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 선생과 맑 선생

 


1


비가 펑펑 내린다. 아유 좋아.

 



2



쪼개고 쪼개서 읽기를 며칠, 겨우 150쪽 남짓 읽었지만 정작 루쉰 선생은 아직 루쉰이 되기도 전이다. 장서우(樟壽)로 불리던 어린 시절을 청산하고, 세상에 나가 수런(樹人)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집안은 애저녁에 망했다. 과거에 급제해 집안의 자랑이 되었던 할아버지는 뇌물을 받고 다른 사람의 과거 입격을 돕는 부정을 저지르다 삭탈관직 당했다. 그때 이미 아버지는 과거에 도전하였으나 결국 급제하지 못해 낙오자의 인생을 살다 술로 몸을 망치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이었으니 과거라는 것에 장서우가 학을 뗐을 만도 하다. 결국 인간은 기술을 배워야 인간이 된다는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의 금쪽같은 말씀처럼, 수런은 우선 함선기관사가 되고자 수군학교에 들어갔다가, 학교에 실망하고 이번에는 광산철로기술자가 되고자 광무철로학당에 들어갔다가, 학교가 폭망하고 마침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길이다.

 

여기까지 그의 인생도 참 파란만장하지만, 이제부터가 우리가 잘 아는 루쉰, 펜이 칼보다 강함을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인간 루쉰의 참 일대기가 펼쳐질 것이다. 난 이걸 왜 알고 있지? 알고 있는데 왜 읽고 있지? 허허허.

 

 

 

3


 

한편 이쪽 역시 기어가는 속도로 250쪽 남짓 읽었는데, 마르크스는 사생아를 만들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쌩을 깠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아이가 개성적이다 못해 독창적이기까지 한 제 아버지의 외모를 복사해 붙여 넣은 고로, 뉘집 자식인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고 전한다.


마르크스를 참 좋아하긴 하는데 그런 내 마음과는 별개로 이 양반은 참 하자다. 싸움은 참 좋아하고, 말로는 당할 자가 없다보니 어지간하면 이긴다. 필요하다 싶으면 상대의 견해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기도 하고, 이기기 위해서라면 거친 인신공격도 마다하지 않는다. 엊그제까지 둘도 없는 친구래 놓고, 한 번 틀어졌다 하면 언론과 출판계에서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사람 하나 순식간에 조져놓는다. 마르크스의 치명적인 펜놀림에 짓밟혀 인류 역사상 유래가 없을 반동 핵폐기물로 전락한 인간이 한둘이 아니다. 웬만하면 모르고 지내고 싶은 참 피곤한 성격이다


친구로서 하자라면 남편으로 두고 지내는 것은? 그렇다면 그 생은 스킵하고 싶다. 마르크스 본인이 자조 섞인 어조로 인정하듯, 그가 제일 잘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생식이다. 발효곡물 마시는 그 생식 말고 하는 거...... 방도 두어 개 뿐인 작은 집에 하녀도 살고, 이미 낳아놓은 애들 세 명이 지치지도 않고 좁아터진 집구석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는데도 어떻게든 기회를 잡아 또 애를 만든다. 하녀가 세 아이를 데리고 산책이라도 나가면 여지없이 생식을 시도한다.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가면? 그래도 생식이다. 하녀가 있으니까. 기왕 무진장 낳았으니 부족함 없이 기르기라도 하면 이런 말을 안 할 텐데, 아픈 아이 치료할 돈은커녕 결국 죽은 그 아이의 관 값조차 없어 어딘가에서 꾸어야 했을 만큼 경제적으로 무책임한 가장이었다. 한평생을 그랬다. 공산주의의 위대한 아버지는 자식에겐 별 볼일 없는 아버지였다.

 


 

4



새삼 느낀 거지만, 예전에는 지금보다 전례典例/前例를 중요시 여겼다. 신기할 정도다. 실록편찬 자체가 굉장히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훌륭한 인간으로 남고 싶은 최고 권력자의 압박에 맞서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고집은 사관에게는 목숨에 직접 관련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다. 그만큼 전례를 크고 무겁게 생각했기 때문인 듯하다. 가령, 부인 장경왕후의 상제를 끝마치기도 전에 새장가를 들고 싶었던 중종이 가장 먼저 명한 일이 전례가 있는지 상고詳考해보라는 것이다. 전례가 있으면 비벼볼 수 있고 없으면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물론 나는 나고 옛날은 똥이라며 밀어붙이는 인간형은 언제나 있다). 잘된 사례와 망한 사례를 참고하여 일을 되게 만드는 방식으로 과거를 이용하는 요즘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옛 사람들이 시경詩經에 어쩌고 서경書經에 저쩌고 하며 오늘날 보면 택도 아닌 말로 제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5



  써놓고 보면 볼품없는 글이 대부분입니다특별한 사건도 없고뚜렷한 주제나 교훈도 없습니다종종 '이런 글을 왜 쓰냐?'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잊혀지는 것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보통 그런 것들은 근사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도리어 초라하고 남루한 경우가 많아굳이 들여다보고 싶어지지 않는 것들입니다문득 그 부재함을 깨닫지만특별한 감정은 생기지 않습니다없어져도 아쉽지 않은혹은 없어질 만했던 것들이라는 생각도 듭니다그래서 더욱 신경이 쓰입니다.

  저 역시 머지않은 미래에 자연스레 잊혀질 것이라는 걸 예감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그렇게 생각하니 저는 잊혀질 준비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마음의 준비 내지는 예행연습 같은 것이겠지요.

김보통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


하필 발췌한 부분에서 중복 피동이 적발된 마당이라 이런 말을 하기 살짝 민망한 감은 있지만, 스스로 볼품없는 글이라 낮잡는 것을 겸손이 아니라 사실이라 믿기는 어려울 정도로 김보통 작가는 글을 잘 쓴다. 일단 온 세상이 칭송해 마지않는 간결한 문장, 쉬운 글을 구사하는데, 그 와중에 잘 웃긴다.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웃기는 것도 물론 어렵지만 간결한 문장을 구사하는 일은 syo에겐 특히 어렵다. 왜 안 되나 몰라. 늘 그걸 부러워하면서도, 늘 내 문장이 지저분하게 꼬불꼬불 길어진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안 되는 건 안 된다. 대체 안 되는 건 왜 안 되지? 안 되는 게 되는 게 되면 왜 안 되지? 안 되는 게 되는 게 안 되는...... , 알겠다, 나는 왜 안 되는지.

 

세상에는 세 등급의 장난꾸러기(이하 장꾸)가 있다. 평범한 장꾸는 장난의 대상을 빼고 모두를 즐겁게 한다. 그리고 뛰어난 장꾸는 장난의 대상조차 포함해 온 세상을 즐겁게 한다. 그러나 구린 장꾸는 지 혼자 재밌다. 그걸 알면 관둬야 되는데, 또 지는 재밌는지라 관두기가 어렵다. 그러니까 간결한 문장을 구사하기에, syo는 너무나도 장꾸인 것이다. 그것도 평장꾸도 뛰장꾸도 아닌 구장꾸...... 이러나저러나 소인배는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러고 보면 필력의 지존, 이덕무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 굴리기를 좋아할 뿐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용 또한 여의주를 자랑하거나 뽐내면서 저 말똥구리의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_선귤당농소

 

내가 너희를 비웃지 않을 테니, 너희 또한 그 말똥 같은 글이나 굴려가며 분수에 맞게 살라는 뜻으로 읽힌다.

 

 


--- 읽은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 9 / 박시백 지음

군자를 버린 논어 / 공자 지음, 임자현 옮김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 / 김보통 지음

논어를 읽기 전 / 정춘수 지음

 

 

--- 읽는 ---

인간 루쉰 / 린시엔즈 지음

마르크스 평전 / 프랜시스 윈 지음

단박에 조선사 / 심용환 지음

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 / 김나연 지음

이토록 보통의 / 캐롯 지음

친절한 강의 대학 / 우응순 지음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 / 이종산 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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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04-09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 혼자라도 재미있으면 경지에 오른 거죠. 불여락지자의 그 락지자네. 호우 좀 즐길 줄 아는 자인가...

syo 2019-04-09 21:30   좋아요 1 | URL
그렇게 보면 또 그렇군요. 은근 든든하다.....

독서괭 2019-04-09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르크스가 그렇게 왕성한 사람이었나요? 게다가 무책임.. 허허
syo님이 구장꾸라니 무슨 그런 말씀을! syo님 글 읽으며 많이도 웃은 저는 뭐가 되나요!!

syo 2019-04-13 13:10   좋아요 0 | URL
독서괭님과 저의 장난질 코드가 맞아서? ㅎㅎㅎㅎㅎ
힘드시겠어요, 이런 비주류 코드를 지니고 사신다는 것이.....-_ㅠ

카알벨루치 2019-04-09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식이다 ㅋㅋㅋ

syo 2019-04-13 13:11   좋아요 0 | URL
맥락과 ‘ㅋ‘의 갯수에 따라 숨어있는 무의식을 해독하는 방법이 무궁무진하다고 합니다.
ㅋㅋㅋㅋ

2019-04-10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13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9-04-11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르크스 평전 다 읽고 하염없이 마르크스 까고 싶네요. 생식이라니... 생식 ㅠㅠ

syo 2019-04-13 13:14   좋아요 0 | URL
우리 집 자식으로 태어나서 다행이랄까요.
마르크스는 그냥 타인으로서 따로 좋아하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