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을 죽여야 한다

 

본질이라는 단어는 물론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는 있지만, 장담컨대, 대개의 경우 본질이라는 단어의 용법은 의미를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본질이라는 말은 십중팔구 이런 식으로 쓰인다. “너의 행동은 그 운동의 본질을 왜곡한 거다.” “그 운동의 본질을 훼손하는 사람들이 문제다.” “그건 그 운동의 본질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너 같은 사람 때문에 그 운동의 본질적 의미가 퇴색되는 것이다.” “나는 그 운동의 본질은 지지하지만, 이건 아닌 것 같다.” 이쯤 되면 본질의 뜻은 이렇게 해석해도 무방하겠다.

 

본질 : 나와 대립하는 상대방의 견해가 틀렸다고 지적할 때 권위를 싣기 위해 내 말에 뿌리는 금 가루 같은 단어.

 

세상에 국립본질결정위원회같은 것이 존재해서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이런 저런 본질들을 시시때때 따박따박 정의해준다면 또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쓰이는 모든 본질은 실제로 본질이 아니라 본질을 주장하는 사람의 견해나 해석에 불과하다. 미투 운동의 본질이 뭔데. 누가 그걸 정의했는데. 그래도 일반적인 통념이라는 게 있다고? 그렇다면 전체의 몇 %가 동의하면 일반적인 건지? 과반? 8? 만약 그렇다면, 과반/8할이 동의하는지 아닌지 전수조사는 거치셨는지?

 

본질이라는 단어의 가장 큰 무서움은, 미투 운동을 반대하는 사람은 반대하는 논거로 본질 운운하고,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은 지지를 위해 본질을 입에 올린다는 데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견해, 객관적인 태도, 논리적인 능력을 갖췄다고 쉽게 오해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본질이 진짜 본질, 본질의 이데아쯤 된다고 믿으며 스스럼없이 본질을 입에 올린다. 결국 본질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논리와 윤리의 결정자임을 주장하는 수백만의 감별사들에 맞서 개념투쟁을 벌여야 한다. 그리하여 본질이라는 말은 결국 운동을 밀고나가는 데 이익보다는 해악으로 작용한다. 본질이라는 말이 없었을 때 우리는 운동만 지키면 되었지만, 본질이라는 말이 무대에 오르는 순간, 운동을 지키면서 덩달아 운동의 본질도 지켜야 한다. 한 번도 제대로 합의된 적이 없는 수백만 개의 본질들에 맞서서 기약 없는 싸움을 하느라 기력을 소진해야 한다.

 

syo는 본질이라는 말 자체에 회의적이지만 만일 그런 말을 쓸 수 있다고 한다면, 변하지 않는 특성이나 최초의 순수한 상태를 지칭하는 데 쓰는 건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상 어떤 고귀한 일에도 크고 작은 부작용은 따른다. 미투 운동이 활발해지면, 그 과정에서 이런 저런 부작용들, 알고 보니 가해자가 아니었던 사람, 실제로 아니었는지는 애매하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가해행위가 있었다고 인정하기에 증거가 충분치 않은 사람, 장난이거나 관심을 받기 위해서, 혹은 사리사욕을 위해 무고를 저지르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 등등이 생길 확률이 0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 부작용과, 그런 부작용을 줄이고 없애나가는 과정, 그러면서도 미투를 외치는 사람들이 겁내지 않도록 힘껏 위드유를 외치는 노력, 가해자의 가족이나 폭로자에게 가해지는 2차적 3차적 폭력을 방지하려는 시도, 그 모든 것들이 통째로 미투 운동의 본질이다. 무균 무중력의 티끌 하나 없는 본질이라는 놈이 존재하고, 우리가 지금 점점 그 본질에서 멀어지고 오염되고 있다는 식이 아니라, 이렇게 지속적으로 지적받고, 내파되고, 수렴하고, 폭발하고, 먼지가 묻고, 다시 털어내고, 꿈틀꿈틀, 때로는 우르릉 쾅쾅 변화하고 진화하는 전체적 역동성 그 자체가 미투 운동의 본질이다. 미투 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운동이나 사상을 놓고 보아도 깎이고 재조립되며 탈바꿈하는 과정을 내포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나. 아, 미투 운동의 본질이라니. 미투 운동으로 우리가 만들고 싶은 세상의 최종적인 모양은, 미투의 본질을 지키는, 그러니까 진짜피해자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진짜가해자의 행위를 폭로하고 처벌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성폭력이 없으므로 미투 운동 자체가 필요 없는 곳이다. 그러니까 미투 운동은 더 커다란, 젖과 꿀이 흐르는 신세계를 찾아 나선 우리가 올라탄 돛단배다. 처음 항구에서 출항할 때, 갑판에는 물 새어나오는 곳이 없고, 돛에는 바느질 자국이 없으며 선원들의 얼굴에는 미소만이 가득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친 바다와 맞서 오랜 항해를 해 나가다 보면, 갑판에 땜질도 해야 하고, 누덕누덕 돛도 기워가며 써야 하며, 선원들의 얼굴에 하나 둘 흉터도 생길 것이다. 그렇게 상처받고 상처를 고쳐가며 우리는 가야 한다. 진정 당신이 새로운 땅에 찬동하는 모험가라면, 원래 이 배가 얼마나 매끈하고 흠잡을 데 없었는지를 한탄하거나, 배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었다며 선원들을 흉볼 시간에 망치를 들어야 한다. 나침반을 보아야 한다.

 

당연히 잘못된 일은 고쳐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내가 올바른 방향이라 생각하는 곳을 가리킬 권리가 있다.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 본질이라는 거대하고 대적하기 어려운 말을 독점할 권능이 우리 개개인에게는 없다. 그 말은, 그리고 나는 당연히 그 말을 할 수 있다는 태도는 결코 좋은 결과를 낳지 않는다. 이제는 그만 그 말을 죽일 때가 되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모든 부침은 그대로 다 미투 운동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성격이다. 이 안에서 해나가야 한다. 이런 생각이 운동을 나아가게 하고 운동을 고친다고 syo는 믿는다.             




다만 진보에는 순서가 있고 발전에는 근원이 있다는 점을 믿고 있어, 온 나라가 지엽枝葉만을 추구하고 뿌리를 찾는 사람이 전혀 없음을 우려하는 것이다. 즉 근원을 가진 자는 날마다 성장할 것이며 말단을 좇는 자는 전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사교편>
_ 루쉰, 『루쉰 전집 1 : 무덤, 열풍』


"나는 너 같은 소년이 모두 온갖 것을 이것저것 경험하며 성장하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해. 그러면 사람들이 서로를 훨씬 더 잘 대할 수 있게될 테니까 말이야. 무엇보다 이런 전쟁도 줄어들게 될 거다. 아, 그래. 아마 언젠가는 이런 모든 갈등이 끝나는날이 올 거야. 위대한 정치가나 교회나 이런 단체들로는 그 갈등을 끝낼 수 없단다. 사람이 바뀌어야 가능한 일이거든. 사람들이 너처럼 바뀔 거란다. 퍼핀. 이런저런 면이 좀 더 섞이게 되는 거지. 그러니 혼혈아가 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단다. 그건 유익한 거니까."
_ 가즈오 이시구로, 『우리가 고아였을 때』


인간해방과 사상의 자유의 역사는 어차피 독선에 대해 회의가, 권위에 대해 이성이 승리를 거두는 긴 투쟁의 되풀이임에 틀림없다. 우화도 그렇고 현실도 그렇고 역사는 한 단계의 투쟁이 끝나면 으레 '임금은 알몸이다'라고 폭로한 소년의 용기에 열중하는 나머지 힘없는 소년에게 그런 엄청난 임무를 떠맏기게 된 그 사회의 실태에 대해서는 눈이 미치질 않는다. 문제시해야 할 중요한 것은 그 사회의 영광(혹은 해결)까지의 과정에 얼마나 많은 인간의 타락과 사회적 암흑과 지적 후퇴가 강요되었느냐 하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겠다.
_ 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


성장이란, 더 이상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을 때에만 진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만을 해왔기 때문에 늘 같은 자리를 맴돌았을 뿐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너에게 용서받기 위한 반성, 아니, 이미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해버린, 그런 반성 말이다.
_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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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18-03-15 0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돛단배 비유 너무 좋습니다. 본질 운운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새겨듣고 갑니다^^

syo 2018-03-15 08:14   좋아요 2 | URL
거대한 말은 쓰기가 쉽지 않고, 운동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일수록 ‘본질‘같은 말은 깊은 고민없이 함부로 정의하고 쓰기가 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요. 쓰기 어려운 말을 쉽게 쓰는 사람이 주장하는 바를 syo는 잘 믿지 않습니다. ㅎㅎㅎㅎ

cyrus 2018-03-15 0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질을 단순하게 ‘의의‘와 같은 의미로 이해했었는데, 이 말의 결점을 보지 못했어요.

syo 2018-03-15 08:25   좋아요 2 | URL
추상적인 개념이 논쟁의 판에 끼어들면 실체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투여해야 할 에너지가 감소되는 경향이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페미니즘의 경우만 해도, 이게 페미니즘이다, 아니다 저게 페미니즘이다, 하는 식의 개념투쟁이 물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만 실제로 무의미한 싸움을 낳거나, 페미니즘을 감별사들이 자신의 ˝객관적이고 높은 지식˝과 ˝치우침 없는 성숙한 윤리관˝을 뽐내는 데나 쓰는 ‘핫한 논쟁거리‘ 수준으로 만드는 해악이 있잖아요?

박기비 2018-03-19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알라딘 서재는 알라딘회사의 블로그 같은건가요??

제가 북로그? 나 쇼님 처럼 일기 같은걸 쓰고 싶은데...

쓸 포맷을 지금 구하려는데 혹시 어디를 가장 추천하시나요?

syo 2018-03-19 22:5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익명의 님.
생각하시는대로 알라딘 서재는 알라딘에서 제공하는 일종의 블로그입니다. 책과 관련한 글을 쓰는데 맞춰진 곳이지요.
저도 경험이 일천해서 어디가 좋다 추천을 드릴만큼 아는 바가 없네요. 알라딘도 좋습니다. 여기는 책 많이 읽으시는 분들, 깊이 있는 독서를 하시는 분들, 심지어 많이 동시에 깊이 읽으시는 분들도 많아서 배우기도 이야기 나누기도 참 좋은 것 같습니다. 단지 글 쓰기에 그다지 잘 만들어진 블로그는 아닌 것 같습니다. 티스토리 같은 전문적 플랫폼에 비하면 불편한 부분이 없지 않네요. 뭐 소소한 것들이긴 하지만요.
알라딘 세상에 들어오신다면 syo가 환영합니다. 제가 뭐 대표자는 아니지만서도......
 


삼재의 화신 vs 귀함의 결정체


며칠 전, 친구 三이 일자리를 구하겠다고 상경하여 syo의 맞은편 방에 짐을 풀었다. 지겹다, 저놈시끼. 서울에서 뛰엄뛰엄 10년쯤 지냈는데 그 가운데 반쯤은 지금 같은 구도로 三과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았다. 그리고 저놈시끼와 얽히면 그해는 항상 되는 일이 없다. 으이구 징한 내 친구 三. 하필 이럴 때 저 걸어다니는 삼재 같은 놈이 내 옆에...... 죽여서 묻어야 하나...... 뇌를 찌르지 않으면 절대로 죽지 않고 다시 돌아와 들러붙는 walking 三災.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三은 짐을 풀자마자 바로 그날 저녁 군소리 없이 치킨을 시켰다. 그러자 우리 사이의 모든 묵은 원망들이 뜨거운 눈꽃치킨에 내려앉은 눈송이처럼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삼재 같지만 다정한 나의 친구야. 삼재 그까짓 거 다 괜찮아. 니 이마에 부적이라도 하나 붙여 놓으면 되지. 그리고 나는 사주가 아주 끝내주거든. 들어는 보았니, 천월이덕天月二德이라고? 숨길 수 없는 어마어마한 귀함의 소유자. 알고 보니 나였어. 나더라고. 그게 나야. 훗.



원국에 월덕귀인과 천덕귀인이 모두 있는 경우를 천월이덕(天月二德)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천월이덕을 관운무병(官運無病), 흉화위길(凶禍爲吉)이라고 했다. 관운이 따르고 무병장수하며 흉한 기운도 길하게 바꾼다는 뜻이다. 따라서 천월이덕이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총애했다. 특히, 일주에 있는 천월이덕을 가장 귀하게 본다.

_ 강헌, 『명리 : 운명을 읽다』


어쩐지 뭐만 써도 이상하게 좋아요 엄청들 눌러주신다 했지. 열라 총애받는 사주. 일주에 월덕 천덕 다 가진 남자. 아, 내 팔자야. 귀하다 귀해. 아, 하느님 나한테 왜 그랬어요? 감당 안 되게. 미치겠다 정말....






잠깐. 근데 난 저 어마무시한 팔자에도 불구하고 지금 왜 이 모양으로 살고 있는 거지? 응? 응?? 응??? 으아아아아아아아?





아, 제발 진짜, 엄청난 힘을 가진 국제 범죄단의 두목들이 나를 좋아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를 내버려둬요. 엉엉,. 나는 소박한 여자예요.
_ 이유경, 『잘 지내나요?』


같이 아무 말 않고 오래 앉아 있으면 불편해지는 사람을 친구라 부르기는 거북하다. 친구란 아내 비슷하게 서로 곁에 있는 것을 확인만 해도 편해지는 사람이다. 같이 있을 만하다는 것은 어려운 삶 속에서 같이 살아갈 만하다고 느끼는 것과 같다. 그런 친구들이 많은 사람은 행복할 것 같다.
_ 김현, 『행복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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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3-13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의 총애를 받는 쇼님!! ❤️

syo 2018-03-13 12:25   좋아요 0 | URL
아이고 내 팔자야....♥️

stella.K 2018-03-13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정말 그런 사람 있더라구요.
뭐만 써도 엄청 열라 좋아요 받는 사람.
거 왜 그럴까요? 질투나요! 쇼님도...ㅋㅋㅋㅋ

syo 2018-03-13 14:32   좋아요 0 | URL
팔자소관인가 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뭐래

단발머리 2018-03-13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래서 사람들이 syo님 좋아하는 거 아닐까요... 이런거...
저놈식끼와 워킹삼재, 그리고 ..
아, 하나님 나한테 왜 그랬어요?
감당 안 되게. 미치겠다 정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8-03-13 14:44   좋아요 0 | URL
이건 다락방 아카데미에서 배운 스타일입니다ㅎㅎㅎ 아시잖아요. 사랑받는 스타일, 락방쌤 스타일.

요건 새발의 피 정도죠ㅋㅋㅋㅋ

다락방 2018-03-13 17:34   좋아요 0 | URL
이런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8-03-13 17:4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왜뭐왜?

프레이야freyja-고마워영화 2018-03-13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킨에 마음 당장 녹아내리는 거. ㅎㅎ 울 작은딸이랑 같아요. 봄이 오나 봄니다.

syo 2018-03-13 16:25   좋아요 1 | URL
날로 날로 뻗어나가는 우리 치느님의 교세에 기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름 모를 자매님께 치느님의 매콤달콤한 권세가 항상 함께하기를 바란다고 전해주세요.ㅎㅎㅎㅎ

긴 겨울이 이제 겨울 끝났네요. 프레이야님 좋은 하루 되세요.

2018-03-13 16: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3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블랙겟타 2018-03-14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연스럽게 좋아요에 손이 간다더만..syo님의 그 총애 받는 사주덕분이었군요!! (아하!) 이번에도 이렇게 눌렀네요.

syo 2018-03-14 08:32   좋아요 0 | URL
정말 저도 이럴 줄은 몰랐네요. 나 원 참.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손승연과 손 일병

 

총을 어깨에 둘러 매고 함께 경계 근무를 나갈 선임을 기다리던 손 일병은 생활관 쪽에서 들려오는 어떤 여인의 노랫소리에 홀린 듯 문을 열고 들어선다. 생활관 안의 병사들은 이미 모두 영혼이 포획된 상태라 누가 들어오든 말든 그저 TV만 보는 중이다. 붉은 단말머리의 아가씨가 당찬 얼굴로 한 음 한 음을 꾹꾹 눌러 담듯이 묵직하게 읊조리고 있었다. 물들어. - 하는 탄성인지 탄식인지가 생활관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손 일병의 입이 절로 벌어진다. 대박. 대박사건. 오거리 표지판마냥 우뚝 서서 멍하니 서 있는 손 일병을 찾던 선임이 화가 난 표정으로 생활관 문을 밀고 들어온다. “아이씨, , 손 일병아, 너 지금 뭐 하냐, 근무 안 가ㄴ..........?” 그때였다. 물드으러어어어어~~~! TV 속의 세이렌이 작심한 듯 빵하고 질렀고, 그 마력에 선임 역시 여지없이 포박되어 손 일병의 옆자리에 딱 멈춰 선다. 총을 둘러 맨 두 사람은 누가 더 멍청한 표정을 잘 짓는지 경합하며 쌍봉바위처럼 굳어 있었다. 부지불식간에 노래가 끝나고 여운에 발이 묶여 어렵사리 정신머리를 찾아가던 찰나, 행정보급관이 문을 밀고 들어와 호통을 친다. “, 이 정신 나간 것들아, 교대 안 가냐? 지금 니들 왜 안 오냐고 난린데! 교대 가기 싫으면 어떻게, 다정하게 영창이라도 한 번 갈까?” 그러나 고개를 돌린 손 일병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행정보급관은 흠칫 놀란다. “, . , 뭔 일 있냐? 왜 그래, . 아니, 꼭 영창을 가라는 게 아니라, 얼른 근무 교대를 나가라는 거였지 나는......”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손 일병은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행보관님, 전 괜찮습니다. 그냥 물들어서 그래요, 물들어서...... 으흑. 경계하는 자세로 초소를 향해 가는 두 병사는 실은 아무것도 경계할 여력이 없었다. 아, 오디세우스 그 양반이 당최 왜 일을 그런 식으로 했냐 했더니만...... 


초소에 도착하자 교대를 기다리던 초병이 벌컥 화를 낸다.


  초병 : (언성을 높이며) ! ! 미쳤어?

  손 일병 : ....... (고개를 떨군다.)

  초병 : (손 일병과 함께 온 선임을 바라보며) , 강산아. 손 저거 이제 갓 일병 달아서 그럴 수 있다 쳐도, 넌 지금 뭐 하냐? 군 생활 다 끝났냐, 지금?

  선임병 : 아니, 그게 아니라 신 상병님. ..... (손 일병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 걔 이름이 뭐라고?

  손 일병 : ...... 승연입니다. 손승연.

  선임병 : (다시 초병을 바라보며) , 손승연이랍니다. 걔가 글쎄......

  초병 : , 걔가 누군데. 신병 들어왔냐?

  선임병 : 아니, 그게 아니라. (손 일병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 그거 제목이 뭐였지?

  손 일병 : ......물들어.

  선임병 : , 맞다. (다시 초병을 바라보며) , 물들어랍니다. 그게 글쎄, 와 진짜......

  초병 : (언성을 높이며) 아 진짜, 이것들이 뭐라는 거야 지금. 누가 물들었다는 건데. 손승연은 또 누구야? , 니 여동생이냐?

  손 일병 : 아닙니다. 가수......는 아니고, 가수 될려고 하는 애 같습니다. 근데 노래가 진짜 장난 아닙니다......

  초병 : ...... 예쁘냐?

 

저녁을 먹고 전화통을 손에 든 손 일병이 여친에게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자기야, 손승연이라고, 보이스 코리아 나오는 앤데. 장난 아냐. 진짜. 진심 노래 미침. 여지껏 오디션 프로 나온 애 중에서 제일 잘함. 대박......” 손 일병의 여친은 음악 하는 중학교, 음악 하는 고등학교, 음악 하는 대학교, 음악 하는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마침내 음악 하는 음악선생이 된 진성 음악인으로서, 취미가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심사하기>, 음악에 관해서는 용서도 자비도 없는 무시무시한 평가자였다. 초등학교 시절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박정희. 중학교 때 별명은 엄석대. 손 일병은 지금도 가끔 그녀를 임틀러라고 부르는데, 뭐 어쨌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한번 들어 볼게.” 라는 여친의 목소리에 어쩐지 왼손에는 지휘봉을 들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안경테를 추켜올리는 습관과 그 습관에 어울리는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검정색 투피스 정장 차림의 사감 선생님 이미지가 떠오르긴 했지만, 손승연이 사감 선생님의 매서운 검증과정을 무난히 통과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므로 손 일병은 마냥 즐거웠다. 다음 날 같은 시간, 손 일병의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나온 여친의 말. “, 잘 하더라? 좀 해.” 역대급 특급 칭찬이었다.

 

갑자기 아이유에게 사과하고 싶은 게 있다. 일종의 위장평화전술이었는데, 다른 병사들이 죄다 시크릿, 나인뮤지스에 환장하는 공간에서 혼자 손승연에 환장한 독특한 인간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 손 일병은 아이유에 환장하는 척했다. 아니, 이건 손승연한테 사과할 문제인가? 하여튼 군대는 그렇다. 환장하는 아이돌 하나는 있어야 정상인 취급을 받고, 조용히 혼자 김동률 CD를 듣고 있다가 걸리면 차마 입 밖으로 내긴 민망하지만 치명적인 건강상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십상이다. 하고 많은 아이돌 가운데 아이유를 고른 이유는 단순했다. 손 일병이 보기에 아이유는 어쩐지, 자신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하루에 두 번씩 의무적으로 자기 뮤직비디오를 보는 손 일병의 멱살을 잡는다거나,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캐러멜을 사면 따라 나오는 엽서 크기의 자기 사진을 철모 아래 넣어놨다고 손 일병을 고소 고발하거나 할 것 같지는 않은 이미지였으므로. 얼떨결에 골랐지만, 그 선택은 예상치 못한 효과를 불러내기도 했다. 스물여덟에 일병 된 늙은 아저씨가 이제 갓 스물하나, 스물둘 된 상병, 병장들처럼 섹시한 아이돌을 탐욕스런 눈빛으로 더듬지 않고, 아이유처럼 동생동생한 아이를 오구오구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는 그림이 또 그 어린 친구들한테는 참신한 장면인거라, , 이런 게 바로 그 말로만 듣던 삼촌팬이라는 존재로구먼, 역시 덕질에는 장유유서가 없구먼, 백세 시대를 살아가는 중년의 진취적인 모습이구먼, 뭐 이런 식의 호응을 불러일으켜 어쩐지 군 생활이 좀 더 편해진 것도 같다. 그러나 멍청한 어린 것들아, 사실 그건 다 페이크였지! 사실 나는 손승연이 좋았다고! 환장한다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주구장창! 몰랐지, 요놈들아? 으하하하.....

 

손 일병은 제대해서 syo가 되었고, syo와 임틀러는 요즘도 손승연이 노래했다고 하는 음악 프로그램은 꾸준히 찾아서 보고, 듣고, 감탄하고, 침이 마르게 칭찬하고, 칭찬하다 침이 마르면 에잇, 뽀뽀도 하고 그런다. 금슬에도 도움을 주는 손승연. 말 그대로 손승연은 사랑입니다. 그 시절의 손승연도 대단했지만, 지금의 손승연은 뭐라 얹을 말이 없다. 결점이 없는 보컬. 너무 장점이 많은데, 그 많은 장점 가운데 하나일 뿐인(심지어 가장 큰 장점도 아닌) 고음 때문에 소위 고음형 가수라는 칭찬 같기도 하고 욕 같기도 한 이미지를 뒤집어쓰고 한껏 과소평가 되는 가수. 얼른 얼른 자라서 세계로 가자. 그리고 자꾸 예뻐져...... 우리 승연이 오구오구.


그리고,

 

손 일병이 손 상병 되겠다고 분주하던 5월의 어느 날 서울에서는 여친이 2호선을 타고 어디론가 가는 중이었다. 손잡이를 움켜쥐고 흔들흔들 한강을 건너는 중에 때마침 차창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고, 그 쏟아진 햇살이 자기 앞에 앉은 아가씨의 정수리를 때렸는데 아무리 봐도 그 정수리가 아는 정수리 같았단다. 이거, 근래에 마주친 정수린데...... 그 정수리가 살짝 고개를 들었는데, 이번에는 눈, , 입이 또 아는 눈, , 입이었던 거지. 생각이 날 듯 말 듯 아련한 가운데 여친은 고개를 갸우뚱했고, 그런 그녀와 눈이 마주친 낯익은 정수리눈코입의 주인이 씨익 웃더란다. 그 순간, 모든 것을 알아차린 여친은 재빨리 가방을 열었으나, 그날따라 종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펜도 하필 x나미(회사이름입니다. 욕 아니예요.) 컴퓨터용 수성 사인펜 달랑 하나...... 그러나 이렇게 포기하면 임틀러가 아니지. 이가 없다고 고기를 못 씹으면 잇몸은 디스플레이냐. 가방을 이 잡듯이 뒤져 기어이 종이 비스무리한 것을 찾아내어 그 위에 필사적인 스피드로 수성 사인펜을 갈긴다. 정황상 저 사람은 아마 홍대에 내리겠지, 서둘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리고 수줍은 표정으로 그 종이를 내민다. 저기, 이거......


그렇게 가보가 탄생했다.


 


좋은 것은 좋다고 말하기 바란다.
누군가를 인정하지 않고, 누군가를 질투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 뿐이다.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할수록, 세상엔 좋은 것들이 좀 더 생겨날 것이다.
_ 최민석, 『꽈배기의 맛』


노래는 말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어야 하고 이름 모를 사람들의 이름이 되어야 합니다.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을 노래로 외쳐 일깨우고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 속으로 삼킨 말들을 가락에 실어 흘려보내는 겁니다. 엉킨 삶을 풀어서 꿈을 짜는 겁니다.
_ 홍승찬, 『오, 클래식』


누구에게나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요정은 있다. 다만 자신이 실제로 품었던 소원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주 적다. 따라서 소수의 사람만이 나중에 자신의 삶에서 그 소원이 실현되었음을 알게 된다. <겨울날 아침>
_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 베를린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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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1 1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1 1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1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8-03-12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맙소사! 이런 아름다운 스토리를 가진 사람이었습니까!!!!!
손승연 물들어, 오케이, 저도 들어볼게요. 불끈!

syo 2018-03-12 16:25   좋아요 0 | URL
제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입니당. 요즘은 노래 더 잘해요.....미쳤어.

psyche 2018-03-13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읽고 당장가서 손승연 들어 봤어요. 와 진짜 노래 잘하네요. 물들어부터 시작해서 불명에 나왔던거 까지 연속해서 들어보고있습니다. 이렇게 노래 잘하는 가수있는지 몰랐네요.

syo 2018-03-13 01:04   좋아요 0 | URL
그렇죠? 물들어 때는 그래도 아직 가수도 되기 전 꼬꼬마 새싹 느낌인데, 불명에서 불렀던 것들은 뭐 하나 어마어마하지 않은 노래가 없어요....

단발머리 2018-03-13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승연은 let it go죠^^
물들어,도 들어보고 결정할까요?!?
근데 김동률은 어떡해요?! ㅋㅋㅋㅋㅋ
나 어제도 들었는데 말이죠.

syo 2018-03-13 14:31   좋아요 0 | URL
여긴 군대가 아니니까 김동률도 괜찮습니다ㅎㅎㅎㅎㅎ

물들어는 손승연이 부른 것 중 제일 못 부른 노래예요. 제일 옛날이니까요 ㅎㅎ

우리 승연이는 이제 학교종이땡땡땡을 불러도 어서 모이고 싶게 만드는 실력입니다....

clavis 2018-04-02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제 꿈을 찾아 여기 까지 오는데에는 기억력이 일등공신였던 듯 하네용

syo 2018-04-02 23:48   좋아요 0 | URL
clavis님의 꿈이 무엇인지 궁금해지네요 ㅎㅎ

2018-04-03 2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04 0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lavis 2018-04-04 0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례하긴요
꿈을 함께 이야기 한다는건 누구와도 아주 즐겁고 중요한 일인걸요♡♡
 



그 바다에 가고 싶다


그저 허기를 죽이느라 맛도 멋도 없는 밥을 쑤셔 넣은 점심, 조용히 누워 눈을 감고 입 안으로 되뇌어 보았다. 지금은 어두운 밤, 나는 여기 세상 끝자락 어느 바닷가에 오롯이 누워 한 점 빛살도 없는 우주를 아득히 올려다 보고 있다고. 날 달린 쇠붙이에 허리를 깎이는 콘크리트의 비명이, 하루 하루 솟아오르는 거대한 교회의 키만큼 제 살을 파먹힌 하늘이 내지르는 야윈 쇳소리가 자꾸만 내 방 작은 창을 넘지만, 그건 사실 모래를 핥는 파도의 기척이라고. 아스팔트를 긁으며 달려나가는 저 바퀴들은 알고 보면 물 먹은 모래를 더듬어 먹거리를 구하는 작은 바닷게들의 집게발이라고. 봐 봐. 들어 봐. 지금 나는 바다에 있어. 지금 바다는 여기에 있어. 봐 봐. 들어 봐. 그러나 오래 누우면 허리가 절로 아픈 고물딱지 매트리스 위에서 눈을 감고 있는 이 시간은 아무래도 바다와 무관한 시간, 파도와 바닷게가 아련히 멀리 있는 시간, 아무리 열심히 내가 나를 속여도 기어이 내가 나에게 속지 않는 쓸쓸한 시간. 그럼에도 그 자체로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닌, 그러니까 자기 손을 둘러 자기 몸을 안아주는 것 같은, 딱 그만큼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시간. 


자신을 묶어 둔 사람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어쩌면 여행이 아니라 여행이라는 관념일지도 모른다. 바다가 아니라 바다라는 추억. 세상 끝이 아니라 세상 끝이라는 낯섬. 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갈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진짜 나는 지금의 모자란 내가 아니라, 아직 되진 못했으나 되고자 안달하는 미래의 충만한 나라는 위로. 달콤한 착각. 오늘 밤을 채 넘기지 못하고 약효가 떨어질 조잡한 플라시보. 그리고 친구들아, 우리는 그걸 오늘 먹었듯이 내일도 먹지. 진짜 바다는 갈 여유도 없지만, 갈 의지도 없고, 어쩌면 갈 필요도 없을지도 모르는. 우리는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3분만에 땡 하고 완성되는 레토르트식 우울쟁이가 되었지. 같은 건물 같은 지붕 아래 모여 공부하며 서로 돕고 서로 경계하는 열 살도 더 어린 나의 친구들아, 너희들도 벌써부터 나하고 같은 눈을 하고 있더라. 웃는 눈동자 뒤로 노리는 눈동자를 숨겨 놓았더라. 그건 참 슬픈 일이더라. 이해가 될수록 더 슬픈 일이 있더라. 


열흘만이지만, 이런 근황입니다. 

        



 파도.
 그것이 파씨의 표면을 뚫습니다. 파씨는 뒤를 돌아봅니다. 등 뒤에 펼쳐진 바다를 봅니다. 발밑의 모래는 미지근한 거품으로 덮여 있고 수평선은 그저 한 겹의 주름인 듯 흐릿하고도 덤덤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파씨는 줄곧 바다를 바라보지만, 온다던 파도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습니다. 파씨는 겁을 먹고 소리를 죽여 우는 것에도 지쳐 다만 바다를 지켜봅니다. 그때 누군가 말합니다. 이번 파도는 너무 작았어, 다음 파도를 기다려. 파씨는 놀랍니다. 바다를 보고 있는 어른들을 올려다봅니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는데 이미 왔다니. 가버렸다니. 바다를 돌아봅니다. 왔는지도 모르게 왔다 가버린 파도, 그냥 가버린 첫번째 파도의 규모를 생각합니다. 이미 이전과는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생각합니다.
 파도를 기다립니다. 
_ 황정은,「파씨의 입문」, 『파씨의 입문』


마음속에 쌓인 기억이 없고 사물들 속에도 쌓아둔 시간이 없으니, 우리는 날마다 세상을 처음 사는 사람들처럼 살아간다. 오직 앞이 있을 뿐 뒤가 없다. 인간은 재물만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저축한다. 그날의 기억밖에 없는 삶은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삶보다 더 슬프다.
_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무한 경쟁은 결국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 종국에 가선, 결국 무엇를 얻기 위함 싸움이 아니라 이기기 위한 싸움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달리 별수 없다는 이유로, 어차피 세상에 다른 존재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 맹목적인 경쟁의 공간에 숨을 허덕이며 머문다.
_ 목수정, 『월경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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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0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0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0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0 1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슨 지랄이냐 하실 분들도 계시겠으나, 하루 한 권을 읽지 못하던 사람이 기를 쓰고 하루 한 권씩 읽는 일 만큼, 하루 한 권을 읽던 사람이 기를 쓰고 하루 한 권도 읽지 않는 일 역시 버겁기는 마찬가지다. 늘이는 일이 됐건 줄이는 일이 됐건, 오래 묵혀 세심하게 빚어 놓은 삶의 무늬를 건드리는 일은 일이다. 그 모든 버거움을 감당해야 할만큼 밥그릇의 무게는 치열하게 무겁다는 것을 깨닫고, 어차피 성에 차도록 읽지도 못할 거, 이제 앞으로 다섯 달은 책을 한 권도 안 읽어볼까 싶은데.



201802 : 20권



1. 나는 이렇게 읽습니다

: 얼마나 읽으면 읽는 법 책을 내는 경지에 오르는 걸까. 어디에나 있는 저 무시무시한 책쟁이들...... 두 시간짜리 강연 듣고 난온 기분입니다.


2. 철학자와 하녀

: 철학을 버무린 생활이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건져올 수 있는 것일까? 열린 눈? 먹어치운 책 더미? 치열한 문제제기와 투쟁의 경험? 철학이 작은 것 가운데 큰 것을 보여주는 돋보기일까, 아니면 반대로 작은 것 속에 숨어 있는 큰 것들이야말로 멀고 높은 곳에 있는 철학을 보여주는 망원경일까.


3. 정확한 사랑의 실험

: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고, 한두 해 지나자 그 손이 부러웠고, 또 한두 해 더 지나고 나니 그 눈이 더 부럽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운이 좋으면 신형철의 손을 가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 눈은 가지지 못할 것 같다.


4. 가벼운 나날

: 숨 막히게 아름다운 문장을 뿌려대는 작가를 만나도 질투하지 않는다. syo는 작가가 될 욕심 같은 게 더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나의 이 속 편한 방어병을 거침없이 무너뜨리고 속절없는 부러움과 달콤한 좌절감으로 육박하는 문장의 지배자들이 있다. 그가 죽고 이제 없다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이름들이 있다.



5. 대통령의 책 읽기

: 더는 읽을 책 목록을 늘리지 말아야 할 텐데. 대통령까지 불러내니까 도저히 안 보고 넘어갈 도리가 없더라만.


6. 그러니까, 이게 사회라고요?

: 이런 책이 나오는 것은 아이들에게 좋은 일이다. 요즘 아이들 사는 거 보고 있노라면 대체로 이런 때 안 태어난 게 참 다행이다 싶지만, 그래도 이런 말랑말랑하면서도 딴딴한 책들이 있는 환경은 아무래도 좀 부럽다. 서른 넘은 지금이라도 읽으면 되지만.


7. 일인분 인문학

: 어쩌면 너무 무미한 문체 때문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박홍순 선생님의 책이 덜 읽히는 이유는.


8. 가까운 날들의 사회학

: 평이한 것이 장점이라면 장점이겠지만, 평범한 것이 치명적인 단점. 약간 자기계발서처럼 읽힌다.



9. 이따위 불평등

: 읽을 책은 늘어만 가는데, 읽을 시간은 줄어든다. 쓸 시간은 눈꼽만큼 남았다. 이 시점에 이렇게 목록만 배불려가는 게 안타깝군. 경제적 관점이 중심이지만, 썩 다양한 측면에서 불평등을 다룬 읽을만한 책들을 소개하는 책 책이다.


10. 존 치버의 일기

: 35년간 거의 매일 썼다고 한다. 한글로 900페이지 되는 분량이 전체 일기의 20퍼센트라고 한다. syo 같은 게으름뱅이는 그저 엎드려 숭앙할 따름이옵니다...... 하루 하루가 치버가 썼을 법한(혹은 쓴) 소설의 한 장면이다. 때론 지루하고, 자주 편협하고, 시도 때도 없이 욕정에 몸부림치는 남자가 일상을 꾹꾹 눌러담아 던져 놓고 간 두꺼운 인생이다.


11. 이 얼마나 천국 같은가

: 거장의 마지막 작품은 아름다움과 즐거움, 개인의 이야기와 공동체의 이야기가 어떻게 꿰매어 질 수 있는가를 능란하게 드러낸다. 그에게 시간이 좀 더 허락되었더라면. 그래서 이 이야기가 조금만 더 길 수 있었다면, 우리는 아마 꿰맨 자국조차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12. 번역에 살고 번역에 죽고

: 정말 잘 하는 번역가가 정말 좋은 에세이스트까지는 아닐 수 있다, 라고만 쓰고 말기에는더 재미있는 책이긴 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전적으로 알맹이의 힘인 것 같다. 글맛은 덜하다.



13. 내 이름은 빨강 1

14. 내 이름은 빨강 2

: 아 진짜, 대작이란 이런 건가 보다 한다......


15.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 베를린 연대기

: 부드럽게 먹어나가기에는 목구멍에 덜컥 걸리는 문장이 꽤 있다. 물론 벤야민이 원래 그렇게 썼을 수도 있으나...... syo의 읽는 힘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으나......


16. 1인분의 삶

: 웃기긴 한데, 웃긴 것 말고는 특출나다 할 게 없는 글 치고는 충분하달만큼 웃기진 않는다. 그래도 최소 syo보단 웃기다. 그러나 이 말은 칭찬으로서는 대충 "이야, 너 콧구멍이 정말 두 개구나?" 정도의 수준이라 송구스럽다.




17. 사라지는 번역자들

: 나도 번역자가 되어 사라져 보는 것은 어떨까, 택도 없는 욕심을 불러내는 책이다. 화려하진 않아도 단정하고, 화를 내지 않고도 단호한 문장이 모여 그런 책을 만들었다.


18. 철학하는 날들

: '철학'하는 날들 보다는 철학'하는' 날들, 혹은 철학하는 '날들'을 말하는 소담한 책이므로 부담없이 집어들고 읽고 지나갈 수 있겠다. 철학은 작고 날들이 커서, 사실 철학 지식은 1도 늘지 않았다.


19. 뉴스는 어떻게 조작되는가?

: 아, 이 쓰레기 새끼들......


20. 그냥 좋게 받아들이세요

: 뭘 이새끼야 뭘. 아오...... 이 쓰레기 새끼들 2




앞으로 딱 150일이 남았는데, 그 이야기는 syo의 집중력과 끈기와 체력에 비추어 보아 아무리 용 빼는 재주를 부려 보아도 총합 2000시간 공부하기 힘든 시점에 돌입했다는 이야기고, 어디선가 폭망의 스멜이 스멜스멜 올라오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는 이야기고, 그런 이야기는 이제 독서는 접어야 한다는 이야기고, 또 그 이야기는 알라딘도 접어야 한다는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으아, 이게 다 뭐하는 이야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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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18-02-28 0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르한파묵 소설 읽으면 딱 저 생각이 들어요!

syo 2018-02-28 09:54   좋아요 1 | URL
그쵸? 역시 저만 그런 게 아니었어요 ㅎㅎㅎㅎ
<내 이름은 빨강> 추천했다가 욕 들어먹은 적이 꽤 있어놔서 쫄았습니다.....

그렇게혜윰 2018-02-28 13:49   좋아요 0 | URL
전 빨강 안읽고 검은책 읽었는데 그 문화를 몰라 속상했지만 대가의 매력에 퐁당 빠졌습니다만 다행히 남에게 권하진 않았습니다 ㅋ

syo 2018-02-28 13:50   좋아요 0 | URL
그러고보면 빨강이랑 검은 놈 말고 하얀 녀석도 있었죠? ㅎㅎㅎ
색깔 좋아하는 파묵이

북프리쿠키 2018-02-28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이 좋긴 하지만 저도 가끔 책디톡스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긴 합니다.ㅎ 책보다 소중한걸 챙겨야될때 말이죠. 응원합니다^^

syo 2018-02-28 09:5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응원을 너무 많이 받아먹어서 이러고 사는 게 민망할 지경이에요 ㅎㅎㅎ^-^

몰리 2018-02-28 1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합격을 기원합니다.
하하하. (‘합격‘이 좋은 결과인 게 맞는 무엇이죠....?)

syo 2018-02-28 11:37   좋아요 2 | URL
하하하하 모든 합격은 최소한 불합격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책읽는나무 2018-02-28 1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 이름은 빨강!!!!
오랜만에 들어 보는...하지만 님의 완독 서적 리스트에서 유일하게 그나마 읽은 책이네요ㅋㅋ
읽는 동안 재미나게 몰입했었던 기억은 있는데 책 내용은 또 가물가물하구요.ㅜㅜ

그나저나 다섯 달 동안이나 안읽는다는 계획은 좀 슬프네요?^^
하지만....정 그리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저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ㅋㅋ

syo 2018-02-28 11:39   좋아요 1 | URL
저도 이게 두 번째 읽는 거였는데, 심지어 살인자가 누구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상태여서 오히려 좋았습니다 ㅋㅋㅋㅋ 망각이란 뭘까요 ㅎ

말은 이렇게 해놨지만, 금단현상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그장소] 2018-02-28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얼마나 천국 같은가 : 거장의 마지막 작품은 ㅡ을 오독해서 거지같은 천국인가 ㅡ 로 그러면서 혼자 크큭 , 아 , 이 쓰레기 새끼 ㅡ에 푸하핫 ~!!^^

syo 2018-02-28 11:40   좋아요 1 | URL
한번에 많은 글자를 읽어들이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만 발생할 수 있는 오독이로군요 ㅎ

한 줄평이지만 쓰레기 새끼들은 좀 과했으려나요 ㅎㅎㅎㅎ

[그장소] 2018-02-28 11:49   좋아요 0 | URL
아뇨~ 과함(?)이 주는 즐거운 시간였네요. ㅎㅎ 한번에 많은~ 이 아니고 어쩌면 스크롤 탓에 발생한 오독인지도 ... ㅎㅎㅎ 아 덕분에 웃고 갑니다 . 2월 마지막 날 멋진 마무리 하시길요!!^^

비연 2018-02-2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르한 파묵 좋아하는데. ㅎㅎㅎ syo님 생각에 동감.

syo 2018-02-28 13:37   좋아요 0 | URL
파묵은 사랑입니다♡
무슨 성만 써 놓으니 무슨 중국인 이름같네요. 요리 같기도 하고. 파묵.

다락방 2018-02-28 1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부좀해욧!! 😡

syo 2018-02-28 14:46   좋아요 1 | URL
😴 Zzz......

이하라 2018-02-28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독서량이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독서하셔도 어마어마한 독서량이니까 티도 안날꺼 같네요. 시험 좋은 결과있기를 바랍니다^^

syo 2018-02-28 15:3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무슨 굿바이 스페셜처럼 되어 버렸네요. 별 것도 아닌데 ㅎㅎㅎㅎ

서니데이 2018-02-28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월부터는 더 열심히 하시겠군요.
syo님, 즐거운 오후 보내세요.^^

syo 2018-02-28 15:34   좋아요 1 | URL
비와서 참 좋네요. ㅎ
서니데이님도 즐거운 오후, 열심히 하시는 3월 되세요.

단발머리 2018-02-28 1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도 파묵 좋아해요. 근데, 검은 책은 끝까지 못 읽었네요. ㅎㅎㅎㅎㅎㅎ
찜해둔 책은, 1번 나는 이렇게 읽습니다, 랑 9번 이따위 불평등이예요.
아무렴, 저는 2번 고병권을 존경합니다.

근데, 갑자기 화가 나려고 해요.
아니, 왜!!! syo님은 이제 다섯달이나 책을 안 읽으려고 해요? 왜 책을 안 읽어야해요? 읽고 요렇게 페이퍼를 써야지요. 왜요? 왜????

syo 2018-02-28 17:05   좋아요 1 | URL
저도 먹고 살아야 되는데, 먹고 살기가 싫은 것은 아닌데, 먹고 살기가 또 싫기도 하고 막 막,

목하 인생 방랑 중이옵이다.....

독서괭 2018-02-28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syo님의 다섯달동안 한 권도 안 읽어볼까 싶은데. 를 싫은데. 로 해석했는데요ㅋ
다섯달동안 잠수타시면 기다리다 환영하겠고, 당장 몇시간 뒤에 글 올리셔도 환영하겠습니다^^

syo 2018-02-28 23:11   좋아요 0 | URL
역시 독서괭님은...... b

짜라투스트라 2018-02-28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글이 재미있어요 그런데 이번 달 저랑 똑같이 20권 있으셨군요^^

syo 2018-03-01 00:52   좋아요 0 | URL
그러나 짜라님은 스무 권을 알차게 읽고 글을 남겼으나, 저는 그저 권수 채우기에 급급하였지요^^

짜라투스트라 2018-03-01 00:55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 제대로 글을 안써서 3월달부터 열심히 써보려구요^^;; 어쨌든 syo님 글의 열혈독자로서 다시 돌아오는 그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ㅎㅎㅎ

psyche 2018-03-03 0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님 화이팅! 앞으로 다섯달만 꾹 참으시고 좋은 결과 있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