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에움길

 

 

1

 

도서관에서는 가끔 재미난 일이 벌어진다. 대체로는 사람에 관련된 일이다. 언젠가는 꼭 도서관에서 마주친 인물 군상과 그들이 촉발한 사소하고 소소한 사건들에 대한 에세이집을 출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뻔 했을 정도다. 할 뻔 했습니다. 하지 않았다구요.

 

syo가 다니는 도서관은 대구에서 가장 큰 시립도서관으로 2층에 종합자료실, 3층에 인문자료실이 배치되어 있다. 한 주에 한번 꼴로 가는데, 도서관 내 동선은 거의 일정하다. 2층 반납, 3층 반납, 3층 대출, 2층 대출, 마지막으로 다시 3층 대출. 3층 대출이 두 번인 이유는 3층과 2층의 신간 서가를 한 번씩 다 들여다보고 나서야 어떤 아이들을 업어갈지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3층에서 반납을 마치고 나면 가장 가까운 자리에 겉옷과 가방을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서가 탐색에 나선다. 이번 사건은 바로 이 지점에서 벌어졌다.

 

syo가 가방을 내려놓은 맞은편에는 할아버지 한 분이 오른손 아래는 노트를, 왼손 아래는 한자가 득시글거리는 책 한권을 깔고서 서릿발 같이 꼿꼿한 자세로 필사에 집중하고 계셨다. 회색 바탕에 흰색 선들이 직교하는 무늬의 빵모자를 쓰셨는데, 그걸 그대로 들어 올린 다음 갓이나 탕건으로 바꿔드리면 순식간에 도서관이 도산서원이 될 것 같은 그런 노론소론한 인상이시랄지, 태풍이 몰아쳐도 읽던 책을 다 읽기 전에는 빨래를 걷지 않을 것 같은 매란국죽한 지조가 엿보였달지. 그런 할아버지였으나 syo가 내려놓은 가방을, 정확히는 가방에 붙어 있는 붉은색 핀버튼을, 더 정확히는 그 붉은 핀버튼 속에 그려진 수염 난 세 남자의 정체를 식별하고 난 후에는 마치 단발령 선포 소식을 접한 구한말 서당 훈장님 같은 표정이 되어 가방과 syo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세 번씩 바라보시었다. 못 본 척 하고 돌아섰지만 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이런 걸 가방에 달고 다니는 놈이 있다는 사실은 누군가에겐 굉장히 불편한 일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특정 지역에는 불편할 사람이 유독 많을 수도 있고.

 

요기 요 빨간 것(출처 : 레닌전집 페이스북 페이지)

 

네 이놈, 지금 어느 안전이라고, 당장 그 흉물스러운 것을 떼어버리지 못할까! 라고 저쪽에서 선빵을 날려 오지 않는다면 그저 불편한 눈길을 던지는 것을 가지고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걸 잘 알지만 이쪽은 또 원체 못되 쳐먹은 성품이라 짓궂은 장난을 치고 싶은 생각이 스멀스멀 샘솟는 것이다. 그리하여 빌릴 생각도 없었던 이 책을 굳이 빌려서 책상 위에 떡, 할아버지가 제목을 잘 볼 수 있는 각도로 내려놓고서는 총총히 2층으로 내려갔다.


이 책

 

2층에서 몇 권을 빌려 다시 올라와보니 할아버지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떠나신 뒤였다. 사특한 syo의 군세를 척살하고 무너진 나라의 법도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의병을 모집하러 가신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그나저나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이제 이런 심보는 좀 고쳐야 하지 않을까.

 


  왜보통 내가 누구한테 상처를 줬을 땐 나도 모르게 그러는 경우가 많잖아물론 작심하고 할퀴고 싶을 때도 있지만 나는 사람들이 언제나 타인을 찢어발길 준비를 하고 산다고 생각하지 않거든?

 

  그렇다고 해도 내가 부지불식간에 타인에게 상처를 입힌 게 무죄가 되진 않아상처를 받은 사람이 과민한 게 아니라거기까지 미처 배려하지 못한 내가 무심했던 거라고 생각하는 게 현대 지성인의 자세 아닐까?

  

  그러니까 모르는 건 죄야.

  늘 죄인의 마음으로 살아.

김나연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 

 

 

2



이런 유형의 갖가지 사건들을 겪으면서도 끝끝내 불온한 핀버튼을 포기하지 않을 정도로 맑 선생님을 사랑하는 syo지만, 유감스럽게도 선생님은 인간적으로는 빼박 하자다. 무슨 하자하자 열매라도 드신 것 마냥 이 주제로 몇 번을 이야기해도 중복되지 않을 만큼 하자 에피소드가 풍부하신데, 이번 시간에 소개해드릴 에피소드는 충격! 맑스-엥겔스 결별설?’ 되겠습니다.

 

엥겔스 선생님은 보기 드물게 훌륭한 남자다. 당최 왜 이런 분이 저런 콧수염 달린 멧돼지 같은 불한당이랑 절친을 맺었는지, 전생에 무슨 업을 쌓았기에 돈 뜯겨(20세부터 계산하여 죽을 때까지 맑스가 쓴 돈의 과반은 엥겔스의 호주머니에서 나옴), 글 뜯겨(맑스가 악플 배틀이나 뜨며 재능을 낭비하는 동안, 마감이 코앞에 닥친 맑스의 원고는 엥겔스의 펜끝에서 나옴), 명예 뜯겨(맑스의 부인 예니가 임신하여 배가 부른 동안, 그 집 하녀 헬레네 데무트도 어쩐지 임신을 하였는데, 그 아이 아버지가 엥겔스인 것으로 쳤음’)..... 그러나 엥겔스는 일생 그런 대접을 당하면서도 딱 한번을 제외하면 결코 맑스를 원망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딱 한번이 이번 한번인데,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공장주의 아들이었던 청년 엥겔스는 공장 노동자 메리 번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교육받은 중간계급, 부르주아의 아들은 문맹의 노동자 여인을 그 여인이 죽는 순간까지(아마 엥겔스가 죽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사랑했다. 그 슬픈 순간은 18631월의 어느 날이었다. 마르크스에게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무어에게,

  메리가 죽었다네메리는 어젯밤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네리지가 자정 직전에 잠자리에 들다가 메리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았네이미 메리는 죽은 뒤였지아주 갑작스러운 일이었네심장마비나 뇌졸중 발작인 것 같아나는 오늘 아침에야 이야기를 들었네월요일 저녁까지는 아주 건강했는데내 감정은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네그 가엾은 여자는 온 마음으로 나를 사랑했는데.

  FE

 

그리고 며칠 뒤, 엥겔스에게 답장이 도착했다. 그 편지는 위로라는 목적에 걸맞게 메리가 죽었다는 소식에 나는 경악했네. 그렇게 착하고 재치있고, 또 자네 곁에서 늘 마음을 써주었는데.”로 시작하긴 했으나 이내, 도대체 요즘 우리는 왜 이렇게 불행한가, 나는 요즘 갈피를 잃었다, 기금을 모아서 어떻게 해보려 했는데 망했다, 하도 외상을 져서 이제 아무도 외상을 안 준다, 애들 학비랑 집세 독촉이 끝도 없다, 이런 마당에 내가 어떻게 일을 계속 하겠는가, 따위의 길고 익숙한 신세한탄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다시 이런 때 이런 참담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매우 이기적인 일이지.” 라는 한 줄을 보태어 스스로의 이기심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스스로의 이기심을 부정한 다음, 이게 다 내 불운을 알려 자네의 불운을 덜어보려는 동종요법의 일환이라는 식으로 깝치기 시작하더니, 전당포에 맡겨져 있는 자신의 옷들과 신발들에 대한 TMI를 제공하고, 이내 다음과 같은 기상천외한 멘트로 편지를 마무리한다. “메리가 아니라, 어차피 병도 들고 또 살 만큼 산 우리 어머니가 죽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 환경의 압박에 시달리는 문명인의 머릿속에는 별 이상한 생각이 다 찾아온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 안녕.”

 

아무런 답장을 받지 못한 닷새 동안, 아마도 맑스는 심장이 한껏 쫄깃쫄깃했을 것이다. 혹시, 엥겔스가 빡친 것은 아닐까? 내가 편지에다 무슨 실수를 한 건 아닐까? 어쩌지, 이틀만 엥겔스가 연락을 끊어도, 사흘 뒤부터는 밥을 굶어야 하는데, 아아아 나는 어쩌지...... 그러던 와중에 마침내 엥겔스로부터 답장이 도착했다. 늘 다정한 별명, ‘무어에게로 시작했던 기존의 편지를 떠올리면서, 맑스는 첫 줄부터 식은땀을 흘렸을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이번에는 내가 당한 불행과 자네가 그 일을 바라보는 차가운 태도 때문에 자네한테 더 일찍 답장을 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네자네도 그럴 만하다고 생각할 걸세내 모든 친구들과 그저 알고 지내는 사이일 뿐인 속물들까지도 이번에 나에게 깊은 충격을 준 이 일을 두고 내가 바랐던 것 이상으로 나에게 동정과 우정을 보여주었네하지만 자네는 이것이 자네의 냉정한 태도의 우월성을 보여주기에 적당한 기회라고 생각한 모양이지그럼 그렇게 하게나! 

 

다 읽은 편지를 탁자에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내 쉰 순간부터, 맑스 인생 최악의 몇 주가 시작된다. 그 와중에 예니는 맑스에게 왜 우리 형편이 이 모양 이 꼴인 것을 엥겔스에게 더 일찍 알리지 않았냐고 비난하고, 맑스는 엥겔스가 무슨 ATM기냐고 맞받는다(누가 할 소리를). 결국 부부싸움은 맑스가 법정에서 파산신고를 해야 한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세부사항으로 첫째, 딸들은 가정교사 일자리를 알아본다. 둘째, 충실한 하녀 헬레네는 다른 곳으로 일자리를 옮긴다. 셋재, 맑스와 예니는 막내딸 투시를 데리고 빈민 구호시설로 들어간다. 이것이 런던의 맑스 패밀리가 내린 결론이었다. 아마 실제로 그렇게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기보다는, 엥겔스에게 보낼 사과편지에 그런 비참한 결정사항들을 첨부함으로써 동정을 사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의심할 만한 대목이다. 맑스는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낸다.


  자네에게 그런 편지를 쓰다니 내가 크게 잘못했네사실 편지를 보내자마자 후회를 했다네그러나 내가 그런 편지를 쓴 것은 절대 냉정해서가 아닐세내 아내와 자식들이 증언을 해주겠지만자네 편지가 도착했을 때(아침 일찍 도착했네나는 나에게 가장 가깝고 가장 소중한 사람이 죽은 것처럼 비탄에 잠겼다네그러나 저녁에 자네한테 편지를 쓸 때는 극도로 절망적인 상황 때문에 압박을 받고 있었네집주인은 고물상을 집 안에 들여보냈고정육점에서는 외상값을 받으러 왔고석탄과 양식은 떨어져가고어린 예니는 아파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네이런 상황에서 보통 내가 기댈 곳이 냉소주의밖에 더 있겠나. 

 

한 권이 800페이지가 넘는 책 50권으로 이루어진 마르크스-엥겔스 전집 속에 있는 서신들을 싸그리 뒤져 보아도, 맑스가 누군가에게 진심을 다해 사과하는 편지는 이것 이외에는 찾아볼 수가 없다는 후문이다. 그리고 도대체 호인인지 호구인지 알 수가 없는 엥겔스는 평소와 별로 다를 것도 없는 이 편지에 또 마음을 풀고 다정하게 화답한다.

 

  그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해줘서 고맙네이제 자네도 자네의 지난번 편지가 나한테 어떤 인상을 주었는지 알게 되었군한 여자와 오랫동안 산 사람이라면 그 여자의 죽음에서 엄청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네나는 그 여자와 함께 내 젊음의 마지막 자취를 묻어버린 느낌이라네자네 편지가 왔을 때는 아직 장례를 치르기 전이었네솔직히 나는 일주일 동안 그 편지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네머리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더군하지만 신경 쓰지 말게자네의 이번 편지가 모든 것을 씻어주었네나는 지금 메리를 잃는 과정에서 내 가장 오래 되고 가장 좋은 친구도 함께 잃지 않은 것이 기쁘다네.


어쩐지 안심의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있는 맑스의 모습이 떠오른다. 살았다! 호구가 돌아왔다! 엥겔스는 즉시 맑스 가족을 고난과 멸시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낸다. 자기도 여윳돈이 없는 처지라, 아버지 회사의 서류함에서 1백 파운드짜리 수표를 훔쳐 배서하는 방식으로......

 

보면 볼수록 하자. 그러나 사랑하는 하자. 아니, 어쩌면 저렇게 하자라서 더욱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치명적인 맑스의 더티 섹시 그물에 걸려 파닥거리는 한 마리 나방 syo. 아니지, 내 옆에서 파닥거리고 있는 저 거대한 장수풍뎅이는 혹시 엥겔스 선생님이 아니신지. 하자라고 실컷 욕하면서도 좋아하는 이 헤어날 수 없는 감정의 요란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당신은 아십니까, 엥 선생님......

 

 

 

3



이 안에 네 개의 이름이 있다. 김금희, 박상영, 강화길, 김봉곤. syo는 언제나 그들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그들의 글을 받아 읽기를 항상 앙망하옵는데, 그러다보니 어쩐 일인지 syo는 알라딘에서 이런 사람이 되었다.

 


이건 무슨 합성같군.

 

이 네 작가 중에 두 명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책이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빌리는데, 심지어 그 중 하나가 김금희라면 사실상 나머지 이름은 또 거들 뿐이다. 울면서 빌린다. 흑흑, 죄송합니다. 사지를 못하고 빌려 읽어서 죄송합니다......

 

 

 

4

 

그러나 사실, 이런 날 개구진 글을 올리는 것은 썩 개운치 않다.

  

젓가락내 마음은 황학주

 

 내 마음은 오래도록 바짝 마른 것에 가 있었다

 

 고아원이 밤의 굴뚝을 울려대는

 새 울음소리 뒤로 옮겨가고 없는 밤에

 나는 시름해진 꿈들을

 곧잘 눈에 잘 띄는 선반에 올려놓곤 하던

 젓가락처럼 몸이 긴 원장을 생각한다

 

 이런 날 내 마음은

 물배급차를 끌고 다닌 길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입에 물려 있던 물을 간신히 다른 입에 밀어 넣던 아이의

 희미한 이름도 간직하고 있다

 별이 두 개나 세 개씩 하룻밤에 떨어지면

 흙칠을 한 호수 옆에 묻어야 했던 그 길을

 

 가지고 있다 내 마음은

 물이 없어 문을 닫은 고아원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주면

 기력을 다한 살핏한 눈빛을 내 귀에 대고

 고맙다고 하던 아이는

 쪼개기 전의 나무젓가락처럼 두 다리가 바닥에 붙어 있었다

 

 지평선에 해 빠질 동안

 아이들을 세상 밖으로 가만히 달아나게 해주고 싶었다

 마른 발등이 병실을 옮기는 긴 허방 붉디붉어도

 우리는 무비나 에이즈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지만

 

 옮겨 심은 나무들이 더 이상 자라지 않아

 어느 귀신이 그걸로 새 젓가락을 만들고 있으리라

_ 황학주, 「젓가락, 내 마음은」전문

 

그날, 나는 파주에 있었다. 다 먹지 못하고 잘라 넣어놓은 생일 케이크가 아직 냉장고에 있었다. 남쪽 바다에선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시각 서울 한복판에서도 역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급하게,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있을 사랑하는 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렇지 않아도 보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사람이 다니던 학교에서도 여행을 계획 중이었을 것이다.

 

파주에 있는 한 원룸에서, 나는 다리를 끌어안은 자세로 바닥에 앉아 남쪽 바다를 생각했다. 그 바다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그 사람이 데리고 떠난 아이들이 갇혀 있는 상상을 했다. TV로 쓰던 모니터 속에서 배는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고, 방바닥 위의 나도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그날을 이렇게 기억한다. 저녁이 되자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와 불 꺼진 방 가운데 앉은 나를 가만히 안아 일으켜주었다. 우리 두 사람은 울지는 않았지만 이미 울고 온 마음이었다. 그날은 웃지 않았다. 그날은 유독 꼭 껴안고 잠이 들었다. 창문을 꼭꼭 닫아도 어디선가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빨래가 밤새 다 마르지 않았다. 아침에는 달리러 나가지 않았다. 제일 먼저 한 일은 TV를 켜는 일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학교에 가고, 나는 남은 케이크를 마저 먹었다. 냉장고 속에 오래 든 케이크는 축축했다. 다시 울고 싶었다.

 

잊지 않겠다는 말을 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내가 잊지 않겠다고 한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날을 저렇게 기억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상상 속 바다에 빠뜨려보지 않고서는 두려워하거나 슬퍼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었으므로, 내가 잊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은 아이들의 이름이나 사건의 진상 같은 것들이 아니라, 그저 그날 나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오늘이 그날이라고 누군가 말해주기 전까지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듣고 나서 제일 처음 떠올린 것도 다름 아닌 그날의 나였다. 그날 울지 못하여 차마 버리지 못한 슬픔 속에 웅크리고 있던 나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상상 속의 서러운 나와, 나와, 나와, 나와, 나였다. 그 모든 나를 불러내 하나하나 다시 거치고 난 후에야, 거짓 없이 슬픈 눈을 하고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내가 그런 사람이다. 남의 일에 진심으로 슬프기 위하여 먼저 해야 할 내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이다. 노란 리본을 가방에 걸고 다니기에는 부박하고 비루먹은 마음이다.

 

다시 오늘이 와도, 아마 나는 그럴 것이다. 내 눈을 먼저 적신 다음에야 그 사람들을 기릴 것이다. 나는 아직 슬퍼하는 방법을 더 많이 배워야 한다. 돌아가지 않고 바로 가기 위해서. 상상하지 않고도 타인의 슬픔에 기꺼이 몸을 적실 수 있기 위해서.


 

 "한 가지만 더 봐야겠어요."

 "서둘러주세요."

 "10분만 주세요."

 "알았어요."

 내가 막 돌아서려고 할 때그가 다시 말했다.

 "그냥 모든 걸 잊으세요그게 더 쉬워요."

 "뭐가 더 쉽다는 말이죠?"

 그가 담배를 창밖으로 던지며 말했다.

 "살아가는 것이요얼마나 더 봐야 합니까내가 당신의 수고를 덜어드리지요당신이 기억하는 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요잊는 게 최선입니다."

 "나는 더 이상 잊고 싶지 않아요. 10분만 주세요."

할레드 호세이니연을 쫓는 아이 

 

한 인간의 내적 삶에는 그가 포함된 사회의 온갖 감정의 추이가 모두 압축되어 있다한 사회에는 거기 몸담은 한 인간의 감정이 옅지만 넓게 희석되어 있다한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린 슬픔은 이 세상의 역사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믿어야 할 일이다한 인간의 고뇌가 세상의 고통이며세상의 불행이 한 인간의 슬픔이다그 점에서도 인간은 역사적 동물이다.

황현산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 읽은 ---

마르크스 평전 / 프랜시스 윈 지음

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 / 김나연 지음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 / 이종산 외 지음


 


--- 읽는 ---

인간 루쉰 / 린시엔즈 지음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고미숙 지음

루쉰 문학선 / 루쉰 지음

자본을 넘어선 자본 / 이진경 지음

저녁의 연인들 / 황학주 지음

꽃을 보듯 너를 본다 / 나태주 지음

레닌 평전 1 / 토니 클리프 지음

도시재생 이야기 / 윤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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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4-16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제로 주변에 맑스 같은 민폐형 인간이 있다면 참 싫을 것 같습니다만... 엥 선생님은 볼수록 정말 대인배 같습니다.

syo 2019-04-16 17:11   좋아요 1 | URL
정말 그렇습니다. 세상에 엥 선생님만 있고 맑 선생님이 없었더라면 <자본> 같은 위대한 책이 태어나지 못했겠습니다만, 그건 맑 선생님만 있고 엥 선생님이 없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습니다.

붕붕툐툐 2019-04-16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마주친 할아버지 묘사에서 빵 터졌네요~ 도산서원이라니...하하핫! 그나저나 대구의 저 도서관에 가면 syo님을 뵐 수 있는 겁니까?

syo 2019-04-16 19:38   좋아요 0 | URL
ㅎㅎㅎ 화요일의 아침 시간대에 저 도서관에 오시면 야생의 백수포켓몬 syo를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2019-04-16 2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4-18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드스타킹 남성 멤버 중에 철학을 혼자 공부하는 분이 있어요. 일전에 한 번 언급했을 거예요. 헤겔을 공부한다고요. 지난달에 중앙도서관에 갔는데, 그 분을 우연히 만났어요. 제가 뭐했냐고 물어봤는데, 열람실에서 책을 읽었다고 했어요. 아마도 두 분, 중앙도서관을 거닐다가 한 번이라도 스치듯 마주쳤을 거예요. 최근에는 독서실에 등록해서 프로이트 전집을 읽는 중이래요... ㅎㅎㅎㅎ

syo 2019-04-19 09:27   좋아요 0 | URL
그분의 열정과 공력에는 항상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syo가 언제나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꼭 전해주시길 바랍니니다 ㅎㅎㅎㅎㅎ

NamGiKim 2019-04-21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오쩌둥 평전 작년 이맘때쯤 공익근무하며, 근무시간에 소방서에서 읽었습니다. 물론 넘사벽 분량이린 읽는데 시간이 꽤나 걸렸지만요.

syo 2019-04-23 13:27   좋아요 1 | URL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필립 쇼트의 마오쩌둥 평전이 새로 나왔잖아요.
NamGi님께서 그것도 읽고 저 평전이랑 비교해서 페이퍼를 올려주셨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쪽 계통으로는 또 NamGi님께서 탄탄하시잖아요.

그랬는데 복학을 하셔서 시간이 없으시군요...... 슬픈 소식 감사합니다.....

NamGiKim 2019-04-21 1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요즘 학교다니니 책을 읽을일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ㅜㅡㅜ

NamGiKim 2019-04-21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닌전집 페이스북 페이지 저도 좋아요 해놓았는데.ㅎㅎㅎㅎㅎㅎㅎ

2019-04-21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3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haeg 2019-04-23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 님이라면, 사지 않고 빌려 읽으셔도 작가님들이 좋아하실 듯 합니다 :)

syo 2019-04-23 13:32   좋아요 1 | URL
아이구 ㅎㅎㅎㅎ 감사합니다.....만, 아마 아닐 걸요? ㅎㅎㅎㅎ

어떻게 댓글로라도 한 번 인사를 튼 작가님들의 책은 사서 읽는 주의긴 한데,
아는 작가님들이라 해 봐야 한 손에 꼽다 보니 그런 주의가 있으나 마나네요. 으하하하.

추풍오장원 2020-01-02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재밌는 글을 이제야 읽는군요^^ 뱃지는 켄터키후라이드치킨 할아버지 같은데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