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에 쌓인 먼지를 걷고 읽은 책을 읽지 않은 책 뒤로 옮기는 작업을 하다가 오래 잊었던 책 한 권을 발견한 s는 그대로 퍼질러 앉아 그 책을 끝까지 읽었다. 그 책의 이름이 무엇인지, 어느 시대를 살던 누구의 작품인지가 우리에게 중요치는 않다. 책 한 권만큼의 시간이 점이나 선처럼 연약하지만 뚜렷하게 녹아버리는, s의 인생에 때때로 찾아오는 이 마술 같은 사건의 구성 요소들이야말로 잠시나마 생각해볼 만하다.

 

지금보다 더 젊고, 어리석고, 무모하였으며, 그래서 더 선명했던 s가 있었을 것이다. 젊음이 늘 그런 것처럼, 자신을 한 가운데 꽂아 그걸 축으로 세상을 돌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 신성한 회전의 어느 지점에서 s는 한 권의 책을 만났을 테고, 그 책이 무겁고 끈적하게 s에게 달라붙어 세상의 공전 속도로 착각되던 s의 자전 속도를 얼마만큼 늦췄을 것이다. 그리고 천구에 별자리가 박혀 이야기를 증명하듯, 그 만남이 s의 마음에 박혀 무엇인가를 증명했을 것이다. 젊고 어리석고 무모하여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뒤이은 수 천 수 만 걸음 중 몇 발 정도는 그 만남에서 비롯하였을 것이다.

 

인생의 항로는 등 뒤로만 펼쳐지는 것 같다. 앞은 그저 어두울 뿐이고, 몇 개의 가느다란 선분으로 이어진 흔적만이 지나온 날을 기록하며 존재를 외치고 있다. 사람의 생 전체는 하나의 별자리고, 사람의 현재는 그 별자리의 제일 끝별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선분으로도 이야기는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만남은 그 선분을 다시 한 번 꺾어 다음 자리에 새로운 끝별을 박는다. 그러면 다시 이야기는 새로워진다. 끝별은 자기가 별인 줄 알아도 어느 별자리의 끝별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어제까지의 별들을 바라보며, 이 긴 항로가 어떻게 변곡되어 왔는지 추측하는 밤이 있다. 변곡의 밤과 추측의 밤 사이의 거리는 늘 멀다. 그러나 너무 멀지는 않다. 너무 가까이 서면 별은 보이고 별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너무 멀리 서면 별자리가 하나의 별로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은 어느 시기에, 언젠가 읽었던 책을 다시 한 번 읽어야 한다. 우연으로, 혹은 의지로.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건 하늘의 뜻과 시간의 조력이 조금은 필요한 일이다.

 

 

180901 180918 : 24



1.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

: 기본소득에 관한 책들은 의외로 많지만 막상 읽어보면 의외로 이렇게 많을 필요가 없겠는데 싶을 만큼 겹치는 데가 있다. 그렇다면 든든한 한 권을 여러 번 읽는 것이 남는 일일 수 있다. 아직 서너 권밖에는 읽지 못해 섣부르지만, 아직까지는 이 책이 바로 그 한 권이다.

 

2. 언젠가, 아마도

: 보자마자 이건 내가 따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글을 쓰는 사람이 있고, 읽는 사람이 이 정도면 나도 하겠는데 하는 착각에 취해 백지 앞에 마주앉아 좀 끄적대고 나서야 비로소 그 경지를 드러내는 글을 쓰는 사람도 있다. 초식이 없는 무공이 결국 가장 무서운 무공임을 설파한 무협지가 있었다. 색깔 없음을 색깔로 삼는 작가는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워 무섭다. 아무렇게나 쓸 수 없는 글을 아무렇게나 쓸 수 있는 글인 것 마냥 위장할 수 있는 작가는 무슨 일을 칠지 짐작하기 어려워 무섭다.

 

3.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처음 이 책을 읽고 작가 후기에서 이 작품이 소설이 아니라는 식의 쓴 소리를 많이 들었다는 진술을 발견했을 때, 그 사태를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하루키에 손대기 전 거의 전작을 하다시피 했던 작가가 배수아였기 때문인데...... 하여간 오늘날의 자리에 가져와도 독특하고 독창적인 작품이긴 하다. 젊은 날 만났던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감동까지야 다시 찾아오진 않았지만, 생각해보니 원래 항상 하루키는 좋은데 왜 좋은지 딱히 설명하기 힘든 양상으로 좋았던 것도 같다.


4. 남자는 불편해

: ‘남성성이 담지하는 수많은 것들 가운데 syo가 가장 경기하는 것은 이성객관성이다. 그건 남자와 여자 중 누구의 것이냐는 문제가 아니라 누구의 것도 되기 힘든 것에 가깝다. 도대체가 스스로 객관적이라 생각하는 인간이 어떻게 객관적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아무 근거도 없이 자기가 파악하는 편향적인 자기 정보만을 근거로 스스로를 객관적이라고 칭하는 것이, 어떻게 이성적인 행동이란 것인지. 스스로를 표준의 자리에 올려놓는 저 무지함, 무심함, 무자비함 같은 것들을 이 책은 때리고 있다.

 


5. 전한길의 공시 합격을 위한 선한 영향력

: 하루 최소’ 16시간씩 6개월간 공부했다는 거대한 7·9급 영웅들의 장쾌한 일대기가 담겨 있는 책. , 이 좋아 미치는 독서를 해도 10시간이 넘어가면 식상해서 식상사할 지경인데. 저들을 과연 인간 승리라 해야 하나, 인간이길 포기한 공부짐승이라고 해야 하나.....

 

6. 단어로 읽는 5분 한국사

: 책이 이쁘게 잘 빠졌다. 하지만 한국사라는 타이틀을 만나면 어느 정도의 함량을 기대하기 십상인데, 그걸 채울 만큼 알차다고 할 순 없겠다.

: 아이들에게 읽히고 싶다. 그러나 syo에겐 아이가 없지. 그리고 아이에게 읽히고 싶은 책은 있는데 책을 읽히고 싶은 아이가 없다는 대구를 뼈대로 하는 이런 식상한 말장난, 이번을 마지막으로 그만하고 싶다. 그러려면 애들 읽기에 좋은 책은 이제 슬슬 알아서 커트해야 하겠다......

 

7.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 더할 나위 없는 것이 최고를 뽑는 조건이라면,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는 단연 2018syo 주최 양서대상 대상 수상작으로 점쳐진다. 이런 걸 쓰다니. 그리고 이렇게 쓰다니. 존경이라는 것을 한 번 해볼까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

 

8. 블랙코미디

: 이런 건 재능인가.

: 이런 걸 책으로 엮어 내면 득보다 실이 클지도 모른다. 독서가들은 책에 관해선 아무래도 엄격한 편이니까.

 


9.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할 6가지 코드

: , 별 거 없네요. 이 장르의 책이 대충 그렇지요.

 

10. 빵 고르듯 살고 싶다

: 사는 게 다 비슷하다고 느끼게 하는 삶이 있고, 제각각 다 달리 산다고 느껴지는 삶이 있다. 또한, 에세이는 다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에세이가 있고, 에세이는 제각각 다 다르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에세이가 있다. 삶과 글은 상관이 있지만 꼭 함께 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나랑 사는 게 비슷한 것 같지만 어쩐지 다르게 느껴져 식상하지 않은 에세이나. 나랑 사는 게 전혀 다르지만 어쩐지 나와 닮아 있어 친근한 에세이가 있다. 많이 읽어야 내게 좋은 에세이를 만난다.

 

11.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아프게 하는 이야기가 나는 아프다. 손을 내밀거나 내밀려다 마는 것도 아픈 사람이고 그 손을 잡거나 뿌리치거나 그 손에 침을 뱉는 것도 다 아픈 사람이다. 주고받는 그 손이 아픈 사람들을 아프게 할 동안, 아프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방식을 손을 사용하지 않으므로 영영 아프지 않다. 아픈 사람은 점점 아프고 아프지 않은 사람은 늘 아프지 않다.

 

12. 고민과 소설가

: 진짜는 에세이인가.



13. 꿀벌과 철학자

: 기획 자체가 흥미롭고 귀하다. 하지만 이런 책은 대체로 소수의 팬을 만들고 다수로부터 무관심의 대상이 되기 쉽다. syo는 다수가 되었다.

 

14. 정치는 잘 모르는데요

: syo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좋은 책,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정치적 중립이 아니라 정치적 올바름이다. 그러나 어쨌든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책은 그 자체로 가치와 의미가 있다. 자신의 생각을 너무 과신하지 말자. 솔직히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것은 잘 벼려진 좋은 생각을 알려주는 것보다 못할 때가 많다. 그래도 가끔 더 나을 때가 있다.

 

15. 우미인초

: 소세키에 대한 편애로 가득 찬 인간으로서 무심히 별 다섯 개를 때렸지만, 솔직히 낡았고, 강압적이고, 지루하다. 100년 전의 소설이란 뭐, 어느 정도 그런 법이다. 시간이 이 시대에 이 책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은 것일까.

: 300쪽까지 작정하고 재미가 없다. 그러나 300쪽을 넘기면 모든 고구마가 쓸려 내려가고 폭풍처럼 사이다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셰익스피어의 하위호환 같은 느낌이 되고 만다.

 

16.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 전공책을 제외한 과학책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과학이 거들먹거리는 책과 과학이 거드는 책. syo가 가장 사랑하는 과학저술가 이정모 선생님의 손끝에서 과학은 항상 거들 뿐이다. 그리고 아직은, 거드는 책이 잘 읽히는 시대가 아닐까.

: 뒤표지에 서민 선생님의 추천사가 있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우리 둘의 격차를 다시금 절감한다. 이정모 선생님, 언젠간 꼭 따라잡고 말 겁니다. 10년만 기다리세요.” 이러면 syo는 작가도 뭣도 아니면서 괜히 박탈감이 든다. ..... 이 양반들이 여기서 지금?



17. 불편한 인권

: 가끔, 이분은 정말 너무 빨리 태어나신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르네상스적 지식인이라는 칭호가 앞에 붙는 박홍규 선생님. syo는 르네상스가 뭐 어떤 건지 박홍규 선생님을 통해서 조금씩 감을 잡고 있다. 다빈치가 아니라.

 

18.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

: 실은, 후속작이라 할 수 있는 고전으로 철학하기를 먼저 읽고 이 책을 본 건데, 아우만한 형이 못 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이하준 선생님보다 더 좋은 학자가 얼마나 있는지는 syo가 알 수 없으나, 이 책보다 더 좋은 책이 얼마간 있음은 잘 알고 있다.

 

19. 카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

: 마르크스 개론서 중 가장 좋은 책을 찾는 방법이 무엇일까? 출간된 모든 마르크스 개론서를 다 읽은 사람 1000명을 모아 설문조사를 한다고 하자. 가장 좋은 책은? 하는 질문에서 제일 많은 득표를 한 책을 고르면, 그걸로 될까? 의문이다. syo 생각에, 더 좋은 질문은 이렇다. 가장 좋은 책 3권을 꼽는다면? 앞의 질문에 어떤 책이 1등을 할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뒤의 질문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을 책은 단연 이 책이다.

 

20. 샤를 보들레르 :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

: 지금 보들레르는 아마 불지옥에서 자연과 문명 중 어느 쪽이 더 쓰레기인가를 놓고 루소와 멱살을 붙들고 싸우고 있는 중일 것이다. 지상에서 문장으로는 전 유럽에 이름이 떠르르 했던 두 사람이므로 승부는 아마 펀치력에서 결정되지 않을까. 둘 다 그다지 싸움을 잘 할 것 같지는 않다. 컨디션 좋은 사람이 이기지 않을까? syo 마음속의 루소와 보들레르도 그렇다. 그날 컨디션에 따라 얘 말이 맞는 거 같다가도 또 쟤 말이 맞는 것도 같고 그렇다.



21. 인간을 위한 약속 사회계약론

: 다 알아듣겠는데, ‘일반의지는 정말 애매하다. 그게 뭔지 제대로 알 때까지 루소를 다룬 다른 책들을 이것저것 읽어야 하겠다. ‘루소 골목에 발을 들이민 것 같다. 빨리 이 골목이 끝나기를.

 

22. 우리는 사랑했다

: 아직도 강화길의 다른 사람을 읽고 받았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 그리고 작가의 전작을 이야기하면서 아직도 그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라는 식의 코멘트를 다는 게, 이 작품에 대한 생각이 어떻다는 의미인지는, 널리 일반적으로 추정되는 바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 그 생각이 맞습니다.

 

23. 일본적 마음

: 90년대 쓴 글도 있고 그렇다. 좀 그렇다.

 

24. 스스로 생각하기의 전통

: 언제나 빛나는 선생님의 사유. 탐나는 그 빛.

: 그러나 그 사유의 빛을 어떻게 내 인생 쪽으로 당겨 와야 하는지는 전적으로 읽는 이에게 달렸다. 뭔들 아니 그렇겠느냐 만은, 그걸 안다고 해서 허망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좋은 말씀은 좋게 허망하고, 너무 좋은 말씀은 너무 좋게 허망할 때가 있다. 다 제가 못나서 그렇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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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8-09-25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 연휴 잘 보내고 계시는지요.
우미인초 300쪽 이후..믿고 갑니다.ㅎ

syo 2018-09-25 12:23   좋아요 1 | URL
평을 쓸 때는 엄청 호기롭게 써 놓고는, 그래서 한 번 읽어보겠다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왜 이렇게 조마조마한지 모르겠습니다 ㅎㅎㅎㅎㅎ

북프리쿠키님께서도 즐거운 연휴 중이시겠지요?^-^

수이 2018-09-25 14: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미인초 빼들고 카페 나갑니다! 뒤늦었지만 쇼님 즐거운 추석 보내셨으리라 믿으며_ :)

syo 2018-09-25 15:36   좋아요 0 | URL
저는 괜찮은 추석을 보냈는데 카페에서 우미인초 읽는 추석만큼 괜찮지는 않았지요 ㅎㅎㅎ 하필 우미인초라니 쉽진 않겠으나 수연님 더 즐거운 연휴로 마무리하시길^-^

2018-09-26 0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26 0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블랙겟타 2019-09-24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syo님께선 왜 왜 때문에! 계속 제가 읽으려는 책(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마다 보이시는 겁니까? ㅎㅎㅎㅎ
어떤 책인가 하고 알라딘에서 검색중에 syo님의 글로 들어와버렸습니다!
syo님의 글을 읽고 이 책을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어요. :)

syo 2019-09-27 18:41   좋아요 0 | URL
응? ㅋㅋㅋㅋㅋㅋㅋ 블랙겟타님과 제 취향이 놀라울만큼 유사한 탓이겠지요!

2022-01-25 1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26 1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26 2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