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의 태양, 삼천의 달, 그리고 두 개의 섬

 

그렇게 오래 기다려주었건만 끝내 나를 발견하지 못하는 세계에 대고 종주먹을 흔들던 젊은 내가 있었습니다. 겨울에서 봄으로 건너가는 포항 어느 바닷가였네요. 넘실대는 파도가 늦겨울 여린 빛살을 넉넉히 깨먹고도 부족한지 내가 모래에 남긴 발자국을 자꾸만 삼켰지요. 천천히, 그러나 꼼꼼하게 전진하는 저 많은 물들이, 물들의 혀가, 혀 끝에 서린 무자비함이 나는 무서웠습니다. 젊은 날 누구나 잠깐씩은 그러듯, 나 역시 스스로 하나의 대륙인 줄 알았어요. 언젠가는 반드시 발견될 거대한 가능성 덩어리, 희망의 너른 퇴적층이라 믿었습니다. 내 어깨 위로 세상 전체를 쌓아올리는 데 모자람이 없으리라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별 것 아닌 계기를 한껏 부풀리고 유리하게 해석하여 채굴한 성공의 징후들은 역시 별 것 아닌 계기들에 얹혀 사라져갔지요. 나는 어리둥절할 새도 없이 퇴락했습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말이 몇 달 안에 미안, 아무것도 아니야가 되더니, 다시 얼마 못 가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가 되었습니다. 그 마지막 말조차 안으로 삼키며 바스라지고 바스라지다가 나는 결국 인정하고야 말았어요. 나를 모두 갈아 저 바다에 부운들, 바다의 수위는 끄떡도 없으리라는 사실을. 그렇게 딱히 이긴 이도 없이 나는 졌고, 패배를 크게 외치러 그 모래톱을 찾아갔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아 발자국만 찍다 되돌아왔습니다. 들고 간 패배를 그대로 들고서 되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밤, 되돌아 온 도시에서 당신이 나를 불렀습니다. 이름난 어느 못가에서 당신과 당신의 언니와 당신의 형부가 될 사람과 나는, 바닷게를 먹고 그 바닷게가 위장에서 취할 만큼 많은 술을 들이켰어요. 어쩐 일인지 당신의 마음이 부어있었습니다. 내 마음이 부어 당신의 마음 부은 자리를 만지지 못했지요. 만져야 하는 줄을 몰랐어요. 그래서 당신이 펑펑 울었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펑펑 울었습니다. 그 울음 속에서 나는 너무나 많은 말을 들었습니다. 바닷가에서 내가 하려 했던 말이었고, 내가 해야 했던 말이었지요. 왜 나를 발견해주지 않았어. 내가 무너지고 바스러져 여기까지 작아지도록, 왜 나를 눈여겨 봐 주질 않았어. 당신은 끝내 아무 말도 보태지 않고 울었는데, 나는 당신의 어깨를 감싸며 알았다고, 알았다고 말했어요. 그 밤, 나는 무엇을 알았을까요. 그걸 말하기 위해서 오늘 이렇게 씁니다.

 

나는 내가 작을까봐 무서웠어요. 작은 것이 왜 무서울 일인지 알지도 못하고 그냥 무서웠어요. 그런데 내가 작다는 진실이 더는 뿌리치지 못할 만큼 가까이 다가왔는데도,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내가 그것을 인정했는데도, 세상은 조금도 서운해 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어요. 나는 톱니에 가시가 박힌 자동인형처럼 정지했습니다. 가만히 서서 계속 주변을 둘러봤던 거예요. 세상은 여전히 안정하고 안전했어요. 나의 잔해 앞에 침묵하고 정적했어요. 그제야 진짜로 알았던 거지요. 나는 작았던 게 아니었구나. 없었던 거구나. 아무리 찍어놓아도 금세 사라지는 그 바다의 발자국처럼, 나는 그저 내가 있다고 착각했던 거구나. 그렇게 이제는 진짜로 없어지고 있었어요. 그때,

 

당신이 나를 잡아준 거예요. 흩어지는 나를 그러모아 어떤 형태를 빚어 올렸던 거예요. 나는 내가 발견될 거라고만 생각했지,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거든요. 내게 눈이 있었다니. 그걸 당신이 알려주었습니다. 내게 당신을 발견할 능력이 있고, 당신을 오래 바라볼 자격이 있고, 당신이 지금의 나처럼 바스러져 없어지지 않도록 지켜볼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걸 알게 된 순간, 나는 발견된 거였어요. 나는 세상 전체를 다 위에 얹을 커다란 대륙이 아니라, 전체만큼 중요한 누군가를 위한 한 줌의 섬으로 발견되었던 겁니다. 당신이 찍어 놓은 발자국을 파도가 지우지 못하는 섬으로요.

 

그리고 그 밤 이후로 섬에는 3000개가 넘는 태양이 뜨고, 역시 3000개가 넘는 달이 졌습니다. 이토록 많은 해와 달이 다녀갔어도 섬은 여전히 작고 좁습니다. 조금도 넓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또 어떻겠어요. 이번 생에는 대륙이 될 욕심 같은 거 내지 않으려고요. 다음 생이나 다다음 생, 그것도 아니면 다다다음 생이나 노려볼까요. 실은 그 모든 건 전적으로, 다른 생에 우리가 또 만나느냐에 달린 문제입니다.

 

공개적으로 사랑합니다. 이렇게 대놓고요. 사람들 다 보는 데서.

 


키트오래 살면 모든 사람을 실망시키게 돼사람들은 내가 자기들을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보통은 도와줄 수 없거든그래서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게 될 한두 사람을 선택하는 과정이 시작되지내 인생에서 내가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너야.

데이브 애거스왕을 위한 홀로그램

 

눈 :

시각이라는 감각에만 의존해 우리가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은 시각의 즐거움도 시각의 도움도 외면한 채로 살아간다보이는 것만 잘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들에 여전히 무지한 채로.

김소연한 글자 사전


사랑의 편지 외에는 그 무엇도 쓰고 싶지 않다. S가 와서 언덕에 올라 함께 산책했지만 외로움이 다소 가신 것도 잠시어두워질 무렵이나 그 이후가 되자 머리가 어지러워질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사랑에 대한 욕구가 느껴졌다농담수다게임으로는 충분치 않다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원한다.

존 치버존 치버의 일기


 "있지." 

 "?" 

 "하늘 멋있지?"

 나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바다의 파란색과 하늘의 파란색이 그곳에서 선명하게 나뉘었다.

 "파랗네."

 같이 수평선을 바라보던 나오야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자기야이 파란색은 어떤 파란색이야?"

 "어떤 파란색파란색이 그냥 파란색이지."

 나오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야 그렇겠지만......"

 "하늘의 파란색은 하늘의 파란색바다의 파란색은 바다의 파란색."

 나오야가 자신만만하게 단언했다마치 새파란 하늘처럼 한 점 구김살도 없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때찾았구나생각했다이 하늘이 어떤 하늘인지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이 하늘과 같은 색으로 웃는 사람을.

요시다 슈이치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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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6-06 18: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syo님은 빨갱이 아닌 사랑쟁이... ㅎㅎ

syo 2018-06-06 20:40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프리즘메이커 2018-06-08 15: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님의 에세이집 출간을 청와대에 청원해야겠습니다

syo 2018-06-08 15:43   좋아요 1 | URL
프메님 에세이집 10권 출간하고 남는 나무로 제 거 하나 찍는 것으로.

psyche 2018-06-11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만 누르기에는 너무 좋네요. 너무너무너무 좋아요 버튼은 없나

syo 2018-06-11 11:2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제 마음 속 버튼을 누르셨네요.

2018-07-13 0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13 0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