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윤고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


황정은이 쓴『백의 그림자』를 처음 읽고 어찌나 울었는지 눈물로, 어찌나 칭찬하고 다녔는지 침과 땀으로 전신의 수분을 너무 많이 소비했던 거라, 건표고버섯처럼 메말라 한동안 시름시름 앓았다- 까지는 아니지만, 그 정도 과장해도 또 어떠리 싶을 만큼 황정은은 좋았다. 최초로 syo의 한국소설가 빠리스트(빠List)에 안착한 이후 오랫동안 홀로 자리를 지켜야 했던 김연수의 곁에 든든한 후배가 자리를 잡은 것이다. 하여간 너무 좋아서 처음 황정은을 추천한 눈 밝은 친구에게 또 누구 없냐고 채근했지만 친구는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 김금희도 아직 뜨기 전, 최은영은 등단도 하기 전이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syo가 아니었으므로, 구글링을 통해 어디선가 황정은-윤고은-손보미를 트로이카로 묶는 글을 발견했다. 윤고은과 손보미렸다.


그렇게 윤고은의『알로하』와 손보미의『그들에게 린디합을』을 읽고 어찌나 욕했는지 syo는 성대를, 소설이라고는 염상섭의 삼대 이후로 읽은 적이 없는 처지임에도 강제로 욕받이 역할을 맡아야 했던 친구 三은 고막을 잃고 말았다- 까지는 아니지만, 그 정도 과장해도 또 어떠리 싶을 만큼 당시에 syo는 열이 받아 있었다. 원래 덕질이 그런 법이라는 변명을 붙이고 싶다. 누군가 자신의 덕으로 내 덕을 깔거나 그와 맞먹으려 들 때, 내 덕을 지키기 위해 피와 비명을 감수하는 것이 진정한 덕도이므로, 좀 부당하다 싶을 만큼 윤고은과 손보미를 낮추어 보았던 것이 아닐까? 하여간 당시 syo의 눈에 황정은과 나머지 둘 사이에는 넘사벽이 놓여 있었기에, 윤고은과 손보미가 문단에서 승승장구하며 쑥쑥 자라는 것은 무언가 어둡고 끈적끈적한 비밀을 지시하는 징후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참 알차게 미친 놈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오늘, 이제 사죄와 정정의 시간이 왔다. 당신들은 몰랐고, 몰랐든 알았든 인생 행로에 하등의 걸림돌이 아니었겠으나, syo가 어리석었습니다. 그런 걸 눈이라고 달고 다녔더라구요. 허허허.


『알로하』가 아니라 그보다 더 근작들을 모아 놓은『늙은 차와 히치하이커』를 읽은 것이지만, 그간 맹목이었음을 충분히 인정할만큼 괜찮은 책이었다. 솔직히 황정은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말은 여전히 빠심이 인정할 수가 없고, 또 아래에서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김금희와 최은영의 추격도 견뎌내야 하겠지만, 윤고은은 참신하고 명민한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지어내며 자기 자리를 선명하게 선언하는 훌륭한 소설가다. 


리뷰나 페이퍼에서 줄거리를 언급하는 일을 극도로 꺼리는 syo지만, 사죄 정정 특집이므로 미흡하지만 짧게나마 읊어보자.


● 된장이 된 : 등록금 하게 오랜 빚 1000만원을 받아오라고 보내 놨더니 어디서 된장 50리터를 짊어지고 온 아버지. 그런데 아니 글쎄, 알고 봤더니 이 양반이....


● 불타는 작품 : 다 그린 그림을 태우는 조건으로 화가를 먹이고 입히는 후원자가 알고 보니 말하는 개. 그런데 아니 글쎄, 이 말하는 개후원자식이 내 작품에다가......


● 전설적인 존재 : 이렇게 꼴랑 달력작가로 빌빌댈 줄 알았으면 소설가 같은 거 꿈도 안 꾸는 건데, 하던 찰나에 내 앞에 나타난 학창시절의 문학천재. 그런데 아니 글쎄, 이 잡놈이 술 쳐먹고 한다는 이야기가.....


● Y-ray : 몸 속에 있지도 않은 가위, 두루마리 휴지, 폭죽 종이 같은 걸 막 찍어대는 신기한 기계. 이 기계를 통해 내부에 물건을 품고 있다고 진단 받은 이들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질병에 걸리고. 그런데 아니 글쎄, 이 몹쓸 병이 자꾸만.....


● 책상 : 지하철을 타고 잃어버린 말들을 찾아 헤매는 작가비서. 책상을 들고 만원 지하철에 타는 남자를 맞닥뜨리는데. 그런데 아니 글쎄, 이 지하철 민폐남이 알고 보니 오래 전......


● 다옥정 7번지 : 뜻밖의 타임슬립으로 현재의 서울에 떨어져버린 나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작가 박태원. 먹고 살기 위해 구한 일자리는 웃기게도 '박태원' 이고. 그런데 아니 글쎄, 난 내가 박태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 오두막 : 제주에서 우연히 만나 막 사랑이 싹트던 두 연인. 그러다 우연히 엄청난 사건의 목격자가 되면서 인생이 망가지기 시작하는데. 그런데 아니 글쎄, 그 사건으로부터 도망치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들이 알고 보니 여전히......


●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 아, 이제 못하겠다. 지쳤다. 그런데 아니 글쎄, 못하겠다 싶은 것이 하필 표제작인데.....



다음은 요것들








지금 당신에겐 시 한 편이 필요합니다

이은직 지음 / 휴먼큐브 / 2016


syo는 이과지만 언어영역이 강점인 희한한 자식이었다. 이과 주제에 수리영역 점수가 자꾸 언어영역의 1/3이라서 그렇지. 1교시 언어영역이 끝나면 문과에서 날고 기는 애들이 찾아와 이번 시험의 난이도랄지, 자기는 3번을 찍었는데 syo는 몇 번을 찍었는지 따위를 묻는 일이 모의고사 날 종종 있는 그림이었다. 어느 국어선생님이 한 번은 심심했던지 애들과 같이 문제를 풀었는데 117점을 받았다. syo가 118점을 받은 시험이었다. 그때 이후로 그 선생님의 도전이 끝없이 이어졌다. 전적은 어슷비슷했다. 한쪽이 안 틀리거나, 둘 다 하나씩 틀리되 한 명은 2점, 한 명은 3점짜리를 틀려 줘야 승부가 나는 게임이었다. 몇 번 하다보니 양상이 보였다. 시. 시가 어렵게 나온 날이면 거의 100% syo의 패배로 결말이 났다. 


시란 정말 아무리 공부해도 못 맞히겠고, 또 어떨 땐 공부 안 해도 맞히게 되는 변덕 심하고 고집 센 놈이었다. 더 큰 문제는 유명하고 해석이 너무도 명백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선생님이 가르쳐 주는 해석이 syo의 생각과 자꾸자꾸 빗나가는 거라, 도저히 시는 아니라는 결론만 자꾸 재확인하는 것이 수업의 유일한 기능인 셈이었다. 마침내, 시를 읽어주는 책을 싫어하면서 좋아하는 양가적 감정이 생겼다. '시'를 읽어줘서 싫은데, 시를 '읽어줘서' 좋은. 결국 '시 읽는 책'은 syo에게 모 아니면 도인 셈이다.


이 책은 최초의 걸 또는 윷이다. 저자는 20년 넘게 국어를 가르친 강사라고 하는데, 업계종사자답게 시어의 의미를 윽박지르는 경향도 있다. 종종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정말 하나의 수능 강의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가 아닌 것은, 시의 주름 속에 접혀져 쉽게 발각되지 않는 새로운 이야기들을 끄집어내는 장점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


추억에서 / 박재삼


진주(晉州) 장터 생어물전에는

바다 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 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닿는 한(恨)이던가.

울 엄매야 울 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 시리게 떨던가 손 시리게 떨던가.


진주(晉州) 남강(南江)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별빛에 보는 것을,

울 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유명한 시고, 그리는 그림도 선명하다. 울 엄매는 진주 장터로 나가 생어물을 팔고, 우리 오누이는 울 엄매가 늦은 밤 별빛을 맞으며 돌아올 때까지 골방에서 머리를 맞대고 떨며 기다린다. 진주 남강은 맑고 아름답지만, 울 엄매는 새벽같이 나갔다 별이 뜬 밤에 돌아오므로 그 아름다움은 보지도 못하고,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은 눈물만 흘리며 설웁게 오명 가명한다.


일반적인 해석에서 4연 5행의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은 같은 연 6행의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는" 눈물을 빗대는 표현 정도로 짚고 넘어간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여기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서 syo를 울렸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화자는 손 시리게 떨며 어머니를 기다리는 골방 속 오누이 중 한 명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화자는 어떻게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옹기전은 어머니가 생선을 파는 시장에 있고, 달빛을 받았다는 것은 시장이 파하는 저녁을 말하는 것인데, 골방에서 떨고 있었을 아이들이 어떻게 그 옹기를 본 것일까. 혹시 오누이가 어두운 밤 혼자 눈물을 흘리며 돌아올 울 옴매를 위해 밤길을 걸어 울 엄매가 있는 생어물전까지 마중을 나간 것은 아닐까? 혼자 옹기같은 눈물을 흘리고 돌아왔을 울 엄매와 손 시리게 떨던 오누이가, 어느 날은, 적어도 하루만큼은, 함께 손 잡고 어두워 채 보이지도 않는 진주 남강길을 웃으며 되짚어 왔던 밤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저자의 다정하고 촘촘한 눈썰미가, 아름답지만 슬픈 이야기를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로 바꾸어 놓는다. 물론 그것은 작은 변화지만, 필요한 순간에는 아주 큰 힘이 되는 작은 변화다.








베를린 일기

최민석 지음 / 민음사 / 2016


이 책을 읽는 순간, syo는 존재의 기반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한때 무모하게 꿈꾸었던 시, 소설, 평론, 마지막엔 서평. 그 모든 분야에서 가열차게 쫓겨나 이제 내게 남은 건 일기밖에 없다는 심정으로 꾸역꾸역 버티며 살아왔는데, 이 장르에도 번듯한 양민학살자가 있었다니.....


사실 돌이켜보면, 애초에 syo는 재미있는 글에 집착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정통파 일기스트로서 아침에 똥 싼 이야기, 점심 먹고 한 번 더 시도했더니 또 나와서 의아했던 이야기, 저녁 먹고 또 일을 치르며 이거 도대체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고민했던 이야기 같은 것들도 일단 경험했다면 여과없이 기록했을 뿐. 그런데 언젠가부터, 어차피 남들 읽을 거 다 알고 쓰는 거니까 조금 더 찰지게 쓰자는 욕심이 승하여 일을 그르치기 시작했다. 썩은 고기를 찾아 산기슭을 헤매고 다니는 하이에나처럼 재미있는 일을 찾아 해메고, 결국 오늘 하루는 재미있는 일이 1도 없었다 싶으면 극도로 우울해져 중2병 걸린 글을 난사한다. 그 와중에 또 뇌는 청순하여 저녁에 치킨 먹고 일찍 자면 다음날 일어나 또 싱글벙글 웃으며 썩은 고기를 찾아 산기슭을......


최민석은 슬픈 일로 웃기고 웃긴 일로 슬프게 할 줄도 알지만, 무엇보다 매일매일 일기를 쓴 걸 보면 아주 지독한 사람이다. 그것도 이런 퀄리티를 유지하면서. 안 읽어봤지만 소설도 잘 쓰겠지. 칼국수 잘하는 집이 수제비도 잘하는 이 승자독식의 세상에서 추노꾼한테 쫓기듯 칼국수 안 돼서 수제비, 수제비 안 돼서 잔치 국수, 잔치 국수 안 돼서 마침내 떡라면에까지 쫓겨 온 도망노비, syo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고디바를 먹고 나면 ABC 초콜릿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목전에서 들은 ABC 초콜릿만이 syo의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ABC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이웃들에게 권하고 싶지가 않다...... 


이런 것이 또 나왔다고 한다. 아, 어쩔거야, 제목이랑 표지만 봐도 벌써 웃기잖아. 아놔. 아주 작정했네, 이 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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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17-11-08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말씀하신 윤고은의 소설집은 읽지 못했지만 <1인용 식탁>을 좋아해요. 최근에 장편소설도 나왔죠. 읽고 싶은 신간은 많고 속도는 느리고. 아, 이건 제 이야기입니다. ㅎ

syo 2017-11-08 16:47   좋아요 0 | URL
아,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사죄의 의미로 전작을 시도하는 중이어서, <알로하>가 끝나면 바로 <1인용 식탁>을 읽어보겠습니다.

최근 손보미가 대산문학상도 받았던데, 늦기 전에 얼른 사죄해야 되겠어요.....

단발머리 2017-11-08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햐~~~ 가즈오 이시구로 전작 마친지가 얼마나 됐다고 또 이렇게 달리십니까.
김연수에서 시작해 황정은-윤고은-손보미라고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황정은 사랑이 무척 흐뭇합니다. 아, 물론 저는 황정은 작품은 단편 하나랑 또 하나, 뭐더라.... 암튼 두어개 밖에 못 읽어봤지만요.
잘 읽고 갑니다, 역시나!!!

syo 2017-11-08 20:23   좋아요 0 | URL
황누나는 사랑입니다. 더이상 말이 필요치 안타....

단발머리 2017-11-08 20:25   좋아요 0 | URL
syo님 무~~~~척 어리군요.
황정은이 누나라니^^ 아니면 그냥 애칭인가요? ㅋㅋㅋㅋㅋ

syo 2017-11-08 20:29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은 황누나보다 연상이셨군요. 전 저보다 한두 살쯤 많으셔서 여차하면 말도 놓을 수 있는 정도일거라 혼자 생각했었는데~ ㅎㅎㅎㅎ

단발머리 2017-11-08 20:33   좋아요 0 | URL
지금 황정은 나이 찾아봤어요~~ 이도 저도 아니지만.... syo님은 저한테 단발머리 언니라고 부르심 되겠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7-11-08 20:35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 언니 접수했습니닿ㅎㅎㅎㅎ
그러고보니 단발머리 언니하고 이러고 있으면 다락방님이 나타나시던데?!

풀꽃놀이 2017-11-08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떡라면에도 쫓기신 syo님! ㅎㅎ 최민석 몰랐던 분인데 땡기네요~~ 소개 감사합니다^^

syo 2017-11-08 22:28   좋아요 0 | URL
한 번 읽어보셔요. 웃겨서 복근생겼어요. 다 읽고 바로 다음날 사라졌지만.

풀꽃놀이 2017-11-08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윗몸일으키기 대신 사용하면 좋은 작가인가요?? ㅎㅎ
참, 김연수 팬인것도 반갑습니다.^^ 다음주 광화문 교보에서 강연 하시더군요.

syo 2017-11-08 22:40   좋아요 0 | URL
소중한 정보는 감사합니다만 대구 교보가 아니어서 슬프네요....ㅠ
 


마키아벨리의 네 얼굴

퀜틴 스키너 지음 / 강정인, 김현아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


나, 철학이라는 걸 한 번 공부해보려고 해. 10년지기 친구에게 syo가 말했다. 물론 전자과를 관두고 철학과로 옮기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알 건 다 아는 스물한 살이었다. 친구가 대답했다. 그래,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자기만의 철학이 있어야 해. 그 옆에 있던 7년지기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인생철학이 확고한 사람이 참 멋있더라고. syo는 우리의 대화가 삑사리났음을 내색하고 싶지 않아서 얼른 앞에 놓인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젠장, 잔이 비어 있었다. 야, 이 양반들아, 그 철학 말고. 친구들은 이 새끼가 결국 취하고 말았군, 하는 표정으로 syo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철학, 철학 말야, 플라톤, 응? 아리스토텔레스, 응? 알겠어? 아, 그 철학? 플라톤 그거, 아리스...토...그거? 당연히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친구가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근데 그걸 왜?


syo가 철학에 관심을 두기 전 살아왔던 인생은 저런 양상이었다. 오로지 미분적분확률통계수열급수행렬벡터로 끈적거리던 이과의 길. 그 길을 걷는 자들에게 철학이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으며, 오히려 알지 말아야 할 것에 가까웠다.『수학의 정석』은 있었지만 딱 한 글자 다른『철학의 정석』은 없었으므로, 학생들은, 특히 이과생들은 철학에 관심을 둘 이유도 시간도 없었다. 그 삭막하고 기계적인 교육과정을 뚫고 공대에 입학한 syo 역시, 친구들에 비해 나을 게 1도 없었다. 철학, 철학 말야, 플라톤, 응? 아리스토텔레스, 응? 이 다음에 몇 명 더 갖다 붙이고 싶었는데 아는 이름이 없었던 것이다. 하이....하이 뭐라는 애 있었는데, 하이마트는 아니고,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의 원리고, 하이.....그레? 하아. 솔직히 그때까지 아리스토텔레스도 "아리스토 텔레스"인줄 알았다. 텔레스 집안의 애교많은 막내 아리스토.


그런 syo가 철학책이라는 것을 난생 처음 읽어보겠다며 읽을 책을 좀 골라달라고 부탁했을 때, 어린 날 syo의 한없이 순수했을 눈동자를 보고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없이 버트런드 러셀의『서양철학사』를 권했던 그 몹쓸 사이코패스의 앞길에 빅똥이 있기를! 그 작자 덕분에 철학은 플라톤에서 시작해야만 되는 줄 알고, 플라톤만 보다가 마침내는 학을 떼고 눈물로 베갯잇을 적시던 슬픈 젊은날이 아른거린다. 젠장, 플라톤 다 주우우욱가라 그래!


그로부터 10년, 아직도 철학의 길 초입에서 관광안내도나 기웃거리고 있는 형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철학은 플라톤으로부터 시작했고, 읽다보면 어쩐지 칭송을 받든 엿을 먹든,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이 자꾸 튀어나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작자들 책부터 읽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어떤 분야를 공부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그 공부의 끝에 밥벌이가 있는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 그저 syo처럼 쫄레쫄레 나타나 몇 권 읽고 또 다른 곳으로 쫄레쫄레 가는 식으로 하는 공부라면, 그 분야의 발원지에 시작점을 찍고 물길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는 방법을 취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그 버릇을 고치기가 쉽지는 않았는지, 작년 여름쯤 정치학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어디선가 현대 정치학의 시작점으로 마키아벨리를 짚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해서 읽었다. 물론 그 동네에서도 제대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결국 깡패 지존 플라톤과 다시 맞닥뜨릴 수밖에는 없겠지만, 이제 그 이데아 덕후 영감은 정말이지 꼴도 보기 싫었다. 게다가 마키아벨리는 프사부터가 어쩐지 쉽게 곁을 내줄 것처럼 다정하게 생겼다. 아이고, 호락호락할 것 같은 저 미소 좀 보라지. 그리하여 한 계절, 마키아벨리를 읽었다. 역시 syo가 늘상 그렇듯이 입문서 위주로 쓸데 없이 중복으로. 그 결과 두 가지를 알게 되었는데, 시중에 도는 마키아벨리 책의 절반이『군주론』한 권을 다루고 있는 지극히 편향된 현실과, 그런 의미에서 진짜 마키아벨리의 사상 전반을 아우르는 입문서 중 맨 처음 볼만한 책은 바로 이『마키아벨리의 네 얼굴』이라는 것.


우리가 마키아벨리를 잔혹한 사이코패스나, 하다 못해 지옥에서 유치원을 다닌 사람 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오롯이『군주론』때문인데, 실제 마키아벨리는 악당보다는 입신양명에 목숨을 건 인간 쪽에 가까워 보인다. 전체 저작을 통해 보면 마키아벨리는 골수 공화주의자고, 아무래도 그 점이 마키아벨리를 현대 정치학 공부의 시작점으로 추천하는 사람이 있는 이유인 것 같다.『마키아벨리의 네 얼굴』은 그의 저작을 크게 네 덩어리로 나누어 네 명의 마키아벨리를 독자 앞에 세워 놓는다. 『서한집』과『외교문서집』의 외교관,『군주론』을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군주의 졸개, 그와 완전 상반되는『로마사논고』의 공화주의자, 그리고 마지막으로『피렌체사』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역사가로서의 마키아벨리.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우리가 잘 모르는 3/4의 마키아벨리를 채워넣고 싶은 생각이 들 겁니다. 들더라구요.


자, 그렇다면 지금부터.



전반적인 기본서


1. 'How To Read' 가 등장하면 항상 하는 말이지만, 이 시리즈는 절대 쉽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래도 해석이 전형적이지만은 않고, 깊이도 있다는 장점이 있다. 


2. 세창의『마키아벨리 읽기』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이 시리즈의 다른 책을 기준으로 판단하건데, 일독의 가치는 보장받았을 거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무방한지 아닌지 읽어보지도 않고 이렇게 쓰면 안된다는 걸 알지만, 요즘 읽을 책이 너무 많다.....


3. 하룻밤의 지식여행『마키아벨리』는 syo가 읽은 이 시리즈의 책 가운데 정말 알차다는 생각이 든 유일한 책이다. 삽화도 어쩐지 포스트모더니즘 양식이다.



군주론


1. 강정인, 김경희가 옮긴『군주론』이 가장 널리 읽히는 듯하다. syo도 꼬꼬마 시절 처음 읽었던 군주론이 이 책이었다. 그렇다는 말은 무난하다는 이야기겠다.


2. 박상훈이 옮긴『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은 최장집 선생님의 빼어난 서문이 달려 있다는 것으로 가치를 더했다. 솔직히 말해서, 최장집 선생님이 쓴 글만 꼼꼼히 읽고 본문은 설렁설렁 읽었다. 그렇다고 평을 못할 일도 아닌 것이, 지금 시점에서 기억이 잘 안나는 건 서문도 본문도 마찬가지라.....


3. 세 번째『군주론』을 옮긴 곽차섭은 그 이름만으로 책에 무게를 싣기에 충분한 마키아벨리 연구자다. 이탈리아어 원문 대역에다가, 비록 가격 때문에 욕을 먹지만 함량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길 출판사의 코기토 총서로 나왔다는 점도 신뢰를 드높인다.


4. 신동준이 옮긴『마키아벨리 군주론』은 표지에서부터 스스로 완역 결정판임을 자부하고 있다. 신동준 선생님의 책이 다 그렇듯, 어쩐지 넘치는 패기를 읽을 수 있다. 군주에게 간택받고자 저술한 군주론의 특성상 다른 역자들은 거진 다 존댓말로 옮겼지만 신동준 선생님만은 반말로 넘치는 호연지기를 보여주신다. syo가 가지고 있는 책이다.


5. 이남석이 옮긴『군주론』은 그야말로 발군이다. 45500원에 달하는 가격에, 단연 압도적인 880페이지는 무엇을 말하는가. 미리보기만 열어봐도 정말 알차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해를 돕기 위한 구조도 하며, 지도 하며, 정말 대단하다는 느낌이다. 실제로 군주론은 읽다보면 600년도 더 전의 인물들이나 사건들을 읽는 이가 당연히 안다는 듯 설명하는 부분이 많은데, 대체로 주석이 달려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쉽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이 책은 그런 것 없다. 아, 정말 갖고 싶은 책이다. 핵비싸서 그렇지.....


6. 마지막으로 가장 최근 출간된 이종인 번역의『군주론 / 만드라골라 /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를 꼽아본다. 아직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추천에 올리는 이유로, 우선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마키아벨리의 희곡 '만드라골라'와 영웅담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를 덤으로 볼 수 있다는 점도 들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역자다. 번역자 이종인이라면 더 말이 필요한가? 다만 분량으로 미루어보면 해제가 듬직하지는 않을 것 같다.



군주론 입문서 / 개설서



1.『마키아벨리를 위한 변명 군주론』은 청소년이 읽는 수준의 평이한 입문서다. 쉽다는 것 이외에 특별한 장점은 엿보이지 않는다.

2.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는 입문서로는 적당하지 않지만, 하나의 저작을 다른 다양한 사상가의 눈을 빌려 새롭게 풀어내는 컨셉의 훌륭한 책들의 모임이다.『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에도 스피노자, 마르크스, 그람시, 알튀세르, 들뢰즈를 만날 수 있는데, 이렇게 다른 누군가 읽고 공부해 준 책은 내용 자체는 물론,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를 알려준다는 점에서도 참 소중하다.

3.『그람시의 군주론』은 정확히 말하면 그람시 책에 가깝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사회주의의 다음 스텝을 위해 마키아벨리를 연구했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저자 김종법 선생님은 그람시에 관한 책을 간간히 출간하여 한국에서 그람시의 명맥을 가늘게 이어가고 있다. 그람시 없이 마키아벨리만 가지고 읽을 책은 아니겠다.

4. 이 카테고리에서 한 권을 추천한다면 단연『지배와 비지배』겠다. 더 말이 필요가 없다. 심지어 이 책 있으면 정작『군주론』을 안 사도 되겠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배를 집어삼킨 배꼽이다. 



로마사논고



『로마사 논고』(로마사론, 리비우스 강연 등등으로 불린다)만 되어도 번역된 종수가 확 떨어진다. 심지어『피렌체사』는 없는 건지 찾질 못하는 건지 하여간 그렇다. 이 저작 역시『군주론』처럼 강정인 번역이 시기적으로 선점했다. 그런데 그것만 읽지를 못해서 할 말이 없다. 동서문화사 책은 가성비가 있지만, 그 가성비 탓에 어쩐지 이미지가 좋지 않다. 시리즈 안에 발번역으로 이름 드높은 책이 몇 권 있어서 함부로 권했다가 욕 먹는다. 그런 핑계를 대며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일단 있다는 것이라도 알리기 위해 이렇게 리스트에 올린다. 읽어 보신 분의 조언을 구합니다.


이종인 번역의『로마사론』은 보유하고 있고, 박홍규 선생님의『왜 다시 마키아벨리인가』는 사실 번역이 아니라 박홍규 선생님의 색깔이 듬뿍듬뿍 들어있는 '저작'이다. 결국 syo는 이 저작에 와서는『로마사론』한 권만 읽은 것인데, 그래도 호기롭게 한 번 추천해 본다. 


마키아벨리의 진짜 가치는 역시 이 책에서 드러난다. 이걸 읽어야 마키아벨리 형아가 적그리스도의 졸개가 아니었으며, 저 순박하고 호구로운 미소 역시 가식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권 합쳐 1000페이지 가량 되는 이 책을 정복한다면, 웃으며 마키아벨리와 석별의 정을 나눌 수 있겠다. syo 역시 과녁에 매달아 놓고 긴 세월 이리저리 조준만 하고 있지 쉽사리 화살을 날리지 못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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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메이커 2017-11-07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클라스...퀜틴 스키너와 김종법의 그람시 공화주의자 마키아벨리가 들어있는 것만으로도 본 리뷰는 넘치는 비르투와 포르투나의 웃음이 가득합니다

syo 2017-11-07 20:50   좋아요 0 | URL
퀜틴 스키너 저서가 맞긴 한데, 다른 것들이랑은 수준이 다릅니다.

제 기억에 저 책은 그 옥스포드의 ˝a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의 마키아벨리를 번역한 거였던 것 같고, 그렇다면 퀜틴 스키너가 심심풀이로 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프리즘메이커 2017-11-07 20:54   좋아요 0 | URL
심심풀이로 썼던게 맞을겁니다. 그러나 저 책은 제목이 하드캐리라... 정치학과 교수들조차 마키아벨리가 공화주의자라고 하면 허튼소리라고 하는 작자들이 넘쳐나거든요..

syo 2017-11-07 21:02   좋아요 0 | URL
실제 정치학계판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군요. 무서워라. 대충 읽고 깝치지 말아야겠네요....

그러고보면 읽은지 너무 오래되서 좀 가물가물하지만, 김경희 선생님이랑 곽준혁 선생님의 입장이 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도 같습니다.

프리즘메이커 2017-11-07 21:04   좋아요 1 | URL
보수적인 성향의 학자들은 마키아벨리를 공화주의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내부자로 관찰한 결과..그것은 교수들의 지적 게으름 때문이지만요..ㅎ

짜라투스트라 2017-11-07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져요!!

syo 2017-11-07 21:02   좋아요 0 | URL
아니에요!! ㅎㅎ

짜라투스트라 2017-11-07 21:16   좋아요 0 | URL
아니에요 진짜 멋져요!!

syo 2017-11-07 21:19   좋아요 0 | URL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받겠습니다. 하하하하하.

독서괭 2017-11-07 2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입문서의 대가 syo님..(최고) 그러나 사실은 입문서 뿐 아니라 깊이 있는 책까지 은근슬쩍 읽은 syo님..(최고)(최고)

syo 2017-11-07 21:15   좋아요 0 | URL
어이구, 터무니없이 이런 과한 칭찬 하시는 괭님이나, 거기에 대고 또 좋아요 누르시는 프메님이나 두 분 다 사랑합니다.

시이소오 2017-11-07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키아벨리 살을 다 발라서 남은 뼈까지 갈아 드시는군요. syo님 점점 무서워집니다. 로쟈님과 사이러스님을 추월하실듯.
로쟈님이 자신의 뒤를 이을 사람이없다고 한탄하시던데
syo님이 차세대로쟈가 되실듯^^

syo 2017-11-07 21:32   좋아요 1 | URL
와, 예전에 제가 어느 글에서 ˝로쟈님과 사이러스님만 있으면 리뷰 갈증은 거의 다 해결되는 거 아닌가˝ 라고 썼을 때, 사이러스님이 몸둘 바를 몰라하셨는데,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사이러스님의 그 마음을 오늘 syo가 완전히 알겠네요.....

저한테 한 300년 정도 주시면 추월은 힘들더라도 로쟈님 사이러스님 근처로 어느 정도는 다가가겠습니다...

풀꽃놀이 2017-11-07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이런 분이셨네요. 무시무시하지만 꽤 도움이 될 것 같은 글을 써주시는군요^^

syo 2017-11-07 21:34   좋아요 0 | URL
절반만 정답이십니다. 꽤 도움이 될만한 글은 쓰지 못하는 이런 놈이었습니다 ㅎ

잘 보시면 이 긴 글을 아무리 읽어도 마키아벨리에 대해 더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실거예요.....ㅠ 길고 허망한 글.

수이 2017-11-07 2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시이소오님 의견에 동의해요. 로쟈님과 사이러스 다음으로 syo님이 좋아졌어요!

syo 2017-11-07 21:41   좋아요 0 | URL
와, 과한 칭찬 말씀에 손사래는 쳐야되지, 그 와중에 또 칭찬 받아서 흥은 오르지, 살짝 정신분열을 걱정하던 중이었는데 야나님께서 아주 용 눈알에 점을 찍으셨네요. 오늘은 그낭 신나는 날로 해야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1-07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것이 왔군요. 알라디너의 커밍아웃. 알라딘 3대장은 시이소오, 쇼, 로자. 그리고 100자평의 최고수는 수다맨 님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1-07 23:05   좋아요 0 | URL
아, 오타... 시이소오 님이 아니라 사이러스 님(요즘 시이소오 님은 뜸해서... ) ㅎㅎㅎㅎㅎㅎㅎㅎ
시이소오 님 용서해 주세요..

syo 2017-11-07 23:08   좋아요 0 | URL
시이소오님을 뺄게 아니라 syo를 빼고 그 자리에 사이러스님이 들어가면 곰발님이 용서를 구할 일도 없을 텐데요.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일들을 로쟈님이나 사이러스님께서 보신다면 얼마나 혀를 차실까요.....

2017-11-07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07 2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prenown 2017-11-07 2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설마? ㅎㅎㅎㅎ

나와같다면 2017-11-08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자공학도가 교양과목으로 철학을 선택해서 듣는다는게 분위기상 좀 힘들지 않으셨어요..?

syo 2017-11-08 13:13   좋아요 2 | URL
정말입니다.

단지 교양일 뿐인데도, 첫 주에 교수님이 출석부에서 제 전공을 확인하시더니 출석 부르다가 한 2분 정도 저한테 막 질문을 쏟아부으셨어요. 왜 왔니, 왜 듣니, 왜 사니.....

그러고 나니까 첫날부터 뭔가 이상한 놈으로 찍혔는지, 다들 뭐지 이 변태는, 하는 눈빛으로 저를....

그러고 나서 전공시간에 과 동기들한테 이 이야기 하니까, 이번에는 이 동기들도 그러니까 뭐지 이 변태는, 하는 눈빛으로 저를.....

결국 첫 주 마치고 바로 수강 취소해서, 그 수업은 못 들었어요. <사랑과 문학>이라는 좀 더 말랑말랑한 걸로 바꾸었지요.

cyrus 2017-11-08 1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syo님의 글빨이 물이 올랐고, syo님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아요. 다양한 분야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syo님의 독서 습관이 마음에 듭니다. ^^

syo 2017-11-08 16:45   좋아요 0 | URL
것 참,

윗분들은 다 짜고 syo를 놀리려고 저러신다는 느낌도 없지 않은데, 사이러스님은 언제나 그렇듯 나는 장난 없다는 느낌이라서 syo의 마음이 한층 무거워집니다. ㅎ

단발머리 2017-11-08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 있으면서 책소개도 해주시고, 사이사이 감동도 주는 페이퍼라면....
syo님 랭킹에 아무런 의심이 없습니다. *^^*

특히 마키아벨리라면 읽고 싶지 않은 얼굴인데(전, 그렇게 해석합니다) syo님 페이퍼 읽고나니 다른 건 몰라도 <마키아벨리의 네 얼굴>은 읽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그나저나 전에 찍어둔 빠알간~~ 마르크스 책 아직 시작도 못 했네요.

syo 2017-11-08 20:26   좋아요 0 | URL
마르크스와 마키아벨리는 syo의 책장에 나란히 꽂혀있지요. 마씨 집안의 형아 동생처럼 다정하게 나란히.

yamoo 2017-11-29 18: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하 재밌게 잘 읽었어요..ㅎ 마키아벨리가 현대정치학의 시조가 된 건 아마도 현실정치를 최초로 다룬 학자여서 그런 듯합니다. 그 전까지는 거의가 정치철학의 일환으로 정치학을 연구하는 경향이 강해서, 주로 도와 덕의 연장선에서 정치를 연구했지요. 하지만 군주론을 읽어보셔서 잘 알겠지만 마킼아벨리는 모사의 현실정치 그대로를 연구했지요.아주 강력한 처세의 지점이지요. 그래서 처세술의 원조로까지 회자되는 듯합니다. 정치학의 고전이 처세의 지점을 가르쳐주니 수많은 판본이 있어왔듯합니다.

근데, 제가 생각하기에 군주론은 입문서를 읽을 필요가 없을 듯해요. 원저가 워낙 분량이 적고 평이한 편이라 원저를 3-4회독 읽는 것이 장땡인 듯합니다. 비르투와 포르투나의 뉘앙스를 본문에서 직감적으로 인지하는게 군주론 독해의 핵심인 듯해서요.

저도 위에 열거하신 4권의 입문서는 다 봤습니다만, 퀜틴 스키너의 저서가 마키아벨리 사상을 가장 잘 개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군주로 자체의 입문은 위 3권도 좋지만, 갑중의 갑은 김영사에서 출간한 서울대 고전시리즈 중 한 권인 <군주론>인 듯합니다. 이 만화는 진짜 군주론을 초등학생도 이해시킬 정도로 쉽고 알차게 군주론의 책 내용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에요. 혹시 안 보셨다면 이 만화책도 읽어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그나저나 사이러스 님 지적처럼 정말 글빨의 물이 올랐네요~ ^^

syo 2017-11-29 19:05   좋아요 0 | URL
역시 yamoo님. 돌아오시자마자 존재감 작렬!! 많이 배웠습니다.

북깨비 2020-05-23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한테 책을 추천해 달라 부탁했더니 마키아벨리가 쓴 책들부터 언급을 하더이다.. 아 난 이 정도 난이도의 책을 추천을 바란게 아닌데.. 내가 이 정도 레벨을 이해하려면 강산이 한 번은 더 바뀌어야 할 거 같은데.. 하고 지금 난감해 하면서 이곳저곳 리뷰를 기웃거리고 있어요.. 역시 syo님도, cyrus님도 여기 벌써 레벨 클리어 하고 다녀가셨네요. 👍

syo 2020-05-24 18:55   좋아요 0 | URL
이미 마키아벨리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안납니다....
뜨내기처럼 여기 왔다 저기 갔다 하는 독서찌끄러기의 한계인가봐요.
말씀하신 것처럼 뭔가 ‘클리어‘ 처럼 한 번 정복하고 나면 계속 남아 있고 그러면 좋겠어요....

북깨비 2020-05-24 23:30   좋아요 0 | URL
😂 며칠 전에 읽은 문학의 건망증이 생각납니다. 저희도 있는 힘을 다해 레테의 물살을 버티어 봅시다. 😅 다 어려워 보이지만 지배와 비지배를 담아갑니다.
 



2017 제41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풍경소리 

구효서 외 / 문학사상사 / 2017


● 구효서,「풍경소리」

이곳이 아닌 어딘가에서 읽고 있다는, 듣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어딘가는 몸의 위치를 옮기는 방식으로는 도착할 수 없는 곳, 이곳과는 다른 이치로 운행되는 곳, 왜라고 묻지 않는 곳, 그리고 마침내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 살아야만 하는 독자들의 마음 속에 커다란 선물 보따리를 실어 보내는 그런 곳이다. 맑고 예쁘게 빚어진 소설은 그곳을 비추는 그윽한 우물 같다. 목을 축이려 찾아들었다 기어이 마음을 축이고 돌아가는 글. 이 글이 대상이 아니었다면 믿을 수 없었을 것 같다. 압도적이다.


● 김중혁,「스마일」

김중혁의 소품이다. 음, 그러니까, 음..... 김중혁의 소품이다.


● 윤고은,「부루마블에 평양이 있다면」

확실히 젊은 작가는 뭔가 젊군, 하고 다시 생각해보니 윤고은은 syo보다 연상에다가 중견이라고 불러도 손색 없을 15년차 소설가였다. 그렇게 고쳐 생각하고 다시 훑어보니, 이번엔 어쩐지 연륜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와, 쓰고 보니 정말 간사한 평이군.


● 이기호,「나를 혐오하게 될 박창수에게」

스토리텔링 하나로 놓고 보면 단연 으뜸이다.「풍경소리」가 읽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다른 세계로 들락날락하게 만드는 작품이라면,「나를 혐오하게 될 박창수에게」는 읽는 내내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꽁꽁 묶어놓는 작품이겠다. 이기호의 스펙트럼이란. 이기호는 이런 소설가라는 쉬운 단정에서 달아나기 위해 이기호는 열심히 글을 쓰는 중인 것 같다. 


● 조해진,「눈 속의 사람」

길게 이어져 내려온 단편 소설의 문법이 제공하는 무대 안에 단단히 자리잡고 흔들림 없이 과거를 서술하는 힘. 시작부터 끝까지 결국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지만, 생각해 보면 그게 더 삶을 많이 닮은 거라, 괜히 가슴이 먹먹해진다. 깊이 파고들진 않아도 탄탄히 다져진 문장과 그 문장에 잘 어울리는 이야기.


● 한지수,「코드번호 1021」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가슴이 뭉근해지는 데가 없진 않지만, 전체적으로 평범하고 무난한 소품 느낌. 한지수의 다른 책을  찾아 읽겠다는 욕심을 불러일으킬만 한 글은 아니었던 걸로.



+ 솔직히 차이가 압도적이었다. syo의 눈은 무지렁이 눈이지만, 가진 게 그 눈 뿐이라 그 눈으로 봤는데 나머지 다른 작품을 다 합친 것보다「풍경소리」하나가 좋았다. 무조건 이거라고 생각했다. 경합이 있었다면 이기호라고 짐작했다. 심사평을 읽어보니 딱 들어맞았다. 와, 살다 처음으로 심사평하고 입을 맞췄다.


+ 그렇다면 구효서의 최근작 네 권을 노린다!「풍경소리」에 필적할만 한 글이 있을 거라 기대하며.








2017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웃는 남자 

황정은 외 / 은행나무 / 2017


● 윤고은,「평범해진 처제」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아무래도 윤고은의 재발견인 것 같다. 재작년이었을 것이다. '황정은에 대적할만 한 두 명의 젊은 여성작가'라는 추천을 듣고 윤고은의 《알로하》와 손보미의 《그들에게 린디합을》을 읽으면서 syo가 풀어보려 노력했던(생각해보니 크게 노력하진 않은 것 같은)  미스테리는 그들이 문단에서 얻어낸 인정과 각광의 이유였다. 도대체 왜. 이해가 안 되는데. 이제는 재작년의 syo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다. 왜. 이 정도로 쓰는 작가한테 대체 왜 그랬어. 이건 만약 syo가 20대 초반에 소설가가 될 마음을 품고 아등바등 노력했다면 40대쯤 세상에 내놓으면서, 그래, 딱 이 정도로만 쓰고 싶었었지, 할 글이다. 가볍고, 개인적이고, 은근 비꼬고. 와, 윤고은의 책을 다시 찾아서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 윤성희,「여름방학」

여름방학은 언제일까. 얼마나 고단한 길을 지나와야 여름방학에 도착할까. 누군가는 엉금엉금, 누군가는 성큼성큼. 누구에게나 여름방학은 오고, 누군가는 여행을 가고, 누군가는 이름을 바꿀 것이다. 여행을 떠나거나 이름을 바꾸거나, 언젠가는 결국 방학은 끝난다. 날은 점점 추워질 것이고 길은 점점 내려가겠지. 누군가는 여행의 기억을, 누군가는 옛 이름을 손에 쥐고 엉금엉금 성큼성큼 겨울방학을 향해 가겠지.


● 이기호,「최미진은 어디로」

그러니까, 투박하게 나눠 김언수의 이번 작품을 재미계통으로 분류한다치면, 하필 같은 책에 이기호의 작품과 함께 실린 것은 김언수의 불행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김씨 문중에 태어나 작가명 가나다 순으로 작품이 배치된 책에서 이기호보다 앞서 읽히게 되었다는 점이겠다. 이 작품 딱 여섯 페이지를 읽는 동안, 김언수의 글 전체를 읽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그리고 막판엔 내가 언제 웃겼냐는 듯 한 순간에 애잔하다. 아, 날 갖고 놀았어. 명불허전.


● 편혜영,「개의 밤」

편혜영의 글은 너무 음산해서 좋았고 때론 그래서 싫었다. 무섭다는 표현이 좋겠다. 어떤 무서움은 즐겁고 또 어떤 무서움은 괴롭듯 편혜영의 글은 항상 무섭다.  검고 질퍽거리는 늪처럼 무섭다. 짖지 않는 개나 악의 평범성, 괴물을 상대하다 괴물이 되는 이야기가 퍼뜩 떠올랐지만, 어쩐지 쉽게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늪을 늪이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함부로 말할 수 없으니까.



+ 이상문학상과 김유정문학상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뜻밖에 윤고은에 새로 주목하게 되었다. 분명히 별로였는데, syo의 눈이 밝아진 것일까, 윤고은의 손이 깊어진 것일까. 이제 윤고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윤고은과 함께 이기호 또한 두 권의 수상작품집에 동시에 이름을 올렸는데, 두 개의 글이 판이하다. 문장 가운데 이기호의 손에서 나왔음을 엿볼 수 있는 시그니처들이 들어있긴 하지만, 그걸 제외하고 보면 같은 작가가 쓴 글이 아니라고 해도 믿겠다. 


+ 윤고은과 이기호는 각기 다른 작품으로 두 권의 책에 등장했지만, 황정은은「웃는 남자」하나로 양쪽 상 모두에 후보로 올랐다. 이상에서는 실제 우수작으로 선정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심사평에 「웃는 남자」에 대한 평이 계속 등장한다. 그럴거면 넣지, 왜 뺐을까. 의아한 지점이다. 솔직히 김중혁과 한지수의 이 작품들은 황정은을 밀어낼 만한 것들은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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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 2017-11-06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이 멋져요^^

syo 2017-11-06 08:25   좋아요 0 | URL
허접합니다. 이런 걸 평이라고 써도 되나 종종 의심합니다....

비공개 2017-11-10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두권의 작품집을 사놓은지가 한참 되었지만 아직 읽지 못하고 있었는데 syo님 덕분에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

syo 2017-11-10 14:45   좋아요 0 | URL
즐거운 독서 시간 되실 거라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2017이니까 2017에는 읽으시는 것이ㅎㅎㅎㅎ
 



2017 제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 작품집 웃는 남자

황정은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7


● 웃는 남자 / 황정은


황정은 칭찬은 이제 입아프고, 골수 황빠인 syo가 해 봐야 객관성도 떨어지겠으나, 그래도 말할 수 밖에. 황정은은 도대체 어떻게 세계를 만드는 걸까. 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세계를 읽는 syo보다 생생하고 디테일하다. 선명하면서도 아련하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만져봐야 만들 수 있을 인물들이 처연하게 전시된다. 재능 없이 이게 되나? 어쩐지 황정은에게 3시간만 주면 syo의 인생을 보란 듯 그려내 듣고 있는 syo의 눈에서 눈물을 쏙 빼놓을 것 같다. 아, 맞아, 내가 딱 저렇게 아팠다니까, 근데 도대체 어떻게 알았지?


그렇다면 과연 syo의 가치는 무엇인가. 언젠가 우연히 황정은 같은 촉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그가 빚을 이야기 속에서 먼지같은 배역이라도 기꺼이 맡겠다는 마음으로 순순히 나를 넘겨줄 수 있도록, 그저 살아내는 일 밖에는 할 게 없겠다. 묵묵히, 자신의 입으로는 될 수 있는 한 많은 말을 하려들지 않고.



● 이혼 / 김숨 


소진된 여자를 조명하는 시선의 폭과 깊이를 따져 보면 김숨만 한 눈과 손이 또 어디 있을까. 담담함 속에 언제 터져나와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억눌린 슬픔이 박동하고 있다. 어쩐지 요즘은 김숨의 글을 만나면 잠깐이나마 울지 않고 버틸 재간이 없다. 


 "엄마, 아버지하고 이혼하고 싶었던 거 아니야?"
 "......"
 "엄마가 그랬잖아. 아버지하고 이혼하는 게 소원이라고."
 "모르겠다......"
 "왜 몰라?"
 "그러게......"
 "내가 중학교 이 학년 때던가. 엄마가 시장에 장 보러 갔다가 다알리아 화분을 하나 사왓는데, 아버지가 돈을 함부로 쓴다며 초등학생 혼내듯 엄마를 혼냈잖아. 그때 엄마가 그랬잖아. 나만 크면 식모살이를 해 먹고사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지하고 이곤하겠다고......"
 눈빛을 흐리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그녀는 뒤늦게 깨달았다. 스스로가 이혼을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는 지경까지 어머니가 가버렸다는 걸. 자신의 기분과 감정이 어떤지조차 모르는 지경까지 어머니가 가버렸다는 걸. _김숨 <이혼>



● 존엄의 탄생 / 김언수 


김언수는 처음 읽는다. 확실히 재미는 있는데, syo의 눈에도 턱턱 걸릴만큼 아마추어의 문장을 구사한다. 이를테면 "여자는 몹시 혐오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라는 문장은 자칫 여자의 얼굴이 혐오스럽다는 식으로 읽히는데, 여자는 상당한 미인이고 이후의 맥락을 고려하면 "여자는 몹시 혐오스럽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나 "여자는 혐오감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와 같은 식으로 읽는 게 올바른 해독이겠다. 이런 식의 매끄럽지 않은 문장들이, 잊고 몰입하려 하면 꼭 다시 나타나 집중력을 흐린다. syo같은 해태눈깔한테도 걸렸다면 문제 있는 건데, 혹시 퇴고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진수야 내 말 잘 들어. 내 시는 쓰레기야. 내 재능은 수준 미달이고 더이상 높이 올라갈 가능성도 없지."
 "형은 그런 사람이 아니예요. 형은 그 누구보다 위대한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이예요."
 심이 다시 술잔을 비웠다.
 "나는 공부에도 큰 뜻이 없어. 그러니 아마 대학에서 교양 강의나 하며 빌빌대다가 마땅한 대책도 없이 어느 날 퇴출당하겠지. 그게 나라는 인간의 정확한 크기야. 하지만 이게 슬픈 일은 아냐.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살아. 사실 우린천재가 아니고 뭘 해낼 만한 대단한 재능도 아직까지 발견 못한 숨겨진 잠재력도 없지. 네 영화를 만들어주겠다고 뻥치는 그 영화사 사장은 다단계 판매나 하는 사기꾼이야. 네가 유능하다고 만날 자랑질하는 김 피디는 충무로가 다 아는 등신이지. 그리고 너의 유아적이고 망상적인 시나리오에다 돈을 낼 골빈 투자자는 대한민국에 단 한 명도 없어. 지금까지 없었듯이 앞으로도 없을 거야. 진수야 이것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싸늘한 진실이야."
 심이 다시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한숨을 쉬고 술잔을 비웠다.

 "잘난 사람 되는 거 힘들어. 이제 너도 적은 나이가 아닌데 더이상 못난 사람은 되지 말자."
_ 김언수, <존엄의 탄생>



김언수는 읽은 바 없어 추천을 못하겠고, 읽고 전율했던 황정은의 책들과 읽고 엉엉 울었던 김숨의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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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 정치 

강준만, 김진표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7


세월호 이전에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봐도 보는 게 아니었고 들어도 듣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syo의 개똥 같은 성격에 노무현 말부터 이명박 말까지를 꼬박 대학에서 보내면서도 홧병 터져 화염병을 들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온갖 더러운 일들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syo는 열심히 학점을 만들고, 등록금을 만들고, 사랑을 만들고 살았다. 실패했지만 게임도 만들고, 중간에 관뒀지만 영화도 만들었다. 만들 것이 많아서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는 핑계가 통할까. 하여튼 syo가 이것저것 만드는 사이에 MB도 이것 저것 만들고 있었다. 남일당 건물을 불바다로 만들었고, 산성을 만들었고, 전국의 강에 녹조라뗴를 만들었고, 오만 공직에 영포회와 TK인물을 꽂아 넣어 제 세상을 만들었고, 진부하게도 비자금까지 만들면서 결국 이 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눈만 돌리면 알 수 있었던, 모르려고 애를 쓰지 않으면 도저히 모를 수 없을만큼 거대하고 연속적인 악행들을, syo는 몰랐다. 그러고도 누가 물으면 대학생활 열심히 했다고 말하고 다녔다. 망할 놈. 등신. 그러니까 아무 망설임 없이 박근혜를 뽑았지. 


2014년 이전의 정치적 기억이 전무했던 syo를 위해, 그리고 대충은 알지만 디테일이 약한 다른 정치새싹들을 위해, 강준만 선생님이 이명박근혜 10년을 아주 적나라하게 전시한다. 역시 막대한 언론 자료를 인용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검색만 잘 해도 알 수 있는 정보들을 그냥 모아 놓기만 했을 뿐이라고 이 책을 평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게 잘 가르치는 강사의 기본기다. 취합. 


아, 정말 이런 어마어마한 양아치와 한 하늘을 이고 잘도 살았구나. 모르는 게 약이라더니. 다시는 이 꼴 안당해야지 하면 생각나는 책 몇 권 더 얹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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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라 2017-11-01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은듯 뒤돌아 보았다고 양아치는 아니겠죠. 촛불집회가 오기까지 늦은듯 뒤돌아 본 사람들이 더 많았을텐데 다들 양아치는 아닐거에요.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정말 늦은 것이다라며 포기해 버리는 사람이 정말 대책없는 사람이 아닌가 싶어요. 늦은듯 돌아본 1인으로서 찔려서 외마디를 남기고 갑니다;;

syo 2017-11-01 22:32   좋아요 0 | URL
syo가 한 하늘을 이고 잘도 살았다는 양아치는 MB를 이르는 말이었는데, 오해의 소지가 있었나봅니다.

이하라 2017-11-01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 말씀이었군요. 독해력이 딸리는 걸 들켜버리고 말았네요. 제대로 이해 못한 채 댓글을 남겨 죄송합니다 ^^;

syo 2017-11-01 23:11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이건 syo의 글이 들쑥날쑥 근본이 없어놔서 그렇습니다.

이하라 2017-11-01 23:30   좋아요 0 | URL
syo님 글솜씨는 많은 분들께 정평이 나있는걸요. 이건 저의 오해와 이해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syo 2017-11-02 00:15   좋아요 0 | URL
정평이라니 그럴리가요. 다시 읽어봐도 헷갈릴만 합니다^^

갱지 2017-11-02 0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황정은씨 소설은 궁금해졌습니다-:-)

syo 2017-11-02 07:25   좋아요 0 | URL
이런 입장에 처한 사람 마음을 표현하려면 나는 어떻게 쓸까- 생각해 보면서 읽으면 참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락방 2017-11-02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황정은 과 김숨은 관심작가이고 김언수의 책은 캐비넷인가 읽어보고 그 뒤로 더 읽겠다는 생각은 안들었는데, 쇼님 책에 관한 글 올리는 거 보면 저랑 좀 비슷하게 느끼는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후훗. 그나저나 김숨의 한 명은 사두고도 안읽었네요. 어디있지? 회사에 있나, 집에 있나....어디엔 있겠지요..... ( ˝)

syo 2017-11-02 08:15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말씀대로 우리가 비슷하게 느낀다면, <한 명>은 읽다가 그냥 아주 퐁퐁펑펑 우실 거예요.

독서괭 2017-11-02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언수를 김연수로 보고 어라 김연수가 문장이 그럴 리가 없는데..(당황)ㅋㅋ 김언수였군요. 다행입니다.
근데 syo님이 박근혜를 찍으셨다고요? 너무 의외라 농담인 줄...
저도 황정은씨와 김숨씨 소설 읽어보고 싶네요!

syo 2017-11-02 09:45   좋아요 0 | URL
김연수느님이 당연히 그러실 리가 없지요. syo는 골수 김연수빠입니다.
그리고 박근혜 건은 전국민 앞에 사과합니다. 정말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거든요. 문재인이라는 사람을 당시 대선국면에서 처음 알게 된..... 게다가 MB때는 투표 자체를 안했으나 아마 했다면 여지 없이 찍었을걸요 MB ㅋㅋㅋ
 
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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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까지 가는 길은 멀지 않았지만 대구의 첫눈은 더욱 짧아, 대문을 나서며 만났던 눈송이가 살금살금 가냘파지더니 교문을 들어설 때는 벌써 멎어 있었다. 까슬한 짧은 머리에 콧수염도 드문드문 돋은 아이들이 교실로 하나둘 모여 들었지만, 첫눈을 말하는 입은 없었다. 아이들은 정해진 자리에 앉아 조용히 찬 손을 비비거나 괜히 바닥을 쿵쿵 차기도 했으나 꼭 3일 만에 끝난 겨울방학을 욕하는 입은 없었다. 아이들은 이 방학이 끝나면 고3이 될 것이었다. 3은 입이 없는 법이라고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알고 있었으므로, 아이들은 짧은 방학 세 밤을 보내는 동안 저마다의 상자에 입을 넣어두고 등교했다. 그 입을 수능 시험일 마지막 답을 체크한 컴퓨터용 사인펜의 뚜껑이 닫힐 때 돌려받기로 약속한 탓에, 아이들은 입이 없었다. 아이들은 꿈도 없고 웃음도 없었다. 꿈은 수능 성적표에 적혀 있는 숫자들에 따라 조정을 거칠 예정이었고 웃음은 비싼 등록금을 내고 되찾아 와야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꿈도 웃음도 없이 서너 해를 더 살아야 할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모든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누구나 끝없는 잠과 오르지 않는 숫자를 가지고 있었다. 비밀과 고민과 성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수업이 끝날 때쯤, 한 아이가 물었다. 선생님, 우리는 왜 잠을 줄여야 하나요,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선생님이 대답했다.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지. 우리는 쉬는 시간 내내 생각했다. 다음 시간이 시작되자 다른 아이가 물었다. 선생님, 우리는 왜 잠을 줄이고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하나요. 선생님이 대답했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지. 우리는 수업시간 내내 생각했다. 수업이 끝나고 반장이 경례도 없이 물었다. 선생님, 우리는 왜 잠을 줄이고 좋은 대학을 가야 하나요. 더 좋은 대학의 졸업장을 따면 사회에 나가서 더 유리한 싸움을 할 수 있기 때문이지. 대답을 마친 선생님은 인사도 받지 않고 교실을 나갔다. 우리는 없는 입을 닫고 밤까지 생각했다. 샤프를 휘갈기며, 다리를 떨며, 이어폰을 꽂고 잘 들리지 않는 영어대화를 엿들으며, 우리는 생각했다. 오늘의 끝과 내일의 시작이 뒤섞이는 시간까지 학교의 불은 밝았고 아이들은 저마다의 생각에 책갈피를 꽂아놓고 그만 가방을 쌌다. 오늘도 수고했다. 담임선생님의 눈도 떼꾼했다. 선생님, 우리는 하루의 끝을 잠으로 맺지 못하고 하루의 시작을 잠으로 열며, 더 좋은 성적을 받고 더 좋은 대학의 졸업장을 따서, 그렇게 기를 쓰고 나간 사회에서 왜 싸움을 해야 하나요? 선생님은 말이 없었다. 그 잠깐 사이에 오늘이 사라지고 내일이 도착했다. 선생님의 대답과 함께. 사회가, 원래 그렇다.

 

사회에 채 나가기도 전에 선생님의 그 대답이 진실로 밝혀졌다. 우리는 단지 좋은 삶을 꿈꾸었지만 좋은 삶은 특별한 삶이었다. 세상은 자신의 삶을 특별하게 만들기 위해 벌어지는 이전투구의 링이었고 우리는 자기계발과 힐링의 늪에 엎어져가며 그저 하루하루 자신을 꾹꾹 눌러 살았을 뿐인데, 사회에 나갈 때쯤에는 누구나 내가 받은 상처와 내가 입힌 상처의 대차대조표를 그릴 줄 알게 되었다. 손익분기점은 넘겼나? 우리의 결론은 하나같았다. 적자. 우리는 모두 내가 입힌 상처보다 내가 입은 상처가 더 큰 사람이었다. 어딘가 자신은 다치지 않고 온 세상을 할퀴면서 모두가 나누어야 할 좋은 삶을 쓸어 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짐작했다. 그것은 너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너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네가 미워졌다. 나를 보며 화를 내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내게 웃음을 건네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웃음이 더러워졌다. 저 멀고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내 옆에 가까이 있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멀고 높은 사람의 거대한 탐욕보다 가깝고 낮은 사람의 작은 욕심이 추해졌다. 날카로운 단어들이 유통되기 시작했다. 홍어, 된장녀, 지잡대, 편입충, 문과충, 의전충, 공시충, 틀딱충...... 벌레의 이름을 빌린 혐오가 벌레가 되어 사회를 좀먹고 있었다. 벌레를 말하는 입에서 한없이 벌레가 나오는 싸움이 길게 이어졌다. 누군가 우리를 벌레라고 불렀고 우리는 지지 않으려 더 많은 벌레를 만들며 대항했다. 이 사회에는 왜 이렇게 벌레들이 많은 거지? 사회가, 원래 그렇다. 저 벌레들 다 없앨 방법은 없나? 사회가, 원래 그렇다. 날보고 벌레라는 저 벌레들은 또 어쩌지? 사회가, 원래 그렇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 한 마리의 거대한 해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특별하지 않은 좋은 삶을 꿈꿨던 것뿐인데, 좋은 삶을 위해 좋은 대학을 나왔고, 좋은 대학을 나오기 위해 좋은 성적을 받았고,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잠을 줄인 것뿐인데, 왜 누구도 우리에게 좋은 삶을 주지 않았나요. 선생님. 왜 우리는 벌레가 되었나요. 왜 사회는 원래 그런 것인가요. 선생님. 왜 그때, 그 대답을 하시는 사이 하루가 지나갔을까요. 그러고도 왜 정답을 알려주지 못하셨나요, 선생님. 선생님도 혹시 해답을 모르셨던 것은 아닌가요.

 

어떤 책이 해답이라면 이내 그 소문은 세상에 퍼질 것이고, 세상은 금세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어떤 책도 영원한 정답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야 하고, 내리면서 가냘파지는 첫눈처럼 금세 사라질 대답에서 또 그 다음 대답으로, 섬을 건너뛰어 다른 섬으로 가듯이 분주하게 살아야 한다. 다시, 그 어떤 책도 영원한 정답이 되지 못하므로, 어쩌면 우리가 손에 쥔 책들은 늘 읽으면 곧 벗어나야 하는 간이역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혹시 당신도 나처럼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침대 속의 한 마리 거대한 해충이 되어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면, 그리고 혹시 아직도 그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방 이곳저곳을 기어 다니며 괴로운 소리를 내고 있는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면, 이 책이 특별하지는 않지만 좋은 삶으로 당신을 실어다 줄 기차가 아주 잠시 멈춰서는 조붓한 간이역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 교활해서는 안 되지만 영리할 필요는 있다. 영리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알아야만 우리는 좋은 삶을 지키기 위한 방어술을, 그리고 좋은 삶을 훼방 놓는 악한 의지의 사람을 제압할 수 있는 공격술을 모두 터득할 수 있다. 좋은 삶은 그래서 공격과 방어의 기술을 요구한다. 좋은 삶은 공격과 방어의 기술을 능숙하 사용해서 세상과 교류할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들이 얻을 수 있다. (1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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