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날 지난 한 해 거의 쓰지 않았던 노트북의 전원을 넣었다. 작년 일 월, 책을 읽고 적어놓았던 메모들에서 나는 한치도 달라져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작년 1월의 어느 날처럼, 일 년이 지나고 또 어느 날, 같은 결심을 주절대고 있었던 것이다. 민망했고, 안쓰러웠지만, 아직은 지치지 않았으니, 그렇게 주저 앉고도 다시 일어났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러고 보니, 또 괜찮은 것도 같다. 혹시, 괜찮을 것도 같다.

 

 

 

  일 월의 첫 날, 지난 가을이 끝날 때부터 읽기 시작했던 이혜경의 소설을 마저 읽었다. 갑자기 몰려든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두어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책을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늘 어깨가 아팠다. 대학을 졸업하고 비정규직 일자리에 만족해 하던 그 시절, 나는 이 작가의 소설 때문에 백 몇 십만원의 생계비를 포기하고, 빚을 내어 다시 학교에 갔다.

그리고 너무나 오랫만에 출간된 소설을 새해의 첫 날 천천히 읽어냈다. 내게 있는 그 어떤 무엇도 나를 풍요롭게 할 수 없어 궁핍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에게, 사랑은 그 궁핍을 보여주는 작은 무늬일 뿐 어떤 희망도 될 수 없다는. 내 사랑이 서글픈 내 생에 대한 위안이 되기는커녕, 너를 향한 연민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빈약한 감정이라는. 그래서 우리는 몸을 포개도 여전히 춥고, 한 침대에 누워도 여전히 다른 공간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더 이상 아프지도 않은 깨달음.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 몰래 숨기고 싶었던 끄덕임과 동의.

 

그러나 다행하게도 나는 이혜경의 소설을 읽고 난 후 이 책을 읽었다. 지난 여름 사 두었다가 오랫동안 책장 한 구석에 밀려 있던 책. 이 책 소개에는 "사랑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과 같은 수사들이 붙여 있었다.

 

 그리고 작가 김연수는 "별 다섯 개짜리 도입부"라는 제목을 붙여 이 책에 담긴 한 단편의 도입부를 소개했었다.

 

아내는 귀가 들리지 않는다. 한번은 눈이 내릴 때 소리가 들리냐고 묻기에 나는 그렇다고 거짓말을 했다. 오늘은 우리가 결혼한 지 12년째 되는 날. 그리고 나는 그녀를 두고 떠나기로 한다.

                                - 사이먼 밴 부이, ‘눈이 내리고, 사라지네’

 

아마도 이 문장에 홀려 나는 지난 여름 이 책을 사 두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에는 저 문장만큼이나 여운을 주는, 오래도록 그 상황과 그 마음과 그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문장들이 퍽이나 많다. 짧은 소설들을 오래오래 마음에 품고, 관계에 대한 나의 냉정함을, 타인에 대한 나의 무관심을, 사랑에 대한 나의 무정함을, 이겨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혜경의 소설과 사이먼 밴 부이의 소설은 아무런 연관성도 없지만, 이 두 소설을 연달아 읽게 되어서 참 다행이다. 이 나이에 나는 또 그저 소설을 읽고 몇 년 전에도 한 번은 깨달았을 평범한 진실들을 다시 한번 각인하게 된다.

 

 

다음엔 한강과 이스마엘 카다레.

 

 

 

 

 

 

 

 

 

 

 

 

 

 

 

언제나 새해에는 그렇듯이 지난 겨울 밀려 있었던 책들을 겨울방학 과제를 해내듯 읽어가면서, 나는 몇 가지를 새로운 사실처럼 깨닫고, 몇 가지를 처음 하는 다짐처럼 되뇌일 것이다. 그리고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에 이 모든 일들이 지난 시절 내내 해왔던, 지치지도 않는 습관임을 깨달으며 다시 민망해 할 터이다. 다만 부디 이 시간이 조금쯤은 길어지기를. 잊혀지지 않을 만큼만 오래 가기를. 그리고 그 어느 날의 깨달음과 지금의 깨달음이 아직 조금쯤은 다를 수 있기를. 일월이 가기 전에 내가 바랄 수 있는 일들이란 고작 이런 것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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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1-16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 없는 그자리]를 지금 이 글 읽고서야, 아 이 책 읽어본다고 생각하고 여태 사지도 않았네 싶어 부랴부랴 서둘러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이스마엘 카다레'의 책을 읽고 난 후의 선인장님 글이 궁금해요. 전 사두었는데 아직 읽지 못하고 있거든요. 자꾸만 다른 책들에게 우선권을 빼앗겨요.

오랜만의 글, 좋으네요, 선인장님.

선인장 2013-01-16 16:18   좋아요 0 | URL
이스마엘 카다레는 출근 길 전철에서 시작했습니다. 발칸 반도의 역사에 대해 너무 무지한지라, 책장 넘어가는 속도가 더딥니다. 그래도 그의 소설을 읽는 시간은 늘 근사한 경험입니다. 2000년 한국에서 보았던 그의 모습도, 친히 받은 사인도, 근사했더랬습니다. 영원히 살 줄 알았던 좁은 내 방에 딱풀로 카다레의 사인을 붙여버렸던 만행만 기억나지 않는다면, 그의 소설을 읽는 시간은 언제나 좋은 시간입니다.

저는 늘 너무 게으른 서재인입니다.
올해는 더 종종 뵙겠습니다.

hanicare 2013-01-16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원년(?)멤버의 글을 대하니 '살아있으셨군요.'라는 말이 절로 흘러나오네요.피난가서 옛마을 사람을 만난 듯한.

이 우여곡절을 견디며 아직 우리는 살고 있군요.사막에서요.

선인장 2013-01-16 21:50   좋아요 0 | URL
지난 해에는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죠? 연말에는 누구나 그렇했겠지만 정신적 허탈감을 극복하느라 좀 애를 먹었지만, 여전히 살아서 또 새해를 맞았어요. ㅋㅋ 알라딘 어느 구석에서 다들 그렇게 살고 있겠지요? 이렇게 드문드문이라고 글을 올리니, 님의 안부도 들을 수 있네요... 반가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