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을 죽여야 한다
‘본질’이라는 단어는 물론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는 있지만, 장담컨대, 대개의 경우 본질이라는 단어의 용법은 의미를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본질’이라는 말은 십중팔구 이런 식으로 쓰인다. “너의 행동은 그 운동의 본질을 왜곡한 거다.” “그 운동의 본질을 훼손하는 사람들이 문제다.” “그건 그 운동의 본질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너 같은 사람 때문에 그 운동의 본질적 의미가 퇴색되는 것이다.” “나는 그 운동의 본질은 지지하지만, 이건 아닌 것 같다.” 이쯤 되면 ‘본질’의 뜻은 이렇게 해석해도 무방하겠다.
본질 : 나와 대립하는 상대방의 견해가 틀렸다고 지적할 때 권위를 싣기 위해 내 말에 뿌리는 금 가루 같은 단어.
세상에 ‘국립본질결정위원회’ 같은 것이 존재해서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이런 저런 본질들을 시시때때 따박따박 정의해준다면 또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쓰이는 모든 ‘본질’은 실제로 본질이 아니라 본질을 주장하는 사람의 견해나 해석에 불과하다. 미투 운동의 본질이 뭔데. 누가 그걸 정의했는데. 그래도 일반적인 통념이라는 게 있다고? 그렇다면 전체의 몇 %가 동의하면 ‘일반적’인 건지? 과반? 8할? 만약 그렇다면, 과반/8할이 동의하는지 아닌지 전수조사는 거치셨는지?
‘본질’이라는 단어의 가장 큰 무서움은, 미투 운동을 반대하는 사람은 반대하는 논거로 본질 운운하고,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은 지지를 위해 본질을 입에 올린다는 데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견해, 객관적인 태도, 논리적인 능력을 갖췄다고 쉽게 오해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본질’이 진짜 본질, 본질의 이데아쯤 된다고 믿으며 스스럼없이 본질을 입에 올린다. 결국 본질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논리와 윤리의 결정자임을 주장하는 수백만의 감별사들에 맞서 개념투쟁을 벌여야 한다. 그리하여 ‘본질’이라는 말은 결국 운동을 밀고나가는 데 이익보다는 해악으로 작용한다. 본질이라는 말이 없었을 때 우리는 운동만 지키면 되었지만, 본질이라는 말이 무대에 오르는 순간, 운동을 지키면서 덩달아 ‘운동의 본질’도 지켜야 한다. 한 번도 제대로 합의된 적이 없는 수백만 개의 ‘본질’들에 맞서서 기약 없는 싸움을 하느라 기력을 소진해야 한다.
syo는 본질이라는 말 자체에 회의적이지만 만일 그런 말을 쓸 수 있다고 한다면, 변하지 않는 특성이나 최초의 순수한 상태를 지칭하는 데 쓰는 건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상 어떤 고귀한 일에도 크고 작은 부작용은 따른다. 미투 운동이 활발해지면, 그 과정에서 이런 저런 부작용들, 알고 보니 가해자가 아니었던 사람, 실제로 아니었는지는 애매하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가해행위가 있었다고 인정하기에 증거가 충분치 않은 사람, 장난이거나 관심을 받기 위해서, 혹은 사리사욕을 위해 무고를 저지르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 등등이 생길 확률이 0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 부작용과, 그런 부작용을 줄이고 없애나가는 과정, 그러면서도 미투를 외치는 사람들이 겁내지 않도록 힘껏 위드유를 외치는 노력, 가해자의 가족이나 폭로자에게 가해지는 2차적 3차적 폭력을 방지하려는 시도, 그 모든 것들이 통째로 미투 운동의 본질이다. 무균 무중력의 티끌 하나 없는 ‘본질’이라는 놈이 존재하고, 우리가 지금 점점 그 본질에서 멀어지고 오염되고 있다는 식이 아니라, 이렇게 지속적으로 지적받고, 내파되고, 수렴하고, 폭발하고, 먼지가 묻고, 다시 털어내고, 꿈틀꿈틀, 때로는 우르릉 쾅쾅 변화하고 진화하는 전체적 역동성 그 자체가 미투 운동의 본질이다. 미투 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운동이나 사상을 놓고 보아도 깎이고 재조립되며 탈바꿈하는 과정을 내포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나. 아, 미투 운동의 본질이라니. 미투 운동으로 우리가 만들고 싶은 세상의 최종적인 모양은, 미투의 “본질”을 지키는, 그러니까 “진짜” 피해자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진짜” 가해자의 행위를 폭로하고 처벌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성폭력이 없으므로 미투 운동 자체가 필요 없는 곳이다. 그러니까 미투 운동은 더 커다란, 젖과 꿀이 흐르는 신세계를 찾아 나선 우리가 올라탄 돛단배다. 처음 항구에서 출항할 때, 갑판에는 물 새어나오는 곳이 없고, 돛에는 바느질 자국이 없으며 선원들의 얼굴에는 미소만이 가득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친 바다와 맞서 오랜 항해를 해 나가다 보면, 갑판에 땜질도 해야 하고, 누덕누덕 돛도 기워가며 써야 하며, 선원들의 얼굴에 하나 둘 흉터도 생길 것이다. 그렇게 상처받고 상처를 고쳐가며 우리는 가야 한다. 진정 당신이 새로운 땅에 찬동하는 모험가라면, 원래 이 배가 얼마나 매끈하고 흠잡을 데 없었는지를 한탄하거나, 배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었다며 선원들을 흉볼 시간에 망치를 들어야 한다. 나침반을 보아야 한다.
당연히 잘못된 일은 고쳐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내가 올바른 방향이라 생각하는 곳을 가리킬 권리가 있다.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 ‘본질’이라는 거대하고 대적하기 어려운 말을 독점할 권능이 우리 개개인에게는 없다. 그 말은, 그리고 나는 당연히 그 말을 할 수 있다는 태도는 결코 좋은 결과를 낳지 않는다. 이제는 그만 그 말을 죽일 때가 되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모든 부침은 그대로 다 미투 운동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성격이다. 이 안에서 해나가야 한다. 이런 생각이 운동을 나아가게 하고 운동을 고친다고 syo는 믿는다.
다만 진보에는 순서가 있고 발전에는 근원이 있다는 점을 믿고 있어, 온 나라가 지엽枝葉만을 추구하고 뿌리를 찾는 사람이 전혀 없음을 우려하는 것이다. 즉 근원을 가진 자는 날마다 성장할 것이며 말단을 좇는 자는 전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사교편>
_ 루쉰, 『루쉰 전집 1 : 무덤, 열풍』
"나는 너 같은 소년이 모두 온갖 것을 이것저것 경험하며 성장하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해. 그러면 사람들이 서로를 훨씬 더 잘 대할 수 있게될 테니까 말이야. 무엇보다 이런 전쟁도 줄어들게 될 거다. 아, 그래. 아마 언젠가는 이런 모든 갈등이 끝나는날이 올 거야. 위대한 정치가나 교회나 이런 단체들로는 그 갈등을 끝낼 수 없단다. 사람이 바뀌어야 가능한 일이거든. 사람들이 너처럼 바뀔 거란다. 퍼핀. 이런저런 면이 좀 더 섞이게 되는 거지. 그러니 혼혈아가 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단다. 그건 유익한 거니까."
_ 가즈오 이시구로, 『우리가 고아였을 때』
인간해방과 사상의 자유의 역사는 어차피 독선에 대해 회의가, 권위에 대해 이성이 승리를 거두는 긴 투쟁의 되풀이임에 틀림없다. 우화도 그렇고 현실도 그렇고 역사는 한 단계의 투쟁이 끝나면 으레 '임금은 알몸이다'라고 폭로한 소년의 용기에 열중하는 나머지 힘없는 소년에게 그런 엄청난 임무를 떠맏기게 된 그 사회의 실태에 대해서는 눈이 미치질 않는다. 문제시해야 할 중요한 것은 그 사회의 영광(혹은 해결)까지의 과정에 얼마나 많은 인간의 타락과 사회적 암흑과 지적 후퇴가 강요되었느냐 하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겠다.
_ 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
성장이란, 더 이상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을 때에만 진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만을 해왔기 때문에 늘 같은 자리를 맴돌았을 뿐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너에게 용서받기 위한 반성, 아니, 이미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해버린, 그런 반성 말이다.
_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