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홍시

 

 아버지가

 감을 보내셨다

 바쁘게 다니다

 이제서야 열어 보았더니

 물크러진 붉은 얼굴이다

 어디서 본 듯도 하다

 어느 늙은 마음이

 조용히 바람 맞는 언덕에서

 내게 온 얼굴이다

 익은 그리움이다

 말간 놈으로 몇을 골라

 방 나누어 쓰는 친구 건네고 나는

 무른 놈

 짓무른 데부터

 혀를 대 본다

 술맛이 난다

 노인이 술을 즐겨 자셨다

- 2010. 11. 24

 

 

2

 

아직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일이다. 가을이면 아버지는 감을 보내오곤 했다. 먼 길을 밟아 온 감은 꼭 어딘가 터져 있었다. 어차피 터져서 절반은 못 먹게 되니 이런 거 그만 보내라고 말을 하면 아버지는 절반이라도 먹을 수 있으면 됐다며 고집을 피웠다. 늙어도 고집은 늙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도 두 번 거절하지 않았다. 저 시를 쓰게 된 건,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이 글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아버지가 내게 줄 수 있는 것이 이제 감밖에는 남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랬다. 다 물크러진 감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난 아버지가 내게 준 마지막 선물이 되었다. 하지만, 내 마지막 선물이 저 시가 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렇게 될 줄 그때 미리 알았더라면,

 

 

 

3

 

아버지는 중학교도 채 마치지 못했지만 아들이 학교에서 받아 온 가정조사서류에는 꼭 고졸이라고 적는, 기왕 하는 거짓말이라면 통 크게 대졸이라 속일 수도 있었을텐데도 고졸이라고 써 넣고는 마치 고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쥐기라도 한 것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어리숙한 사람이었다. 아들의 교육에는 관심이 없었고, 책을 적게 사 주는 무심한 사람이었다. 고집이 세 당신 한 몸은 당신이 하고 싶은 데로 하고 사는 사람이었지만, 당신을 닮아 고집 센 아들의 팔목을 비틀어 법대를 보내지는 못한 허술한 사람이었다. 딸처럼 키운 조카가 기대에 썩 못미치는 신랑감을 데려와 결혼을 통보했을 때, 안방의 문을 걸어 잠그고 한 시간을 목놓아 울어 놓고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방에서 나와 부은 눈으로 결혼을 허락한 사람이었지만, 정작 당신 딸은 그 남자 친구 한 번 제대로 만나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성미 급한 사람이기도 했다. 암으로 간의 절반을 떼어내 놓고도 끝내 술을 버리지 못해 아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모질고 모자란 사람이었다.  

 

 

4

 

처음 병실에 들어선 날을 기억한다.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싯누런 미소를 처음 마주한 순간, 아들은 이미 애도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곧 괜찮아 질거라는 허튼 말로 아들을 맞았지만 그 말은 지금 당신이 괜찮지 않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았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가 미웠다. 아버지는 잠이 많아졌다. 바늘처럼 가느다래진 그 초라한 생명의 옆에 앉아서 아들은 감을 생각했다. 물러터진 감의 달면서도 시큼한 맛을 떠올렸다. 그리고 옆에 누워있는, 저 금방이라도 흐물흐물 터져 병실 바닥으로 쏟아질 것 같은 누런 감의 빈약한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 조금 울 수 있었다. 울음의 냄새를 맡은 아버지가 일어나 말없이 웃었다. 그러면 아들은 아버지가 다시 미워졌다. 미우므로 다시는 울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아버지, 나는 당신이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날 거라고 믿지 않습니다. 나는 애도를 시작했습니다. 의사가 당신의 눈을 감기며 어떤 시간을 불러줄 때, 눈동자를 흔들지 않고 당신이 식어가는 모습을 또렷이 바라볼 겁니다. 당신의 영정 옆에 서면 곡을 하겠으나, 영전에 향을 바치는 이가 나의 오랜 친구라면 나는 괜찮다, 슬쩍 미소를 보내기도 할 겁니다. 그리고 당신이 하얀 베옷을 입고 재가 되기 위해 아궁이 속으로 들어갈 때쯤에 나는 아마도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될 겁니다. 당신께는 퍽 야속하겠으나 이 모든 것이, 지금 당신이 그 얼굴에 칠해 놓은 누런 분장을 지우며, 이게 다 재밌는 농담이었다고, 그 좋아하는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자며 환자복을 벗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벌어질 일들입니다.  

 

 

5

 

아버지는 겨울에 떠났지만 아들은 가을이 오면 기일처럼 아버지를 생각한다. 여름의 뒷모습이 보인다. 오늘 우연히 세 권의 책을 읽다가 가을이면 감을 보내주던 사람을 생각했다. 다시는 배송되지 않을 감을 한번 더 생각했다. 애도는 옛날에 끝났고, 가을이 와도 더는 슬프지 않지만 그래도 가끔 한 박스의 감을 생각한다. 절반이 아니라 전부가 터져나갔더라도, 한 상자의 감을 다시 받아보고 싶을 때가 있다. 감은 누런 색이어도 밉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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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8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28 2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7-08-29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이 와도 더는 슬프지 않다는 말이 마음아파요. 시간이 지나면서 나이를 먹고 사람들의 빈 자리를 만나게 되더라구요.;;

syo 2017-08-29 06:50   좋아요 1 | URL
제가 죽음에 대해 뭔가 이해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의 죽음과 그 이후의 시간을 겪어나간 방식이 앞으로 또 다른 죽음들을 맞아 애도하는 방식을 결정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8-29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버지를 여읜 적이 있어서 쇼 님의 애도가 구구절절 와닿습니다.

syo 2017-08-29 11:42   좋아요 0 | URL
어느 정도는 본질적으로 다들 비슷한 경험을 하는 거군요...

sprenown 2017-08-30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라는 시가 생각나네요...늦었지만 삼가 명복을 빕니다. 주소 알려주신다면 감 한박스 보내드리고 싶네요..주황색으로 밝으시레하면서 물컹한 놈으로.

syo 2017-08-30 15:04   좋아요 1 | URL
하하하, 감사합니다.
문태준은 제가 제일 사랑하는 시인이지요.
감은 말씀만으로도 먹은 기분입니다. ˝밝으시레하다˝는 표현은 살면서 첨 듣는데, 어쩐지 말맛이 있습니다.

sprenown 2017-08-31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그스레하다˝가 옳은 표현이네요..철자법도 제대로 모르고 엄벙덤벙 적었네요.

syo 2017-08-31 15:03   좋아요 0 | URL
어차피 모양을 나타내는 말인데 굳이 옳은 표현에 집착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발그스레하다˝는 말은 빨갛다는 느낌이 들지만 ˝밝으시레하다˝고 쓰니까 밝다는 느낌이 더 강조되는 것 같습니다.

AgalmA 2017-09-02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이상하게 절절입니다! 절절맨다 그거 말고요.

syo 2017-09-02 18:44   좋아요 0 | URL
절절맨다 그것도 매력적입니다!

카알벨루치 2018-10-05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남자의 자리>읽고 난 한 어머니가 남편의 부재의 슬픔에 잠겨 펑펑 울었다해서 읽고싶은데 품절이고. 근데 syo님 글 읽으니 가슴이 쒜 해지고 코끝은 시큼해지고 눈은 퀭해지네요~마음이...^^

syo 2018-10-05 20:36   좋아요 0 | URL
대출을 이용해서 한 번 읽어 보세요 ㅎㅎㅎ 아니 에르노는 뭘 읽어도 좋습니다.

카알벨루치 2018-10-05 21:12   좋아요 0 | URL
아니 에르노 <한 여자>읽으면서 가슴이 갑자기 멍했지요! 그런 느낌은 ‘벌거벗은 글쓰기’의 아니 에르노만이 주는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syo님 굿뜨!

공쟝쟝 2019-03-26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감..... 동....ㅠㅠㅠㅠ

syo 2019-03-27 09:29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뭘 또 이렇게까지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