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쓰는,

 

 

1


 

10년도 더 전에 A4 3장 분량의 성춘향 탈옥 사건에 관한 증언들이라는 짧은 소설을 쓴 적이 있다. 한 페이지짜리 단편 소설을 표방하는 어느 커뮤니티에 올렸던 글로서, 지금은 소실되어 세상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사흘 밤낮을 정말 애절하게 매달려서 썼던 기억이다. 제목을 달 때도 탈옥파옥사이에서 한 시간을 고민했었으니 말 다한 거지. 그 글은 변학도의 요구를 세차게 거부한 춘향이 옥에 갇힌 지 사흘 만에 홀연히 칼을 벗고 사라지자,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한양에서 파견된 감찰관이 여러 인물들을 조사하고 그 증언을 옮긴 글의 형식이었는데, 변학도, 옥지기, 방자, 월매, 향단, 그리고 춘향을 마지막으로 목격했다는 동네 미친 소녀의 증언을 각각 한 꼭지로 하여 엮었다. 그때쯤 노벨상을 수상했던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과 비슷한 형식이었다. 당시 그 책을 읽을 만한 역량이 아니어서 펴보지도 못했지만. 하여간 캐릭터 저마다의 말투를 살리고자 무진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들의 증언을 되짚어 보면, 변학도는 관기에게 수청을 요구한 게 무슨 죄냐고 따지며 신분질서를 울부짖었고, 옥지기는 옥에 갇힌 춘향이한테 껄떡거린 건 사실이지만 이 동네 남자 치고 안 그런 놈 있으면 나와 보라는 식이었고, 방자는 이몽룡을 만나러 간 감찰관의 길을 막고서, 자기 주인은 그저 하루 옴팡지게 놀았을 뿐 그런 천한 여인과 정을 통한 일이 추호도 없으니, 장원급제한 동량의 앞길 막을 생각 하지 말라고 위협한다. 월매는 사또의 수청을 들라고 했던 자신의 말을 들었으면 팔자가 폈을 텐데 고집을 부리다가 실종까지 된 딸을 원망하면서도 그리워하고, 향단은 저나 춘향이나 천한 신분임은 마찬가진데 왜 자기가 춘향이를 아씨로 모셔야 하냐고 따지면서도 이몽룡의 그 안개 같고 부질없는 사랑의 맹세를 춘향은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었다며, 춘향이 수청 들기를 거부한 이유가 이몽룡을 기다리기 때문이라는 세간의 말을 부인한다. 그리고 마지막 증언자인 미친 소녀는 춘향이가 탈옥 이후 광한루에서 혼자서 그네를 뛰더니 새가 되어 해 뜨는 방향으로 날아갔다고 증언한다. 그 글을 읽은 어떤 분이 댓글로 춘향이는 진짜 어디로 간 거냐고 물어보셨는데, 그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 천인이나 여성으로 태어나 겪어야 했던 모든 억압이 없는 곳으로 갔기를 바란다는 댓글을 달았던 것 같다.

 

2007년이었고, 그때의 syo는 마르크스는 알아도 레닌은 모를 만큼 지금의 syo와는 달랐고, 무엇보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 자체를 몰랐다. 타인의 불행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투표권이라는 것을 얻은 후 최초의 1표를 국밥 광고 찍은 아저씨에게 던졌으니 개념도 없었던 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저런 글을 썼다. 알지도 못하면서. 겪은 적도 없으면서. 그러니까 저 글의 실체는, 옹호나 공감이 아니라, 그저 사용혹은 이용이었던 셈이다.

 

여친이 학교 아이들을 데리고 23일로 서울에 현장학습을 가는데, 수요 집회에 참가하기로 했단다. 아이들이 손에 들고 참가할 피켓 문구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에, 이런저런 말들을 지어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멈추라 하지 마세요. 우리는 아직도 그날에 멈춰 있으니.” 같은 문구를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직 그날에 멈춰 있는 우리는 할머니들인데, 아무리 집회에 참가해 할머니들의 옆자리에서 같은 목소리를 내고자 한대도, 피해자가 아닌 아이들이 피해자의 경험과 감정을 짐작하고 추론하여 언급하는 글귀를 쓰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


2007년의 syo는 올바른 행동을 한 것일까? 그 글이 정치적 올바름을 준수하고 있다고 쳐도, 그 글을 쓴 행위 역시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같은 글, 같은 말이라도, 쓰는 사람, 말하는 사람이 지닌 역사와 입장이 다르다면, 그 말과 글들이 같은 평가를 받으면 안 되는 것은 아닐까? ‘쓴 것쓰는 일이 서로의 정의와 맥락을 침범하는 사태를 마주하면, 쓰는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할까.

 

아니, , 그냥 이 책을 읽으니까 그때 생각이 아련하게 났네요. 이 증언록 형식, 참 반갑다.

 

 


우리가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순수한 보고가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태도입장을 드러내는 행위다모든 발화는 객관적일 수 없다지식은 인식자의 렌즈를 통해 우리 앞에 재현('')된 것이다공부는 지식을 습득하는 자체가 아니라 인식자가 자기에 대해 아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사회와 공유하는 것이다.

정희진정희진처럼 읽기


중요한 것은 축제 같은 저항을 즐기는 것이 아니다사람들은 집으로그리고 자신의 삶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그곳에 남아 있다그러니 길 위에서 삶을 돌려달라고 외치는 이들과 연대하고 싶다면 나의 정의감보다 그들의 삶을 우선해야 한다이렇게까지 하면서 이들과 함께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그들이 앉아 있던 자리가 깨끗하게 치워지고 그 흔적이 무언가로 덮여 매끄러워지는 그 순간이 우리 모두의 패배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태섭억울한 사람들의 나라


 음독(音讀)이 전부였던 시간이 있었다

 인간의 목소리가 잠든 활자를 깨워준다고 믿었던 때

 믿음은 깨지는 순간 비로소 믿음이다

 묵독의 기원은 경전을 동공에 새기려 했던

 어느 불온한 수도사에게 있다

 기록되는 순간잠들어버릴 문장보다

 행간 사이를 헤매는 것으로 길을 찾고 싶었을

 그는 동공에 고인 그늘이 무거웠을까무겁지 않았을까

 이단의 독법이라며 수군거렸을 입들

 얼마 후 그를 봤다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부재하는 목소리의 그림자가 길어질수록

 내내묵독의 절기를 건너야 할 동공

 기록되지 않을 새의 날갯짓이 사라지고

 허공의 밑줄 아래로 흩어졌다 모이는한 점 구름

이은규묵독」 부분 

 

 

 

2


 

헤겔은 이 논문 속에서 대체적으로 피타고라스나 플라톤이 생각했던 것처럼 수()의 신비주의와 유사한 방법으로 자연수의 간단한 비례에 혹성 간의 거리를 대응시켰다따라서 비례에 따라 파악할 때 화성과 목성 사이에는 어떤 혹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그가 이 논문을 저술한 때는 1801년 봄부터 여름에 걸친 기간이었다그러나 운명의 장난이라고나 할까같은 해 1워 1일에 이탈리아인 피아치에 의해서 화성과 목성 사이에는 소혹성 세레즈(Ceres)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미 발견된 뒤였다통신수단이 발달한 현대에는 생각할 수도 없는 실수였다.

나까야 쪼우헤겔』, 79-80

 

저건 운명의 장난도, 실수도 아니라 그냥 무지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을 구분하는 일이 이렇게 어렵다. 인류 지성사에 그 이름을 거대하게 새긴 헤겔쯤 되는 인물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철학하는 인간이 가장 오래된 철학의 격언인 너 자신을 알라도 지키지 못하는 꼴을 비웃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비난 속에는 나는 그러지 않을 걸. 나는 날 잘 아니까.’ 하는 기본전제가 깔려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헤겔이 자기 마음속에 깔아 놓았던 그것과 똑같은.

 

오늘도 또 한번 묵직해지는 syo의 좌우명 No. 2, “깝치지 말자

 

 

 

 

3


 

일상을 매끄럽게 운용하고신체가 유연해지는 것이것이 슬기로운 백수 생활의 핵심이다고수는 서두르지 않는다내공이 깊으니까백수도 서두르지 않는다시간이 많으니까경제활동의 폭도 넓어진다명랑하고 당당한 사람들은 인복이 많다자연스럽게 주변에 사람이 모이는 법이다사람이 모이면 밥이 생긴다알바 자리도 생긴다같이 재미난 활동을 기획할 수도 있다밥은 밥을 부르고친구는 친구로 이어진다.

고미숙조선에서 백수로 살기, 74쪽


멋있고 좋은 말씀이긴 한데, 백수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건 두 가지 경우 중 하나다. “나도 백수다라고 말씀하시는 고미숙 선생님이 뭔가 잘못 알고 계시거나, 아니면 syo놈이 뭔가 잘못 살고 계시거나.....

 


 

 

-- 읽은 --



조관희, 루쉰 : 청년들을 위한 사다리

고미숙,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

나까야 쪼우, 헤겔 G.W.F. Hegel

무카야마 다카히코, 다카시마 데츠오, 빅팻캣의 영어수업 : 영어는 안 외우는 것이다

최은영, 손은경,



 

-- 읽는 --



줄리언 바지니, 진실 사회

강대석,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꿈꾼 유토피아

나카노 노부코, 우리는 차별하기 위해 태어났다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

정유민, 아무튼, 트위터

요한 록스트룀, 마티아스 클룸 지구 한계의 경계에서

박홍순, 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심리학 수업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18-11-13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해요~~~~
“성춘향 탈옥 사건에 관한 증언들” 파일을 찾아 내던지, 아니면 다시 쓰던지.
그렇게 합시다!!!

syo 2018-11-13 18:32   좋아요 0 | URL
앗, 답정넠ㅋㅋㅋㅋㅋㅋㅋ
저기 서술해 놓은 거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제가 쓸 자격도 권리도 없는 주제였어요 ㅎ
다시 살려내는 건 온당치 않다고 봄 ㅎ

오후즈음 2018-11-13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꼭 다시 쓰셔요. 방자전을 보며 저런 해석도 있구나 했는데 더 잼있습니다!

syo 2018-11-13 19:06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고랫적 아이디어지요.... 뭐 ‘해석‘이라는 단어까지 붙일 만한 게 못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