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그 낮의 syo와 밤의 syo

 

 

1

 

백수에게 명절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무게감이 만만하지 않은 화두로서 1년에 두 차례, 정말 징하게도 오랫동안 고민해온 질문인데, 어쨌든 노답이다. 뜨거운 눈총(적당히 하세요, 뜨거워서 정월 초하루에 반팔 입게 생겼잖아요)에 데고 날카로운 충고(라고 부르시니까 그렇다고 쳐드립니다)에 베이는 하루 종일을 10~15회쯤 겪고 나면 이쪽도 어쩐지 무감각해지고 저쪽도 어쩐지 지쳐서, 무승부라기보다는 쌍방이 패배하는 결론이 늘상 도출되는 식이다. 말하지 않아도 이심전심 서로가 아는 것이다. 의미가 농축된 짧은 한 마디 말과, 감정이 쪼르르 새어나오는 능숙하지 못한 눈빛과, 그걸 덮기 위해 던지는 어색한 웃음 같은 것들이 긴 이야기를 단번에 대신한다. 아, 역사란 이렇게나 편리한 것이다. 때리지 않지만 때리고, 얻어맞지 않지만 얻어맞는 기적의 현장. 그런 노래 가사가 생각난다. 너의 한 마디 말도, 그 웃음도 나에겐 커다란 의미.....


누군가는 말했다돈은 빵이야.

누군가는 말했다돈은 상품이야.

누군가는 말했다돈은 삶이야.

 

하지만 누가 말할까돈이 당신이라고상품이라고?

오 이런살아 있는 생물이라고?

생명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데?

 

이것은 절대 좋은 거래가 아니다.

국가들은 진짜 살아 있는 것들을 보호하지 않는다.

 

그대 자신이 되어라!

그대 자신이!

 

그 책에 당신의 표식을 할 때에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삶이란 가난한 이들과 영원한 추종자들을 위해

망각을 퍼트리고씨앗을 뿌리고낭비하는 것 아닐까?

에곤 실레영원한 아이, 13-15쪽

 

가끔은어른 흉내를 내고 싶어 애쓰는 나를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어린 나와 맞닥뜨릴 때가 있다.

김정선나는 왜 이렇게 우울한 것일까, 194

 

나는 왜 글을 쓰는가내 손가락이 촉침처럼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질문을 추적한다젊었을 때부터 내 앞에 놓인 익숙한 수수께끼언어의 허리띠를 졸라매고 놀이와 친구들과 사랑의 계곡에서 한 박자 바깥으로 물러서기.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합창이 터져 나온다.

  그저 살기만 할 수가 없어서.

패티 스미스몰입, 129


 

 

2

 

백수에게 명절은 도리 없이 그런 것인데, 백수+독서가에도 명절은 일종의 허방이다.

 

휴일이 기니까 이게 다 가능할 거라는 기대로 책상 위에 책을 잔뜩 쌓아놓고 호연지기로 연휴의 문을 열었으나, 나올 때는 쥐구멍으로 나왔던 경험을 서너 번쯤 하고 나니까 비로소 문제의 원인이 드러난다. 핵심은, 백수에게는 평일이 명절이고 명절이 평일이지만 non백수에겐 평일이 평일이고 명절이 명절이라는 점이다. 백수는 명절에 바쁘다. 평일에는 놀아주는 사람이 없다보니, 울며 겨자를 먹든 웃으며 피자를 먹든 어쨌거나 읽는 일 말고는 딱히 할 게 없다. 그러나 명절이 되면 집단수용소에서 해방된 노동자들이 떼로 거리에 몰려나와, 그간 바삐 사느라 녹이 슬었던 우정의 표면에 기름을 칠하거나 함께 돼지껍데기를 뒤집으며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되새김질할 친구, 감정의 배터리를 완충시켜 다시 일상을 헤쳐 나가는데 힘이 돼 줄 25YearAh짜리 대용량 보조배터리를 찾아서 전화번호부를 샅샅이 뒤지는 일이 발생한다. 결국 syo는 이리저리 불려나가고, 늦은 밤까지 너덜너덜해지고, 알딸딸한 표정과 마음을 하고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일 년에 한두 번쯤은 이렇게, 책 대신 사랑하는 친구들의 얼굴을 읽는데 시간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 좋구나, 감당할만한 행복이구나, 뭐 이런 생각들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요즘도 너는 너하고 서먹하게 지내니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아직도 매일매일 일어나니아무에게도 악의를 드러내지 않은 하루에 축복을 보내니누구에게도 선의를 표하지 않은 하루에 경의를 보내니모르는 사건의 증인이 되어달라는 의뢰를 받은 듯한 기분으로 지금도 살고 있니아직도아직도 무서웠던 것을 무서워하니.

김소연i에게」 부분

 

인생의 고랑에 맺힌

찰나의 수화물처럼

신의 비밀스러운 섭리 따라

한 세대가 싹트고 익고 사라지면,

또 다른 세대가 그 뒤를 잇고......

그렇게 우리 경망스러운 인간은

자라고 요동치고 들끓다가

조상들의 무덤가로 모여든다.

우리의 때도 곧 닥쳐오리니,

그 시간에 후손들은

우리를 상에서 밀어내리라!

 

벗들이여그때까진 이 가벼운 인생을

취하도록 마실지라!

알렉산드르 푸슈킨 지음김진영 옮김예브게니 오네긴 

 

 


3

 

내가 정말 쓰임이 없으며 여러 사람의 얼굴에 불편한 웃음이나 걸어놓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며 시름하는 낮과, 내가 그래도 쓰임이 있으며 몇몇 사람의 마음에서 진짜배기 웃음을 길어 올릴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심장이 저리게 느끼며 위안하는 밤이 접붙어 감정의 일교차가 극심한 날. syo에게 명절이란 그런 날이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괜찮다면 나는 아주 오랫동안 당신들에 대해 생각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이야기는 계속되고 우리는 그 안에서 자주 만났다가 헤어지며 그리워도 하겠지만 끝내 서로를 다 이해하지는 못할 거라고하지만 그렇게 거듭되는 재회와 헤어짐 속에서도 당신들이 처음 내 마음속에 들어와 헤이라고 스스로의 존재를 각인시켰던 그 눈부신 순간에 대한 감각은 잃지 않을 것이다그것은 떠난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차마 가져가지 못하는누군가를 사랑하고 다정함을 주었던 사람이면 마땅히 차지해야 할 오롯한 빛이니까.

김금희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작가의 말

 

시간은 흐르는데 더 나은 인간이 되기는커녕 예전보다 못한 내가 될까 봐 겁난다그래서 느리게라도 계속해서 읽고 생각하고 듣고 보고 쓴다일단 멈춘다면 예전보다 못한 내가 될 게 뻔하니까시간은 순환한다는 말은 위로일 뿐이다시간은 앞으로 간다우리는 분명히 지금보다 늙은 사람이 될 것이다그러니 지금 이 순간이 시간을 명백히 살아내야 한다나는 나답게 당신은 당신답게.

조경란소설가의 사물, 64

 

 

 

 

--- 읽은 ---

몰입 패티 스미스 지음 김선형 옮김

예브게니 오네긴 /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 김진영 옮김

소설가의 사물 / 조경란 지음

, 영원한 아이 / 에곤 쉴레 지음 / 문유림, 김선아 옮김


  

--- 읽는 ---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 / 젊은역사학자모임 지음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 / 이현우 지음

전락 / 알베르 카뮈 지음 / 유영 옮김

죽어가는 짐승 / 필립 로스 지음 / 정영목 옮김

맑스주의 역사 강의 / 한형식 지음

후설의 현상학 / 단 자하비 지음 / 박지영 옮김

캘리번과 마녀 / 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 황성원, 김민철 옮김

불교입문 /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지음


댓글(19) 먼댓글(0) 좋아요(6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2-02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02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9-02-02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죽어가는 짐승
오호~~ 캘리번과 마녀

친구들과의 뜨거운 밤. 좋은 시간 되세요!!!
뜨거운 밤 후기도 올려주셔야 되는거 아니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9-02-02 11:50   좋아요 0 | URL
안 뜨거워요. 좀 뜨거웠으면 좋겠는데 친구들이 다 식었어....
식은 건지 삭은 건지 하여튼 막 그래요 ㅋㅋ
사회생활이 그런 걸까요?
저만 백수라서 어린이 같고 ㅋㅋㅋㅋ 재미없어 ㅋㅋㅋ

레삭매냐 2019-02-02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절에는 엄청 두터운 책을 읽어 봅시다... 메리 설날입니다.

syo 2019-02-02 11:52   좋아요 0 | URL
그러고보니 레삭매냐님 서재에 명절 인사 드리러 가는 걸 잊었네요.....
레삭매냐님도 메리 설날, 엄청 두터운 설날 되세요 ㅎㅎㅎㅎ

카알벨루치 2019-02-02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 짱박혀 책냄새 맡고 싶은 주말이네요~

syo 2019-02-02 12:24   좋아요 1 | URL
따뜻한 주말이네요,
책냄새와 공냄새를 두루 섭렵하시는 양수겸장의 배카알님!

카알벨루치 2019-02-02 12:45   좋아요 1 | URL
근데 진짜 쇼군의 페이퍼는 독서를 자극하게 한다 이런거 넘 좋은거 아냐 근데 난 왜 잠이 올라하노 ㅋㅋ

stella.K 2019-02-02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수에게 명절이 그렇기는한데 백수를 가격하는 그들도
알고보면 다 고만고만한 삶을 살면서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거에서 위안삼으려 하는 뭐 그렇고 그런 심리.
명절은 그저 그동안 만나지 못한 일가친척 만나는 날이니
그냥 그런 것에 의미를 두는 거지 별거 있습니까?
그래도 전 오랜만에 조카 녀석들 볼 생각을 하니 기다려지기도 하더군요.
물론 이것도 다 아직 결혼 안한 조카와 아직 비교적 건강하게 살아 계신
울엄니 때문에 가능한 합작품이긴 하지만...ㅋ
암튼 명절 즐겁게 잘 보내십시오.^^

syo 2019-02-02 17:50   좋아요 0 | URL
역시 각자의 고충이 있겠으나 각자가 자기 고충 처리하는 데만 전념하고 남의 일은 남에게 돌려주는 명절이 되면 좋겠달까요.....

스텔라님 복작복작한 명절 보내세요 ㅎㅎㅎ

페크pek0501 2019-02-03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수가 많아서 안 누르려다가 눌렀습니당~~ 킁킁~~
즐거운 설 연휴 보내시길 바랍니다.

syo 2019-02-03 14:13   좋아요 2 | URL
과분한 수의 좋아요가 페크님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고 말았나요 ㅎㅎㅎㅎ

페크님도 즐겁고 알차고 보람찬 명절 연휴 보내세요^-^

이하라 2019-02-03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가지로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명절만한 날이 없는 것 같아요.

즐겁고 행복한 설연휴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syo 2019-02-03 14:3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ㅎ
이하라님도 걱정 없이 즐거운 일만 가득한 명절, 그리고 새해 되세요^-^

블랙겟타 2019-02-04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일에는 평일, 명절에는 명절... 공감이가네요 ^^;;;
그런 의미로 안그래도 저도 친구들을 만나고 오는 길입니ㄷ..(응?)
내일부턴 채..책읽으려구요.. ㅎㅎㅎ
syo님 즐거운 연휴 보내시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syo 2019-02-04 08:45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어느덧 연휴의 후반전이 시작되고 있군요. 독서가 있는 연휴를 기원하면서, 블랙겟타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소서!^-^

무식쟁이 2019-02-09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절 이래 이제 쇼님글 복습시작. 어느새 1주일이나 지났다니.. (잘 살아남으셨쥬?)

syo 2019-02-09 21:33   좋아요 0 | URL
으하하하 명절 따위에 질 수 있나요!! 적당히 잘 살아남아버렸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