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판력보다 떡국을


해가 바뀌고, 뭐 한 것도 딱히 없는데 어쩐지 민족의 큰 명절 설이 시작된 눈치다. 큰 명절은 과연 어마어마 커서 그런가 syo가 사는 좁은 방문을 통과해 들어오지 못했고, 창 밖으로는 4층 높이의 허공만 보이는데 텅 빈 것이 역시 오늘이나 어제나 그제나 별로 다른 게 없다. syo도 그렇다.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지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판력과 석명권에 대해 생각하고 말았다. 으윽, 당했군. 물론 느즈막히 일어나 기지개를 펴면서 민사소송법 판례를 읊조리는 인생은 세상 사람들 눈에 좀 불쌍해 보이지만, 심지어 새벽같이 일어나 똑같은 짓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강의실에 바글바글 모여 앉아 명절을 새하얗게 불싸지르는 노량진의 유예된 청춘들을 스케치한 기사는 마치 작년 추석의 것을 복붙한 것마냥 똑같다. '3년째 7급 공무원을 준비하고 있는 박 씨(29)'가 '9급 공무원을 준비하는 박 씨(30)'으로 바뀌었을 수는 있겠다. syo는 단지 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늙었고, 그래서인지 법조문들한테는 더 무시당하고 판례들하고는 더 서먹서먹한 느낌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더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인생이고, 역시 그런 명절이다. 


떡국이라는 것이 맛있겠다.




완전한 삶이란 없다. 그 조각만이 있을 뿐. 우리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그런데 빠져나갈 이 모든 것들, 만남과 몸부림과 꿈은 계속 퍼붓고 흘러넘친다...... 우리는 거북이처럼 생각을 없애야 한다. 결의가 굳고 눈이 멀어야 한다. 무엇을 하건, 무엇을 하지 않건 그 반대는 하지 못한다. 행동은 그 대안을 파괴한다. 이것이 인생의 역설이다. 그래서 인생은 선택의 문제이고, 선택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되돌릴 수 없을 뿐이다. 바다에 돌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_ 제임스 설터, 『가벼운 나날』




마광수보다 만두국을


며칠 전에 썼던 일기 속의, 그 옛날 달달했던 우리 모습을 상기시켜 주고 싶어 여친에게 그 글을 보여주었는데 되돌아온 답변이 충격이었다. 너무 야해서 아무한테도 못 보여주는 글을 썼군. 그 사람 생각 난다. 그 자살한 교수 이름 뭐지?


대박사건. 


물론 가슴 이야기 좀 나오고 엉덩이 이야기 좀 나왔지만. syo에겐 그저 야릇하고 나른한 글일 뿐이었는데 그게 그녀에겐 마광수를 떠올릴 만한 스케일이었다니, 이걸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9년을 만나도 알 수 없는 연인의 마음이여.


만두국이라는 것도 맛있겠다.



가능한 여러 차원의 경험을 해보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한 장소에 대해 알게 된다. 한 장소를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방에서 그 장소를 향해, 또한 그 장소로부터 동서남북 사방으로 다시 가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장소는 우리가 파악하기도 전에 전혀 예상치 못한 길을 통해 서너 번은 우리에게 달려든다.

_ 발터 벤야민, 『모스크바 일기』




불알친구 귀 빠진 날보다는 눈꽃치즈치킨을


벌써 2월의 절반이 영면에 드셨다.아놔, 뭐 한 것도 없는데! 어제의 syo는 달력을 넘기며 도대체 시간은 왜 이렇게까지 급하게 내게서 도망치는가, 나는 왜 그저 빛의 속도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 말고는 속수무책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는가를 한탄했다. 달력의 날짜를 거꾸로 짚어가며, 오늘은 발렌타인데이지, 어제는 K의 생일이었군, 8일은 H의 생일이고, 7일은 엄마 생일, 우리 기념일...... 그러다 1일까지 짚었는데, 아뿔싸, 그러고보니 1일은 syo의 고환친구 三(이름입니다. 3명도 아니고, 친구 No.3도 아닙니다)의 생일이었다. 이놈이랑은 3일에 한 번 꼴로는 톡을 주고 받았었는데, 그러니까 三의 생일을 생까고 지나간 후에도 우리는 몇 번의 대화를 나눈 셈이 된다. syo는 무심해서 생일을 말하지 못했고, 三은 모양 빠져서 생일을 말하지 못하는 등신같은 침묵의 대치관계 속에서. 고환친구라는 관계의 이 가벼움으로 미루어보건대, 역시 고환이라는 건 달고 있다고 뻐길만큼 대단한 물건이 아니군, 하는 의미있는 깨달음도 있었다. 하여간, 차라리 제발 1일날만은 대화가 없었기를 바라면서 三과의 톡을 뒤집어 보는데, 아뿔싸, 있다! 그 순간, 우리 사이에 있었던 어떤 대화가 떠오르면서, 제발, 제발 그 이야기를 그날 했던 것만은 아니기를 절실히 기도했다. 오 하나님, 지금도 똥인 저를 더 거대한 똥덩어리로 만들지는 말아주세요...... 그런데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그러니까 이것은 三의 생일날, 25년지기 친구의 생일도 잊고 언급조차 하지 않은 버러지 같은 syo와, 그런 syo를 꿋꿋이 버티며 25년을 한결같이 착취와 고난의 인생을 묵묵하게 걸어온 재림성자 三의 대화 일부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syo의 인성입니다 


돈 벌었으면 치킨 내놓으래 ㅋㅋㅋㅋ 심지어 개념이 없대 ㅋㅋㅋㅋㅋㅋ 하다하다 주문도 자기 손으로 안했어 ㅋㅋㅋㅋㅋㅋㅋ 완전 쓰레기 ㅋㅋㅋㅋㅋ 안 타는 쓰레기 ㅋㅋㅋㅋㅋㅋ 지 생일날 치킨 삥뜯기는 저 멍청하게 착하고 착하게 멍청한 놈ㅠㅠㅠㅠ 나같은 놈이 불알친구라 이번 생은 폭망한 저 불쌍한 놈 ㅠㅠㅠㅠㅠㅠ


아 근데 이 와중에 눈꽃치즈치킨 맛있겠다.



우리에겐 우리 말고는 내 편이 없어. 그걸 이제야 알았네.

_ 코바야시 타끼지, 『게 가공선』






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 1』은 읽어도 읽어도 재미지다.

루쉰, 『루쉰 전집 1 : 무덤 열풍』을 팍팍 읽어나가다.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의 반환점을 지나다.

존 치버, 『이 얼마나 천국 같은가』를 마치며 손쉽게 치버 입덕.




이웃님들 모두 모두, 명절 잘 쇠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syo같은 친구 있으시다면, 올해는 기필코 인연 끊으시구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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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8-02-15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은 제 나이엔 화살보다 더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아요. 말씀처럼 토비 님 같은 친구와는 인연을 끊고 친구 삼 님 같은 분과는 인연이 닿는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ㅎㅎㅎㅎㅎ

2018-02-15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15 1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15 15: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프리쿠키 2018-02-15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syo 2018-02-15 11:3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북프리쿠키님^^
행복하고 충만한 연휴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8-02-15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syo 2018-02-15 12:44   좋아요 1 | URL
열심히 받겠습니다ㅎㅎㅎ
겨울호랑이님도 새해 복 끝장나게 받으셔요^^

2018-02-15 1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15 15: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8-02-15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판력과 석명권, 민소네요.
syo님, 즐거운 설연휴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syo 2018-02-15 15:0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화이팅화이팅입니다 ㅎㅎㅎㅎ

psyche 2018-02-15 15: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판력, 석명권이 뭔가 찾아봤네요.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 무슨 줄임말인줄.... syo 님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syo 2018-02-15 15:32   좋아요 1 | URL
모르고 살 수 있다면 평생 모르고 사는 게 가장 좋은 단어들입니다^^

psyche님도 새해 복 많이많이많이많이더많이 받으세요!!

라로 2018-02-15 16:22   좋아요 0 | URL
뭐에요? 토비 님 프님을 더 좋아하나봐. 많이 많이 저한테는 한 번도 안 쓰시고 프님에게는 왜 이리 많이많이많이많이더많이 쓰시는 거에요? 왕삐짐. ㅎㅎㅎㅎ

라로 2018-02-15 16:24   좋아요 0 | URL
우리 프님은 정말 학구적이세요!! 이러니 많이많이많이많이더많이 좋아할 수 밖에~~~! 저는 그 단어들 읽으면서 뭐 그런 🦀 있나보다 그랬어요~~~~ㅎㅎㅎㅎㅎ 나도 찾아볼까???🙄

syo 2018-02-15 16:35   좋아요 0 | URL
라로님 무슨 말씀이세요. 전 분명히 어마어마한 수식어를 붙여드렸는데요. ˝저처럼˝

ㅎㅎㅎㅎㅎㅎㅎㅎ



psyche 2018-02-15 16:47   좋아요 1 | URL
학구적인게 아니고 발음도 어려운 말이라 신조어인줄 알고... 제가 또 얼리 어탑터잖아요 ㅋ 어디가서 써먹으려 한건데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되는 단어들이었어요 흑

라로 2018-02-16 01:05   좋아요 0 | URL
괜찮아요, 토비 님. 농담 길게 못하는 성격 나오는데 처음부터 장난기 빌동 한 거에요. 많이많이많이많이더많이 보고. ㅎㅎㅎㅎ 그래도 부러웠어요~~~많이많이많이많이더많이! ㅎㅎㅎㅎ

얼리 어답터!!! ㅎㅎㅎㅎ 그래도 프님은 학구적인 자세가 딱 잡혀있어요!!^^ 저도 저 단어들 찾아봤는데 그나마 석명권은 이해가 좀 가는 것 같은데 기판력이 도대체 뭔 소리인지~~ㅎㅎㅎㅎㅎ 어쨌든 토비 님의 애정이 프님에게 많이많이많이많이더많이 있는 것은 사실인듯요 ~~~ㅎㅎㅎㅎㅎ (돌아서며 어깨를 들썩인다)

syo 2018-02-16 01:21   좋아요 1 | URL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라로님께 syo의 애정을 전합니다.

석명권은 법원이 당사자한테 ˝너 그렇게 애매하게 주장하다 개털려서 나중에 엉엉 울지 말고 다시 한번 똑똑히 말해 보렴˝ 하는 거고
기판력은 법원이 ˝아놔 기껏 판결내놨더니 똑같은 말 또 시키거나 택도 없이 계속 판결에 대들다니. 네놈 요구는 더 들을 것도 없다.˝ 하는 거지요.

와 정말로 애정이 많이많이많이많이더더많이 묻어 있는 설명이다.😆

psyche 2018-02-16 01:32   좋아요 1 | URL
오 syo님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설명!!
많이많이많이많이를 가지고 두 분이 다투시니 제가 어쩔 수 없이 올해는 복을 많이많이많이많이많이 더 많이 받기로 하죠 ㅎ

라로 2018-02-16 01:56   좋아요 1 | URL
ㅋㅎㅎㅎㅎ 그래요. 토비 님에게 저렇게 많이많이많이많이더많이 애정이 묻어 있는 설명을 들었으니 프님이 복 많이많이많이많이더많이 받으세요~~~^^
근데 기판력 쌀벌하네요!! ㅎㄷㄷ

프리즘메이커 2018-02-16 0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킨은 배틀그라운드로.... syo님 새해복많이받으세여!

syo 2018-02-16 08:3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프메님도 복 폭주하는 새해되세요.^^

2018-02-19 14: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19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19 1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19 1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20 0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20 0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존 치버의 일기
존 치버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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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검사유서


어두운 시간이 찾아오면 당신을 구원하는 데 재산은 쓸모가 없다오랫동안 다녔던 스키장이나 시냇물에 이르는 오솔길도 마찬가지다그보다 더 위대한 무엇을 당신은 반드시 찾아내야만 한다. (27) 


일기를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소설가의 인생을 구성하지 않아도 된다. 듣고 믿으면 충분하다. 일기를 믿을 수 없다면 우리는 이 소설가의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된다. 소설을 읽으면 충분하다. 하지만 일기가 믿을 수 있지만 믿을 수 없는 기록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소설가의 증언을 듣고, 신문하고, 상상하고, 메꾼다. 소설가는 이미 죽었다. 우리는 죽은 소설가의 일기에서 살아있는 소설가를 건져낼 필요가 없다. 소설가의 삶을 부검하고 그 흔적들 안에서 우리가 쓸 백신이나 치료제의 실마리를 길어내면 된다. 소설가는 이미 죽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살아있다. 이게 희소식이다. 나쁜 소식도 있다. 죽은 소설가를 찾아갔던, 그의 다잉메시지가 지목하고 있는 그 느긋하고 끈덕진 살인마, ‘어두운 시간역시 아직도 살아있다. 이제는 호시탐탐 우리의 옆자리를 노리면서.

 

 

 

첫번째 비상구 : 쓰기


잘 쓸 것정열적으로 쓸 것좀더 자유롭게 쓸 것좀더 너그러워질 것자신에게 좀더 엄격해질 것욕망의 물리적 힘뿐 아니라 그 지배력에 대해서도 인지할 것글을 쓸 것사랑할 것. (43)


어두운 시간에 갇힌 소설가는 종종 펜과 잉크 대신 나침반과 지도를 집어 들었다. 각도기와 삼각자를 문장에 가져다 대고 미세조정을 거듭했다. 글길이 멀었으므로 그 길은 아름다워야 했다. 문장의 여행자는 정열적이면서도 자유로웠고, 너그러운 동시에 엄격했으며, 욕망, 욕망에 신경을 온통 쏟았다. 소설가는 쓰고, 쓰고, 쓰고, 사랑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펜이 지나온 궤적 위에 나침반을 올려놓고 어디로 향할지를 가늠했다. 그의 인생은 그런 과정의 지난한 반복이었다. 우리는 그 반복의 매듭을 가리키며 소설이라 불렀다. 우리가 그저 소설가의 잉크가 달려간 궤도만을 포착되는 동안, 소설가는 자신의 비밀스런 측량기구들을 일기장 속에 조용히 묻었다. 그가 죽고 나서야 세상에 나온 일기장이었다. 


 

작가란비극적이게도방관자의 입장에 서기 위해 기웃대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작가는 그의 창을 통해 공원에 핀 천수국을 훔치는 여자를나무 뒤에서 오줌 누는 노인을또 사람들이 공터에서 공을 주고받는 놀이를 지켜보지만 작가와 이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광경 사이에는 그 어떤 냉혹한 심연이 가로놓여 있는 듯하다어쨌든 작가는 손에 든 펜으로 카뷰레터를 수리할 수 없고 풋볼도 할 수 없다거기에 너무 날카롭고 비판적인 눈을 갖고 있기도 하다. (486)

 

인간의 비참함이 지니고 있는 그 광대함과 강렬함을 부족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게끔 묘사하기초조함과 병적 상태라는 고뇌를 잘 다듬기고통에 약간의 고귀함을 부여하기하지만 우리가 이를이러한 비극을 어느 정도의 도덕적 권위도 없이선과 악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각도 없이 다룰 수 있을까? (316)

 

소설에 소설이 쌓였다. 쌓인 소설들이 세상 사람들의 책상 위로 퍼져나갔다. 세상이 소설가를 칭찬했다. 당신이 세상에 무엇인가 해줬노라고. 그러나 그 즈음 소설가는 소설이,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보았다. 그리고 썼다. 그러나 의심했다. 가능한 일이 의심받았고, 이내 허락된 일들도 의심받았다. ‘할 수 있을까에서 해도 될까. 그러는 중에도 소설은 계속 태어났다. 세상은 기뻐하며 소설의 겉옷에 무겁고 빛나는 훈장을 달았다. 소설은 저 홀로 육중해졌고, 소설가는 점점 부풀어가는 자식을 불길한 눈동자로 응시했다.

 

 

작가는 그의 상상력을 개발하고확장하고끌어올리고부풀리며 이것이 선과 악의 이해에 대한 자신의 운명이요 유용성그리고 공헌이라고 확신한다작가가 그의 상상력을 부풀리면 그는 악에 대한 그의 능력을 부풀리는 것이 된다작가가 그의 상상력을 부풀리면 그는 불안에 대한 그의 능력을 부풀리는 것이 되고 그러면 필연적으로 오직 치사량의 헤로인이나 알코올로만 완화시킬 수 있는 참담한 공포의 희생양이 되고 마는 것이다. (493)

  

그렇게 소설가는 서서히 무너졌다. 제 몸보다 더 거대한 자식을 낳기 위해 끝없이 상상력을 부풀려가며. 낡은 나침반과 지도는 이제 와 어떠한 위대함도 가리키지 않았다. 소설가의 손에는 펜만 남았다. 그것은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휘둘리고 마는 참담하고 무서운 물건이었다. 여기가 그의 첫 번째 환멸의 자리였다.

 



두 번째 비상구 : 부부

 

결혼에 대한 네일리스의 기억은 낭만적이지 않았고 심지어 조잡하기까지 했다그는 전통적인 아름다움엔 관심이 없는 듯했다가을 장미를 다듬는 메리앨런야회복 차림의 메리앨런친구가 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흐느끼던 메리앨런하지만 이보다도 네일리스는 테시라는 개가 병에 걸려 그랜드피아노 밑의 마룻바닥에 토했던 밤을 기억했다때는 새벽 3시였고 그는 늙은 개를 밖으로 내보낸 후 대걸레와 양동이를 들고 와 토사물을 치우는 중이었다청소하는 소리에 잠이 깬 메리앨런이 나이트 가운을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피아노 밑에서 위를 쳐다보던 네일리스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메리앨런은 종이타월을 가져오더니 이어 손과 무릎을 굽혀 네일리스를 돕기 시작했다청소를 다 마치고 일어서던 메리앨런은 그만 피아노 뚜껑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상처가 생겼고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벌거벗고 있던 네일리스는 키스로 눈물을 닦아준 후 메리앨런을 소파로 데리고 갔다그는 메리앨런의 나이트가운을 가슴 위로 끌어올리고 그녀와 사랑을 나눴다또다른 밤메리앨런은 자신이 목욕을 하기 전에 섹스를 하자고 그에게 부탁했다섹스가 끝난 후 그녀는 욕조에 물을 받았고 그가 욕실로 가서 알몸으로 변기에 앉아 있는 동안 다리의 털을 밀었다. "점심 때 더운 음식을 먹지 않으면." 그가 말했다. "설사가 나와치즈를 먹어도 설사가 나오더군." "난 치즈를 먹으면 변비에 걸려." 메리앨런이 말했다그녀는 계속 다리의 털을 밀었다그 모습은 정말정말정말 아름다웠다그것이 그가 기억하는 장면이었다. (527 528)

 

인간의 창백함을 오래 지켜보았던 소설가는 사람을 사랑하였으나 사람의 사랑에 커다란 기대를 거는 것은 아니었다간혹 사랑에 기대었으나 사실 그 사랑의 가면 뒤에는 의무나 성욕의 맨얼굴이 숨어있을 뿐이었다의무성욕성욕의 의무의무적 성욕. 어쩌면 그가 바란 것특히 아내에게 그가 바랐던 것은 고작 이런 것들일 뿐인지도 모른다그러나 그 속에 숨어있는 조잡함이야말로 오히려 그의 숨통이었다무시로 사랑을 나누고소소하고 더러운 것들을 함께 나누는 것소설가는 고작 그런 것을 바랐다무려 그런 것을 바랐다.

 


거리에서그러니까 동창이나 그와 비슷한 누군가를 만났다고 가정해보자당신은 그 동창의 저녁식사 초대를 받아들인다친구의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당신은 뭔가 일이 잘못됐음을 깨닫는다친구의 아내는 울고 있고 동창은 술에 취한 것 같다비틀거릴 정도는 아니지만 술을 상당히 많이 마신 것처럼 눈에 띄게 이상한 짓만 한다당신이 땅콩을 사양하면 냉소적인 표정을 짓는다저녁식사를 하려고 식탁에 앉기 전친구가 자기 아내를 욕하고멸시하고조롱한다한창 식사하는 도중 친구는 자기 아내가 더러운 계집이라며 흉을 본다친구의 아내는 평범하고 착한 심성을 가진 여자 같다당신이 식사 중에 모자와 코트를 집어 밖으로 나오는 동안에도 그녀는 계속 울어대고 친구는 입에 담지 못할 온갖 더러운 말로 그녀를 욕해댄다. 10년에서 15년이 지난 어느 날 저녁극장에서 빠져나오던 당신은 동창이 당신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를 또 듣는다옆에 있는 아내는 여전히 같은 여자여서 당신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는데 동창의 아내는 행복한 표정이다동창의 집은 당신이 사는 곳 근처로 밝혀지고 이에 같이 택시를 타고 가다가 술을 한잔 마시기 위해 내린다십 분 동안은 모든 게 유쾌하다동창 친구는 아내에게 왜 샌드위치를 만들어주지 않느냐고 묻는다왜 그 엉덩이를 움직여 뭔가 쓸모 있는 일을 하지 않느냐고 따진다친구의 아내는 울기 시작하며 부엌으로 들어가고 당신이 모자와 코트를 챙겨 밖으로 나올 즈음 동창은 또 자신의 아내를 향해 계집년더러운 년창녀라면서 욕을 해댄다. (122 123)

 

그러나 소설가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았을 때쯤이미 그들 부부는 파국의 시야 안에 들어와 있었다그들은 끝과 아직 사이의 두꺼운 경계선 위에 서로의 그림자를 밟고 서 있었다어느 날은 끝인 것 같았고또 어느 날은 아직인 것 같았다다른 모든 싸움은 그 시작점이 명확하지만오직 부부의 싸움만큼은 그렇지가 않다. “내가 이런 것은 그 전에 당신이 그랬기 때문이다.” 모든 부부는 이 말에 동의한다단지 누가 고 누가 당신인지에 대한 합의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뿐이다그는 아내에게 수없이 요구했고수없이 거절당했으며그 거절을 수없이 기록했다우리는 그 기록을 상처로 읽을 수도 하고 과도한 성욕이나 착취시도로 읽을 수도 있다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읽든소설가로서는 여기가 바로 그가 맞닥뜨린 두 번째 환멸의 자리임이 분명하다.


 


세 번째 비상구 : 도망

 

창가에 서서 거리의 사람들을 지켜보았다나는 갇혀 있다사람들은 자유롭게 거리를 오갔지만 그 자유 속에서 너무 무신경하게 행동하고 있어 자유가 낭비되고 있는 듯이 보였다. (694)

 

우리 역시 누구나 한 번은 다 겪듯결국은 소설가도 내려놓고 싶었을 것이다그는 갇혔다그러나 갇혀 있는 것보다 더 무섭고 괴로운 일은갇혀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느끼는 것이다그때 우리는 탈주를 꿈꾼다무엇도 나를 속박하지 않는 곳을동파된 수도관에서 자유가 터져 나와 하수구로 낭비되는 무심하고 방탕한 세상을 열망한다우리가 그렇다그도 그랬다.

 

 

하지만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려 하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도망칠 수 있단 말인가? (211)

 

그러나 도피의 험한 길 위에서 그는 생각한다무엇이 나를 밀었나무엇이 나를 도망치게 하였나대부분의 도피를 무로 되돌리는 묵직한 질문이다그래서 종종 도피에 실패한다멀리 못 가고 되돌아온다우리가 그렇다그도 그랬다가는 길은 혼자였으나 돌아오는 길은 동행이다환멸이 따라 붙었다.

 

 

 

네 번째 비상구 : 자기파괴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스스로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자기파괴 본능을 거의 건드리지 않는다는 점이다혹시 자기파괴적인 모습을 갈망하거나 꿈꿀 수도 있겠지만 이런 우리의 생각은 한줄기 빛에또 불어오는 바람의 변화에 그래서는 안 된다고 설득당하는 것이다. (217)

 

그렇다면 나를 부숴버리는 것은 어떨까.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어디에도 기댈 대가 없다면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 것이다. 아무데도 갈 곳이 없다면 아무데도 가지 않는 것이다. 소설가는 침잠했다. 그리고 자신의 안에 도사리고 있는 자기 파괴의 씨앗을 발견했다. 그것은 놀라울 만큼 얕은 곳에 있었다. 떡하니 있었다. 도리어 그는 이렇게 물었다. 우리는 어떻게 이제껏 이 파괴적 본능에 눈길을 주지 않고 버틸 수가 있었을까. 이렇게 선명한 것을. 이렇게 외설적인 것을.



마음속에서 자기파괴가 시작될 때그것은 그 크기가 단지 모래알 정도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그것은 두통이요가벼운 소화불량이요오염된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다하지만 당신은 8시 20분 기차를 놓치고 신용기한 연장정책에 관한 회의에 늦게 도착한다점심을 함께하기로 한 옛 친구는 갑자기 당신의 인내심을 바닥내고 이에 당신은 유쾌해지기 위한 노력으로 석 잔의 칵테일을 들이켠다하지만 그때쯤이면 이미 하루는 그 형태를그 의미와 감각을 잃어버린다어떤 목적과 아름다움을 되살리고자 당신은 너무 많은 칵테일을 마시고 너무 많은 얘기를 하고 다른 누군가의 아내를 유혹하면서 결국은 바보스럽고 외설스러운 어떤 일로 치닫게 되며 아침이 되면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그러나 이와 같은 심연에 빠지게 된 경로를 되돌아보려 할 때 당신이 발견하게 되는 것은 모래알뿐이다. (65)

 

그저 딱 한번, 그 선명하고 외설적인 것과 단 한번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이제는 그놈이 그를 물고 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이후로 그는 종종 단 한 알의 모래알로도 온몸이 서걱거렸다. 그것은 잡히지 않는 들불처럼 일어나 번졌고 그는 그저 불탈 뿐이었다. 그는 재가 되고 재가 다시 재가 되어 이리저리 날렸다. 차라리 그것을 찾지 않았다면, 호기심에 그것을 눌러보지 않았더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는 설득에 생각 없이 넘어갔더라면. 그는 새로운 환멸을 만났다. 남은 평생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작은 절망을 훔치고 큰 절망을 내밀 버거운 적수였다.

 

 

  

마지막 비상구 : 금지된 사랑

 

남자들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는데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가장 엄격한 잣대로 검토해보아도 그런 애정 관계에서는 그 어떤 성욕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다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기뻐하지만 내면을 살펴보면 주목할 만한 것이 전혀 없다우리는 함께 있으면 서로 행복해하고 만족하지만 떨어져 있을 때는 결코 서로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이러한 유대관계들은 우리가 인생애서 형성하는 그 무엇보다 강력하지만 우리는 완벽한 무책임성으로 그것들을 집어 들었다가 내쳐버리기도 한다우리는 병원에 있어도 서로를 방문하지 않으며 떨어져 있을 경우 편지를 거의 쓰지 않는다하지만 같이 있을 때는 사람들이 소위 사랑이라 부르는 것의 최소한 몇 가지 증상들을 경험하기는 한다. (442 443) 

 

종종 있는 경우와는 달리, 소설가에게는 금지와 억압이 가져오는 매력이 동력으로 기능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소설가가 처음 남자에게 성욕을 느꼈던 시점의 일기에서 뜨악함과 일종의 자기 경멸까지 읽을 수 있다. 대신 그는 꾸준히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거절은 그런 힘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깊이, 그리고 오래 들여다보아도 그는 자기 욕망의 가지 끝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것이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불알을 흔들면서 숲으로 달려라달려라달려라그리하여 그것을 님프의 은밀한 곳에사티로스의 털로 덥수룩한 엉덩이에 집어넣어라그러면 마침내 네 자신에 대해 알게 되고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리라하지만 그렇다면 사티로스는 왜 그 바보천치 같은 음흉한 미소를 짓는 걸까보기에 그럴듯한 것과 이 세상이 사랑하라고 권고하는 것을 사랑하고그리하여 이에 대한 보답으로 사랑받게 되는 행운을 차지한다는 것은당신의 주머니를 털고 목을 비튼 후 당신을 죽은 채로 하수구에 내팽개쳐버릴 포르토프랭스의 한 선원에게 구애하는 것보다 더 가벼운 운명이기 때문이다. (480 481) 

 

그래서 결국은 싸워야했다. 누구도 자기 자신과 평생을 싸울 수는 없기 때문에, 결국은 최초의 적이 동맹이 되고, 마지막 적은 세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 선택을 우리는 자기합리화라 부를 수도 있지만, 정신적 건강함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내 안에 숨어 있는 한 명의 적은, 내 밖에 도사리고 있는 수십억의 적만큼이나 두려운 상대이기 때문이다.

 

 

나의 불안정성은그 변화무쌍함은 새로운 수준에 다다랐다나는 종이에 이렇게 쓰고 싶다. "널 사랑해널 사랑해널 사랑해." 수백 번아니 수천 번이라도이 모두는 부적당한 고객에게로 향하고 있다전화를 해야겠다진실을 발견하는 중이라는 억측 뒤에 숨어 열정을 승화시키지도그렇다고 억누르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의 눈에서 콩깍지가 벗겨졌다."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었던 사랑의 열병이 종말에 이르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이 말에는당연하지만사회는 무너뜨릴 수 없는 운명적인 신의 말씀과 같으며 만약 우리의 에로틱한 욕구를 통제할 수 있다면 이는 이 사회에 실질적인 기여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682 683)

 

그리고 마침내 소설가는 사랑한다. 사랑을 부인했던 시절을 넘어, 싸움과 싸움이 이어지는 전장을 거쳐, 마침내 사랑의 자리에 도달한다. 수백 번, 수천 번을 써도 부족함이 있는 사랑, 그것은 진짜로 보인다. 세상은 사랑을 한 덩이의 소고기처럼 등급 짓고 그 위에 도장을 찍는다. 월권이고 오만이다. 그의 사랑이 진짜였는지는 그와 그가 사랑한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소설가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과정에 옆자리를 지켰던 그 사랑이 있었으므로, 일기의 마지막 몇 장에 그 사랑의 이름과, 그 이름을 사랑하고 고마워하는 소설가의 마음이 잔뜩 들어있었으므로, 어쩌면 우리는 마침내 소설가가 어두운 시간의 방문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위대한 무엇인가를 찾아냈다고 선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이 어둠은 세상이 용인한 사랑을 하는 다른 이들에게는 찾아오지 않는, 소설가가 덤으로 감당해야 했던 또 다른 어둠이겠으나. 우리는 이번에야말로 환멸이 그를 빗겨나갔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syo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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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02-13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캬~~ 좋다~~
좋아요, 정말...

syo 2018-02-13 11:05   좋아요 1 | URL
(으쓱으쓱)
(으쓱으쓱으쓱)
ㅎㅎㅎㅎㅎㅎ

[그장소] 2018-03-09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좋네요! 멋져요..글이~^^

syo 2018-03-10 00:04   좋아요 1 | URL
어설픈 글이예요 ㅎㅎㅎ
감사합니다^-^

[그장소] 2018-03-10 00:12   좋아요 0 | URL
이 겸손 난 반댈세~!! ㅎㅎㅎ
으쓱으쓱 하셔도 되어요!^^

syo 2018-03-10 00:14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ㅎ
쓸 땐, 그리고 쓰고 나서 한 며칠은 진짜 혼자서 신나게 으쓱으쓱 했는데 시간 지나고 찬찬히 보니까 좀 부끄럽네요...

[그장소] 2018-03-10 00:16   좋아요 0 | URL
맞아요 . 저도 그래요 . 금방 쓰고는 빠져 있다가 정신차리면 어긋난 부분들이 보이곤 해서요 . 그래도 그냥 두지만요. ㅎㅎㅎ
syo님처럼 긴 글 잘 쓰는 분들 부러워요. 저!! 🤔🤗😁

syo 2018-03-10 00:21   좋아요 1 | URL
가끔 자려고 누웠다가 괜히 북플 켜서 예전에 써 놓은 글 한번 더 읽어보면 사정없이 이불킥....

그장소님이 syo를 부러워 하신다구요? 에이 아냐.....그건 아니죠🤔
이 겸손은 내가 반댈세~ 😆

[그장소] 2018-03-10 00:27   좋아요 0 | URL
ㅎㅎㅎ그럼 이불킥 대신 우리 자아비판을 킥해버립니다~!! 순간의 몰입에 빠졌던 그 느낌은 신났으니까요!^^
그리고 부러운건 부러운 거예요 . 다락방님도 그렇고 AgalmA님도 그렇고 syo 님도 .. 저는 5000천자 넘기는게 일이거든요 . 어려운 일.. 😥😆

syo 2018-03-10 00:33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 AgalmA님 말씀하시니까 확 와닿네요.
부러운 건 부러운 일이죠. syo도 그장소님처럼 5000자를 쓰는 일이 어렵고 드문 일이지만, 제가 2500자 같은 5000자를 쓰는 반면 그 분들은 25000자 같은 5000자를 쓰시니까 참 부럽지요.

그렇지만 그장소님처럼 잘 쓰시는 분께 길이가 무슨 상관이겠어요. 짧아도 좋음 그저 장땡입니다.
그장소님 장땡.

[그장소] 2018-03-10 00:36   좋아요 1 | URL
하핫~ 25000자 같은 5000자! 쿵~ 와닿네요. 그분들은 아실까 몰라요. 어디선가 늘 부러움에 지는 상황을요~😆🤣

암튼 잘 쓴‘ 다고 해주셔서 응원챙겨갑니다.
굿굿한.밤되세요!^^
 


기껏해야 syo일 뿐인데, 이론이 필요할까


지금 이 순간,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이라는 거미줄처럼 약하고 조금은 비참하기까지한 방패를 미리 받쳐들고 입을 떼야만 했던 사람들의 심정을 좀 알 것 같다. 이런 말을 하려고 한다.


syo는 말기 빨갱이에 열혈 맑빠지만, 솔직히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엥겔스의 다소 미심쩍은 책 『가족, 사유재산(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이나 영문판으로 800페이지가 넘는 책 50권에 달하는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을 악착같이 뒤져, 여기저기에 정말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구절들을 들먹이면서 자신들의 두 성자를 페미니즘의 전당에도 은근슬쩍 밀어넣으려 분투하는 모습을 볼 때면 기가 찬다. 다 차치하고 마르크스가 살아 온 꼴을 보자. syo는 역사에 그만큼 큼지막하게 이름자를 박아 넣은 인물 가운데서 마르크스만큼이나 아내를 성적, 재정적, 직업적으로 착취한 사람을 알지 못한다. 마르크스의 아내 예니의 마음이야 syo가 가늠할 수 있는 바는 아니지만, 그 모든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가치를 남편에게서 찾아냈기 때문에 버티고 살았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아, 이런 이야기를 하려 했던 게 아니라, 다시,


syo는 말기 빨갱이에 열혈 맑빠지만, 계급 투쟁이 성공하여 모든 생산 수단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손아귀에 쥐어지는 순간, 자동으로 모든 부수적인 문제, 인종 차별이나 남녀 차별이나 이런 저런 갖가지 차별들이 일거에 해결될 것처럼 부풀리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은 좀 순진하거나 기만적이라고 본다. 물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러려면' 지금 이 시점부터 혁명이 성공하는 순간까지 살아 있는 모든 차별들을 잠시도 눈 감지 말고 주시하며 가야 하는데 그건 참 어렵고, '아니려면' 그냥 지금처럼 앞만 보고 달리면 되니까, 결과적으로 아니게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차별의 철폐에 불필요하거나 불편하고, 페미니즘의 이론은 혁명의 완성에 불필요하거나 심지어 족쇄가 될까?


안태근이 '그랬던' 이유는 물론 그의 품행과 인식에서 나오겠지만, 안태근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가진 권력, 그리고 권력을 가진 이들이 그의 편이라는 데 있다. 인사권. 그리고 2차 가해를 유발하는 사회적 힘. 고은이 '그랬던' 이유 역시 그의 품행과 인식에서 출발하지만, 고은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 또한 그가 가진 권력, 그리고 권력을 가진 이들이 그의 편이라는 데에서 생겨난다. 청탁권력. 그리고 역시 2차 가해를 유발하는 사회적, 문화적 힘. 


결국 이것은 다시 권력의 문제다. 권력을 가진 이들이 이 문제를 '문제'로 생각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다. 쓰레기 같은 남자들이 소수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쓰레기를 치울 뜻과 힘을 동시에 가진 남자들이 너무 소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어느 소수가 더 소수인지는 명백하다. 쓰레기보다 청소부가 더 많았다면, 이 모든 폭력들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다해도 최소한 발생과 동시에 수면에 드러났을 것이다. 몇 년이 지나고, 몇십 년이 지나 이제야 겨우, 이렇게 힘겹게 싹을 틔어올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MeToo의 융단폭격 소리를 듣고 잠자던 청소부들이 이제 눈을 떴을까? 이제껏 눈 감고 못 들은 척, 기껏 들으면 치우는 둥 마는 둥 한없이 미적거리던 청소부들이 드디어 일제히 기립하여 손에 손에 목장갑을 착용하고 빗자루를 들까? 청소를 마치면 유니폼을 갈아 입고 경찰관이 되어,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 단속하고 처벌하여 아예 쓰레기가 생겨나지 않도록 열과 성을 다할까?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가 등장하면 어떨까.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모든 생산수단을 점거하고, 부르주아지들이 사라지는(프롤레타리아트가 되는 셈이다) 순간 승전보를 울린다. 그렇다면 모든 권력을 여자들에게 주면 어떨까. 그건 안 되겠다. 생산수단을 잃는 순간 프롤레타리아가 되는 부르주아와는 달리, 남자는 권력을 내려놓아도 여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별만 바뀌어 유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권력을 반으로 나누면 어떨까. 자신을 아프게 하는 쓰레기를 치울 수 있게, 여성에게도 빗자루를 나누어주면 어떨까. 권력이라는 생산수단을 균형있게 나누어 가짐으로써 서로의 착취를 서로가 막을 수 있는 두 집단의 혁명 프롤레타리아트를 맞세워 놓으면 어떨까. 


정말 어색한 비유였지만, 이 문제를 발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여성에게 권력을 주는 것 외에는 역시 방법이 없다고 syo는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면역이 떨어진 몸이다. 그래서 병까지 걸린 두 배로 불쌍한 몸이다. 우선 병을 쫓아내면, 반드시 면역력을 회복해야 한다. 대증요법으로 일관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아무리 안태근이니 최교일이니 고은이니 욕으로 두들기고 법과 도덕으로 처벌해도, 다시 그들의 자리에 그들이 가 앉을 수 있게 둔다면,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물론 단순하고 순진하며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생각이다. 그러나 당장 무엇을 행동으로 옮겨야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지, 아니, 내가 무슨 행동을 한다고 해서 조금 더 나은 세상이 오기나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syo 깜냥에,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겨우 이런 생각들이나 내면의 윤리학을 기름치고 조이는 소심한 노력 말고 뭐가 있을까. 그렇다면, 기껏해야 이런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하고 간단한 생각들을 하기 위해, 이런 책들이 과연 필요했던 걸까? 고작 이런 뻔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려고 저 무섭고 무거운 책들을 읽어야 했다면, 어쩌면 syo는 구제가 안 되는 덜떨이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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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18-02-20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옳은 이야기는 뻔해 보이기 쉽죠. 한동안 북플 소홀했더니 syo님의 글을 여러개나 놓쳤었군요 ㅠㅠ

syo 2018-02-20 12:14   좋아요 0 | URL
무플방지 위원회 독서괭님이시다 ㅎㅎㅎㅎ
 



자각몽을 꾸는 중이었다. 꿈 속의 syo는 요게 꿈이란 걸 알고 있었으므로 꿈을 쥐락펴락하며, 어차피 꿈인데 뭐 어때, 평소 한 번쯤 어떨까 생각해봤던 온갖 짓거리를 다 해 보았다. 어차피 꿈인데 한남대교에서 투신도 해 보고(미친 놈아), 어차피 꿈인데 사람도 막 쥐어 패 보고(으아, 미친 놈아!!!), 어차피 꿈인데 세상 사악한 표정으로 책을 한 장 한 장 뜯어 불살라도 보고(으아으아 왜 그랬어 미친 놈아아아!!!!!!!!!!!!), 뭐 이런 짓 저런 짓 다 해 봐도 역시 그건 꿈이었다. syo는 죽지도 않았고, syo한테 얻어터진 정치인은 암만 패도 한결같이 개소리에 개소리를 얹었으며, syo가 태운 책들도 여전히 책장에 기세등등 꽂혀 있었다. 자각몽을 꾸는 것은 신나면서도 허망한 일이군. syo가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지금 아등바등 살고 있는 이 세상도 꿈은 아닐까? 오늘 한 번 확 진짜 한강에서 확 그냥 막 그냥 응? 그러나 그럴 용기는 없었다. 아니면 어쩔 거야. 인생 한 갠데. 꿈 같은 개소리는 집어치우고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해 똑바로 살아나가자, 이 험한 세상에. 아자아자 화이팅.


하고 힘차게 다짐했는데 눈 떠보니 그것도 꿈임.


자각몽은 몇 번 꿔 봤지만, 자각몽을 꾸는 꿈은, 심지어 '자각몽을 꾸는 꿈인데 그 자체는 꿈이라고 자각을 못하는 꿈' 같은 희한발광한 꿈은 또 처음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싸다구라도 한 대 먹여(먹어) 볼까 했지만 진짜 안 아플까봐 겁나서 못 하고, 대신 이렇게 일기를 남긴다. 하루의 시작부터 아주 야무지게 농락당한 느낌입니다.




 "사비에르는 내 동생입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노인은 잔인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검지를 쳐들었다. "사비에르는 존재하자 않소. 그저 환상일 뿐이오." 그가 방 전체를 껴안는 몸짓을 했다. "우리는 모두 죽었소. 아직도 그걸 몰랐단 말이오? 나도 죽었고, 이 도시도 죽었소. 전투, 땀, 피, 영광, 나의 권력, 이 모든 건 죽었소. 아무짝에도 소용없게 되어버렸소."
 "아닙니다." 내가 말했다. "어떤 것은 영원히 남아 있어요."
 "뭐가 말이오?" 그가 따졌다. "그의 추억이? 당신네들 기억이? 아니면 이 책들이?"

 노인이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온몸이 오싹했다. 노인 무얼 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발치에 있던 조그만 주머니 같은 것을 장화로 걷어찼다. 보니까 그건 죽은 쥐었다. 그걸 바닥에 굴리더니 조롱하는 투로 중얼거렸다. "아니면 이 쥐가 영원하다는 건가?" 노인이 다시 웃었다. 그 웃음에 내 몸의 피가 얼어붙었다. "난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다!" 노인이 부르짖었다. 그러자 목소리가 부드러워졌고, 나를 교수라고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당신을 깨웠다면 용서해주시오."
_ 안토니오 타부키, 『인도 야상곡』




오른손


어제는 아침에 일어났더니 오른손이 왼손을 막 꼬집고 있었다. 그래서 하루만 오른손을 써 보기로 했다. 밥이 자꾸 볼을 때렸다. 국물이 돌아오지 않는 번지점프를 시도했다. 밥 한 끼 먹고 났더니 거지꼴이 되었다. 위대한 오른손. 그럼에도 오른손을 포기하지 않았다. 뭔가 더 재밌고 웃긴 일이 벌어질 거라고 기대하며. 그러나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역시 날로 먹으려 한 것이 패착이다. 시트콤의 길은 지난하다.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 이제 칸트의 멱살을 노린다.

발터 벤야민,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 베를린 연대기』는 당최 무슨 말을 하고 있나....

프랜시스 윈, 『마르크스 평전』우리 마르크스가 대학생이 되었어요.

존 치버, 『존 치버의 일기』치버가 본격적으로 남자를 만나고 다녀요.

박민영, 『그러니까 이게, 사회라고요?』를 마침.

이진우 외, 『대통령의 책읽기』를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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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5 1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5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별이 2018-02-05 1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자아자화이팅.

cyrus 2018-02-05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 <기생수>에 나오는 ‘오른손이‘처럼 syo님 오른손이 책을 읽을 수 있겠는데요. ^^

syo 2018-02-05 15:59   좋아요 0 | URL
제 오른손은 그만한 성능이 안 나옵니다.
보세요. 밥도 제대로 못 떠먹는 놈이 이놈이라구요.....

프리즘메이커 2018-02-05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른손잡이 좌파를 진지하게 필명으로 고민했었습니다...ㅎㅎ

syo 2018-02-05 16:01   좋아요 1 | URL
드디어 프메님과 저의 차이점이 하나 나왔군요. 손잡이가 다르네요.
그나저나 프메님 프로필 이미지하고, 위에 있는 사이러스님 프로필 이미지가 좀 많이 비슷해 보입니다.
프메님이 좀 더 잘생겼다는 게 결정적 차이네요.

마그리트 의문의 1패.

프리즘메이커 2018-02-05 18:00   좋아요 0 | URL
밍ㅠ 부끄럽구요 ㅎㅎ

유부만두 2018-02-06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루스트.... 가 연상됐다고 쓰려니 넘나 가식적인 댓글 같네요;;;; 진짠데요...^^

syo 2018-02-06 11:57   좋아요 0 | URL
저는 프루스트를 안 읽어봤지만 어쩐지 들어서는 안 되는 거대한 말을 들어버린 느낌이네요ㅎㅎㅎㅎㅎㅎ

유부만두님 반갑습니당^^

토큰 2018-02-10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을 쥐락펴락 하고 싶네요. 흐흐흐

syo 2018-02-10 14:43   좋아요 0 | URL
흐흐흐^ㅠ^
 


헤어지는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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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울에서 컴퓨터를 공부하고, 그녀는 경남의 유서 깊은 도시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법을 배운다. 주고받는 이야기만으로 그는 그녀에게 빠졌다. 그는 시를 썼고, 책을 읽고, 그녀와 달리 사랑이 처음이었다. 그가 아는 누군가를 그녀는 좋아했었고, 버림받았다. 가을과 겨울을 옆에서 보듬다가 기어이 그는 그녀를 좋아하고 말았다. 세상이 갑자기 환하고 선명해졌다. 처음 겪는 감정이라서 오히려 확신했던 그와는 달리 그녀는 망설이는 중이다. 그 망설임이 그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큰 빛이 내리면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법이다. 봄이 왔다. 무엇 하나 못박지 못하고 그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마음은 들뜨고 그저 이야기만 분주히 오간다. 그는 만지고 싶다. 상상만으로도 몸이 가득 차올라 터져버릴 것 같다. 낮으로 밤으로 봉오리가 부풀어 오르고, 무심히 벚꽃은 떨어진다. 보고 싶다는 말을 문자로 찍어보내고, 미처 다 보내지 못한 백만 개의 말들을 반지하 하숙방에 차곡차곡 쌓아올린다. 말들이 밀집하여 굳으면 그리움이 된다. 그리움이 겹겹이 쌓이면 그것만으로도 어엿한 사랑이 된다. 그의 사랑은 혼자서 깊다. 그녀는 내 생각을 할까. 그는 항상 생각한다. 서서 생각하고 앉아서 생각한다. 그런 생각들이 높은 곳에 가 닿는 때가 가끔 있다. 그녀가 서울에 온다. 그녀의 학교가 여의도로 학생들을 보내 시위할 예정이다. 아직 벚꽃이 다 지지 않았다. 운이 좋다면 잠깐, 아주 잠깐 그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손이라도 쥐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몇 개의 밤이 더디게 지나간다. 무리 가운데서 그녀를 한 번에 찾아낼 수 있을거라 확신했지만, 그가 여의도에 도착하고도 꽤 긴 시간을 그들은 엇갈렸다. 그와 그녀는 무수한 사람 가운데 하나와 하나일 뿐이었다. 벚꽃이 한 장씩 홀로 떨어지는 것처럼. 그는 하얀 봄 속을 헤맨다. 마침내 마주섰을 때, 이미 그들에게 남겨진 시간이라곤 채 10분도 되지 않았다. 왈칵 눈물이 난다. 안녕, 안녕. 그 말만 주고받은 채 두 손 맞잡고 그대로 5분이었다. 밤 되면 쌀쌀해. 응. 너무 소리 지르지 마. 응. 빨리 찾아내지 못해서 미안. 아니야. 작은 비닐 봉지나 은박지 같은 것들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고, 그 위로 가끔 벚꽃이 내려 앉았다. 그러면 10분이었다. 안녕, 안녕. 손도 놓지 못한 채 입으로만, 안녕, 안녕. 다시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본다. 자꾸 고개를 돌리는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팔을 크게 흔든다. 봄이 진하고 진해서, 그 동작은 마치 깊은 늪 속에서 팔을 젓는 것처럼 힘겹다.




2


그녀가 그에게 입술을 가르쳤다. 가슴을 가르치고 엉덩이를 가르쳤다. 그 모든 것이 가고 나도 한참을 안아줘야 한다고 가르쳤다. 속삭임을 가르쳤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배웠다. 한참을 이불을 덮은 채 돌아 누웠다가 부스스 그녀가 몸을 일으키면, 그들은 손을 잡고 거리로 나간다. 때론 아직 밝고, 때론 벌써 어둡다. 편의점에 들러 콜라 한 캔을 산다. 콜라가 두 입술을 오간다. 5분 전까지 서로를 직접 더듬던 입술이다. 거리를 채운 젊은이들은 흥청망청 흔들거리고 있고 그와 그녀도 젊은이다. 손을 맞잡은 두 젊은이가 뚜벅뚜벅 걷는다. 때론 봄이고, 때론 여름이다. 그녀의 집은 서울 밖이다. 지하철을 타고 큰 박물관이 보이는 데서 내린 다음, 그곳에서 다시 버스를 잡아타야 가는 곳이다. 자리가 나도 그들은 앉지 않는다. 문가에 서서 재잘대다가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잠깐 입을 맞추기도 한다. 흥청망청 흔들거리고 있다. 젊음은 누구에게나 오고, 그래서 젊음을 통과한 그 누구도 그들을 손가락질하지 못하리라, 그는 그렇게 생각한다. 멀리 박물관이 보이고, 그의 집을 나오면서 잡은 두 손을 그들은 아직 한번도 놓지 않았다. 버스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맞아. 그러면 입을 맞춘다. 그럼 그냥 다시 돌아갈까? 그럴까? 그러면 다시 입을 맞춘다. 서서히 어둡고 여름이다. 늦게까지 매미는 울고 밤은 부옇게 망설이고 있다. 아직 버스는 오지 않는다. 우리 나중에 저기 살자.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이제 막 뼈대를 갖춘 키 높은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다. 우리 돈 많이 벌어야겠다. 정말 그래야겠다. 그러면 다시 입을 맞춘다. 이번에는 좀 길다. 버스가 도착하고, 머뭇머뭇 올라탄 그녀가 창가 자리에 앉아 손을 흔든다. 전화 해. 전화 할게. 버스 후미등이 저녁을 둘로 가른다. 꽁무니가 보이지 않을만큼 멀리 버스가 사라지면, 그제야 그 자리에 밤이 내린다.



3


그의 생일을 맞아, 그녀는 약간 무리해서 서울에 올라온다. 선물을 고르고, 케이크를 사고, 편지를 쓴다. 무얼 가장 좋아할까?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당연히 선물과 케이크와 편지를 들고 온 그녀다. 많이 걷지 않고, 이르게 숙소로 들어간다. 아직 오지 않은 밤을 벌써 끌어다 붙인다. 그들은 평화롭게 서로를 더듬고, 온몸을 뒤적거리며 그간의 안부를 확인한다. 모든 것이 나아지고 있어. 아직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해 미안해. 하지만 다 괜찮아질 거야. 같이 가니까 다 괜찮아질 거야. 서로가 가장 원하는 말이 무엇인지, 지금 가장 필요한 말이 무엇인지 저절로 알게 되기까지, 그들은 오래 만났고, 그래서 더 오래 만날 것이었다. 말은 아무것도 확실하게 해 주지 못한다는 세상의 파상공세 속에서도 말만으로, 그저 말만 가지고도 그 긴 시간을 빚어온 그들이었다. 오롯이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긴 믿음에 올라타 여기에 도착한 사람들이었다. 문서가 불필요한 사랑이었다. 큰 침대 위에 손 잡고 누운 한 쌍의 확신범이었다. 아침이 오면 그녀는 다시 대구로 내려간다. 어떻게 하면 아침을 죽여버릴 수 있을까, 그는 턱없는 고민 중이고, 그녀는 새근새근 잠을 잔다. 바람이나 욕심만으로 아침은 결국 살해되지 않았고 서울역은 만남과 이별로 왁자지껄하다. 두 사람은 햄버거와 프렌치프라이를 나눠 먹고, 프레즐과 커피를 손에 들고 발차시간을 기다린다. 창가 자리야. 계속 손을 흔들 수 있겠군. 어쩐지 슬플 것 같지 않아? 뭐가 슬퍼. 영영 못 보는 것도 아니고. 그는 코웃음을 친다. 그러나 막상 그녀가 자리에 앉고, 플랫폼에 서서 차창 너머의 그녀를 보는 순간 그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그녀는 웃으며 손을 흔든다. 그러나 그는 손을 흔들지 못한다. 곧 그녀도 손을 내린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반투명한 유리 한 장이 세상의 모든 장벽을 겹쳐놓은 것처럼 비통하다. 시선은 부질없다. 만져야 한다. 그는 전차 안으로 달려들어가 거칠게 입맞추는 상상을 한다. 그러나 눈물이 무거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도 이미 그녀의 눈물에 한없이 짓눌려 있다. 그들은 행복했다. 그러나 큰 슬픔은 언제나 행복의 한 가운데 있다. 그들은 기뻤으므로, 언제라도 울 준비가 되어 있는 두 마리 짐승이 되어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서로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오래 쳐다보고 있다.



            

마침내 시간이 몇 분밖에 남지 않았을 때 내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고, 아샤는 내가 울고 있는 걸 보았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말했다. "울지마. 안 그러면 나도 같이 울게 되니까. 나는 한번 울기 시작하면 너처럼 그렇게 빨리 그치지 못해." 우리는 힘껏 껴안았다. ...... 썰매에 올라타고 여기서 작별 인사를 하려다가 그녀에게 트베르스카야 거리 모퉁이까지 함께 타고 가자고 했다. 거기에서 그녀가 내렸고 이미 썰매가 출발하기 시작했을 때, 다시 한 번 대로변에 있던 그녀의 손을 내 입술에 대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서 있었고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 역시 썰매에서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기가 무섭게 곧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무릎 위에 큰 가방을 올려놓은 채 울면서 어두워져 가는 거리를 지나 역으로 향했다.

_ 발터 벤야민, 『모스크바 일기』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마침.

제임스 설터, 『가벼운 나날』에 수없는 밑줄을 그음.

존 치버, 『존 치버의 일기』를 꿋꿋이 읽어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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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2-02 14: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좋다. 좋으네. 좋다요...
쇼님 오늘 감성 포텐 터졌네요. 팡팡 팡팡팡팡팡!!

syo 2018-02-02 15:20   좋아요 0 | URL
벤야민-설터-치버-좁아터진 고시원에게 이 영광을 돌립니다.

무슨 사람 울적하게 하는 버거-프렌치프라이-콜라-케찹 세트 같은 존재들이군요.

syo는 그저 한 장 냅킨일 뿐이구요. ㅎ

단발머리 2018-02-02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좁은 고시원에서도 이런 매력을 한껏 터뜨리는 syo님은 진정 누구인가요~~
누구신가요, syo님은~~~~^^

syo 2018-02-02 16:34   좋아요 0 | URL
고시생이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추억이나 들추며 소주대신 제로콜라 나발부는 망나니 고시생이요.....

단발머리 2018-02-02 16:39   좋아요 0 | URL
건전하다
이 고시생~~
소주 대신
제로 콜라~~

syo 2018-02-02 16:40   좋아요 0 | URL
못 마셔서 그런거지 마음만은 만취대취입니다! ㅎ

psyche 2018-02-03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너무 좋은데요!

syo 2018-02-03 08:34   좋아요 0 | URL
아 이런 너무 감사한데요!^ㅂ^~~ㅎㅎ

2018-02-12 1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12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