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기다리는 밤

 

 

1

 

나는 밤을 편애하는 사람들이 사는 별에서 왔다. 어둡고 추운 밤을 오래 들여다보는 일은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들에 어둠이 자욱하면 총을 든 나는 도화지처럼 서서 밤이 내 몸에 그림 그리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밤이 들고 오는 크레파스는 사실 매일 조금씩 다른 검정색이었다. 1월의 크레파스가 보기에는 가장 좋았다. 차갑지만 쨍한, 총을 쏘면 맑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질 것 같은 검정이었다. 하늘과 땅이 한 색이었다. 이 밤을 사랑하면 세상의 모든 밤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더라도 최소한 견뎌낼 수는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눈동자가 비교적 검은 아이에서, 머리칼이 유난히 검은 어른으로 자랐다. 밤은 자꾸 나를 덧칠하고, 나는 밤을 사랑하고 닮아갔다. 사랑은 밤에 깊어지고, 나는 밤이면 사랑을 자꾸 덧칠한다. 낮에는 읽지만, 밤에는 읽고 쓴다. 낮에는 잠들지만, 밤에는 잠들고 꿈을 꾼다. 밤은 내게 더 많은 숙제를 떠안긴다. 밤이 없는 나는 불완전하다. 나는 밤에 더 많이 내가 된다.

 

그럼에도 가끔은 밤이 무거워 마음이 결린다. 밤의 독서는 생의 어두운 면과 조응한다. 자정이 지나면 나는 불안과 불행을, 아픔과 슬픔을 탐지하는 눈을 크게 뜬다. 낮이라면 언뜻 지나쳤을 불안과 남의 것인 불행이 자꾸만 발목을 잡아채고, 등장인물의 아픔 위로 나는 넘어져 그들의 슬픔을 세심히 번역한다. 그렇게 지어진 글들이 실은 죄 남의 것들이다. 번안된 노래가 심장에 명중하기가 어렵듯, 그렇게 만들어진 글들은 먼지로 만들어져 부유하고, 쌓이고, 부패하고, 잊힌다. 현명한 사람들은 달빛 아래서 쓴 글은 햇볕에 말리기 전에는 내놓지 말라고 권한다.

 

그럼에도 밤에 무엇인가를 끄적대는 일은 내게 있어 혈족의 계보 같은 것이라, 거절하고 거절해도 도달하고야 마는 하구 같은 곳이라, 나는 오늘도 무던히 그 길을 간다. 조금 지나면 비가 내릴 것이라 한다.

 

사흘의 낮을 지나면 나흘의 밤이 이어지는 일주일로 만들어진 우주에 살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런 별이 은하계 어딘가엔 있을 것이다. 가보지 않은 별이 가끔 그립다.


나는 어째서 이토록 그 강을 사랑하는 것일까 .탁하게 흐리고 뜨뜻미지근하던 그 강물에 왜 이리도 알 수 없는 그윽함을 느끼는 것일까나 자신도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다만 오래전부터 이 강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은말로 설명하기 힘든 위안과 고요를 느꼈다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멀어져그리움과 추억으로 만들어진 나라에 들어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나는 세상 무엇보다 스미다강을 사랑한다.

아쿠타카와 류노스케나의 스미다강

 

겨울비 박준

 

비는 당신 없이 처음 내리고 손에는 어둠인지 주름인지 모를 너울이 지는 밤입니다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광장으로 마음은 곧잘 나섰지만 약을 먹기 위해 물을 끓이는 일이 오늘을 보내는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한결 나아진 것 같은 귓병에 안도하는 일은 그 다음이었고 끓인 물을 식히려 두어 번 저어나가다 여름의 세찬 빗소리를 떠올려보는 것은 이제 나중의 일이 되었습니다 

 

 

 

2



한참을 달리고 나니 마음이 가라앉아서어느 집 대문 그늘 아래수거를 기다리고 있는 쓰레기들 뒤에 앉았다나는 울지 않았다더 울 필요도 없었다나는 두 눈을 감고 창피한 마음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나는 상상 속의 경찰을 불러냈다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경찰을그는 다른 경찰들에 비해 백만 배는 더 큰 덩치에 안전을 책임지기 위해 완전무장을 하고 있었다심지어 그는 방탄차까지 몇 대씩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그와 함께라면 나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그는 나의 안전을 보장해줄 터였다그가 책임을 져줄 것이므로 이제 마음을 놓아도 될 것 같았다그는 아버지처럼 억센 팔로 내 어깨를 감싸주면서 내게 그렇게 여러 발의 총을 맞았는데 다치지는 않았는지 물었다나는 상처를 입었지만 병원에 가봤자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그는 한 손을 내 어깨에 얹은 채 가만히 있었다그가 나의 아버지가 되어 모든 일을 처리해줄 것만 같았다그런 생각을 하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그리고 내게 제일 좋은 방법은 현실이 아닌 곳에서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에밀 아자르자기 앞의 생

 

상상 속에 많은 친구를 두고 살던 아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밤이면 이불 덮은 마음이 늘 왁자지껄했다. 새우처럼 웅크리고는 서늘한 이부자리가 체온으로 차츰 덥혀지는 것을 몸이 감각하는 동안, 마음은 친구들의 출석을 불렀다. 꿈결의 입구까지 나를 데려다 줄 다정한 친구들이 모여들어 밤으로 나를 칭칭 감았다. 작은 빛 하나 없는 방, 어둠은 바다였고, 나는 배였고, 나는 파도였고, 나는 조개였고, 나는 선원이었고, 나는 노래였다가, 내가 다시 내가 되면 어둠은 썰물처럼 물러가고 이름 모를 아침 새가 우는 소리로 창문을 두드리곤 했다.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면 나는 받아쓰기를 하고, 곱셈과 나눗셈을 배우고, 올챙이의 뒷다리를 관찰하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읽게끔 소략하게 줄인 프랑스 작가의 소설책을 읽고, 강아지 밥그릇과 물그릇을 채워주고, 막 숟가락질을 배우기 시작한 동생의 손놀림을 지켜보며 저녁을 먹고, 작은 빗자루와 쓰레기를 들고 건성건성 방을 치우고 나면 다시 이부자리는 펼쳐진다. , 슬슬 친구들이 올 시간이야.

 

마지막 친구를 죽였던 때가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때쯤 나는 친구들보다 <수학의 정석>을 한 페이지라도 더 많이 푸는 일이나, 평생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 영어 단어를 외우는 일이나, 가본 적도 없고 가보고 싶지도 않은 나라의 토양의 특성에 대해 공부하는 일에 많이 신경 쓰는 아이가 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아이에게 상상 속의 친구를 굶겨 죽이는 일 같은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 같다. 그리고 인간의 일이 다 그렇듯이, 한번 떠난 친구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3



갈비뼈

 

  그렇다면 당연히아니 무엇보다도 그녀를 새로이 창조해야 할 것이다어쨌든 내 갈비뼈로 그녀를 만들지 않았던가하느님은 원형이 혼자서 너무 외롭고 불완전한 것을 알아차리시고 말씀하셨다.

  "그래여자가 하나 있어야겠어."

  그래서 심심풀이로덤으로그러니까 별다른 생각 없이 가볍게 손을 놀려 그녀를 창조하셔서 원형에게 붙여주었다원형은 그녀와 함께 행복해지는 것말고 다른 도리가 없었다그래서 그들원형과 갈비뼈피조물과 덤남자와 부산물은 함께 살았다그런데 함께 살아가는 동안 기묘하게도 두 사람의 역할이 바뀌었다분명 남자가 할 일이 많아서 그것에 주의할 시간이 별로 없었으리라그래서 부속품덤은 자신이 잘난 줄 알고 오만불손해졌다이런 것을 전부 이해하고 능력껏 받아들여야 한다그러나 남자들이여우리가 잠깐 정신을 놓은 사이에 상황이 이리 되었으니그녀를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정육점 주인이 살에다 뼈를 덤으로 얹어주듯이하느님이 조각을 떼어내 손바닥으로 몇 번 쳐서 그녀를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다이제 이 뼈를 교육시키고 여러 가지를 가르쳐야 한다아주 별 볼일 없는 여자도 자신이 동등한 줄 알고 온갖 일에 참견을 하기 때문이다그렇다그녀를 새로이 창조해야 한다그러니 우리 작은 것부터 시작하자.

산도르 마라이하늘과 땅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쩐닼ㅋㅋㅋ적당히 깝치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러니 우리 작은 것부터 시작하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뭔 똥폼을 또 저리 쿨하게 잡고 앉았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이고 배야.

 

산도르 마라이가 아니라 톨스토이에 괴테가 살아 돌아와도 이런 글을 소설 등장인물의 말도 아니라 그냥 에세이로 써 제끼면 오랑캐 소리 면하기 힘든 법이다...... 20세기 인간을 21세기 관점에서 평하는 일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인간이 syo인지라 아이구 송구스럽습니다요.

 

 

 

--- 읽은 ---

자기 앞의 생 / 에밀 아자르 지음 / 마누엘레 피오르 그림 / 용경식 옮김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우치다 타츠루 지음 / 이경덕 옮김

흐름으로 읽는 프랑스 현대사상사 / 오카모토 유이치로 지음 / 차은정 옮김

수학의 감각 / 박병하 지음

 

 

 

--- 읽는 ---

숙련자를 위한 고전노트 / 이수은 지음

How to read 푸코 / 요하나 옥살라 지음 / 홍은영 옮김

오래된 연장통 / 전중환 지음

세상을 바꾼 화학 / 원정현 지음

권력 / 스기타 아쓰시 지음 / 이호윤 옮김

자본론 함께 읽기 / 박승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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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2-19 0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도르 마라이... 뭐죠? 오만년전에 산도르 마라이 하나 읽었었는디...... 아웃이다 아웃이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욕 쓰고 싶지만 제 서재가 아니므로 건너뛸게요. 후훗

syo 2019-02-19 09:52   좋아요 0 | URL
저게 한 300페이지쯤에 나오거든요. 그 전까지도 읽는 중에 어어, 어어어, 요것바라? 어어 이럴 때가 가끔 있었는데, 갑자기 저게 뽝!!!!

하아...

뒷북소녀 2019-02-19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흘의 밤이 지나면 나흘의 밤이라... 그렇다면 72시간 연속 근무해야 되는데도요?ㅋㅋㅋ
이건 웃자고 드리는 말씀이구요... <비를 기다리는 밤> 이 글 너무 좋네요.
저도 어제 빗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어죠.

syo 2019-02-19 13:4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사람이 한치앞만 보는 법인지라, 근무 같은 상황을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백수라서.....

사실이지만, 웃자고 드린 말씀입니다 ㅎ

저도 빗소리 듣다가 잠들었습니다. 빗소리 들으면서 일어났구요. 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19-02-19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덤 같은 소리 하고 있네요 욕 대신 우아하게 배열된 ㅋ의 위치와 개수가 적절해 보입니다. 밤과 비와 책이 키운 아이가 쓴 글을 읽을 수 있어 다행입니다. 일기장에 꽁꽁 숨겨 놓지 않고 펼쳐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syo 2019-02-19 14:58   좋아요 1 | URL
이쪽이야말로 늘 감사합니다. 언제나처럼 좋게만 봐주시는군요. 열심히 살아도 산도르 마라이 같은 필력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열심히 살아서 산도르 마라이 같은 품성을 가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