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눈으로 대강 살피면 잘못 읽고 넘어갈 제목이다. 아니면 빌렸던 도서관에 다시 돌려주고 나서 얼마후에 제목을 이렇게 기억할 것만 같다. ‘가만히 혼자 울고 싶은 오후‘. 웃다와 울다는 꼭 그렇지는 않지만 얼추 상반된 표정인데, 책을 덮으면 자꾸 웃고 있다는 장석주 작가가 시골집 툇마루나 마당에 내어놓은 평상에 앉아 울고 있을 것만 같다.

비슷한 문체의 글이지만, 다른 작가의 글인줄 알았다. 올 봄에 낸 ≪내 몫의 사랑을 탕진하고 당신을 만나≫를 두어달 전에 구입해서 읽었던 적이 있고, 이 책은 작년 봄에 출판되었다. ˝가만히 오후˝를 삼분의 이쯤 읽고는 ‘어라 이상하다‘싶어 책장을 뒤져보았더랬다. 이게 다 부족한 독서력과 주먹구구식 읽기의 부작용이리라. 어쨌든, 꽤 다작이신 작가의 근작 두편중에는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에 더 끌리더라.

일본에서 번역되어 들어온 책 중에 그런 책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미니멀리즘을 실천한다며 가구고 세간이고 거의 들여다 놓지 않고 있던 물건도 내다팔고 심지어 수건도 한 장으로 사는. 어딘가 찾아보면 우리집 책장에도 그런 책이 한권은 꽂혀 있을 건데... (찾아내서 ‘상품넣기‘에 추가해 놓음)그런 책 수십권보다, 이 책에 언뜻언뜻 비치는 작가의 삶과 문장이 훨씬 소박하게 느껴지고 사유의 깊이가 남다르다. 실용서적보다는 문학을 읽자.

지금부터는 몇군데 접어둔 글들

1)

젊고 미숙한 내영혼을 키운 것은 도서관에서 읽은 무수한 책들이다. 호메로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단테, 셰익스피어, 노자, 장자, 붓다, 혜능, 굴원, 도연명, 부처, 예수, 헨리 데이비드 소로, 스코트 니어링, 월트 휘트먼, 니체, 하이데거, 휠덜린, 보들레르, 말라르메, 발레리, 랭보, 사르트르, 카뮈, T.S. 엘리엇, 바슐라르, 도스토옙스키, 헤르만 헤세, 카프카, 보르헤스, 니코스 카잔차키스, 막스 피카르트, 바슐라르, 파울 첼란, 콜린 윌슨, 롤랑 바르트, 발터 벤야민 등등 위대한 연혼들이 내사 만난 스승들이다 그들은 무지와 결핍으로 메마른 대지와 같은 내 영혼을 적시고 자라게 했다. 나는 이십대 초를 주로 시립도서관에서 잡다한 책들을 읽으며 보내며, 갓난아기가 젖을 빨 듯 책과 문장을 탐독하며 빨아들여 피를 만들고 뼈대를 키우는 일에 몰두했다. 그 ‘스승‘들의 가르침 없이 무른 본싱이 시키는 대로 내달렸다면 나는 건달이나 사기꾼, 혹은 이런저런 중독자가 되어 물색, 성색, 주색에 빠져 허우적거렸을 테다. 내가 하찮은 인간이 되어 세상을 떠돌지 않은 것은 그들의 가르침 때문이다.(158~159쪽)

2)

1961년 태어나 마흔한 해 만에 홀연 생을 등지고 떠난 한 무명시인의 시집도 내 도서목록에 들어 있다. 그는 단 한 권의 유고 시집만을 남겼다.

나중에 나중에
고요한 시절이 오면
잘생긴 아들을 낳으리라
아들이 자라
착실한 소년이 되면
함께 목욕탕에 가리라
싫다는 아들에게
등을 밀어달라고 하리라
할 수 없어서 나의 등을 밀었어도
아들은 내게 제 등을 맡기지 않으리니
나중에 나중에
내가 늙고 아들이 장성하면
다시 목욕탕에 가리라
싫다는 나에게
아들은 등을 돌리라고 하리라
할 수 없어서 나의 등을 맡겼어도
아들은 내게 제 등을 밀게 하지 않으리니
나중에 나중에
고요한 시절이 오면

윤택수(1961~2002), <찬가>(204~205쪽)

3)

올해도 이른봄 지리산 산수유꽃들은 피어날 테고, 여의도 윤중로 벚꽃들은 눈부시게 흐드러졌다가 분분한 낙화를 하겠지요. 우리가 꽃이 만개한 벚나무 아래를 지나갈 때, 당신의 까만 머리와 어깨에 눈송이처럼 점점이 내려앉은 하얀 꽃잎들, 가을에는 순천만의 갈대들이 저문 빛 속에서 사각거리겠지요. 연인들이 헤어졌다고 오던 계절이 안 오거나 흐르던 시간이 멈추는 경우는 없어요. 부디 잘 살아요, 당신. 울 일이 있을 때 조금만 덜 울고, 웃을 일이 있을땐 조금 더 크게 웃어주세요. 당신은 웃는 모습이 예쁘니까요. 나는 날마다 청송 사과 하나씩을 깨물어 먹고, 만 보씩을 걸으며, 어떻게 살아야 세상에 작게나마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는가를 궁구하며 살겠어요.

잘 있어요, 당신(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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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8-12-27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와 제목이 참 잘어울리는 책이네요. 수목원 안의 온실 느낌^^

봄날의 언어 2018-12-27 23:44   좋아요 0 | URL
저는 오히려 표지를 보고는 자연실로 찾아갈 뻔 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