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아닌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평점 :
품절


2008년-2015년.

크게 변한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매일 보는 거울을 통해서는 세월의 흐름을 짐작할 수 없듯이, 모르는 사이에 점차로 나이를 먹었다. 친밀했던 누군가와 특별한 다툼 없이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밤잠 이루지 못하게 만들던 것들도 점차 사라져, 평온한 날들이 계속 되었다. 몸은 조금씩 마모되거나, 굳어갔다. 바깥 세상에서는 이따끔씩 태풍이 불었다.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화를 내지 않는 대신, 세상에 화가 났다. 그러나, 뉴스 화면에서 눈을 돌리면 다시 무덤덤한 일상이 계속 되었다. 슬픔 역시 다르지 않아서, 어떤 슬픈 일도 내 일상에 치명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며칠 간의 태풍이 지나가면 세상은 다시, 잠잠해졌다.


그러나, 한 번 지나간 태풍은 어디엔가 흔적을 남겼다. 도심의 한 복판에서 바람이 실어온 폐비닐 한꾸러니를 만나는 것처럼, 평화로운 시간이 지나가다 문득 멈추곤 했다. 찰나의 시간, 아주 잠깐 동안 가슴에 통증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 대단한 통증은 아니었고, 금방 잊을 수도 있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 것도 같았지만, 새삼스럽게 서글프지도 않았다. 특별히 동굴을 파지 않아도, 사람은 누구나 혼자만의 공간에서 버티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니, 어쩌면 많이 변했을지도 모른다.  작가 황정은의 단편집 <파씨의 입문>과 <아무도 아닌>에 수록된 작품들이 쓰인 그 시간을 천천히 살아내는 동안은 알지 못했던, 그저 시간의 한 귀퉁이가 풍화되고 마모되는 것뿐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너무나 아픈 변화임을, 두 권의 책을 앞에 두고 천천히 생각한다.


처음 두세 편의 소설을 읽고는 왜 과거의 이야기일까, 생각이 들었다. 이미 지나가버려서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양의 미래>와 <상류엔 맹금류>는 과거 어느 때, 잠시를 그리고 있다. 그 시간들은 대체로 남루하고, 그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 역시 그러하다. 남루한 나와 남루한 다른 이가 만나서 서로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남루를 확인하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듯 지나온 한 시절, 이 소설 속 과거는 대체로 그런 시간이다. 그 시간을 겪고 난 인물들의 생이 특별히 달라지지도 않는다. 어떤 공간을, 어떤 사람들 속을, 어떤 시간을 도망치듯 빠져나왔지만, 그곳을 벗어나도 다른 생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극적인 변화와 성장, 사람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 혹은 새로운 만남 같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아니면 십여년 발버둥치며 바꾸려고 했으나, 더욱 나빠지는 세상을 살면서 기대하지 않는 법을 터득한 것인가. 그래서 소설 속 세상은 과거의 한 순간이지만 지금과 다르지 않아 유의미하고, 지금과 다르지 않지만 과거의 한 순간이기에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 그 세상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의지나 신념이 아니다. 부끄러움, 혹은 슬픔, 지난 10년을 살아내면서 달리 무엇도 하지 못하면서, 내내 우리가 감당해야 했던 부끄러움, 혹은 슬픔.

마지막 소설을 읽고는 생각했다. 왜 이들은 혼자가 되었을까. 훌륭하지는 않지만 따뜻했던, 다정하지는 않지만 소소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가족들은 왜 한 마디 말도 주고 받지 않을까. 장어 한 번 제대로 사 먹을 수 없을 만큼 넉넉하지 않은 일상이었지만 아르바이트에 지친 나의 잠꼬대를 시라고 물어주던 그(파씨의 입문 중 <양산 펴기>)는 어디로 가고, 죽어서도 붙어 있던 유라씨와 긴 세월 문득문득 혼령으로라도 붙어 있던 유라씨의 이름을 불러주던 유도씨(파씨의 입문 중 <대니 드 비토>는 어디로 가고, 따뜻한 우동 한 그릇으로도 사람에 대한 배려와 애정을 전할 줄 알던 무재씨(백의 그림자)도 어디로 가고, 이들은 모두 혼자였다. 이따금 사랑을 하기도 했다. 오제이거나 호재이거나, 제희인 그들과 만나 연인이 되었지만,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 제희를 바라보지 않으니, 독자인 나는 제희 대신 그의 가족에 대해서만 알게 된다.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는 소박한 바램 때문에, 자식들에게 가난을 짐지운 그의 부모에 대해서만. 호재가 꿈꾸는 더 나은 삶이 무엇인지가 아니라, 아무 바램도 없이 더 나은 삶을 기대하는 건조한 세대에 대해서만 알게 된다. 혼자인 것이 트렌디한 문화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지독한 소외에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때마다 대니 드 비토 속 유도씨의 언제든 붙어, 라는 말이 그리워진다.

어쩌면 십 년, 우리 모두는 이런 세월을 살아온 것인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부끄럽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슬펐던 시간. 혼자 있는 것이 지독하게 외롭지만, 다른 누군가를 통해 확인하는 나의 비루함이 싫어서, 애써 혼자서 감당해야 했던 시간. 그저 남에게 피해를 끼치기 싫었을 뿐인데, 그 피해를 나와 가족들이 짊어져야만 했던 시간. 그래서 웃음은 웃늠이 되고, 나의 웃늠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고, 벽 하나를 두고 고함을 지르면서, 자신을 향한 모멸을 견디어야 하는 시간.

겨울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무도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내 발로 걸어나가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그것을 생각해야겠다.
- 황정은의 소설 <명실>과 <웃는 남자>의 마지막 구절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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