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가 오리처럼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신 적 있으신지? 상당히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모름지기 비둘기는 비둘비둘 걸어다녀야 제맛이라고 생각했다. 참새처럼 귀엽게 콩콩 뛰는 게 아니라. 목을 앞뒤로 흔들고 상당히 고압적인 눈빛으로 인간을 쏘아보며, 직립 보행은 너희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이 신발 신은 원숭이놈들아- 하는 모습이 디폴트로 설정된 비둘기의 자태였는데, 공원의 잔디밭에 서른 마리쯤 되는 비둘기들이 알 품는 자세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진리가 현현했다. 이 세상에 정해진 것은 없다. 정하는 것은 나다. 나라는 놈은 얼마나 오만한지, 나를 정하는 것에 그쳐야 할 것을, 심지어 '너'까지 결정한다. 비둘기도 아니면서 비둘기 너희들은 항시 걸어다니고 있어야 한다고 결정한다. 여성도 아니면서 니들은 남자를 못 만나서 그래, 사랑을 못 받아서 그래, 사회 생활을 제대로 안 해봐서 그래, 하고 여성의 의식을 결정한다. 신도 아니면서 다른 사람들을 인간이 아니라 쓰레기나 유전학적 오물로 규정해 600만이나 죽이고 나면, 결국 스스로가 인간도 아니게 된다는 것. 그것은 알아야 한다.

 

그런 이유로(?) 원래 10일에 한 번씩 정리하던 독서목록을, 부족하지만 일주일만에 대방출 해본다. 이렇게 쉽고 얇은 책 위주로 마구잡이로 읽기보다는 몇 가지 주제를 정해서 한 번 읽어볼까 싶기도 하고, 두꺼운 책을 슬슬 피하며 도망치는 것도 한계에 봉착했다. 나도 이제는 두꺼-업하고 묵지-익한 책 읽고 폼나게 리뷰 쓸 수 있는 지식인이 되고 싶다. 자,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170831-170906 25권

문학 6권


1. 게 가공선

: 이게 소설이라고? 거짓말. 이게 100년 전이라고? 그럴 리가.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란 이러하고 저러한 것이다 말만 들었지, 실제로 읽어보니 현장감과 현실감이 압도적이다. 그리고 압도적으로 열 받는다.


2. 나무는 간다

: 책 딱 한 권 읽으며 여러 번 경탄하려면 시집만큼 좋은 게 없다. 그리고 글 딱 한 편 읽으며 와,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나, 혀를 내둘러 보려면 시집 맨 뒤에 달린 해설만큼 좋은 게 없다.


3. 사라진 입을 위한 선언

: 이 정도면 거의 암호놀이다. 시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내가 오롯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시는 내가 소비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일단 내게 온 시는 머리로든 가슴으로든, 어떻게든 소비되어야 하는데, 단편적인 정황만을 남겨둔 채 시가 허공으로 흩어져버렸다. 결국 나는 시인의 다음 시집을 기다리지 않는다.


4. 중얼거리는 천사들

: 그러니까, 눈이다. 귀다. 손끝이다. 거기서 시작한다. 눈이 가는 자리, 귀가 향하는 자리, 손끝이 닿는 자리. 시인은 거기에 선다. 나머지 일은 시가 다 한다.


5. 인생의 일요일들

: 여행기는 우리에게 네 가지 선물을 줄 수 있다. 하나, 여행지로 데려간다. 둘, 그곳으로 가 보고 싶게 만든다. 셋, 지은이의 마음으로 데려간다. 넷, 그곳으로 가 보고 싶게 만든다. 여행기 입장에서는 둘이 가장 쉽고 넷이 가장 어렵겠다. 정혜윤이 네 번째 선물 언저리에 섰다. 그러나 한번에 다 읽어 삼키기에는 너무 진해 마음이 쉬 피로해지므로 나눠서 읽기를 권한다.


6. 동급생

: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듯, 사람 옆에선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정도는 다르겠지만, 누구에게나 친구를 만드는 것은 거울을 만드는 것이다. 거울을 보고 있으면 거울 안의 내가 보인다. 거울 안의 나를 보고 있으면 거울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은 그렇게 실컷 거울 속의 나만 봐 놓고, 누가 물으면 거울을 봤다고 대답한다. 나를 봤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믿지도 않는다.



젠더 3권




7.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 배우는 것도 많지만, 나는 어디까지 읽어낼 수 있나를 확인하는 데도 좋다. 지식에 관해서건, 분노에 관해서건, 내 입장에서 아직 이 책에 대해 평하거나 쓰거나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읽고, 생각하고, 느껴야 할 것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8. 길 위의 인생

: 많은 사람이 걸어 온 많은 길을 읽고, 듣고, 감탄하고, 부러워해왔다. 그 중 가장 멋지고, 다른 그 누구의 것과도 같지 않은 길이 이 책 안에 있다.


9. 악어 프로젝트

: 논쟁의 철이 지난 책이고, 역시 철 지난 대답이 되겠지만, 왜 남자들을 다 악어로 표현했냐고 분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명민한 꼬맹이가 했던 말이 대답으로 맞춤한 것 같다."홍시맛이 나서 홍시라 한 것이온데, 왜 홍시맛이 나냐고 물으시면 그냥 홍시맛이 나서...."


철학 7권



10. 현대 철학 로드맵

: 이러면 정말 곤란하다. 원제를 흘낏 보니까 "진짜로 이해하는 현대사상" 뭐 이런 식인가본데, 저자 본인도 서문에서 이런 '후려치기+우겨넣기'가 바람직한 결과를 낳지 못하거나 애당초 불가능함을 은근히 드러낸다. 일본 출판계의 고질병이다. 이 책만 읽으면 ~할 수 있다! 2시간이면 ~를 정복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천안이다. 호도하면 천안이지. 네, 무리였네요. 죄송합니다. 내용 서술은 이런 식이다. "라캉은 '차이의 체계'라는 소쉬르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시니팡의 연쇄를 '구조'로 이해했다. 라캉에 따르면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이러한 시니피앙의 연쇄(언어)에 의해 구조화된다." 이러고 띡 끝이다. 아, 입문서를 읽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말이 나오면 책은 이미 실격인 것이다.


11. 비트겐슈타인 철학으로의 초대

: 절반을 다 읽고 나서야 예전에 한 번 읽은 책이라는 사실이 기억났다. 내용도 같이 기억났으면 좋았을텐데. 심지어 당시에 리뷰도 썼었던 것 같다. 지금도 있으면 좋았을텐데. 비트겐슈타인 입문서 중에서는 정말 쉬운 편이라고 평했던 기억이 난다. 그게 진짜 쉽다는 말이면 좋았을텐데. 


12.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 1년에 한 번 꼴로 읽으면서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해 보는 측량기로 삼는 책이다. 작년에 뿌려 놓은 눈물의 냄새가 나는 걸로 보니, 별로 멀리 오지 못했군. 여전히 데리다, 지젝, 랑시에르, 바디우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깝다. 그러니까 엄밀히 따지면 이건 읽었다고 할 상황도 못 되는 셈이다. 또 한번 쓰린 눈물을 심으며 내년을 기약한다.


13.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 "자본론" 입문서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철학" 입문서라는 입장에 맞게 상당히 폭넓은 범위를 다루고 있다. 다른 책들을 읽기에 앞서 일독하면 방황을 크게 줄일 수 있겠다.


14. 헤겔

: 이걸로 시작하기보다는 좀 더 다정하고 두꺼운 책이 좋았겠다. 그러나 헤겔은 한없이 두꺼울 수는 있어도 결코 다정할 수는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함정.


15. 한 눈에 읽는 현대 철학

: 역사에, 철학에, 뭐가 됐든 남경태의 책은 심지어 사전식이라도 어쩐지 잘 읽힌다. 최소 40년은 더 책을 만들었어야 했는데. 물론 그도 모든 방면에 달통한 만물박사는 아니었던 듯하다. "지금 상대성 이론은 양자역학에 자리를 내주고 패배한 이론이 되어 있다. 상대성이론이 뉴턴 역학을 대체했듯이 양자역학은 상대성 이론을 대체했다." 랄지, "뉴턴역학과 상대성이론의 관계처럼 서로 화합할 수 없고 정면으로 대립되는 이론이다"랄지 하는 구절을 보면 좀 의아해질밖에.


16. 프로이트 씨, 소통은 어떻게 하나요

: 청소년용을 만만히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다. 당신, 그렇게 자신만만하다가 정말 부럽습니다. 백미는 푸코, 마르쿠제, 융, 포퍼와 프로이트가 벌이는 가상대담이다. 시리즈물로 니체와 마르크스도 절찬 판매중.


정치 / 경제 / 사회 4권



17. 일하지 않고 배불리 먹고 싶다

: 기본소득에 관한 책인 줄 알았는데, 21세기형 아나키스트의 일기장이었다. 그럴 바에는 사랑이나 하자, 집이나 불태우든지 가라오케나 가자, 하는 식으로 글을 마무리하는 것을 즐기는 듯 보인다. 재미도 꽤 있다. 마지막 꼭지인 "미친 사회를 위한 화장실 사보타주"는 압권이다.


18. 국가란 무엇인가

: 살을 붙이고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는 뼈대가 필요하다. 뼈대를 빚는 책으로 부족함이 없다. 부족한 건 항상 여기를 시작점으로 해서 더 깊게 더 많이 읽어나가자는 의지의 지속력이다.....


19. 자본론 이펙트

: 자본론도 자본론이지만, 자본론의 이펙트를 다루는 데 주력한 책이다. 얇아서 내용이 풍부하지는 않지만, 핵심을 비껴가지 않는 눈이나, 비판적 견해의 고갱이를 저며내는 손놀림을 보고 있으면 저자의 저력이 여실히 드러난다.

 

20. 위대하고 찌질한 경제학의 슈퍼스타들

: 글과 만화 중 어느 것도 내 취향 아닌 것이 없는지라, 유유에서 나온 책이 아닌가 하여 출판사를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러고보니 유유가 요즘 잠잠하다? 싶어서 검색해봤더니 지난 달도 두 권이 나왔다. 소홀했다. 모든 게 내 불찰이다....



인문일반 / 책 / 생활 5권



21. 장서의 괴로움

: 알라디너들이여, 우린 이제 그만 사야 합니다. 책 무게로 집이 무너지는 일을 막으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미니멀리즘입니다. 그러나 미니멀리즘은 파산과 함께 오거나, 아님 최면이라도 걸리지 않는 한 결코 그냥 오지 않겠지요..... 


22.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

: 발매된지 4년이 다 되어가는 이 책을 읽은 사람이 나를 포함해 5명뿐이라고 알라딘은 말한다. 그게 내가 최근 맞닥뜨린 가장 큰 미스테리다. '쓰레기 고서'라는 '얼굴'이 독자들의 간택을 막는 요인이 되는가본데, 일단 읽기만 하면 재미와 의미를 두루 갖춘 훌륭한 책임을 알게 된다. 


23. 공부해서 남 주다

: 우리에겐 익숙치 않은 지식인들의 초상을 제공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에릭 호퍼나 듀랜트 부부에 대한 이야기는 읽기 즐거웠다. 다만 이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지식의 대중화에 일획을 긋긴 한 것 같은데, 그들이 지식을 대중에게 돌려주고자 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식자층과 투쟁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공부해서 남 줬지만 남 주자고 공부한 것은 아닌 셈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칭찬하기 애매할 수 있다.

24. 편안하게 따뜻하게 휘게

: 행복이 들어오는 입구는 소소한 것들을 바라보고 보듬을 줄 아는 눈과 손과 그 온기 속에 숨어 있다. 그리고 코코아와 아로마 향초와 벽난로가 필요하다..... 휘게는 어려운 것이 아니랍니다. 어느 집이나 벽난로 하나쯤 다 있잖아요.


25. 올 어바웃 러브

: 나는 벨 훅스를 정말 좋아하고 그녀가 써낸 모든 책들을 사랑하지만, 사랑론만큼은 예외로 해야겠다. 사랑을 정의할 수 없다고 보는 방식에도 단점이 있고, 그녀가 제기한 문제의식 또한 납득은 가지만, 사랑을 한 가지 정의 안에 가둘 수 있다고 보는 관점도 분명히 크고 작은 문제들을 낳는다. 거칠게 말하자면, 이게 사랑이니? 야, 사랑 몰라? 사랑은 이거야 이거, 다 정해져 있음, 그러니까 내 건 사랑, 니 건 사랑 아님. 헐, 대박. 뭐 이런 문제랄까?



내일부터는 아마도 초심으로 돌아가 마르크스를 열심히 읽게 될 것 같다. 사실 초심 찾을만큼 어디 멀리 간 적도 없다. 그냥 마르크스 읽다가, 까먹었다가, 다시 읽다가, 다시 까먹었다가, 다시 읽.....다가 세월은 가고 허리만 굽은 것이다. 그래도 계속 읽는 거 보면 이게 끈기가 없어서 이렇게 된건지, 있어서 이렇게 된건지 막 헷갈린다. 마르크스의 '마'까지 알았다 싶으면 까먹고, '마르'까지 알았다 싶으면 또 까먹고. 그러니까 결국 마르크스 관련 책을 처음 읽은 지 1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마르크스'를 알지 못하고 '마마르마르마르크마르마마르큿!마마...마..마르말'뭐 이런 것을 알고 있는 셈이라 하겠다. 이번에는 꼭 '스'까지 알고 싶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7-09-06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라진 입을 위한 선언》을 읽고 나니까 제 머리도 사라진 줄 알았습니다. 시구가 눈에 들어오지가 않았어요.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은 처음 보는 책입니다. 이런 책을 보면 헌책방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7년 전 알라딘 서재에 활동한 ‘노이에자이트‘님이라는 분이 있었어요. 그분 말로는 아파트 재활용분리수거장에 가서 버린 책들 중에 읽을 만한 것을 건진다고 해요. 한때 저도 그분의 책 사랑(?)에 반했습니다. 가끔 분리수거함을 지나가면 기웃거려요.. ㅎㅎㅎ

syo 2017-09-06 20:21   좋아요 0 | URL
보셨군요. 《사라진 입을 위한 선언》을. 솔직히 저건 너무 심했습니다.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은 어쩐지 cyrus님과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저는 금정연 작가 책에서 발견하고 읽었지요. 분리수거함을 기웃거리는 cyrus님의 모습이 그림처럼 그려집니다. 한 번 뵌 적도 없는데 말이지요ㅎㅎㅎㅎ

독서괭 2017-09-06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마르..(중략)..마르말‘ 이라니 ㅋㅋㅋㅋ 그 정도면 뭐, 끈기 인정입니다!(엄지척)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이 보관함에 추가되었습니다. 보관함에서 장바구니로 넘어가기까지 기나긴 기다림이 필요하겠지만요...

syo 2017-09-06 23:2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제가 책 추천 타율이 그리 높은 편이 아니라서 걱정입니다. 저 혼자 좋아하는 경우가 더 많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