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시그널
브리스 포르톨라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복복서가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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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이메일도 휴대폰도 없었어요. 제가 휴대폰을 가지고 왔는데, 사람들이 휴대폰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21세기의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죠. 몽골 최북단 지역은 무척 고립된 곳인 만큼 모든 일이 매우 천천히 일어난답니다. 그렇긴 하지만 전 곧바로 생각했어요. ‘이보다 더 살기 좋은 곳이 어디 있겠어?"

"이곳에서 살려면 몇 가지에 익숙해져야 해요. 게르에서 산다는 건 그런 것이죠. 처음엔 굉장히 힘들었어요. 바람이 들이치고 겨울이 길거든요. 겨울이 일곱 달이나 계속되고 기온이 영하 50도까지 내려가요. 그런 날씨에 순록과 온종일 밖에 있어야 하죠. 눈이 부츠 안으로 들어와 발이 얼어버려요. 하지만 사람들 사이의 온기가 추위를 보상해준답니다. 와이파이가 없어서 사람들이 대화를 더 많이 나눠요…… 이곳 사람들은 삶의 지혜가 있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아는 연장자를 존중합니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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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행복은 이렇습니다 - 먼저 살아본 30인의 행복론
박완서 외 지음, 김승연 그림 / 디자인하우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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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할 것이니, 그래서 삶과 죽음은 하나라는 명제도 성립하는가 보다. 죽음을 개신교에서는 소천召天이라 하고 가톨릭에서는 선종善終이라 하며 불가에서는 입적, 열반涅槃이라 한다. 인간의 종언에 대해 그렇듯 품위 있고 존귀한 단어를 쓰는 것은 고달픈 생의 의무를 마친 데 대한 위로이고 존경일 것이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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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면 반칙이다 - 나보다 더 외로운 나에게
류근 지음 / 해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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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을 떠돌아 다니는 저자의 SNS 글을 보았던 거 같기도 한데, 간행물로는 처음 접한다. 기행을 일삼는 주당의 냄새가 가득하여, 만약 그와 가까이 지내면 꼼짝없이 새벽 첫차...아니 아침 해장을 하고도 한 이틀을 엮여 다녀야 할 것 같은 '포쓰'가 있다. 그런데 내가 이 에세이에서 찝어낸 글은 책날개에 저자소개의 첫 단어인 '낭만주의자'에 어울리는 글이다. 두 꼭지를 옮겨놓는다. 한 번도 실수하지 않은 첫날이어서 내일 있음이 우리에게 위안이다. 좋은 밤!


세상은 어쩌면 <빨간 머리 앤>을 본 사람과 안 본 사람으로 나뉠 것 같다. 그게 만화든 소설이든 애니메이션이든 드라마든 말이다. 삶의 깊고 푸르고 멀고 환하고 가슴 뛰는 의미를 잃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장래 희망이 돈이고, 신앙이 돈이고, 첫사랑이 돈이 된 세상에서 19세기 소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가슴에 별처럼 아프게 박힌다. 지금 더럽혀진 모든 '어른'들에게 빨간 머리 소녀는 말한다.

"우리에게 내일이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요?
한 번도 실수하지 않은 첫날이잖아요?"

_p.117

이름만 봐도 가슴 뛰는 사람이 있다. 이름만 봐도 가슴 설레고 가슴이 아파오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사람이 있다. 첫사랑이었으나 짝사랑이었던 소녀의 흰 웃음처럼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이름이 있다. 깨꽃 같은 이름이 있다. 해 질 무렵 교회당에서 울려오던 소녀의 풍금처럼 내 가슴에 노을로 오래 번지는 이름이 있다.

바라만 봐도 슬퍼지는 이름이 있다. 이승에선 어쩌지 못할 예감 같은 것, 다음 생도 아니고 그다음 생도 아니고 그다음 다음 생에서나 행여 마주칠 것 같은 약속이 있었던가. 허공을 떠도는 풀씨와 바람처럼 마주칠 약속이 있었던가. 그래서 속절없이 슬퍼지는 이름이 있다.

혼자서 술을 마시면 푸른 술잔에도 있고, 내 손등 위에도 있고, 창밖의 고단한 빗방울에도 있고, 늙은 가수의 목소리에도 있고, 발등에 툭 떨어진 눈물에도 있고, 천천히 오는 가을과 겨울에도 있네. 이름만 봐도 울고 싶어지는, 이름만 봐도 서둘러 정거장에 나아가 기다려야 할 것 같은 이름이 있다. 당신의 오래고 먼 이름이 있다.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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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탐심 - 라디오에서 찾은 시대의 흔적들
김형호 지음 / 틈새책방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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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라디오 수집기가 아니다. 지역방송 기자로 일하는 저자가 '탐심'을 가지고 라디오에 대해 오랫동안 벌여온 치열한 '덕질'에, 특정한 모델의 라디오를 하나 하나 소개하며, 그것의 생산에서부터 당대 사회배경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을 곁들인 흥미로운 글들로 묶여있다. 전기공학에 대한 배경지식, 한마디로 이과적 두뇌가 없어도 책을 읽는데 지장이 별로 없다.




리전시 TR-1을 작동해 보기까지 몇 년을 기다려야 했다. 한국폴리텍대학교의 어느 교수님이 가변 트랜스 한 대를 주신 덕분에 22.5V 전원을 연결할 수 있었다. 라디오를 잠시 보관했던 지하실에서 혼자 들었던 리전시 TR-1의 첫 라디오 방송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의 2018년 삼일절 연설이었다. 연설은 독도에 대한 내용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독도 발언이 연상되는, 일본을 향한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지하실에서 최초의 트랜지스터라디오로 대통령의 담화를 듣고 있자니 내가 레지스탕스라도 된 것 같았다. 당시 촬영한 화면을 페이스북에 올려놨는데 갈무리된 40초 길이의 담화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박수 소리)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잘못된 역사를 우리 힘으로 바로 세워야 합니다. 독도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 과정에서 가장 먼저 점령당한 우리 땅입니다. 우리 고유의 영토입니다. 지금 일본이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제국의 침략에 대한 반성을 거부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p.108

'국민 라디오'는 1933년 독일에서 처음 등장했다. 1933년에 집권한 나치 정권은 집권 시점인 1월 30일의 '301'과 국민 라디오 Volks Empfanger, 폴크스 엠팡저의 약자 'VE'를 따서 VE301이란 라디오를 만들었다. 라디오 제조는 지멘스가 맡았고, 텔레푼켄의 진공관을 사용했다.
(중략)
독일의 국민 라디오 프로젝트는 '히틀러의 입'이라고 불렸던 요제프 괴벨스가 주도했다. VE301 라디오는 '괴벨스의 주둥이 Goebbels Shnauze'라는 별명을 얻었다. 괴벨스가 이 라디오를 어떻게 이용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별명이다.
-p.220

원조 국민 라디오를 보고 있으면, 우리나라의 국민 라디오 시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전쟁 준비로 국민을 선동하는데 빛을 발했던 국민 라디오는 우리나라에서는 독재 정권 시대에 도입됐다. 박정희 정권은 집권 초기 농어촌 지역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벌였다. 공무원들의 월급까지 갹출해 라디오를 보급했다. 통치 이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농어촌 지역을 중앙 방송으로 계몽하겠다는 의도였다. 나치의 선전영화 '미거스하우젠의 전투'의 복사판이었다. 국민 라디오는 계몽이란 명분으로 여론을 통제했다. 무료로 라디오를 나눠주는 것처럼 선심을 썼지만, 라디오는 정부 방침을 국민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선전용 확성기였다.
우리는 국민 라디오에서 대통령에게 라디오 마이크를 빼앗긴 슬픈 역사도 가지고 있다. 미국 대공황 시대 루스벨트 대통령의 노변정담爐邊情談을 흉내 낸 대통령의 확성기 방송은 희망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훈화하기만 했다. 마이크는 다시 국민에게 돌아왔지만, 방송 정책에서 통제를 받는 미디어들은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제는 권력, 자본과 결탁한 뉴미디어까지 나타났다. 여론을 왜곡하고, 가짜 뉴스가 진실을 가린다. 한낱 라디오가 뭘 할 수 있느냐고 남의 얘기처럼 말하기 어려운 이유다.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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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 산문
박준 지음 / 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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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이 읽히나 쉬이 넘어가지 못하고 머물러 서있게 만드는 글들을 읽었다.
저자의 시집을 한 권쯤은 읽은 줄 알았는데, 계절 산문이 처음 읽게 된 그의 글이고 시집을 보관함에 담아둔다.

시간들이나 그때의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글들은 마음을 누른다.
아마도 숲이 울창해 지고, 다시 앙상해지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그런 문장들을 계속 곱씹어 읽어본다.




과거를 생각하는 일에는 모종의 슬픔이 따릅니다. 마음이 많이 상했던 일이나 아직까지도 화해되지 않는 기억들이 슬픔을 몰고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문제는 즐겁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은 장면을 떠올리는 것에도 늘 얼마간의 슬픔이 묻어난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것은 켜켜이 쌓인 시간이 만들어낸 일이라 생각합니다. 숲이 울창해지는 일도 다시 나무들이 앙상해지는 일도 이러한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 p.39

낮이 분명하게 길어졌습니다. 저는 하루종일 저의 하루를 살아가느라 이렇게 지쳤는데 어둠은 조금 전에야 막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허정허정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초입에는 어느 집 담장 너머 만발한 능소화들이 이정표처럼 서 있습니다. 이 길이 제 집으로 가는 길이 맞는다는 듯이, 혹은 지금부터가 여름이라는 듯이.
능소화는 바람에 흔들리고 덩달아 능소화가 만들어낸 그림자도 흔들립니다. 발끝으로 그림자를 몇 번 따라 짚어보다가 그만둡니다. 온통 흐르는 것들을 지나 드디어 제 방으로 돌아옵니다. 제가 누우면 하루와 어둠과 가난도 따라 눕습니다. 함께 잠이 듭니다. 벌써부터 방은 덥고 새벽쯤 땀을 흘리며 잠이 깬 저는 일어나 물을 마십니다. 물을 마시고 살금살금 자리로 돌아와 조용히 다시 눕습니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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