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못 가진 것들에 대하여

 

1


세밀하게 뜯어보면, 삶이란 두 가지 일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무엇인가를 지키는 데 성공하는 일, 그리고 실패하는 일. 마찬가지로, 조금만 선명하게 응시하면, 인생의 변곡점이란 그저 지금부터 지켜나갈 것들을 고르고, 재어보고, 때에 따라 바꾸어 쥐는 사건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아픔(상실이나, 상실에 뒤따르는 후회나, 후회에 뒤따르는 자괴감 같은 것들)을 통과한 사람들은 간혹 기념품 같은 지혜를 얻는다. 내가 탐내고 가져오고 싶어 목을 매던 그 대상이, 실은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의 이면이거나, 그것을 약간 치장했을 뿐이거나, 심지어는 그것의 변색, 또는 변질일 따름이었다는 지혜를. 그때 내가 골라야 했던 선택지는, 쟁취가 아니라 지키는 것이었다는 처연한 진실을. 그때 좀 더 오래 내 안을 들여다보았어야 했는데, 하고.

 

 

2


단맛이 나지 않는 커피는 마시지 못하는 사람을 좋아한 일이 있었다. 시원한 커피로 단 한 사람의 목을 채워주고 싶은 욕심, 그 욕심이 부적절하거나 부당해 보이지 않도록 하려고 부러 열두 잔의 아이스커피를 만든 일도 있었다. 그 사람의 손에 종이컵을 쥐어주는 나의 손길과 눈길에 특별함이 있었을까, 있었다면 그 사람이 알아봐주었을까, 알아봐주었다면 그 뒤에 숨어 있는 마음도, 찐득했을 그 욕심의 냄새도 그 사람이 맡았을까, 맡았다면 나는 힘을 내어 한 발을 더 내딛어야 할까, 내딛어도 될까, 된다면, 정말 그게 된다면, 그래서 그 발걸음이 계속 이어진다면, 그 끝에서 결국 나는 저 사람을 얻을 수 있을까, 얻을 수 있다면 지킬 수도 있을까, 지킬 수 있어서 지킨다면, 지키면서 내가 행복할까, 행복할 수 있을까.

 

커피 한 잔을 건네는 호감 속에서도, 심지어 그 독점배타적인 호감을 숨기기 위해 열두 개로 쪼갠 다음 그저 한 조각 호의로 위장하는 가운데서도, 나는 내내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지켜야 할 것이 있었고,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일이 곧 가져야 할 것을 가지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많이 늦었고 많이 아팠다. 세상은 내게 그런 신호를 준 적이 종종 있었다. 어떤 때는 그 신호를 받지 못했고, 또 어떤 때는 정확히 수신하였으나 구겨서 내다버렸다. 욕심의 먹이로 주었다.

 


3


더 가지기 위한 핑계로 그저 지키고 싶었을 뿐이라고, 지켜주고 싶어서 그랬던 거라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지키는 것은 그저 지키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공격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무엇을 지니고 있는지 정확히 꿰고 있기 때문에, 내게 부족해 보이는 것은 실제로 부족한 것이라 이해한다.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지니고 있는지 정확히 꿰기도 어렵고,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곧바로 내게 부족한 것은 아닐 수도 있으며, 어떤 부족함은 채우고 채워도 끝내 부족함으로, 더 거대한 부족함으로 남기도 한다.

 

지키기 위해 더 가지려 한 사람들이 더 가지기 위해 지키지 못한 이야기가 세상엔 많다. 내가 가진 것이 있음을 알았을 때 멈추어 내 손을 오래 바라보고 싶다. 세밀하게 뜯어보고, 선명하게 응시하고, 내가 통과한 아픔들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싶다. 지켜야 하는 것들을 지켜야 하는 그 자리에서 지키고 싶다.

 

 


당신을 보고 싶으면 볼 수 있는 것이게 기적이다책을 읽고 나니 지금 다른 곳에서 잠들어 있을 사람의 구부정한 등이보고 싶다잠든 등을 사랑하는 것내 취미다.

장석주 박연준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보오


되돌아보면 그토록 더웠던 여름과 추웠던 겨울이열중쉬어 자세로 훈화를 듣던 학교운동장이장작을 훔치기 위해 원정대를 결성한 그 어느 날들이 모두 꿈만 같다다만 그것을 '검정 고무신'처럼 추억하고 싶지는 않다무엇이든 추억하면 미화하게 된다내가 외면한 괴물들은 내 다음 세대의 가슴속에서 다시 자라날 것이다그래서 나는 있는 그대로 '기억'하기로 한다내 아이들이 성산동과 망원동에서 학교에 다니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성서초등학교나 성산초등학교에 배정받아 아버지와 할머니의 후배가 된다면 참 멋진 일이겠다아이가 아카시아 활짝 핀 성미산길을 따라 등교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다만 어느 길을 걷든 대한민국보다는 자기 자신을그리고 자신을 닮은 친구들을 더 사랑하는 한 존재로서내딛는 걸음만큼 조금씩 커나가면 좋겠다.

김민섭아무튼망원동


의젓해지려고 애쓰는 이 순간에도 삶도 글도 여전히 어렵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하루를 구성하는 것도하루를 통과하는 것도 어렵다다만 고요한 시간에 나와 대화해 보면 나는 여전히 나무를 닮은 방식으로 성장하고 싶어 한다벽을 통과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순간이 자주 있었으나그 경험으로 나는 삶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이리라그리고 나무에 찾아오는 바람처럼 글이라는 움직임이 굳는 성질인 나를 아주 굳지는 않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원최소의 발견


인생의 좌표라는그 단어부터 너무나 거대해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는 세상의 말에 더이상 무심할 수 없는 나이에 닿아 가면서결국 버티어내는 것만이 유일하게 선택 가능하되 가장 어려운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이기는 것도좀더 많이 거머쥐는 것도 아닌 세상에 맞서 자신을 지키고 버티어내는 것.

허지웅버티는 삶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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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eg 2018-07-23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 한 잔을 건네는 호감 속에서도, 심지어 그 독점배타적인 호감을 숨기기 위해 열두 개로 쪼갠 다음 그저 한 조각 호의로 위장하는 가운데서도, 나는 내내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chaeg 2018-07-23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심스러운 마음을 어찌 이렇게 잘 표현할 수 있을까요^^

syo 2018-07-23 18:04   좋아요 0 | URL
음.... 정말 저랬거든요^-^
허허허. 옛날 기억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