨다니 반갑네요 ㅎㅎ

syo 2018-12-09 11:30   좋아요 0 | URL
많이 그리고 빠르게 읽는 일이 쉽지 않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적게 거듭 깊이 읽는 일이 훨씬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에너지 소모도 크구요.

사실 <침묵의 봄>과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이야기> 중 한 권을 고르라면 오늘날 우리는 당연히 후자를 골라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북플은 이 책을 읽은 이가 저밖에 없다고 알려주네요. cobomi님처럼 읽으셨지만 표시하지 않은 분들이 실제로는 더 계시겠지만 그래도 어쩐지 씁쓸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