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 신에게는 아직 두 장의 수면바지가 있사옵니다

 

 

1

 

범인을 검거하였습니다.

 

 


2

 

syo, 그는 석 장의 수면바지를 가진 남자다.

 

(1) 올해도 가을은 이렇게 오시는 듯 가시는구나 싶을 때쯤 꺼내 입기에 적합한, 사각형 패치 무늬에 큼직한 별이 듬성듬성 박혀 있는 아이 : 별바지

(2) 또 한살 더 먹는 거야? 이렇게 한 것도 없는데? 싶을 때쯤 꺼내 입었다가 또 한살 더 먹었구나. 올해도 별 건 없겠지 싶을 즈음까지 애용하는, 밤하늘 빛 바탕에 똥그란 털덩어리 양과 별과 달이 송송 박혀 있는 아이 : 밤바지

(3) 마지막으로 최고의 두께감과 풍성한 기모 안감을 장착, 이 바지가 무너지면 이번 겨울은 그냥 와장창 무너지는 거라고 봐도 무방한 최종병기 두꺼운 아이 : 막바지

 

 

 

3

 

수면바지 착용 기간을 11-12-1-2-3 로 잡았을 때, 바지의 보온력과 기온 간의 상관관계를 고려하면 착용 순서는 당연히 별----별 이 되겠으나, 현실적으로는 별-별밤-밤막-막밤-별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실제로 1, 2월 추위는 밤바지와 막바지가 최선을 다해 방어해주는 중이다.

 

헐벗고 부끄러운 하반신을 처음 목도했던 얼마 전 그 기상장면에서, 간밤에 쳐들어 온 웬놈에게 무참히 정복당하고는 비몽사몽간에 패배의 증표로 수면바지를 공물로 바치옵니다, 하고 인형머리 위에 걸어놓았던 것은 아닐지 상상해보기도 하였으나 그럴 리가, 결국 제풀에 벗어 던졌겠지. 하지만 왜? 대체 왜 이런 몹쓸 짓을?

 

 

 

4

 

의문을 해소하는 데는 며칠의 시간이 필요했다. 밤바지가 빨래통에 들어가고 막바지를 입고 자는 동안, syo의 아침은 하루도 부끄럽지가 않았다. 그런데 막바지가 빨래통에 들어가고 다시 밤바지를 착용한 바로 그날부터 다시 새벽의 탈의쇼가 시작된 것이다. 아하, 너였구나, 밤바지! 잡았다, 요놈!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은, 밤바지보다 막바지가 명백하게 방어력이 높다는 것이다. 그런데 땀은 왜 밤바지가 흘리는가...... 혹시 보송보송 귀여운 양 그림 때문일까?

 

 

 

5

 

밤바지는 일단 유배형에 처해졌다. 밤바지에게 사약을 내려야 하는가를 놓고 치열한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 전하, 어찌되었건 저 바지 때문에 하반신이 군기를 어지럽히고 공연음란한 밤을 보내고 있다면, 처단하는 것이 마땅한 줄로 아뢰오...... 하오나 전하, 아직 저 창 밖에는 동장군의 사기가 드높고 공격이 매섭사옵니다. 현재 전장의 수면바지 보급 상태가 그리 넉넉지 않사오니 부디 통촉하시옵소서...... 그렇다면, 경이 직접 말해보라, 대체 이 난국을 어찌 타개하면 좋겠는가.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신에게는 아직 두 장의 수면바지가 남아 있사옵니다......

 

 

 

6

 

재활용 의류수거함에 담긴 옷들은 흘러 흘러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 산다불멸의 신적인 것을 가슴에 품고 있지만방 안에 혼자 있으면 코를 후빈다내 영혼 안에는 인도의 온갖 지혜가 자리하고 있지만한번은 카페에서 술 취한 돈 많은 사업가와 주먹질하며 싸웠다나는 몇 시간씩 물을 응시하고 하늘을 나는 새들을 뒤좇을 수 있지만어느 주간 신문에 내 책에 대한 파렴치한 논평이 실렸을 때는 자살을 생각했다세상만사를 이해하고 슬기롭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때는 공자의 형제지만신문에 오른 참석 인사의 명단에 이름이 빠져 있으면 울분을 참지 못한다나는 숲 가에 서서 가을 단풍에 감탄하면서도 자연에 의혹의 눈으로 꼭 조건을 붙인다이성의 보다 고귀한 힘을 믿으면서도 공허한 잡담을 늘어놓는 아둔한 모임에 휩쓸려 내 인생의 저녁 시간의 대부분을 보냈다그리고 사랑을 믿지만 돈으로 살 수 있는 여인들과 함께 지낸다나는 하늘과 땅 사이의 인간인 탓에 하늘을 믿고 땅을 믿는다아멘.

산도르 마라이 지음하늘과 땅


날 둘러싸는 이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힌다!

숨 좀 쉬게 내버려둬!

창문을 다 열어젖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창문보다 더 많이모두 열어!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페소아와 페소아들

 

 

 

7



1845년 3월 24일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도스또예프스끼는 이 전환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글을 쓰지 않을 때 무슨 일을 하는지 형도 궁금할 거야독서를 해끔찍할 정도로 많이독서는 내게 기괴한 영향을 줘예전에 읽었던 것을 다시 읽으면 새로운 힘이 솟아나서 모든 것을 깊이 있게 탐구하고그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능력을 얻게 돼. (......) 문학에 관해선 나는 2년 전의 내가 아니야그때 난 어린아이 같았고 엉터리였지. 2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 나는 많은 것을 얻었고또 많은 것을 잃었어.

이병훈 지음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73-74

 

끔찍할 정도로 많이 한다고 자랑스럽게 진저리를 칠 수 있다니, 끔찍할 정도는 대체 얼마 만큼일까?

 

잉여킹으로 살아온 기나긴 세월을 책으로나마 눅여보겠다고 설치긴 했지만, 사실 누구도 내가 읽은 양을 끔찍하다고까지는 생각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나조차도! 그래서 syo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라 syo가 된 것이다. syo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닌 150709180198번째 이유가 발견되었군. 아무래도 억겁의 시간이 필요하겠어.

 

방구석에 처박혀 독서하는 일상에 들어선 것이 100퍼센트 자발적인 선택은 아니지만, 그런 사정과는 무관하게 어쨌든 얻은 것이 있고 잃은 것이 있어서, 인간 본성상 저울질을 해보게 된다. 그런데 어느 한쪽이(어느 쪽이라고 밝히진 않겠지만) 너무 치명적으로 무거워서 양팔 저울이 무슨 사다리마냥 벌떡 섰다. 삐딱하게 선 그 꼴이 보기에 건방지지만, 그게 누구 탓인지 생각하니 어쩐지 슬퍼져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떨군다...... 대체 나는 왜 이 따위로 사는가,

 

라고 또 쓰고 앉았다.

 

그리고 다 쓰고 나면 또 뭔가를 읽어 대겠지. 쯧쯔......

 


 

오랫동안 연필을 쥐고 있다가 난 결국 쓰는 사람이 되었다사람과 사람이곳과 저곳 사이보이지 않는 많은 선들을 지워가는 그런 글을 언젠가는 쓸 수 있겠지 느긋하게 생각한다꿈을 연필로 써나가는 일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조경란 지음소설가의 사물

 

나는 앞으로도 '이런 글은 나도 쓰겠다혹은 '이런 그림은 나도 그리겠다'에서 '이런 글'과 '이런 그림'이나 맡을 예정이다글과 그림으로 누군가에게 감동과 재미를 줄 수 없다면 자신감이라도 주면서 살고 싶다.

정은우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창작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자산은 습작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작가의 삶이다. (박완서)


아이 씨어떡하지.

이경미 지음잘돼가무엇이든 

 

 

 

--- 읽은 ---

카모메 식당 / 무레 요코 지음 / 권남희 옮김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 이병훈 지음

슈퍼맨은 왜 미국으로 갔을까 / 한민 지음

 

 

--- 읽는 ---

뻬쩨르부르그 이야기 / 니콜라이 고골 지음 / 조주관 옮김

하늘과 땅 / 산도르 마라이 지음 / 김인순 옮김

새로운 엘리트의 탄생 / 임미진 외 4인 지음

슬픈 인간 / 나쓰메 소세키 외 지음, 정수윤 엮고 옮김

열두 발자국 / 정재승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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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2-10 14: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국어사전에 찾아보니 ‘끔찍하다’가 ‘정성이나 성의가 몹시 대단하다’라는 뜻도 있었어요. 저는 ‘끔찍하다’가 참혹한 정도를 의미한 건줄 알았어요. syo님의 독서는 전자의 의미에 가까워요.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

syo 2019-02-10 18:37   좋아요 0 | URL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 아마도 전자 반 후자 반 섞은 뉘앙스로 쓴 것 같은데요?
시루스 박사님이야말로 전자의 ‘끔찍한 독서‘를 대표하는 인물형이지요.

전 솔직히 후자쪽이 더 탐나긴 하는데, 전자건 후자건 ‘끔찍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의 수준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것 같아요.ㅎㅎㅎㅎ

stella.K 2019-02-10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요님 책 끔찍히 많이 읽는 거 인정!
그런데 누가 인정하고 안 하고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스스로가 많이 읽는다면 많이 읽는 거고,
조금 읽는다면 조금 읽는 거죠.
우리 이제 누구와 비교하고 그러지 맙시다.
난 그러려구요.
누구와 비교하면 전 한없이 뒤쳐지는 사람입니다.
그냥 나에게 알맞으면 그것으로 되는 것 같아요.
난 분명히 스요님이 언젠간 자신의 길을 찾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게 남들 보기엔 늦는 것 같아도 스요님께 가장 적당할 때 찾아질 겁니다.
단지 책 읽는 건 조금 줄이는 게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이건 여담입니다만,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이 세상에 살지 못하는
사람도 있더라구요. 뭐 천에 한 두명 있을까 말까한 일이겠지만.
별얘기 다합니다. 그냥 방해 공작으로 여겨주시길...ㅎㅎㅎ

저도 수거용 의류함의 의류가 궁금하긴 한데
말에 의하면 괜찮은 건 수선해서 제3세계로 수출 나간다는 말도 있고,
또 담요 만드는데 들어간다는 말도 있고,
그런데 구멍난 내의류 같은 건 어떻게 해야하는 건지 모르겠어요.ㅋ

syo 2019-02-10 18:43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께서 저 힘내라고 끔찍하게 읽는다고 인정해주셨거늘, 전혀 기쁘지 않은 걸로 봐서 제가 바라는 것도 역시 그게 아니었나 봐요ㅋㅋㅋㅋㅋㅋㅋㅋ 뭐지? 나라는 인간은?? ㅋㅋㅋㅋㅋㅋㅋ

그렇지만, 뒤이어 하신 말씀들(특히 책 줄이라는 말씀)은 어쩐지 힘이 나네요 ㅎ
진짜 뭐지? ㅋㅋㅋㅋㅋㅋ 사실은 책 줄이고 싶어서 저러는 거였을까요? ㅋㅋㅋㅋ

stella.K 2019-02-10 18:58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그렇다면 그런가 보죠.
물은 물이고, 산은 산 아니겠습니까?ㅋㅋㅋ

2019-02-10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10 2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9-02-11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나귀 반바지도 아니고 밤바지ㅎㅎ 웃겨요.

왜 이따위로 사는가 하셔서...
“박완서 문학이 묘사해내는 생활 감각은 탁월해서, 이웃의 갈망이 낳는 소소한 내면적 불편과 갈등이 잘 그려진 선생님의 소설을 읽고 나면 ”왜 이렇게 사나“하고 흔들리고는 했다.”(전성태) 『멜랑콜리 해피엔딩』중

데이비드 실즈가 페소아 『불안의 서』를 ˝동반 자살 약속에 첨부된 아포리즘˝이라고ㅋㅋ 페소아를 다자이 오사무 급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실즈의 표현에 반박은 안 되는ㅜㅋㅜ;;



syo 2019-02-11 00:31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대목에 공감이건 뭐건 할려면 얼른 『불안의 서』를 읽어봐야 할 텐데요......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고!

왜 이 따위로 사는가 222222

무식쟁이 2019-02-11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모르게 쇼님을따라 내 수면바지에 이름을 붙여보고 있다. (분명 나뿐은 아닐터!) 내바지는 소바지. 대체 나는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가..

syo 2019-02-11 00:36   좋아요 0 | URL
물건에 이름 붙이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 없대요!
그리고 프로필 사진에 멍뭉이 쓰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 없대요!

와..... 쟁이님.....

무식쟁이 2019-02-11 00:53   좋아요 1 | URL
제가 좀 무해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유해한 사람을 보면 앙!! 뭅니다. 제가 오늘 읽은 책이 뭘까요~ (대체 나는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가..222)

syo 2019-02-11 00:58   좋아요 0 | URL
정답! 최은영??

무식쟁이 2019-02-11 01:05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그걸 또 열심히 맞춰주시고ㅋ
수학과교수님께서 초등학생 구구단에 장단맞춰주시는 훈훈한 광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