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물티슈

 

 낡은 바다가 지어놓은 여관

 그 곳에 오래 머문 적 있다

 주머니 속에서 굴리던 조개껍데기

 무늬가 다 사라질 때까지,

 옷깃을 스친 인연들이

 인연 전으로 모두 돌아갈 때까지,

 우리는 별빛이 끝난 새벽마다

 창틈에 빠져나온 파도 한 장을 뽑아

 서로의 때 낀 입술을 닦아주었다

 파도는 아무리 뽑아 써도

 쉽게 채워지곤 했으므로

 너와 나 사이에 드나들던

 거짓말도 참말도 점점 희미해졌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담장을 걷던 고양이가 같이 뽑혀와

 붉은 혀로 쓰윽,

 우리의 눈길을 핥고 가기도 했다

 망막에 낀 얼룩이 사라지자

 너는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서먹한 얼굴로 각자 짐을 챙겨

 그 낡은 여관을 빠져나왔고

 남겨놓고 온 우리는

 몇 겹의 파도가 천천히 지웠다

 

_길상호, 『우리의 죄는 야옹』 中 <물티슈>

 

2.

            한때 정말 많이 좋아했던 사람의 이름은 흔하고 남자도 여자도 쓰는 이름이라서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된 이후에도 한동안 그 이름을 만나게 되면 아팠지. 이름을 만나면 반사적으로 우리가 통과한 모든 순간들을 한번에 되짚었고. 좋았던 것들과 좋을 수 있었던 것들과 좋았으나 좋았으면 안 됐을 그 모든 것들을. 좋았던 것들은 좋았던 대로, 좋을 수 있었던 것들은 좋을 수 있었던 그대로 다 아팠어. 종종 울었고, 참고 참다 대답하지 않을 이름을 툭 꺼내보기도 했지만 그런다고 아픔이 작아지는 것은 아니었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어. 아픔도 나도 그냥 그 자리에 있었지. 이러다가 죽거나 최소 평생 앓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견디는 데 하루를 다 쓰는 날들만 길게 이어졌는데,

 

            그 이름을 만나면 아픔이 아니라 아련함을 느끼기 시작한 시점이 언제인지 아무래도 알 수 없군. 사랑에 얽힌 감정들은 왜 항상 뚜렷한 윤곽선이 없을까. 물론 아직도 그 이름은 쉽게 나를 찾아와. 여자 배우 이름, 남자 가수 이름, 남자 배우 이름, 여자 아이돌 이름, 일본어 초급 교재에 등장하는 캐릭터 이름..... 그러나 악착같이 이름 뒤를 따라붙던 감정의 요동이, 부질없는 후회가, 해갈되지 않을 미련이 언제부턴가 조용히 자취를 감추고, 남은 것은 어쩐지 어색하게 탈색된 추억들 뿐. 사건들을 그저 사실들로 건조하고, 주고 받던 말들을 한낱 작용과 반작용으로 환원하는 시간. 엄혹한 시간.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시간.

 

 

3.

            다시 그 사람을 만나면, 또다시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또다시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랑이 그때 그 사랑일까.

 

            가질 수 없었던 사랑 같은 건 없다. 가질 수 없는 사랑만이 있다. 가질 수 없는 사람을 운좋게 가졌더라도 가질 수 없는 사랑만은 여전히 가질 수 없다. 그 사랑은 그저 그리움의 자리에 있다. 느낄 수는 있어도 만질 수 없는 자리다. 내가 원하는 것이 행복했던 그 때의 그 사랑이라면, 그것은 다시 오지 않겠지. 어제들의 무덤 속에서 화려하게, 그리고 조용하게 풍화되겠지. 그러니까 나는 헛된 바람을 버리자. 어제보다 조금 더 마른 오늘치의 눈물을 뿌리고, 오늘보다 조금 더 마른 내일의 눈물을 예비하며 결국은 모든 슬픔이 서글픔으로 돌아서는 날을 나는 기다리자. 오늘의 사랑이 결국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사랑이라는 것을 나는 받아들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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