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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1

 

올해 여름은 두 걸음 다가왔다가 한 걸음 물러나는 식으로 오려나 보다. 비 그치고 새 소리 들리는 가운데 사뭇 쌀쌀하다.

 

 

 

2

 

일은 일이고 삶은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때 세상은 지금보다 간단했다.

 

 

 

3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특산종 관목의 이름과 같은 표기의 이름을 가진 사람을 오래 사랑했었는데, 식물 책을 읽다가 그 나무를 만나면 끝없이 아련해진다. 1속에 1종밖에 없다는 진귀한 그 나무에서는 개나리를 많이 닮은 꽃이 핀다. 나는 그 꽃의 꽃말보다 아름다운 꽃말을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벌써 아득해졌지만, 그 사람과 같이 있는 순간은 늘 그 꽃말과 같은 순간이었다. 이제 와 그립다 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 생각한다. 나는 그 사람에게 어떤 꽃말이었는지를.



학명 Abeliophyllum distichum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하지만 오늘은 그 숲에 대해 쓸 것이므로 슬픔에 대해서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 머지않아 겨울이 오면 그 숲에 '아침의 병듦이 낯설지 않다' '아이들은 손이 자주 베인다'라는 말도 도착할 것입니다 그 말들은 서로의 머리를 털어줄 것입니다 그러다 겨울의 답서처럼 다시 봄이 오고 ''이나 '우리'나 '엄마같은 몇 개의 다정한 말들이 숲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 먼 발길에 볕과 몇 개의 바람이 섞여 들었을 것이나 여전히 그 숲에는 아무도 없으므로 아무도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박준」 부분 


  

 

4



인종, 젠더, 계급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흑인 여성의 위치가 지니는 특수성이 있고, 흑인 페미니즘 사상이란 그 특수성 위에서 발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이 있(어야 했). 언어는 권력의 도구이므로 권력의 중추에서 멀리 서 있을수록 자신의 위치를 설명할 도구는 빈곤하다. 송곳으로 나사를 돌릴 수는 없기에, 그들은 송곳을 내던지고 드라이버를 만들거나, 심지어는 송곳으로 박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나사를 발명해야 한다. 발명의 어머니는 필요라서, 필요는 자기와 닮은 모양의 발명을 낳는다. 그렇게 발명된 언어는 자신의 어머니인 필요와 닮을 뿐더러, 거슬러 올라가 그 필요의 어머니인 억압, 결핍, 박해 등과 닮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흑인 페미니즘 사상은 다른 사상과 완전하게 닮을 수도, 완벽하게 호환될 수도 없다. 그럴 수 있었다면 도리어 이 책은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언뜻, 흑인 여성이 압도적으로 적은 이 사회에 사는 우리가 흑인 페미니즘 사상에 관한 독서를 통해 과연 무엇을 얼마나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해 의심하게 한다.

 

어느 나라의 법도 모든 특수한 상황을 상정하지는 못한다. 조문의 유추 적용과 유사판례를 통해 특수성에 대응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어떤 특수성을 깊이 들여다봄으로써, 다른 특수성을 위한 혜안을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치면 세상 모든 텍스트가 유추와 적용의 양분이 된다. 굳이 이 책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이 책의 가치는(아직 절반도 못 읽었으나), 그러니까 흑인 페미니즘 사상과 상당히 멀리 서 있는 한국인-남성으로서 이 책을 읽어 볼 명분은, 특수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세한 균열을 조율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을 확인해보는 데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경험상 그 조율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고, 늘 망했다.

 

흑인 여성과 한국 여성이 겪는 억압의 닮은 모습에 집중하여 여성 일반이 겪는 고통에 대한 결론으로 나아가게 되면, 어쩌면 그것은 반쪽짜리 독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반면, 이 책을 흑인 여성이 겪는 경험의 특수성에 대한 증언으로만 인식하고 오늘날-우리 사회를 위해 변용할 만한 여지가 그다지 없는 책으로 치부하며 몇 개의 밑줄만 건지고 돌아선다면 당연히 그것도 온전한 읽기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줄을 잘 타야 한다.

 

요는, 이 책은 읽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지금껏 우리가 읽어왔던 다른 책들에 비해 학문적으로 난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얘들은/도 이래?” 양쪽 모두가 위태로울 수 있어서.

 

 

 

 

--- 읽은 ---



42. 더 저널리스트: 카를 마르크스 / 카를 마르크스 : 98 ~ 190

 

평전을 읽어보면, 마르크스는 거의 모든 장르의 글쓰기에 한 번쯤은 도전해본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문학 쪽으로는 그다지 큰 소질이 없었다는 평이 있긴 한데, 읽어보진 않았지만 글쎄, 수제비 맛집에서 평균 이하의 칼국수를 먹기는 힘든 법이니까. 어쨌든 마르크스는 정말 글을 잘 쓴다. 솔직히 syo가 마르크스에 흠뻑 빠진 것은 그의 사상보다 문장에 두들겨 맞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다. 마르크스의 저널리즘은, 아니 저널리즘 속의 마르크스는 당연히 철학서나 정치 팸플릿 속의 마르크스보다 담백하고 직선적이다. 그것은 저널리즘이 어떤 장르인지(어떤 장르여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훌륭한 검객이라면 찌르는 칼로도 벨 수는 있겠으나, 강한 적을 맞닥뜨리면 찌르는 칼로 찌르고 베는 칼로 베어야 이긴다.

 

 

 

43. 쓰레기책 / 이동학 : 138 ~ 273

 

어마어마한 추천에 비해 어마어마한 통찰이 있지는 않다. 문제의식은 뚜렷하나 한칼이 없다. 저자는 눈을 뜬 사람이지만 다른 이들의 눈을 뜨게 할 힘은 조금 부족하다. 훌륭한 운동가가 될 수는 있겠지만 매혹적인 선동가가 되기까지는, 앞서 나갈 수는 있겠으나 끌고 나갈 수는. 좋은 책이지만 매력적인 책일 수는.

 

 


 44. 대도시의 사랑법 / 박상영 : 181 ~ 341

 

syo의 사랑은 대부분 대도시에서 시작해 대도시에서 끝나거나 작다고 해봐야 광역시 규모에서 끝나거나 했다. 대도시에서 사랑한다고 대도시의 사랑법을 다 이해할 수는 없는 모양.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다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닌 모양. 특정한 모양의 사랑이 대도시의 사랑법을 혼자 독점하거나 전유를 주장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대도시에서 시작하는 사랑과 대도시에서 끝나는 사랑들, 특히 끝나는 모든 사랑들을 찬찬 들여다보면서, 어쩌면 끝나기 위해서 시작하는 것이 대도시의 사랑이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해보면서, 어떻게든 대도시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대도시의 사랑법이 진짜 있는지는 몰라도, 사랑법의 대도시는 저기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내 머리맡에 앉은 저 대도시에는 정말 사랑도 사랑법도 너무 많다. 이러니 내가 저 도시를 사랑할 수밖에.

 

 

 

--- 읽는 ---

식물의 책 / 이소영 : ~ 154

로쟈의 한국 현대문학 수업 / 이현우 : ~ 115

인생이 왜 짧은가 / 세네카 : ~ 130

대량살상 수학무기 / 캐시 오닐 : 123 ~ 236

흑인 페미니즘 사상 / 패트리샤 힐 콜린스 : 89 ~ 177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 정희진 : ~ 92

스피노자 / 스티븐 내들러 : ~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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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0 14: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1 0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0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1 0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0-05-10 16: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에서 삶으로 회복하는 시간을 만들기 어려운 요즘이네요. 왜 이렇게까지 간단치가 않은 건지. 이 어려운 걸 간단하게 풀고/혹은 풀지않은 채로 고단히 살아가는 인류는 어때먹은 종족인 건지. 가끔 눈물나요 ㅠㅠ..

syo 2020-05-11 07:24   좋아요 0 | URL
울지 마... 울지 마... ㅜ_ㅡ

또 봄. 2020-05-19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말을 알고 나무이름을 보니 달리 느껴지네요.
syo님 글은 마음을 간지럽게 하는 뭔가가 있어요.
멋지심!

syo 2020-05-20 18:36   좋아요 0 | URL
또봄님 오랜만입니다.
저도 자주 못 들락날락하느라 더 뜸했네요. 시국은 이래도 봄은 좋응 봄이지요?? 건강 조심하세요^-^
 

 

스탠바이

 

 

1

 

시작과 동시에 금방 끝날 것만 같아 사람 불안하게 만들던 연휴가 금방 끝났다. 여지없다. syo는 마카롱을 씹어먹으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네 개만 사도 두 사람이 호주산 소고기로 한 끼 든든하게 해결할 수 있는 가격이 나오는 미친 간식 마카롱은 커피와 같이 먹으면 맛나다. 일주일 전쯤 얼음 곽을 구매한 덕에 커피는 아이스커피. 어쩐지 비리다. 마카롱이 있어서 참 다행이야.

 

부지런한 나의 룸메 이 얼음 곽을 비틀고 흔들어 통에다 얼음을 모으고 있다. 가끔 저렇게 시키지도 않았는데 성실할 때, syo는 많은 것들을 용서하게 된다. 그의 무심함, 그의 불결함 등등의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을. 저 정갈한 연속 동작을 좀 보라지. 얼음 곽을 비튼다. 큰 그릇에 얼음을 쏟는다. 얼음 통에 붓는다. 얼음 통의 뚜껑을 닫는다. 싱크대 수돗물을 튼다. 얼음 곽을 가져다 댄다. 곽에 물이 가득 차자 뚜껑을 닫는다. 그리고 그걸 냉동실에 넣고 앉았다……. 그래. 아이스커피가 비린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 커피 머신에 수돗물 넣어서 만든 커피에 수돗물 얼린 얼음을 띄워놓고 고급지다 폼난다 아주 좋다고 마셨던 모양이다.


저놈의 무심함과 불결함을 용서하기가 힘들다. 마카롱, 마카롱…… 마카롱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고 한다. 살인을 면하는 데 드는 비용이 단돈 8,000. 의 목숨값은 헐하다.

 

 

 

2

 

저와 제 가족 중 누구 하나 크게 아파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은 본인한테는 행복한 일이겠지만(그걸 알긴 알는지), 같이 사는 사람한테는 불쾌한 일이 되기도 한다. 코로나 사건이 터지고 한 달이 지나도록, 저 친구는 집에 돌아와도 손을 씻지 않았다. 그냥 옷 갈아입고, 컴퓨터 하고, 드러누워 있고, 그러다 요리나 하게 되면 흐르는 물에 잠깐 손을 적셨을 뿐. 쟤가 마스크라는 걸 차고 다니기 시작한 시점에, 세상에는 이미 마스크 5부제가 실행되고 있었다. 옆에서 보면 정말 무서운 인간이 아닐 수 없다. 아파 본 적이 없어서 아픈 게 얼마나 무섭고 지치는 일인지 쟤는 모른다. 위생 관념 없는 인간으로 35년을 살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그가 전생에 쌓았을 공덕에 무한한 갈채를 보낸다.

 

 

 

3


 

흑인 페미니즘 사상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과 그 윤곽선을 그려나가는 데서 책은 시작한다. 그것은 지난한 일이다. 증거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내놓아야 하는 법이다 보니,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척이나 쉽다.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 하나도 없는데. 인간이여, 인간의 불상사란 내가 내 주변이 어떤지 다 알고 있을 수는 없는데도 나만은 그걸 다 안다고 착각하다가 터지기 마련이라오. 각설.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분투해 본 이들이 듬직하다. 운이 좋아 온몸에 이런저런 증명들을 바르고 태어나는 바람에 증명하는 방법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의 말보다 무겁고 무섭다.



가난한 사람들이 현실에서 겪는 좌절은 지식과 정보의 부족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비유하자면 그것은 조명의 문제이지 사물의 문제가 아니다지식과 정보량을 늘린다고 삶의 자세가 달라지지는 않는다지식의 축적이 곧바로 좋은 삶으로 연결되지 않음은 인문학자 자신의 삶이 보여준다게다가 장애인들과 함께 공부하다 보면 장애인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제도와 관행이 무엇보다 우리 시대의 인문 지식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그리고 인문학자 자신이 그런 지식의 생산자라는 것도 알게 된다.

고병권묵묵 


이는다시 한번 맑스의 문장으로 말한다면프롤레타리아에게서 물질적 무기를 발견하고 프롤레타리아에게 정신적 무기를 제공하는 것그리하여 기존의 세계 질서를 해체하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유로운 연합'을 창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프롤레타리아와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삶의 방식새로운 생산의 방식을 창조하는 것그것이 바로 철학이 비-철학(프롤레타리아!)을 통해 사유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이다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가자신을 탄생시켰고 자신을 말 그대로 무산자(프롤레타리아)로서 재생산하는 자본주의의 외부를 창조하는 것.

이진경자본을 넘어선 자본


 

 

4

 

아무것도 증명해보지 못한 사람보다 더 어려운 적은 피나는 노력으로 한두 가지를 증명해 본 사람 중에서 나온다. 내가 직접 증명한 것들이 내가 아직 증명하지 않은 것들의 증명이라고 믿는 사람들. 내가 증명한 것에 비하면 네가 증명할 것은 작고 가벼운 것일 뿐이므로 나는 증명 없이 너를 증명할 수 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5

 

야구 시작한 모양이다. 봄이군.

 

 

 

6

 

연휴라고 간만에 여유롭게 책을 좀 읽을 수 있었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급한 대로 어느 정도 수혈은 된 듯.


 

"가장 큰 고민은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거야아마 내가 망가지면 그건 책을 못 읽어서야.“

김필균문학하는 마음

 

 

 

7

 

철학책을 (다시) 시작할 때는 스피노자가 좋다.

 

스피노자 하면 기냥 스티븐 내들러 선생님


플라톤이랑 아리스토텔레스는 위대하긴 한데 낡을 대로 낡아서, 거기서 시작하면 오히려 그들의 위대함을 느낄 수 없고, 다른 철학책을 읽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쳐다볼 때에서야 간신히 위대하다. 그 다음으로는 데카르트가 눈에 띄긴 한다만, 21세기 사람들이란 정규교육만 마쳐도 데카르트 쌈 싸드시는 회의懷疑의 인간이 되는데, 심지어 여기가 코리아인지라 우리는 기본적으로 회의/의심을 넘어 불신의 달인이 되었다는 증거로 주민등록증을 받는다. 그 바람에 데카르트는 연구의 대상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독서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삐꾸다. 멍뭉이는 기계라는 둥,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만 빼고 모든 전제를 싸그리 의심해가며 내린 결론이 신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는 둥, 읽고 있으면 회의/의심을 넘어 불신이 생기게 만드는 희한한 재주가 있다. 무엇보다 감정과 욕망을 똥으로 본다.

 

여혐을 하면서도 여혐인 줄 모르고, 자본의 방식에 편승하여 살아가는 스스로를 인정하기 위하여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사는 이들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과 술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다. 그때 그가 가장 입에 많이 올린 단어가 객관적’, ‘중립적’, ‘논리적이었으므로 syo는 그날 이후로 그 단어들이 기본적으로 역겹다. 그리고 그가 자기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며(그것이 그 나이에 그만한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며) 같잖게 데카르트의 이름을 입에 올린 이후로, syo는 데카르트가 해롭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같잖은 인간에게는 모든 철학이 해롭다.

 

스피노자를 읽기 전에 스피노자를 읽어도 되는 사람이 되어야지…….


마부가 대답했다나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나는 음식이지 생명이 아닙니다저 소년이 우뚝 선 것처럼 당신도 혼자 힘으로 서십시오나는 당신을 구해드릴 수가 없습니다왜냐하면 시는 정신이기 때문입니다시를 숭상하는 사람은 정신과 진실 속에서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_ E. M. 포스터천상의 합승 마차

 

어떤 사람이 경계하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로부터 작은 기술이라도 한 가지 재주를 지니고 있으면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없게 된다스스로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를 믿게 되면 점점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생겨난다이렇게 되면 작게는 욕과 비난이 온몸을 덮고크게는 재앙과 환난이 따르게 마련이다이제 그대가 날마다 문자에 마음을 두고 있으니힘써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자료를 만들자는 것인가?" 이에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말했다. "감히 경계하지 않겠는가."

이덕무이목구심서 4

 

 

 

--- 읽은 ---


40. 사랑 밖의 모든 말들 / 김금희 : 128 ~ 231

 

말들이 있었던 것이다. 풀어놓기 전에는 미처 몰랐지만, 안에 있음으로써 삶을 충만하게 하고 충만함으로써 안을 부딪는 말들이 있었던 것이다. 생의 어느 곡면을 휘감고 도느라 알록달록 물든 말들. 어느 날은 젖었다가 어느 날은 메말랐다가 꾸글꾸글 주름으로 남은 말들. 종이 한 장 마주하고 앉은 어떤 날, 맑았거나 흐렸거나 했을 어떤 시간에 나는 뭔가 말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이 뭔가 말했고, 그 순간 내 삶이 다른 쪽을 가리키며 회전했을 것이다. 자기 안에 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은 다시 그것을 모르던 때처럼 살 수는 없다. 결코.

 

사랑 안에서든, 밖에서든, 누구도 모든 말들을 다 할 수는 없어서, 이 책이 있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내가 말할 수 있다. 내가 어떻게 무엇까지 말할 수 있게 되더라도 여전히 이 책은 존재할 수 있다.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을 겨냥한다면, 우린 모두가 이 책을 함께 읽어야 하고, 써야 한다.

 

 


41.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 유치환 : ~ 96

 

그게 있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교과서로 배웠던 시를 교과서 밖에서 만나는 일은 오묘한 느낌을 준다. 학창 시절 싫다고 싫다고 손사래 쳐도 지겹도록 달라붙던 그 아이를, 교복을 벗고 다시 만났는데 그 찰랑대는 숏컷하며, 봄빛 같은 분홍분홍 입술하며, 왼손으로 머리를 넘기는 자태하며, 우와, 얘를? 얘를 깠다고? 내가? 하게 되는 그런 느낌 비슷하달까.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그 비슷한 일조차 없었다…….

 

 

 

--- 읽는 ---

더 저널리스트: 카를 마르크스 / 카를 마르크스 : ~ 98

대량살상 수학무기 / 캐시 오닐 : ~ 123

쓰레기책 / 이동학 : ~ 138

철학이 필요한 순간 / 스벤 브링크만 : ~ 89

흑인 페미니즘 사상 / 패트리샤 힐 콜린스 : ~ 89

대도시의 사랑법 / 박상영 : 70 ~ 181

어느 작가의 오후 / 페터 한트케 : ~ 82

당신에게 베토벤을 선물합니다 / 임현정 : ~ 99

콜로노스의 숲 / E. M. 포스터 : ~ 124

에티카를 읽는다 / 스티븐 내들러 : ~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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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5 2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06 0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20-05-05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단순한 인간인지라 마카롱 하나에 무장해제되는 경험이 많아 syo님 글 읽고 죄송한데 빵 터졌어요. 그분.... 후덜덜 정말 무서운 사람인데요. 저도 주변에 아픈 사람이 있고 ˝나는 아닐거야˝가 얼마나 오만인지 경험으로 알기 때문에 이런 사람이 한편 부러우면서 세상 무섭습니다. --;; 사실 걱정하고 배려하고 준비하는 마음이라는 게 일면 그 이면의 아픈 경험이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아서.. 당사자로서는 참 괴롭지요. 압니다...

syo 2020-05-06 07:23   좋아요 0 | URL
역시 마카롱인가요. 좀 줄여야되는데..... 웬만하면 그러려니 그냥 넘어가는 사이지만 감염병 시즌에 저러니 빡치더라구요.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아무 일 없이 끝났지만 저러다 쟤 언제 한 번 크게 델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Angela 2020-05-05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삼님과 단짝인게 보여요~

syo 2020-05-06 07:24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지옥에서 온 우정

북프리쿠키 2020-05-05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는다는 게 수혈함에 빗댄 건 정말 공감합니다 ^^ 서울 공무원 하는 게 여간 쉽지 않지요. ? 연휴의 끝밤은 너무나 과롭습니다.ㅎ 건투를 빕니다!!

syo 2020-05-06 07:24   좋아요 0 | URL
쿠키님 감사합니다!! 피충전 마쳤으니 또 달려야겠네요...

비연 2020-05-06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을 다시 시작할 땐 스피노자군요. 한 권 푱 보관함에 넣습니다..

syo 2020-05-06 19:21   좋아요 0 | URL
스피노자가 최고죠..... 드루와 드루와요

라로 2020-05-06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로즈 마카롱!! 아니면 얼그레이,,,,이 글은 저를 무지 슬프게 해요...여기서는 도대체가 없는 것이 왜 이리 많은가요? 한숨 신세계 백화점에서 먹었던 마카롱이 떠오르는 아주 슬픈 글이에요. 그래서 스피노자도 슬프게 기억 될 것 같아요....

syo 2020-05-06 19:2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마카롱 하루 두 개씩 먹어야지 해놓고 한끼 두 개씩 먹어서 없앴어요....

2020-05-18 0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20 1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rabelle 2020-05-21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카롱을 좋아하시는군요 :) 프랑스도 마카롱은 비싸서 먹어본게 손에 꼽네요 리뷰 재밌게 읽고있어요. 힘내세요!

syo 2020-05-24 18:56   좋아요 0 | URL
네... 그냥 다들 좋아하는 분위기라서 저도 분위기 따라 좋아하는 것으로 스스로 착각하고 있는 것도 같고....
아무튼 비싸잖아요. 작작 먹어야겠어요.
Mirabelle님,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05-21 1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24 1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겠지

 

 

1

 

세상에 나온 날이 가장 늦은 책부터 읽어나가겠다고, 어느새 가득 차 있는 책장을 보며 생각했다. 새 책장을 들여놓은 게 2월쯤이었나. 품도 충분하고 깊이도 있어 책을 두 줄로 꽂아도 낙낙한 녀석이었지만…….



마음속에 약간의 성의만 있다면 아무리 난리 속이라도 반드시 진보할 수 있는 법이다너희들은 집에 책이 없느냐몸에 재주가 없느냐눈이나 귀에 총명이 없느냐어째서 스스로 포기하려 하느냐영원히 폐족으로 지낼 작정이냐너희 처지가 비록 벼슬길은 막혔어도 성인(聖人)이 되는 일이야 꺼릴 것이 없지 않느냐문장가가 되는 일이나 통식달리(通識達理)의 선비가 되는 일은 꺼릴 것이 없지 않느냐?

정약용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2

 

돈을 벌기 전에는 돈만 벌면 책을 잔뜩 살 줄 알았는데 막상 돈을 벌어보니 책을 사는 데 진짜로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시간이 없으면 욕구도 없다. 시간과 인간이 이렇게도 유기적인 관계로구나 싶은 요즘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열심히 일하는가그래야만 하는 이유일을 하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는 게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이유만이 신기한 것이 아니다그보다는 이런 상태에 맞서 더욱 적극적인 저항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하다.

케이시 웍스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열심히 일하는가? 


 

 

3

 

세상은 이제 더는 봄을 무시할 수가 없을 만큼 봄이다. 사무실 안이 훨씬 춥다. 공무원들은 점심시간을 최대한도로 사용하여 청사 앞뜰에서 광합성을 시도하고 있다. 사람들은 밝은 햇살 아래, 푸른 식물들 사이에, 그리 넓지 않은 벤치에 어깨가 닿을 듯 말듯 붙어 앉아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눌 때 제일 아름다운 것 같다. 미소가 볕에 녹아 한들한들 봄 공기를 헤엄치다가 KF94 마스크를 뚫고 타인의 들숨에 섞인다. 햇살에 버무려진 웃음은 금세 옮는다. 못 막는다. 그걸 막을 수 있는 필터가 있었다면 코로나 같은 건 진작에 작살이 났겠지.



풍부한 수목은 도로와 보행로를 편안하고 친근한 장소로 만든다그러면 보행자들과 이웃들은 자연히 바깥에서 사람들 틈에 섞여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며서로 만나는 횟수도 늘어나고 서로 대화의 물꼬를 트기도 한결 쉬워진다아이들은 실내보다 나무가 있는 거리에서 뛰어노는 것을 좋아한다여름이면 우거진 수목이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은 뜨거운 햇볕을 피할 수 있다대다수 사람들은 건물의 외벽만 줄지어 있는 거리보다 수목이 있는 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마즈다 아들리도시에 산다는 것에 대하여


 

 

4

 


노인은 천천히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그의 독서 방식은 간단치 않았다먼저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읽었다그리고 그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고역시 그런 식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이렇듯 그는 반복과 반복을 통해서 그 글에 형상화된 생각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음절과 단어와 문장을 차례대로 반복하는 노인의 책 읽기 방식은 특히 자신의 마음에 드는 구절이나 장면이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그는 도대체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달을 때까지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루이스 세풀베다연애 소설 읽는 노인

 

살다 보면 많은 골목길을 만나게 되고, 골목길을 지날 때는 그 골목의 길이와 폭과 밝기에 걸맞은 읽는 법이 있겠다. 어떤 날 어떤 분위기 속에서 어떤 기분으로 읽은 한 구절이, 버릴 것 없는 백만 단어로 채워진 두꺼운 책 한 권보다 멋진 독서의 경험을 안겨주기도 하는 것. 그저 그렇게 믿고 끝까지 읽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협소하고 조도 낮은 골목길을 지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한 권이 힘들면 한 쪽을, 한 쪽이 어려우면 한 문장을, 그마저 벅차면 하나의 단어라도 오래도록 질겅질겅 씹으며, 읽기의 턱 근육을 만들어가며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골목길의 끝점을 기다리는 것.

 

좋은 날, 오겠지.

 

 

 

--- 읽은 ---


39.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 손택수 : 67 ~ 132


그 볼에 내 볼을 맞대고 있던 그때 우리가 우리의 두 볼에 봄볕처럼 번져나가던 붉은빛이 붉은 줄을 깨쳐 알았더라면. 붉은빛은 지나간 기억 속에서 더욱 붉은 옷을 입고 깃발처럼 다시는 잡을 수 없는 손을 내밀어 오늘을 흔드는데, 붉은 줄 모르고 붉은빛을 만지던 어제의 우리는 그저 붉은빛의 안부를 묻는 것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는 오늘의 우리가 되었습니다.

 



--- 읽는 ---

사랑 밖의 모든 말들 / 김금희 : ~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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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0-04-30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일은 잘 쉬시고 계신지요?
좋은 날은 반드시 옵니다.

syo 2020-04-30 21:15   좋아요 1 | URL
ㅎㅎ 감사합니다. 내일은 출근합니다.
스타브로긴님도 좋은 휴일 보내시길 바랄게요

잠자냥 2020-04-30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왠지 지금 syo 님 처지같아 보이는데요! ㅎㅎㅎ

syo 2020-04-30 21:16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 다산쌤한테 혼꾸녕나는 기분

stella.K 2020-04-30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않아도 스요님 생각이 나더라니.
그렇죠. 2번은 절대 동감입니다.
하지만 일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 일이라는 것도 그렇더라구요.
하고 있을 땐 지겹고 도망치고 싶고 한데 지나놓고나면
새록새록 의미가 다르게 다가 오기도 하더군요.
고로 지금도 스요님은 나쁘지 않은 때를 보내고 있는 중일겁니다.^^

syo 2020-04-30 21:16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오랜만이네요 ㅎㅎㅎ
제가 알라딘 자체가 오랜만이네요.....
지나고 나면 알게 되는 것들은 지나기 전에는 절대 모르는 것들이라
저는 그냥 하루하루 열심히 버틸 뿐이네요^-^

2020-04-30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30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20-04-30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을 만들어 봐. 그러기 위해서 계획이 중요해. (<----언젠가 누군가 저에게 해 준 이야기! 그런데 세세히 체크 마크를 그리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아주 사소한 것부터 그렇게 하니까 시간이 조금씩 생기는 것 같아요.^^;;)
하지만, 토비 님은 또 저와 다르니까,,누군가 이딴 얘기 해주는 것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그저 버티기 잘하자구요, 우리!!^^

syo 2020-05-05 20:37   좋아요 0 | URL
이게 학업에서 커다란 성취를 달성한 라로님의 비결인가요.
공짜로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당 ㅎㅎㅎ

함께 열심히 버텨보자구요^-^

라로 2020-05-06 13:27   좋아요 0 | URL
제 비결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렇게 얘기해줬다니까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암튼, 저한텐 좀 먹히더라구요, 그 방법이.
암튼,,,같이 버텨봅시다!!^^

2020-05-06 1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06 1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08 1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망가자

 

 

1

 

문득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다- 고 써놓고 보니 거짓말이었다. 문득 도망가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라고 써야지 올바르게 말한 것이다. 사는 게 늘 그런 식이다. 입구에 들어서면서 출구를 확인하는. 퇴로가 없는 진입로엔 들어서지 않는.

 

들숨과 날숨의 횟수나 맥박수를 세는 일이 건강한 사람에게 별 필요가 없는 것처럼, 도망으로 끝나버린 일들의 횟수를 세는 것은 syo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넌 또 도망을 쳤구나- 하는 말 같은 건 아무렇지도 어떻지도 않았다. 넌 또 숨을 쉬었구나-

 

도망치는 일이 무책임하거나 부끄럽다고 여겨 본 일이 없다. 도망치지 않는 삶 같은 게 세상에 있을 거라고 믿지도 않는다. 내가 지금 도망치고 있음을 알거나 모르거나의 차이일 뿐. 숨을 쉬는 데에 숨을 쉬고 있다는 인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동거인 三의 경우를 보자. 업무 핑계를 댔지만 사실 그냥 괴롭히려는 마음으로 과장 놈이 에게 도를 넘는 말을 했을 때, 三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존엄을 외치는 마음의 소리를 외면한 채 꾹 참고 돌아섰다면, 그는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을 친 것이다syo의 경우도 있다. 둘이 합쳐 2인 가구 중위소득 기준보다 겨우 10만원 넘게 버는 젊은 부부의 신청은 부적합 판정을 내리면서, 재산이 10억에 달하지만 근로소득이나 사업소득이 없는 어느 노인에게 긴급생활비 지원 적합 판정을 내릴 때, 공무원으로서 당연하게도 규정에 따라야 하는 syo는 자기 내부에 오래 품어 둔 무엇인가로부터 도망을 친 것이다. 이런 도망들은 너무나 소소하고 빈번하여 도망으로 계산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다. 그런 사람들이나 syo나 다른 건 없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어떤 도망만은 치지 않기 위해 어떤 도망만큼은 쳐야 하는 것이니까.

 

이래저래 안타까운 일이 잔뜩인 세상이라, 점점 화내는 법을 잊어가고 있다. 여력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분노에도 에너지가 필요하니까. 건강한 사람이 분노한다. 지친 사람은 연민하고 고갈된 사람은 자기연민한다.

 



우주에서 보면 인간은 하루를 사는 곤충이나 길가의 이름 모를 풀과 다를 바 없다그러나 인간은 우주가 아니라 자기가 만든 세상에서 산다이름을 얻으려고 발광하다가 타인까지 질식시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드물지만 흔적을 지워 가며 사는 이들도 있다나 역시 미숙한 범죄자처럼 가는 곳마다 뭔가를 흘리고 다니지만나는 욕망한다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는 삶을.

정희진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사랑하는 동생아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어쩌면 우리의 자잘한 슬픔들을 농담처럼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른다어떤 점에서는 인류의 거대한 슬픔들까지도 말이다사태를 받아들이고 목표를 향해 돌진해야 한다현대 사회에서 우리 예술가들은 부서진 컵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빈센트 반 고흐반 고흐영혼의 편지

 

"변질된 가치나 가면이 벗겨진 환상은 똑같이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있고서로 비슷하게 닮아서 그 둘을 혼동하기보다 더 쉬운 건 없죠.“

밀란 쿤데라농담

 

 

2

 

이번 주에는 생일이 있었는데, 그날 하루만 12개의 기프티콘을 받았다. 대부분 커피였고 치킨도 있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고, 내 생일이건 니 생일이건 생일 같은 걸 크게 여기지 않는 스타일이라 예상조차 하지 못하다 얻어맞은 선물폭격이었다. 내가 참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똑같이 살아왔던 작년까지는 이런 일이 없었으니까. 그보다, 나도 베풀고 살아야겠구나 하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한두 개 받았으면 먹고 잊었겠는데, 이쯤 되니까 무시하기가 어렵다.

 

 

 

3

 

시력교정수술을 위해 매달 얼마씩 돈을 모아 보기로 했다.

 

 

 

4

 

6시에 일어나고 대충 21시쯤 집에 도착하는 패턴은 변함이 없다. 요즘은 일찍 자는 편이라 23시에는 일단 자리에 눕고, 누워서 책을 보든가 뭘 하든가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새벽을 건너 아침으로 순간이동이다. 읽으려는 마음은 여전한데 주어진 시간이 적다 보니 일단 읽다가 하품이 나온다? 그럼 바로 집어던지고 있다. 그랬더니 방 한 켠에 나동그라진 책들의 작은 산이 생겨났는데, 가관이다. 책이란 게, 이렇게까지 재미없는 것이었던가? 마르크스고 나발이고 확 다 불싸지르고 남은 재를 물에 태워서 삼키고 싶고 막 그렇고…….

 


요즘 고양이는 잘 울지도 않는다 사람을 별로 두려워하지도 않고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고 적절한 거리에서 노려보다가 등을 돌린다 너희도 내일이 오지 말기를중얼거리며 돌아다니는 거니물어 보고 싶은 밤이다 거대한 사상은 이미 내게는 골칫거리다 장식된 책들을 솔직히 다 불사르고 싶다 다 타고 남은 수북한 재를 모아두었다가 심심할 때 물에 타 마시고 싶다 방이 아닌 큰독 안에 들어가 웅크린 채 잠들고 싶은 밤이다 나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어 그 사람과 둘이 독 안에 들어가 웅크려 자는 것도 좋을 듯싶다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니지만 백 살도 넘게 살아버린 느낌은 뭘까

김충규내일이 오지 말기를 중얼거리는 밤이다부분 

 

  

--- 읽은 ---


37. 어떤 양형 이유 / 박주영 : 122 ~ 279

: 반드시 글을 잘 쓰게 해 주는 직업이라는 게 있긴 하겠으나, 어떤 직업이든 거기에 종사하는 이들 중에는 기막히는 글빨로 기죽이는 사람 꼭 있는 거 보면, 역시 글잘잘(글은 잘 쓰는 사람이 잘 쓴다).

 



38. 연애 소설 읽는 노인 / 루이스 세풀베다 : ~ 178

: 헛똑똑이들이 우글거리는 이놈의 문명사회에서 건질 것이라고는 오로지 연애소설뿐이다! 라는 컨셉까지는 아니지만.

: 책 읽는 방법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데가 있다. ‘뜨거운 키스라는 구절을 만난 우리의 주인공은 대체 어떤 게 뜨거운 키스인지에 대해 곰곰 생각하며 상상과 기억을 넘나드는데, 어쩌면 그런 게 읽기의 본령일지도.

: 그나저나 뜨거운 키스, 그건, 헤헤.

 

 

--- 읽는 ---

생각하는 마르크스 / 백승욱 : 155 ~ 241, 418 ~ 512



--- 갖춘 ---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 데이비드 하비

한 권으로 읽는 지젝 / 켈시 우드

라캉과 지젝 / 강응섭 외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 김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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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0-04-19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이스 세풀베다 아저씨 돌아가셨더라구요. 좀 놀라고 당황스럽고 코로나가 이런 건가 이렇게 무서운 건가 싶어서 잠시 당황했어요.

syo 2020-04-19 16:21   좋아요 1 | URL
헐...... 코로나로?? 전혀 몰랐어요.... 안 돼 세풀베다 아저씨...ㅜㅠ

페크pek0501 2020-04-19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빈센트 반 고흐와 동생 테오와의 관계를 잘 알 수 있는 영화를 티브이를 통해 봤어요. 슬프더라고요.
동생을 형처럼 의지하며 살았던, 오로지 그림밖에 몰랐던 고흐가 가여웠어요.

syo 2020-04-20 06:14   좋아요 0 | URL
‘영혼‘의 편지라는 제목이 붙어도 어색하지 않은 저 밀도 빽빽한 편지들이 대부분 테오에게 가는 걸 보면, 빈센트와 테오의 영혼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대단한 형제예요. 새삼 느낍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4-19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 37. 38.이 올해 읽으신 책의 의미라면, 그렇게 바쁘신데도 저보다 훨 많이 읽으셨습니다. ^^

syo 2020-04-20 06:14   좋아요 0 | URL
늘 말씀드리지만, 북다님의 독서밀도에 비하면 저는 책을 핥은 수준이지요^-^

2020-04-20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20 06: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0-04-20 0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스마일 라식... 뽐뿌.. ㅠㅠ 돈모아야지..

syo 2020-04-20 20:40   좋아요 0 | URL
저는 ICL렌즈 삽입을 노리고 있어서 어마어마한 돈을 모아야 합니다.....

공쟝쟝 2020-04-20 20:43   좋아요 0 | URL
눈 많이 나쁘시구나 ㅠㅠㅠㅠ 마니 모아요... 지인할인 꼭 하시구 ㅋㅋㅋ

라로 2020-04-20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아니 벌써, ˝분노에도 에너지가 필요하니까. 건강한 사람이 분노한다. 지친 사람은 연민하고 고갈된 사람은 자기연민한다.˝ 이런 것을 깨달으면 어떻게 해요!! 아이참 ㅠㅠ

2.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어쩌면 우리의 자잘한 슬픔들을 농담처럼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 글 제 친구에게 문자로 보내준 글귀인데!!

3. 라식 수술, 너무 늦지 않게!! ^^



라로 2020-04-20 07:54   좋아요 0 | URL
아참! 1번 댓글 괜히 맘 상할까봐~~.^^
제가 애정하면 이렇게 엄마본능이 나온다는요.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내가 뭐라고 이런 말을....후회, 반성)

syo 2020-04-20 20:41   좋아요 0 | URL
1. 응? 기분 나쁠 포인트가 하나도 없는데요? ㅎㅎㅎㅎㅎ 좋기만 하다.

2. 반 고흐 저 사람 그림도 그림이지만 글도 만만찮죠? 예술은 결국 어딘가에서 만나는 것인가요.

3. 고도근시라 라식은 좀 어렵고, 렌즈삽입술 생각하고 있어요.

2020-04-20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양형 이유 읽으면 와 진짜 글 잘쓴다.. 이 생각이 절로 들더라고요.. 역시 짬바..

syo 2020-04-20 20:42   좋아요 0 | URL
짬바...... ㅎㅎㅎㅎㅎ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라기보다는 그냥 원래 잘 쓸만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ㅎ

감은빛 2020-04-20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바쁜 일상에서도 책을 읽고 글을 쓰시는 군요. 멋져요!

요 위에 라로님께서 쓰신 댓글과 비슷한 어떤 느낌을 받아 한 마디를 쓰려고 했으나,
이미 라로님께서 쓰셨으므로 저는 그냥 지나가렵니다. ^^

늦었지만 생신 축하드립니다!
생일에 기프티콘을 받는 것도 이 시대의 사회현상이 아닌가 싶어요.
이젠 생일 선물을 메신져로 주고 받는 시대라니,
옛날 사람인 저로서는 적응하기 쉽지 않네요.
2주 전쯤 생일이었던 후배 녀석 하나도 그날 받은 기프티콘을 보여주던데,
그 종류도 그 숫자도 엄청나더라구요.

syo 2020-04-20 20:43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좋은 세상입니다. 부피도 무게도 없는 기프티콘인데 핸드폰에 넣어 다니면 뜻밖에 든든해요.

별로 열심히 읽고 쓰지 않는 요즘이라 민망하네요. 으하하하

AgalmA 2020-05-14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일 단상이ㅎㅎ;
작년에는 우연히 모두 깜빡한 거고 그것 땜에 올해는 각성 효과가 있었다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syo님이 그리 생각하실리 천부당만부당ㅎ;
늦었지만 생일 축하드려요^^ 내년엔 더 무시 못할 애정의 선물 많이 받으시길🎂

syo 2020-05-20 18:40   좋아요 0 | URL
대댓글을 일주일 만에 달았어.....
아갈마님 잘 지내시죠?? 봄이 막 사라지고 있어요. 누리소서.

다락방 2020-10-22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양형 이유 땡투했어요~ *^^*

syo 2020-10-22 14:31   좋아요 0 | URL
^ㅂ^/ ㅎㅎ
 

 

Walk, Walk, Cherry Blossom

 

 

꽃과 나무와 새 이름을 많이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으므로 그런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쪽으로 방향을 고쳐잡았다. 이건 철쭉이야. 확실해. 그런 확실함이 퍽 사랑스러운 걸 보니 봄은 봄인가 봄. 하늘하늘 떨어지는 벚꽃잎을 움켜잡으면 보고 싶던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

 

었으면 좋았을 뻔했지만, 그 반대여도 좋았다. 보고 싶던 사람을 만나면 하늘하늘 떨어지는 벚꽃잎을 움켜잡을 수 있게 된다-는 식으로. 손바닥을 펴자 벚꽃잎은 다시 하늘하늘 다른 친구들과 합류했다. 계속 지켜보고 있었지만 떨어지는 벚꽃잎이 워낙 잔뜩이라 왼손을 뻗어 잡았던 애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내 오른손을 잡고 이 길을 함께 걷는 애가 누군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건 너무나 확실해서, 마치 철쭉처럼 확실해서 차마 모를 수가 없었다. 벚꽃 가득한 길 위에서 봄을 모를 수가 없는 것처럼, 도무지 모를 수가 없는 두 마음이 나란히 손잡고 자박자박 봄을 걷고 있었다.

 

 

 

--- 읽은 ---


35.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 정희진 : 177 ~ 253

: 쓰는 데 이유가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당신은 왜 쓰십니까- 하고 누군가 물어준다는 것, 그런 물음에 대한 답을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은 벌써 멋있다. 지지 않으려고 쓴다는 표현도 좋다. 이기려고 쓴다는 말보다 뻐기지 않고 아름답다. 이기고 싶은 욕심은 없지만 지고 싶지는 않은 사람들잔뜩인 세상이다. 이기는 법보다 지지 않는 법이 훨씬 탐난다.



 

36. 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 / 이현우 : 300 ~ 466

: 무언가에 빠졌지만 죽지 않으려는 태도에 대해서 생각했다. 우리는 무언가에 깊이 빠졌을 때 그것에 관해 말하고 쓰고 세상에 알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너무 깊이 빠진 사람이 그 안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서 하는 일 역시 그것에 관해 말하고 쓰고 세상에 알리는 일인가 보다. 뒤집어 생각하면 쓰는 이유는 여기에도 있는 것이다. 어딘가에 바닥없이 빠져들기 위해, 동시에 그 안에서 숨 쉴 공간을 열어두기 위해.

 

 

--- 읽는 ---

어떤 양형 이유 / 박주영 : ~ 122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 손택수 : ~ 67

생각하는 마르크스 / 백승욱 : ~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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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9 05: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9 07: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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