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
1
망하고 망해도 망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일은 늘 망한다. 슬프고 슬퍼도 슬픈 일엔 꾸준히 슬프고, 참고 참아도 참아야 하는 일은 참을 수 없으리만치 많이 남았다. 남의 슬픈 일에 울고 울어도 울 일이 줄어들지 않아 자주 우는데, 언젠가부터 자기 울 일엔 울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망하면 슬펐고, 슬픔은 참았고, 참다 보면 울고 싶었는데, 그럴 때마다 일일이 울어왔다고 가정하면 아찔할 만큼 수도 없이 망했으므로, 울고 싶은 일엔 울지 못하고 내가 울 것 까지는 없는 남의 일에 잘 울어주는 인간으로 나이 먹었다.
끝내 잡아채지 못한 것과의 남은 간격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실패는 자업자득인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긴 것도 기묘한 소수점 두 자리 숫자를 바라보자면, 그 숫자에 길이나 질량의 단위를 붙였다 떼었다 해보면, 도대체 저 거리가 얼마나 먼 것이기에, 저 무게는 얼마나 무거운 것이기에, 울기보다는 울화가 치미는데, 그렇게 자신에게 오래 울분을 토하다 보면 부끄러울 때가 있다. 너무 부끄러워 사람의 몸이 눈물로 만들어져 있다면, 차라리 실컷 울다가 몸과 함께 녹아 사라진다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울 줄 아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버펄로 이론 알아요?" A가 입을 열었다. "버펄로는 무리지어 이동할 때 맨 뒤에서 달리는 버펄로 속도에 맞추어 전체가 움직인대요. 육식 동물의 습격을 받으면 후방을 담당하는 버펄로들이 제일 먼저 잡아먹혀요. 모두 죽지 않기 위해서 걔네들 속도에 맞춰 움직이는 거예요. 우리는 맨 뒤에서 달리는 버펄로예요." "왜?!" 나는 발끈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돼. 왜 우리가 희생을 해야 돼?" "잘 생각해 보면 희생이 아닌 거지. 뒤에서 달리는 버펄로가 전체를 움직이잖아. 그리고 전체를 구하고." "난 싫어요. 난 누구도 구할 생각 없어."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서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하면서 자기네 삶을 반추하는 거지. 그러니까, 우리는 전체의 밸런스를 맞춰주는 사람들. 인구 조절도 해주잖아." "그게 좋아요? 맨 뒤에서 달리는 버펄로가 정말 좋아요?!" "전체를 구하잖아." "완전 짜증 나.“
_ 이경미, 『잘돼가? 무엇이든』
2
헤겔의 시대에 있었던 중요한 논제 중 하나는 교양의 본성 및 그것이 계몽과 맺는 관계였다. 계발되고 교육된 사람이 또한 계몽된 사람이기도 한 것일까? 어떤 이들은 교양과 계몽이 구별된다고 생각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둘이 본질적으로 결합되어 있어서 젊은이들이 교양을 얻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계몽되어야"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또한 더 나아가 비교적 반동적인 삶에 젖은 독일인들의 시각에서, 교양을 습득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젊은이들에게 프랑스혁명가가 되라고,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자코뱅 당원이 되어 교회 지도자들과 귀족들을 죽이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되었다. 멘델스존은 교양과 계몽을 동일시했고, 칸트는 계몽된다는 것이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으며, 많은 반동 세력들은 계몽과 자코뱅주의를 동격으로 보았다. 당연히 "참된" 교양을 "거짓된" 혹은 "부패한" 교양과 구별하고자 하는, 즉 참된 자기 계발을 혁명가나 대중 민주주의자를 키우는 선동과 구분하고자 하는 시도도 논쟁에 가세했다. 교양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심지어 여전히 신성로마제국이라 불리는 지역 곳곳에서 우후죽순처럼 조직되는 "독서 모임"을 보면서, "독서 중독증"이라는 새로운 질병이 발생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병은 주로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학생과 헤픈 여자와 주인을 공경하지 않는 하인 등 여러 문제 있는 사람들에게 감염된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_ 테리 핀카드, 『헤겔』, 74-75쪽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이런 장면은 역사적으로 두고두고 되풀이되므로, 이 문단은 몇 개의 단어들만 고쳐 넣으면 그대로 재활용 할 수 있는 매우 쓸모 있는 템플릿이라고 볼 수 있겠다. 지금 생각나는 예를 들어 본다면,
우리 시대의 중요한 논제 중 하나는 교양의 본성 및 그것이 페미니즘과 맺는 관계였다. 계발되고 교욱된 사람이 또한 젠더 편향이 없는 사람이기도 한 것일까? 어떤 이들은 교양과 성 평등 의식은 구별된다고 생각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둘이 본질적으로 결합되어 있어서 젊은이들이 교양을 얻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젠더 의식을 갖춰야”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또한 더 나아가 비교적 반동적인 삶에 젖은 한국인들의 시각에서, 페미니즘을 습득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젊은이들에게 페미니스트가 되라고,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꼴페미가 되어 남성들을 죽이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으며, 많은 반동 세력들은 페미니즘과 여성 우월주의를 동격으로 보았다. 당연히 “참된” 페미니즘을 “거짓된” 혹은 “부패한” 페미니즘과 구별하고자 하는, 즉 참된 성 평등을 페미니스트나 여성우월주의자를 키우는 선동과 구분하고자 하는 시도도 논쟁에 가세했다.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심지어 여전히 민주공화국이라 불리는 지역 곳곳에서 우후죽순처럼 조직되는 “페미니즘 모임”을 보면서, “메갈”이라는 새로운 질병이 발생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병은 주로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인 여자와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 등 여러 문제 있는 사람들에게 감염된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syo : 오와우, 엉클 테리, 누구라도 자기가 생각하는 단어를 집어넣으면, 금방 이렇게 멋진 문단을 만들 수 있는 걸요!
테리 핀카드 : 참 쉽죠잉?
그나저나 이 책은 이제 겨우 100쪽. 남은 게 1000쪽..... 오와우, 엉클 테리......
3
(...) 결국 그를 마지막으로 잘리어 왕조는 이름처럼 대가 잘리었으며 (...)
_ 남경태, 『종횡무진 서양사 1』
어느덧 2권도 반절을 넘겼다. 간간히 아재 개그를 만나면서. 그럴수록 더욱 그리운 남경태 선생님.
-- 읽은 --
천정환, 정종현, 『대한민국 독서사』
규리네, 『게임의 심리학』
카와하라 카즈네, 아루코 『내 이야기!! 1~13』
-- 읽는 --
테리 핀카드, 『헤겔』
남경태, 『종횡무진 서양사 2』
녹색평론 편집부, 『녹색평론 통권 163호』
도가와 신스케, 『나쓰메 소세키 평전』
이경미, 『잘돼가? 무엇이든』
미카엘 뢰비 외, 『마르크스주의 100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