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목

 

 

1

 

상처 받는 일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게 나는 아니다.

 

 

 

2

 

세상에 진짜 혼잣말은 없다. 정말로 아무도 듣지 않을 거라 여기면서 말하는 사람은 없다. 하다못해 저 위에 계신다는 누군가, 온 누리에 다 닿는 커다랗고 공정한 귀를 가진 누군가가 내 말을 놓치지 않고 낚아채 주리라 알게 모르게 믿는 마음이 없다면 결코, 사람은 어떤 말도 입 밖으로 꺼내놓지 않는다.

 

 

 

3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그러나 생각이 인간의 특권이 되는 순간, 인간은 생각의 특권이 되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세상엔 인간을 한낱 탈것으로 여기는 것들이 많다고 한다. 실체는 유전자고 인간은 그 운반자일 뿐이라는 이야기가 있고, 실체는 언어일 뿐이고 인간은 그 구현자일 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해박하나 도무지 읽기 어려운 글을 쓰는 어느 죽은 철학자 역시, 세계란 절대정신이라는 것이 스스로를 변증법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이라는 선언을 통해 비슷한 뉘앙스를 풍겼다. 이런 어려운 이야기들일랑 모조리 차치해도


우리에겐 가끔씩 자신이 생각이라는 집요한 추노꾼에게 뒤쫓기는 노비 같다는 느낌을 받는 때가 찾아온다. 말을 할 때와 말을 하지 않을 때, 다른 일을 할 때와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 심지어 다른 생각을 할 때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때조차, 어떤 생각은 발목에 감긴 그림자처럼 우리의 걸음걸음에 들러붙는다. 동행하다보면 자꾸 혼잣말을 하게 되고, 상처가 있는 방향으로 알아서 찾아가게 만드는 생각들.

 

생각은 인간의 것이다. 동시에 인간은 생각의 것이다.

 

 


4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시를 내려놓는 선인장은 없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끝없이 벽을 허무는 마음은 없다. 지키는 마음은 늘 울타리를 두르게 한다. 그리고 둘러놓은 울타리가 지키고 싶은 마음을 부추긴다. 선순환과 악순환 가운데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존재하는 사이클이다.

 

세상에는 지키지 않는 방식으로 지키는 기술이 있다고 한다. 한없는 개방이나 공유가 그런 것일까. 뒤집어 생각하면 그것은 지키는 방식으로 지키지 않는 것이다. 커다란 인간에겐 어쩌면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인간이 작을수록 모든 것을 내어주는 방식으로 무엇인가를 지키는 일은 어렵다. 어려운 방식은 마치 고슴도치가 가시를 몸 안쪽으로 기르는 것처럼 은은하고 완만하게 상처를 남기고, 비명보다는 신음에 가까운 혼잣말을 자꾸 길어낸다.

 

 

 

5

 

웃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것도 욕심에 지나지 않을까. 그저 웃는 날이 줄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은 그저 그거 하나만 바라면서 기다리고 있다.

 

 

 

999

 

한 넉 달 어영부영 한 것 치고는 좀 좋은 점수를 받아서, 덜컥 필기는 붙었다. 운이 꽤 좋았던 듯. 그러나 면접이란 것은 미친놈 구별하는 수준이고 사실상 결판은 필기 득점에서 끝나는 시험이라는 점을 미루어 보면, 1.4배수의 커트라인 위에 납작 엎드린 syo가 최종적으로 될 것 같지는 않다(고 보는 것이 중론). 하던 대로(다들 권하는 대로) 묵묵히 다른 필기나 준비해야지.

 

  

 

--- 읽은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한나 아렌트 지음

마취의 시대 / 로랑 드 쉬테르 지음

중국사상사 모리 미키사부로 지음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4 / 박시백 지음

본격 한중일 세계사 2 / 굽시니스트 지음

 

 

--- 읽는 ---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다 / 양자오 지음

개헌과 선거제도 개혁에 관한 모든 것 / 백상진, 김예찬 지음

만화 동사의 맛 / 김영화 지음, 김정선 원작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 리처드 J. 번스타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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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5-09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면접 보고나면 얘기해줘요!
:)

syo 2019-05-09 11:11   좋아요 0 | URL
네. 미친놈을 어떻게 걸러내는지 가 보고 와서 알려드릴게요 ㅎㅎㅎ

독서괭 2019-05-09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키는 마음은 늘 울타리를 두르게 한다.. 밑줄 그어 봅니다.
필기 합격 축하드려요~^^

syo 2019-05-09 11:12   좋아요 0 | URL
최종합격이 아니면 큰 의미가 없는 거죠 뭐 ㅎㅎㅎ 사실 커트에 찰싹 붙어 있어서 그렇게 기쁘지도 않답니다.....

2019-05-09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9 1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5-09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합격하시길 기원합니다. ^^

syo 2019-05-09 13:0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ㅎㅎ 그러나 정황상..... ㅋㅋㅋ

설해목 2019-05-09 1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밝은눈을 가진 면접관이라면 syo님을 알아볼 겁니다! 면접 잘 보셔요. 평소의 syo님답게~ ^^

매일밤 명상을 10분씩 하는데 내가 그리 많은 생각을 하는지 새삼 깨닫게 되어 그만 두어야 하나 싶기도 합니다.
생각을 비우는 일이 쉽지가 않네요. 고작 10분조차 멍때리지 못하는 스스로를 반성하는 나날들입니다. 저는~

syo 2019-05-09 13:02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으쌰으쌰 말씀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면접관이라는 자들과의 만남이 늘 좋지 않은 기억으로 마무리되었지요ㅎㅎ 웃으며 돌아섰으나 다시 만날 일이 없었다...

고양이라디오 2019-05-09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합격기원합니다!!

syo 2019-05-09 13:02   좋아요 1 | URL
고라님 번창 기원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19-05-09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원합니다!!!

syo 2019-05-09 13:03   좋아요 1 | URL
아, 이런 글에 응원 말고 다른 댓글을 어떻게 달겠습니까만, 응원 낭비세요 ㅎㅎㅎㅎ 아껴두심이....

반유행열반인 2019-05-09 14:00   좋아요 1 | URL
드릴 게 응원 뿐이라...시험 뿐 아니라 syo님이 잘 되고 싶은 모든 걸 (e.g.쾌변, 단잠, 잘 써진 글)저 앞에 붙여 주세요!!(셀프 DIY 신개념 응원)

북프리쿠키 2019-05-09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홍~좋은 결과 있길 바랄께요.^^

syo 2019-05-09 16:3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ㅎㅎㅎㅎ 이것참 여러모로 민망하네요.

cyrus 2019-05-09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넉 달 동안 공부해서 공무원 필기시험에 합격한 건 정말 대단한 일이죠. 좋은 기운을 잘 받아서 면접시험에도 합격하길 바랍니다. ^^

syo 2019-05-09 16:33   좋아요 0 | URL
허허허. 올해 유독 시험이 쉬웠다네요. 저도 살다보니 시험운 같은 것에 당첨되는 일이 다 생기네요.

잠자냥 2019-05-09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개그로 승화할 것 같은 면접 후기도 기대합니다.

syo 2019-05-10 01:01   좋아요 0 | URL
그걸로 개그 치기가 영 쉽진 않을 것 같지만, 그래서 더욱 끌리는데요? ㅎㅎㅎ

감은빛 2019-05-09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세상에는 은근히 상처나 고통을 즐기는 성향의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가끔 은근한 근육 통증을 즐기는 모습과 작은 생채기의 통증이 아프면서도 어떤 썩 나쁘지만은 않은 감각으로 이어지는 걸 깨달을 때가 있어요.

2. 그런데 저는 혼자 집에 있을 때 가끔 혼잣말을 하는 버릇이 들었어요. 당연히 아무도 들을 이 없다는 알고도 습관처럼 합니다. 심지어 저는 신이란 존재 자체를 믿지 않아요.

3. 저도 이런 생각 자주 해요. 그런데 인간만이 생각을 할 수 있는 걸까 궁금하네요. 동물들에게 거울 테스트를 해보면 의외로 많은 동물들이 자아를 인식한다고 하던데요. 쓰다보니 자꾸 딴지를 거는 것처럼 보일 것 같은데, 절대 그런 의도는 아닙니다.

4. 이 말씀은 저도 공감.

5. 저는 웃는 날이 딱 정해져있어요. 아이들 만나는 날이죠.

999. 축하드립니다! 좋은 결과 얻으시길 바랄게요. ^^

syo 2019-05-10 01:11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제가 감정에 너무 휘둘린 나머지 무람없이 세상에 있니 없니 단정적으로 써 놨네요.
여러방면으로 꼼꼼한 지적 감사합니다.
실제로 감은빛님 말씀에 대체로 공감합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도 혼잣말을 많이 합니다.

동물의 ‘생각‘에 대한 생각도 그렇구요. 생각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법의 ‘생각‘을 기준으로 놓고 보더라도 저는 동물들이 생각을 한다고 믿어요. 저 문단도 생각이 인간만의 것이라는 가정을 깔지 않고 쓴 글입니다. 그러니까, 감은빛님의 말씀은 딴지를 거시는 게 아니라 다른 논점을 제시하신 거라 받아들였습니다^-^

응원해 주신 바에 힘 입어 좋은 결과를 얻어내면 좋겠지만, 사실 필기 점수로 결과가 거의 결정된다고 하더라구요. ㅎㅎㅎㅎㅎ

카알벨루치 2019-05-09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오~기대된다 원래 하던대로 아자자!!! 27만명 응시에 6000명이 된다는 그 공무원 셤!!!! 좋은 결과 기대할께요^^

syo 2019-05-10 01:02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아니에요, 필기만 합격이지, 커트라인에 붙어 있어서 사실상 탈락이에요.
6월달에 또 있는데, 그거나 열심히 준비하려고 합니다.
잠자냥 님 말씀처럼, 면접은 개그랑 바꿔먹구요 ㅋㅋㅋ

2019-05-10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10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15 1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16 1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또 봄. 2019-05-10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듣는 이 신경쓰지 않는 혼잣말이 늘었어요.T.T
필기 합격 축하드립니다.
좋은 결과 있으시길.

syo 2019-05-12 13:26   좋아요 0 | URL
인사가 늦었네요ㅜㅜ 감사합니다 또 봄님 ㅎㅎㅎ
좋은 결과든 좋지 않은 결과든 결과가 나오면 다시 알리겠습니다^-^

토큰 2019-05-21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합! 격! 기! 원! 입니다!

syo 2019-05-21 18:51   좋아요 0 | URL
에너지 배송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ㅎㅎㅎ
 

 

호반정경湖畔情景 5

 

 

1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더 소중한 사람은 낯익은 사람이 아니라 낯선 사람일 때가 많다. 낯익다는 느낌은 매일 생각하는 사람에게서는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래 생각해 보지 않은 얼굴, 가물가물한 이름, 언젠가 한번쯤 만났던 것 같은 희석된 기억 같은 것들을 다시 마주쳤을 때, 혹은 그것들과 유사한 것들을 만났을 때, 우리는 낯익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정말 사랑하는 사람, 하루에도 몇 번씩 그리워하는 사람, 내 가장 가지고 싶은 사람에게서는 낯섦만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낯익은 사람이 자꾸 낯선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 반대가 아니라.

 

당신을 참 많이 읽었다고 생각한 것이 거칠고 조악한 오해일 뿐이었다는 사실은 내겐 치명적이다. 나는 당신을 잘 몰랐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당신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만큼, 실은 당신을 잘 몰랐던 나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겐 이 세계가 나와 당신, 그리고 그 밖의 것들로 이루어져 있으니, 단 한방에 내 세계의 2/3가 무너진 것이다.

 


 낯익은 당신

 

 빛인가당신저 손등 아래 지는 당신봄빛인가 당신그래한 상징이었을지도 모를 당신뭉큰손에 잡히는 600그램 돼지고기 같은시간저 육빛인 당신당신은 빛 아닌물인가저 발 아래 일렁이는 당신물 냄샌가 당신그래한 기호였는지도 모를 당신덜컹발에 잡히는 영상 25도 물 온도 같은시간저 온탕인 당신혹 당신은 물 아닌 흙인가저 땅 아래 실은 끓고 있는 바위 같은 당신아직 형태를 결정하지 못한망설이는바위인가사방 100킬로 용암의 얼굴 같은저 낯익은 당신

허수경낯익은 당신」 전문

 

 


2



분명 재판관들이 피고에게 그가 말한 모든 것이 '공허한 말'뿐이라고 드디어 말한 것은 옳았다다만 그들은 이 공허함이 가장된 것이며피고가 공허하지 않은 끔찍한 다른 생각들을 감추려고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이 생각이 반박될 수 있는 것은아이히만은 기억력이 상당히 나쁨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중요한 일이나 사건에 대해 동일한 선전 문구와 자기가 만든 상투어를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일관성 있게 반복한 점 때문이다(자기가 스스로 만든 문장을 하나 말하더라도 그는 이 말이 상투어가 될 때까지 계속 반복했다). 아르헨티나나 예루살렘에서 회고록을 쓸 때나 검찰에게 또는 법정에서 말할 때 그의 말은 언제나 동일했고똑같은 단어로 표현되었다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speak)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이는 그가 거짓말하기 때문이 아니라그가 말(the words)과 다른 사람들의 현존(the presence of others)을 막는따라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05-106

 

개인적이지만 개인적이라서 더욱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은 정말 재미가 없다는 점이다. 한나 아렌트가 보고 적어놓은 수많은 세부사항들이 이 세상에서는 60년도 넘는 세월동안 살아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syo의 머릿속에서는 3일 이내에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결국 철학사 책이나 입문서, 한나 아렌트 개론서에서 몇 페이지 안짝으로 요약해 놓은 지식 이상의 그 무엇도 건지지 못하고 아까운 시간만 박살낸 셈이다. 이게 syo의 탓인지 한나 아렌트의 탓인지(수십 년의 역사가 증언하건대 아무래도 전자일 확률이 크지만) 혹은 세월의 탓인지 모르겠지만, 모르겠으니 말하지 않고 알겠다 싶은 것만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정말, 정말 재미가 없습니다. 진짜로요.

 


 

3



우울증의 문제는 언제나 존재론적 성질을 띠었다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그리고 이 드러남을 이런저런 규칙이나 규범관념에 비추어 바람직하다거나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방식의 문제와 늘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로랑 드 쉬테르마취의 시대, 29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한병철피로사회, 11

 

당연히 더 먼 기원이 있겠으나, syo의 지식 범위 내에서 보면 질병(의 정의나 그 대처방법)과 사회(시대) 사이의 은밀하지만 명백한 관련성을 최초로 의미 있게 짚어낸 이는 미셸 푸코였다. 특히 정신질병(과 더는 그렇게 분류되지 않는 과거의 흔적들, 예컨대 동성애)에서. 그 후 다양한 방면의 논의가 있었던 걸로 보이고, 최근의 학자들은 자신의 견해가 푸코에게서 뻗어 나왔음을 인정하는 동시에 푸코의 사상은 이제 적실성을 잃었음을 선언하는 것을 기본으로 깔고 가는 것 같다. 재미가 있다.

 

syo가 알기로 푸코는, 니체를 언급한 것에 비해 보자면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한 것으로 봐도 무관하고, 심지어 후기에는 마르크스를 훌쩍 건너뛰어 칸트를 만지다가 생을 마무리한 것 같다. 그런데 후학들이 푸코적 관점으로 연구를 거듭해오면서 다시 마르크스와 은근한 연결점을 구성하는 것도 흥미롭다. 결국 푸코의 시대에 비해 오늘날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부과하는 압박이, 주체가 기꺼이 스스로를 성과주체로 재구성하도록 만드는 생존압력이, 각종 정신질환과 정상상태를 판가름하는 잣대 속에 은근하게 숨겨져 있는 노동 착취 가능성혹은 노동력 재생산 가능성따위가 점점 더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피로사회야 재독이고, 원래 괜찮은 책임을 알고 있었지만, 마취의 시대는 단순히 표지와 두께에 끌려 빌려온 것인데 굉장히 신명나게 읽는 중이다. 아무 생각 없이 빌려온 책이 즐거운 독서를 보장해주는 경험은 드물고, 드문 만큼 소중하다.

 

 

 

4

 

2005년 처음 월든을 만난 이후로 매년 한 번씩 읽고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작년은 그냥 넘어간 것 같다. 얼마 전 책 정리를 하면서야 그걸 깨달았다. 잠깐 패닉에 빠졌으나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나의 월든 연속 독서 기록은 사망했다. 월든 연속 읽기(2005-2017). R.I.P.

 

다시 차근차근 기록을 쌓아나가려니 서글퍼진다. 올해부터 바로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저 연속기록을 경신하고 나면 거의 오십 줄에 드는 것인데..... 올해는 소로의 다른 책을 읽어봐야지 싶다. 



혼자가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나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로마 황제의 방처럼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인 곳에서는 혼자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다락방으로 올라간다이곳에선 거미조차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다마루를 쓸지 않아도재목을 나르지 않아도 좋다독일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진실이란 나를 더 나아지게 하는 모든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소로의 일기, 47


현재의 나라는 말을 어디까지 넓게 보느냐에 따라 이 문단은 상당히 달리 읽힐 수 있다. 무난하게는, 내가 나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반자동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여러 의무들, 하기 싫은 일들, 혹은 겉치레를 위해 탕진하고 있는 시간들 따위를 전부 회수하여 내게돌려주자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 좀 더 몰아붙이자면,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내 외부의 것, 관계로부터 벗어나 아무도 없는 곳에서 침묵을 벗하여 지내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읽을 수도 있다. 가혹하게는, 오늘까지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윤리 도덕 준칙들, 조금의 의심도 없이 믿어왔던 세상의 많은 진리들을 다 걷어내고 발가벗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라는 주문으로도 읽을 수 있다.

 

고시원 생활이 답답하지 않을 만큼은 익숙해졌을 때부터는 종종, 손바닥만 한 창문에 커튼을 치고 불을 다 끈 채 무릎을 껴안은 자세로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곤 했다. 혼자 살아도 혼자가 필요했고, 입을 다물고, 귀를 막고, 눈을 감으면 혼자라는 게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불을 켜고 커튼을 걷었을 때, 늘 거기엔 한 번도 혼자였던 적이 없던 내가 혼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불을 끈 나와 불을 켠 내가 의미 있을 만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늘 하던 생각, 나의 생각과 함께라면 나는 쉽사리 혼자가 될 수 없다.

 

 

 

--- 읽은 ---

파리의 생활 좌파들 / 목수정 지음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2 13 / 박시백 지음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 허수경 지음

보트 하우스 / 장정일 지음

351 / 박시백 지음

 

 

--- 읽는 ---

소로의 일기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중국사상사 / 모리 미키사부로 지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지음

빨간 잉크 / 이택광 지음

도둑맞은 페미니즘 / 니나 파워 지음

마취의 시대 / 로랑 드 쉬테르 지음

청춘의 문장들+ / 김연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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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9-05-05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 어린이날 행복하시길 ^^;

syo 2019-05-05 12:59   좋아요 0 | URL
앗 ㅎㅎㅎ 날씨도 좋은 어린이날인데 북프리쿠키님두 행복하소서!!

반유행열반인 2019-05-05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거의 여덟 달 만에 겨우 읽었는데 안 좋은 번역 탓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재미없는 거였을 수도 있군요. 읽을 때 뭔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었는데 서평을 쓰면서 아니 그런데도 서평이 써지네 하고 신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syo 2019-05-05 13:04   좋아요 1 | URL
맞아요. 번역도 후져요. 심지어 주술호응이 안맞거나 조사를 이상하게 쓴 문장도 수두룩빽빽하지요. 이런 깔거리들은 월말 결산을 위해 남겨둔 것인데, 열반인님께 다 털렸네요 앜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19-05-05 13:09   좋아요 1 | URL
어 이 책 syo님도 읽으셨네 하는게 대부분인데 아아주 가끔 제가 먼저 읽은 책이 읽는에 뜨고 다시 읽은에 뜨면 그게 또 소소하게 뿌듯하네요. 헤헤

syo 2019-05-05 13:12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1뿌듯 드려서 저도 2뿌듯하긴 한데, syo가 읽었을 법하지만 안 읽은 책이 얼마나 많은데요 ㅎㅎ

카알벨루치 2019-05-05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취시대> 읽꼬싶넹! 마 취ㅎㅎㅋㅋ마취시키는 쇼군 글~조아! 휴일에 피로회복제 같네 그냥 때론 내용이 이해안되고 어려운 부분도 있는데 음 뭐랄까 여기서 커피 한잔 마셔도 될 것 같은 푸근함이 느껴진다는. 한나 아렌트 잼없다는 거 아는데 넘 솔직하게 이야기하니 더 멀어질려나, 좋네요 어린이날 글 좋네욧!

syo 2019-05-05 18:16   좋아요 1 | URL
칭찬으로 저를 마취시키려는 계획이식군요 ㅋㅋㅋ 시도는 좋았습니다만 ㅎㅎ

쟝쟝 2019-05-05 1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번의 두번째 문단 좋아요. 아프기도 하구. 꾹꾹 눌러담아 좋아요 누르고 갑니다.

syo 2019-05-05 20:32   좋아요 1 | URL
어쩐지 좋아요가 푹 들어가있더라니 쟝쟝님의 솜씨셨군요 ㅎㅎ

뒷북소녀 2019-05-05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만히 읽다보면 했던 말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어요. 아렌트가요.

syo 2019-05-05 20:33   좋아요 0 | URL
결국은 한두 문장을 다양한 방식으로 계속 반복하는 것일까요 ㅎㅎㅎ

독서괭 2019-05-05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아이히만 그렇게까지 재미없단 말입니까... 덜컥 사둔 한나아렌트 전집 땜에 읽긴 읽어야하는데.. 걱정이네요ㅠㅠ

syo 2019-05-05 20:56   좋아요 0 | URL
전 두 번째 읽는거라 더 재미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덤벼드세요!! 그러나 사실 번역도 후지......

2019-05-07 0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9 1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리의 생활 좌파들 - 세상을 변화시키는 낯선 질문들
목수정 지음 / 생각정원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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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0년대 초반, 60명의 코흘리개들이 모여 앉아 코를 흘리는 어느 시골 국민학교학급에서, 차별 혹은 부당한 대접을 받는 모습을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최악의 소수자는 다름 아닌 왼손잡이였다.

 


2  오른손은 그야말로 옳은 손이었다. 실제로 우리 할머니는 오른손을 바른손이라 부르셨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왼손은 틀린 손, 그른 손이 되는 것이고 결국 그 시절, 코흘리개 syo는 왼손잡이가 아니라, 틀린 손잡이였다. 정의는 국가와 사회가 나서서 세우고 바로잡아야 하는 초월적 가치였으므로, 틀린 손잡이 아이들은 필연적으로 교정과 훈육의 대상으로서 나름의 고된 삶을 살아내야 했다. 국민학생 syo가 겪은 몇몇 사건들을 통해 그들의 고난을 짐작해보자.

 


3-1  syo(8, 경남 창녕 거주). 학교라는 곳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조약돌처럼 조그만 아이들이 빽빽이 들어찬 교실, 각자에게 주어진 정말 작은 책상 위에 커다란 네모 칸이 그려진 공책을 펴놓고 아이들은 한글을 배웠다. 칸 속에 희미한 색깔로 그려져 있는 선 위를 연필로 따라 그으면 가갸거겨를 쓸 수 있었다. 그게 또 재미있어서 몰두하는 그야말로 애기들이었다. syo는 집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왼손에 연필을 쥐고 칸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담임선생이라는 작자는 학부모가 순서를 정해서 사 바치게 되어 있는 지시봉이라는 물건을 들고 책상 사이사이를 거닐며 아이들이 글자를 그리는 모습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틀린 손으로 연필을 쥐고 있는 syo를 발견, 지시봉으로 손을 탁 때리며 말한다. “글씨는 오른손으로 쓰는 거야.” 그런 규칙이 있다는 사실을 syo는 처음 알았다. 그래? 그렇다면 그래야지. 즉시 오른손으로 연필을 고쳐 잡았으나 글씨는 삐뚤빼뚤해지고, 무엇보다 속도가 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 지나갔고, 공책 한 바닥을 다 채우지 못한 아이들은 교탁 앞으로 나가 줄을 서서 손바닥을 맞고 자리로 돌아갔다. 생전 처음 맞아본 손바닥이 너무 아팠다. 그리고 억울했다. 내 실력이 이 정도 가 아닌데. 심지어 난 집에서 받아쓰기도 맨날 백점인데! 그리고 다음날, ‘나냐너녀가 시작되었다. 또 손바닥을 맞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syo는 왼손으로 연필을 쥐고는 제 기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냐너녀에 몰입하여 주변도 잊고 네모 칸을 채우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귀싸대기가 날아왔다. 너무 놀라 아픈 줄도 모른 채 올려다보니, 담임이라는 작자가 무슨 공산당 빨치산이라도 보는 듯한 표정으로 syo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글씨는 오른손으로 쓰는 거라고 했지!”

 


3-2  syo(9, 아직도 경남 창녕 거주). 천운으로 이번 선생은 좀 더 온건했다. 온건했지만 그녀 역시 글씨는 오른손으로 쓰는 주의였고, 그런 주의를 syo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자주 주의를 주었다. 그럼에도 syo는 요지부동이었다. 싸대기를 맞아가면서도 선생이 안 볼 때는 몰래 다시 연필을 옮겨가며 지켜낸 왼손이었으니 주의를 주는 정도의 약한 처방으로는 syo틀린 손을 고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생은 제 딴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징벌을 내렸다. 국민학교 2학년 1학기 syo의 통지표에는 이런 식의 문구가 쓰여 있었다. “성격이 활달하여 교우관계가 폭넓고 학업 성취도가 뛰어나지만 왼손으로 글을 씀.” 이건 플러스-마이너스 제로를 말하는 것일까? 활달한 성격 + 넓은 교우관계 + 뛰어난 학업성취도 왼손잡이 = 0? 그것이 궁금했던 아버지는 통지표를 들고 학교에 찾아가 선생과 면담한다. 그 자리에 syo도 있었다. 왼손잡이라는 이유로 1년 내내 얻어터지고 돌아올 때는 콧방귀도 안 뀌더니 통지표에 한 줄 적혀 있다고 당장 학교에 찾아가는 아버지의 교육관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선생의 당당함도 이해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버님, 이유야 어찌 되었든 왼손으로 쓰는 건 교육상 고쳐야 합니다.”만 주구장창 반복되다보니 결국 아버지도 열이 받은 것이다. “이보세요, 선생님. 우리 애 교육은 제가 결정할 문제지 이제 반년 더 보고 말 선생님이 이래라 저래라 하실 건 아니지요. 목욕탕에서 짜장면을 시켜먹건, 똥밭에서 수박화채를 말아먹건 그건 우리 자유니까 선생님이 간섭하지 마세요.” 뭐 이런 식의 대꾸를 남기고 아버지는 돌아섰는데, 결국 아버지 입장에서도 아들이 왼손으로 글을 쓰는 건 똥밭에서 수박화채를 먹는 것과 유사한 일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 왼손으로 쓰고 싶으면 그냥 써. 지들이 뭔데 지랄이야.” 이랬던 걸 보면, 경상도에서 태어나 경상도 남자로 경상경상 살다 가신 우리 보수 아버지(지지정당 민자당)에게도 뜻밖의 반골기질은 있었던 것 같다.

 


3-3  syo(10, 대구시 거주). 과연 대처의 선생은 달랐다. 한 가지 방법만 사용해서는 틀린손잡이들을 교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그는 화전양면전술을 구사, 친구들이 보는 데서는 때렸고 친구들이 없는 데서는 얼렀다. 굳이 왼손이 이유가 아니더라도 맞거나 단체기합을 받거나 하는 일이 여사였던 개 같은 시절이었으므로 3년쯤 국민학교를 다니고 보니 체벌은 피해야 할 일이 되었을 뿐, 행동양식을 교정하는 데는 이미 영향력을 소실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어르고 달래는 것은 참신했다. 물론 참신하다고 효과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syo, 오른손을 쓰라는 건, 다 너를 위해서 그래. 봐봐, 우리 반에 너 말고 왼손으로 쓰는 애가 있니? 친구들 다 오른손잡이잖아. 너만 왼손으로 써서 되겠어?” “선생님, 우리 반에 저 하나 손 씨라고 제가 성을 갈 수는 없잖아요.” “syo, 그게 아니라, 우리 반에서 너만 왼손잡이인 것처럼, 온 세상에는 왼손잡이보다 오른손잡이들이 훨씬 많아요. 그래서 물건들도 다 오른손잡이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단다. 가위만 해도 봐봐, 네가 가위질을 잘 못하는 게, 가위가 오른손잡이용으로 만들어져서 그래요.” “선생님, 왼손잡이용 가위를 만들면 되잖아요.” “그런 건 못 만들어. 세상 사람들이 다 오른손잡인데 왜 왼손잡이용 가위를 만들겠어. 왼손잡이들이 오른손으로 바꾸면 일이 훨씬 쉬운데.” “선생님, 사람들은 TV도 만들고, 게임기도 만들고, 심지어 비행기도 만드는데, 왜 왼손잡이 가위를 못 만들어요?” 화전양면전술은 끝났다. 철없는 syo는 이제부터 친구들이 보건 말건 얻어터지기 시작한다.


 

3-4  8, 9세의 syo가 겪은 일도 돌아보면 참 인상적이지만, 마지막 선생의 대응이야말로 놀랍도록 많은 것을 시사한다.

 


4  어떤 생각을 품은 사람들은, 그 생각이 다수의 것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배척당하고 교정의 대상이 된다. 세상은 다른 생각을 품은 사람들에게 불편한 곳이고, 그 불편을 해소할 역량이 충분하고도 남음에도 되레 불편을 강조하고 강요하는 방향으로 작동함으로써 소수자를 교정하려 한다. 심지어 이게 다 너를 위한 거라는 말까지 덧붙여 가며. 그 부당한 불편함(‘다른 생각에게 주어지는 불편함은 왼손잡이가 당해야 될 소소한 고통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닐 만큼 다면적이면서 거대하다) 혹은 불편한 부당함에 맞닥뜨리면 많은 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거나 수정하여 세상과 보폭을 맞춰 살아간다. 그건 비난할 일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삶을 어느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인지에 대한 개인의 선택일 뿐이다. 그래서 행복하다면야. 그러나 끝내 세상과 다투는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때 세상은 얼른 표정을 바꾸고, 어르고 달래기를 포기한다. 낙인찍고, 탈락시키고, 빼앗고, 모욕한다. 이렇게 되면 여기서부터는 싸움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일방적인 폭행의 국면이 열린다. 그 안에서 꿋꿋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식의 싸움을 모색하고 이어나가는 사람들이 이 책 안에 있다. 귀 기울여 들을 만한 노하우들을 잔뜩 던져주면서.

 

좌파의 최종진화형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생활좌파는 이론좌파보다는 한 발 더 나아간 입장인 것 같다. 세계는 우리의 이론이 아니라 생활에 침투한다. 그들은 우리의 태도, 자세, 언어, 관계, 생계를 건드린다. 이런 판국이라면 우리는 마르크스의 말씀보다 더 적실한 무기를 찾아내 무장해야 한다. 그 무기를 어떻게 발명하는가, 인터뷰이들은 그 무기의 레시피를 담담하게 서술한다.

 


5-1  첫째, 시련이 필요하다.

 

나는 이전까지 신체적으로 완전히 건강하고내가 건너뛸 수 없는 역경은 없으며내가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그러나 유도를 하다가 부딪힌 그 단순한 사고로 나는 잠시나마 오직 죽기만을 열망하는 시간을 겪었고거기서 날 구해준 사람들은 비제도권의 의사였다이 사회가 내쫓은 사람들인 것이다내가 견고하다고 믿었던 이 세상의 모든 겉모습이 일순간에 와르르 무너져내렸다나는 진정으로 무엇을 알고 있는지내 삶이 잠시라도 헛된 일에 소모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기 시작했다그러자 자본의 논리로만 굴러가는 이 세상의 어리석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아무것도 손으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오직 돈을 내고 뭔가를 사서 소모하고또 뭔가를 소비하기 위해 돈을 번다는 현대 자본주의사회의 모델이 역겨워졌다. _ 92


 

5-2  둘째, 시련을 벽이 아니라 시련으로 바로 볼 수 있는 더듬이가 필요하다.

 

그들(지배계급)이 이 모든 것을 '문화'라고 분류하는 순간 우린 그것으로부터 소외된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어쩌면 문화부가 생겨나지 않았던 시절그들이 팔 걷어붙이고 달려들어 한류며 케이팝이며 관광단지며 무형문화재 따위를 만들어내지 않았던 시절아니 문화라는 단어가 제도와 자본 사이에서 이토록 역겹게 나뒹굴지 않고 우리가 그런 개념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조차 없던 시절우린 익숙하게 문화를 걸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_ 63

 


5-3  셋째, 내 시련이 아닌 남의 시련은 없다는 것을 알아채는 감수성이 필요하다.

 

Q. 당신에게 좌파는 어떤 사람인가?

A. 다른 먼지들이 진정한 자유를 갖지 못하고 있을 때 ''라는 먼지만 홀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_ 204


 

5-4  넷째, 나의 방식을 찾기 위해 누구보다 나를 잘 들여다보는 눈이 필요하다.

 

  자크 제르베르의 아름다움을 향한 예찬은 단지 예술작품에 그치지 않는다길에 서서 이야기를 하다가도 서쪽 하늘에 석양이 걸릴 때면 "저길 좀 봐정말 아름다워"라며 말을 끊기 일쑤다길을 같이 걷다가 건물 벽에 조각된 여신상을 보면 그것을 벌써 300번쯤 보는 것일지라도 "제발 저것 좀 보라고저 곡선의 아름다움을"이라고 말하며 감탄의 신음을 연신 내뱉는다이제 예순을 조금 넘긴 이 남자는 언제 어디서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포착하느라 분주하다.

  이 같은 열정은 파리에서 열리는 거의 모든 집회에 얼굴을 들이밀고 권력의 거대한 힘에 저항하는 소수자들 속에서 한 뼘 더 성장하고 싶어 하는 그의 욕망과 관련이 있다언제나 첫사랑을 만난 듯 밝게 상기되어 있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싱그러운 농담을 건네려고 애쓰는 그를 보면 곳간에 장작이 쌓여 있지 않아도 지금 가진 초 하나로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의 차가운 손을 녹이려고 애쓰는 사람 같다그가 집회장과 전시장영화관을 하나의 단상에 나란히 올려놓고 그곳을 갔다 올 때면 자신이 한 뼘 움직였음을 느낀다고 말할 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그것이 바로 그가 말한 일상적 실천과 제도적 혁명을 양손에 쥐고 가는 그의 방법이라는 사실을유토피아는 결코 지옥의 끝에 문득 다가오지 않을 것이며더 많은 미소와 환희희열들이 일상에 쌓이고 쌓였을 때어느새 옷처럼 우리에게 입혀지리라는 것을. _ 80-81


 

5-5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활이 끝나기 전까지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므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벼려 나가는 끈기가 필요하다.


대학은 굳은 지식을 전하는 곳이야거기서 배운 지식은 사람들을 해방시키기보다 가두는 경우가 더 많아하지만 운동가는 자신이 꾸는 꿈과 현실에서 마주하는 문제들로 인해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하고 방법을 모색하게 되지토론하고 선언하고 실천해 나가면서 온전히 우리에게 피와 살이 되는 지식과 지혜를 삶 속에서 얻고그것은 우리를 더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해방의 열쇠를 제공하지. (...) 그러니 질문을 멈추지 말 것질문의 노마드로 계속 살아가는 것그것이 활동가의 첫 번째 사명이야. _ 28 


 

6  좌파에게 좌파라는 것은 별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가 지니고 있는 태도고, 세상에 대응하는 방법이고, 삶을 만들어가는 자세다. 왼손을 틀린 손으로 만드는 것은 오른손을 옳은 손으로 드높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치사한 말장난일 뿐이다. 내가 좌파인 것은 우파에게만 경천동지할 일이다. 왼손잡이는 오른손 가위만 있는 세상에서도 그럭저럭 살아냈다. 그러나 오른손만이 바른 손인 이들에게 왼손 가위의 등장은 바른 손의 권위를 나눠줘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때로는, 생활 차원에서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왼손 가위를 발명하는 것이, 이념 차원에서 저들의 견고한 성벽에 뜻밖의 포탄을 날리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생활 좌파라는 것은 아름답지만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개인의 개인적 투쟁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추상적 집단을 위해 동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또 다른 개인을 위한 옹호가 될 수 있는 것. 옹호 받은 개인 역시 자신만의 개인적인 방식으로 생활 속 전쟁을 이겨나가는 중에 서로가 서로의 든든한 동지가 되는 것. 21세기형 좌파는 이렇게 앞으로 가는 것인가 보다. 이념의 거대한 깃발을 잘 나누어 각자의 방으로 가지고 들어간다. 그 조각을 나의 개성에 맞게 리폼한다. 다시 광장에 나온다. 광장은 이제 백만 개의 저마다 다른, 그럼에도 어딘지 닮은 깃발들의 바다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깃발을 올려다보기보다는 깃발을 든 서로의 표정을 마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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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2 1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2 1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설해목 2019-05-02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훌륭한 글을 읽고나서도 제가 궁금한 건 그래서 syo님은 글씨를 여전히 왼손으로 쓰는건가.. 입니다. ㅎㅎㅎ;;;
저도 왼손잡이입니다. 아빠에게 왼손이 묶여 하루를 굶기도 하고 syo님처럼 아이들 앞에서 선생한테 손등을 엄청 맞고......
저는 결국 선생에게는 굴복하여 글씨만 오른손으로 쓰고 그 외의 손으로 하는 모든 건 왼손으로 하지요.
명절때 모인 어른들의 왼손으로 밥먹으면 시집 못간다는 말을 꿋꿋하게 무시해가면서 버텨온 긴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 갑니다. ㅋㅋㅋ
한때는 왼손잡이라는 이유만으로 <왼손잡이의 역사> <왼손이 만든 역사> <왼손잡이 여인> <왼손잡이> 뭐 이런 책들도 좀 봤더랬지요. ㅋㅋ

각자의 개성에 맞게 리폼한 21세기형 좌파라..... 이거 정말 멋진 표현입니다!
고민하던 부분이었는데 한결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다고 해야할까요. ^^

syo 2019-05-02 17:57   좋아요 3 | URL
네. 저는 왼손으로 글씨를 씁니다.

심지어 패면서 고치라는 게 너무 기분이 나빠서 더 엇나가야겠다는 생각에 발까지 왼발로 바꿨습니다. 어린 syo는 그래도 고집과 강단이 있었지요.

지금 같으면 아마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좌파는 이념이 아니라 자세라고 합니다. 물론 이론과 개념들이 자세를 바로잡는데 큰 도움이 되겠지만 결국은 자세와 태도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무식하지만 힘내서 열심히 살아보려구요 ㅎㅎㅎ

설해목 2019-05-02 18:35   좋아요 0 | URL
부럽습니다. 그때 고통에 굴해 오른손으로 옮겨간 것이 무지 후회가 되네요, 두고두고.

그 자세와 태도에 대해 고민 아닌 고민이었거든요. 좋은답 얻었습니다. ^^

레삭매냐 2019-05-02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다 보니 예전 학창 시절,
좌장면만 먹고 좌전거만 타고
좌측통행만 한다던 선배 생각이
문득 났습니다...

그나저나 쁘띠부르주아 지식인
의 글은 왠지 불편하게 다가오네요.

어느 삐딱선의 투정일까요...

syo 2019-05-02 18:0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제가 저간의 사정을 잘 몰라서 달리 말씀드릴 건 없지만, 이 책은 인터뷰집이라서 아무래도 사정이 좀 낫겠다 싶습니다.

그나저나 좌장면 좌전거라는 표현은 살짝 옛스럽지만 되게 좌밌습니다ㅋㅋㅋ

stella.K 2019-05-02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놀랍네요.
제가 어렸을 때 오른손, 왼손에 대한 가르침과 눈총이 심하지만
스요님 때는 그런 게 거의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 그랬네요.
전 오히려 이해 받는 쪽에 속했던 것 같습니다.
외국은 오히려 왼손을 더 쳐준다면서 말이죠.

저도 스요님과 같은 생각을 했더랬죠.
바른손이라는 것도 왼손이 있어야 가능한 거지 혼자 바른손이면
뭐하겠습니까? 순간 그렇게 나누는 게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요즘엔 왼손잡이도 많아졌고 오히려 왼손으로 글씨 쓰면 멋있지 않나요?ㅎㅎ
참고로 저도 왼손으로 글을 씁니다.

근데 오늘은 3-1, 3-2. 3-3....으로 나눠 쓴 게 인상적이군요.
무슨 기준으로 나눈 건가요?
마치 반인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때 3-4반이었는데...ㅋㅋ

syo 2019-05-03 00:42   좋아요 0 | URL
많은 왼손잡이님들이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하였음을 증언하고 계시네요 ㅎㅎㅎ 저도 억압의 막차를 탔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니까 선생님들이 마치 짠 것처럼 아무도 제 왼손을 터치하지 않더라구요.

3-1, 3-2 이렇게 나눈 건 그냥 내용상 병렬로 구성되는 게 맞겠다 싶은 문단을 나란히 배열하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ㅎㅎㅎㅎ

그리고 전 3학년 2반이었지요 ㅎㅎ

수연 2019-05-02 2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잔나비 들으면서 읽다가 저도 모르게 아 좐나비 좋다...... syo님은 더 좋아요......

syo 2019-05-03 00:43   좋아요 0 | URL
요즘 수연님이 잔나비에 흠뻑 빠져 계시다는 걸 제가 익히 알고 있는데, 무려 more than 잔나비라니, 신납니다^-^

독서괭 2019-05-02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왼손잡이라는 이유만으로 귀싸대기를 맞다니.. 그 이유만이 아니라도 있어서는 안 될 일이건만요. 정말 폭력적인 시절이었네요... 그나저나 그 어릴 때 이미 syo님의 좌파적 앞날은 예고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ㅎㅎㅎ

syo 2019-05-03 00:47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어릴적부터 이미 될성부른 빨갱이였던 것입니다!! ㅎㅎㅎ

요즘은 저렇게 패지는 않겠지만, 제도권 교육이라는 것이 소수자에 가하는 교정 압박이 근본적으로 해소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어떤 부분에서는 알게 모르게 소수자고, 전 제가 낳은 아이들에게 이런 제도 하의 교육을 시키면서 분노하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하고 있답니다. 물론 전적으로 교육환경 때문만은 아니겠습니다만......

반유행열반인 2019-05-03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왼손과 오른손이 공생하는
세상이 오길...올까요? (오른손잡이 대표 겸 못난 선생 대표로 반성하며 오른뺨 철썩철썩)

syo 2019-05-05 12:06   좋아요 1 | URL
탄압받다가 탄압받지 않게 된 왼손잡이 입장에서는 이 정도면 공생하는 세상이 왔다고 말하겠습니다만,
사실 저건 비유적인 말씀이셨겠으니, 대답이 되지 않겠죠? ㅎㅎㅎㅎ
답이 없으니 대답이 없는 걸로 할까요.

오른뺨 말씀이 나와서 말씀인데,
내 부어 오른 오른뺨을 자연스럽게 만져줄 수 있는 상대방의 손은 그의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임을 오른손잡이들이 알게 된다면 세상이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요.
여기서 ‘오른손잡이들‘은 당연히 비유고요 ㅎㅎ

쟝쟝 2019-05-05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체 왜 때려요 ㅠㅠㅠㅠㅠㅠㅠ 진짜.. 저도 그시대를 살았지만 ㅠㅠㅠㅠ 정말 ㅠㅠㅠ 말도 안되는 시절이었어ㅠㅠㅠㅠㅠㅠㅠ

syo 2019-05-05 20:14   좋아요 1 | URL
하도 맞다 보니 맞는 사람도 맞을 만해서 맞는다고 착각할 정도였잖아요 ㅎㅎㅎ 저도 심지어 왼손으로 쓰면 얻어터진다는 건 당연히 깔고서 ‘그럼에도‘ 쓴다는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쟝쟝 2019-05-05 20:18   좋아요 0 | URL
전 맞는 걸 수치스럽게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맞을때 최대한 안아픈척 하는 것이 복수하는 거라 생각했던 아픔을 잘 참는 (서늘한) 어린이였어요... 어린이날 맞이 독한 어린시절 배틀 같네요 ㅋㅋㅋㅋ

syo 2019-05-05 20:35   좋아요 1 | URL
전 별로 독한 아이는 아니었어요 ㅋㅋㅋㅋ 기꺼이 패배를 인정합니다. 쟝쟝님이 이 구역의 독한 어린이세요.

쟝쟝 2019-05-05 21:41   좋아요 0 | URL
맞을 줄 알면서도 왼손으로 쓰는 그 마음이 더 독한거예요☝️전 맞을 상황을 최대한 피했다구요.. 독한어린이!!

문모운 2019-05-11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녕이 이상했던 건가 대구가 이상했던 건가 아리송하구만. 왼손잡이 탄압이 버킷리스트에라도 들어있는 것처럼 구는 사람들을 어찌 그리 많이 만났어? 나는 왼손잡이들을 동경했었는데~

syo 2019-05-12 13:29   좋아요 0 | URL
특별히 골라서 만난 건 아니고 그냥 그땐 다 그랬던 것 같은데.
하도 다들 그러니까 특별히 그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느낌도 받지 못했어.
내가 이상한 놈 같았지.

근데 알다시피 나는 이상한 놈 취급 받는거 은근 즐기는 변태였잖아. 그런 이유로 퉁쳐서 그럭저럭 살만 했어.

문모운 2019-05-13 10:09   좋아요 0 | URL
@syo 엄청 변태였네 몰랐어☺️

syo 2019-05-13 11:21   좋아요 0 | URL
뭐래, 남의 매력포인트 함부로 비하하지 마라.

문모운 2019-05-13 13:42   좋아요 0 | URL
syo 변태혐오 안 하겠습니닷😑
 

 

이번에는 책을 좀 성의 있게 처분하는 중이다. 가지고 있는 것들 전체를 까뒤집어 놓고서는 고작 몇 권 억지로 뽑아내 손을 벌벌 떨며 울며 겨자 먹기로 팔아치운 적은 많았지만, 이번처럼 사과 박스를 통째로 해치워버린 건 처음이다. 그래봐야 얼마 쳐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얼마 되지도 않는 돈으로 나는 또 책을 사겠지..... , 어쩌다 끝없는 욕망과 시장경제의 허망한 콜라보에 걸려들었나. 책 판 돈으로 책 사고 그 책을 다시 팔아서 또 책을 사고.....

 

고전이고 나발이고 두 번 읽지 않을 것 같다거나, 내 역량으로 읽어봐야 연구서나 개론서 한 권 읽는 것보다 건지는 게 없겠다 싶은 철학 원전 등등을 과감하게 숙청한다. 첨엔 마음이 좀 허전했지만 떠나보내고 나니 걔가 원래 있던 앤지 없던 앤지, 난 자리가 흔적조차 없는 마당이다. 이럴 걸 왜 그리 움켜쥐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경험상, 칸트가 썼건 칸트 와이프(없다)가 썼건, 구해놓고 3년이 지나도록 한 번을 열어보지 않은 책은, 결국 열어보지 않는다. 지금 팔아치웠다가 정말 읽고 싶어서 미칠 지경일 때(가 만약에 온다면) 다시 사서 읽으면 된다. 그럴 때가 오지 않는다면 불필요한 책을 팔아치웠으니 잘된 것이고, 그럴 때가 오면 그건 그거대로 땡큐다. 단돈 몇 만원 손해보고 몇 년 동안 생기지도 않던 고전독서의 의욕을 사들인 것이라 치면 되지 않을까.

 

하여간 이놈의 정신승리란.

 

 

201904 : 24

 


1.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 / 김보통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

: 김보통 작가님 스스로는 사건도 주제도 교훈도 없는 글을 쓴다고 너스레를 떨며 첫 꼭지를 열었지만, 그건 그야말로 엄살일 뿐이라는 사실을 syo는 바로 알 수가 있다. 주제도 교훈도 없는 글이 어떤 글인지, 그걸 쓰는 기분은 또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또 s모씨이기 때문이다......

: 실제로는 사건도 주제도 그리고 교훈도 다 있다. 심지어 그림까지 있다. 그런데 엄살까지 갖췄단 말인가? 이 정도면 이거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법에 저촉되는 거 아닌가요?(당연히 아닙니다) 이런 보통 아닌 글을 쓰면서 스스로 김보통이라 칭하다니, 이거는 부정경쟁방지법이나 상표법 저촉 아닌가요?(이것 역시 아닙니다)

 

2. 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 / 김나연 지음 / 문학테라피 / 2018

: 일단 제목에 들어있는 모든 명사가 나를 꼬신다. 동물, 그거야말로 이 험한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지. 우울, 그것은 하루 두 끼 식후에 꼬박꼬박 챙겨먹는 디저트 같은 감정이고. 그리고 세.....섹스. 허허허허허허 어허허허허허.

: 이 책 속에 동물이나 우울이나 섹스가 syo의 예상(기대)만큼 들어있었는가를 놓고 생각하면 입맛만 다실 밖에. 그러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런 저런 것들이 잔뜩 있었고, 잘 쓰는 글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복잡 미묘한 감정 역시 배부르도록 느낄 수가 있었다.

 

3.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8

: 이것은 인문학 책이다. 선생님 허수경의 생각을 눌러 담은 책이 아니라, 읽는 이가 생각을 펼칠 수 있게끔 발굴자 허수경이 자신의 발굴 도구를 선뜻 빌려주는 책이다. 이런 책이 이젠 더 나오지 않는다니.....

 



4. 꽃을 보듯 너를 본다 / 나태주 지음 / 지혜 / 2015

: 표현은 개인의 취향이겠으나, 시가 겨냥하고 있는 마음이 너무 단순하고 평면적이지 않나? 그리하여 물론 공감의 여지는 많겠으나, 공감하였음을 자랑할 만한 생각들은 아니지 않나? 누구나 이만큼의 사랑을 얻을 수는 없겠으나, 누구나 이만큼의 글을 지을 수는 있지 않나?

 

5. 저녁의 연인들 / 황학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

: 읽는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 문장의 신기함을 허용할 수 있는 정도라는 게 있을 것이다. 보조관념과 원관념 사이의 거리가 너무 먼 비유법이라든가, 전혀 예측할 수 없었고 동시에 반드시 필요한지도 아리까리한 의인법, 활유법이라든가 하는 기술들이 과연 어디까지 기교로, 참신함으로,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따위를 결정하는 경계선 같은 것. 문장이 그 경계선에 가까이 다가가 붙을수록 아, 어떻게 이런 생각을! , 정말 천재다! , 이런 사람이 있으니 나 같은 놈이 글을 써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 것은 죄악일거야! 따위의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다가 그 선을 넘어서는 순간, 뭐야, 욕심이 과했네! 뭐야, 잘난 척 쩌네! 뭐야, 읽는 사람 배려 안 해? 같은 반응으로 급전환 되는 그런 경계선. 저마다의 경계선. 황학주 선생님은 syo의 경계선에 바짝 붙어 계신다. 아슬아슬하리만큼 아름다웠다.

 



6. 이토록 보통의 / 캐롯 지음 / 문학테라피 / 2018

: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사랑이란 참으로 신묘하여, 비슷한 상황에 있는 사랑들도 각자 저마다의 방향으로 사방팔방 결론난다. 모든 결론이 다 가능하다. 모든 사랑이 다 개연성이 있고, 아무리 쓰레기 같은 사랑 이야기여도 최소한 세상의 누구 하나는 그 사랑에 공감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남의 사랑 이야기는 더욱 쓸모가 있다. 지금 이 순간 지구 표면의 어디선가는 결코 있을 법하지 않은 개막장 사랑이 진행되는 중이며, 바로 그 시각 또 다른 어디선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아 고귀한 동시에 진귀한 참트루 러브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사랑 이야기를 하나 창조하는 일은 사실 하나 이상의 실재하는 사랑을 옹호하는 일이 된다. 누군가에게 보통 아닌 사랑이, 이미 누군가에겐 이토록 보통의 사랑일 따름이다.

 

7.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 / 이종산 외 지음 / 큐큐 / 2018

: 그러니까 우리는 사랑하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 아무리 망한 사랑이라도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고, 이야기를 옹호하는 일이 되므로. 그리고 그 이야기가 다시 지구 어딘가에서 울고 있는 어느 약한 사랑의 등을 두드려줄 것이므로.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맡은 일이다. 사랑을 멈출 수는 있어도, 사랑하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

 

8. 멜랑콜리 해피엔딩 / 강화길 외 지음 / 작가정신 / 2019

: , 짧지만 이건 너무 좋아! 하는 글들이 몇 있는 반면, 와 이건 정말 성의가 없군, 싶은 글도 있었다. 짧은 지면 속에서도 딴딴하게 몰아붙이는 작품도 있었지만, 휘뚜루마뚜루 덤벼드는 글도, 뱀 꼬리마냥 스리슬쩍 찍 마무리지어버리는 글도 있었다. 스무 개가 넘는 작품이 다 좋을 수는 없다. 당연하지. 그렇지만 아마도 책으로 묶여 나온 걸 보고 아차 싶었던 작가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9. 인간 루쉰 / 린시엔즈 지음 / 김진공 옮김 / 사회평론 / 2007

: 上下 합쳐 1500쪽은 되는 분량을 채우려면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할까. 우선 루쉰이 쓴 글을 폭넓게 싣는다. 그리고 루쉰에 대한 견해를 풍부하게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루쉰이 했으리라고 추측되는 생각이나 그가 친구들과 나눴으리라고 짐작되는 대화 같은 것들을 마치 소설의 한 장면처럼 구성한다. 특히 마지막 기술은, 달아나지 못하도록 독자를 현혹하고 1500페이지의 대장정을 끝마치게 하려면 구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과하긴 하지만, 단 한 종의 평전만 소유하려면 이 책이 가장 든든한 것도 사실이다.

 

10. 루쉰 문학선 / 루쉰 지음 / 루쉰전집번역위원회 옮김 / 2018

: 루쉰 평전을 읽기 전에 읽은 루쉰의 글과, 그 후에 읽은 글이 다르다. 광인은 왜 저런 모양으로 미쳤는지, Q는 대체 뭐 어쩌자는 자식인지, 저 캐릭터들은 어째서 태어나야만 했는지를 100년 후의 타국에 사는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기란 쉽지가 않은 일 같다. 결국 평전과 작품이 시너지를 만든다. 서로를 읽게 한다. 아직 루쉰 평전을 읽기 전이시라면, 루쉰의 소설을 읽어보시기를. 그리고 루쉰 평전을 읽어보신 분이라면, 루쉰의 소설을 읽어보시기를. 결국 당신은 루쉰을 읽어야 하는 운명인 것입니다. 답정루. 으하하.

 



11. 누구를 위한 높이인가 / 박현찬, 정상혁 지음 / 서울연구원 / 2017

: 별다른 말을 붙일 만한 책은 아닌 것 같다. 서울시에 세워진 건축물들에 높이에 관한 역사, 규정, 현황과 나아갈 방향 같은 것들에 대한 정보를 별다른 색깔 없이 제시하는 얇은 책이다.

 

12. 마르크스 평전 / 프랜시스 윈 지음 / 정영목 옮김 / 2001

: 작년,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 몇 권의 책이 추가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에는 빨간 표지의 마르크스 평전 트로이카라는 것이 존재했다. 걔들은 저마다 특색이 뚜렷하다. 이사야 벌린의 책은 전반적으로 마르크스를 깐다. 자크 아탈리의 책은 반대로 마르크스를 빤다. 그리고 이 책은 마르크스를 놀린다. 그렇다면 셋 중 누가 마르크스의 유령과 가장 친한 친구겠는가. 다양한 평전이 나와 있는 시점이다 보니 이런 질문 또한 읽을 책을 고르는 데 역할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13. 논어를 읽기 전 / 정춘수 지음 / 부키 / 2013

: 눈이 밝고 생각이 깊은 이는 논어를 읽지 않아도 벌써 이 정도다. 반면 syo 같은 인간은 논어만 해도 각종 번역본으로 다섯 번을 읽었으나 아직도 이렇게 산다. 뭐 철학이 대충 다 그렇지만, 동양철학이라는 놈들은 유독 더 사람 차별한다. 과연 반상의 법도는 지엄한 법인가요.

 

14. 군자를 버린 논어 / 공자 지음 / 임자헌 옮김 / 루페 / 2016

: 번역자의 재량을 좀 크게 투여하여, 마치 2016년 당시 살아 있는 공자를 찾아가 묻고 대답을 들은 것 같은 문체로 논어를 풀어냈다. 쓸모는 당연히 있고, 득실의 크기는 독자가 저마다 알아서 판단할 문제다.




15.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 / 정성희 외 지음 / 사우 / 2018

: 여러 저자가 한 꼭지씩 맡아서 완성한 책인데, 단순히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한 글들임에도 글쓴이마다 편차가 크다. 지식의 편차, 문체의 편차가 아니라 정성의 편차.

: 도대체 <흠흠>는 누가 쓴 뭐하는 책인가요. 이 오타를 낸 이의 글은 전반적으로 보아 퇴고를 거치지 않은 것으로 강하게 추정된다. 재밌는 것은, 이분이 또 다른 꼭지에서는 글을 굉장히 잘 썼다는 것이다. 그것 참.

: 누구라고 말을 하지 않겠지만, 또 다른 이는 글을, 정말 너어어무 못썼다. 처음 손끝에서 나온 글을 그대로 던져 놓은 게 아니라면 이럴 수가 없다. 전공이 무엇이건 인문학 분야에서 전문적인 연구 활동으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그리고 막대한 양의 활자를 헤치고 나와 그 위치까지 도달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지니게 될 수밖에 없는) 글쓰기의 수준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syo는 이거, 그냥 정성 부족이라고 본다.

 

16. 문장의 온도 / 이덕무 지음, 한정주 엮음 / 다산초당 / 2018

: ‘온도라는 어쩐지 포근할 듯한 단어를 달아놓은 제목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 자신이 연구하는 사람은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것이 인지상정이다. 연구자의 극찬이 일반 독자들에게 과찬으로 들리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당연히 이덕무의 글은 좋다. 그렇게 많이 읽고 꾸준히 쓴 사람의 글이 200년 전 작품이라 해서 별로기는 어렵다. 시간을 들여 읽어볼 만큼 충분히 아름답고,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대목도 있다. 그럼에도 좋게 말하자면 고풍, 막 지껄여보자면 고루한 데는 있다. 이덕무의 문장이 훌륭하다는 것이야 이론의 여지가 없다는 분위기지만, 그걸 훔쳐와 내 문장에 매끄럽게 바르려면 센스가 꽤 필요하겠다. 그런데 그 정도 센스가 있는 사람은 자기 문장을 잘 쓸 것이다. 문장 안에 든 생각 역시 당대에는 깨치고 치고 나간 생각이었겠으나 200년 지난 관점에서 보면 상식에 절반, 상식 이하에 절반이 걸쳐 있는 수준이다. 오늘날 눈높이로 이덕무가 낡았다고 욕하는 게 아니라, 책을 읽고 나서 얻은 게 이덕무는 뛰어난 사람이었다.”라는 한 문장이라면 이건 나를 위한 독서가 아니라 이덕무를 위한 독서가 되는 거잖아.

 

17. 단박에 조선사 / 심용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

: 심용환 선생님의 책을 몇 권 읽었더니, 이제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 심용환 선생님의 코멘트가 시작되는 순간 어떤 관점으로 풀어나가실지 예측이 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면 이제 다른 작가의 역사책을 읽어볼 필요가 생긴 것이라 하겠다. 그런 책이다. 부족하지 않은 한 권인 동시에 한 권으로는 부족하겠으니 계속 읽어나가 보자는 기분이 들게 하는.

 



18-23.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6-11 /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

: 한 달에 딱 다섯 권씩 읽어서, 네 달이면 정복하리라는 계획이다.

 



24. 본격 한중일 세계사 1 /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

: 이른바 서브 컬쳐라는 컬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거나, 그 컬쳐가 컬쳐는 무슨 컬쳐냐는 생각을 가진 독자들에게는 권하지 않는 책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굽시니스트 작가님은 센스가 좋고 글도 참 잘 쓴다는 사실은 언급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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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해목 2019-05-01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그런거였군요. 3년 동안 열어보지 않은 책은 미련없이 처분해야 한다는 syo님의 말씀에 저도 처분할 책들 선별작업 들어가야겠습니다. ㅋㅋ 근데 그런 책들이 너무 많아........... 책장 절반이 빌 것 같아요. ㅎㅎㅎ;;;;;
저 두꺼운 루쉰 평전 읽게 될까봐 루쉰 문학선을 읽지 말아야 하나 고민 들어갑니다. ㅋㅋ
<멜랑콜리 해피엔딩>은 제 발 저리는 작가가 누구일지 궁금해서라도 읽어봐야하나 갈등 들어갑니다. ㅋㅋ

syo 2019-05-01 22:03   좋아요 1 | URL
제가 또 고민거리를 남겨드렸군요.
아니야 이게 다 설해목님의 독서의욕이 충만하시기 때문이에요!! 제 탓 아닙니다 ㅎㅎㅎㅎㅎ

책장은 비워봐야 사실 곧 다른 책으로 찰 텐데 말이에요 ㅎㅎ

단발머리 2019-05-01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처분의 시원섭섭함이란 뭐,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처분하고 나면 그 책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이....
아, 내가 그 책 왜 버렸지? 아니면, 아닌데!! 그 책 안 버렸는데, 왜 없지? 이런 생각 ㅠㅠ

빨강의 유혹 <마르크스 평전>이랑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 읽어봐야겠어요.
쇼님 글 읽으면 다 읽어보고 싶지만, 간추리고 솎아내고 추리고 추려서^^

syo 2019-05-01 22:06   좋아요 0 | URL
같은 책 있는지도 모르고 또 사는 거랑 어느 게 더 착잡한 일일까요??

그러고 보니 안젤라 카터 책 두 권 사셨던 어느 다....님이 떠오른다?? ㅎㅎㅎ

단발머리 2019-05-01 22:08   좋아요 0 | URL
그 분이 이 댓글을 좋아합니다^^
자나깨나 다...님 생각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9-05-01 22:12   좋아요 1 | URL
그럼요. 군사부일체라는 말이 있는데요. 다싸부님.

다락방 2019-05-02 17:22   좋아요 0 | URL
누가 제 얘기 하나봐요. 귀가 간지러워요...

syo 2019-05-02 17:25   좋아요 0 | URL
일부러 다...라고 익명처리했는데, 이렇게 나서시면 저의 노고가 물거품이 되잖아요. 어휴, 깜쪽같이 아무도 몰랐을텐데......

2019-05-15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15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15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15 1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두 파마

 

 

1

 

아, 정말 시간은 놀라우리만치 잘 간다. 인정사정없다. 뭐 하나 찌끄린 다음, 공부 좀 하고 책 좀 읽고 나면 일주일이다. 그럼 한 번에 일주일치의 독서 자취를 남겨야 하는데...... “읽는 책이라는 명목의 기록은 작년 오늘 나는 무엇을 읽고 있었나랄지 이 책을 내가 며칠 동안 읽었나같은 것들이 궁금할 때를 대비하여 남겨두는 것인데, 이게 의미가 있으려면 못해도 3일에 한 번씩은 써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Q. 근데 뭐 읽는 게 많아야 뭐라도 쓰지.

A. 원래부터 딱히 읽은 것에 대해 쓰고 살지는 않았다......

 

Q. 근데 이런 데 시간 쓰니까 공부를 못하지.

A. 원래부터 딱히 공부에 시간을 많이 쓰고 살지는 않았다......

 

 

 

2

 

목요일(목요일 있었던 일을 월요일에 쓰는 패기)에는 데이트가 있었다. 여섯 시에 근사한 곳에서 감자와 치즈로 충만한 저녁식사를 마친 다음, 영웅들이 총출동하는 영화(엄마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자 엄마는 영웅 영화의 최고봉으로 <성웅 이순신>을 꼽아 아들을 안타깝게 했다)를 보기로 약속했다. syo는 조금 일찍 시내(서울에서는 잘 쓰지 않는 듯한 표현이다. 서양말로 downtown)에 나가 서른 넘어 처음으로 머리를 볶아(엄마는 굽는다고 표현하지만 아무래도 면발은 볶는 쪽이) 보았다. 미용실과 옷가게를 가장 무서워하는 syo로서는 결연한 다짐이 필요했다.

 

..... 쇤네가 가르마 펌을 좀 해볼까 싶어서..... 저 같은 게 감히 가르마 펌님을 해도 되올는지요(굽신굽신샤바샤바)...... 안 되겠는데요? , , 역시 안 되겠구나. 나는 안 되겠구나...... 그게 아니라, 고객님 앞머리가 가르마 펌을 하기에는 좀 짧아서요. 기본적으로 눈을 찌를 정도는 돼야 되는데, 이 정도 길이라면 펌을 하고 나면 앞머리가 달랑달랑 들려서 멋이 없겠어요. , , 역시 멋이 없겠구나. 나는 멋이 없겠구나...... 그리고 고객님들이 인터넷에서 관리 잘 된 사진 보고 오셔서 그렇게 해달라고 하시는데, 실은 그 사진들이 엄청 세팅을 잘 한 상태에서 찍은 것들이거든요. 실제로는 그렇게 세팅하려면 솜씨가 좀 필요해서, 잘 할 줄 모르시는 고객님들께는 어지간하면 추천을 안 드리거나 혼자서 세팅 하실 때는 스타일이 잘 안 나오실 수도 있다고 꼭 알려드리거든요. 가르마 펌이 그래 보여도 사실 세팅하기 어려운 머리스타일이거든요. , , 역시 어렵구나. 나는 어렵구나...... 지금 길이에서는 그냥 볼륨 펌을 하시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 볼륨 펌이요? 아이구, 해야합죠, 해야합죠. 그러믄입쇼, 볼륨 그거, , 그걸로 해주세요.

 

뭔가 대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흥분에 찬 안도상태에 들어간 syo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볼륨 펌이라는 게 뭔지를 내가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고 나니 볼륨 펌이란 그야말로 빠마라는 단어를 들으면 보편적으로 떠올리는 가장 기본적인 녀석이었고, 완성된 비주얼은 그야말로 6세 어린 syo에게 빠마 트라우마를 심어주었던 바로 그 꼬불이가 30년 가까운 세월을 뚫고 다시 살아온 듯한 모습이었다(당시 뭘 크게 잘못했었는지, 엄마는 6syo를 발가벗겨서 대문 밖으로 내쫓았는데(잘 생각해보니까 이건 학대잖아 엄마, 성웅 이순신이 엄마 이러는 거 알면 가만 계실까?) 어린 syo는 누드보다 빠마가 더 부끄러워서 대문 앞에 있던 빨간 플라스틱 바케스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앉아 잉잉 울고 있었다(또 잘 생각해보니까 빠마가 아니라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쫓겨난 데 트라우마가 생겨야 되는 게 아닌가? 아이의 마음이란?)).

 

하여간 심하게 곱슬대는 머리를 찰랑거리며 약속장소로 도착했지만 시간은 이르고 여친은 아직 도착 전이어서, 알라디너들의 영원한 오아시스,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어가 잠깐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걸어 내려와 모퉁이를 딱 도는 순간 낯익은 얼굴이, 굉장히 리뷰 잘 쓰게 생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아는 척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일 수도 있잖아? 소심한 syo,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슬쩍 그 사람을 지나친 다음 책장 사이에 숨어서 문자를 보낸다. “혹시 지금 알라딘이세요?” 그리고 15초 후, “. 어디계세요? ㅎㅎㅎ역시, 그냥 닮은 사람일리가 없지. 함박웃음을 짓고 다시 모퉁이를 돌아나간 syo. 역시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syo를 마주하는 책 많이 읽는 얼굴. 두 사람은 반갑게 악수를 나눈 다음, 근처에 놓인 아동용 책상에 앉아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이게 얼마만이에요. 얼굴 본지 벌써 100일은 지났네요. 어쩐 일이세요. 전 데이트. 님은요. 전 독서모임이요. (......쉬지 않고 블라블라......) 제가 파마를 했거든요. , 그러네요. . 근데 파마를 하고 나니까 사람들이 자꾸 좋은 일 있냐고, 여친 생겼냐고 물어봐서 별로에요. 그냥 다니던 미용실 원장님이 해보자고 해서 한 건데....... , 그러셨구나. 그랬다. 1월에 만났을 때 우리는 둘 다 생머리였는데, 4월에 우연히 다시 만나자 각자 저마다의 사정으로 파머(??)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았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우리는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안녕, 안녕, 6월쯤에 꼭 다시 봐요, 안녕, 안녕, 열심히 살아요. 열심히 읽어요. 덕담을 주고받으며, 파마한 syo와 파마한 cyrus는 각자 저마다의 약속을 지키러 발걸음을 옮겼다.

 

 

 

3

 

<어벤져스: 엔드 게임>를 보는 내내 눈에 들어왔던 것은 호크아이의 호쾌한 헤어스타일이었다. 재작년부터 작년까지도 한국에서도 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투블럭 모히칸인지 투블럭 뭐시긴지 하는 스타일이었는데, 한껏 뿜뿜하는 남성미가 곱슬이 syo와 대차게 보색대비를 이루면서 알 수 없는 감정에 젖어들게 만들었다. 어쩐지 호크아이가 죽어버려도 별로 아쉽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치졸한.....

 

그나저나 호크아이 헤어스타일 스포일러해서 죄송합니다.

 

 


--- 읽은 ---

꽃을 보듯 너를 본다 / 나태주 지음

인간 루쉰 / 린시엔즈 지음

저녁의 연인들 / 황학주 지음

멜랑콜리 해피엔딩 / 강화길 외 지음

문장의 온도 / 이덕무 지음, 한정주 엮음

 

 

--- 읽는 ---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 허수경 지음

피로사회 / 한병철 지음

파리의 생활 좌파들 / 목수정 지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한나 아렌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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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19-04-29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cyrus님과 서점에서 딱 만나다니~ 어찌 생각하면 두 분이 마주치기에 가장 가능성 높은 곳이라 크게 놀랍지도 않네요.
빠마 궁금합니다~ 6살에 엉덩이는 내놓고 머리에 바가지 뒤집어쓴 꼬맹이라니 짠하긴 한데 엄청 귀여웠을 듯요 ㅋㅋ

syo 2019-04-29 12:06   좋아요 0 | URL
서로 얼굴을 몰랐던 시절에도 몇 번쯤 스치고 지나갔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사이러스님은 그야말로 대구 안에 있는 책과 관련된 공간이라면 어디든 출몰하시는 분이라서요.

지금의 제가 생각해보면 6살 그 빠마는 좀 귀여웠을 것 같지만, 6살의 저한테는 세상 무너지는 충격이었습니다. 6살 syo는 키 작은 골목대장, 진짜 싸나이였거든요! ㅋㅋㅋㅋㅋ

감은빛 2019-04-29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시루스님과 우연히 마주치셨군요. 게다가 두 분 모두 빠마 머리로.

저도 오래 전 뽀글이 빠마한 기억이 있어요. 다시는 빠마를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죠. ㅎㅎ

syo 2019-04-29 22:28   좋아요 0 | URL
빠마에 상처받은 남성들이 세상에는 참 많군요...... 잘 어울리는 사람들은 참 잘 어울리던데 말이죠ㅠㅠ

반유행열반인 2019-04-29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번 챕터 두 번째 문단 세 글자로 ‘손이고’로 압축하더라고요ㅋㅋ 일부러 빠마 하는 사람들, 부럽습니다. 평생 빠마 0번해 봤습니다. (내츄럴본퍼머넌트웨이브aka악성곱슬)

syo 2019-04-29 22:30   좋아요 1 | URL
그게 뭔가 싶어서 검색을 해봤다가, 무려 2011년부터 오픈사전에 등재된 단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감으로는 이 줄임말의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 그 이후였던 것 같은데 말이지요...

반유행열반인 2019-04-30 07:02   좋아요 0 | URL
저도 중학생들 덕에 알게 된 말인데 직접 써 본 건 처음이에요. 같은 상황도 syo님처럼 재미나게 풀어갈 수 있는데 말씀듣고 보니 줄임말의 폭력성과 파괴력이 새삼 느껴지네요.ㅎㅎ

설해목 2019-04-29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증샷! 요구하고싶은 글입니다. ㅋㅋ
여친님 반응 궁금해요. ^^

syo 2019-04-29 22:30   좋아요 1 | URL
좋아합니다. 엄마 동생 여친 세 여자의 반응이 공히 좋습니다. 저만 슬픕니다....

수연 2019-04-29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빠마한 사이러스와 syo님이라니 ㅋㅋ 인증샷 보고싶습니다 실로

syo 2019-04-29 22:31   좋아요 0 | URL
괴랄한 투샷이 나올 듯하여 인증샷은 좀 그렇겠습니다만 ㅎㅎㅎㅎ

칼르페디엠 2019-04-29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시오님 역쉬 글쓰기 내공이 느껴지네요.
건승하시구요. 시험도 잘 준비하시구요~!
그보다는 글쓰기 실력이 더.....

syo 2019-04-30 16:43   좋아요 0 | URL
언제나 응원 감사합니다 ㅎㅎㅎㅎ 언제나 제 글쓰기를 높게 봐주시는 것도 감사하구요^-^

cyrus 2019-05-01 1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점에 우연히 만났던 아는 사람들 전부 다 책을 엄청 좋아해요... ㅎㅎㅎㅎ

syo 2019-05-01 15:54   좋아요 0 | URL
전 알라딘에서 아는 사람 만난 게 처음입니다.

아는 사람 좀 들여놔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