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잠

 

 

 

그늘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 잎을 스치는 바람에 묻어날 것만 같은 초록. 세상의 부피가 커지는, 여름이다. 그림자의 윤곽이 바짝 마른다. 그늘을 벗어나면 그림자로 그림을 그리며 척척 걸어가는 저 더운 사람들.

 

여름에는 천천히 걸어야지 발걸음을 세다가도 문득 빛살이, 구름이, 온갖 지나치게 선명한 것들이 눈길을 잡아채면 아, 잊었다, 처음부터 다시 하나, , …….

 

이 계절의 땅 위에는 엇갈리고 다시 만나 이어지는 길들이 수없이 놓여 있고, 산책하는 이들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무한해서, 모든 것이 흐름이고 또 흐름이다. 가장 추운 곳에서 와서 가장 추운 곳으로 지구를 굴리며 돌아가는, 복숭아 향기가 잔뜩 묻은, 밤의 어깨에는 낮이 깨문 이빨 자국, 늦도록 잠 못 드는 마음들이 부채를 부치면, 일렁거리는 이름들이 밝다. 하나, , …… 처음부터 다시,

 

 

 

--- 읽은 ---



201. 포옹

정호승 지음 / 창비 / 2007


- 일독(그언젠가)

- 재독(했을걸?)

- 삼독(210608)

 

  나는 나를 벽에 걸어놓아야만 벽이 아름다워지는 줄 알았다

  내가 벽에 걸려 있어야만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줄 알았다

  밤하늘이 아름다운 것은

  스러져 보이지 않는 별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캄캄한 내 눈물의 빈방에

  한 줄기 밝은 햇살이 비치는 것은

  사라져 보이지 않는 어둠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빈 벽이 되고 나서 비로소 나는 벽이 되었다

_ 정호승, 빈 벽부분

 

서로를 안아주는 동안, 우리 안에 있던 그 많은 소란스러운 것들은 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오래도록 포옹이란 서로에게 뭔가를 주고 또 채워 넣는 동작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그게 실은 서로에게서 뭔가를 가져가고 그럼으로써 비워주는 일이라는 걸. 포옹하는 동안 포옹 이외의 모든 것이 녹아나고 마침내 오직 포옹하는 너와 나, 그리고 너와 내가 하는 포옹만이 남았을 때, 이 포옹이 마무리되면 우리가 두 개의 빈 벽이 되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때, 그 순간이 너무 아름다워서 벽도 인간도 인간이라는 벽도 모두 다 같이 아름다워진다. 우리는 이기거나 지면서,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 것들을 내 안에 어떻게든 우겨넣기 위해 저 소란 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겠지. 그러다 눈물도 차마 캄캄한 어느 밤이 되면, 내일은 벽에 걸어놓은 나를 잘 챙겨입고 다시 안으러 가야지, 안아주러 가야지, 마음을 먹기도 할 테고. 포옹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과 포옹이 있는 곳에는 그 밖에 다른 무엇도 없다는 사실을 이제 다 알아서. 나를 걸어놓은 벽은 다시 빈 벽으로, 다시 빈 벽으로,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다시 벽으로.

 

 

 


202.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

이유경 지음 / 다시봄 / 2013

 

- 일독(1708xx)

- 재독(210608)

 

독서 공감이라는 말을 대충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같은 책을 읽은 사람들 사이의 공감이라든지, 혹은 읽지 않은 이도 공감할 만한 독서 기록이라든지, 뭐 그런 걸 뜻하는 게 아닌가 했던 것. 다시 읽어보니, 이유경 선생님이 하고 있는 공감은 무려 소설 속 등장인물들에 대한 공감이고, 읽는다는 그 사람은 소설 바깥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소설 안의 사람들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니까 어쩌면 독서 공감보다 공감 독서에 가까운 읽기.

 

그러나 책으로 공감하고 책으로 사람을 읽는 일이 실로 가능하다면, 그래서 그 엄청난 역량을 우리가 독서 공감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경지는 공감 독서를 거쳐서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 속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느끼고, 그와 연관된 독자 자신의 추억을 되새기면서 스스로에게 또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등장인물들의 행동에 일일이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반응하며 나의 행동을 반성/예측하는 넓은 의미의 공감 독서’. 그러니까 타인에 공감하고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 일이 반드시 책을 거쳐야만 이루어질 일은 아니겠지만, 기왕 책 속에 난 길을 통해 공감의 영토에 도착하려고 마음 먹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먼저 공감 독서를 통과하고서야 마침내 독서 공감에 이를 수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 재독으로 얻은 교훈이라 하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신비한 힘이 나를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했던 때가 내게도 분명히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순간들이, 바로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이토록 가치 있는 사람을 내게 주기 위해서 그간 나에게 방황과 기다림이 주어졌던 거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이 책의 여자에게도 믿어도 좋다고 말하고 싶다. 베를린 장벽은 당신이 프란츠를 만나기 위해 무너진 것이 맞다고. 당신은 그 운명의 힘을 제대로 느낀 거라고. 그리고 내가 내 인생의 그 시점에 그를 만났던 것도 '나를 위해' 일어난 일이었다고. 그게 무엇이든 또 어떤 힘이든, 그것이 '나를 위한'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 맞다고.

  그러나 그것은 언제고 끝난다고, 지나가버린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 모두가 어쨌든 결국은 과거형으로 끝을 맺게 된다고. 순간은 영원할 수 없다고. 영원할 수 없고 지속될 수 없기 때문에 순간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잊을 수 없는 거라고, 내내 기억할 거라고. 잊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칠거라고. 그렇지만 잊혀질 거라고.

_ 이유경,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

 

 

 


203. 타르인의 사막

디노 부차티 지음 / 한리나 옮김 / 2021

 

국경 북쪽에 펼쳐져 있다는 타타르인의 사막, 쳐들어오지 않는 타타르인의 공격을 막기 위한 요새, 없는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보루 위에 한 평생을 쏟아붇는 군인들, 존재의 의미를 확언받기 위해 누구보다 타타르인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는 그 군인들의 역설적 열망. 이 모든 것들이 안개 낀 타타르인의 사막처럼 모호하고 환상적으로 그려져 있-

 

다고 읽었다면 당신의 삶은 괜찮습니다.

 

나는 이 책이 너무 아프다. 전투가 일어나지 않는 국경을 방어하며 찬란하고 아름다운 도시와 단절되어 살아가는 이들이 스스로를 부여잡기 위해 의미 없는 요새에 더 열심히 집착하고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건 10년이 넘는 백수 생활 동안 syo가 늘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 짓과 완전히 똑같기 때문이다. 이들의 삶을 알레고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정말 좋겠다. syo에게 이 책은 비유도 상징도 아닌, 하다 못해 농담 한 마디 없는 거대하고 막막한 사막 같았다. 내 발목이 반쯤 파묻혀 있는 바로 지금 여기의 사막.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의 나날들은 지나갈 것이다. 그제야 어떤 깨달음이 일어, 그는 못 미더운 눈으로 주위를 살펴보고, 이어 뒤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발소리를 느끼게 되리라. 자기보다 일찍 몽상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는 모습을 보게 되리라. 먼저 도착하기 위해 그를 따라잡으려는 사람들이다. 그는 삶을 맹렬하게 재는 시간의 고동소리 또한 듣게 될 것이다. 이제 창가에는 웃는 얼굴 대신 무표정하고 무관심한 얼굴들이 고개를 내밀 것이다. 만일 그가 길이 얼마나 남았는지 묻는다면, 그들은 여전히 지평선을 가리키겠지만 어떤 선량함이나 기쁨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한편 그는 친구들도 불 수 없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지쳐서 뒤에 남는다. 또 누군가는 일찌감치 앞질러 가는데, 그는 고작 지평선에 있는 작은 점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저 강을 지나 10여 킬로미터쯤 더 가면 도착할 거라고. 그러나 길은 결코 끝나지 않고, 하루하루의 날들은 점점 짧아진다. 여행의 동반자들은 더욱 드물어지고, 창가에는 고개를 내젓는 창백하고 냉담한 얼굴들만이 보인다.

  드로고가 온전히 혼자 남을 때까지, 어두운 납빛에 물결도 없는 광활한 바다의 가냘픈 흔적이 지평선에 나타날 때까지 그럴 것이다. 어느덧 그는 지칠 테고, 거리에 있는 집들의 거의 모든 창문은 닫혀 있을 것이며, 간혹 드물게 보이는 사람들은 슬픔에 잠긴 몸짓으로 그에게 대답할 것이다. 좋은 것은 뒤에, 아주 뒤에 있는데, 그가 모른 채 그 앞을 지나쳐버렸다고. , 되돌아가기에는 이제 너무 늦었고, 뒤에서는 그를 쫓아오는 무리의 웅성거림이 점점 크게 들려온다. 하지만 텅 빈 하얀 길 위에서, 그들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_ 디노 부차티, 타타르인의 사막

 

 

 


204. 한 컷의 인문학

권기복 지음 / 웨일북 / 2020

 

에바 일루즈, 엘리자베트 벡-게론샤임, 한병철, 앤서니 기든스, 벨 훅스, 모리치오 비롤리, 찰스 테일러, 퀜틴 스키너, 필립 페팃……. ‘한 컷이라는 수식어를 단 표제는 초보 독자를 대상으로 한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런 것 치고는 인용되는 이들의 구성이 놀랍도록 새롭다. 플라톤이나 마르크스 같은 전통의 강자들도 등장하지만, 허어, 필립 페팃이라는 양반은 그 존재 자체를 처음 알았다. 정말 묘한 책이 아닐 수 없다.

 

과거에는 사랑의 아픔을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고 성장한다는 삶의 보편저 서사가 있었다면, 이제 사랑의 아픔은 필사적으로 피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사랑은 이제 어쩔 수 없이 나의 자존감을 걸고 뛰어들어야 하는 영역이, 실연은 삶을 뒤흔드는 재앙이 되었다.

  실패와 아픔은 자아를 좀먹는다. 다시 일어서기 힘든 세상이니까. 이제 실패를 두려워하는 만큼 진지한 사랑을 하려는 사람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타인을 사랑하느라 에너지를 소비하느니 그 시간에 스스로를 사랑하는 게 더욱 합당하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이른바 나르시시즘의 시대가 도래했다.

_ 권기복, 한 컷의 인문학

 

 

 

--- 읽는 ---

백의 그림자 / 황정은

그러라 그래 / 양희은

프로페셔널 스튜던트 / 김용섭

호빗 / 존 로날드 로웰 톨킨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 / 제이컵 솔

죽은 백인 남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 / 도나 저커버그

틀리지 않는 법 / 조던 엘렌버그

해커와 화가 / 폴 그레이엄

우리말 교실 / 조현용

철학 한 입 / 데이비드 에드먼즈, 나이절 워버턴

데이터사이언스 입문 / 타케무라 아키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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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6-17 2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오셨어요~ 기다렸어요~ 이유경 선생님의 글에 대한 평에 공감하는 바입니다. syo님이 사랑하는 복숭아의 시절이 다가오네요^^

syo 2021-06-18 00:24   좋아요 2 | URL
간만에 잠수가 길었습니다 ㅎㅎㅎㅎ 언제나 기다려주시는 독서괭님^-^
올해 복숭아는 맛이 있기를 기원하고 있어요. 맛있다는 소문이 들려오면 또 100복 100북을 도전하는 것으로....

다락방 2021-06-17 2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쇼 선생님의 이렇게나 좋은 글에 댓글이 없는 건 너무 좋은 글이기 때문인가요..
이유경 선생님 측근이라 이런말 하는 거 맞습니다.
그럼 이만..

syo 2021-06-18 00:24   좋아요 1 | URL
앜ㅋㅋㅋㅋㅋ 선생님,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6-17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슬슬 모셔 놓은 백의 그림자를 펴 볼까 합니다. ㅎㅎㅎ

syo 2021-06-18 00:25   좋아요 3 | URL
문득 황정은 선생님을 복습할 때가 되었다 싶더라구요.
오랜만에 읽어도 너무 좋은 <백의 그림자>

새파랑 2021-07-07 17: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님 2관왕 축하드립니다~!!😄👍 역시가 역시나군요~!! PC로 Syo님 글 보니까 북플에서 보는거랑 완전 다르네요

syo 2021-07-07 19:14   좋아요 2 | URL
ㅎㅎㅎ 감사합니다. PC에서 글을 쓰다보니까 레이아웃에 좀 신경을 쓰고 있씁니다. 좌우정렬 같은 거랄지.....

그레이스 2021-07-07 20:52   좋아요 0 | URL
pc에서 했던 작업들이 북플에서는 전혀 효과가 없어 당황했었습니다.

그레이스 2021-07-07 17: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syo 2021-07-07 19:14   좋아요 2 | URL
리뷰는 생각도 안하고 있었는데 참 운이 좋았습니다 ㅎㅎ😄

초딩 2021-07-07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축.하.드.립.니.다!
멋져요!

syo 2021-07-08 01:10   좋아요 0 | URL
초딩님도 받으셨잖아요 ㅎㅎ
같이 멋지자는 말씀이시죠? ^-^

황후화 2021-07-08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

syo 2021-07-08 01:1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운이 좋았네요^-^
 

 

멸치로도

 

 

 

1

 

떡볶이를 먹고 책상 앞에 다시 앉았지만 여전히 첫 문장은 나오지 않았다. 첫 문장만 있다면 모든 게 있을 텐데, 첫 문장이 없어서 아무것도 없는 광막한 백지가 있었다. 그리고 백지를 마주 보며 아무 생각도 없는 syo가 있었다.

 

 


2

 

그러다 친구가 보내준 링크를 타고 금희 누나가 쓴 글을 읽었다. 무려 현대식품문학이라는 혁신적인 지면(?)에 실린여름의 앤초비라는 엽편소설이다. 여름의 풀벌레 소리를 듣고 있던 우리 둘의 대화는 이내 끊겼지만 그 밤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뚜렷하게 서로가 서로의 옆에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라는 단정한 마지막 문장 아래로 간략한 작가 소개, 그 아래로 은빛 멸치 사진과 상품 보러가기링크, 냉 멸치국수 레시피 링크가 따라붙고, 그 아래로 울릉도 건오징어(375g), 딱새우(200g), 볶음땅콩(300g) 등의 관련 상품 30건이 노출되는 식이었는데, 여러모로 대단했다. 금희 누나의 글로 멸치를 팔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그러니까, 멸치를 살 생각이 없거나 살까 말까 망설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장바구니에 정치망 은빛 멸치를 투척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파워를 금희 누나의 글 속에서 발견해내다니, 기획자도 누나도 모두 대단했다.

 

문학으로 앤초비 구매를 독려하는 목적과 멸치로 문학의 구매를 독려하는 목적이 절묘하게 버무려진 이 짧고, 짧아서 찐한 글의 첫 문장을, 금희 누나는 이렇게 적었다.

 

서로의 마음을 긁은 뒤에 떠난 휴가는 당연히 즐겁지 않았다.”

 

완벽하진 않을지 몰라도 완벽으로 다가가는 첫 문장이다. 이어서 우리가 도로를 달리고 달려 남해까지 흘러든 건 그렇게 멀리 가고 싶었다기보다는 이런 상태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영영 되돌릴 수 없는 나쁜 상태를 맞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라는 조금 긴 문장이 이어지는데, 이 두 번째 문장은 내용으로 첫 문장을 보충하는 동시에 그 길이로 첫 문장의 간결함을 돋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첫 문장을 완벽 방향으로 조금 더 밀어준다. 다음 문장은 더 이상 대화하지 않게 되는 것이 가장 나쁜 상태라고 남편은 말하곤 했다.” 인데, 긴 문장 다음에 다시 간결한 문장을 내려놓아서 좋았다. 짧길짧. 나라면 이다음에 다시 간결한 문장을 선택할 것이다. 짧길짧길보다는 짧길짧짧이 아름답지! 누나가 고른 다음 문장은 나는 그보다 더 나쁜 건 지금껏 했던 대화들은 어디로 흘려보냈는지 잊은 채 도대체 뭐가 문제야?’ 하고 되묻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였다. 그러니까 대충, 짧길짧중. , 이런 수를. 언제나 그렇듯 누나는 이긴다…….

 

< 여름의 앤초비 / 김금희 >

 

 

 

3

 

문제는 언제나 첫 문장이다. 첫 문장은 시작의 끝인 동시에 끝의 시작이다.

 

 

 

4

 

엽편의 아름다움은 읽기만큼 쓰기에 욕심을 내는 사람에게 더 선명하다. 짧은 글일수록 문장은 밀도를 요구한다. 문장이라는 물건이 지니는 매혹적인 특성은, 한 것, 그러니까 빽빽한 것이 곧 뻑뻑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으로부터 온다. ‘고밀도의 가벼운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도 어색하지 않은 희귀한 문장들을 만나면 아낌없이 전율해주는 것이 참된 독자의 태도라고 믿는 편이다. 엽편은 짧아서, 짧기 때문에, 짧음으로써 그 전율적인 문장을 내 손끝에서 구현해보겠다고 달려드는 욕심쟁이들의 좋은 선생님이 된다.

 

 

 

5

 

금희 누나는 심지어 멸치로도 한다. syo는 징징거리지 말자.

 

 

 

6

 

찾아보니 정세랑 선생님의 글도 있었고, 김연수 선생님의 아직은 봄이니까, 미나리는 얼마든지도 있었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오래 전, 그러니까 지난 세기에 일어난 일이다.” / 미나리는 얼마든지, 아직은 봄이니까, 그러니까.”

 

마지막 문장을 보고, , 하는 탄식이 나왔다. 저런 건 syo가 요즘도 종종 마무리 투수로 써먹는 문장인데……. 과연 김연수에서 시작해 김연수를 거쳐 마침내 김연수에 도착하던 syo의 독서수련시절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 읽은 ---



197. 하루 5분의 초록

한수정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

 

그림은 귀엽고 말은 다정하다. 잘 살펴보면 우리 주변의 식물들이 종종 그렇다. 잘 살펴봄에는 하루 5분의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5분의 시간을 설명하고 마련하는 데는 물리학이 아니라 심리학이 필요하다. 물리적으로 시간은 늘 있고, 단지 그 시간이 심리적으로 더 많이 있거나 더 적게 있거나 한다. 살펴보는 기술은 정말 소중한 동시에 유용한 기술이라서 배울 기회를 만나면 반드시 배워두고 싶다. 5분은 오히려 싸게 치는 것




 


198. 소설 제주

전석순 외 / 아르띠잔 / 2018

 

여섯 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읽으면서는 하나하나 다 짚고 이야기해보자 했었는데, 네 번째 작품인 이은선 선생님의 귤목에서 어어어 하기 시작해서, 다섯 번째 작품인 윤이형 선생님의 가두리를 읽는 순간에 그냥 다 포기하고 읽기나 열심히 했다. 윤이형 선생님을 진짜 어떡하면 좋을까. syo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도 아니면서 syo에게 가장 많은 밑줄을 선사하는 이 신비로운 선생님을.

 

그런데, 김경희 선생님의 등장인물들은 말투가 왜 그럴까?

 

여자는 시선을 조금 먼 곳에 던졌다. 멀리 무언가가 열심히 햇빛을 튕겨내고 있었다. 누군가 혼잣말처럼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파도 소리 때문에 확실하진 않았다. 하지만 귀를 기울여보면 아이의 목소리를 골라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벨롱장은 그쯤일지도 몰랐다. 남자와 옥신각신하는 동안 이만큼이나 걸어온 건가 싶었지만 여자는 그럴 수도 있다는 쪽에 무게를 뒀다. 거기쯤에 체험학습을 나온 아이가 있어 꽃잎이 그려진 책갈피나 어디에 써먹을지 알 수 없는 구슬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을 것이었다. 이제 여자는 아이가 물건을 파는 쪽이 아니라 사는 쪽일 것만 같았다. 어쩐지 자신이 직접 만들어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게…… 아이에겐 없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대신 그런 물건을 찾아 종종거리며 벨롱장을 돌아다니고 있지 않을까. 딱히 무엇을 사야 할지 알 수 없지만 사고 나면 꼭 필요했다는 생각이 들 것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책갈피나 구슬 없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의아할지도 몰랐다. 끝내 그것들 없이 살아온 시간이 다 거짓말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벨롱장은 그런 곳이니까.

_ 전석순, 벨롱

 

 

 


199.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김신지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

 

사건이라는 용어를 철학적으로, 그러니까 그 사건을 통과한 사람을 다시는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단절의 자리에 꽂아두는 깃발처럼 생각한다면, ‘기록하기로 한다는 것은 당연히 사건이다. 한번 기록에 뜻을 품은 사람은, 저마다의 사정으로 인해 짧거나 긴 시간 동안 기록을 정지할 수는 있어도 결코 종료할 수는 없게 된다. 그런 이유로 세상에는 기록하는 사람과 기록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기록하지 않아도 사는 데 특별한 불편함은 없다. 게다가 오늘날은 딱히 내가 하지 않아도 세상이 나에 대해 기록한다. 오히려 기록되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판. 이런 세상이다 보니 기록의 필요성은 더 옅어지는 것 같다. 그러면 기록하는 사람은 왜 기록하는가?

 

사실 그냥 하는 것 같다. 시작할 때는 의도가 있었지만 습관이 되는 순간 의도는 희미해진다. 그저 기록하는 내가 있을 뿐. 기록을 통해 뭔가 얻어져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은 내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기록하는 사람이 이 책을 읽고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이 책을 읽었다는 기록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기록하지 않는 사람이 이 책을 읽고 기록하는 사람이 된다면, 조만간 그 사람에게도 이 책은 기록으로만 남을 것이다. 기록하는 사람에겐 동력이 불필요하니까. 기록하지 않는 사람이 이 책을 읽고도 기록하지 않는 사람으로 남는다면 이 책은 기록으로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거의 대부분의 독자에게 하나의 과도기적존재로만 작동할 것이다. 올라간 후에는 늘 치워지는 사다리처럼. 생각해보면 사실 그런 대접을 받는 책들이야말로 진짜 의미가 있는 것들이다.

 

기록이라는 단어는 기록할 기()’기록할 록()’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적고 또 적는 셈이죠. 사전적 뜻은 주로 후일에 남길 목적으로 어떤 사실을 적음. 또는 그런 글.” 현재에 서서 후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지금 이 순간을 미래로 부치고 싶어하는 사람일 겁니다. 그는 아는 거예요, 지금이 단 한번뿐이라는 걸. 같은 순간을 절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걸. 그러니 기억하고 싶다면, 이 순간을 적어서 미래로 부쳐두어야 한다는 걸.

  기록한다는 것은 무엇을 기억할지 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살면서 마주치는 모든 것을 기록할 순 없으니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더 중요해지고, 덜 중요한 것은 덜 중요해지겠죠. 그게 무엇이 되었든 자기만의 기록을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겪게 됩니다. 하루가 촘촘해질 테니까요. 기록해둔 지금은 분명 미래에서 우리를 기다려줄 테니까요.

_ 김신지,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200. 약한 연결

아즈마 히로키 지음 / 안천 옮김 / 북노마드 / 2016

 

아즈마 히로키는 좀 재미있는 것 같다. 얇은 책 두 권을 읽은 것에 불과하지만…….

 

이 책은 자기계발서라고 봐도 된다. 역시 독자의 마음이란 사람의 마음의 부분집합이어서, 괜찮게 생각하는 사람의 글은 장르에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괜찮아 보이는 모양이다. 철학을 가지고 생활로 내려와 어슷비슷한 말을 해도 사이토 다카시는 싫어서 까는 거고, 아즈마 히로키는 좋아서 빠는 것.

 

인터넷은 기호로 구성된 세계다. 글자만의 얘기가 아니다. 음성과 영상도 마찬가지로, 결국 인터넷은 인간이 만든 기호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터넷에는 누군가가 올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만 있다. '표상 불가능한 것'은 거기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인터넷은 무의미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말로 할 수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런저런 불만이 있지만 우리는 인터넷과 언어에 의존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말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평소와는 다른 검색어로 검색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분투할 때 그 말은 원래 의도와 조금 다른 방법으로 전달된다. 철학적 표현을 쓰자면 '배달 오류'가 일어난다. 우리는 이 배달 오류를 통해 말로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더라도, 말로 할 수 없는 것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알게 된다. 한마디로 기호를 다루더라도 기호가 되지 않는 무엇이 세계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외경을 잊어서는 안 된다.

_ 아즈마 히로키, 약한 연결

 

이런 문장은, 독자의 콧잔등에 어떤 색의 안경이 올려져 있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해석된다. 밉게 보면, , 이놈의 자기계발서가 다 그렇지, 또 뻔하고 모호한 이야기를 뭐 있는 척 해놨네- 하고 끝날 수도 있고, 곱게 보면 좋은 말씀이지, 훌륭한 말씀이야, 자기계발서답지 않게 수준이 높은데- 하며 지나가고 그러는 것이다. 그러니까 책의 훌륭함을 논할 때는, 이게 라면인가 끓여놓은 뿌셔뿌셔인가도 중요하지만, 먹는 사람이 누구이며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도 잘 살펴야 한다는 지극히 뻔하고 당연한 결론.

 

 

 

--- 읽는 ---

타타르인의 사막 디노 부차티

포옹 정호승

내가 누구인지 뉴턴에게 물었다 김범준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 고미숙

우리에게는 헌법이 있다 이효원

약의 과학 크리스티네 기터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 / 이유경

이토록 매혹적인 고전이라면 / 홍진호

한 컷의 인문학 / 권기복

라캉의 주체 / 브루스 핑크

무사시노 외 / 구니키다 돗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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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1-06-08 12: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른 것보다 말이지요. 김금희가 누나에요? 그것만 말해봐요 ㅎㅎㅎㅎㅎ 그래요? 김금희가 누나에요? 🤭

syo 2021-06-08 12:47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ㅋ 명백히 누난데요? 형아는 아닐거잖아......

단발머리 2021-06-08 12:50   좋아요 4 | URL
김금희씨 보소서. 누나랍니다.
김금희씨는 쇼님 누나래요. 누나~~ 🤭🤭🤭🤭🤭🤭🤭🤭🤭🤭🤭

syo 2021-06-08 13:04   좋아요 5 | URL
헤헤, 잘 쓰면 다 형 누난데 이 누나는 실제로도 누나라서 부담없는 누나임. 😁

반유행열반인 2021-06-08 13: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진짜 어마어마한 마케팅이라고 생각했는데 ㅋㅋㅋ더현대 투홈의 멸치와 마른어물들은 너무 비싸네요…. 그래도 금희언니 쪽글이라도 얻어 읽어 행복했다…

syo 2021-06-08 14:18   좋아요 3 | URL
이런 기획이 좀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멸치 말고도 갈치 참치 개복치....

새파랑 2021-06-08 14: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ㅋ 댓글 보고 김금희 작가님 나이 검색해 봤네요 ㅎㅎ 금희누님 완전 동안이시네요^^

syo 2021-06-08 14:18   좋아요 4 | URL
ㅎㅎㅎㅎㅎ 금희 누나 동안 누나....

독서괭 2021-06-08 15: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윤이형 작가님 잔뜩 칭찬해놓고, 김경희 작가님에게 질문을 던져놓고, 전석순 작가님의 글을 인용해놓은 건, 그러니까.. 궁금하면 직접 읽어보라 이거죠? ㅋㅋ 이런 영업전문syo님 같으니라구..

행복한책읽기 2021-06-09 06:41   좋아요 2 | URL
저도 이건 먼 수작이지 했는데, syo님 영업전략이었군요^^

syo 2021-06-17 18:59   좋아요 1 | URL
특별히 그런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닌데, 뭐 어떻게든 이름들을 많이 많이 넣어보자 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또 아니고..... 결론적으로 영업이 되었다니 ㅋㅋㅋㅋㅋㅋㅋ

답이 늦었습니다 ㅎㅎㅎ

붕붕툐툐 2021-06-08 2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님이 독서수련기간이 있었다고요? 그 커리큘럼 좀 공유해 주십쇼~

syo 2021-06-17 19:02   좋아요 1 | URL
누구에게나 코흘리던 시절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어디 한 번 콧물 자국 확인해 보고, 재밌게 생긴 콧물 자국이면 페이퍼로 올릴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ㅎㅎㅎ

행복한책읽기 2021-06-09 0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김금희 작가가 syo님 누나였군요. 싸인 좀 받아주세요^^

syo 2021-06-17 19:00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 진짜 우리 누나였으면 제가 지하철 대신 누나를 업고 다녔을 텐데 말입니다.....

유부만두 2021-06-14 14: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떡볶이를 드셨군요. 매운맛입니까?

syo 2021-06-17 18:57   좋아요 1 | URL
카레떡볶이였습니다. 어떤 맛이었느냐 하면 망한 맛.....
 

 

 

 

 

사실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많이 지고 많이 내려놓고 그렇게 패배하는 법과 포기하는 법을 배우면서 여기에 연착륙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직 추락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빼앗겨도 참을 만한 것들만 빼앗겨 왔기에 버틸 수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무엇을 빼앗겨도 덤덤하게 다음 하루를 자기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착각하는 중일지도. 익숙해진다는 것은 고마운 만큼 무서운 일이기도 해서, 아픔이 더는 아픔이 아니게 된 무덤덤한 몸을 자랑하게 되는 일이기도 해서, 어쩌면 그것은 나를 더 자세히 알아가는 과정이라기보다 내가 자세히 모르는 나를 내게서 삭제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부정否定하여 끝내 부정不定하는 방식. 나는 이것이 아니고, 그것도 아니며, 저것조차 아니면서…… 사람의 정의는 n개의 아니오를 더하는 방식으로만 가능한지, 사람의 삶은 결국 그 n을 무한대로 보내면서 자기를 무한소로 수렴시키는 것과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그런 생각을 품는다는 것이 사실 아무것도 내려놓지 못한 나를 증명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갖고 싶은 것은 없지만 가지고 있고 싶은 것은 있고, 잃을 것은 없지만 잃기 싫은 것은 있는, 무감한 듯 감각하고 무욕한 듯 욕망하는 삶. 나를 속이는 나에게 속는 척 속아 넘어가 주며 속이는 나를 속이는 나와, 속는 내가 실은 속아주는 것임을 모르는 척하며 이중으로 나를 속이는 나의 기기묘묘한 왈츠. 나를 속이고 내가 속일 세상이 내 안에 다 있어서 노래는 안으로 안으로만 흐르고, 춤사위는 무한대로 가는 n의 스텝에 따라 작고 작게만 휘휘 돈다.




 

그렇게 해서 아프게 하면, 고통이 느껴지면 기이한 안도와 충족감이 찾아왔다. 모든 상황이 불행 쪽으로 아귀가 맞추어지고 그것이 온당하며 지금과 다른 삶이란 가능하지 않으리라는 낙담 쪽으로 나 자신을 미는 힘, 그건 무엇이었을까. 그런 것도 생장의 힘이었을까.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게 그저 여여한 성장을 이루는.

_ 김금희, 우리가 가능했던 여름

 

이 사건에서 자네가 저지르고 있는 잘못이 뭔 줄 아나? 복잡한 사건이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이야. 자네는 이 사건을 채프먼이 태어난 순간부터 시작된 거대한 음모로 생각하고 있어. 유대인의 똑똑한 머리를 써서 어제 일어난 일을 생각해야 마땅한데, 5년 전에 일어난 일을 걱정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자네가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어제는 채프먼이 피살된 날이고 오늘은 거기에 대해 무언가를 해야 하는 날이야.

_ 폴 오스터, 스퀴즈 플레이

 

그는 그 후로 결코 노래를 부르지 않았지. 친한 사람과도 말을 나누는 것을 피하게 되었다네. 말도 없이 노래도 부르지 않고 웃지도 않으며 세월을 지내다 보면, 그 어느 사람이라도 세상에서 잊히고 마는가 보네. 겐 씨가 배를 젓는 것은 옛날과 다를 바 없었지만, 포구 사람들은 겐 씨의 배에 타도 겐 씨가 세상에 있다는 것을 잊게 되었지. 이렇게 말하는 나도 때때로 겐 씨가 그 둥근 눈을 반쯤 감고 노를 저어 돌아오는 것을 볼 때, 겐 씨가 아직 살아 있구나 생각할 때도 있다네. 그가 누구냐고 물은 사람은 자네가 처음일세.

  그렇군. 불러서 술을 마시게 하면 어느덧 노래도 하게 되지. 그렇지만 그 노래의 뜻은 알기 어려웠어. 아니, 그는 중얼거리지도 않고 똑같은 말을 반복하지도 않고 단지 때때로 큰 한숨만 내쉴 뿐이니 불쌍하다 생각지 않을 수 있겠나…….

_ 구니키다 돗포, 겐 노인

 

 

 

--- 읽은 ---

 


193.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이주영 지음 / 나비클럽 / 2020

 

민폐쟁이 프랑스 책벌레 에두아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많은 우스개 사건이 있고, 그 우스개 사건 속에서 욕과 분노를 삭이기 위해 분투하는 이주영 선생님이 있고, 그 분투 속에서 얻게 된 깨달음들이 있다. 그 깨달음들의 스펙트럼이 폭넓다. 사귈 때는 웃기고 편할지 몰라도 같이 살면 엄청 피곤하고 짜증나는 인간형이란? 잘못을 지적하는 적절한 방식이란? 로마까지 걸어서 가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이란? 열등감에 벗어나는 방법이란? 허영심의 효용이란? 적게 알수록 깝치고 많이 알수록 더 많이 침묵하는 인간이란? 배움이란? 모르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란? 자문화 중심주의/서구 우월주의란?

 

책벌레가 물론 세상 벌레 중에 가장 멋진 벌레고, 벌레 소리를 들어도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은 거의 유일한 벌레긴 한데, 그래서 책벌레라면 응당 그럴 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예측하는 어떤 성향이나 단점 같은 것들이 용인될 가능성도 더 크긴 한데, 그렇다고 그게 좋은 건 아니다. 두 가지 깨달음을 얻었는데, 에두아르 같은 사람이 책벌레라면 syo는 아직 책벌레가 아니라는 것과, 책벌레가 저런 사람이라면 나는 안 할 거라는 것. 멋짐과 구림이 버무려지면 멋진 구림과 구린 멋짐이 되는 건데, 둘다 썩 내키지 않는다.

 

여기 주목받을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에두아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좋지 않은 머리를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사용하려 드는 고집쟁이이자, 상상을 초월하는 덜렁이 모지리이다. 그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뛰어난 것이라고는 '끊임없이 읽을 수 있는 능력'밖에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돈이나 명예로 얻은 성공은 언제 깨질지 모를 아슬아슬함이 있다. 우리는 그래서 불안한지도 모른다. 에두아르는 그저 앉아서 주구장창 읽으며 뭔가를 알아가는 것이 즐겁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며 감탄하고 동감하며 울고 웃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풍요롭게 만든다.

스스로의 내면을 풍요롭게 하는 삶.

  이보다 더 성공적인 삶이 있을까? 절대 깨지지 않는 내면의 단단한 풍요로움으로 무장한 에두아르는 진정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_ 이주영,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194. 맨발

문태준 지음 / 창비 / 2004

 

모든 풍경이 정경이다. 광경은 채 몇 발 못 떼고 사람의 방향으로 돌아가고, 이 돌아감이 중심감각으로 시집 전체에 묻어있어, 해질녘과 길어지는 산그림자와 저물어가는 것들의 어우러짐이 성마르지 않고 담담하다. 당하는 사람이 없어 평온하다. 공간을 선명하게 그리자 투명해지는 시간. 마모되는 사람조차 조용히 아름다운.

 

  어두워지는 순간에는 사람도 있고 돌도 있고 풀도 있고 흙덩이도 있고 꽃도 있어서 다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바람이 불고 불어와서 문에 문구멍을 내는 것보다 더 오래여서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하늘에 누군가 있어 버무린다는 느낌,

  오래오래 전의 시간과 방금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을 버무린다는 느낌,

  시람과 돌과 풀과 흙덩이와 꽃을 한사발에 넣어 부드럽게 때로 억세게 버무린다는 느낌,

  어두워지는 것은 그래서 까무룩하게 잊었던 게 살아나고 구중중하던 게 빛깔을 잊어버리는 아주 황홀한 것,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얻으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어두워지려는 때에는 개도 있고, 멧새도 있고, 아카시아 흰 꽃도 있고, 호미도 있고, 마당에 서 있는 나도 있고…… 그 모든 게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_ 문태준, 어두워지는 순간」부분

 

 

 


195. 1417, 근대의 탄생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 이혜원 옮김 / 까치 / 2013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에 문제의 변화가 일어났을 때, 결정적인 순간은 한 외딴 장소의 벽 뒤에 처박혀 가만히 숨죽인 채 거의 눈에 띄지도 않게 지나갔다. 어떤 영웅적인 행위도, 이 위대한 변화의 현장을 후세에 증언해줄 영민한 관찰자도 없었다. 천지개벽할 변화의 순간이면 으레 나타나는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 날, 상냥하지만 약삭빠르고 기민해 보이는 인상의 한 30대 후반의 덩치가 작은 사내가 한 도서관의 서가를 둘러보았다. 그는 그곳에서 매우 오래된 필사본 하나를 발견하고 꺼내들었다. 책을 살펴보고 그는 매우 흥분해서 다른 사람에게 그 책을 필사하도록 지시했다. 이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했다.

_ 스티븐 그린블랫, 1417, 근대의 탄생

 

흥미진진한 전개로 너를 꼼짝도 못 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의지를 잔뜩 드러낸 도입부다. 이 책의 정체는 기원전 1세기경 등장한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개론서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까 사실 고갱이는 철학 장르의 영역인 것. 그럼에도 저런 도입부라니, 사뭇 도전적이지 않습니까?

 

성공한 도전은 도전이 아니라 성공의 예견처럼 보이듯, 자신의 역량을 처음부터 알았던 그린블랫 자신에게 이건 하나도 도전적이지 않았겠다. 교회의 타락, 수도원의 일상, 에피쿠로스학파의 사상, 기원전후 1세기 로마의 문화 수준 및 정치 상황, 필사가들의 고충, 콘스탄츠 공의회의 막전막후 등, 흥미로운 문화적 구경거리들이 책 사냥꾼 포죠의 이동 경로에 착착 감기면서 맛깔나게 서술된다. ‘OO의 인문학이라는 제목을 단 책들이 이런 재밋거리들을 나열하곤 하는데, 이 책 속 포죠와 같은 인물이 없으면 이야기가 하나의 스토리 라인으로 꿰어진다는 느낌이 약하고 사전적으로 나열된 지식처럼 보이면서 정이 잘 안 가게 된다. 이 책은 이겼다.

 

 

 

 


196. 정의 중독

나카노 노부코 지음 / 김현정 옮김 / 시크릿하우스 / 2021

 

스스로 정의라고 생각하는 인간이 몰고 올 수 있는 부정의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듯, 스스로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생각하며 을 토벌하는 데서 오는 도파민 쾌락이 이번 세기, 저번 세기의 일이 아니라서, 뇌의 기능과 호르몬의 기전을 토대로 이런 문제를 분석하려는 것은 유효한 시도인 듯.

 

후루룩 읽기는 좋다. 그렇지만 일본에서 건너온 책들이 자주 그러듯 가볍고(미국에서 온 애들은 가벼운 주제에서도 뭔가 그래프며 실험이며 이런 것들을 잔뜩 물고 있다), 조심스러운 척하지만 실은 대놓고 개인 가치관을 투척하는 경향도 없지 않으며(그렇지만 한국에 십수 권이 번역되어 들어오는 유명저자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눈에 띄지도 않는 수준이다), 무엇보다 처방전이 어쩐지 신통치 않다는 느낌. 절대 관심 없는 책도 좀 읽어라, 평소에 가지 않던 길로 좀 가봐라, 그리고 뇌 건강에 좋은 오메가3지방산을 먹어라…….

 

그렇지만 방금 오메가3 한 알 삼켰다. 이제부터 필사적으로 트림을 막아야 한다.

 

정의 중독 상태에 빠지면 나와 다른 것을 모두 악으로 간주한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거나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을 보이면 '몰상식한 인간'이라 규정짓고 어떻게 공격할지, 상대에게 최대한 큰 타격을 주기 위해 어떤 말을 할지 고심하게 된다.

  누가 옳고 그른가를 떠나 양측 모두 자신이 정의라고 확신해 공격하기 시작하면 해결점을 찾기가 매우 힘들다.

심지어 참여자들이 그 상황 자체를 하나의 이벤트로 여겨 적극적으로 즐기는 듯 보일 때도 있다. '어쩌면 처음부터 해결할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가만히 지켜보면, 얼마나 능숙하고 효율적으로 상대를 깎아내리는지 그 기술을 겨루는 시함을 보는 것만 같다.

  이는 '매우 심각한' 정의 중독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새로운 답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스스로의 정의에 취해 상대를 일방적으로 깎아내리는 데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_ 나카노 노부코, 정의 중독

 

 

 

--- 읽는 ---

플라톤 전집 1 / 플라톤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 김신지

집중과 영혼 / 김영민

데리다 입문 / 김보현

소설 제주 / 전석순 외

잘 안다고 믿는 것을 다르게 보는 법, 수학 / 미카엘 로네

안나 카레니나 2 / 레프 톨스토이

당신이 옳다 / 정혜신

젠더 모자이크 / 다프나 조엘, 루바 비칸스키

세계를 향한 의지 / 스티븐 그린블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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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6-04 1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도 댓글이 없을 때 쇼 님에게 댓글 쓰기는 처음인 듯합니다.
위의 책에서 제가 읽은 건 두 권뿐입니다.
다양한 책의 독서가 님에게 자극을 받고 갑니다.

syo 2021-06-04 14:54   좋아요 2 | URL
페크님 오랜만이네요 ㅎㅎㅎ
서재활동 재개하신 건가요? 그동안도 계속 꾸준하셨는데 제가 발견을 못했던 것뿐이라면 🍎 드리고 ㅎㅎㅎ
다른 사람이 읽은 몇 권을 올렸는데 그 중 두 권을 이미 읽었다면 굉장히 많이 읽은 거죠 ㅎㅎㅎ 페크님이 읽으신 책을 한 10개 올리셔도 과연 제가 그 가운데 2권이나 읽었겠습니까 ㅎㅎ

수이 2021-06-04 13: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데리다 입문 이미 건너뛴 그대가 데리다 입문을 읽고 계시니 저도 데리다 입문 읽고싶지만 이탈리아어 단어 외워야 하니 참겠습니다. 오늘 날 왜 이리 좋아?! 숲 속 바람소리 들으며 낮술 해야하는 날씨입니다 오바

syo 2021-06-04 14:55   좋아요 1 | URL
아니에요. 저는 영원히 입문서의 세계를 방랑하는 입문떠돌이 syo입니다.....
숲 속 바람소리는 콜라죠 제로콜라.

행복한책읽기 2021-06-04 14: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님 왈츠 넘 많이 췄나봐요. 머릿속이 어질어질.^^
문태준님 저 표현, 버무린다 는 내거였는데. 뺏겼다요^^;;
이주영님은 이주윤 작가랑 잠시 헷갈렸음요. 말장난. 유머감각. 감성. 수려함. 맛깔남. syo님 또한 터짐^^

syo 2021-06-04 14:56   좋아요 1 | URL
문태준 선생님이 저보다 어렸을 때 저런 걸 막 쓰셨으니, 어른이 된다는 건 거저 되는 게 아니라는 증명이네요.....
읽기님 늘 감사합니당^-^

바람돌이 2021-06-04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근대의 탄생 도입부는 꼭 츠바이크같은 느낌! ㅎㅎ
한해 한해 지나면서 꼭꼭 명심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아 그냥 끝까지 절망하지 않아도 될만큼의 시련이나 고통이었기에 편한 소리 잘하는 내가 있는 것일 터, 그러니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함부로 나불거리지 말자.
드디어 주말입니다. 오늘 금요일은 아 진짜 피곤해 죽는줄 알았습니다. 좀 있으면 퇴근 시간... 룰루랄라~~~
syo님도 즐거운 주말 되세요. ^^

syo 2021-06-04 23:32   좋아요 0 | URL
제가 아는 직장인들이 다들 이번주는 어쩐지 바빴다고 하더라구요. 무슨 일일까요.....
바쁘고 피곤한 한 주였던만큼, 바람돌이님 책과 행복이 가득한 주말 보내소서^-^

새파랑 2021-06-04 16: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님의 저 많은 책 중에 겹치는 책이 1권(안나 카레니나 2) 밖에 없네요 ㅜㅜ 언제나 봐도 놀라게 되는 syo님의 다양한 책의 범위~!!

syo 2021-06-04 23:33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굵직굵직한 책은 새파랑 님의 독서목록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군요. 역시 ㅎㅎㅎ
 

 

독난讀難

 

 

 

1

 

드디어 선풍기를 꺼내놓았다. 커피는 무조건 아이스. 식후 산책은 함께해요, 반바지.

 

 

 

2

 

5개월에 190권이라. 450권 페이스긴 한데, 글쎄. syo는 내가 잘 아는데, 걔는 하반기에 더 미친 듯이 읽는다. 모르긴 몰라도 8월에는 한 70권쯤 읽을 거고, 8월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그 탄력이 그대로 남는다면 9월도 어지간하겠지. 예상컨대 올해는 500~600권 사이에서 맺을 듯. 그렇다면 17년 이후 최대량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다시는 이렇게 읽을 일은 없겠거니 했었지만, 작년에 11권 달성에 실패한 반동으로 올해 이러는 모양이다. 그리 잘하는 짓 같지는 않지만 딱히 못할 짓도 아니어서 아무려면 어떤가 싶고 그렇다. 뭐 이런 게 syo고 또 이런 게 syo의 인생이지.

 

 

 

3

 

소설을 기가 막히게 잘 읽고 또 읽은 것들을 오래 기억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늘 혀를 내두른다. 읽은 양으로는 나도 어디서 꿀리질 않는데 나는 왜 저런 게 안 되는가. 그것은 오래도록 숙의의 과제였다. 그러다가 최근에서야 문득, , 내가 이래서 안 되는구나- 하고 깨달은 바가 있었다.

 

소설을 잘 읽는 친구들은 등장인물에 이입한다. 그 친구들은 아, 저 기쁨 나도 알지, , 내가 이 상황이었다면 너무 슬펐겠구나, , 떠나! 저 호로새끼를 버리라고 제발! 이렇게 읽는다. 그런데 syo는 작가에 이입한다! , 이 기쁨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대단하다, , 저런 오도 가도 못 할 상황을 만들어내다니 대단하다, , 저런 불세출의 호로새끼를 창조하다니 대단하게 대단하다! 이렇게 읽는 것이다…….

 

그러니까 잘 읽는 친구들이 등장인물들을 따라 다종다양한 감정의 널을 뛰면서 읽기의 직물을 짜나가는 동안, syo는 오로지 감탄의 감정 하나만 가지고 독서를 해나갔던 것. 감탄이란 건 뚜껑 따자마자 원샷으로 들이켠 500ml 콜라처럼, 체감하는 당시에는 온몸이 저릴 정도로 톡 쏘고 목은 따갑고 눈물이 퐁퐁 샘솟을 정도지만, 진정되는 데 긴 시간이 필요 없고, 결국 빈 플라스틱병만 남는 그런 유형의 감정이다. 그래서 syo의 소설 읽기가 시간의 이빨 앞에 그토록 무력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될 작정이 1도 없는 인간이 작가의 눈으로 소설을 읽는 것에는 어떤 이점이 있는가. 이제는 이게 질문이구나…….

 

 

 

4

 

나는 소플아(소크라테스-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만 만나면 이상하게 까고 싶어서 손가락이 근질거린다.

 

 

 

 

--- 읽은 ---

 


190. 동급생

프레드 울만 지음 /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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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름다운 작품에 흔하고 무딘 찬사를 한 줄 덧붙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나의 줄기로 만들 수 있는 이야기 가운데 가장 완벽한 작품이다. 그 줄기가 무리 없이 버틸 수 있는 동시에 최고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무척이나 적합한 양의 잎과 꽃이 달려 있다. 세밀해야 할 만큼만 세밀하고 아름다워야 할 만큼만 아름다운 글을 쓰기란 정말 어렵다.

 

이것 보소, 또 작가에 이입하고 앉았다. 울만 안 돼, 울만 안 돼…….


그나저나 동명의 야한 게임이 있었다. 원도 있고 투도 있고 리메이크조차 있었다. <동급생>은 그냥 야겜의 대명사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 '동급생'은 실수로라도 입에 올리면 안 되는 단어였다. 자칫하면 뭐라고? 동급생이라고? 이새끼 그거 해봤나보네? 이러면서 비릿하게 웃는 하이에나들에 둘러싸인 부시맨 소년이 되고 마는 것. 하지만 과연 그게 안 해본 놈들 입가에서 나올 수 있는 웃음이었나. 어떻게 그 <동급생>은 잘 지내는지 모르겠다. 이 『동급생』은 잘 지내다 못해 완벽하게 아름답다. 그리고 지금 이 문단은 세상에서 제일 미친 놈이 쓴 제일 미친 리뷰의 한 대목 같다.

 

어느 날 밤, 부모는 외출을 하고 가정부는 심부름을 갔을 때, 그 목조 주택이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에 휩싸였다. 소방차들이 당도하기도 전에 아이들이 불에 타 죽고 말았다. 나는 불이 난 것을 보지도, 가정부와 어머니의 비명 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단지 다음 날 시커멓게 그을린 벽과 타버린 인형들, 뒤틀린 나무에 뱀처럼 매달려 있는 숯이 된 그네 줄을 보았을 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 일은 전에 그 어떤 일로도 겪어 보지 못한 엄청난 충격으로 나를 뒤흔들어 놓았다. 나는 수천 명을 빨아들인 지진, 마을들을 묻어 버린 불타는 용암의 흐름, 섬들을 삼켜 버린 대양의 파도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황하가 범람해 백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거나 2백만 명이 양쯔 강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도 있었다. 수많은 군인들이 베르됭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추상적인 이야기 숫자, 통계, 정보였다. 한 사람이 백만 명을 위해 고통스러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 세 명의 아이들, 내가 알고 있었고 내 눈으로 보았던 그 아이들은 완전히 다른 이양기였다. 그 아이들이 무슨 짓을 했기에, 그 가여운 어머니와 아버지가 무슨 짓을 했기에 그런 일을 당해야 했을까?

_ 프레드 울만, 동급생

 

 

 


191. 철학의 태도

아즈마 히로키 지음 / 안천 옮김 / 북노마드 / 2020

 

쌔삥(?) 철학에 대해 비전공자가 공부하러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은 크지도 않고 잘 발견되지도 않는다. 하려고 들면 하겠지만, 외국어도 필요하겠고, 앞 세대 철학자들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겠고…… 그럴 땐 개론서가 좋은데, 개론서도 개론할 만큼 명망 있는 철학자를 대상으로 하지 않으면 팔리지 않으니 그 구멍 역시 좁거나 없다. 결국 철학에 조예도 욕심도 없는 통상의 독자 입장에서 보면 최첨단 철학은 들뢰즈나 데리다, 더 나가면 지젝 정도의 위치에서 형성되는 듯. 잘은 모르지만 들뢰즈 훌륭하고 데리다 못지 않겠지만 5G 인터넷망이 어떤 건지 상상이나 하다가 돌아가신 분들의 철학이 겁나 새롭다는 느낌을 주기는 어렵다. 그 이전 철학자들에 대해 폭넓게 아는 독자라면 준거점이 달라서 비교적 참신해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름을 들어본 철학자라고는 플라톤이랑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뭐 이런 사람들 뿐인 독자, 아는 거라고는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데, 나는 생각하면 고로 존재해야 한다던데, 뭐 이 정도에 그치는 독자 입장에서는 현대 철학자들의 참신성을 인지하기가 도리어 어렵다. 우편-전신-유선전화-무선전화-시티폰-피쳐폰-스마트폰의 발전사를 따라가는 사람이야 스마트폰의 참신성을 깨닫지, 편지지 보여주고 대뜸 스마트폰 보여주면 그건 참신한 게 아니라 완전 다른 물건일 뿐이다. , 이런 게 다 진짜 최신식 철학을 공부하기 싫은 사람에게 좋은 핑계가 된다.

 

젊은철학자로 나타나 시대를 풍미하는 사람들이 그래도 일본에는 가끔 있나 보다. 아즈마 히로키도 지금은 차마 젊다고 하기 어려운 나이가 되었지만. 어쨌든, 오래된 생각을 새로운 현상에 적용하는 방법보다 새로운 현상에 맞는 새로운 생각 자체를 배우고 싶을 때가 있다.

 

가령 만화가 있으면 고전적으로 접근하는 연구자는 만화 콘텐츠를 독해할 뿐, 만화 주변에 형성된 관계망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 만화가 어떤 형태로 소비되는지, 만화를 읽은 오타쿠가 어떤 2차 창작을 하는지를 간과하고 작품을 논한다. 작품만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소비자가 그 작품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하면 작품 주변에 어떤 문맥이 생겨나고, 그 문맥을 활용해 소비자가 어떤 행동을 하며, 그것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사회의 문화 현상은 작품이 아니라 '작품 소비자의 행위'를 시야에 넣을 때 핵심에 다가갈 수 있다.

_ 아즈마 히로키, 철학의 태도

 

 

 


192. 스스로를 아는 일

앙드레 지드 지음 / 임희근 옮김 / 유유 / 2020

 

몽테뉴의 수상록을 앙드레 지드가 발췌하고 서문 해설을 단 책이다. 수상록은 두꺼운 책이라 그런가, 대부분 다 편역이고, 완역한 것은 동서문화사 판밖에 없는 것 같다. 20대 초반에 그 책을 읽었었는데, 문체가 참 신비롭지만 졸립다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다. 물론 좋은 말씀은 너무 많았다. 유물론자 공대생이 읽기에는 괜찮았다. 신비롭지만 졸린 게 문제였지. 이것은 곧 신비롭고 졸린 문체로 느껴졌고, 마침내 신비롭게 졸린 문체라는 생각이 들기에 이르렀다. 하루에 한두 꼭지를 침대 위에서 읽다가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나를 깨울 때까지 기절하는 방식의 라이프스타일을 확립하는 데에 큰 도움을 받았다. , 물론 좋은 말씀은 너무나 많았다. 언제 한번 다시 꼼꼼하게 읽어볼 작정이다. 그 몸풀기로 이 작은 책을 집어든 것. 작아도 신비롭(지만//) 졸렸던 것을 보면, 역시 위대한 책은 크나 작으나 자신의 빛나는 특성을 잃지 않는 법인 듯. 다시 한번 말하지만, 좋은 말씀은 너무나 많았다. 짐작건대, 심지어 몽테뉴의 이 문체를 사랑하는 사람도 상상해볼 수 있다. 취존.

 

모든 스포츠와 훈련이 공부의 일환이 될 수 있다. 육상, 레슬링, 음악, 무용, 사냥, 무기와 말 다루기. 학생의 외적 태도나 품위, 그의 사람됨을 마음과 함께 빚어 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형성해 주는 것은 마음도 몸도 아니라 바로 인간이며, 교사는 비단 제자의 몸과 마음만 빚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몸은 아직 유연하므로 마땅히 모든 유행과 관습에 부응해야 하며 젊은이는 대담하게 모든 국가와 집단에 들어맞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 필요하다면 모든 무질서와 고통도 맛보아야 한다. 그가 모든 유행에 친숙해지게 하라. 그러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고 칭찬받은 일만 하려 들 것이다.

_ 앙드레 지드, 스스로를 아는 일

 

 

 

 

--- 읽는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 이주영

1417, 근대의 탄생 / 스티븐 그린블랫

플라톤 전집 1 / 플라톤

젠더 모자이크 / 다프나 조엘, 루바 비칸스키

맨발 / 문태준

회계가 직장에서 이토록 쓸모 있을 줄이야 / 한정엽, 권영지

하루 5분의 초록 / 한수정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 / 사라 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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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06-01 19: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정말 다양하게 읽으세요. 부럽습니다. ^^
책의 진짜 진수는 소설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왜 손이 안 가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ㅠㅠ

syo 2021-06-01 19:58   좋아요 4 | URL
읽기라면 북다님처럼 진하고 깊이 읽기가 부러운 읽기죠.
언제나처럼 권 수만 늘리는 syo의 허랑방탕한 읽기.....

저는 이런 이유로 소설을 더 열심히 읽어보려구요. 이제부터는 의식적으로 등장인물에 이입하면서....

북다이제스터 2021-06-01 20:04   좋아요 3 | URL
별 말씀을... 전 syo 님이 소개해 주신 책 읽기도 벅찬 것 같습니다. 좋은 소설 소개 많이 해 주시는데 읽어야지 하면서도 소설외 다른 소개해 주신 책부터 먼저 읽게 됩니다.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ㅠㅠ

syo 2021-06-01 22:51   좋아요 0 | URL
사실 책은 너무너무 많아서 저절로 손이 가는 것만 읽어도 죽을 때까지 읽을 책 없는 일은 없겠잖아요.
북다님의 독서 스타일이 스스로 다음 책을 지목하는 것이니, 저는 북다님의 독서를 응원합니다 ㅎㅎㅎ

붕붕툐툐 2021-06-01 20: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syo님 글을 읽으며 생각해 보았어요. 저는 등장인물에 감정이입은 안 되고, 그렇다고 작가한테도 감정이입이 안되고, 그냥 스토리 파악이 주라는 걸.. 어흑~ 저도 작중 인물에 감정이입 해가며 읽도록 노력해 봐야겠어요~ 한꺼번에 다양한 읽기를 하시는게 syo님 읽기의 특장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syo 2021-06-01 22:53   좋아요 2 | URL
저는 스토리 파악을 하긴 하는데 제일 빨리 까먹는 것도 스토리입니다. 사실 재독할 때마다 뭔가 새로운 책 같아서 좋긴 해요 ㅋㅋㅋㅋ 그래서 그 단점은 사실 좋아합니다.

저는 동시에 여러 권 읽으면서 뭔가 하나도 제대로 몰입해서 들어가지 않는 독서로 이번 생을 채우다가 갈 모양입니다. 그건 그거대로 가볍고 팔랑거리는 깨달음이 생겨서 괜찮아요. 양질 전환의 법칙이라잖아요. 많이 읽다보면 뭐 얻어지는 것도 있겠지요^-^

새파랑 2021-06-01 20: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엄청나게 다양한 분야를 읽으시면서 5개월에 190권이라니 정말 대단하신거 같아요~ 진정한 독서 기계네요~!! 역시 세상은 넓고 엄청난 분들도 많은거 같아요 ^^

syo 2021-06-01 22:55   좋아요 2 | URL
ㅎㅎㅎ대단의 영역이라기보다는 그냥 개인적 특색에 가깝습니다.
권수를 줄이고 오래오래 깊이 읽어도 결국 조금만 시간 지나면 다 똑같이 희미해지더라구요.
그럴 바에야 그냥 치고 달리는 전략입니다^-^

저는 새파랑님의 매일 만보 매번 리뷰가 더 대단해 보입니다.

꼬마요정 2021-06-01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몽테뉴의 문장들이 ‘신비롭지만 졸리다’에 극공감 하고 갑니다. ㅋㅋㅋ 그 문장들 하나하나 의미를 깨닫기엔 전 너무 모자라요ㅜㅜ 머리로는 그런가보다... 해도 그런 상황 속에서 느낄 감정들이 가늠이 잘 안된다고나 할까요. 절망을 이겨내고 희망을 얘기하는 건 쉽지만 직접 희망을 가지기란 쉽지 않은 것처럼 말이죠.

그나저나... 속독이라도 배우신 건가요?? 쉽게 읽히는 책들은 없어보이는걸요. 언제나 감탄만 합니다^^

syo 2021-06-01 22:59   좋아요 2 | URL
좋을 때는 또 좋은데, 약간만 피곤하거나 정신적 여유가 없어도 잘 읽히지 않더라구요, 몽테뉴의 문장이. 저는 늘 정신이 산만한 인간이어서, 그렇게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독서에 늘 실패하곤 합니다 ㅎㅎ 머리로도 생각하고 감정적 가늠도 시도해 보시는 꼬마요정님의 독서는 한 권을 읽으셔도 syo의 열 권만한 얻음이 있겠네요.

ㅎㅎㅎ 속독은 아니옵고, 직장생활이나 가정 건사하시는 다른 분들에 비해 책 읽을 시간이 많은 것뿐이랍니다^-^

레삭매냐 2021-06-01 21: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렇습니다.... 선풍기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작년부터 당근으로 하나 장만해
야지 하면서도 못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반다시 만원 짜리 선풍
기를 득템하겠습니다.

<동급생> 엔딩의 강력한 한 방의
추억이 돋습니다.
부담이 없으니 저도 다시 한 번
만나 보고 싶네요.

syo 2021-06-01 23:00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ㅋ 응원합니다.
특템하시면 인증샷 첨부한 페이퍼 작성해주시기를 ㅎㅎ

저는 동급생 재독인데, 놀랍게도 그 강력한 한 방의 엔딩을 까먹은 상태였습니다.
엔딩이 강력했다는 사실은 남았고, 뭔가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기억은 있었는데, 그 강력한 파트를 까먹었더라구요. 그래서 즐겁게 읽었습니다. 멍청해서 행복해요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6-01 21: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 만화책 빼고 55권인데…절반도 안 되네…저도 소설 열심히 읽을래요!!!그리고 맨발도 집에 있는데 볼까…(의욕만 있고 오늘은 어쩌다보니 단편소설 한 편조차 못 봤네요…)

syo 2021-06-01 23:02   좋아요 2 | URL
만화책을 빼다니, 그런 양심적인 일을..... 저는 결코 만화책을 빼지 않습니다.
<맨발>은 마음의 여유가 있고 한 줄을 오래 읽을 시간적 여유도 있을 때 읽으시길.
어쩌다보니 단편 소설 한 편도 보기 어려울 만큼 이래저래 분주하실 때에는 읽기 좋은 시집이 아니라서요 ㅎㅎ

han22598 2021-06-02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슨 머슨 일입니까? 이렇게나 많이 읽는 사람이 있긴 있나봅니다. 저의 현실세계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실은 실물을 본적은 없지만 ㅎㅎㅎ) 머슨 사람입니까? ㅋㅋㅋㅋㅋ 싱기하고 놀랍네요.

syo 2021-06-02 12:2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이제부터 이 정도 사람은 그냥 사람이구나 싶을 정도로 더 괴물같은 사람들이 조금씩 눈에 띄실 거예요 ㅎㅎㅎ 저는 쪼오끔 많이 읽는 수준이죠. 알라딘은 그런 곳ㅎㅎ

공쟝쟝 2021-06-02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시궁창에서 연꽃을 피워볼까…? (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혹은 나는 어떤 읽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 없는 독서는 아무리 많이 읽더라도 좋은 독서일 수는 없다는 나름의 생각들을 요즘 하고 있어요. 거기에 대한 메타적인 인식이 없이 지식으로 누군가를 내리누르거나 자기합리화에 골몰하는 읽고 쓰는 사람들을 발견할 때 책 금지령 먹이고 싶을 때도 있고.
또 생각해보니 바쁜 하루 속에서 틈틈히 그리워하며 책을 읽을때 읽기의 인식론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이제부터 남는 두달.. 어떻게 읽을 것인지를 고민하게쒀요… 오늘부터 커피 탈땜 무조건 아이스. 읽다 지쳐하는 산책은 반바지 고고!

syo 2021-06-02 12:29   좋아요 1 | URL
요즘 알차게 생각하고 알차게 읽고 쓰는 중인 쟝님이시로군요.
저는 뭐, 예전부터 저한테 워낙 관심이 많아놔서 어떻게 읽는가 어떻게 쓰는가 늘상 주시하고 있었지요.
그런다고 뭐 많이 훌륭해진 것 같지는 않지만, 쟝님의 말을 듣고 나니,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그지같았을까를 생각하게 되네요 ㅋㅋㅋㅋㅋㅋ

왜 남는 두달이야 근데? 두달 뒤에 어디 가요?

공쟝쟝 2021-06-02 12:48   좋아요 0 | URL
두달 뒤부터 백수 때려치고 돈벌거야ㅋㅋ

공쟝쟝 2021-06-02 12:49   좋아요 0 | URL
그때까지 우리 함께 읽기에 대한 읽기를 읽기하자!!! 아 맞다 쇼님 공부해야지? ㅋㅋㅋ 열공열공 ^ㅡ^

바람돌이 2021-06-02 1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근사했던 syo님의 그 상금받은 리뷰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방금 알게 되었네요. 작가의 눈으로 책을 읽는다. 확실히 특이한거 같아요. 작가가 아닌 사람으로서는....
저의 경우 전형적인 등장인물 공감 대입형이거든요. ㅎㅎ
아 근데 책을 저렇게 많이 읽고도 일상생활이 가능하세요?????

syo 2021-06-02 12:31   좋아요 1 | URL
저도 등장인물에 공감하고 싶어요.
아주 가끔 자동으로 그렇게 되는 책이나 영화가 나오면 펑펑 울고 막 그러는데, 막상 그런 작품들이 또 작품 자체만으로 놓고 보면 크게 훌륭한 것은 아니었다는......

저는 지금 이게 일상생활이랍니다^-^ㅎㅎㅎㅎ

독서괭 2021-06-04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syo님은 언젠가는 작가가 될 것이라는 결론. 음. 끄덕끄덕(만족)

syo 2021-06-04 12:4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만족)˝에서 빵 터졌음
 


그대의 탄생

 

 

 

윤곽이 둥그런 연못 있어서 귀여운 붕어도 살고 어여쁜 잉어도 몇 마리쯤 이리저리 헤엄치며 노는 연못이 있어서 물방개도 소금쟁이도 버들 그림자 일렁이는 수면 위로 미끄러지고 긴 풀이 서로를 스치며 바람을 연주하면 연잎 위에 올라앉은 조그만 청개구리 그 음악을 듣는 둥그렇고 윤곽이 부드러운 연못이 있어서

 

거센 빗방울이 얼굴을 두드리면 비가 지나갈 날을 기다리고 꽁꽁 살얼음이 얼어붙으면 눈이 지나갈 날을 기다리며 영원처럼 반복되는 계절 속에서 자신의 윤곽을 힘있게 지켜나가는 연못이 있어서 어떤 침범 속에서도 넘치지도 둑을 무너뜨리지도 않는 단단한 연못이 있어서

 

그런 연못이 아름다워서 누군가 물가에 크고 빛나는 바위 하나 내려놓았더니 연못의 윤곽은 살짜기 안으로 말려 들어가고 윤곽은 이제 연못만의 윤곽이 아니고 바위와 연못의 접경지대고 그 어둡고 따뜻한 틈새에 처음 보는 물풀이 돋고 도마뱀이 알을 숨기고 비늘에 무지갯빛을 두른 물뱀도 한 마리 자리를 잡고 새봄 연못에서 나는 생명들의 합창곡이 달라졌고 여름 빗방울에 퍼져나가는 물무늬가 달라졌고 가을볕에 몸을 뒤척이는 윤슬의 생김생김이 달라졌고 겨울 얼음이 얼고 녹는 시작점과 끝점이 달라졌고

 

마치 비가 지나가길 기다리듯이 눈이 지나가길 기다리듯이 연못은 바위가 지나가길 기다리면서 윤곽이 돌아오길 기다리면서 영원의 반복이 자신의 편이길 기대하면서 넘치지도 무너지지도 않으면서 모든 것이 변하여도 끝내 변하지 않을 무언가를 지키면서 웅크리고 웅크린 빛으로 바람이 불어야 겨우 이는 여린 물살로 풀의 노래로 붕어와 잉어의 헤엄으로 바위를 톡톡 두드리면서 연못은 시간 속에서 버텨내면서 자기 자신을 믿으면서 최선을 다해 버텨내면서 연못은

 

새벽 바람에 쿵쾅거리는 발소리 몇 달려들어 바위를 다시 실어 간 어느 날부터 연못은 다시 둥그런 윤곽을 만들기 위해 바위의 흔적 쪽으로 느린 물살을 밀어내면서 연못은 오래지 않아 다시 둥그런 윤곽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 끝내 연못이 연못이기 위하여 지켜냈던 뭔가를 풀어놓을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연못은 모든 것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를 바라면서 연못은 열심히 열심히 무언가를 더듬고 쓰다듬고 들었다가 내려놓고 껴안았다 풀어주고 매듭을 고쳐 묶고 울고 또 웃고 무심한 계절 속에 자신의 표면을 마모시키면서 가는 길인지 돌아가는 길인지를 끝없이 헤아리면서 연못은

 

어느 날 문득 생각했던 것입니다. 빗방울에 얻어맞으며 이 비가 그치면 돌아올 진짜 나를 기다렸던 내가 그날의 진짜 나였구나. 바위를 만졌던 나도 그 만짐으로써 나였고 나였음으로써 만졌구나. 바위를 만지면서 그 만짐으로 나를 만졌구나. 나는 끝없이 나를 만짐으로써 나를 만들고 나를 만듦으로써 나를 지켰구나. 나의 윤곽은 내 만짐의 윤곽이었구나. 나는 한 번도 진짜 나였던 적이 없었구나, 그리고 그럼으로써 모든 순간의 내가 다 진짜 나였구나.

 

그리고 연못은 문득 바위가 그리워지고 어느 먼 곳에서 바위 또한 자기 생각을 할지 궁금해졌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나는 비처럼 눈처럼 바위처럼 여기 왔습니다. 당신의 오늘을 만들어 오늘의 당신을 만들기 위해 오늘 당신에게 왔습니다. 당신은 연못처럼 여린 물살로 내게 와서 나를 스치고 톡톡 두드리며 오늘의 당신을 만들면서 나의 오늘을 만들어주세요. 나는 나를 굴려 당신의 윤곽을 내 윤곽과 닮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당신은 나를 닮아가지 않고 나를 만지는 당신의 만짐을 닮아갑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닮아가기 바쁩니다. 그저 그렇게 하는데 서로가 필요할 뿐입니다.




박이문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구축하는 나름의 세계를 '둥지'라는 소박한 표현으로 나타낸다. 조금 어려운 말로 풀면 그 중심엔 '존재-의미 매트릭스'가 있다. 그것은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짜내어 그 속에 몸담고 살아가는 세계다. 새가 둥지를 짓는 것처럼, 인간도 나름의 삶의 틀을 마련한다. 새의 둥지가 다양하듯 인간의 둥지도 다양하며, 새의 둥지가 종종 허물어지고 다시 다듬어지듯 인간의 삶의 틀도 파손과 갱신의 변화 과정을 겪는다. 둥지의 바깥은 이 둥지에 영향을 주지만, 우리는 우리의 거처인 둥지를 통해 그것과 관계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둥지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변형시킨다. 이 둥지와 거기에서 비롯하는 변화 또한 둥지의 존재-의미 매트릭스에 귀속된다.

  우리가 파악하는 세계는 우리 자신의 자리를 포함한다. 그 자리로부터 우리는 세계와 관계한다.

_ 문성원, 철학의 슬픔

 

무언가가 ''를 나타내기 이전부터 ''''입니다. ''는 이미 ''로써 ''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임으로써 그 역할과 기능을 완벽히 수행하고 있는 겁니다. 바꿔 말해, 인간은 인간입니다. 어떤 행위를 해서 인간이 아니고, 날 때부터 인간이기에 인간입니다. 그러니 이제 진짜 ''와 가짜 ''를 구분하지 맙시다. 의미 없는 구분입니다.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릴 땐 근엄한 모습, 누군가에게 부탁할 땐 아부하는 모습, 누군가를 싫어하지만 필요에 의해 곁에 둬야 할 땐 가식적인 모습. 이런 것들을 소위 '가면'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것 또한 선생님이고 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짜 나''가짜 나'를 애써 구분하려다 보니 가면을 쓴 내 모습에 괴리감을 느끼고, 종국에는 그런 자신을 싫어하는 양상을 띠게 됩니다. 이런 괴로움들이 뭉쳐저 우울증을 만들어내고 정신적인 병리 증세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엇이 되엇든 결국 ''가 행하는 모든 것이 ''의 발자취이고 ''의 생이며 ''의 존재입니다.

_ 김불꽃, 이제 꿈에서 깰 시간입니다

 

"부모나 자식, 또는 친구와 지인 그밖에 은혜를 입은 선생님과 선배 같은 사람은 한마디로 말해 단순히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지. 잊어서는 아니 되는 사람이라고 말해야지. 그런데 그런 은혜와 사랑의 인연도 없고 의리도 없는 전혀 모르는 타인 중에서 솔직히 말해 잊어버린다고 해서 인정이나 의리를 모른다고 할 수도 없지만, 이상하게 끝끝내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지. 세상 모든 사람에게 그런 사람이 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적어도 내게는 있어. 아마 자네에게도 있을걸.“

_ 구니키다 돗포, 잊을 수 없는 사람들

 

 

 

--- 읽은 ---

 


185.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장 지글러 지음 / 양영란 옮김 / 시공사 / 2019

 

- 일독(190710)

- 재독(210530)

 

인간은 말이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건 확실하게 알아. 이 할아버지는 5초마다 10세 미만 어린이 1명이 배가 고파서 혹은 배고플 때 제대로 먹지 못해서 걸린 병 때문에 죽어가는 곳에서는 살고 싶지 않아. 게다가 우리 별 지구는, 식량의 분배만 공정하게 이루어진다면 현재 인구의 2배 정도도 아무 문제 없이 먹여 살릴 수 있는데 말이야. 재산의 살인적인 불평등,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벌이는 부자들의 영구적인 전쟁에 화가 나서 눈이 뒤집힐 지경이지. 나는 반계몽주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시장의 힘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소비자들에 대한 조롱 행위 등을 인간의 이성에 대한 모욕이라고 받아들인단다. 환경 파괴, 천연자원의 과도한 개발, 서서히 진행되는 지구의 죽음 등은 한마디로 잔학함의 끝이지.

_ 장 지글러,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나도 없이 살아봐서 아는데, 라는 말머리는 대체로 적절하지 않다. 한때 없이 살아봤으나 지금은 나쁘지 않게 가지고 사는 사람의 자기 성취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슬쩍 드러나는 거라고 보는 쪽이 옳다. 그런 말 없이도 북돋고 돕는 사람은 북돋고 돕는다. 그런 도움에는 없이 살아본 경험이 딱히 필요한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해의 차원에서 보면, 사람은 자기가 가난해 본 딱 그만큼만 타인의 가난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가난을 폭넓게 이해하는 게 무슨 벼슬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으로 우겨넣어 재단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다. 조금 길게 생각하고 판단하지 왜 눈앞의 상황만 보고 결정하느냐는 말 같은 건 나는 너만큼 가난해 본 적이 없어서 너를 이해하지 못하노라 하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가난한 사람은 앞날 같은 거 잘 생각하지 못하는 게 통상적이다.

 

그러나 가난도 어떤 영역 안의 일이다. “5초마다 10세 미만 어린이 1명이 배가 고파서 혹은 배고플 때 제대로 먹지 못해서 걸린 병 때문에 죽어가는 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이 가난이라는 단어에 수용될 수 있을까. 그들이 우리는 왜 가난할까?’라고 생각할 것인지를 떠올려봤다. ‘먹을 것을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이 아픔은 어떻게 해야 사라질까’ ‘옆집 아이는 죽었을까같은 생존과 실존에 대한 질문들이 거대하고 무겁겠다. 이 모든 게 우리가 가난하기 때문이고 우리가 가난한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벌이는 부자들의 영구적인 전쟁때문이라는 생각까지 도달하기 위해서 숨쉴 만큼의 여유는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생각할 여력이 있을 때까지 우리는 돕고, 그때까지 생각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라는 물건을 만들고 살 여유가 있는 사회에 사는, “을 쓰고 읽을 줄 아는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

 

물론 이조차 내가 겪어본 가난의 범위 안에서의 이해에 그칠 것이다. 확실히 내 경험의 범위 안에서는, 우리 집은 왜 가난하고 엄마는 왜 아프며 아버지라는 사람은 어디에 있고 나는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치열한 생각보다, 나는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 집 사정을 어떻게 알았는지 돕겠노라며 집안에 들여놓은 쌀, 김치, 라면, 반찬 같은 것들이 훨씬 이로웠다. 엄마가 퇴원할 때까지 일단 월세는 내지 말고 그냥 살라던 자본가 집주인 할아버지의 통 큰 자선이 훨씬 실질적이었다. 생각은 당장의 배고픔을 줄여주지 않고,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급한 일을 하는 동안 내가 되고자 하는 나는 한 발 더 멀어지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는 금방 무너질 것 같지 않다. 하지만 그걸 무너뜨리기 위해 나설 수 있는 이는 그 체제의 가장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보다는 조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아이들에게 깨끗한 물과 필수적인 예방주사를 제공한다는 단체에 약간의 돈을 보내는 좋은 일을 했다면, 동시에 생각을 자꾸 해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

 

 

 


186. 정선

최은미 지음 / 최지욱 그림 / 미메시스 / 2018

 

- 일독(1810xx)

- 재독(210530)


슬픈 사연을 이고 어른으로 자라난 아이를 만들거나, 서울에서 치이고 치이다 끝내 고향을 찾아온 사기꾼을 만들거나, 조금씩 조금씩 멸망의 방향으로 스스로를 슬며시 밀어가는 망가진 사람을 만들어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땅을 팠더니 숟가락이 나오고, 그 숟가락을 갈고 갈아 무기로 바꾸는 사람을 만드는 것, 그 숟가락의 유래가 어디까지 거꾸로 거슬러 올라갈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던지면서 우리 모두를 숟가락을 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물크러지고 비릿한 것들을 내내 둘러쳐 문장 위를 걷는 독자를 끝없이 취하게 만드는 일은 어렵기까지 하다.

 

좋았던 글을 다시 읽었는데 역시 좋았고, 이제 최은미 선생님의 모든 책을 읽으러 갈 것이다.

 

밥은 먹지 않았다. 썩기 직전의 과일도 먹지 않았다. 동창이 까만 봉지에 담아 준 복숭아와 자두는 실온에서 하룻밤이 지나자 들큼한 냄새를 풍겼다. 손으로 살짝만 쥐어도 물크러질 것 같은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 있는 것들에선 무언가 사람을 미치게 하는 냄새가 났다. 자귀꽃에서도 그런 종류의 냄새가 났다. 달콤하면서 메슥거리고, 설레면서도 허전한 냄새. 누군가를 만나게 될 것 같은 냄새. 금세 망가질 것 같은 냄새. 어쩌면 여름 냄새가 대체로 그런 건지도 몰랐다.

_ 최은미, 최지욱, 정선

 

 


187. 나의 첫 투자 수업 1 : 마인드편

김정환, 김이안 지음 / 트러스트북스 / 2021


188. 세상 친절한 경제싱식

토리텔러 지음 / 미래의창 / 2019

 

 

 


189. 인문교양책 만드는 법

이진 지음 / 유유 / 2021

 

책 만드는 사람이 될 건 아니지만 책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를 자꾸만 찾아 읽는 것은 책 읽는 사람의 습벽 같은 것일까. 유유는 늘 재미있는 기획으로 syo의 눈길을 붙잡는데, 요즘 줄줄이 나오는 ‘~책 만드는 법시리즈 역시 딱히 그 일에 궁금한 게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냥 지나치지를 못하겠다. 책이라고 쓰지만 그게 다 같은 책이 아니어서, 에세이 만드는 편집자의 글과 인문교양책 만드는 편집자의 글은 중식요리와 일식요리처럼 제각각이다. 몇 권 더 찾아 읽어도 될 것 같다.

 

서로의 영역과 의견을 존중하고, 자신의 판단이 섣부르거나 부족할 수 있음을, 자신의 감각이 낡았거나 후퇴했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연습을 하는 길밖에 없다. 나는 경력이 많은 사람이 반드시 책을 잘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내 경력의 반도 안 되는 편집자들이 매력적인 콘셉트의 눈에 띄는 책을 척척 만들어 내는 모습을 SNS를 통해 많이 본다.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하는 이야기,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이야기를 잘 찾아내 감각적인 편집으로 선보이는 모습이 얼마나 당당하고 멋진지 모른다. [] 그러니 경력이 많다고 해서, 직급이 높다고 해서 의사 결정 과정에서 주도권을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된다. 어느새 내 감각이 낡았을 수도 있고, 내가 쥔 작은 권력이 내 눈을 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을 늘 가져야 한다.

_ 이진, 인문교양책 만드는 법

 

 

 

--- 읽는 ---


1417, 근대의 탄생 / 스티븐 그린블랫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 권김현영

소설 제주 / 전석순 외

동급생 / 프레드 울만

맨발 /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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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5-31 14: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두권 있네요
지글러, 그린블랫
그린블랫은 다른 책으로 좋았어서 사놨는데 아직 못읽었습니다.^^
재독하시는 것도 있으신걸 보니 부끄럽네요.ㅠ

syo 2021-05-31 14:31   좋아요 3 | URL
저는 그린블랫 처음 읽는데, 다른 책도 벌써 읽으셨군요. 부끄럽네요 ㅎㅎㅎㅎ
읽고 좋으셨다는 그린블랫의 다른 책 저도 조만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너무 좋네요^-^

그레이스 2021-05-31 14:34   좋아요 2 | URL
<세계를 향한 의지>였어요.
세익스피어에 관한.
좋았어요.^^

syo 2021-05-31 14:36   좋아요 4 | URL
아, <세계를 향한 의지> 출간되었을 때 읽었었는데, 그게 그린블랫 책이었군요!
사실 내용도 거의 다 까먹어서 ㅎㅎㅎㅎㅎ
제 재독 이유가 이렇게 들통나버렸네요 ㅋㅋ

붕붕툐툐 2021-05-31 21: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앗, syo님 전업 투자자로 변신하시는 거 아니죠? 요즘 주식, 코인 광풍이다 보니 경제 관련 책을 보고 혹시나....ㅎㅎ

syo 2021-06-01 16:57   좋아요 0 | URL
전혀 아닙니다 ㅋㅋㅋㅋ
요즘 대화할 때 꿀먹고 앉았기가 너무 서러워서 개론서 몇 권 들춰보려구요 ㅎㅎ

독서괭 2021-06-01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많이 읽으시는 와중에 재독까지 하시는 게 정말 놀랍네요. 그대의탄생 글도 너무 좋습니다. 운율에 많이 신경 쓰셔서 시인지 산문인지 헷갈리네요. 뭐든간에 좋은 거^^

syo 2021-06-01 16:57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ㅎㅎ 역시 독서괭님 뭘해도 syo편^-^

공쟝쟝 2021-06-01 15: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못이야기는 어린이용 그림책으로 만들어도 좋을만치 이쁘고 따땃하네요.
이를테면 이런 문장 ˝그러니까 그들이 생각할 여력이 있을 때까지 우리는 돕고, 그때까지 생각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책”이라는 물건을 만들고 살 여유가 있는 사회에 사는, “글”을 쓰고 읽을 줄 아는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 은 저 자신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글을 읽고 쓰는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여유있는 것 맞아요. 정말 그래요. 돌아보니 그랬던 것 같아요.
아직은 저 자신을 돌보는 데 더 열중해야 하는 것 아닐까 고민했었는 데, 제가 가진 것들을 한번 더 생각하게 되네요.

syo 2021-06-01 17:02   좋아요 0 | URL
우리가 그냥 하는 것들을 너무 그냥 하다 보니까 남들도 그냥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일이 많잖아요.
사실 무슨 일이든 어느 정도의 여유는 필요한 법인데, 필요한 수준의 여유를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어떤 문제에 대처해나가려다 보면, 그 여유 없는 상태가 대처 방법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나저나 뭐죠 이, 무슨 교훈을 얻은 것만 같은 댓글은? ㅋㅋㅋㅋㅋㅋ
syo의 글에서 뭔가를 얻어내다니 시궁창에서 꽃을 피우시는군요 ㅋㅋㅋㅋ

공쟝쟝 2021-06-01 17:41   좋아요 0 | URL
역시 시궁창에서 피는 꽃이 아름다운 법이죠.. 저는 깨닫는자. 아 깨닫도다.

syo 2021-06-01 19:16   좋아요 0 | URL
잘 깨닫네. 그렇게 자꾸자꾸 깨닫다가 붓다 되는 거야. 깨우친 자 붓다.
참, 붓다 이마에 있는 그 점 그거 점 아니고 털뭉치다?

공쟝쟝 2021-06-01 20:08   좋아요 0 | URL
뭬..뭬야…?

유부만두 2021-06-08 0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쟝 지글러 책은 ... 큰애 때 부터 십몇 년 간 계속 제 주위를 맴돌고 있고 세계는 계속 싸우고 배고프고 엉망이라 이젠 힘들어요. ㅜ ㅜ

syo 2021-06-08 12:48   좋아요 0 | URL
계속 싸우고 배고프고 엉망진창.....ㅠㅠ
저는 시간이 지날 때마다 반복해서 읽으려고 생각중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