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보폭 - 구체적인 삶을 강요받는 사람들을 위한 추상적으로 사는 법
모리 히로시 지음, 박재현 옮김 / 마인드빌딩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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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논문을 쓸 때였습니다. 도무지 늘어날 것 같아 뵈지 않는 요지의 논문을 있는 힘껏 잡아당겨서 늘려놨는데, 그걸 또 한 페이지 가량으로 줄여야 하는 시지프스적 노동에 어처구니없어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 요약문 앞에는 왠지 있어보이는 타이틀이 붙게 돼 있습니다. Abstract. 그 때 abstract이 팔 벌려 안아들이는 의미의 친족들이 이렇게나 계보가 복잡했구나, 처음 알았습니다.

 

모리 히로시라는 작가는 『작가의 수지』라는 책으로 처음 만났어요. 그 적나라한 제목에 홀리지 않을 수가 없었거든요. 이 사람이 글로 꽤나 수지를 맞았던 인물이라는 걸 알고는 더더욱. 소설은, 안타깝게도 그다지 취향이 아니었습니다만.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함부로 추천하기 힘든 책이라는 점입니다. 간결하고 구체적(bold again)인 글을 선호하는 독자에게는 절대 비추예요. 시종일관 축축한 새벽안개길을 헤매는 기분이니까요. 안개가 보통 그렇듯 어쩌다 반짝 선명한 길잡이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순식간에 시야가 다시 부예져서 말이죠. 이 애매함을 꿋꿋하게 버텨나갈 수 있는 읽기 근지구력을 갖춘, 그리고 새로운 발상법을 배우고 싶은 의욕충만한 분꼐 한정하여 권해도 될까 말까조차 망설여지고요. 추상성과 추상화 능력의 중요성을 웅변하는 책답게 문장도 지극히 추상 일변도입니다(쓰면서도 슬슬 ㅊㅅ에 멀미가...). 가끔은 어쩌라고! 주먹을 내리치고 싶을 정도?

여기에서 무엇을 추상해서 나만의 행동강령으로 구체화할 것인지를 전적으로 독자 몫으로 떠넘기는 불친절한 책이지만, 사고의 혁신을 도모하는... 아, 거창해진다.

여하간, 뭔가 식상함을 털고 새로운 통찰을 얻고 싶다면 그 정도의 수고와 노력쯤은 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은근히 독려하는 책이기도 한 것이죠.

제 경우에는,

 

'왠지 이런 게 좋다'는 기분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으면 자신도 '어떤 좋은' 것을 만들고 싶어진다. 따라서 창작을 하려는 욕구의 밑바닥에는 대상을 추상적으로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중략) 그래도 무엇인가를 만들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만으로 생각의 보폭은 넓어져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구체적으로 앞으로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건 아직 존재하지 않기에 처음에는 추상적이다. 추상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구체화시키는 행위를 우리는 '창조한다'고 말한다. -134쪽

 

이 대목이 흡사 동앗줄 같았거든요. 늘 '난 뭘 좀 하고 싶은데' 말만 주워섬기고, 그러면서 딱히 뭘 구체적으로 열심히 하지는 않는. 그런데 그 무쓸모의 집합체나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있던 무형의 물컹거리는 무엇이 의미가 있다고 누가 말해주는데 그게 얼마나 고맙겠어요. 진실인지 아닌지 따지는 건 잠깐 미뤄두더라도.

 

저자는 '생각의 정원'이라는 아이디어가 자신이 이 책을 쓰면서 걷어올린 가장 가치있는 발상이라고까지 단언하더군요. 저는 인용했던 부분이 개인적 가치를 느낀 단락이었고요. 그게 책을 읽는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누군가를 문장을 통해 만나, 지금껏 어두웠던 머릿속 혹은 마음속 어딘가에 반짝, 불이 밝혀질 때의 그 경이로움 때문에 말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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