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1월에 벌써 한겨울인 고장에서 100명이 먹을 쌀을 씻고 나면, 쌀 씻은 손이 한겨울보다 차서 아무리 세게 손바닥을 맞부딪혀도 따갑지 않았다. 쌀을 안치고 불 가에 서서 손을 비비면 조금 지나 그때 아팠다. 가렵고 아팠다. 그럴 때 유독 두고 온 이름들 생각이 났다. 만지고 싶은 얼굴 생각이 났다. 누군가의 곁에 있고 싶은 마음은, 가장 시린 손이 아니라 항상 그보다는 조금 덜 시린 손과 함께 찾아온다.


틀어박혀서 혼자 공부하는 시간들과 그 시간들이 빚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일종의 얼룩이고, 내가 살아온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이 군데군데 얼룩 묻힌 한 줄의 목도리라면,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고 말 한 마디 주고 받을 기회가 이틀에 한 번 꼴로 겨우 찾아오는 이 외로운, 퍽 외로워 보이는 시간이 또 한겨울 같아서, 그래서 되려 생각보다 덜 슬픈 것이라고. 목도리를 풀어 한 뼘 한 뼘 짚어가며 얼룩을 세고, 혹시 지워지려나 하는 마음에 술 한잔 묻혀서 슬쩍 비벼도 봐야 크게 슬플 텐데, 이 겨울에는 그 얼룩 목도리를 칭칭 두르고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면서 조용히 한 발 한 발 걸어나가기도 벅차서, 그래서 되려 생각보다 잘 버티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해 주었다. 


작은 모닥불 같은 그 말들 오갔다. 전화기를 내려놓자 그때 문득 가렵고 아팠다. 가렵다는 말을 가엽다고 쓰고 싶은 응석과 가볍다고 쓰고 싶은 허세가 세게 부딪혀 어떤 마음이 되었다. 새로운 얼룩이 되었다.




내가 충분히 깊게 나아가지 않은 것, 그것이 문제다. 고독 속에서도 우리는 파고들어야 하고 견뎌야 한다. 냉정한 시작이야말로 최악이다. 그 모든 것을 지나가야 한다. 비통함을 뚫고, 정당한 감정을 뚫고 줄곧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진정한 즐거움을 느끼면서, 성스러운 도시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을 향해 가야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내게 불러오려고, 그것이 나타나게 하려고 애쓴다. 나는 그것이 거기 있다고 확신하지만 그것은 쉽사리 오지 않는다. 당연히 쉽지 않다. 흔들려야 한다. 몸부림쳐야 한다.

_ 제임스 설터,『스포츠와 여가』


삶의 어떤 부분은 말할 수 없다. 말하려고 하는 순간 그것은 그저 가볍고 우스운 것으로 변해버린다. 어느 날 삶을 텅 비게 하는 것, 쓸모없는 무엇으로 남아 있는 시간을 가득 채우는 것, 아무것도 없는 오늘을 견뎌야 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들이다. 
_ 전지영,『책, 고양이, 오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작은 방을 하나쯤 마련해두고 싶은 소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 소망을 가진 사람이 비단 나뿐인 건 아닐 것 같다고, 오늘 아침 이 시집에 실린 첫 시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방을 마련했다는 말을 하기 위한, 자기 자신을 위한 소망일는지도 모르겠다.
_ 이유경, 『잘 지내나요?』


1978. 1. 22.

나는 외롭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는 외로움이 필요하다.
_ 롤랑 바르트,『애도 일기』




2


사실은 내가 그렇게 똑똑한 아이가 아니었음을 받아들이는 데 많은 시간과 감정을 소진했다. 사실은 내가 유별나게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조금 더 쉬웠다. 성격, 생각, 호감, 그리고 가능성. 많이 만나고 많이 읽고 많이 들으며 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믿음이 마치 오래된 그릇에 이빨이 나가듯 조금씩 마모되어갔고, 점점 더 쉽게 흩어지는만큼 받아들이는 것도 점점 더 쉬워졌다. 어른이 된다는 건, 내 자신이 별 거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자꾸 간단해지는 것, 그 사실을 알고 받는 상처가 차차 더 작아지는 것, 작아지는 것, 작아지는 것.


살며 한 번도 최선을 다해 본 일이 없다는 사실을 떳떳하게 말하는 것이, 그러니까 내겐 아직 가능성이 풍성하며 마음만 단단히 먹으면 언제라도 지금 이 시궁창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여기는 근거 없는 믿음이 아이의 일이라면, 어른이 된다는 건, 지금까지의 삶으로 미루어보건대 내가 최선을 다하는 법을 결코 모른다는 사실과, 그러므로 아마 앞으로도 최선을 다할 줄 모르고 어영부영 살아가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최선을 다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행운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최선의 선택지를 만날 수 없는 차선의, 혹은 차악의 삶을 어찌저찌 이어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게 내게 주어진 최선이라는 것을 감사히 여기는 것. 감사하는 것, 감사하는 것.


최선을 다했기에 실패했어도 후회가 없다는 숭고한 말이 최선을 다할 줄 모르는 사람의 것이 되지 않듯이,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 역시 입에 올릴 자격이 없음을 아는 것. 알고 그 말을 틀어막는 것. 그리고 그 말이 나올 일을 틀어막는 것. 





내 상태는 불행은 아니다. 하지만 행복도 아니다. 내 상태는 무관심도 아니고, 나약함도 아니며, 지친 것도 아니고, 다른 어떤 관심도 아니고, 그러니까 이 상태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내가 이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아마 글을 쓸 능력이 없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 무능함을, 이 무능함의 이유는 알지 못하면서, 난 이해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 그리고 이런 질문이 아직은 내가 말을 하도록 만들지는 못한다. 하지만 매일 적어도 한 줄은, 마치 사람들이 이제 혜성을 향해 망원경을 겨냥하듯이, 나를 겨냥해야만 할 것이다.

_ 프란츠 카프카,『카프카의 일기』


나는 그녀에게 물었어요. "초조해요?" "초조하다기보다는 불안해요. 내가 꼭 조개 같아요. 날카로운 작은 조각을 오랫동안 내 안에 간직하고 있다가, 더 편안하게 만들려고 노력했죠. 그래서 천천히 그 조각을 진주로 만들었어요. 이제, 그것이 나오려고 해요. 그런데 나는 그게 나오면, 뒤에 틈이 남을 거라는 걸 알아요. 그것이 있던 자리에 틈이 남겠죠. 그래서 나는 그 조각을 좀 더 붙들고 있고 싶어요."
_ 모신 하미드,『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나보다 모든 면에서 갖추어지고 우월한 입장에 서 있는 동료와 선후배들 속에서 직업적으로 대성하려면, 자신의 부족을 겸허하게 시인하고 실직(實直)한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한다. 선천적으로 두뇌가 떨어지고 학교에서 배운 것이 이질적이고 부족한 사람으로서는 직업생활에서 성급히 굴지 말고 오로지 진지한 노력으로 보완해 나가야 한다. 빠르기로 말하면, 아첨하고 술수를 부리고 가식을 꾸며서 임기응변으로 세상사를 매끈하게 헤쳐나가는 재주 이상 없겠지. 그러나 모든 사람이 우둔하지 않은 한, 그 '재주'는 조만간 드러나게 마련이다. 또 모든사람이 그런 술수에 능한 이 사회에서 교지(巧智)의 경쟁에서 이긴다는 것은 더욱이 어려운 일이다. 참된 인간적 삶도 아니다. 차라리 부족한 대로, 둔한 대로, 성실껏 노력하고 곧게 삶만 못하다.

_ 리영희,『역정』




3


눈이 온다고 했다. 사람을 만나고, 술을 마셔야겠다. 한 잔만 마시고 돌아와 다시 읽어야겠다.

  


권용선,『발터 벤야민의 공부법』을 마치다.

미셸 푸코,『담론의 질서』를 어거지로 마치다.

김고연주,『나의 첫 젠더 수업』을 가볍게 클리어 하다.

리처드 오스본 외,『미술사 아는 척하기』를 읽고 아는 척을 시도하다.

E. K. 헌트,『자본주의에 불만있는 이들을 위한 경제사 강의』를 읽기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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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1-08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버티고 잘 견뎌내요, 쇼님.

syo 2018-01-08 15:16   좋아요 0 | URL
버틸 만합니다 ㅎㅎㅎ 왜 이렇게 버틸 만한가 생각해 볼 여유가 날 정도예요.

AgalmA 2018-01-08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잔이 딱 한 잔 용량을 말씀하시는 건 아니지요?
글의 쓸쓸함이 글라스 원샷 하실 것 같은 느낌...

syo 2018-01-08 15:18   좋아요 1 | URL
주량이 궁벽하여 한 잔만 마셔도 남들 한 병 수준으로 취하거든요. 잔으로 부어줘도 간이 알아서 글라스 마신 것으로 쳐줍니다....

2018-01-08 15: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08 15: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08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08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1-08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같이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뜨끈한 국물과 술이 생각나요.

syo 2018-01-08 18:00   좋아요 1 | URL
눈은 아니겠지만 비오는 여름 밤을 하루 골라서 한 잔 하자구요.

cyrus 2018-01-08 18:02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여름이 빨리 왔으면 좋겠네요. 비 오는 여름 밤에 마시는 술맛도 좋죠. 비 오는 날에 먹는 북성로 연탄불고기는 최고예요. ^^

syo 2018-01-08 18:04   좋아요 0 | URL
낙찰이군요ㅎㅎㅎ 자 그럼 비 오는 여름 밤의 연탄불고기로.

chaeg 2018-01-08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이 소록소록 내리는 날, 밤하늘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 묻어나네요. 잘 하실거라 믿습니다^^

syo 2018-01-09 08:5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힘내서 할게요 ㅎㅎ

다락방 2018-01-08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 밤이 깊었네요. 굿나잇!

syo 2018-01-09 08:57   좋아요 0 | URL
그리고 아침이 밝았네요. 굿모닝!

다락방 2018-01-09 10:04   좋아요 1 | URL
내가 이런 댓글 남겼었네요.. 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