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필 철회 한 시간 만에 다시 절필

 

1

 

마지막으로 시를 쓴 것은 이십대 중후반(그러니까 메소포타미아 문명 때쯤)이었다. 나는 시를 쓴다고 깝치면 안 될 놈이야 하는 마음으로 절필을 선언했지만, 그 선언에 관심 있는 사람도, 그 선언을 확인한 사람도 세상에 syo 하나뿐이었으므로, 그리고 애당초 쓰는 일 자체가 세상에 한 점 보탬이 되지 않았으므로 쓰지 않는 일 역시 큰 의미는 없었다...... 서재 친구 분들 중에는 꾸준히 시를 지어 게시하는 분들이 몇 있는데, 한때나마 끄적여 본 사람들은 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나비종님께서 syo의 서재에 들르셨다가 페터 비에리의 '문학의 정확함'에 대해 생각하시다 좋은 시 한 수를 지으셨기에, 답시를 드리겠다는 댓글을 달았다. 달고 나서 알았다. 아놔, 나 또 깝쳤어.......

 

그리고 아침나절 한 시간을 매달려 이 흉한 놈을 시랍시고 쓰고 나니까, syo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은 그때 그 절필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가장 잘못한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꽤나 잘못한 결정 가운데 하나가 이 시를 쓰겠다는 깝침이었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리하여 또다시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 가운데 하나가 될, 두 번째의 절필을 이 자리에서 선언합니다...... 안 써, 이제. 안심하세요.

 

 

 

정확함

 

 

당신과 나란히 그 개울을 건널 땐

물살 매서워

그저 그 손이 필요했던 것

여울 밑에 눌러 놓은 우리 불안한 발자국들이

그대로 네 줄 길이 될 줄이야

 

이제 우리 물을 다 건너

당신은 당신에게로 갔고

나는 혼자 기슭에서 돌아보며

저 길이 다 내 혼자

내 혼자 뜻으로 닦은 길이라 하고 싶어서

 

물은 아직 창창하고 여태 당신은 오지 않았는데

끊어진 개울의 허리춤에서

짓밟힌 물풀이 울음이 들려

나는 얼른 당신의 공백을 훔쳤지

없는 당신의 이름을 대려고

당신이 간 방향을 가리키려고

 

당신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고 온 목을 축이며

맑고 단 이 물의 값을

누구에게 치를지 그가 물었을 때

혀를 스치는 이름을 간신히 붙잡기도 했지

우리가 찍은 건

발자국이 아니라 도장이라 우기고 싶어

 

끝내 나는 그 모든 침묵을 안고서

돌아온 당신의 손을 잡고 다시 개울을 건널 때

발자국들을 되밟아가며 되돌아갈 때

내 발이 내 발자국에 철컥 맞아 들어갔는데

그때 덜컥 하늘 열리고

솟대처럼 서서 우러러보자

 

퐁당

개울에 별빛 떨어지는 소리

 

 

 

2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the political)’ 같은 구호는 세상에 관해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위장되어 있지만 사실은 행동을 제안하는 것이다저런 구호의 의미는 종종 불분명하지만휴면 상태의 암시를 담고 있다그 암시는 새로운 상황에서 깨어날 수 있고 개인의 자유와 같은 소중한 다른 가치들을 훼손할 수 있는 정책들을 요구할 수 있다이런 말이 있다자유를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경계(警戒)이고경계의 한 가지 중요한 방식은 정치적 수사에 주의하는 것이다.

케네스 미노그정치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페미니즘 제2물결의 슬로건은 모든 사생활을 폐기하고 공적인 것으로 만들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비록 사생활이라고 할지라도 부당한 폭력이 있었다면 더는 개인적인 문제로 둘 것이 아니라 사회의 법과 제도가 개입해야 한다이 정도의 상식조차 사회적 합의를 보지 못한 상태가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권김현영성폭력 폭로 이후의 새로운 문제피해자화를 넘어

 

동시에 여러 권의 책을 읽다보면,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책을 고른 것이 아닌데도 이런 문장들을 두세 시간 간격으로 만나는 일이 있다. 이런 비교는 참 재미있다. 주장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말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어떤 말은 가치를 직격하고 또 어떤 말은 가치를 에두른다. 그것은 공격과 수비의 문장이다. 문장은 삶에서 길어 올릴 수밖에 없다. 공격하는 삶은 칼의 문장을, 수비하는 삶은 방패의 문장을 만든다. 그러나 때로는 잘 갈아놓은 칼이 적의 칼과 맞부딪어 공격을 막고, 단단한 방패가 적의 정수리를 내려치는 데 쓰이기도 한다. 칼이건 방패건, 열심히 휘둘러야 하겠다.

 

 

 

3


 

중요한 것은 여기서 말하는 노동계급의 도덕이 결코 노동자들의 가장 흔한 행동과 사고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노동계급 남성의 일부는(물론 중간계급 남성 일부도가정에서 야만적인 폭력을 휘두르지만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가정 폭력을 도덕적으로 용납하지는 않는다노동계급의 도덕은 마르크스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의 속성이라고 보거나 노동계급이 따라야 할 것으로 제시된 규칙들도 아니다오히려 노동계급의 도덕은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며 역사적으로 발전시킨 가치·규범·교훈이 집적된 것이고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것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것이다.

존 몰리뉴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173

 

이 문단에서 깊이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지점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도덕관념이 실제로 어떤지 하는 문제가 아니라(물론 그 문제도 어떤 논점에서는 중요하지만), 운동을 이어나가는 이들이 도덕을 형성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요는, 만들고 싸우는 게 아니라 싸우면서 만든다는 것. 싸움 밖에서 만드는 게 아니라 싸움을 통해 만든다는 것. 결국 싸움이 도덕을 만들고, 도덕이 싸움을 만든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시작점을 명확히 짚어낼 수는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싸우는 도덕이 진짜 도덕이라는 것.

 

 

 

 

-- 읽은 --



요코가와 준, 내가 사랑한 물리학 이야기

존 몰리뉴,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조원재, 방구석 미술관

이언 스튜어트, 보통 사람을 위한 현대 수학

김기범, 오늘도, 녹색 이슈

케네스 미노그, 정치

 

 

-- 읽는 --



남경태, 종횡무진 서양사 1

로버트 H. 프랭크,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손기태,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

존 조던, 로봇 수업

김한민, 페소아

비토리오 회슬레, 독일 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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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10-29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뭐래도 제가 쓴 시보다는 훨씬 낫습니다요, 네.

syo 2018-10-29 12:28   좋아요 0 | URL
그래도 절필이요 ㅎㅎㅎ 안 맞아 나랑 안맞아요-_ㅜ

단발머리 2018-10-29 13:56   좋아요 2 | URL
나도 그 절필 반댈세~~~~~~~~~~!!

2018-10-29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29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10-29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욕망의 정신분석학이 느껴지면서 난해한...ㅋ
좋은데요 뭐. 계속 써 보지 그래요.
절필 한다고 하는 사람치고 정말 절필하는 거 못 봤어요.
발표를 안한다는 것 뿐 어디선간 깨작거리고 있을 거라능.
늙어서 기운떨어지면 모를까.

syo 2018-10-29 16:01   좋아요 0 | URL
욕망의 정신분석학 ㅋㅋㅋㅋ 뭐 그런 거창한 거 없어요 ㅎ
그리고 정말 늙어서 기운떨어졌어요 ㅎㅎㅎ 메소포타미아 때 20대였다니까요?

2018-10-29 15: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29 1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비종 2018-10-29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그림같은 이야기 시로군요.
‘당신과 나란히‘라는 도입 부분에서 살짝 설레는 포인트가 있구요,
‘당신의 공백을 훔쳤지, 퐁당‘ 부분의 표현이 마음에 듭니다.
연상되는 장면은 마지막 ‘퐁당/ 개울에 별빛 떨어지는 소리‘의 이미지가 가장 좋구요.
정확함의 절정은 ‘철컥‘과 ‘덜컥‘일까요? 모험 영화에서 문양이 맞아들어갈 때 철컹하며 열리는 동굴의 문이 연상됩니다.
당신에게로 간 당신이 결국 돌아왔군요. 취향이 맞는 시집의 첫 장을 읽은 기분입니다. 저는 마음에 드는데요?^^
(*분위기 깨는 딴지 : 되돌아가는 발이 아까 그 발자국에 철컥 맞으려면 뒷걸음질로 가야할 것 같습니다만ㅋㅋ)

2. 결국 칼로 쓰이느냐 방패로 쓰이느냐는 그것을 휘두르는 이의 의지에 달려있다는 말씀이시군요.

3. 싸우는 도덕.. 고고하게 물 위에 떠 있는 백조가 떠오릅니다. 물 아래에서는 치열하게 발버둥을 친다는. 뭐든 저절로 편하게 얻어지는 것은 없나 봅니다.

syo 2018-10-29 20:47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되돌아가는 발자국 그거 저도 생각했어요. 얘는 뒤로 걷나.... 얘는 발가락이 앞뒤로 나 있나 ㅋㅋㅋ 그냥 냅두긴 했지만......

시보다 해설이 더 좋은 거 아닌가요 ㅎㅎㅎ

이하라 2018-10-29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필하지 마세요. 곧 또다른 시를 쓰고 계실 것 같아요.

syo 2018-10-29 20:49   좋아요 0 | URL
다시 10년이 지나면 또 모르겠지만 ㅎㅎㅎ 시는 아무래도 저랑 잘 안맞는 것 같아요

라샤 2018-11-05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쓰지 않는 일 역시 큰 의미는 없었다는 말이 재미있어요..ㅋㅋㅋ

syo 2018-11-05 14:47   좋아요 0 | URL
재미있지만 사실이지요 ㅎㅎㅎㅎ 반갑습니다, Alain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