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는 돌 창비시선 331
송진권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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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울리는 노래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사랑해요, 아빠 엄마 우리 이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요." 라고 가사를 지으면 아무리 애타는 곡조에 얹어 노래해 본들 듣는 이의 마음자리를 요동시킬 힘이 모자라고, 그런 사실을 너무 잘 알기에 가수는 노래의 첫머리를 이렇게 가져 갈 것이다. "우리 집엔 매일 나 홀로 있었지, 아버지는 taxi driver, 어디냐고 여쭤보면 항상 양화대교, 양화대교......" 듣는 이의 경험, 현재의 기분, 그가 선호하는 장르 등 다양한 요인들이 뒤섞여 마침내 가수의 시도는 성공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두 번째 가사에 울지 않는 사람이 첫 번째 가사를 듣고 눈물바람이 날까?


펄펄 끓는 감정이란 틈만 나면 정상과 광기의 경계를 전복시키려 음모를 꾸미는 내란선동세력이므로, 상징계에 부역하는 말들은 우리가 그 말을 통해 주고받으려 한 펄펄 끓는 감정을 차갑게 식혀 정상의 틀 안에 박제로 놓고 누구라도 만질 수 있도록 전시하려 한다. 당신의 감정을 겨냥해 내가 날린 화살의 경로를 비틀어 내 말이 오직 사건이나 사태를 지시하도록 만든다. 사랑, 사랑해, 사랑하는 당신. 이런 표현들은 당신에게 온통 뜬눈으로 지샌 나의 수많은 밤들이나, 어둠이 끈적한 국물이 되어 방 바닥에 고일 때까지 얼어붙은 밤을 녹이던 내 뜨거운 갈망, 그 빈자리를 오직 당신의 이름을 천만번 부름으로써 메우느라 쉬어버린 나의 성대 같은 것들을 당신에게 하나도 알려주지 못한다. 심지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도 매끄럽게 전해지지 않는다. 당신이 확신하게 되는 것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다는 사건 뿐이다. 그리고 꼭 당신이 아닌 누구라도 내 말을 듣기만 한다면 당신이 얻은 확신과 거의 같은 양과 질의 확신을 얻는다. A가 B를 사랑한다고 말하는군. 나는 내 '사랑'을 '당신'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화살을 쏘지만, 화살이 꽂힌 과녁은 '사랑'도 아니고 '당신의 과녁'도 아니게 된다.


물론 때로는 사태를 전하는 말만으로도 감정이 움직인다. 결국 그 배에서 아무도 구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아무리 단순하게 표현해도 우리를 울린다. 뭣이 중헌지도 몰르는지 구조작업에 전념해도 모자랄 해경에 보고, 보고, VIP께 실시간 보고를 외쳐대는 청와대 비서실이나, 이럴 때일수록 정부와 언론이 하나로 똘똘 뭉쳐 해결해 나가야 한다며 기사를 넣으라 마라 해댄 어느 자전거 탄 국회의원의 이야기는 별다른 수사학적 기법을 동원하지 않고서도 내 입에서 욕지거리를 너끈하게 뽑아낸다. 그러나 나의 사랑이나 그리움 따위야, 내겐 태산일지라도 다른 이에겐 티끌같은 사건일 뿐이라서, 나는 사랑이나 그리움 같은 것을 말 해내는 방법을 알기 위해 매일 밤 시를 읽고 있다. 그리고 오늘, 또 좋은 방법 한 가지 찾게 되어 이 자리에 새겨 놓는다.




달 속의 할머니

- 뭇골1


  가을걷이 끝나고 마실 가는 할머닐 따라 성새미네 집엘 가면 동구나무 그림자 발꿈치에 눌어붙곤 했는데요 나무에 깃들였던 귀신이며 달별들도 따라붙곤 했는데요 우리가 지나온 길이 스르르 몸을 풀며 가뭇없이 어둠속으로 잠겨들고 웅크린 산들이 거멓게 일어서는 기척에 나는 자꾸 길섶 풀벌레 울음소리에도 웅크리며 할머니 치마꼬리에 엉겨붙곤 했는데요 어둠속에 묻힌 길이 이무기처럼 희게 희게 배를 뒤집고 떠오르면 꺼칠한 할머니 손 힘주어 잡은 내 손에도 어느새 땀이 배어나곤 했는데요 아귀아귀 달빛에 파먹힌 어둠을 따라 할머니 머리에 인 고구마넌출 내 목덜미에 늘어져 저 축축한 어디 먼 데 사는 귀신의 혓바닥일지도 몰라 오스스 무서리가 목덜미를 따라 내릴 때면 성새미네 처마에 켜놓은 백열등은 아귀의 눈처럼 희미하게 눈을 뜨고 흔들렸습니다.


  할머니들 고구마줄거리며 얼갈이배추를 다듬을 때 잎사귀 갈피갈피 성춘향이 쑥대머리 귀신형용이 포개지구요 승천 못한 이무기가 처녀 하나 잡아먹고 스르르 또아리 틀며 제 굴 속으로 들어가면 살풋 잠 깬 난 여기가 어느 큰 짐승의 뱃속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곤 했는데요 꽉 절은 담배 연기에 눈 못 뜨고 갈비뼈 같은 서까래 세어보다가 할머니가 나를 깨워 업고 머리까지 할머니 옷에 들씌워진 채 툇마루에 나왔을 적엔 귀뚜라미 여치 우는 소리가 씀벅씀벅 마당에 꽉 절었는데요 신발에 든 귀뚜라미 털어내고 신을 신고 돌아올 때는 우리가 초저녁에 걸어온 길이 허물 벗은 뱀같이 말갛게 떠오르곤 했습니다 꼬꼬닭도 검둥개도 울지 않은 할머니 등에 귀를 대고 뜨듯한 소리의 울림에 까뭇까뭇 잠들었는데요


  우리가 걸어온 길들이 스르르 몸을 숨기고 어디만치 왔나 차돌멩이 돌았다 모새방 지났다 어디만치 왔나 나를 내려놓은 할머니가 둥근 달무리의 문을 열고 가뭇없이 달 속에 들어가 앉으시고 할머닐 쳐다보며 시악을 쓰고 울어도 할머닌 다시 나오시질 않고 할머니가 풀어내놓은 고구마줄거리 넌출넌출 길게 난 길을 쫓아 여기까지 온 나는 시방 쪼그리고 앉아 사방천지 이무기가 뿜어내놓은 독 같은 부연 세상에 혼자 마냥 패악을 떨며 돌팔매나 던지는 것인데요 장지문 삐걱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어디만치 왔나 어디만치 왔나 불러도 대답도 없이 어여 가거라 아가 어여 할머니는 손을 내저으며 가라고 가라고 홰홰 손을 저으시는 것입니다.

- 54~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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