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 우주의 건축가와 함께 나란히 걷고 싶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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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돌아가시던 날 힘없이 내 손을 부여잡으며 남긴 말씀을 종종 생각한다. 데이비드 오빠의 이름을 따서 네 이름을 짓는 게 아니었는데. 데이비드는 헨리 삼촌의 어릴 적 이름이었다. 우리 세대가 태어났을 때 삼촌은 이미 헨리 데이비드 소로였지만, 엄마와 이모, 외삼촌들이 콩코드의 아름다운 들과 호수를 이리저리 들쑤시며 뛰어다니던 어린 시절에 삼촌의 이름은 데이비드 헨리였다. 엄마 세대는 헨리 삼촌을 데이비드라고 불렀다. 엄마가 다른 누구보다 헨리 삼촌을 사랑했으므로 삼촌의 이름은 나의 이름이 되었다.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엄마는 어려서 삼촌을 사랑했고, 삼촌이 월든 호숫가에 작은 집을 짓고 조용히 지내던 시절이나, 불복종과 노예제 폐지를 외치며 세상을-매사추세츠 주를-종횡무진 다니던 시절이나 그 사랑을 그치지 않았다.

 

엄마가 내게 삼촌의 이름을 붙여 준 것을 후회하며 눈을 감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엘리자베스와의 약혼이 깨졌을 때, 나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지만 엄마는 그 파혼의 까닭에 헨리 삼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이미 짐작한 눈치였다. 헨리 삼촌은 엄마에게 자부심과 불안이 한데 엉겨 자라는 선인장 화분 같은 존재였다. 아름답고 훌륭하지만 끌어안으면 따가운, 삼촌은 엄마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내게도. 나는 내 영혼에 칠해진 헨리 삼촌의 색깔을 그저 사랑하며 스물다섯 해를 살아왔고, 그날 애덤스 저택에서의 만찬 이전까지는 삼촌이 내 심장에 부어준 것들이 경우에 따라서는 족쇄가 될 수도 있음을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을 아프게 깨닫고 난 후 이어진 고뇌의 시간 속에서도, 나는 끝내 헨리 삼촌을 사랑하고 존경했다. 어떻게 그를 미워할 수 있을까! 삼촌의 손을 잡고 거닐던 콩코드의 들판에서는 여전히 향기가 피어오르고, 여러 갈래로 갈라진 개울들은 쉼 없이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월든 호수, , 수천만 조각으로 흩뿌려진 햇살들이 조용히 바스러지는 그 찬란한 은반을, 그곳을 둘러싸고, 혹은 그곳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물새들, 양서류들, 애벌레들, 윌귤나무와 물푸레나무를 비롯한 셀 수도 없이 다양한 생물들의 심포니를 어떻게 본체만체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는 법을 내게 알려준 헨리 삼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삼촌이 손수 지은 이 호숫가 작은 오두막에 들어와, 몇 달째 나는 엄마가 남긴 마지막 퀴즈를 풀어내려 애쓰고 있지만, 이 집 곳곳에 깃든 삼촌의 흔적이 끈질기게 방해한다. 내가 아주 어릴 적에 엄마는 종종 이런 말을 했다. 삼촌의 오두막에 가거든 지하실 벽을 두드려보렴. 네 삼촌의 집에, 그 지하실 바로 옆으로 분명히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가 지나갈 거야. 분명히 그 흑인 노예들을 캐나다로 실어 나르는 기차에 네 삼촌의 지분이 있을 걸. 지하철도 콩코드 역의 역장 헨리 데이비드 소로. 그게 네 삼촌이 숨기고 있는 진짜 정체지. 엄마는 생을 마칠 때까지 지하철도라는 것이 실제로 있어서 콩코드의 무른 땅 밑으로 흑인 노예를 잔뜩 실은 기차가 달리고 있으리라 생각하다 가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마의 짐작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헨리 삼촌이 책에다 자기가 캐나다로 흑인 노예 몇을 데려갔다고 써 놓았으니까. 실제 지하철도의 콩코드 역장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헨리 삼촌은 기인이었다. 남이 보기에 특별한 이유도 없이 멀쩡한 거주지를 박차고 나와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22개월을 혼자 사는 남자. 완벽한 고립을 추구한 것은 또 아니라, 거의 매일 저녁 친지와 친구의 집을 방문하여 식사에 끼어드는 객식구. 세금을 내지 않아 유치장에 갇혔는데, 누군가 대신 세금을 내 줬다며 석방을 알려오는 보안관에게 왜 자신의 저항운동을 방해하느냐며 되레 역정을 내는 괴짜 사상가. 집안 내력인 매부리코와 덥수룩한 수염 탓에 다들 접근을 꺼리지만, 한번 말을 트고 나면 도저히 감탄하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는 촌철살인의 재담가. 마치 전설속의 인디언 추장처럼, 말 못하는 무수한 생명들과 영혼의 교감을 나누고 그 이야기를 글로 엮어내는 다정하고 마술적인 작가. 헨리 삼촌을 표현하는 이처럼 다양한 이름들이 적혀 있는 명함 맨 아래에 지하철도의 역장이라는 한 줄을 더 붙인들 어색할 게 뭐가 있을까. 사실, 아직 삼촌이 살아 있던 내 어린 시절에, 그 오두막을 찾아가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하실에 내려가 이곳저곳을 두드려 보고 귀도 대어 보기도 했으나 역시 경적 소리 같은 건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다.



 

조카의 약혼이 행복의 꼭대기지점에서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데 자신의 책임이 없지 않다는 것을 저 세상의 삼촌이 안다면 과연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날, 나와 엘리자베스를 애덤스 가문의 저택으로 실어간 마차는 부러 멀리 빙빙 돌아 애덤스 가의 흑인 노예들이 목화를 따고 있는 목화밭 사잇길을 밟으며 천천히 달렸다. 마차가 지나가자 노예들은 일손을 멈추고 마차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마차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는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되어 있는 듯했다. 나는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 시선을 마차 바닥에 고정한 채 옆자리에서 엘리자베스가 종알대는 소리를 귓등으로 흘리고 있었다. 마차는 지독히도 천천히 나아갔다. 누구도 비난하지 않지만 모두에게 비난받는 듯한 시간이 영원처럼 내려앉았다. 그 길고긴 시간을 뚫고 마침내 마차가 애덤스 저택의 정문으로 들어섰다. 서둘러 마차에서 내리는데 이미 정원의 모든 흑인 노예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광경을 마주하고 나는 발을 헛디딜 뻔 했다. 등 뒤에서 엘리자베스가 높은 음역으로 짧게 웃었다.

 

데이브, 아버지께 드릴 선물로 뭘 가져왔나요? 흑인 하녀의 손에 머리칼을 맡긴 엘리자베스가 미소를 띠며 물어왔다. 프랑스에서 건너온 와인이라오. 보잘 것 없는 선물이라 오히려 아버님의 심기를 건드리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오. 잘 했어요, 데이브. 아버지가 분명히 좋아할 거예요. 아버지는 프랑스에서 태어난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랑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렇지만 다른 걸 가져왔으면 더 좋았을 뻔했죠. 그게 뭔지 알아요? 그게 뭔가요, 리지? 엘리자베스가 슬쩍 웃더니 부채로 입을 가리며 소리 높여 말했다. 그건 바로 자유, 평등, 박애랍니다! 항상 아버지는 말씀하시죠. 자유, 평등, 박애야말로 프랑스의 최고급 수출품이라고. , 내 이름도 엘리자마히가 될 뻔 했다는 거, 이야기 한 적 없었나요? 어머, 아자리, 아버지가 새로 사다주신 백금 목걸이 좀 가져다주겠어? 사파이어가 걸려있는 목걸이야. , 아가씨. 아자리라 불린 흑인 하녀가 종종걸음으로 물러나 작은 방으로 사라졌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런, 리지, 내게 미리 귀띔을 해줬더라면 자유, 평등, 박애 가운데 하나라도 오늘 가져왔을 텐데요. 엘리자베스가 대답했다. 괜찮다니까요, 데이브, 사실 자유, 평등, 박애는 이미 이 집에 넘치고 흘러 더는 필요하지 않거든요. 둘러보세요. 이 영지와 저택의 모든 곳에서 프랑스 최고 수출품의 향기가 진동하고 있지 않은가요? 나는 적당히 주위를 둘러보는 척을 하고 맞장구를 치려했으나, 마차를 타고 이 저택까지 오면서 보았던 풍경들이 갑자기 떠올라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 사이 목걸이를 두 손으로 받쳐 든 아자리가 역시 종종걸음으로 돌아왔다. 엘리자베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아자리? 내 말이 맞지? 아무것도 듣지 못했을 아자리는 잠깐 당혹스런 눈빛을 보이더니, 그 눈빛을 들킬세라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그럼요, 아가씨. 아가씨 말씀이 다 맞아요. 맞고 말구요.

 

만찬은 의외로 아무런 문제없이 이어지는 듯 했다. 애덤스 씨는 내가 선물한 와인을 마음에 들어 했고(아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유, 평등, 박애의 요술 주문을 이미 알았기 때문에 식탁 위의 대화는 암초를 만나지 않고 순항했다. 그랬던 그날의 저녁 만찬이 결국 엘리자베스와 나의 항해를 파혼이라는 기항지로 몰고 간 것은 돌이켜보면 아마도 애덤스 씨의 이 말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매사추세츠 주의 흑인 사업은 전망이 좀 어떤가. 북쪽으로 캐나다 자치령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흑인들이 쉽게 달아난다고 들었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애덤스 씨의 말씀대로입니다. 저도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그렇군. 얼마 전 그곳의 농장주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 참 훌륭한 신사인데도 자꾸만 달아나는 흑인들 때문에 정당한 사업을 망치고 있었어. 매사추세츠는 정말 사업하기 좋지 않은 곳이라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지. ,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런데, 나는 그것이 매사추세츠가 캐나다와 맞붙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네. 자네도 그곳에 산다니까 이미 알고 있겠지만 말이야. 애덤스 씨는 손을 턱에 대고 생각에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리더니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크게 당황하지 않은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며 물었다. 달리 생각하시는 바가 있으신지요. 애덤스 씨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내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더니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거리며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의 이름에도 데이비드가 들어가는구먼. 그곳에서는 참 흔한 이름인가보군. 이봐, 자네 혹시, 몇 해 전에 죽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라는 이름의 선동가를 아는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차마 입으로 대답을 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애덤스 씨가 목소리를 높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 악마 같은 작자는 흑인들을 꾀어내어 그들이 우리 인간(그는 분명히 인간이라고 말했다)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고 가르쳤지. 게다가 인간들에게는 시민으로서 당연히 납부해야 할 세금조차 내지 말라며 선동했다네. 흑인 사업이 옳지 않고, 옳지 않은 일을 하는 정부에는 세금을 낼 수 없다는 거야! 세상에, 그런 자의 목숨까지 지켜주려고 이 나라가 공정한 사업을 하는 이들의 주머니에서 세금을 걷어가는 거야. 그가 그렇게 떠들 수 있는 것도 다 공정한 사업을 하는 이들이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불복종이라니. 불족종이라니! 책 이름은 또 얼마나 거만한가. 그 지옥불로 태워 없애야 할 책의 제목은 시민 불복종의 의무라고 한다네. 의무라니. 누구 마음대로 의무야. 그렇지 않은가? 자네도 매사추세츠 사람이니 그자의 더러운 이름을 한 번은 들어보았겠지? 나는 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저 그 자리를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 애덤스 씨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뒤쪽 벽 그늘 속에 조용히 서 있던 흑인을 손가락으로 불렀다. , 내 집무실에 가서 책을 가져 오도록 해.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 자리에서 태워버릴 수 있도록 성냥도 가져 오고. 주인님, 저는 글을 몰라서 말씀하신 책이 어떤 책인지 찾을 수가.....어디서 말대답을! 이 멍청한 놈!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놈! 글도 모르는 너 같은 짐승이 우리 인간과 같다는 말을 했던 그 악마에게 신의 벌이 있기를! 그 책은 내 책상 한 가운데 펼쳐진 채로 놓여 있으니 그걸 가져 오란 말이다, 이 벌레 같은 놈아! 하인은 연신 고개를 조아리다 재빨리 연회장 밖으로 사라졌다.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내가 엘리자베스에게 헨리 삼촌의 이야기를 했던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만약 했다면, 애덤스 씨는 지금 내가 저 지옥불로 태워 없애야 할 책, 시민 불복종의 의무, 그에 못지않게 사악한 책 월든을 쓴 사람의 조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역시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그는 분명히 지옥으로 갔을 거네. 주님은 결코 그런 자들을 건져 주시지 않지. 애덤스 씨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알고 있다. 나는 그가 알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팠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 뒤에 이어질 그림들과, 지어내야 할 변명 혹은 병명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무것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인이 책을 한 권 들고 돌아왔다. 제발 글을 모르는 그가 다른 책을 가져오기를, 그리하여 주인의 벼락같은 분노를 뒤집어쓰고 새카맣게 타서 죽어버리더라도 제발 다른 책을 가져오기를 기도했지만, 그가 내려놓은 책 표지에는 내가 사랑하는 삼촌의 이름이 대문자로 당당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예감했던 시험의 순간이 왔다. 애덤스 씨는 아무 의도도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가 한 번 태워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매사추세츠 사람이 이 책을 태우는 것이 그자를 지옥으로 한 발 더 가까이 데려가지 않겠는가? 그가 내게 성냥을 내밀었다. 나는 성냥을 받아들고 물끄러미 내려다 볼 뿐이었다. 아마 떨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떨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갑자기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팔꿈치로 건드려 바닥에 떨어뜨렸다. 잔이 산산 조각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다. 아자리, 이 못된 것, 어디서 이런 미끄러운 잔을 가지고 온 거야. 내 새 드레스에 와인을 흘려 못쓰게 만들려고 그런 거지? 대답해, 어서 대답해 이 벌레 같은 것아! 그러나 쉼 없이 거친 말을 쏟아 붓는 그녀의 시선은 내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자리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빌고 있었지만, 진짜로 사죄하라는 청구서를 받은 사람은 아자리가 아니라 사실 나임을 나는 어렵지 않게 눈치 챘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사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구원의 밧줄을 던진 것일 수도 있었다. 이 줄을 잡으라고, 네게 이름을 물려 준 야만인의 시체를 발로 차 지옥 구덩이에 밀어 넣고, ‘우리 인간의 울타리로 들어오라고, 지금 이 손만 잡으면 전부 아름답게 흘러갈 거라고, 이 자유, 평화, 박애가 넘치는 저택에서 정당한 흑인 사업을 통해 모든 것을 누리며 살 수 있을 거라고, 지금 그녀가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아자리, 너 같은 짐승은 정말 대접받을 가치가 없어. 그렇지 않아요? , , 맞습니다, 아가씨, 아가씨의 말이 다 맞아요. 닥쳐, 너에게 물은 게 아니야. 데이브, 대답을 해 봐요. 이 노예가 내 드레스를 망치려 했다구요. 이 검은 짐승에게 우리가 무슨 벌을 주어야 할까요? 모두의 눈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애덤스 씨, 엘리자베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아자리까지. 그러나 나와 눈을 맞추고 있는 것은 헨리 삼촌이었다. 나는 탁자 위에 놓인 삼촌의 책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책 표지에 박혀 있는 헨리라는 이름이 왼쪽 눈이 되고, 데이비드라는 이름이 오른쪽 눈이 되어 매섭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시 영원의 시간이 찾아왔다. 모든 눈들이 외치고 있었다. 대답해요. 대답하게. 대답하라구요. 대답을 하시게. 대답. 대답. 대답을. 조카야, 대답하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손에 쥔 성냥은 나도 모르게 이미 부러뜨린 뒤였다.




 

엘리자베스로부터 긴 편지를 받았다. 안타까움이 느껴지지 않는 글로 안타까움을 말하고,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 글로 슬픔을 말하는 긴 편지였다. 그러나 그 긴 편지도 이별을 말하기에는 짧았다. 짧아도 들어 있을 이별은 들어 있었다. 나는 그 편지를 세 번 다시 읽었다. 그러나 그 편지 어디에도 아자리, 흑인, 삼촌의 책, 그리고 삼촌의 이름은 들어있지 않았다.

 

오늘 밤도 엄마의 퀴즈를 생각한다. 엄마가 후회했던 것은 무엇일까. 내게 삼촌의 이름을 붙이고, 삼촌의 태양 아래 키워내 마침내 삼촌의 이름과 영향력이 내 결혼을 망치게 만들었다는 탄식이었을까? 아니면 그것은, 세상에 빛을 던지고 떠난 삼촌의 훌륭한 이름을 나 같은 용기 없고 나약한 멍청이에게 붙여 욕되게 만들고 말았다는 죄책감이었을까? 나는 오늘도 삼촌의 오두막에 기어들어가 지하실의 벽을 두드려보기도 하며 하루를 버렸다. 그러나 그렇게 버린 날들이 쌓이자, 조금씩 희미한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윤곽밖에 드러나지 않아 무엇의 윤곽인지조차 말할 수 없는 그런 징조가. 삼촌은 월든, 어느 겨울 꽁꽁 언 월든 호수의 얼음을 잘라내 가져간 얼음 장사꾼들의 이야기를 썼다. 그들이 가져간 얼음은 어디선가 녹아 물이 되었을 것이고, 월든은 제 품에서 그만큼의 물을 도둑맞은 것이다. 그 후로도 겨울이면 많은 물을 잃었을 월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이면 충만하게 가득 차 출렁인다. 그 물은 어디서 왔을까. 멀리 떠난 물들이 하늘과 땅을 밟아 다시 월든으로 돌아온 걸까? 헨리 삼촌은 아마 그 대답을 찾으려 이곳에서 22개월 하고도 2일을 보냈을 것이다. 삼촌이 오두막을 나간 것은 그 답을 찾았기 때문일까? 내겐 아직 모든 것이 어렵고 세상은 모를 일투성이다. 나는 저 물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곳에서 반년을 혼자 지내는 동안, 저 물들이 온다는 것을, 결국은 월든 호수가 다시 가득 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수백 개의 낮과 밤이 월든 호수의 표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마침내 22개월 2일을 채우고, 나는 이 오두막을 나설 것이다. 그때 내가 손에 얼마나 많은 대답들을 움켜쥐고 나갈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역시 또 다른 시작을 위한 밑천이 될 것이다.



 

나는 삼촌과 나란히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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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11-15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도 비난하지 않지만 모두에게 비난받는 듯한 시간이 영원처럼 내려앉았다.


이 문장, 쇼님이 쓴거죠? 와- 진짜 명문장이에요. 이 글도 그렇고요.

syo 2017-11-15 09:59   좋아요 0 | URL
앗, 칭찬 ㅎㅎㅎ
감사합니다.
별 거 아닌 글인데다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사실 열심히 썼어요...

다락방 2017-11-15 10:11   좋아요 0 | URL
저는 월든 사놨지만 읽기 싫었었는데, 이 리뷰 보니까 읽어야겠다 생각하게 되네요.

그건그렇고, 그 뭐더라, [우아한 인생]이라는 책이 있는데요. 거기 남자주인공이 여자 주인공 때문에 월든 을 읽게 되거든요. 여주가 좋아한다고 해서요. 그리고 읽고는 그 책이 너무 좋아서 항상 바지 뒷주머니에 꽂고 다니는 장면이 나오는데, 저는 그 책 읽고 월든을 샀었어요. 크- 그 생각 나네요.

syo 2017-11-15 10:26   좋아요 0 | URL
이 책은 그야말로 제 인생책이라, 저는 매년 한 번은 꼭 읽고 있어요. 자꾸 혼내는 데도 어쩐지 힘이 많이 되는 책입니다.

짜라투스트라 2017-11-15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재미있어요^^

syo 2017-11-15 10:27   좋아요 0 | URL
ㅎㅎㅎ 감사합니다. 재미씩이나!

프리즘메이커 2017-11-15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이렇게 저랑 독서취향이 비슷하신거죠?

syo 2017-11-15 14:53   좋아요 1 | URL
프메님이랑 인생 행로가 좀 비슷하더라구요. 제가 좀 더 철없이 인생 탕진하면서 살긴 했지만요. 아마도 그래서?? ㅎ

AgalmA 2017-11-19 0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아니라 소설이 되자! 제 모토를 만족시켜주는 글이네요^^ 역시 syo님이얌^-^b

syo 2017-11-19 09:46   좋아요 0 | URL
(^-^)> ㅎㅎ

- 2021-06-16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져요.

syo 2021-06-17 18:5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