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 슬픈 열대
폴 고갱 지음, 박찬규 옮김 / 예담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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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슬픈 열대>는 화가 고갱의 편지와 산문집 <노아노아>의 부분을 모아 엮은 책이다. 변혁의 겉모습만 흉내내는 시대를 궁핍하게, 그러나 치열하게 살아갔던 화가의 모습은 그의 사적인 편지 속에 그대로 담겨 있다. 가장으로서 무책임하고, 도가 지나친 성생활을 즐기면서, 오로지 그림만을 그리며 살아갔던 화가 고갱. 그러나 그는 자신만의 철학과 미학에 대단한 소신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그리고 그의 철학과 미학은 개인적인 차원을 너머, 그리고 시대를 너머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고민과 역시 만난다. 창조를 꿈꾸는 나는 아직 자연 그 자체도 볼 줄 모르고, 그 속에서 추상을 이끌어내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단순히 사물을 묘사하는 것에 질려 하면서도, 그 묘사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난감해 하고 있는 내게 고갱의 고민은 차라리 부럽다.

그가 어려운 경제난 속에서도 타히티 섬을 찾을 수 있었던, 당시의 상황과 그의 용기와 그리고 식민지를 거느린 프랑스라는 나라가 나는 부럽기만 하다. 아직 나는 자연을 가까이에서 보고 있지도 못하므로. 고갱의 편지들을 보면 그는 동양과 불교와 그리고 야만에 무척 관심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옛말이 되어버린 오리엔탈리즘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는 유럽의 문명이 이미 낡았음을 간파하고, 새로운 것에서 대안을 모색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가 찾은 야만은 본래의 색, 본래의 형체,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세상이었던 것 같다. 열세 살 먹은 소녀와 사랑을 하고, 낙조가 아름다웠을 바다 앞에 오두막집을 짓고, 고갱은 거기서 야만의 색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자들, 그리고 백마. 내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원시적인 분위기와 강렬한 색상 밖에 없지만, 나는 고갱의 삶을 동경한다.

나는 아직도 화가의 그림보다 화가의 삶에 더 관심이 있다. 그래서 고갱의 그림에는 별로 감동하지 못하면서 그의 삶에는 감동한다. 폐렴으로 죽어버린 그의 어린 딸, 빠리를 떠돌다 아버지로부터 팽개쳐진 아들, 자식들과 함께 힘겨운 삶을 꾸려가야 했던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친구들, 고갱의 빈곤한 삶. 그는 일찍부터 화단에 인정받았으면서도 경제적으로는 늘 궁핍한 생활을 해야했다. 그러나 그 빈곤 속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파악했고, 그것을 실행하고자 노력했다. 고호와의 생활,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생활. 그 속에서 그는 어떤 이론가에게도 뒤지지 않는 자신의 예술 철학을 완성했고, 그것대로 그림을 그렸고, 그것대로 살았다.

나는 꽤 오래 전부터 본능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으로 글을 써야 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계속 본능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이 진정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늘 열등감에 시달렸고, 그래서 늘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이런 이중성은 아마도 문학을 하고 싶다는 열망과 나에게는 문학적 재능이 없다는 자괴감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문명의 시대는 인간의 본능을 잠재우고, 같은 기준을 가지고 살도록 교육시킨다. 그래서 아직도 지금은 예술적 방황기이다. 그것은 물리학과 화학, 자연과학, 그리고 정보통신에서 생겨났다. 그리고 이것들은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새롭게 만들어낸다. 그들 방식에 맞도록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능을 일깨우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그 본능을 일깨우는데 학습이 필요하다. 이것이 내가 글을 읽는 이유이다.

나의 상상력을 자극시킬 수 있는 무언가가 내게 필요하다. 나는 아주 많이 지쳐 있고, 아주 진부한 세상 속에 갇혀 있으며 낡았고 권태롭다. 새로운 것이 머리 속에서 떠오르지 않고 아주 늙어버렸다. 타이티 섬에 가면, 가서 열세 살 먹은 소년과 사랑을 하면, 그때 나는 내 본래의 색을 찾을 수 있을까. 나를 가두는 모든 세상에서 벗어나고만 싶은 여름 날, 나는 그저 방 한 구석에 쳐 박혀 모든 것을 두고 떠날 수 있었던 고갱을 부러워만 할 뿐이다. 그의 깊은 예술 철학과 인생관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수준 낮은 부러움 속에서 책 한 권을 읽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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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성의 수호자, 나의 끼끗한 들깨
복거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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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마법성은 기억이지.' 노인은 말하고서 다시 먼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미로를 헤매다가 문을 찾을 것처럼, 도린의 마음이 환해졌다. 정임을 만난 뒤 그의 마음을 스친 생각들이 보얀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았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면서, 그는 신음처럼 뇌었다, '진정한 마법성은 기억이라.....'복거일의 소설 <마법성의 수호자, 나의 끼끗한 들깨>는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다. 희미한 그림자로 남아 마음 한구석에 존재하는 옛사랑과의 재회를 통해 그는 한 인간의 삶과, 거대한 우주를 휘감는 윤회의 원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리고 마법성,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물론 이 소설에는 재미 있는 부분들이 많다. 도린의 딸 효민의 소설로 등장하는 마법성의 이야기, 그리고 쉰을 넘은 도린의 첫사랑, 그와 정임의 재회는 매우 소설적이다. 중년이 넘어선 나이, 나름대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사람이 마음 한 구석에 여전히 마르지 않고 흐르는 첫사랑의 감정을 되새기는 장면은 도린이 그의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만큼 애절하다. 경험하지 않은 중년의 나이, 그 사이에 다시 만난 첫사랑은 전혀 과장되지 않아서 더욱 가슴 아프다. 전혀 끈적거림이 느껴지지 않는 그들의 정사도 그들의 사랑을 더욱 절실하게 만든다. 천오백억 년 뒤의 해후를 기다리며, 노량진의 낡은 여관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옛사랑의 흔적이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도록 다리를 오그리고 앉아 있는 정임의 모습은 그것 자체로도 큰 울림을 갖는다.

그러나 이 소설이 재미 있는 것은 이미 중년의 나이에 들어선 지 오래인 작가가 세상을 보는 눈을 읽는 일이다. 소설 속에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출판사 사람들과 도린과의 대화는 정임과의 사랑 이야기와는 전혀 관계 없는 듯 하지만 그 방식을 정당화하는 요건이 된다.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그저 밤새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는 도린을 통해 작가는 자신이 인식하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매춘과 아파트 재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길게 인용되는가 하면, 젊은 사람들에 대한 관찰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젊은 아가씨들의 육체를 흘낏대는 도린의 모습은 전혀 외설스럽지 않다.

언젠가 이제 팔십이 넘은 외할머니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나이를 먹고 몸이 늙는 만큼, 마음이 같이 늙으면 좋을텐데, 마음은 예전 그대로인데 몸만 늙는다고. 그냥 흘려 들었던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찬 바람이 분다. 지금 같은 열정과, 지금과 같은 욕망을 그대로 품고 몸만 늙는다면, 그때 내 삶이 얼마나 추해질까. 그러나 이 소설 속에서 도린의 욕망은 충분히 건강하다. 그의 욕망은 기억이고, 그 기억은 곧 마법성이다. 그 마법성은 물론 현실에서 불가능한 도린과 정임의 사랑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도린의 삶 자체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인간은 끊임 없이 기억할 만한 것을 만들고, 또 그 기억을 부인하려고 한다. 좋았던 기억이든, 그렇지 않았던 기억이든, 기억을 부인하는 것은 지금 돌이키면 부끄러울 자신의 과거에 대한 부정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정당한가? 다짐이 앞으로의 생에서 다시 만나게 될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라면 기억 역시 그러하다. 우주가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면 내 과거는 다음 생에서 미래가 될 것이므로. 소설이 처음부터 긑까지 재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린의 모든 상념들에 너무도 쉽게 동의할 수 있었던 건, 그가 내가 아직 살아보지 않은 나이를 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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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 사진시대총서 9
로버트 카파 / 해뜸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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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언어가 갖는 한계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다. 좋은 영화의 한 장면 때문에 하루 종일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할 때, 소설 한 권 분량의 내용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을 것만 같은 그림을 볼 때,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치는데 한 마디도 꺼낼 수 없을 때, 나는 내 종교와도 같은 언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이럴 때마다 나는 아버지께 물려 받은 오래된 캐논 카메라를 만지작거린다.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아직 한 번도 밖으로 들고 나가 본 적이 없는 낡은 카메라...

이 책은 보도 사진 기자로서, 전쟁의 한 복판에 서 있었던 카파가 2차 대전에서 경험한 일들을 직접 기록한 책이다. 그의 사진을 잔뜩 기대하고 주문했던 나로서는 흐린 사진 몇 장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책은 며칠동안 책상 한 구석에 쳐박혀 있었다.

그러나 '아침이 되었는데  아무 할 일이 없었다'는 진술로 시작되는 그 책을 한번 손에 들고는 쉽게 놓지 못했다. 거기에는 전쟁의 한 복판, 그것도 최전방의 전선에서 총 대신 사진기를 들고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너무나 뚜렷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가 그리고 있는 노르망디 해변의 상륙 작전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그것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생생했다.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나로서는 전쟁터에 가지 못해 안달하는 그의 마음을 보도 사진 작가로서, 그리고 한 예술가로서의 사진에 대한 열정이라고 아주 쉽게 짐작해버리지만, 사랑하는 여인 둘을 모두 전쟁과 사진 때문에 잃고 기어이 목숨까지 잃게 되는 그의 생애가 내게 쉽게 이해된다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책을 읽고, 마음 속에는 스페인의 한 고향을 찾아갔던, 그 애달픈 노래의 주인공이 계속 남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고향과, 가족을 두고 논 덮힌 고향 마을을 도망쳐 나와야 했던 소수의 생존자들은 그 후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을까.

가끔 어떤 것에 목숨을 건 사람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당혹감은 책을 덮는 순간, 더 크게 다가와 종일을 멍한 상태로 있어야했다. 지뢰가 터지는 순간, 카파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죽음까지 렌즈 너머의 피사체로 바라보고 있을 그를 생각한다면, 전쟁을, 그리고 그 전쟁의 복판에서 찍은 그의 사진을 너무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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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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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등 뒤로 지나가는 어떤 것을 느낀다.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다가, 텅 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다가, 혹은 빈 집에서 세수를 하다가. 너무나 또렷하게 어떤 존재를 느끼는데,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보이는 것은 없다.

언제부터인지, 보이지 않는 세게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의 감각이란 너무나도 보잘 것 없어서, 너무 큰 소리도, 너무 작은 소리도 듣지 못하고 역한 냄새에도 금방 둔해진다. 시각 역시 마찬가지인듯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이 금방 허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불완전한 감각에 대한 인식은 쉽게 감지하지 못하는 것들, 그러나 엄연한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킨다.

이승우의 신작 <사람들은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에 등장하는 많은 것(?)들은 바로 인간의 감각 이전에 존재한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 집안의 악취를 호소하는가 하면, 혼자 사는 여인이 자신의 집에 함께 살고 있는 누군가의 존재를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소설에서 이들의 존재가 매력적인 것은 그것들이 어쩌면 허상일지 모른다는 은밀한 암시 때문이 아니라, 그 허상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내용 때문이다. 너무도 간절하게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존재를 느끼면서, 귀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서워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가 보이지 않는 특별한 존재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 삶의 내용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 많은 전설의 고향의 귀신들을 보면 무섭다기 보다 슬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내 삶을 조용히 뒤흔들고, 내 삶에 균열을 일으킨다. 아주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와 허상에 집착하고 있는 내 삶이 붕괴될 때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붕괴의 과정은 처참하다. 그러나 붕괴될 때까지 흔들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내 삶의 내용을, 그리고 보이지 않았던 어떤 것의 삶의 내용을 확인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늦은 밤, 아파트 단지를 지나갈 때마다 주위의 공터를 두리번거리게 된다. 그 공터 어딘가에 우산으로 집을 짓고 어떤 여자가 살지는 않을까, 어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꽃향기가 퍼져오지 않을까, 혹시 내 옆에 누군가 발소리를 죽이며 함께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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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들의 사생활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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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소설가는 한 편의 잘 된 연애소설을 꿈꾼다고 한다. 그건 아마도 연애소설 한 편을 통해서, 삶과 사랑과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소통과 욕망에 대해서, 나와 타인에 대해서 말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식물들의 사생활>이란 소설을 일주일 동안 읽었다. 보통 소설 한 편을 하루만에 읽어내는 나는 불성실한 독서 습관을 생각할 때, 꽤나 느리게, 오랫동안 읽은 작품이다. 이 소설이 특별히 어려웠던 것도 아니었고, 그 내용의 깊이에 침참해서 헤어나오지 못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단지 연말이기에 조금 바빴고, 그 바쁜 와중에 소설을 읽는 과정이 더디었고, 그리고 간혹 앞 페이지를 다시 넘겨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간을 넘어가면서, 특별히 할 일이 없어졌는데도, 책을 읽는 속도는 빨라지지 않았다.

다리가 잘린 아들을 업고 창녀촌을 찾아다니는 어머니, 일평생 다른 남자를 사랑한 아내를 대신 식물들과 소통하는 아버지, 그리고 사랑을 잃고, 다리를 잃고, 사진을 잃고, 좌절된 욕망 때문에 몸부림치는 형, 그 형을 사랑한 화장기 없는 얼굴의 목소리가 고운 여자, 형의 여자를 사랑하는 화자... 절망적인 가족사는 소설의 전면에서, 혹은 배경에서 끊임없이 편안한 독서를 방해했다. 이야기를 한 장을 넘어갈수록 깊어졌고, 내용은 점점 확대되었다. 좌절된 형의 욕망은 어머니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확대되었고, 그 배경에는 우리 나라 현대사의 아픈 현상이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비극적인 사랑과 가족사가 소설의 중심을 이루는 것을 결코 아니다.(만일 이 내용들이 중심이었다면 이 소설은 얼마나 진부한 것이었을까.) 소설의 중심에는 한 밤에 태평양을 건너는 야자나무가 있고, 시간까지 떠받치고 있는 물푸레나무가 있다. 그리고 소나무와, 그 소나무에 몸을 감고 좌절된 사랑을 이루려하는 검고 매끄러운 때죽나무가 있다. 소설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나무들이 수런거렸고, 방 안에 있는 작은 화분에서 늙어버린 선인장이 숨을 쉬고 말을 걸어왔다. 책을 덮으면, 시간을 견디며 숲의 한 가운데 서 있는 물푸레 나무가 조용히 내 작은 방으로 걸어들어왔다.

그러나 아직 나의 욕망은 완전히 좌절되지 않았기에, 나는 결코 그 나무들과 소통할 수 없었다. 그 소통 불가능의 답답한 상황이 책장을 넘기는 것을 어렵게 했다.

인간의 욕망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타락한 욕망이 언어를 타락시켰고, 그로 인해 인간의 삶은 고난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쉽게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쩌면 인간이란 욕망하는 순간만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끊임 없이 욕망하고, 그 욕망이 좌절되고, 그 좌절 속에서 다시 새로운 욕망을 꿈꾸면서 삶은 지속된다. 그래서 다리가 잘린 채 창녀촌을 찾아가는 형의 욕망은 오히려 그의 영혼이 아직 순수함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그의 정신이 나무가 되고 싶다고 꿈꾸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육신이 망가져 창녀촌을 헤매고 있으므로 그는 아직도 살아있다. 그 삶의 진정성 때문에 그 소설에서 나오는 비현실적인 모든 요소들은 현장성을 갖는다.

모든 나무들은 좌절된 사랑의 화신이다. 소설을 읽고 나서 정말로 나무들의 사생활을 엿본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은 아마도 그 나무들을 통해 그려진 삶의 내용 때문일 것이다. 어떤 왕릉 곁에 있는 소나무와 때죽나무의 사랑을 언제 한 번 나도 보고 싶다. 그 모습을 통해 좌절된 사랑의 그 지난한 흔적을 볼 수 있을 때 어쩌면 나도 좋은 연애 소설 한 편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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