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을 위한 투쟁 ]
p.45-47
차라투스트라에 따르면, 정신은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어린아이가 된다. 정신은 세 가지 변형태를 갖는다는뜻이다. 우선 낙타는 고귀한 전통을 존중하고 지키는 정신을 상징한다. 낙타의 정신은 그 내면에 외경심이 깃들어 있으며, 강인하고 인내심이 많다. 사자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자 하는 정신, 삶의 주인이되기 위해 자유를 쟁취하려는 정신이다.
사자의 정신은 인류를 지배해 온 거대한 용에 맞서 싸우려 한다. 그용은 규범적 도덕의 힘, 우리 모두에게 "너는 해야 한다"라고 명령을내리는 지배자 신, 유리즌의 상징이다. 사자는 유리즌의 명령에 맞서
"나는 원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자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한다. 사자는 다만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을 뿐이다.
사자의 정신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항거와 부정의 정신이며, 오직 이러한 부정의 정신을 통해서만 자유가 새로운 가치를 위한 권리가 쟁취될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가치의 창조는 순연한 긍정의 정신을 필요로 한다.
차라투스트라에 따르면 "어린아이는 천진무구함이자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이자 걱정을 모르는 놀이이며,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운동, 성스러운 긍정이다." 왜 어린아이의 천진무구한 정신은 성스러운 긍정의 정신인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존재함 그 자체에서 순수하게 긍정하기 때문이다.
존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생성, 창조를 위해 부단히 자신이 극복되도록 하는 만물의 이름이다.
어린아이의 정신은 윌리엄 블레이크의시 양」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어린 양의 정신이기도 하고, 자신을 어린 양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정신이기도 하다. 물론 자신을 어린 양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기꺼이 몰락을 선택하는 신이며, 오직 새로운 창조를 위해 몰락해 가는 한 존재에게서만, 몰락해 가기 위해 창조되는 무상한 존재에게서만, 그 가장 내밀한 비밀로 깃들며 감추어지는 영원한 삶의 이름이기때문이다. 그는 우리에게 "너는 해야 한다"라고 명령을 내리는 도덕의 궁극적 심급으로서의 신이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숭배의 대상으로 기념되는 초월자로서의 신이 아니다. 그는 그저 몰락할 운명에 처해 있는 모든 것들의 근원적 아름다움을 증거하는 침묵의 소리일 뿐이다.
신은 죽었다! 죽지 않는 신, 죽음을 거부하는 신은 처음부터 신이아니었으며, 경외될 자격이 없는 압제자의 허명일 뿐이다. 신을 만나고 싶거든 천진무구한 어린아이를 찾으면 된다. 스스로 몰락을 위해 내던져져 있을 뿐 아니라 몰락해 갈 운명에 처해 있는 모든 무상한 것들을 순연하게 긍정하고 기꺼워하는 그러한 정신보다 더 높은 것은 없다.
성스러운 긍정의 정신으로서 어린아이는 아무것도 동정하지 않는다. 동정이란 그 자체가 일종의 부정, ‘동정의 대상이 되는 한 존재를본래 존재해서는 안 될 것으로 받아들임‘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의정신은 불행한 인간조차 동정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그와 함께 있음이 그저 즐겁기 때문이다. 기꺼이 함께 고통을 나눌뿐, 불행한 인간의 존재를 부정할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기쁨의 원천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