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 사는 꼬락서니에 신경 쓰는 듯 보이는 꼼꼼한 당신
대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다. 치킨 집에서 3000cc 두 통을 비우고 우리는 알아챘다. 내일이 회로이론인지 전자기학인지의 중간고사라는 사실을. 이제 겨우 네 시 반이었으므로(......) 지금이라도 일어서서 책가방을 메고 도서관으로 들어간다면 아직 승산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끝내 여덟 시까지 놀았다. 그제야 도서관으로 올라가 놓고도 곧바로 열람실로 향하지 않고, 술 냄새 빠지면 들어가자는 허접한 핑계를 대며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도시를 내려다보며 밍기적거렸다. 친구는 담배를, syo는 추파춥스를 빨며 비타500을 마셨다. 지금부터 밤새면 다 볼 수 있겠지? 친구가 말했다. 당연하지, 내일 오후 시험인데. 두 번 볼 수 있음. syo가 결연하게 대답했다. 친구는 허공에 길게 담배연기를 뿜더니 말을 이었다. 야, A받으면 좋겠다이, 전날 실컷 술 달리다가 띡 공부해서 A, 크- 멋지지 않냐? 역시 syo가 결연하게 대답했다. 동기, 아무래도 그건 안 되겠는데. 우리 같은 놈이 A 받으면 그건 곧 이 세상이 공정하지 않다는 이야긴데, 넌 그런 세상을 원하니? 난 우리 같은 놈이 칼처럼 C 받는 정의로운 세상을 원한다. 동기여, 정의를 위해, 세상을 위해, 우리는 당당히 C를 쟁취하는 거야. 오케이? 친구는 담담한 손동작으로 담배를 비벼 끄더니,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래, 그래, 너 미친놈인 거 알아, 다 알아.
그 학기 성적표를 받아보니, 세상은 정의롭고 공정하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27일에 6월의 마지막 페이퍼를 쓰고 한 열흘을 알라딘에 얼씬거리지도 않다가 결국 약속대로(?) 못 참고 들어왔더니, 신랄한 댓글들이 몇 개 달려 있었다. 요지는 고시생이 공부는 안하고 이러고 책이나 쳐 읽고 앉았으니 정의를 위해서 넌 광탈이라는 것인데, 처음에 그 댓글들을 봤을 땐 놀라 자빠지는 줄 알았다. 아니, 이 댓글 이거, 어쩌면 이렇게 내 맘과 똑같지. 혹시, 내가 달았나??
사실 그건, 누가 봐도 그렇기 때문이다. 이러면 폭망하는 것이다. 그것이 정의다.
누가 나타나 열심히 공부했느냐 물으면, 자랑은 아니지만 너무 명백한 사실이라 망설일 염치도 없이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지난 6개월이었다. 광탈을 할 것 같냐면 또 그렇지만도 않은 게, 얼렁뚱땅이지만 작년에도 한 번 봤던 시험이었고, 지난 몇 달의 G/S 결과도 so so였으므로 결국 시험장에 들어갔다 나와 봐야 답이 나오는 상황이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면서 제일 많이 좌절했던 부분은, 내가 이런 종류의 시험에 맞지 않는 인간이라는 것이 자꾸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꾸역꾸역 한 달을 참으면, 다음 한 달 동안 정량의 두 배 가까이 처 읽는 의지박약. 남들은 의지를 가지고 읽는 책을, 의지를 가지고 읽지 않아야 하는 입장이라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겠지만, 결국 남들이 의지가 부족해 독서에 실패하듯, syo 역시 의지가 부족해 독서에 성공(?)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니 인생 망한 거 아냐고 물으신다면, 그거 확실히 알고, 안 지 벌써 몇 년 되었으며, 그 몇 년 동안 이미 망한 거 나태하게 휘적휘적 살다가 가기로 결정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syo는 본래가 미미하고 미시적이라, 한 달에 백만 원을 벌든 백억 원을 벌든, 결국 좋은 책 읽고 뻘글 쓰는 동안 가장 행복한 인간이다. 세무사가 되건 세신사가 되건 많이 읽을 것이고, 변호사가 되건 변검술사가 되건 짬짬이 쓸 것이다. 그리하여 비록 탈락 확률이 더 높은 오늘이지만, 오늘까지 읽고 쓰면서 보낸 하루들은 읽고 쓸 새 없이 공부했던 다른 하루들보다 명백히 더 즐겁고 행복했다. 물론 결과는 모두 syo의 책임이고, 책임져야 할 망한 선택의 결과, 가난과 비교와 멸시와 열등감을 감내해야 했던 경험이 풍부하여 면역 체계도 완비하였사오니 우려의 말씀은 이제 충분하다고 전해 드리고 싶다.
악플이라고 부르려면 일단 기본적으로 읽고 기분이 나빠야 할 텐데, 저 댓글들은 구구절절이 다 맞는 말이라 기분 나쁜 데가 별로 없다. 한 군데 쓰면 syo가 읽지 못할까 염려하여 여러 데에다 댓글을 다신 정성이나, syo가 써놓고도 다시 읽어보니 정말 머저리도 상 머저리 같은 문단을 짚어내어 반성과 사과의 기회를 주신 데 감사한 마음에 이렇게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밥은 너무 잘 먹고 다니고 있고요, 왜 자꾸 거울을 보라고 하시는지 잘 모르겠지만 맨날 보는 얼굴 그대로라 달리 드릴 말씀이 없네요. 창문을 열고 싶어질 거라는 말씀은 아마도 창문 열고 뛰어내리고 싶어질 거라는 뜻이 아닐까 추측하는데, 저 좁은 창문은 사시사철 열려 있는 상태고, 전 이번 시험이 망하고 그 다음에도 망하고 그 다음에도 또 망한다고 해도, 뛰어내릴 생각은 1도 없습니다. 어차피 인생 망한데 비하면 시험 망하는 건 별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세상에 읽을 게 너무 많이 남아서요.
길을 잃으면 분명 더 많은 새로운 길과 마주하게 될 거예요. 길을 잃은 뒤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아요. 한 책에서 그 방식을 얘기해주네요. 무조건 헤매기, 아무 길이나 따라가기, 남의 말 무조건 따르기, 무조건 앞으로 가기, 여러 길 차례로 가보기, 어느 기점을 중심으로 탐색하기, 그대로 있기,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왔던 길 되돌아가기, 다르게 생각하기, 다른 목표 찾기...... 부디 낯익고 편한 쪽은 버리세요. 낯선 길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세요. 새로운 길들은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으니까요.
_ 장석주, 『내 몫의 사랑을 탕진하고 지금 당신을 만나』
31.
나는 자제(自制)를 지향하지 않는다.
자제란 내 정신적 실존의 무한한 발산이 빚어낸 어느 우연한 자리에서 작용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러한 테두리를 내 주위에 둘러 그어야 한다면, 나는 그 선 긋기를, 무엇을 행하기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거대한 복합체를 그저 놀랍게 응시하면서 보다 잘 행하고, 거꾸로 이러한 순간이 주는 흥분이나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겠다.
_ 프란츠 카프카, 「죄와 고통, 희망 그리고 진정한 길에 대한 성찰」
나는 고민해보겠다고 했다. 거짓말이었다. 나는 고민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매일 스트레스를 받고 긴장하고 불안에 떨긴 해도 고민은 하지 않는다. 스트레스와 긴장은 일종의 반사작용이다. 인류의 조상이 아프리카 초원에서 발가벗고 돌아다닐 때부터 장착되어 있던 생존 기제다. 고민은 다르다. 대부분의 고민은 자기 자신을 향한 수동공격이다. 남 걱정이 타인을 향한 수동공격인 것과 비슷하다.
_ 금정연, 『아무튼, 택시』
"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 매일 읽기만 해."
"쟤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할 줄을 몰라."
"저건 소일거리 중에서도 가장 나태한 소일거리야."
"저건 게으른 거지."
그리고 특히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쟤는 ......을 하는 대신에 읽기만 해."
무엇을 하는 대신에?
"더 실용적인 것은 아주 많잖아. 그렇지 않아?"
여전히 지금도, 매일 아침, 집이 비고, 모든 이웃들이 일하러 나가면 나는 다른 것을, 그러니까 청소를 하거나 어제 저녁 식사의 설거지를 하거나, 장을 보거나, 빨래를 하고 세탁물을 다리거나, 잼이나 케이크를 만드는 대신 식탁에 앉아 몇 시간 동안 신문을 읽는 것에 가책을 조금 느낀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쓰는 대신에.
_ 아고타 크리스토프, 『문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