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집에 비해 우리 집에서는 아이들을 빨리 재우는 편이다. 중학교에 올라가는 아이와 초등 고학년인 아이가 자는 시간이 평균 아홉시 반에서 열 시이고, 이제 유치원 졸업을 코 앞에 둔 막내는 여덟시 반이면 잠잘 준비를 한다. 삼십 분은 책을 읽어주는 시간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아홉 시경에 잠드는 셈이다.

 

이제 와 생각하니 쭉 읽어주었던 책들을 목록을 만들어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약간의 후회스러운 마음이 든다. 무슨 책을 읽어줬을 때 셋 중 누가 어떤 반응을 보였고 무슨 말을 했는지 그런 것까지는 일일이 다 기록해두기 힘들었더라도 제목 정도는 그때그때 적어놓을 수도 있었을텐데, 이제와서 그런 소리 해봤자 때늦었다.

 

아무튼...

 

위의 두 아이들은 이제 엄마가 책 읽어주는 걸 들으려고 일찍 들어와 눕기보다는 저희들끼리 수다 더 떨다가 자러 들어오는 걸 선호하는지라, 이제 이 책 읽어주는 일도 몇 년 안 남은 호사(이걸 불과 일 년 전까지도 노동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선배들이 '좋은 시절이다'라고 말하는 심경을 좀 알겠다 싶어지니 호사라고 느끼게 됐다)가 되어 책을 좀 더 신중하게 고르게 되었다. 주로 그림책을 골랐었는데, 일주일 쯤 전부터 막내는 '엄마, 그림책 말고, 매일매일 조금씩 나눠 읽는 그런 긴 책 읽어줘'하고 똑부러지게 요구해왔다. 뭘 읽을까, 고민하다가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반가운 책을 골라봤다.

 

사실 내가 읽었던 것은 이 에디션이 아니다. 나남출판에서 나온, 아마 최초 번역본이지 않았나 싶은 책인데 기억으로는 번역하신 분이 원서로 읽었다가 너무나 감동을 받으셔서 직접 번역에 나서셨다더라, 그런 썰이 있는 책이었다. 새로 나온 이 깔끔하고 사랑스러운 장정의 워터십 다운도 너무 예쁘지만, 첫 번역본과 달리 토끼들의 이름이 영어 그대로 나와 있어서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봐야 지금도 말할 수 있는 애들은 개암이, 더벅머리, 그리고 토도방정 정도지만. 그땐 몰랐고 이제서야 아! 싶은 건, 뭔 이름이 이래, 싶었던 토도방정은 아마도 토끼+오도방정의 합성어가 아니었었을까 싶다는 거 정도. 그런데 우리말로 옮겨놨던 그 이름들이 기억 속 깊은 곳에 뿌리를 단단히 내린건지 원래의 이 이름들이 당최 입에 붙지를 않는다. 엘-어라이라도, 어쩐지 그 옛날의 엘-어하랄롸가 더 익숙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계절 출판사 판의 훌륭한 점이라면 역시 충실한 번역이(리라 믿음...)겠다. 총 767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인데, 아무래도 예전 버전은 다이제스트판이었겠구나 하는 의심을 감출 수 없는 것이 총 페이지수가 거의 두 배 분량에 달한다!! 무엇이 잘려나갔던건지 이제와서 확인할 방도는 없지만, 아이에게 읽어주다보니 좀 알 것도 같은 게, 묘사가 어마무지하다. 이쯤 되면 디테일하다는 말로는 부족하고, 그냥 문장으로 모든 것을 다 해설해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음. 어지간한 인내심으로는 읽어내기 힘들겠구나 (그래서 큰애들이 다들 듣다말고 도망갔나) 싶은 정경묘사는 한 술 더 뜬다.

강둑을 따라 무슨나무 숲이 깊은 어둠을 품고 블라블라블라. 학교도 아직 안 들어간 어린 남자아이가, 이걸 참고 듣고 있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에 책을 읽다가도 아이를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면 계속 읽으라고 눈짓을 한다. 과연 이해할까, 이게 뭘 묘사하는 건지 알고 있는걸까 의심하면서도 느낌으로는 알 거라고 믿으면서 계속해서 읽는다.

 

어젯밤엔 엄마가 지금껏 읽어준 분량과, 남아있는 분량을 눈으로 대강 비교해보더니 엄마, 이거 대출 얼마나 남았어? 물어본다. 글쎄 한 일주일 남았을까? 잘 모르겠는데, 왜, 하니 남아있는 기간 동안 도저히 엄마가 다 읽어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단다. 일단 반납했다 다시 빌려와도 돼, 그랬더니 누가 예약하고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는데... 라면서 엄청 심각해 하길래 그럼 사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 한 마디에 얼굴이 세상 편해지더니 엄마가 사줄 거지? 란다. 그래 뭐 사주지. 까짓것. 책인데. 그런데 너 재미있어하고 있었구나. 다행이다.

그리고 오늘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봤더니 아니나다를까 권당 2~3개씩의 여유분이 서가에 꽂혀 있더라. 의기양양하게 네 권을 다 샀는데 만 몇백원 들었다. 이따 집에 오면, 좋아하겠지.

 

*

 

토끼들의 캐릭터가 분명해서 몇 번 들은 것으로도 어린 아이의 머릿속에 그 모습이 아주 또렷하게 그려지나보다. 아침에 등원할 준비를 하면서 혼자 중얼중얼, 실버는 힘이 세고, 빅윅도 힘 세고 덩치도 커. 파이버는 쬐그맣고 힘이 약해... 하고 동의를 구하는 눈빛으로 엄마를 본다.

거의 이십 년 전에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었을 때 훗날 이런 날이 올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을까. 같은 책을 두고 결이 다른 추억을 쌓는 일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 본 적이 있었을까. 눈으로 읽었던 책을 귀로 다시 읽게 되면 어떤 공감각이 펼쳐지는지 알 수 있었을까. 한 번의 경험이 다른 차원으로 반복된다는 건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입체적인 체험이 되더라. 읽어줄 수 있을 때까지, 더 많이 읽어줘야지.

 

또 뱀발.

소리내어 읽어주면 좋은 이유는, 이 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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