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ring, forsythia and the baby baby bear

 

 

 

1

 

한껏 멍청하게 지내느라 눈치 못 채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 2020년이 이제 스무 밤 남짓 남았다.

 

최근 날이 추워지면서 등이 자꾸 가려운 게 이슈였다. 그딴 게 핵심 토픽이라니? 그 옛날, 서른을 눈앞에 둔 1211일의 syo는 무슨 생각을 했었던가. 서른이었다. 온통 서른이었다. 서른셋을 앞에 놓고는 무엇으로 겨울밤을 활활 태웠는가. 삼땡이었다. 모든 게 삼땡이었다. 그때는 그래도 한 살 한 살 늙어간다는 게, 앞자리가 바뀐다든가, 초반이 중반이 된다든가 하는 것들이 연말 이슈였다. 크게 봤을 때 올해는 전반적으로 망했군. 그래도 크게 봤을 때 전반적으로 망해서 다행이지, 전반적으로 봤을 때 크게 망한 거였으면 어쩔 뻔했어. 수고했어, 수고했구나, 나여. 내년에는 또 어떻게 망할지 미리 잘 생각해놓고, 망해도 부드럽고 계획적으로 망하자. 뭐 이런 깜찍한 다짐 유사품들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syo는 날갯죽지와 죽지 사이의 손 닿지 않는 부위에 어떻게 하면 바디로션을 바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뇌에 사로잡혀, 한 해 반성이나 내년을 위한 계획 수립 같은 소소하고 수수한 일들에 관심을 가질 틈이 없는, 그런 인간이 되고 만 것이다…….

 

 

 

2

 

오늘 또 하나 배웠는데, syo는 장작 타는 소리를 오래 들으면 자는 동물이었다. 지금 유튜브 공부 채널을 점령한 최신 츄-렌드가 바로 장작 타는 소리 ASMR이라서 그걸 들으며 공부를 했던 것인데, 한 며칠 아 봄날 개나리 아기곰도 아니고 왜 이렇게 졸아대나, 이상하다 이상하다, 했더니 그게 다 장작 의 범행으로 밝혀진 것. 이쯤 되니까, 장작 소리 틀어놓고 라이브 방송으로 공부하는 저 사람들이 마치 괴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안 존다고? 타탁 탁 타닥 하는데 안 졸아? 타다닥 탁 탁 타다다타닥 탁 타다…… , 입으로 장작 소리 내며 쓰다가 졸 뻔했다. 혹시 이거, 자기들은 도저히 잠들 수 없는 트렌디한 지니차트 TOP 200 이런 거 듣고 있으면서 구독자들한테는 장작 소리 들려줘서 재우는 수작 아냐, 이거? , 이렇게까지 한다고, 이 장작범들아.

 

그렇게까지야 하겠냐. 그냥 syo가 문제인 듯. 내가 봄날 개나리 아기곰이다…….

 

 

 

 

--- 읽은 ---



241. 보통의 언어들

김이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

 

나한테 처음으로 김이나라는 방송인의 존재를 알려줬던 친구가 누구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말 잘하는 예쁜 누나라고 설명해준 거 보면 사내놈이었는데, “말잘 + 예쁜 + 누나 = 사랑해요방정식은 내가 아는 모든 놈들에게 A+ B + C = 180수준의 진릿값을 가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서, 당최 누가 저 말을 했던 건지 모르겠다. ……설마, 난가?

 

나였다면 아마 준-덕질 급의 정보검색 정도는 했을 텐데, 별로 아는 게 없는 걸 보니 나는 아닌 듯. 이렇게까지 글을 잘 쓰는 사람일 줄은 몰랐거든. 생각해보니까 몰랐던 게 더 이상하군. 글로만 밥 벌어도 노후가 든든한 정말 극소수의 사람 중 하나일 텐데. 어쨌든 아마 나였다면 말 잘하고 예쁘지만 글은 더 잘하고 더 예쁜 누나라고 했을 것도 같다.

 

다종다양한 글쟁이들 가운데서도 작사의 길을 오래 걸은 사람이 획득하는 선명한 강점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라면,


나는 가끔 세상의 모든 형용사들이 가진 기가 막힌 표현력에 감탄하게 되는데, 이는 주로 발음에서 온다. '-'하고 말할 때 ㄴ받침을 부드럽게 도움닫기 삼아 '' 하고 내뱉는 발음은 무언가에 빛이 닿아서 튕겨 나오는 모습 그 자체인 것 같고, 찬란하다는 말의 실제 발음인 '-'''의 받침 ㄹ과 ''의 자음 ㄹ이 파도 능선처럼 이어지는 기분이 들어 앞서 비유했던 것처럼 햇살이 닿은 물결의 느낌인 것이다. 게다가 '-' 하면서 시작되는 첫 음절은 퍼져나가는 빛이 혀에서 구현되는 착각이 들지 않는가.


, 들어요. 든다구요. 진짜로!

 

내가 오래오래 지내고 싶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저 말이었던 것 같다실망시키는 데 두려움이 없기를 바란다는더 솔직히 말하자면나는 높은 확률로 당신을 실망시킬 테지만 우리 평균점을 찾아가보지 않겠냐는 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인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다하지만 역으로 말하면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인 소수와의 관계는 견고한 것이다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고서는나는 누군가와 진실로 가까울 자신이 없다우리마음껏 실망하자그리고 자유롭게 도란거리자.

 

김이나보통의 언어들 

 

  


242. 도시로 보는 유럽사

백승종 지음 / 사우 / 2020

 

죽기 전에 유럽을 갈 수 있을까. 그거 한 번 가는 거 별것 아닌 것 같아보여도 진짜로 별것 아니었다면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살면서 한 번은 가봤겠지. syo는 아직 여권도 없는 오랑캐다……. 매번 책으로 이렇게 먼 타국의 도시를 만날 때마다, 분노가 치민다. 특히 사진 별로 없는 에세이가 마음을 끄는데, 사진 많은 에세이는 겁나 뽐내는 것 같아서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버리겠다는 자세로 읽게 되고, 사진 아예 없는 에세이는 선생님 이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싶고 그렇거든. 그런데 이 책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까지 왠지 평온한 태도로 일관할 수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뭘 뜻하는 건지 모르겠다. 좋았던 거야, 아니었던 거야?

 

과거의 슬픈 흔적을 깨끗이 지우는 일을 나무랄 수도 없으나꼭 잘한 일이라고만 보기도 어렵다상처도 남겨두면더러는 약이 되는 법이다싹 쓸어낸다고 뭐가 근본적으로 달라지는가역사란 아픔을 끌어안고 제 길을 가는 사람에게만 축복이 된다.

백승종도시로 보는 유럽사

 

 

 


243.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이규리 지음 / 문학동네 / 2014

 

2회독인데, 읽기 시작하던 날 알라딘에 이규리 선생님 성함을 때려 넣었는데 이 다음 시집이 없었다. 이 책이 2014년 출판이니 이제 7년이 다 되어가건만 왜 최선을 다해주지 않으신 거예요, 선생님- 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닦으며 돌아섰는데, 지금 이 글을 쓰며 검색했다가 10일자 출간된 선생님의 새 시집 <당신은 첫눈입니까>를 발견했다. , 바로 알아버렸다. 그러니까 이거 사라고 알라딘에서 나한테 적립금 2만원을 쾌척한 것이었음을. , 모아놨다가 민사소송법 다음 판 나오면 보태서 사려고 했지만, 지금 이 마당에 민사가 문제겠냐 소송이 대수겠냐.

 

 

  잘려나간 꼬리는 얼마간 움직이면서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포식자의 시선을 유인한다 하네요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외롭다는 말도 아무때나 쓰면 안 되겠어요

이규리특별한 일」 부분

 

 

 


244. 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지구의 과학

신규진 지음 / 생각의길 / 2018

 

이 시리즈를 몇 권 읽으며 매번 했던 말(“잘 잤다”)이 식상할 때가 되었기에 더는 이 겁 없는 제목을 단 책들을 읽지 않겠다 다짐했건만, 어찌 된 일인지 운명처럼 이 책을 만나버렸다! 라고 쓰면 이 책이 정말 재밌어서 잠 못 들기라도 했다고 오해하시겠지. 그 정도는 아니었고, 때마침 잠 못 드는 밤에 읽었는데 읽다가 잠이 드는 일은 없었다- 수준입니다. 그래도 꽤 재미있게 쓰려고 노력했고, 쉬우면서 알이 꽉 찼다. 거물급 지식이 들어있는 책은 아니지만 이 분야 꼬꼬마들에게 권할 만하다.

 

3월 21잠에서 깨어보니 황당하게도 당신은 사방이 온통 회벽인 방에 갇혀 있었다방에는 고양이가 드나들 만한 작은 창이 하나 뚫려 있는데 햇빛이 잘 드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남향 창이다문 밖에는 검은 터번을 두른 사람들이 AK소총을 메고 보초를 서고 있다몰래 탈출하는 건 꿈도 못 꾼다그들은 무전기를 이용하여 어딘가와 교신하며 협상을 하고 있었다아마도 당신은 포로가 된 모양이다어찌 하면 좋을까?

신규진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지구의 과학

 

 

 


245. 질문하는 법

윌리엄 고드윈 지음 / 박민정 옮김 / 유유 / 2020

 

최초의 아나키스트윌리엄 고드윈은 한때 젊은 syo의 아버지였다. , 아부지. 말씀의 힘으로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셨도다. syo 고드윈으로 개명을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순간이 있었다. 그러니까 프랑켄슈타인를 쓴 메리 셸리는 syo의 누나가 될 뻔했고, 여성의 권리 옹호의 저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우리 엄마가 될 뻔한 것. 그러나 그 당시에는 메리들을 전혀 몰랐고. 그야말로 철없는 무정부주의자 시절이었다. 무정부주의적 글을 써서 syo의 심금을 울렸지만 사실은 사방팔방 온갖 글을 다 쓰고 다니던 지식인 고드윈은, 역시 교육 쪽으로도 나팔 꽤나 불었던 모양이다. 아동 문학출판사도 차리고 어린이 책도 많이 썼다고. 최초의 아나키스트는 사실 18세기 영국판 김소영 선생님 포지션이었던 것인가.

 

책은 인간에게 가장 훌륭한 모든 것을 모아 둔 보물창고다문학은 모든 방면에서 인간과 동물계 사이의 거대한 경계선을 형성한다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의 손이 닿는 범위 안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그저 원하기만 하면 된다그러면 올바른 판단에 필요한 모든 종류의 지혜와 행동할 힘을 스스로 얻게 될 것이다.

윌리엄 고드윈질문하는 법

 

 

 

 

--- 읽는 ---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혼자 있기 좋은 방 / 우지현

그림으로 이해하는 현대사상 / 발리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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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1 0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13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0-12-11 0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라고요? 이규리 신간이라고요? 저는 갑니다, 사러, 시집을...

syo 2020-12-13 22:22   좋아요 0 | URL
- 라고 댓글을 다신 다락방님께서 그 시집을 다 읽었을 법한 때에 와서야 대댓글을 달았네요....

단발머리 2020-12-11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날 개나리 아기곰님! 팬입니다! 2020년의 아쉬운 날들 아기곰님 글 읽으며 달래고있어요. 감사합니다!

syo 2020-12-13 22:23   좋아요 0 | URL
요새 몸매가 점점 곰처럼 되어가고 있는데 이게 다 겨울이랑 코로나 탓이네요!
건강 조심하세요. 하루 1,000명 나온다....

2020-12-11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13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14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14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20-12-11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의 기술 예전에 읽지 않았어요?? 그냥 인용만 하셨나?? 책을 넘 많이 읽으시니 이 책이 가책 같고 그 책이 이 책 같고,, 늙은이 헷갈려요!!🤣🤣🤣

syo 2020-12-13 22:26   좋아요 1 | URL
사랑의 기술 10년쯤 전에 읽었어요. 사랑 잘 하려고.
어른들 말씀에 그런 게 있잖아요. 사람이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행복한책읽기 2020-12-11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syp님의 독서량은 범접 불가네요.^^ 이규리 신작 소개 감사요.^^

syo 2020-12-13 22:27   좋아요 0 | URL
으하하하하하 1일 1권도 안되는데 뭐가 범접불가겠어요.
손만 슬쩍 내밀어보세요, 바로 syo 싸다구에 닿습니다^-^

Angela 2020-12-12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의 어휘력이란...

syo 2020-12-13 22:28   좋아요 0 | URL
봄날 개나리 아기곰?? ㅎㅎㅎ 그것들을 한 그림 속에 넣고 상상하면 되게 귀엽죠.

유부만두 2020-12-12 0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등 간지러울 땐 목욕탕 이야기가 좋은데요. 책으로 등을 긁으시면 안되고요. ^^;;;;

syo 2020-12-13 22:28   좋아요 0 | URL
<아무튼, 목욕탕> 말씀이신가요? ㅎㅎㅎㅎ 그렇잖아도 슬슬 읽어볼까 하던 참이었는데!

scott 2020-12-14 15:15   좋아요 1 | URL
유황탕 추천, 추천ㅎㅎㅎㅎ

scott 2020-12-14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요님에 날개 죽지 그중간을 긁을수 있는 효자손 弌
(っ‘-‘)╮=͟͟͞͞.
곁에 두고 가요 ㅋㅋ

syo 2020-12-16 01:20   좋아요 0 | URL
오오, 되게 시원해보이네요!
던지신 거 맞죠? 잡아챘어요, 후후.
ㅋㅋㅋㅋㅋㅋ 저런 귀여운 얼굴 구사하시는 분이 알라딘에 블랙겟타님 말고 또 있었군요!

독서괭 2020-12-14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음포인트가 많은 글이예요. 봄날개나리아기곰 상상되어 너무 귀엽네요ㅎㅎ 전 예전에 독서실만 가면 그렇게 졸아댔는데ㅋ 컴컴하고 조용하니 자라는 거 아닌가.. 장작 타는 소리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아요.

syo 2020-12-16 01:21   좋아요 0 | URL
장작은 아예 멸종시켰습니다.
저런 소리 말고, 진짜 불멍때리고 싶긴 해요. 모닥불 앞에서 담요 뒤집어 쓰고 손에는 코코아 들고 눈 내리는 거 보면서.....
 

 

푸코는 읽기 싫다

 

 

 

1

 

잘난 척을 좀 줄여야 할 텐데 걱정이다. 아는 건 쓰고 모르는 건 삼키면 되는데 애매하게 아는 애가 애매하다. 아는지 모르는지조차 애매한 애는 더하다.

 

 


스스로를 가끔 천재가 아닐까라고 의심해볼 때가 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인데, 천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_ 안녕하신가영, 언젠가 설명이 필요한 밤 


우리 머리는 교향곡을 작곡하고 도시를 계획하고 상대성이론을 생각해내지만, 가게에서 포테이토칩 하나를 살 때도 무슨 종류를 살지 족히 5분은 고민해야 겨우 결정할 수 있다.

_ 톰 필립스, 인간의 흑역사




2

 

좀 오래 버텼다 싶으면 제일 먼저 봉기하는 것은 항상 눈이다. 판례를 읽는데 슬슬 플로우가 꼬이고 자꾸만 읽었던 줄을 다시 읽기 시작하면 나는 바로 방에 들어가서 타이머 30분 맞춰놓고 잔다. 30분도 못 채우고 서둘러 깨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러고 나면 꼬였던 뇌는 대충 풀리는데 뻑뻑한 눈은 그렇지가 못하다. 선봉장이 끝판대장질까지 하는 것이다. 천하에 고집스런 구슬 같으니. 약을 먹든지 채소를 먹든지 하여간 얘한테 뭔가를 해줘서 좀 달래야 할 것 같다. 그런 나이가 되었구나. 어허허허.

 

 

 

3

 

새벽 한 시에도 불 켜진 집이 많은 동네다. 주인 끌고 산책하는 멍뭉이도 있고, 족발을 싣고 달리는 라이더도 있고, 옥상에서 뒷짐 지고 음악 듣는 수면바지 차림의 중년 백수도 있다. 면도는 이틀에 한 번꼴로 하는 모양이다.

 

단무지처럼 생긴 달이 크게 밝아도 별이 다 보인다. 멀리 산등성이에서 주기적으로 반짝대는 저 붉은 점 세 개는 우리 집 정수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그 비행기들이랑 관련 있겠지. 추워서 오래는 못 버티고 계단을 다다다 내려가는 중년 백수의 뻐근한 눈은 밤공기 그거 약간 발라줬다고 차도가 있다.

 


 

4

 

요즘 유튜브 덕을 톡톡히 본다. study with me(스윗미라고 하던데)라고 때려 넣으면, 어쩐지 힙해 보이는 시계와 귀여운 가습기를 구비한 파스텔톤의 우아한 방에서 공무원 준비하는 아가씨가 한국사 공부를 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클래식 음악을 배경으로 깔아주는 추세는 물러가고 요즘은 장작 타는 소리가 트렌드인 듯. 스윗미 채널은 요즘 유행하는 먹방이랄지 몰카랄지 일상 엿보기랄지 하는 콘텐츠가 관음적 욕망을 건드리는 것과 정반대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그러니까, 공부하다 딴짓하고 싶을 때 눈앞에서 불이라도 붙일 기세로 노트에 볼펜을 비벼대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급속 자아성찰 모드에 돌입하게 되고, 무의식중에 마우스로 향하던 손가락이 부끄러이 유턴하여 다시 볼펜을 잡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옆에 뜬 채팅창에다가 인간인지 로봇인지 모를 누군가가 공부 관련 명언 1~50을 자꾸만 올려주는데, 겁나 식상한데 식상해서 더 상처다. 청년은 늙기 쉽고……. 허윽.

 

그런 과정이 몇 차례 반복되면 이내 내가 쟤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쟤가 날 보고 있다는 인식이 형성되는데, 마침내 그 인식의 내면화까지 성공한다면 이제 푸코의 규율 권력 메커니즘이 작동하면서 나는 자발적으로 나의 간수가 되고 동시에 기쁜 마음으로 나의 죄수도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무시무시하게 스윗하다 스윗미.

 

syo가 간수로 즐겨 채택하는 사람은 동그란 모범생 안경을 써도 어쩐지 귀염상에 쉬는 시간마다 푸시업도 착착 해내는 당찬 여성 유튜버보다, 오전 9시 방송 시작할 때는 깔끔하던 코와 입 주변이 23시 방송 종료 직전에는 시꺼매지는 semi-아저씨(그래도 syo보다 어린) 유튜버다! 왜 모자를 쓰냐고 누가 물었나 본데 대답은 탈모를 가리기 위해서라고……. 이보시게 젊은이…….

 

 

 

5

 

7만원짜리 민법책이 출발했다는 소식이다.


두둥

 

 

 

--- 읽은 ---


 

237. 나는 수학으로 세상을 읽는다

롭 이스터웨이 지음 / 고유경 옮김 / 반니 / 2020

 

송파 강동 일대를 주름잡던 과외 선생으로 활동하던 시절, 아이들에게 syo가 가장 많이 했던 대사는 , 이거 수학 아니야. 산수지.”였다. 신랄하고 괴랄한 말이 아닐 수 없다. 표면적으로는 이것도 못 푸냐는 뜻이지만 말을 굳이 저렇게 해 버리면 아이도 기분 상하고, 산수 취급받은 수학도 기분 나쁘고, 산수는 내가 뭐 어때서! 하며 빡치는 것. 어쨌든 저 말에 깔린 전제는 수학 >>>> 산수인 것인데, 과연 어디서부터 수학이고 어디서부터 산수일까? 산수와 수학의 국경선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이 책이 실은 산수 나라 국민이라는 건 명확히 알겠다.

 

근데 세상을 읽는 방법이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구만 이노무 세상 왜 나한텐 하나도 읽히지를 않는 걸까?

 

단지 퀴즈 쇼와 같은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 때문만은 아니다우리는 계산기나 인공지능 장치가 없어도 어림 계산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왜 그럴까?

  그 주체가 사람이든 컴퓨터든우리 앞에 등장하는 모든 정보에 도전할 수 있도록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모든 계산과 결정을 컴퓨터에 맡기면 우리는 기술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롭 이스터웨이나는 수학으로 세상을 읽는다

 

 


 

238. 뉴욕스케치

장자크 상페 지음 / 정장진 옮김 / 열린책들 / 2018

 

서울 생활이 뉴욕 생활보다 덜 척박한 것은 아니더라. 슬프다. 이렇게 말해놓고 나니까 꼭 뉴욕에 살아본 것 같네. 큰 도시는 무조건 좋아하는 syo지만, 뉴욕살이 재미없겠다.

 

심프슨의 아파트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너무나 멋지더군. <이 집이 내 집이라면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이 반짝거리는 황홀한 야경만 바라보면서 살 것 같군.> 마이클이 내 말을 받았네. <바로 그게 내 문제야.>

장자크 상페뉴욕스케치

 

 

 


239. 휴식의 철학

애니 페이슨 콜 지음 / 김지은 옮김 / 책읽는귀족 / 2018

 

아무것도 안 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거창하게 가르쳐 주는 책이다.

 

약간 이런 느낌이다. 자연의 섭리! 자연의 섭리대로만 하면 돼! 자연의 섭리가 뭐냐 하면, 그대로만 하면 되는 바로 그것이 자연의 섭리야! 좋은 말이고 옳은 말인데, 뜻밖에 실용적인 부분도 없지 않은데, 말투가 사짜 같아서 문제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바로 완벽한 자연의 섭리에 불응하면서 병이 생겼다그러니 이 섭리를 꾸준히 성실하게 따르면 다시 건강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자연은 더없이 친절하다그러므로 우리는 가야 할 길을 1할만 가면나머지 9할은 자연이 돕는다항상 자연은 어디 끼어들 틈이 없을까노심초사하면서 우리를 지켜본다그러다가 아주 살짝이라도 우리가 자연을 향해 몸을 돌리면 곧바로 우리 손을 덥석 잡는다그런데 우리는 자연의 단순한 법칙을 받아들여서 묵묵히 그 완벽한 길을 걸어가지 않는다인위적인 수단을 써서 보다 빨리 자연스러운 상태로 돌아가려고 무리수를 둔다그러다가 도리어 자연으로부터 더 멀어지고 있는 셈이다.

애니 패이슨 콜휴식의 철학

 

 


 

240. 동네의사와 기본소득

정상훈 지음 / 루아크 / 2020

 

개인으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지역 주민으로서, 동네 의사로서 실제로 만나고 접한 다양한 사람들과 그들이 겪는 어려움을 먼저 밑그림으로 그려놓은 다음, 기본소득이 그 해답이 될 수 있다는 견해로 전체 그림을 완성한다. 이런 구성은 실체감 있어서 좋다. 장판에서 푸코 읽기가 푸코 (개론서로서도 나쁘지 않았지만) 훌륭한 책인 이유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현실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현실에 개념을 비비기 때문이었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처음 깨닫게 된 이후 기회가 될 때마다 언급하고자 다짐한 거라서 한 마디 덧붙이자면, 출판사 <루아크>는 진짜 내 맘에 쏙 드는 책들을 많이 만든다.

 

이 책은 기본소득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려고 쓴 책이 아니다그것은 내 역할이 아니며본격적인 이론서는 국내에 꽤 여러 권 나와 있다그런데도 책을 내기로 마음먹은 것은 나름의 욕심 때문이었다아직 기본소득은 사람들의 운동이라기보다는 이론가나 정치인의 주장에 머물고 있다제도나 정책 하나 바뀐다고 좋은 세상이 올 리는 없다기본소득도 마찬가지다정책은 도입되고 실행되는 과정에서 쉼 없이 타협과 왜곡을 겪는다사람들의 운동이 없다면 제도는 본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뒷걸음질 치는 것이 보통이다나는 이 책에서 기본소득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주변 사람들 그리고 진료실에서 만난 사람들의 삶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보여주려 한다사람들의 이야기만큼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상훈동네의사와 기본소득

 

 

 

--- 읽는 ---

언젠가 설명이 필요한 밤 / 안녕하신가영

도시로 보는 유럽사 / 백승종

질문하는 법 / 윌리엄 고드윈

유행의 시대 / 지그문트 바우만

몸의 일기 / 다니엘 페나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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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0-12-08 15: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준호 민법강의면.. 힘든 공부 하고 계셨네요. 합격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syo 2020-12-08 18:04   좋아요 0 | URL
도착했는데, 밀도가 어마어마하네요 으하하하...

stella.K 2020-12-08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민법 강의가 7만원대라닛! 살 떨리네요. ㄷㄷㄷ

syo 2020-12-08 18:04   좋아요 0 | URL
제가 사본 한 권짜리 책 중에서는 제일 비싼 것 같아요 ㅎ

다락방 2020-12-08 15: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안녕하신가영 이 내가 아는 그 안녕하신가영 이군요! 언젠가 설명이 필요한 밤... 오늘 퇴근할 때 그 노래 들어야겠다. 언젠가 설명이 필요한 밤~
난 이 노래 좋아해요.

우리는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기 위해서
어느 날 불 같은 사랑을 했고
잊을 수 없어 매일 울었고
우리는 또다시 한번
더 남이 되지 않기 위해서
적당한 사랑을 해야 해서 슬펐고


적당한 사랑이 아니라도 슬퍼...(흑흑 울며 뒤돌아 뛰쳐나간다)


이 방에 오신 분들께 들려드립니다.

https://youtu.be/GG6VP77uv1w

syo 2020-12-08 18:05   좋아요 0 | URL
매번 무슨 준비된 사람마냥 슬퍼요 ㅋㅋㅋㅋㅋㅋ
무서워서 가수 이름, 노래 제목 입에 올리지를 못하겠네!
흑흑 울며 뒤돌아 뛰쳐나갈까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0-12-08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아크 어감 좋다 루아크 루아크

syo 2020-12-08 18:06   좋아요 0 | URL
루아크 루아크 루앜 루앜 뢐 뢐

2020-12-08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08 1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몰리 2020-12-08 16: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눈편한 에센셜. 효과 있습니다!
스포츠 리서치에서 나오는 블루베리 60정짜리, 이것도 효과 있어요.
이 둘을 같이 먹으면서 노안 도래를 막고 있는 1인.

다락방 2020-12-08 16:20   좋아요 1 | URL
이미 노안이 와버린 사람에게도 효과 있나요? ㅜㅜ

몰리 2020-12-08 17:07   좋아요 0 | URL
효과 있다 쪽!
저도 이미 온 (안경 맞추려고 심각히 고민하던) 시점에서 먹기 시작했는데
거의 바로 효과 보기 시작. 둘 다 강추! 눈편한 에센셜만으로도 눈은 편해지는데
그래도 스포츠 리서치 블루베리도 강추! 블루베리는 족저근막염 등 하여튼 갱년기...; 증상완화에
탁월합니다.

다락방 2020-12-08 17:09   좋아요 0 | URL
갱년기요? (메모메모..)

syo 2020-12-08 18:07   좋아요 0 | URL
신뢰의 내돈산 몰리 약국!
3통에 4만원이네요. 장바구니에 담았다.

다락방 2020-12-08 18:36   좋아요 0 | URL
뭐라? 나 왜 한 통에 19,900 원 주고 샀어? 😱

몰리 2020-12-08 18:43   좋아요 0 | URL
눈편한 에센셜은
syo님이 산 거 같은 딜 (2+1 등등), 지마켓 같은 데서 (쿠팡엔 없는 듯)
찾으면서 지마켓 스마일 ㅎㅎㅎ 회원이면 쿠폰도 쓰고, 글고 또 가끔
핫딜로 뜨기도 해요 그럴 때 좋은 가격으로 왕창. 저는 이젠 막 9개월 어치씩도 삽니다.
없으면 안되게 되었어요.

스포츠 리서치 블루베리도
불면증부터 하여튼 갱년기...; 갱년기에 격화할 수 있는 증상들 완화에 효과가 있어서
쟁여두는데, 이건 쿠팡에서 로켓직구 6만원당 1만원, 10만원당 2만원 할인 등등의
쿠폰이 자주 나와요 (2달에 한 번은 나오는 듯?). 그 때들 사셔야 합니다.

그때 블루베리만 사는 게 혹시 꺼려진다면
삼부콜 엘더베리 오리지널 포뮬러. 이게 또 명약입니다. ;
이걸 꼭 드셔보셔야 해요. 면역력 강화!
플레인 요거트에 섞어서 드시면 감기, 모르고 산다니깐요.

다락방 2020-12-08 19:09   좋아요 0 | URL
몰리님 지금 네 명이 한꺼번에 세병씩 구매했다는 소식 알려드려요..

syo 2020-12-08 19:12   좋아요 0 | URL
몰리님 눈편한에센셜 회사에 전화하셔서 커미션 받으세요. 증빙자료는 저희가 쏴드릴 수 있습니다....

몰리 2020-12-08 20:01   좋아요 0 | URL
야아 이런 게 입소문!
근데 이거 먹으면서
어찌 이런 신통방통한 약을 개발했지? 누가 했습니까 감사합니다. ㅋㅋㅋㅋㅋ

삼부콜 오리지널 포뮬러도 안드셔보셨으면 언제 꼭 드셔보셔야만 합니다.
특히 겨울엔 필수!

라로 2020-12-08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비 님의 증상을 들어보니까 (무슨 점쟁이 같은 소리 하고 있지만) 일단 점안액을 사용해 보셈. 수시로 뻑뻑할 때마다 사용해 봐요. 그래서 괜찮아지면 500원.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암튼, 화이팅!!!💋💋💋💋💋

syo 2020-12-08 18:08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 감사합니다. 점안액 하나 들여놔야겠어요.
500원은 적립!

2020-12-08 1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08 17: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08 1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20-12-08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민법강의라니 시험 보시는 거예요? 왠지 대번 붙을 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

syo 2020-12-11 02:5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감사합니다^-^
근데 좋은 예감은 왜 틀리는 법이 없나- 이런 말은 왜 없는 걸까요.....

바람돌이 2020-12-08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톰 필립스가 포테이토칩을 고르는데 5분이 걸리는 이유는 포테이토칩 종류가 너무 많기 때문에 당연한것입니다. 예전 유럽에서 카르푸에 갔는데 매장 끝에서 끝까지 포테이토칲밖에 없었다죠. 종류 다르게 해서.... 전 10분 넘게 걸렸음다. 한국에서는 고민하지 않습니다. 포테이토는 포카칩 어니언. ^^ 아 반대는 받지 않아요. 무조건 포카칩 어니언!!

syo 2020-12-11 02:52   좋아요 1 | URL
반대를 받지 않으시다니.....
저는 감자로 만들어진 모든 종류의 식품을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감자로 만들어진 어떤 종류의 식품에도 반대할 생각이 없습니다 ㅎㅎㅎㅎ

페넬로페 2020-12-08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방에서 죄송하게도
뜬금없이 눈편한 에센셜~~
눈에 담아갑니다**
아니 기억 잘 못하니
메모해갑니다요~~

syo 2020-12-11 02:53   좋아요 0 | URL
눈편한 에센셜 지금 주문전화 폭주하고 있는데요.
조금 있으면 저희가 마련한 분량 전부 소진 될 것 같으니까,
방송 보시는 고객님들, 지금 바로, 주문전화 주세요!
사은품 <가벼워지는 하루 일맥차> 10pc 함께 나갑니다!

scott 2020-12-09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로니아 가루 내던져버리고, 메모 메모 ,,,,몰리님한테 영업당했으 ㅋㅋㅋ
내일부터 눈편한 에센셜 ㅋㅋ

syo 2020-12-11 02:54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저는 벌써 두 알 먹었습니다.
하루 두 알 눈편한 에센셜.
보고 읽고 맛보고 즐기고, 보고 읽고 맛보고 즐기고....

독서괭 2020-12-10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 다시 공부 시작하신 거예요? 요즘 북플을 많이 못 했더니 syo님 근황 파악에 늦었어..(왠지 슬픔)
건강, 체력관리가 일번입니다. 화이팅~^^

syo 2020-12-11 02:55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독서괭님 가족 새 멤버는 쑥쑥 자라고 있나요?
왜 하필 시대가 이 따위야.....

화이팅 감사합니다^_^

서니데이 2020-12-10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시고,
항상 행복과 행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syo 2020-12-11 02:56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께 이 인사를 받은 게 벌써 1년전이라니,
시간 미쳤네요.
덕분에 다사다난한 세상에서 무사무난하게 한 해 난 것 같습니다.
서니데이님도 행복하셔요^-^
 


 

문체반란

 

 

 

1

 

프랑스의 어느 미식가는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준다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고 호기를 부렸다고 한다. 과연 프랑스스럽달까. syo는 프랑스 사람도 미식가도 아니지만 저게 어떤 말인지 대충은 알 것 같다. 하루의 대부분을 활자를 먹는데 소비하는 사람은 그가 읽는 책과 비슷한, 그러니까 그 책 속에 들어있는 문장의 생김과 비슷한 기분으로 생활하고 말을 하고 글을 쓰게 된다. 최근 제일 안력을 가장 많이 소진하고 있는 장르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잔뜩 들어있는 책들이다.

 

그러나 그 수 개의 부동산 중 일부는 채무자의 소유이고 다른 일부는 물상보증인의 소유인 경우에는 물상보증인이 민법 제481, 482조의 규정에 따른 변제자대위에 의하여 채무자 소유의 부동산에 대하여 저당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그 물상보증인이 채무자에 대하여 구상권을 행사할 수 없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채무자 소유의 부동산에 대한 피담보채권액은 공동저당권의 피담보채권액 전액으로 봄이 상당하다.


, 상당하네.

 

알라딘이 법원이 아닌 이상, 저런 상당한 문장들과 하루 10~12시간씩 씨름하는 사람이 쓰는 글이 제대로 꼴을 갖출 수 있을 턱이 없다. 가끔 뭐라도 끄적거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시간적 여유가 없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문체적 여유가 없어져서 큰일이다.

 

 

 

2

 

하루의 절반 정도를 저러는 데 쓰고도 책을 읽겠다고 잠을 줄여 보았다. 며칠은 괜찮았는데, 슬슬 피곤하다.

 

 

 

 

--- 읽은 ---

 


233. 축소주의자가 되기로 했다

이보람 지음 / 카멜북스 / 2020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행의 시대에서 소비시장을 운영하는 책임자들을 공급에 맞추어 욕구를 키우는 전문가들이라고 표현한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시대에 사는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내 욕구와 욕망의 자주성을 지키고/인정받고 싶어서 안달한다. 우리의 욕망이 대타자의 욕망임을 선언한 라캉의 철학적 금언이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식으로 먹기도 좋고 보기도 좋게 조리되어 떠돈다. 저 말은 한 번만 들어도 아, 진짜지! 우리가 진짜 그렇지! 하면서 쉬이 공감하게 되고, 그 즉시 우리는 어떤 지혜를 깨치거나 탁월한 삶의 감각을 획득한 것같은 착각에 빠진다. 멋있는 말과 내 자아의 쉬운 일체화는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어쩐지 나를 더 멋진 인간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그 멋짐을 지키기 위해 경구 자체에만 집착하다 보니 실제 삶은 한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애초에 저 말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타인의 입김에 오염되지 않은 자신만의 욕망을 찾으라는 말이 아니라, 언어 구조에 포획된 신경증적 인간으로서의 현대인에게, 그런 탈출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뜻에 더 가까운데. 보기에 따라서는 그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벌써 어떤 담론에 포획되어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되지도 않을 일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되는 일부터 해나가는 게 좋다. 불순물이 첨가되지 않은 순수한 내 욕망을 찾겠다는 꿈을 애초에 버리고 시작하면, 오히려 피할 수 있고 노골적인 타인의 욕망들을 직시하기 쉽다. 다시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로 돌아가면, “공급에 맞추어 욕구를 키우는이들로부터 내 욕망을 지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내 욕망을 조작해서 더 많이 팔아치우려는 그들의 욕망을 꺾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공급을 줄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공급은 어떻게 줄이면 될까? 수요를 줄이면 된다. 물질의 소비를 줄이는 일에는, 인간을 포함한 지구 전체를 위해 좋은 선택이라는 거대한 이점 말고도, 내 욕망의 주도권을 조금 더 찾아오는 소소하고 개인적인 이득도 있다.

 

스스로 응원하고 격려하면서 자존감을 높여 나가면 나의 정체성을 물질로 대체하지 않고타인과 비교하며 흔들리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쓸데없이 물질로 남과 경쟁하는 일이 줄어들면 물건을 많이 만들 필요도 없어진다과도한 생산이 멈추면 그에 따른 탄소 배출이 줄어들고 쓰레기도 감소할 것이다나는 내 건강만 챙겼을 뿐인데 그 영향은 나비처럼 날아가 온 지구에 퍼지게 된다마음이 병든 사람들이 지구를 파괴하면 그 악영향은 돌고 돌아 결국 또 인간이 아프다.

이보람나는 축소주의자가 되기로 했다 


 

 

 


234. 마흔에는 잘 될 거예요

권수호 지음 / 카멜북스 / 2020

 

마흔이 눈앞에 있다. 코앞은 아니지만. 눈앞에 있는 마흔은 금방 코앞으로 올 것이다. 서른이 눈에서 코까지 가는데 걸린 것보다 훨씬 짧은 시간이면 눈에서 출발한 마흔이 충분히 코에 도착할 것이다. 서른이 되기 전에는 세상에 서른이 되면’, ‘서른에 알았더라면’, ‘서른에 꼭이라는 제목을 단 책이 정말 많다고 생각했는데, 마흔의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는 오늘 보니까 세상에 있는 책의 80%가 마흔아’, ‘마흔에는’, ‘마흔이라면따위의 제목을 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서른 전에 보았던 서른의 책들이 서른을 돌파하는 데 아무런 실체적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마흔 앞에 만날 마흔의 책들을 그리 기대하지 않고 읽는다. 이 책은 그저 소소한 에세이고, 권수호 작가님의 필력은 우후죽순처럼 쏟아지는 수많은 에세이들 사이에서 이 책을 낭중지추로 만들 정도는 아니다.

 

늙었다.”

  툭 하고 내뱉은 말이었지만 유난히 속이 시렸다바쁘게 사는 건 좋은데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그 과정이 보이지 않았다거울 속 나는 내가 소망했던 모습과 많이 달랐다그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난 지금 행복할까앞으로 행복할 수는 있을까어쩌면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사는 건 아닐까?

권수호마흔에는 잘 될 거예요


 

 


235. 밤에 일하고 낮에 쉽니다

정인성 지음 / 북스톤 / 2019

 

책을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사랑에 한없이 가깝다고 해도 좋다. 술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현미경의 배율을 무한대로 보내서 마음을 들여다보면 결국 싦음에 수렴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원체가 그런 사람이다 보니, ‘북바라는 개념이 하나도 매력적이지 않아서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읽었다. 오히려 북바보다 그 북바를 만들기 위해 분투한 인간 정인성이 내겐 더 재미있는 개념 같았다. 정인성 작가님의 다른 책 소설 마시는 시간을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표지도 그렇지만 안에 실린 술병이랑 술 마시는 사람들 그림이 어쩐지 마음에 들어서, 술도 안 좋아하면서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다. 이후로도, 이 작가님은 술을 주제로 한 두 권의 책을 감수하신 것 같다. 아무래도 술+책 하면 정인성이 1빠지- 이런 개념이 저 판에 떠도는 건가. 뭐 그것도 재미있는 개념 같다.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는 사람에는 두 종류가 있다. 이곳에 있는 걸 더는 못 견디는 사람과, 저곳에 가고 싶어 더는 못 참는 사람. 물론 전자는 안쓰럽고 후자는 존경스럽다. 그건 내가 3자일 때, 그러니까 그냥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일 때 이야기다. 그런데 내가 전자가 되어서 후자를 볼 때, 혹은 내가 후자가 되어서 전자를 볼 때 드는 감정은 3자일 때와 같을 수가 없는 듯하다. 멋있는데 못내 아니꼽고, 부러운데 괜스레 흠잡고 싶고, 이 사람 잘 됐으면 싶으면서 또 너무 크게 잘 되면 어쩐지 좋지만은 않을 것도 같고.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좋다고 했다몇 시간 뒤계산대 앞에 선 그녀에게 압생트는 어땠는지 감상을 물었다역시나 맛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앉았던 자리를 슬쩍 쳐다보니 두 모금 정도만 비워진 압생트가 남아 있다. 90%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내가 그녀였어도 압생트를 주문했을 것이다취향과 관계없이궁금한 술을 맛보는 경험은 소중하기 때문이다술을 다 마시든 남기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마셔보면서 내 취향을 찾아가고그러면서 또다시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그렇게 매번 새로운 도전을 통해 나라는 사람과 가까워진다.

정인성밤에 일하고 낮에 쉽니다


 

 


236. 공부는 내 삶을 어떻게 바꾸었나

이종훈 지음 / 북카라반 / 2019

 

세상 모든 것이 그것에 열중하는 사람의 삶을 급격하게 바꾸어 놓을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실제로 공부를 포함한 몇몇 것들을 제외하고 나면 아무리 열중해도 삶을 바꿨다고 표현할 만큼의 전환점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 심지어 이 책을 쓴 이종훈 판사님이 오늘날 갑자기 고2의 몸으로 돌아가 똑같은 방식으로 다시 시작해도, 비슷한 결과를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건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고,

 

그렇다면 개인이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면, 이런 성취를 이룬 사람에 대해서는 존경과 찬사 말고도 더 바칠 게 있는지 찾아보고 싶은 심정이다. 노력과 열정도 재능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야 그게 없는 내 입장이 덜 비참해지잖아…….

 

하여튼 이런 책에 손이 간다는 건, 마음 한켠에 불안 같은 게 있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결국 글을 써야겠노라 마음 먹은 것은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전국의 수많은 꼴찌들 때문이다이들에게 최소한의 성실성과 노력만 있다면 누구나 공부를 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이 책을 읽는 사람 중에 아마 학창 시절 나보다 공부를 못했던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싶다나처럼 평범한 사람도 해낼 수 있다면이 책을 읽을 누군가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종훈공부는 내 삶을 어떻게 바꾸었나

 

 

 

 

--- 읽는 ---

도시로 보는 유럽사 / 백승종

동네의사와 기본소득 / 정상훈

파퓰러사이언스 2020. 11 / ()에이치엠지퍼블리싱

법은 얼마나 정의로운가 / 폴커 키츠

사랑이 스테이크라니 / 고요한

휴식의 철학 / 애니 페이슨 콜

엄마의 뜰 / 김살로메

유행의 시대 / 지그문트 바우만

성의 역사 1 / 미셸 푸코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 / 김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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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12-06 21: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잠은 적당히 자 가면서...건강 잘 챙기세요. 문체는 그 다음에 챙기세요 ㅎㅎㅎ

syo 2020-12-06 21:53   좋아요 3 | URL
누우면 또 잠이 안 와서 읽다보니 시간은 가고, 그래도 기상 시간은 변동이 없다보니 수면량은 줄어들고, 그런 악순환(선순환??)이네요 ㅎㅎㅎ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좀 피곤한 정도지 건강 이야기 나올 수준은 아니에요.
졸리면 낮에 쳐자거든요^-^

바람돌이 2020-12-07 0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상보증인의 소유인 경우에는 물상보증인이 민법 제481조, 제482조의 규정에 따른 변제자대위에 의하여..... 한국어인데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이런 공부를 할 때 보는 책이 진짜 꿀맛이죠. 요런 때는 내가 이거 끝나기만 해봐. 보고싶은 책 24시간 풀로 다 읽어줄거다하면서 씩씩거리는....ㅎㅎ 견디기 힘들어서 일을 때려치웠든 다른 걸 간절하게 원해서 그랬든 그래도 그럴수 있는 용기가 아름답습니다. 그 용기가 syo님의 삶을 이끄는 힘이 될거라고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당신은 좀 멋진 분 같아요. ^^

하나 2020-12-07 02:12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님 독서의 참 맛을 아시는 분 🙊

syo 2020-12-07 09:01   좋아요 0 | URL
처음에 일을 때려쳤을 때 꼭 그런 마음이었거든요. 24시간 풀로 읽어줄 테다!
이틀 가더라구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나란 인간 으하하하하하

그리고 바람돌이님의 마지막 말씀에 관해서라면, 저희 엄마 생각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ㅎㅎ

추풍오장원 2020-12-07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이 상당하다 답안지 쓸 때도 쓰게 되는 표현이네요. 안 쓰는 편이 사회상규에 어긋나지 않다고 봄이 상당합니다...

syo 2020-12-08 14:54   좋아요 0 | URL
저는 답안지에 ‘현출‘한다는 표현도 공부하면서 처음 들어봤어요.
추풍님 말씀 들으니까 저런 문체를 ‘현출체‘라고 불러도 되겠네요.

라로 2020-12-07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몰랑요. 요즘 술과 작별 인사를 하고 있는데 그동안 압셍트에 대한 글을 읽어도 이름 강하네 정도였는데 이 글을 읽으니까 막 마셔보고 싶어요. 술을 끊기 전에 후회 없도록. ㅎㅎㅎㅎㅎㅎㅎㅎ (핑계😅) 암튼, 뭘 하시든 전 언제나 토비 님 응원해!!!👍 (근데 무슨 공부인지 뭐 검은 것은 글자요 싶은... 머리 아플 땐 만화??😅)

syo 2020-12-08 14:53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 저는 술을 싫어하지만 압생트는 이름부터가 싫었어요. ‘압생‘트.... 뭔가 생을 압박하는 이름이야.

그나저나 술과 작별인사를 하시는군요..... 성공하고 행복하시길, 설령 실패하신데도 그게 더 행복하기 때문에 행복하게 실패하시는 길이 되길, 뭐가 됐든 행복하세요ㅎㅎㅎㅎㅎ

Angela 2020-12-08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번글에 동감입니다~

syo 2020-12-08 14:51   좋아요 1 | URL
Angela님도 요즘 스타일에 안 맞다 싶으신 글을 읽는데 시간을 쓰는 중이신가 보네요 ㅎㅎ

공쟝쟝 2020-12-14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바 가봤는데! 나 가서 칼바도스 마셨는 데! 담에 가면 압생트 도전 해야지!!! 아마 밤일 낮쉼이 그분 책인 듯 하죠?
 

 

답은 정해졌다

 

 

 

낮잠을 자려고 누웠거든. 비몽사몽 골짜기를 헤롱헤롱 지나고 있는데 누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거야. 반품 택배 신청하셨죠? 내일 오실 줄 알았는데요. 코로나라서요. ? 코로나요. ……? 안녕히 계세요. 그러고 나니 잠이 달아나고 말았지. 아무 생각 없이 폰을 들고, 역시 아무 생각 없이 네이버에 들어가서,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뉴스를 보다 보니, 아 글쎄 경기도에서 배달특급이라는 공공 앱을 출시했다는 거야. 이재명 지사가 배달특급이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더라고. 거대 배달 서비스 업체의 전횡으로부터 소상공인과 도민을 지키려고 만들었대. 그런 훌륭한 취지를 감지했는데, 훌륭한 경기도민으로서 어떻게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어. 우리 도의 공정한 경업질서 확립과 소비자 편익 증대를 위하여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겠다는 사명감이 치밀어 올라 참을 수가 없는 거라. 그래서 당장 치킨을 시키기 위해 앱을 설치했지. 그런데 앱을 켜 보니까, 내가 사는 성남시는 아직 서비스 전이네? 서비스 일정표를 봤는데, 2021 일정에 우리 동네는 없네?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나의 사명감과 당황해서 눈알만 굴리는 나…….

 

그렇게 잠깐의 패닉 상태가 지나갔고 남은 거라곤 뜨거운 원망과 분노뿐이었어. 어떻게 이 사회는, 좋은 일을 하고자 하는 시민의 참한 마음을 이렇게 처참하게 짓밟는 데 능숙한가. 도대체 왜 이 사회는, 거룩한 시도가 물거품이 되었을 때 좌절하고 상처 입을 개인의 여린 감성을 인지하지 못할 만큼 무심한가. 도대체 왜, , ! 참을 수 없다! 이대로라면 큰 사고를 칠 것만 같아! 도저히 안 되겠다, 사고를 칠 바엔 차라리 치킨을 시키자! 좋아! 도시의 평화를 위해 나는 오늘 치킨을 시키는 거야! 두 마리를 시키자! 이 태산 같은 울분을 누르고 태평양 같은 분노를 잠재우려면 닭 다리가 족히 네 개는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대의명분 빌드업 G렸다.

 

 

 

다시 말해 진화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 '지금 당장이익이 되는 특성은 무조건 선택된다그 결과 훗날 9대손쯤에서 너무 구닥다리 특성으로 고생하지 않을지 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미래를 내다보고 반영한다든지 하는 것도 물론 전혀 없다이를테면 "이 특성은 지금은 좀 거추장스러워도 100만 년 후에는 후손들한테 진짜 유용하겠군좋아선택하자", 그런 경우는 없다진화의 원리는 앞을 내다보는 것이 아니다그냥 먹을 것과 짝짓기에 굶주린 개체들을 인정사정없는 세상에 무진장 많이 풀어놓고 누가 제일 덜 망하나 보는 것이다.

톰 필립스인간의 흑역사


최근에 내가 말이야꿈의 원리에 대해 설명하고 그 의미를 알려 주는 책 몇 권을 읽었어그런데 간밤에 자네가 돼지 머리를 하고 있는 꿈을 꾸지 않았겠나그건 자네가 돼지라는 소리라더군.

장자크 상페마주 보기


아무래도 좋아하는 것에는 손이 저절로 가는 법이지어쩔 수 없어돼지는 손을 내미는 대신 코를 내밀지돼지는 말이네꽁꽁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해두고 코앞에 맛있는 음식을 놓아두면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까 코끝이 점점 늘어난다고 하더군맛있는 음식에 닿을 때까지 늘어나는 거지정말 집념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니까.”

나쓰메 소세키산시로


  

 

--- 읽은 ---

 


229. 스무 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

 

스무 살, 그것은 정말 설레는 단어다. 아직 스물이 되지 않은 이들에게도, 벌써 스물을 지나온 이들에게도. 표제작 스무 살에 아무래도 녹아있을 김연수 선생님의 자전적 정보를 읽으며, 나는 스물에 어디서 뭘하고 있었는지를 떠올려보다가 기분이 더러워졌다. 젠장, 그 좋은 스무 살을 암담에 참담을 얹고 비참에 비루를 더하면서 소진했단 말인가. 그대로 책을 집어던지려다가 내 스무 살을 망친 건 책이 아니라 나라는 생각에 책을 그대로 내려놓고 나를 집어 던졌다. 침대 속으로. 한잠 자고 좀 눅눅해진 마음으로 다시 읽었는데, 과연 좋았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자 읽느라 수고했다며 선생님께서 약을 발라주셨다.

 

생에서 단 한 번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별들처럼 스무 살제일 가까워졌을 때로부터 다들 지금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이따금 먼 곳에 있는 그들의 안부가 궁금하기도 하다이 말 역시 우스운 말이지만부디 잘 살기를 바란다모두들.

김연수스무 살

 

처음 읽은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예민하게 굴었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요즘 사는 꼴이라는 게. 부디 잘 살아야겠다.

 

 

 


230.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

제임스 설터 지음 / 최민우 옮김 / 마음산책 / 2020

 

syo란 놈의 성벽이란 저런 아련한 제목을 만나면 여지없이 흐물흐물 왈카닥 무너져내리는 물벽돌이라서, 작가가 설터가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들춰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쓰지 않으면 사라져요라는 말이 설터의 입에서 나왔으니(그렇다면 “젊은 친구, 쓰지 않으면 사라지고 말지.” 정도가 어울릴까?) 즉시 장바구니로 갈 밖에. 그런데 잡은 물고기의 운명이 늘 굶주림으로 귀착되듯, ‘산 책역시 언제나 읽을 수 있으니 언제나 읽지 않는 기이한 운명을 두르고 책장 속에서 먼지만 뒤집어 쓴다. 그렇게 천대의 세월이 축적되고, 어느날 우연히 책장을 뒤지던 주인의 손에 재발견되어 애절한 표정으로 어필하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 읽지 않으면 말일세, 젊은 친구, 확 사라져 버릴 걸세. 좋을 줄 알았지만 좋았다.

 

설터 할아버지께 죄송스럽게도, 스키로 유명한 도시에 대한 리뷰랄지, 미국 육사에 대한 홍보글이랄지 하는 것들은 그냥 넘겼다. 설터 할아버지가 아니라 설터의 할아버지가 온대도, 안 읽어도 될 글이나 읽어도 뭣도 안 될 글은 읽지 않는다.

 

거투르드 스타인은 왜 글을 쓰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찬사를 받으려고요." 로르카는 사랑받으려고 글을 쓴다고 말했다포크너는 작가란 영예를 얻기 위해 글을 쓴다고 했다나도 가끔은 이런 이유들로 글을 썼겠지만콕 집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대체로 내가 글을 쓰는 까닭은 어떤 대화로도또는 어떤 일련의 사건으로도 그려낼 수 없는 세상비록 위대한 소설들이 감행하는 시도에 짜릿한 전율을 느끼기는 하지만어떤 소설도 완벽히 옮겨낼 수 없는 세상이 특정한 방식으로 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설터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

 

 

 


231. 사치와 평온과 쾌락

장자크 상페 지음 / 이원희 옮김 / 열린책들 / 2018

 

안다. 이 사람이 대단한 사람이고, 그의 그림이, 그림 옆에 붙은 촌철살인의 말들이 든 책에 소장한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아는데도, 알게된 지 벌써 한참 되었는데도, 그래도 이걸 사서 집에 두면, 아 차라리 다른 책을 사서 볼 건데- 하는 후회가 없으리라는 확신이 그간 없었던 것이다. 밀리의 서재 사랑해요…….

 

언제나 똑같은 꿈이에요펠레가 상대 수비수를 따돌리고 플라티니에게 공을 패스하면플라티니는 골인을 시킬 수 있는 기차게 좋은 상황에서 내게 공을 차주죠나는 냅다 슛을 날려요비웃으면서 한 손으로 공을 막는 골키퍼는 내 마누라예요.

장자크 상페사치와 평온과 쾌락

 

 

 


232. 밤으로의 긴 여로

유진 오닐 지음 / 강유나 옮김 / 열린책들 / 2010

 

내가 앞으로 한동안은 극문학은 읽지 않겠구나, 하는 느낌 등등이 휘몰아쳤다라고 쓴 게 고작 닷새 전인데……. 나조차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개똥 같은 결심을 뭉개고 읽게 되었는데, , 좋았다. 부디 syo님이 이번 주 안에 리뷰를 작성해서 올리면 좋겠다(유체이탈).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건 큰 실수예요갈매기나 물고기였다면 훨씬 좋았을 텐데지금의 나는 한 번도 진짜 집을 느껴 보지 못한 이방인으로 남아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누구도 나를 원하지 않고 어디에도 녹아들지 못하고 언제나 약간씩 죽음을 갈망하고 있는 인간일 뿐이죠!

유진 오닐밤으로의 긴 여로

 

 

 

--- 읽는 ---


마흔에는 잘 될 거예요 / 권수호

밤에 일하고 낮에 쉽니다 / 정인성

혼자 있기 좋은 방 / 우지현

도시로 보는 유럽사 / 백승종

축소주의자가 되기로 했다 / 이보람

동네의사와 기본소득 / 정상훈

나는 수학으로 세상을 읽는다 / 롭 이스터웨이

공부는 내 삶을 어떻게 바꾸었나 / 이종훈

베르그손 / 황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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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12-03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제임스 설터 별로였는데 인용해주신 구절 읽으니 관심이 생겨요. 설터는 표지는 제 스타일인데 아직 한 권도 안 읽어봤네요.
닭다리 네 마리로 태평양 분노가 잘 마무리되었다죠! 기분 좋게 두 마리 시켜라. 세리 언니 말씀 ㅎㅎㅎㅎㅎㅎㅎㅎㅎ

syo 2020-12-03 21:58   좋아요 1 | URL
설터를 한 권도 안 읽어보셨다면, 단편집 <어젯밤>을 추천합니다.
그리고 작가들의 작가라는 칭송을 받는 설터의 아름다운 문장을 노리신다면 장편 <가벼운 나날>을 추천합니다.

레삭매냐 2020-12-03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터 자신은 <스포츠와 여가>와 <가벼운 나날>
을 자신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더군요...

syo 2020-12-06 21:48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그 마음이 어쩐지 이해가 갈 것 같아요.
<스포츠와 여가>는 본격적으로 작가로 인정받기 시작한 첫 작품일 테고,
<가벼운 나날>은 정말, 정말 아름다우니까요.....

cyrus 2020-12-03 2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생각해보면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저는 설렜다고 하기 보다는 ‘설레발’친 것 같아요. 진짜 스무 살이 되면 하고 싶은 거 다 할 거라고 떵떵거렸는데, 정작 제대로 한 건 없었어요. 이제야 정신 차리고 시작하려고 하니까 군대 영장이 날아와서 또 물 건너갔죠.. ㅎㅎㅎ

syo 2020-12-06 21:50   좋아요 0 | URL
그때 하고 싶은데 못하고 지나친 것 중에 아직 못했거나 이제는 못할 것들이 많아서 서글프네요....

반유행열반인 2020-12-04 06: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치킨은 옳으니 옳은 일 하셨어요 꿀꿀

syo 2020-12-06 21:50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치킨의 ㅊ만 나와도 침이 고인다니까요. 침킨인가

2020-12-04 0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06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ott 2020-12-04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진 오닐 극 사랑하지만 읽다보면 우울함에 풍덩 ㅋㅋ

셜터 할배 콜로라도에서 빵집(베이커리 샵) 하셨어요.
아주 오랫동안 ,,,,
빵 반죽하다가 또다시 글쓰기로,,,
쓰고 또 쓰고 또 쓰는 삶이 자신에 운명이라고 하쉼 *ㅅ*

syo 2020-12-06 21:52   좋아요 0 | URL
설터옹이 직접 빵 반죽을 했다구요? ㅋㅋㅋㅋㅋㅋ
아 멋지긴 한데 왜 되게 맛없을 것 같지? ㅋㅋㅋㅋ
 

 

지금 따지냐?

 

 

 

1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박이문 선생님이 쓰신 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있는데, 감히 선생님께 맞덤비자는 것은 아니지만, syo라는 인간의 머릿속에도 철학적 개념이라는 것이 들긴 들었는지, 도무지 선생님의 말씀이 턱턱 걸려서 진도를 빼기가 힘들다.




ⓖ 한국 사람은 얼굴빛이 노랗다.

ⓗ 한국 사람은 마음이 착하다.

ⓘ 우주는 하느님이 만드셨다.

ⓙ 처녀는 결혼하지 않았다.

ⓚ 아름다운 처녀는 마음을 끈다.

ⓛ 금송아지는 금으로 되어 있다.

 

가 사실인가 아닌가를 알려면 실제로 한국 사람의 얼굴빛을 조사해봐야 하며한국 사람들의 마음씨를 경험을 통해서만 알아봐야 할 것이다그 이외에는 알 도리가 없다이 반면에 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결정하기 위해선 구체적으로 경험을 통해서 알아볼 아무것도 없다다만 그 진술에 쓰인 언어의 의미를 분석하면 결정될 수 있다전자의 예가 종합적 진술에 속하고 후자의 예는 분석적 진술에 속한다.

박이문철학이란 무엇인가』 54 


선생님은 명제, “아름다운 처녀는 마음을 끈다라는 문장을 분석적 진술, 그러니까 그 진술에 쓰인 언어 속에 이미 그 진술의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에 아무런 새로운 지식을 보태주지 않는 진술로 보고 계신데, 그렇게 생각하신 이유는 뭐였을까?

 

심지어 수학에서 보면 아예 명제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저 문장이 분석명제이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처녀라는 단어의 정의에 마음을 끈다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어야 하는데, 아름다운 처녀에게 마음이 끌리지 않는 사람의 예를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아름다운 처녀에 마음이 끌리는 것이 당연한 주체는 보편 주체가 아니라 특정 주체다. 박이문 선생님이 무엇을 당연시하면서 무엇을 백안시하는지가 선명히 드러나는 지점은 아닐까.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겠지만 박이문 선생님이 유학하던 1960년대, 한국이라는 제3세계 끄트머리 국가 출신의 동양인이 세계 학문의 중심지에서 그야말로 변방인으로서 느껴야만 했던 비애가 있었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들의 학문, 그들의 언어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인간으로서 그들의 학문과 언어를 배우며 일었던 소회 같은 것이 없을 수 있었을까. ‘인간이 당연히 서구의 백인(그리고 남성)을 지칭하는 언어로 이루어진 학문 체계 속에서 겪어야 했을 배제의 경험을 우리는 상상해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은 디폴트 인간에 대해 좀 더 첨예한 비판의 관점을 지니게 될 거라고 기대하기도 한다. 근데 그게 꼭,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2

 

칸트를 읽으면서도 느낀 거지만, 명제를 종합 명제분석 명제로 구분하는 그 이분법은 너무 기계적이다. 양극단 사이에서 언어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색깔들을 무시하고 무지개를 빨강색과 보라색으로 이루어진 덩어리로 보이게 한다. 예를 들어, “처녀는 결혼하지 않았다라는 문장은 처녀라는 단어 속에 결혼하지 않은 여자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분석명제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 문장의 분석명제성이랄지, 분석명제력이랄지, 분석명제점수랄지 뭐 그런 것이 과연 금송아지는 금으로 되어 있다라는 문장의 그것과 같다고 볼 수 있을까?

 

처녀라는 단어와 금송아지라는 단어를 뒤흔들 수 있는 사태의 집합은 그 크기가 다르다. 다시 말하면 처녀=결혼하지 않은 여자라는 공식은 금송아지=금으로 만든 송아지라는 공식과 엄밀성의 정도가 다르다는 뜻이다. 더 간단히, 금송아지라는 단어가 초콜릿이라면 처녀라는 단어는 핫초코라고 할까. 결혼하지 않고 자녀도 없는 20세 여성을 처녀라고 칭하는 사람의 수와, 결혼하지 않고 초등학교 1학년짜리 아들을 키우는 40세 여성을 처녀라고 칭하는 사람의 수가 과연 동일할까? 그게 다르다면, '처녀'라는 단어에 합의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사용자가 동의해야 '합의'에 이를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언어가 언어사용자들의 관념에 영향을 받는 걸쭉한 수프 같은 형상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처녀는 결혼하지 않았다는 문장과 금송아지는 금으로 되어 있다는 문장을 분석명제라는 집합 속에 밀어 넣을 때 칸트가 상정한 언어는 언어가 아니라 언어의 박제였다.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답습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박이문 선생님은 줄곧, 언어의 세계(의미차원)와 존재의 세계(존재차원)의 이분법을 강조하신다. 베르그송이나 하이데거 같은 대철학자들과, 데리다 같은 젊은’(!) 철학자들이 자주 범하는 실수가 그 두 가지 세계를 자꾸 버무리는 데서 발생한다고 한탄하신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제시한다.

 

하나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자면 우리는 바닷속의 어류와 그것을 잡기 위해 만든 어망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우리는 흔히 필요에 따라새우를 잡느냐 오징어를 잡느냐에 따라 일정한 모양의 어망을 뜬다알맞은 어망을 사용할 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물고기를 잡게 된다말하자면 그물에 고기가 걸려든다이런 의미에서 물고기와 어망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그러나 사실상 어망과 물고기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물고기는 존재하는 물체로서 그것대로 어떤 질서 속에 그것대로의 질서를 갖고 있으며어망은 물고기나 그것들이 살고 있는 환경과는 아무 관계 없이 어망이라는 조직으로 있다물고기나 그것들이 살고 있는 환경은 우리의 뜻대로 바꿀 수 없는 자연에 속하지만어망은 우리가 우리의 꾀대로 만들 수 있는 문화즉 사고의 체계에 속한다이러한 사고의 체계즉 어망은 물고기 잡는 일물고기 자체와 아무 상관 없이 여러 가지로 짜여질 수 있다그러나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때에 따라 물고기와 직접 관계없는 어망도 물고기를 얽어 잡아낼 수 있다.

  여기서 물고기는 사물에 해당되어 존재차원에 비유되고어망은 언어에 해당되어 의미차원에 비유된다.

같은 책, 63-64

 

그러나 선생님의 비유야말로, 언어와 존재 사이의 막강한 상관성을 증명한다. 커다란 물고기를 잡기 위한 어망은 다른 작은 물고기들이 그물 사이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성기게 만든다. 어망이 고기의 크기를 반영하는 것이고, 돌려 말하면 목표 물고기가 어망의 특성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만든 어망으로 어부들이 오랫동안 그 바다에서 물고기를 분별없이 잡다 보면, 커다란 물고기는 점점 그 수가 줄어들게 되고, 같은 종이지만 덩치가 조금 더 작다 보니 그 어망 틈 사이로 빠져나갈 수 있는 녀석들이 생존 경쟁에서 유리하여 상대적 개체수를 늘릴 수 있다. 그 어종의 지배적 형태가 바뀌는 것이다. 어망의 특성이 환경을 만들고, 그 환경이 자연선택의 메커니즘으로 물고기의 특성을 바꾸는 상황이다. 거칠게 말해서, 어망이 고기를 (작게) 만드는 것이다.

 

선생님 역시, 칸트와 마찬가지로 특정 시점에 정지된 상태의 언어와 존재를 분석하시기 때문에 비슷한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단면은 분석하기 좋고 아름다워서, 오래 들여다보고 있자면 시간이 가는 것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인지.

 

 

 

3

 

따지지 않고 읽으려고 하는데 쉽지만은 않아서, 누르고 누르다 한 번 대든다. 그리고 또 누르고 누르러 간다.

 

 

 

--- 읽은 ---


 

226. , 이게 뭐라고

장강명 지음 / arte / 2020

 

읽으면서는 발췌를 위해 캡쳐를 좀 해놨는데, 막상 옮겨 적으며 다시 읽는 과정에서 이건 안 옮겨도 되겠군, 이것도, 이것도, 이렇게 하나하나 자르다 보니 몇 문장 남지 않았다. 장강명의 소설이나 소설가로서의 장강명을 아끼는 마음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이래저래 나하고는 맞지 않아서,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을 그려봐도 그다지 설레지 않아서,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독서는 그냥 무심한 마음으로 끝났다. 시종 강조하는 말하고 듣는 인간읽고 쓰는 인간의 대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기 위해서는, 내가 좀 더 쓰는 인간 방향으로 가까이 갈 필요가 있는 듯하다. 내가 서 있는 해발고도에서는 그가 보는 풍경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

 

 

 



227. 마주 보기

장자크 상페 지음 / 배영란 옮김 / 열린책들 / 2018

 

아무리 차가운 풍경을 그려도 괜히 따뜻하게 느껴지는 그의 그림도 그림이지만, 말재간 진짜 어마어마하다.

 

 

 


228. 그림으로 내 마음을 충전합니다

이근아 지음 / 명진서가 / 2019


책 속의 한 대목을 책 생긴 그대로 옮겨본다.

 

직장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친정엄마 도움을 받아야 했던 나는

결혼 5년 동안은

친정이 있는 강동구 언저리에 있어야 했다.

친정 가까운 곳에서

내가 가진 돈에 맞는 집은

 

시도 아닌데, 대체 이런 편집 왜지?

 

그렇다고 대단히 아름다운 에세이도 아니며, 대단히 특별한 이야기도 없다. 이 책으로 syo의 마음은 하나도 충전되지 않았습니다.

 

 

 

--- 읽는 ---

성의 역사 1 / 미셸 푸코

철학이란 무엇인가 / 박이문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 이규리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 / 짐 홀트

스무 살 / 김연수

밤으로의 긴 여로 / 유진 오닐

반부패의 세계사 / 김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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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11-30 0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지려고 읽는 거니 열심히 따지며 읽으십시다. 저거 친정엄마 나 시인 줄 알고 몰입해서 읽었는데...그런 의도의 편집인 거죠. (그리고 심지어 타겟에게는 먹히는 컨텐츠...)

반유행열반인 2020-11-30 0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가진 돈에 맞는 집은
하고 딱 끊어서 절묘했나 보네요 ㅋㅋ

syo 2020-11-30 08:51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실제로 보면 와 sns화면 캡쳐했나 싶은 정돈데요....

단발머리 2020-11-30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책을 이렇게 야무지게 꼭꼭 읽어주는 쇼님이 있어서 난 철학책 안 읽고 쇼님 글 읽을래요!! 룰루랄라~~~

syo 2020-12-03 21:28   좋아요 0 | URL
날로 먹으면 체해요. 인간은 불을 사용할 줄 아는 동물입니다....

stella.K 2020-11-30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이문 교수는 철학을 에세이 같이 써서 이분 책은 읽어줘야겠구나
했는데 약간 뻘쭘하게 되네요.

syo 2020-12-03 21:29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관점의 차이에 가깝지 않을까요?
읽어줘야겠다 하신 책이라면 읽기를 권합니다.

syo에게도 관점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전 기뻤습니다 ㅋㅋㅋ

2020-12-03 1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03 2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03 2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